최초의 인류는 약 250만 년 전 동부 아프리카에 등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이들이 북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면서여러 종들이 생겨났다. 유럽과 서부 아시아에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아시아 동쪽에는 호모 에렉투스, 시베리아에는 호모 데니소바, 그리고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는 호모 솔로엔시스가 살았다. 인류의 요람인 동아프리카에서도 진화가 계속돼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르가스터 등 다양한 인류가 살았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30만 년 전쯤 동아프리카에 처음 등장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 29만 년 동안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며 먹고 살았다. - P19

첫 번째 울트라메가 혁명 농업혁명
사피엔스는 빙하기가 끝나고 온화한 기후의 홀로세 Holocene 가 시작되던 1만 년 전쯤 큰 변화를 맞았다. ‘야생 식물에서 씨앗을 얻어 이를개간한 땅에 뿌린 후 물을 대고 잡초를 뽑는 경작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농업혁명(또는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르는 첫 번째 울트라 메가혁명 Ultra Mega Revolution이다. 수렵채집인이었던 인류는 농부와 목축인이되었다. 인간은 개를 시작으로 양, 염소, 소, 돼지, 말, 낙타와 같은 야생동물을 길들이고 사육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로써 인간은 위험한 사냥을 하지 않아도 단백질 원이 되는 고기와 우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 P20

드디어 인류는 수렵과 채집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한곳에서 도시와국가를 이루며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수렵채집 공동체는 기껏해야 수백 명 정도였지만 최초의 도시에는 수만 명이 모여살았다. 초생달 지대에 자리 잡은 수메르문명 최대 도시였던 우르크Uruk에는 전성기에 5~8만 명이 살았고 전체 인구는 80만~150만 명에달했다. 최초의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지구에 등장한 지 249만년만의 일이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지 29만여 년만의 일이다. 한곳에 정착하게 되자 출산율이 크게 증가하면서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또한 다른 동물들에 비해 늦게 사육을 시작한 말이나 낙타와 같은 동물의 힘을 빌려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문자, 수학, 법, 바퀴와 같은 세상을 바꾸는 발명을 이룩했다.
농업혁명과 함께 인류는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삼림 벌채하고 경작지에 물을 대는 관개 활동을 통해 자연환경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 P21

전반적으로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던 수렵채집인들에 비해 농부가 된 인류는 주로 농사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경작은 소수의 작물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이용 가능한 식품의 다양성은크게 좁아졌고, 그 결과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던 조상들에 비해 영양의 질이 저하되었다. 또한 때때로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에따른 흉작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인간의 키도 10센티미터 이상 줄어들었다.‘ 더욱이 인구 밀도가 높고 위생 환경이 좋지 않은 도시에 몰려 살면서 인간과 동물의 배설물과 오염된 식수로 인해 기생충과 전염병은 증가했다. 이 때문에 유발 하라리 YubalHarari는 사피엔스 Sapiens」에서 농업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는커녕 도리어 불행하게 만든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주장한다." - P22

1760~1840년경에 걸쳐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1차 산업혁명은 석탄을 에너지로 바꾸는 증기기관과 같은 기계가 발명되면서 시작되었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해 원자재를 빠르고 값싸게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은 증기기관차와 철도, 증기선을 이용해 아주 멀리까지 공급되었다. 석탄이 핵심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다. 황산, 염화나트륨 등과 같은 다양한 화학물질이 대량생산되면서 다른 발명품의 도입을 가능하게 했고, 시멘트가 발명되면서 대규모 건설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질수 있게 되었다. 1880년경에 이르면서 제1차 산업혁명은 서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제 인류는 동물의 힘이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려 생산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노동생산성은 획기적으로증가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제2차 산업혁명은 미국이 중심이 되어,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새로운 운송수단과 전기, 전신, 라디오를 발명했다. 대량생산방식이 도입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더욱분업화되고 노동생산성은 더욱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기술 변화는 천연자원의 사용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공산품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제2차 산업혁명으로 인류는 철과 같은 천연자원 뿐만아니라 합금이나 플라스틱과 같은 새로운 합성자원을 만들어 사용하고, 석탄에 이어 석유를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제사적 관점에서 볼 때 1·2차 산업혁명은 농업에 기반을 둔 봉건주의 체제를, 제조업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로 바꾼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 P23

런던 정경대 리처드 립시Richard Lipsey 교수에 따르면 인류는 지금껏24개의 범용기반기술GPT: General Purpose Technology을 만들어냈다.  - P34

립시교수는 범용기반기술은 고도화되면 될수록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궁극적으로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끌어올린다고 주장한다. 립시 교수에 따르면 인류의 첫 번째 범용기반기술은 동물사육기술과 경작기술이다. 이것이 일반 년 전의 농업혁명을 만들어냈다. 이후 바퀴, 글쓰기청동기, 철기, 인쇄술과 같은 범용기반기술이 발명되었고 18세기 중업에 시작된 산업혁명 기간에 범용기반기술이 집중적으로 발명되었다. 대표적으로 증기기관, 공장제도, 철도, 기선, 내연기관 전기자동차, 비행기, 대량생산 기술 등이다.
이렇듯 앞선 두 번의 울트라 메가 혁명기에는 여러 범용기반기술이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면서 종전 제도를 무너뜨리고 사회 전체를 변혁시켰다. 현재 진행 중인 세 번째의 울트라 메가 혁명인 디지털혁명 역시 컴퓨터, 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바이오테크놀로지, 나노테크놀로지 등의 핵심적인 범용기반기술이 경제 전반의 생산을 획기적으로높이고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고 있다.
커즈와일은 수확가속의 법칙 때문에 21세기 100년 동안 발생할 기술적 변화는 지난 2만 년에 걸쳐 발생한 기술 변화만큼의 크기가 될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1만 년 전쯤 농업혁명이 발생하였으니농경사회의 시작부터 산업사회까지의 발전 단계를 두 차례 반복해서 겪을 것이라는 의미다. 100년이면 너무 긴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향후 10년은 어떤가? 향후 10년 동안의 기하급수적인기술 변화는 최소한 지난 100년 동안의 기술 변화에는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P32

경제사적 측면에서 보면 흑사병은 농업사회를 산업사회로 바꾸는게임 체인저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자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이는 농노들의 임금과 권리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 왔고 부족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찾을 필요성을 만들었다. 또한 중세사회의 종식과 함께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6백 년 전 흑사병이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 팬데믹은 인류 역사의게임 체인저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람들로하여금 집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하면서 모여서 일하고 공부하고 쇼핑하고 놀던 일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신 온라인 재택근무와온라인 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 온라인 쇼핑과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도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원격 서비스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원격의료 서비스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규제의 틀을 벗고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뿐만 아니다. 디지털화는 경제, 사회, 문화, 정치를 포함한 모든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세계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가히 혁명적 상황이다.
이렇게 새로운 일상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인공지능, 빅데이터B%data, 클라우드 컴퓨팅, 디지털 플랫폼, e-비즈니스, 핀테크, 사물인터맛이 등과 같은 디지털 기술이다. 만일 코로나 팬데믹이 10년 전에만 발생했어도 세계는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을 터였다. - P35

산업사회 이전까지는 일부의 사람들만 이를 읽고 쓸 수 있었다. 이후 보통교육이 일반화되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제 소수가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시대뿐만 아니라 과거와지식과 정보를 교환하게 된 것이다.
디지털혁명으로 인류는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를 만들고 있다. 디지털혁명이 만들어낸 첫 번째 단계의 초연결사회는 20세기 말인터넷 보급과 WWW의 확산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컴퓨터를 통해 전 세계의 지식과 정보를 몇 번의 클릭만으로 탐색하고 서로 이러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는 능력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빠르게 지식과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디지털사회는 더욱 빠르고 손쉬운 초연결사회가 되었다. 이제는 컴퓨터 대신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빠르고 간편하게 세상과 연결이 가능하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1970년대의슈퍼컴퓨터보다 100만 배나 더 성능이 좋은 ‘울트라 슈퍼컴퓨터‘이다.
디지털혁명이 만든 초연결사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 2차원의 초연결사회가 3차원의 메타버스 초연결사회로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로블록스 Roblox와 같은 메타버스에서 게임과 온라인 콘서트를 즐기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에 맞춰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는 페이스북 Facebook이었던 회사명을 메타 플랫폼스Meta Platformis로 변경하고 2차원적인 SNS를 3차원의 메타버스로 바꾸고 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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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생명체는 35~38억 년 전쯤의 원시 지구에 처음 출현한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고 20억 년 동안 지구의 원시 바다에는 박테리아 정도만이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그중에서지구 생명체의 번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박테리아가 시아노박테리아였다. 35억년 전부터 서서히 증가하던 시아노박테리아는 물속에 다량으로 녹아있던 수소를 이용해 산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 P23

그 과정에서 햇빛이 작용해 이산화탄소와 물로 영양원이 만들어졌다. 이 광합성 기술은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 과정이었고 지구 생명체들의 삶의 패턴을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물속뿐만아니라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20퍼센트를 넘어 지구환경이 혐기성(嫌氣性)에서 호기성(好氣性)이 되었다. 산소는 오존층이 되어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지구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고 시아노박테리아가 광합성 과정에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소비하자 지구의 온도가 떨어졌다. 처음 시아노박테리아가 출현한 태고대의 지구에서는 거대한 화산들이 폭발하고 바다가 펄펄 끓고 있었다. 시아노박테리아가 만들어낸 산소는 다음 단계의 더 복잡한 생명의 역사를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일부 단세포박테리아가 다른 단세포박테리아의 몸속으로 들어가 공생 관계를 이루기 시작한 것도 20억 년 전 일어난 놀라운 변화 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세포 내에 핵과 미토콘드리아 같은 소기관이 공생하는 진핵세포가 만들어졌다. 식물세포 내에 엽록체가 공생하면서 식물체가 광합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핵세포는 원핵세포보다 더 크고 더 많은 DNA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생존을위한 더 좋은 전략을 짤 수 있었다. 그 결과, 진핵세포들의 연합체인 다세포생물체가 출현했다. - P24

한편 1924년 아프리카 칼라하이사막 근처인 타웅의 석회석 채석장에서 어린아이의 두개골 화석이 한 인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다. 발견 초기에 ‘타웅의 아이(Taung Child)‘로 불린 6세 정도의 이두개골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인간과 원숭이의 특징이 공존했다. 요하네스버그의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교 해부학 교수 레이먼드 다트(Raymond A. Dart)는 이 유골이 유인원과사람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새로운 종이라고 주장하면서 ‘아프리카 남쪽 지방(australo)의 원숭이(pitecus)‘라는 의미를 담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ecus africanus)‘로 명명했다.
200~300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는 이후 인류 진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된다. 그 후 많은오스트랄로피테쿠스종 화석이 아프리카의 남쪽 지방뿐만 아니라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견되었는데 특히 동부의 케냐, 탄자니아, 에티오피아에서 대거 발견됐다. 이 초기인류는 팔의모습이 유인원과 크게 다르지 않아 수상생활(生活)을 주로 했을것으로 추정되며 엄지발가락이 직립보행에 완전히 적응한 해부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오늘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오래된 선행인류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으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인류 조상으로서의 위상은 아직 변화하지 않고 있다. - P27

영장류 중 일부가 직립보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는 학자들의 가설은 많지만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영장류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을 거쳐 호모속으로 진화할 당시 지구환경이 급속한 변화를 겪던 와중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 P30

지난 250만 년 동안 지구상에는 적어도 17회의 극심한 빙하기가 관측된다. 계속된 극심한 기후변화를 견디지 못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100만 년 전 무렵 멸종했는데, 이는 그다음에 나타난 진화종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는 상당히 다른 형질적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빙하기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의 삼림지대가 건조해져서 숲이 감소하고 넓은 사바나가 형성되기 시작하자 수상생활을 하던 영장류는 새로운 삼림지대를 찾아 이동하거나 일부는 생활 태도를 바꾸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그러지 못한 종은 멸종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때 즈음해 영장류 중 일부는 수상생활을 포기하고 나무에서 내려와 생소한 지상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지상에 적응하기 시작한 영장류가 고인류의 모집단으로 추정되는데 400~500만 년 전에 등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이 중간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인류는 직립보행을 했다는 점 외에 침팬지나 고릴라 등의 유인원과 두뇌의 용량, 두개골 및 치아 형질에서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빨의 구조 때문에 유인원처럼 입이 튀어나왔고 영양가가 낮은 식물성 먹이를 먹고 소화시켜야 했으므로 창자가 크고 배가 불룩했고 따라서 구부정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영장류는 소화시킬 수 있는 식물의 어린 싹, 씨앗과열매, 저장 기관 등을 먹고 살았고 유충, 곤충도 가끔 잡아먹었을 것이다. 이들의 큰 어금니와 깊숙한 턱뼈는 많은 양의 음식을 하루종일 씹어 삼켰음을 시사한다. - P31

200만 년 전 호모 하빌리스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할 때는모든 면에서 큰 변화가 관측된다. 호모 에렉투스는 종래의 구인류들과는 확연히 다른 종이었다. 뇌는 하빌리스보다 더 커졌고 체형도 오늘날의 인간과 유사해져 팔이 짧아지고 다리가 길어졌다. 에렉투스는 직립했을 뿐만 아니라 달릴 수도 있는 체형을 갖추었다.
게다가 턱과 치아가 현저히 작아지고 장이 짧아져 식생활이 획기적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장이 짧아지려면 식생활이 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적으로 유리한 식품은 단연 동물성 식품이며, 날것보다는 익혀서먹을 때 영양 효율이 훨씬 높다. 따라서 송곳니가 크지 않은 호모에렉투스는 영양가가 높은 동물성 식품을 주로 익혀 먹은 것으로보인다. 이들은 동물을 직접 사냥해 불로 익혀 먹은 최초의 사람으로서 그야말로 현생인류의 첫번째 진짜 조상으로 여겨진다. - P34


인간의 특징으로 지목되는 대뇌화(化 encephalization)도 동물성 식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던종 중에서 초식 식단을 유지했던 여러 분파가 멸종해버린 사실 역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어느 시기든 인류는 고기만 먹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의 수렵채집인들은 잡식성이었을 것이며 이는 호모속이 더 다양한 생존 전략을 개발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먹이를 선택했고, 먹이를 찾아 오래전부터지구 위를 돌아다녔으며 만나는 호모종 사이에 잡종교배가 일어나유전물질을 교류하면서 오늘날 지구의 주인공이 되어왔을 것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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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역이 중세 전성기에 도달한 975년, 엔데(Ende)라는 이름의 스페인 수녀가 남긴 ‘화가이며 신의 종인 엔데‘ 라는 서명이 있다. 그녀는 에메테리우스라는 수도승과 함께 8세기에베아투스라는 수도승이 집필한 계시록에 주석을 단 「베아투스 계시록」을 섬세한 작업을 통해 완성하였다. 오늘날 게로나(Gerona)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이 필사본은 그녀가 그려 넣은 수많은 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인간의 나체는 죄악과 결합될 때만 그릴 수 있다는 중세의 이해에 따라, 엔데 수녀는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면서 지옥 속에 있는 죄인들의 벌거벗은 육체를 그렸다.
엔데 수녀가 자신의 책에 서명을 남기고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책과 책에 삽입되는 장식화는 물론이고 그림이나 조각조차도 대부분은 익명이었다. 중세에는수도원의 작업장이 예술 작품들이 창작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모든 그림들은 교회나 수도원의 주문에 의해 탄생하기 때문에 그림의 테마 역시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한 개인으로서의 예술가 개인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수녀나 수도승들은 자신들을 예술가 개인으로서의 야심이 전혀 없는 단순한 수공업자로서만 이해하였다. - P15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지은 이후에 비로소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죄악과 나체의 결합은 그 후 약 2천년 이상을 서양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회의 이러한 견해는 남성과 여성의 성과 육체에 대한 욕망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 P16

물론 여성상에 대한 인식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12세기 이후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기사들의 연애에 대한 숭배 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유랑하는 음유 시인 트루바두르는12세기와 13세기에 남편을 십자군 전쟁에 보내고 외롭게 살고있는 귀족 여인들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숭배가 단순히 귀족들 사이에서만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무지한 백성들 역시 여성적인 신을 섬기고 있었다. 중세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은 기독교 신앙 외에도 이교도의 자연 종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며, 이러한자연 종교의 중심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풍요의 여신이 있었다.
교회는 이러한 풍습에 맞서기 위해 마리아 숭배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동정녀 마리아는 유혹적이고 불행을 가져다주는 이브에 대한 반대극으로 형성된 것이다. - P18

수도승들과 함께 작업을 했던 수도원의 작업실과는 달리, 그자유로운 아틀리에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여성 예술가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에게는 오로지 수도원의 작업실만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수도원 안에 누드 모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에 따라 수녀들에게 해부학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P21


르네상스가 태동한 곳은 도시 국가인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통치하에서 무역과 은행업을 통해 매우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메디치 가의 코시모와 로렌초는 15세기 동안 자신들의 도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저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은 이제 더 이상 수도원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아틀리에를 마련하였다. 그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주체는 교회나 국가와 더불어 이제 부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된 신흥도시들이었다. 특히 초상화 예술이 번성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하는 것이 부를 얻게 된 시민들의 새로운 자기 이해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의 자의식 역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건축가이자저술가이기도 했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
1404~1472)는 수학을 통해 예술과 학문을 결합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에 따라 예술이나 학문에서 비례에 관한 이론이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알베르티의 이러한 이념은 조각가와 화가들이 자신들을 단순한 수공업자들과 구분 짓고 스스로를 예술가로서 이해하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예술가들의 위신도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들이 점차 자신들의 개성에 눈을 뜨기시작했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서 예술 작품들도 중세와는 달라 예술가 개개인의 개성의 발현으로 인식되었다. - P24

자유로운 아틀리에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인간의 몸을 조각할 때 자연과학에 토대를 두었던 알베르티의 지침을 따랐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처음엔 뼈에 대해 연구하고, 그 다음엔 근육과 피부에 대해 연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서 누드 모델이 없는 아틀리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ti, 1475~1564)와 같은 예술가들이 보인 인체에대한 관심은 철저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스케치하는 일에까지 이르렀다. - P26

1479년의 한 발굴 작업에서 기원전 3세기경의 그리스 조각품으로 추정되는 「벨베데레의 아폴로」 복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품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은 당시 세간의 이목을 불러일으켰다.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르네상스 역시 오로지 남성의 육체만을 찬미하였다. 남성은 힘과 활기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가치의 주체였다. 이제 남성의 나체는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테마의 서열에서 단연 선두에 서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서열은 거의19세기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예술가들이 테마로 선택하는 모든 분야는 ‘조형 예술 최고의 대상인 인간‘ 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철저한 해부학적 지식을 요구했다. 고대에 대한 재발견과 더불어 신화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일기 시작했다.
이로써 예술가들에게는 나체로 표현하는 테마 영역이 한층 더 확대되었다.
남성의 육체에 대한 숭배에 따라 많은 예술가들이 동성연애자였으며, 그 가운데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 P26

한편 성의 역할에 대한 문학 내의 논쟁은 20세기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14세기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radio,
1313~1375)는 1361년에 고명한 여성들에 대하여 (De ClarisMulieribus)』라는 저서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일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1405년경에는 서양 최초로 저술 활동을 전문적으로 했던 여류 작가 크리스티네 데 피잔(Christine de Pizan, 1365~대략 1430년경)이 문학 논쟁을 시작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저서 「여성들의 국가에 대하여」에서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 지적 동등함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녀는 이를 위해 성경과 신화, 역사 속에 등장하는 탁월한 여성들에 대한 수많은 보기를 제시하였다. 30년 후 이와 같은 논쟁에 참여한 알베르티는 자신의 저서 「가족에 대하여」에서 여성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르네상스 초기, 새로운 인문주의적 이상에 대한 모범으로 간주되고 있는 그의 저서가 성의 역할 변화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던 알베르티는 여성이 있을 자리는 가정이지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영역을 분리하고자 하는 단호한 태도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여성화가들이 아틀리에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P28

 남성 예술가들은 남성의 육체를 찬미하는 가운데 자기들끼리만 교류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 유명한 비트루브(Vinuv)』(나체의 한남자가 팔다리를 넓게 벌린 채로 사각형 안에 서 있고, 이 사각형은 다시둥그런 원에 둘러싸여 있음)에서 스케치한 것처럼, 조화로운 균형을 갖춘 육체의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성뿐으로 파악되었다. 반면 여성의 몸에서는 어떠한 균형도 찾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여성의 몸은 심지어 동물의 몸과 동일한 단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당시의 한 설명에 의하면 여성과 동물에게는 ‘정신적인 의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남성 예술가들이 여성들과의 경쟁에서 느끼게 된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국가와 특히 교회 기관들은 여성들이 예술 활동을 위한 해부학적 연구를 넘어서, 그들 자신의 육체와 성적 욕구에 대면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아가 르네상스의 계몽적 정신은 정반대의 반향으로서 종교재판이라는 재앙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1487년 베네딕트 파의 수도사인 슈프렝어(Sprenger)와 인스티토리스(Institoris)에 의해 집필된 마녀의 망치(Hexenhammer)라는책이 발표되었다. 이 책은 교회가 자신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일에 법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교회는 광범위한 사회적 영역에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에 제동을 걸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산파라는 직업은 언제나 눈엣 가시였다. 그것은 이들이 전통적으로 이교도적인 숭배 의식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의식의 중심에는 보통 여신에 대한 숭배가 놓여 있었다. - P29

볼로냐 출신의 또 한 사람의 여성 예술가 역시 높은 명성을얻을 수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화가 라비니아 폰타나(LaviniaFontana 1552~1614)였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이주했다. 라비니아 폰타나는 화가 프로스페로 폰타나의 딸이었고 아버지의 아틀리에에서 교육을 받은 최초의여성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볼로냐를 감싸고 있던 여성을 환대하는 풍토 외에도 소포니스바 앙구이솔라가 누렸던명성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겨우 17세 연상이었던 앙구이솔라는 폰타나에게 많은 자극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폰타나의 명성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화가로서벌어들이는 수입도 함께 증가했다. 그녀는 로마에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교황 파울 5세가 자신의 초상화를그리게 할 정도로 초상화가로서의 명성도 아주 높았다. 그녀는 죽기 바로 직전에 매우 특별한 종류의 영예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의 초상이 들어간 동전이 볼로냐 출신의 펠리체카소니 (Felice Casoni)에 의해 주조된 것이다. 동전에는 라비니아폰타나가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있다.
소포니스바 앙구이솔라와 라비니아 폰타나는 16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여성 예술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누렸던 높은 명성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들이 받은 특별한 교육 덕분이기도 했는데......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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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화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리스의 여성화가인 코라(Kora)는 막 동트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속에서 그녀의 침실 벽에 드리운 애인의 실루엣을 목탄으로 그리고 있었다. 때는 기원전 7세기, 장소는 그리스의 코린트(Korinth)였고, 코라가 그리고 있던 것은 인간의 벗은 몸이었다.
코라는 이별의 아픔 속에서도 애인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기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아침, 그녀의 애인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전쟁터로 떠나야만 했다. 이것이 유럽 문화권에서 최초로 여성의 손에 의해 나체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20세기까지 여성화가들에 의해 나체화가 그려졌지만 그 노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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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신화의 세계는 여신들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조기로 옷감을
짜듯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여신들은 소수민족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소수민족 신화가 가지고 있는 부드러움과 온화함, 우아함과 따뜻함은 바로 그들의 신화 세계를 채우는 자애로운 여신들의 힘 덕분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수민족 신화에는 지혜나 지식에 대한 존경심이 자주 보입니다. 물질적인 자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정신적 유산입니다. 그들은 지식이나 지혜가 없는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경제‘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있는 현대의 우리에게 그것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입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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