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 대해
본명은 노르마 로사 가르시아 마이니에리
1940년 과테말라에서 태어나 과테말라 산카를로스 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역사학·인류학·고고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사회과학 분야의 자료에서 얻은 노동자, 농민, 민중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집단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표작으로는 「입 다문 마을」이 수록된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들』, 『행인의 시』, 『주변성, 여성과시」 등이 있다. - P51

작가의 말
글쓰기는 힘들고 끝이 없는 작업이다. 그것은 고독과 고통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갚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과테말라에서 ‘문학적‘ 현실 속에 침잠하여 살아가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작가들이 주제를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수많은 주제로 포위되어 공격받고 있다. 그래서 글쓰기란 도구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알고만있다면,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입 다문 마을」을 쓰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중심인물의 죽음이었다. 정확히 나는 그 대목을 열여덟 번에 걸쳐 다시 쓰면서. 가능한 한현실적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기에, 언젠가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놀리기도 했다.
"얘야, 불쌍한 아벨 사령관을 죽일 때면, 거기에 관해 너무 많은 경험을 갖게 될 거야. 그래서 아마도 살인자의 입장에서도 쓸 수 있게 될거야."
난 중요한 목표가 있다. 난 우리나라의 대중들에게 읽히고 싶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 중 대부분은 문맹이다. - P52

......그 지역에는 아무도 살지 않소. 기껏해야 코요테와 같은 동물만 살 뿐이오. 그러니 이제부터 이 사실을 명심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로 고통을 받을지도 모르오."
그리고서 그 지역의 지도와 교통표지판, 그리고 버스정류장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친척들은 산타마리아 델라 벤디시온에살던 친척들을 잊어버렸고, 전에는 채소와 꽃으로 가득 찼던 소란스러운 일요일이 아침에는 교회를 가고 오후에는 술집으로 향하는 슬프고 우울한 일요일로 바뀌었다. 건망증이 심한 친척들은 사진과 선물들과 로사리오를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그 누구도 그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밤새에 망각의 전염병이 휩쓴 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다. 기억을 상실한 산헤로니모 마을은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우선 선생님들, 다음에는 우체국 직원들, 그러고는시장과 신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몇 사람들은 그것이망각에 저항했던 끈질긴 기억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러자 모든 마을사람들의 삶이 바뀌었다. 기억과 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꼭 다문 사람들이사는 그 마을은 유령과 같은 마을이 되었던 것이다.
- P64


"아…… 벨사………… 령…………… 관!"
그는 혁명군이 해방시킨 새로운 영토의 첫 번째 방어선이었던 산타마리아 델라 벤디시온 마을의 혁명 사령관이었다.
불빛이 꺼졌다. 귀신 같은 사람들이 시체를 치웠다. 시체의 눈은 아직도 맑고 깨끗한 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무기를 철수시켰다.
"여기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작전 지휘관이 명령조로 말했다.
마을의 집들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닫힌 창문에서 물러나 침대로 돌아갔다. 이제 그들은 잠을 이룰 수 없을것이다. 기억은 되돌아왔고・・・・・・ 한 명의 증인이 있었다. 방금전에 죽은 남자의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보았던 단 한 명의 증인이 있었던 것이다.
산타마리아 델라 벤디시온과 그곳의 주민들, 그리고 아벨사령관은 역사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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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미얀마어가 공용어로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정도가 미얀마어를 이해하고 있다. 미얀마는 의무교육제(4년제)를 채택한 지가 오래지 않기 때문에 소수종족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미얀마어가 부분적으로 소통되지 않는다. 이들 소수종족이 구사하는 다양한 고유언어가 있고, 그 종류가 141종에 달한다는 조사통계가 있다. 미얀마어 이외에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영어가 폭 넓게 통용되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도어(Hindi)와꾸앙뚱(廣東)어가 부분적으로 소통된다.
주요 종족과 분포(도표2 참조) 상황은 다음과 같다.
주종족인 버마(Burma)족은 에야워 강을 중심으로 한 중부 평야지대와 태국과 국경을 이루는 동부 고원지대의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미작산지와 벵갈 만의 서쪽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서 역사를 통하여미얀마의 가장 중요한 종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산(Shan)은 미얀마 중부의 샨 주의 해발 1,000m 이상의 고원지대와계곡에 거주하는 종족이다. 샨족을 지칭하는 샨(Shan)은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태국과 라오스 및 중국의 국경과 마주하고 있어서 오래 전부터 국경무역이 성했다. 교역품 중 아편은 오랫동안 주요 교역품목 중의 하나였다. - P3

까렌(Karen)족으로 오랫동안 널리 알려져 온 꺼잉(Kayin)은 3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서부 고원지대의 샨족의 거주지역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밀수품에 대한 통행세를 받아왔으나, 현재는 정부군에 의해 태국으로 내몰려 있는 상태이다. 정치적 활동에 간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꺼인족들은화전방식으로 농사를 짓거나, 코끼리 사육과 길들이기, 코끼리를 이용한벌목, 광산에서 주석 등의 광물을 캐서 생활하고 있다. - P4

친(Chin)은 미얀마의 소수종족들 중 외부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종족이다. 친족은 총 인구가 100만 명 정도인데,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산악지대에서 살아온 이들 친족들은 네팔(Nepal)의 구르카(Gurka) 종족과 마찬가지로 영국식민 통치시기에 식민지 군대에서 강인함으로 용맹을 떨쳤다.
까친(Kachin)족들은 미얀마 최북단에 위치한 까친 주에 근거한다. 미얀마의 산악지대에 분포되어 있는 많은 고산(高山族)들은 대개까친족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들은 애니미즘(animism)에 가까운 종교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막내가 상속하는 특이한 가족제도를 가지고 있다.
몽(Mon)의 인구는 130만 명가량이며 미얀마의 중남부 해안지역에군거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버마족에 동화된 것으로 보이나, 미얀마에 불교문화를 전파한 주요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소수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정부가 공식으로 확인한 종족 수는 135 종족으로 발표된 적이 있다. 아직도 외국인으로 등록되어있는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지난 1993년 군사정부에 의해서 각각 5만8천 명과 3만4천 명으로 조사되었다. - P5

III. 국토와 지형
미얀마는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와 인도 북동쪽으로 중국, 동쪽으로는 라오스 남동쪽으로 태국의 5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총 국토면적은 약 68만㎢로 대륙부 동남아 국가들 중 가장 크며 한반도 전체의 3배정도이다.
미얀마의 지형은 그 성격에 따라 동부 고원지대, 중부 평야지대, 서부산악지대, 그리고 벵갈(Bengal) 만 연안의 라카인(Rakhine) 연안 지역으로 구분한다. - P5

IV. 기후
미얀마는 국토가 남북으로 2,040km에 달하며 북으로 중국대륙 운남성(雲南省)의 남서부와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태국 및 인도와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나라는 전체적으로 열대와 아열대에 속하여 고온다습한 열대몬순기후대이다. 건기와 우기는 대체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우기는 벵갈(Bengal) 만(灣)에서 남서 계절풍(Monsoon)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5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5개월간이다. 이기간 중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5,000㎜ 가량의 비가 내린다. 건기 중 기온이 가장 낮은 기간은 11월부터 2월까지 4개월간이고 이 기간 중 평균 최저기온은 17℃이다. - P7

2. 주요 도시
1) 양공(Yangon)에야워디강 하구의 델타평원에 위치한 양공은 양공행정주의 명칭이자 미얀마의 수도이다. 양공은 ‘적을 무찌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755년 몽(Mon)과의 전쟁에서 알라웅퍼야(Alaungpaya) 왕이 승리하여 더공(Dagon)을 점령한 후, 더공을 양공으로 개칭한 사실(史實)에서 연유한 것이다. 1824년 영국과의 제1차 전쟁에서 미얀마가 패한 후 양공 지역은 영국 식민통치의 필요에 의해서 조선소를 비롯한 각종 공장시설이 건립되면서 번창하게 되었다. 2005년 현재 양공시청이 추정한 양공의 인구는 6백만 명에 달한다.
2) 만들래(Mandalay)
양공으로부터 에워디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620km 떨어진 만들래는 양공 시 다음으로 큰 미얀마 제2의 도시이다. 꽁바웅 왕조의 민돈(Mindon) 왕에 의해서 건설된 왕궁이 이곳에 있다. 1857년부터 민돈 왕이 건설했다는 이 도시는 불교전설에 따라 이룩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얀마문화와 불교의 중심도시라 일컬어지고 있다. 인구 60만(1996년 추정치)의이 도시는 68만㎢ 면적 미얀마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버마족 이외의 다른 소수종족들과의 접촉이 용이하다. 또한 만들래는 중국의 꾸밍시와 연결되는 미얀마 국경무역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중국 민항기가 주2회 운항하고 있다. - P12

3) 버고(Bago)
양공과 만들래를 잇는 도로와 철도망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버고 행정주의 수도로 인구는 32만 명(1996년 추정치) 수준이다. 중부 평야지대에서 생산되는 쌀과 목재의 중간 집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1월과 2월의쌀 수확기에는 미작문화(文化)의 장관을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2만 7천 명의 연합군 희생을 기리는 영국군 전몰장병 유적지가 이곳에 있다.
4) 몰먀잉(Mawlamyine)
땅르윈(Thanlwin) 강과 안다만(Andaman) 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있는 항구도시로 22만의 인구(1996년 추정치)가 거주하고 있다. 이 도시는 몽(Mon) 주의 중심도시이며, 양공과 만들래, 그리고 버고에 이어 미얀마 제4의 도시이다. - P12

1. 중국
네윈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정책을 추구하면서 화교(華橋)의 경제활동을 봉쇄하여 미얀마-중국 관계가 소원했으나, 1971년에 이르러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었다. 이 때부터 1985년까지 양국의 최고 지도자들의 교차방문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 기간 중 네윈은 총 다섯 차례(1971년,
1975년, 1977년, 1980년, 1985년) 베이징을 방문하였고, 덩샤오핑(1978년)등 중국 지도자들도 양공을 답방하였다.
베이징 정부는 중국 대륙의 서남부 개발과 관련하여 미얀마를 통한 인도양 진출의 교두보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중국-인도 간의 국경분쟁이 해소된 이후에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중국은 대 인도 협력관계 강화에도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다. 땅쉐(1996년 1월) SPDC 의장을 비롯하여 마웅에(1996년 10월 2000년 6월)SPDC 부의장 등 대부분의 SPDC 위원들이 베이징을 방문하였으며, 리펑(1994년 12월) 총리를 비롯하여, 장쩌민(2002년 12월) 국가주석 등 많은 베이징 지도자들도 양공을 방문하여 관심사를 논의하고 양국 간의 협조관계 증진에 노력하였다.
미얀마는 소수종족의 반정부활동에 중국측의 긴밀한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미얀마는 중국산 재래식 무기와 탄약 수입에 중국측의 협력을 요청하고 있으며, 중국도 미얀마의 양공만 인근에 해군 기지를 임차하려는 협상을 전개하고 있다. - P16

2. 태국
미얀마와 태국은 역사적으로 가깝고도 먼 ‘애증(愛)관계‘의 이웃나라이다. 총 연장 1,800km의 국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만큼 국경분쟁의 요인도 많다. 특히 마약재배와 밀매에 태국의 고산(高山族)들과 미얀마 북동부 산악지대의 소수종족들 간의 협조가 양국 정부를 어렵게만들고 있다. 미얀마-태국 양국은 양국의 협조관계 증진으로 보다 많은실질적인 이익을 제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1979년 당시 미얀마의 최고 실력자 네윈이 태국을 방문하였고, 1980년태국의 쁘렘 수상이 답방하였다. 1980년 쁘렘 수상 양공 방문시 양국 간의 영해(海) 확정에 관한 협정이 이루어진 바 있다. 미얀마 군사정부에 대한 외부의 비협조 관계로 양공 정부는 태국을 통하여 국제적 고립을 탈피(脫皮)하려고 유화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태국도 국제적으로 고립되어있는 미얀마를 지지. 지원함으로써 투자와 경제 진출을 선점(先占)할 수있다는 양국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서 상생(相生)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태국이 더 적극적이다. 2001년 6월 딱신 태국 수상의 미얀마 방문으로양국 외무장관의 정기 교환 방문을 제안하였으며, 이 때부터 양국의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이 긴밀한 교차 방문을 통해서 미얀마-태국 양국의 주요현안인 군사분야의 협력 문제를 비롯해서 경제협력 문제, 마약퇴치 문제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 P16

3. 아세안
미얀마 군사정부는 국제적인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첫 번째 조처로 아세안 가입을 시도하였다. ‘아세안 10‘ 혹은 동남아의 아세안화(ASEANizationof Southeast Asia)를 추진해 온 주요 아세안 국가들도 1995년 4월 아세안-미얀마 간의 ‘건설적 개입(Constructive Engagement)‘을 추진해 왔다. 태국이 주도한 이 연계정책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 싱가포르가 동참하였고, 미얀마 군사정부에 부정적인 대미(對美) 관계를 고려한 필리핀은 다소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미얀마는 1997년 7월 제30차 아세안 외무장관회담을 통하여 아세안 가입이 확정되었다. 이 때 이후로 미얀마 군사정부의 최고 지도자 땅쉐는 아세안 무대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1997년 12월에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였고, 1998년 12월에는 베트남 (제6차 아세안 정상회담)을 방문하였다. 1999년 11월에는 필리핀을, 2000년 월에는 싱가포르(제7차 아세안 정상회담)를, 2001년 9월에는 다시 말레이사아, 같은 해 11월에는 브루나이의 아세안+3 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2년 10월에도 캄보디아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 P17

4. 미국
미얀마와 미국은 네윈 정부 이래로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73년 네윈 정부는 AID 원조를 거부하고 일체의 간섭을 거절하였다.그러나 마약문제가 국제문제로 비화하고 미얀마도 북동부 국경의 소수종족 문제로 골치를 썩이면서 1975년부터 1976년 사이에 미얀마 정부는마약 단속을 위한 헬기 지원(18대)을 수용하였다. 미얀마-미국 관계는1980년 이후 다소 개선되었는데, 1981년에 미국은 총 3,500만 달러 규모의 무상원조를 미얀마에 지원하였다.
미얀마-미국 관계는 1988년 9월 SLORC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미국은 1991년 7월 대 미얀마 경제제재조치를 취하였으며, 1997년 4월에는 대 미얀마 투자금지 결정과함께 국제금융기구의 대 미얀마 금융지원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 해 5월에는 미국의 대 미얀마 제재조치를 매년 연장하는 조처를 취했다. 미국은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SPDC 출범 이후에도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 P18

5. 일본
일본은 미얀마 최대의 원조공여국이며 역사적으로 매우 돈독한 양자관계를 유지해 왔다. 1988년 9월 SLORC 정부 출범 후 원조 중단 등 양국관계가 일시 정지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역사적 관계와 최대의 원조공여국임을 내세워 서방세계를 대표하여 미얀마의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야권(野圈)과의 대화도 시도하고 있다. to folo일본은 미얀마에 다양한 형태의 유무상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무상원조도 점증(漸增)하고 있는데, 1990년에 3,000만 달러 규모가 1994년에는 1억 달러로 증액되었다. 1995년에는 1억 4,000만 달러, 1996년에는 다시 1억 5,000만 달러로 늘어났다. 일본의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 수출입은행, 상공회의소(JCCI) 등이 대 미얀마 원조를 대행하고 있다. 2001년 5월에는 일본 정부 차원의 원조로 2,800만 달러 규모의 수력발전소 건립에 필요한 무상원조를 실시한 바 있다. 일본측에서는 각료급 인사들이 자주 미얀마를 방문하고 있다. - P18

남·북한관계에 원칙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였으나, 1977년 당시 네윈대통령의 북한 공식방문 등으로 정치적으로 북한에 편향된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1983년 10월 아웅산 폭발사건이 북한의 소행으로 확인되자, 1983년 11월 버마 정부는 대 북한 정부승인을 취소하고 외교관계를단절하였으며, 버마 주재 북한대사관 전 직원을 추방하는 등의 외교조치를 단행하였다.
최근 들어 북한은 외교적 고립탈피 정책의 일환으로 유엔 등의 국제무대나 중국·태국·인도네시아 등 제3국에서 미얀마의 외교관이나 무관등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관계재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0년 7월 미얀마 외무장관은 대한민국의 입장과 전체 아세안 회원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북한의 아세안지역포럼(ARF)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태국 외무성을 통하여 공식화한 바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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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9월 2일

어떤 의미에서, 논리에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야 한다. 이것은
‘논리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에 이미 부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대단히 심오하고 중대한 깨달음이다.
프레게는 말한다: 올바르게 형성된 문장은 항상 의미sinn 를 가져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가능한 모든 문장은 올바르게 형성된 것이고, 만약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구성요소 중 일부에 표의 Bedeutung 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게 했다고 믿을지라도 말이다.
- P29

정신적 삶을 위해서 비축하지도 못하고 있다. 나는 한 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고, 두 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고, 한 달 후나 아니면 몇 년 후에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죽음을 알지 못하며, 그것에 대항하거나 준비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존립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음과 아름다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삶이 스스로 멎는 순간까지.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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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을 들여다보면, 대다수 이란 사람들이 어째서 산악지대에몰려 살고 있는지 그 황량하고 혹독한 풍경을 보면 이해가 된다. 산을 가로질러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인구가 밀집된 산악지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각 소수 민족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흡수 통합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란은 현대 국가로서 국민의 단결이나 화합정신을 발전시키는 데 한층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 산 때문에 주요 인구 분포지가 넓은 땅덩어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보니 최근까지도 밀접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에도 이 나라 도로는 절반 정도만 포장된 상태다. 그래서 뭉뚱그려 이란 국민이라고는 해도 다양한 소수 민족 출신인 경우가 많다.
일명 파르시 Farsi라고도 하는 페르시아어는 이란 국민의 60퍼센트가 사용하는 공식 언어다. 그러나 쿠르드족, 발루치족, 투르크멘족.
아제르바이잔인(아제리족), 아르메니아인 모두 각기 고유 언어를 따로 가지고 있으며, 아랍인, 체르케스인, 그리고 반유목 생활을 하는 루르족 같은 여러 소수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조지아어를 쓰는 마을도 있는데 대략 8천 명의 유대인이 사는 이 작은 공동체는 기원전 6세기에 벌어진 바빌론 유수(Babylonian Exile,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당한 많은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건까지 그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 P71

특히 쿠르드족이나 아제리족처럼 비교적 큰 집단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이 나라 역대 통치자들은 늘 강력한 중앙 집권과 억압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 집단을 통제해서 어떤 지역도 떨어져 나가거나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임자들의 이런 정책 기조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라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쿠르드족은 국가의 공격적인 동화 정책에 맞서 자체 문화를 고수하는 산악지대 사람들의 가장 전형적인 표본이라 하겠다. 이란 정부가 소수 민족에 대한 통계를 명확히 밝히기를 꺼리다 보니 이들의 정확한 수를 따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을 참고해서 추정해 보면 쿠르드족은 이 나라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략 850만 명정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16퍼센트 정도 차지하는 아제리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소수 민족이다. 이들 대다수는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정착촌과 인접해 있는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쿠르드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민족성, 언어, 독립적 기풍, 그리고 시아파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그들 대다수가 수니파라는 사실때문에 수세기 동안 중앙의 당국과 갈등을 빚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말의 혼란스러운 틈을 타 소규모 쿠르드족 지역들이 독립을 선언한적도 있으나 중앙 정부가 정국을 장악하자 채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는 1979년에 이란 혁명‘이 벌어지자 또다시 봉기를 일으켰지만 이란군은 3년에 걸쳐 이들을 진압한 적이 있다. - P72

이란이 세계에서 4번째로 원유 매장량이 많고 천연가스도 2번째로많은 사실만 두고 보면 이 나라는 굉장히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아바단의 정유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최근 들어서야 전쟁 이전의 생산량을 겨우 회복한 상태다. 또 이란의 화석 연료 산업은 비효율적인 걸로 악명 높은데 국제적인 경제 제재로 인해 첨단 기자재를 들여오기가 어려워진 현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란에서 일할 의향이 있는 해외 전문가들의 수 또한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이란산 연료를 구입하려는 국가들 또한 많지 않다.
이란에게 가장 중요한 수출 상품은 뭐니 뭐니 해도 에너지다. 주요 유전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와 맞닿은 지역에 있고,
좀 더 작은 유전들은 내륙의 콤근처에 있으며, 가스전은 주로 부르즈 산맥과 페르시아만 쪽에 집중돼 있다. 따라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만orman만으로 들어가는 것이 주요 수출로 중 하나가 된다. 이곳이 이 나라가 개방된 해양 항로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데 가장 좁은 곳은 너비가 34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든 선적 항로의 폭은 3킬로미터를 겨우 넘는 정도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그 사이에 3킬로미터의 완충지대를 두고 있다. 이란에게 이곳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다. - P74

현재 약 3천5백만 명이 사는 이 나라에는 1세기 전에는 대략 2백만 명이 살았다. 그들 대다수는 유목민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 나라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지대다. 이곳에는 석유와 모래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를 20세기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킨 것은 다름 아닌 화석에너지원이었다. 석유야말로 이 나라가 주요 동맹국이자 보호국과 맺고 있는 관계의 근간이기도 하다. - P147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석유는 이 나라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고, 이 부는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극단적인 브랜드인 해석을 수출하는 이 나라를 석유에 목말라하는 권력 구조 사이에서 살아남게 해주고 있다. 최근에도 사우디아라비아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국왕이나 석유 갑부가 아닌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가 조금씩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래와 검은 원유밖에 없는 국토, 다루기 힘든 국민들, 정통성 시비에다 안팎의 적들에게까지 시달리는 사막 국가의 왕조는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나라에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현대화다.
21세기에 살아남으려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이 시도는 중동의 보다 넓은 지역과 그 너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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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들은 부상했다가 쓰러진다. 동맹들은 손을 잡았다가 놓기도 한다. 나폴레옹 전쟁 (1797-1815년) 이후에 맺어졌던 유럽의 합의는 60여년간 이어졌다. 히틀러가 꿈꾸던 천년제국은 고작 10년을 웃돌았다.
따라서 다가오는 시대에 어떤 식으로 <힘의 균형>이 바뀔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제적, 지정학적 공룡들이 여전히 국제정세를 부여잡고 뒤흔들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EU의 각 나라들, 또 인도처럼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 강국 등이그들이다. 그러나 보다 작은 나라들이라고 간과할 수는 없다. 지정학은 동맹을 끌어들이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현 세계 질서에서 강대국들은 반대편 못지않게 그들 편에 설 약소국들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은 터키나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같은 나라에게 미래 권력을 향해 전략적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물론 현재는 그 만화경의 조각들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어서 완전히 제자리를 찾지는 못하고있지만 말이다. - P13

이제 오스트레일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민이 외교정책과 국방 문제에 이르렀을 때 이 나라의출발점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그러했듯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오스트레일리아에게 그 나라의 면적과 위치는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덕분에 외부의 침략에는 안전했지만 정치적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한 광범위한 장거리 교역망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해상 항로를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이 필요하다. 게다가 주요 우방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P24

시드니 주변으로 정착촌이 자리 잡자 멜버른, 브리즈번, 태즈메이니아 등지의 정착촌도 성장해 갔다. 이것이 훗날 개척전쟁 (FrontierWars, 1788-1934년)으로 알려진 과정이다. 역사가들 사이에선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2천 명의 식민지 주민들과 그보다 몇 배 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추정한다. 특히 원주민들은 대량 학살을 당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식민지 주민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화 파괴 행위는 일찍이 1856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당시 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윌슨은 멜버른의 《아르고스Argus》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실었다.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 퍼부었으며.… 전체 부족들을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장면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노골적인 학살이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1910년부터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가운데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진 채 백인 가정이나 국가 시설에 맡겨졌다. 두 경우 모두 강제적인 흡수와 동화가 그 목적이었다. 이 정책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단됐는데 그때까지 소위 <도둑맞은 세대 >가 10만 명 이상을 헤아렸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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