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합리성은 1579년 유유 사건의 재조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유연을 살해한 사법장치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유연을 대신할 새로운 악인을 찾아내어 사건을 덮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백을 확보해 그를 법적으로 완벽한 악인으로 공표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법장치는 살인을 하고도 천연덕스러운 살인자처럼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백씨가 끝까지 조사를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일이다. ‘나의 아우를 죽였다‘(<유연전>)는 유유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 유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백씨라는 생각은 사건 당시에도일정하게 공유된 견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백씨는 결코 추궁을받지 않았고 그녀와 채용규의 공모관계도 밝혀지지 않았다. 백씨와 함께 춘수를 제대로 조사했더라면, 그의 아들 채경백을 조사했더라면,
춘수와 채용규를 잡아 넘기겠다고 유연의 아내 이씨에게 접근했던 영수와 김헌을 조사했더라면, 사건의 실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법장치는 그 조사를 회피하였다.
왜 조사를 회피했을까? 백씨에 대한 조사는 백씨와 채응규의 성관계는 물론 결국은 유유가 갖고 있었던 성적 문제를 드러낼 것이었다.
사족이 아니라면 남성이면서도 여성인 경우, 괴물로 치부하면 간단하였다. 하지만 사족남성이라면, 그것도 한 집안의 적통을 이을 적장자가 성관계 자체가 불가능한 ‘제3의 성‘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P243

 예컨대 동성애자는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노출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일뿐이듯, 유유와 같은 경우는 당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제3의 성‘을갖는 사족남성의 존재 같은 난감한 문제는 은폐되어야만 마땅하였다.
1579년 백씨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사건을 덮어버린 것은 그 내부에 성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연전>은 유연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곧그것은 일차적으로 유연의 아내 이씨와 이원익을 비롯한 당시 사족들의 여론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또한 이 작품은 비합리성과 남형으로 점철된 사법장치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갖자는 의도를 표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서술은 이제의 ‘악인화‘를 향해 치달았다. 이제를 악인화하는 과정에서 백씨가 적장자권을 놓지 않기 위해 채용규과 공모해 사기극을 벌이고 유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을 은폐했다. 나아가 사족남성이 갖는 성적 문제가 야기할 일체의 문제도 아울러 덮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유연전>은 유교적 가부장제와 사족사회의 모순을 근저에서 은폐하는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64년(명종 19)과 1579년(선조 12) 사이에 조정에는 권력의 교체가있었다. 과거 네 차례의 사화로 진출과 패퇴를 반복하던 사람이 정치권력을 온전히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와 남명, 율곡이 있었다.
그들은 도덕정치를 표방했고 주자학 텍스트를 철저히 읽으면서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 P244

표면적으로 매끈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 매끈한 시대의 이면에는 온갖 인간들의 온갖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로서의 괴로움으로 집을 떠난 자, 적장자에게서 후손을 보지 못해 절망하는 자, 사기극으로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자, 성불구의 남편을 대신할 가짜 남편을 만드는 자, 형수의 무고로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16세기 후반 ‘매끈한 조선사회의 구체적 삶의 모습이었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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