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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으로 인해 난민이 된 사람들을 수용하는 난민 캠프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본국에서 대립하던 그룹이 같은 장소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라이베리아 내전은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이라는 지배 계층에 대해, 원주민인 크란족 출신 군인 새뮤얼 도(후일 대통령이 됨)가 무장봉기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4년에 걸쳐 내전이 벌어졌고,
민족적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군벌이 등장하여 처참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2003년 내전 종식 후에도 이 민족 간 앙듬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때때로 이 분쟁의 망령이 떠돌며 부두부람 캡프의 정치 역학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 P192

일반적으로 ‘인도적 지원‘의 대상인 난민은 수용국에서 ‘지원은 감사히 받고 불평은 하지 않는 피해자‘로 지낼 것이 요구된다.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권력에 순응하는 난민은 모범적인 ‘착한 난민(Good refugees)‘이며, 캠프를 총괄하는 측에 소중한 존재가 된다.
한편, ‘카운티 대표자 협회‘와 같이 소리 높여 자신들의 권리를주장하는 정치 활동을 하거나 하면 ‘나쁜 난민(Bad refugees)‘이라는 낙인이 찍혀 수용국 정부나 UNHCR과 멀어지게 된다.
난민이라는 ‘피해자‘가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행위이며, 하물며 수용국에 비난의 화살을 겨누는 시위는 허용될 수 없는 범죄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다.
난민의 정치 활동에 대한 UNHCR의 반응은 내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본래 난민을 보호하고 이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 UNHCR의 스태프는 부두부람 캠프에서 일어난 일련의 시위를 보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UNHCR 스태프 중 한 명에게 2008년에 캠프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몇몇 ‘불량한‘ 사람들이 다른 주민들을 선동해서 일어난 거예요. 우리는 시위를 해산하도록 수차례 경고했지만 그들은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런 행위를 하면 가나 정부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 P204

언론과 표현의 자유, 결사와 집회의 자유는 세계 인권 선언에도 명기된 기본적 권리로, 난민이 되었다고 해서 박탈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라이베리아 난민의 정치 활동에 대한 가나 정부의 극심한 탄압과 UNHCR의 냉정한 반응을 보면 난민의 정치적 권리와 자유가 얼마나 억압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라이베리아 난민의 경제 활동이나 상업 활동에는 큰 제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캠프 안에서의 활동은 허락된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어쨌든 안 돼!‘
라는 게 현실이다. - P205

난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가장 많이 머여드는 곳은 세간의 관심과 동정이 쏠리는 긴급 사태가 발생한 곳이다. 요즘 한창 심각한 상황에 놓인 시리아 난민의 대량탈출 사례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장기화된 난민 상태‘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말한다.
이미 이들의 피난을 받아 준 수용국에서 몇 년(혹은 몇 십 년)을보낸 난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거의 사라졌고, 기삿거리를 찾아 미디어가 찾아오는 일도 없다. 이들의 이야기가 미디어에 오르는 일은 그래 봐야 매년 6월 20일에 돌아오는 ‘세계 난민의 날‘ 즈음이 전부다.
그 결과 공여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축소되고, 그로 인해 수용국정부 또한 난민에 대한 지원을 줄여 갈 수밖에 없다.
현재 세계 난민의 약 90%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 흔히 말하는 개발도상국에 머물고 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수용국은 난민 수용하는 한편, 공여국으로부터 받는 원조의 일부를 난민을 받아들인 지역 사회에 지원하는 식으로, 일종의 교환이 성립하게 된다.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난민을 둘러싸고 도상국인수용국과 선진국인 공여국이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여국의 관심이 떠난 ‘장기화된 난민‘에게는 지원을 모으기가 어렵고, 그렇게 되면 난민 수용국은 ‘원조받는 맛‘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거래‘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된다.
- P254

부두부람 캠프에서 생활하는 난민들은 앞서 말한 장기화된 난민 상태의 전형적인 사례로, 2003년 내전이 종결된 후 UNHCR과 가나 정부는 이들에게 본국으로 귀환할 것을 강하게 추천하고 있었다.
UNHCR은 2004년에서 2007년에 걸쳐 대규모 ‘라이베리아난민 본국 귀환 추진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이들을 조국인 라이베리아로 귀국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진행된 캠페인이었음에도, 프로젝트가 실시된 3년간 가나에서 라이베리아로 귀국한 난민은 2004년 당시 부두부람 캠프에 체류하던 4만 명의 25%인 1만 명 정도에 그쳤다.
대대적인 본국 귀환 추진 프로젝트가 별 소득 없이 끝나자,
UNHCR은 바로 차선책으로 ‘영구적 해결 방안‘의 하나인 ‘지역통합‘으로 초점을 옮겼다. ‘본국 귀환‘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라이베리아 난민을 현재 수용국인 가나에 정착시키는 것으로, 20년이나 지속되어 온 라이베리아 난민 문제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가나 정부는 당시 재정착프로젝트 후 잔류 중인 3만명의 라이베리아 난민을 ‘지역 통합‘으로 영구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에 난색을 표했다. - P255

UNHCR은 가나 국내에서 라이베리아 난민에 대한 비난이 가장 거세진 이 기회를 공교히 활용했다. 2007년에 이제 막 종료된 본국 귀환 추천 프로젝트를 재개하여 귀환하는 난민에게는 라이베리아까지 무료로 이동할 수 있도록 운송·교통 서비스를 지원했고,
한 명당 100달러의 지원금(이때까지는 난민에 대한 지원금이 1인당 고작5달러였다)을 약속하며 다시 한번 본국 귀환 추진에 나선 것이었다.
UNHCR은 가나에 머물고 있는 난민의 수가 대폭 감소하면 난민의 ‘지역 통합‘ 안에 대한 가나 정부의 태도도 유연해지지 않을까 하는 심산으로, 캠프에 설치된 게시판을 통해 "이번 본국 귀환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여 각자의 미래에 대해 합리적인 결단을 내립시다."라며 난민들에게 재차 호소했다.
2008년 4월에 재개된 본국 귀환 추진 프로젝트의 접수 마감은처음에는 2008년 9월까지였으나, 이를 두 차례 연장하여 최종적으로는 2009년 4월까지 였다. - P257

‘캠프에서 나고 자란‘ 난민 2세, 3세들에게 라이베리아는 ‘낮선 나라‘가 되어 있었다. 한 번도 모국 땅을 밟아 본 일이 없는 이들의 눈에 UNHCR이 추진하는 ‘본국 귀환‘은 큰 모순으로 비칠 뿐이었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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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0만 명 ‘
이 숫자는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UN이 발표한 2017년 말 기준 세계 ‘강제 이주자‘의 총 인구수다. 강제 이주자란 난민, 난민(비호) 신청자, 국내 실향민 등을 말한다. 이들은 무력 분쟁, 내란, 박해, 자연재해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 국내외에서 피난 생활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 숫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로, 4년 연속 과거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이 6,850만‘이라는 숫자는 일본 총 인구수의 약 절반에 해당하며, 영국의 총 인구보다도 많은 숫자다. 만약에 강제 이주자들을모아 한 나라를 만든다면 세계에서 21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강제 이주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 명가량이 난민이다.
일본에서는 보편적으로 논의되는 경우가 잘 없지만, 난민 문제는 이 시대의 국제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 중 하나다.
난민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 P31

이와 같은 난민 문제에 대해 종종 오해를 사는 부분이 있다. 근래의 보도를 보면 ‘유럽 난민 위기‘나 ‘세계 난민 위기‘와 같은 말이 자주 보이면서 마치 세계의 난민들이 선진국으로 밀려드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유럽과 그 외 선진국에 갈 수 있는 난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에는 2,5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있는데,
그중 90% 가까운 인구가 개발도상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350만명의 난민을 보호하고 있는 터키를 시작으로, 파키스탄, 우간다,
레바논, 이란이 2017년 기준으로 난민 수용 규모 상위 5위까지 차지하고 있다. - P33

난민이 발생하게 된 나라의 절대다수가 개발도상국 으로, 보통 그 주변에 있는 개발도상국이 난민 수용국이 됨과 동시에 그곳에
‘난민 캠프‘가 설치된다. 예를 들어 시리아에서 온 난민의 90%는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레바논, 요르단에 체류하고 있다.
그리고,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하고 있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대륙이다. 현재 세계에는 소규모를 포함, 모두 150곳에 가까운 난민 캠프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중 약 3분의 2가 아프리카대륙에 위치해 있다. - P35


라이베리아 내전 - 아프리카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분쟁
대서양에 접해 있는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정도 이동하면 부두부람 난민 캠프가 위치한 고모아 지역(Gomoa District)이 눈에 들어온다.
부두부람 난민 캠프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는데, 라이베리아 내전이 발발하고 그다음 해인 1990년에 라이베리아에서 피난 온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가나 정부가 설치한 시설의 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 라이베리아 내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바로 라이베리아라는 국가가 성립하게 된 매우 특수한 배경이다.
라이베리아는 미합중국의 해방 노예를 이주시키기 위해 1847년에 건국된 사실상의 미국 식민지였다. 이 이주 작업은 1822년부터
‘미국 식민 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라는 단체의 주도로 시작되어, 당시의 토착 원주민들의 땅을 일방적으로 빌리는 형식으로 이곳에 해방 노예들을 보냈다.
‘라이베리아‘라는 국가명은 ‘해방하다‘라는 뜻의 영단어 Liberate‘
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라이베리아의 수도는 해방 노예들이 이주하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로(James Monroe)‘의 이름을 따 ‘몬로비아‘로 부르게 되었다. - P43

또한 미국으로부터 ‘귀환‘해 온 해방 노예를 ‘아메리코 라이베리안(Americo-Liberian)‘이라고 부른다.
선진국인 미국에서 온 해방 노예들은 라이베리아의 원주민을 멸시하고, 철저히 탄압했다. 소수파였음에도 신생국인 라이베리아에서 부를 축적하고 정치·경제를 장악하여 20세기 후반까지 이나라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수파 엘리트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독재에 불만이 쌓이고 쌓여, 1980년 원주민 출신 장군인 ‘새뮤얼 도(SamuelDoe)‘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톨버트(William Tolbert)‘를 암살한 새뮤얼 도는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100년 넘게 이어진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권력 독점은 일단 막을 내린 듯했다.
그러나, 원주민 출신 첫 대통령이라며 기대를 모았던 새뮤얼도는 유감스럽게도 한 나라의 지도자로 전혀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권력을 손에 넣은 새뮤얼 도는 노골적으로 친인척을 편애하고 자신의 출신인 크란족(Krahn)을 우대하면서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이 정권도 쿠데타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9년 크리스마스에 ‘아메리코 라이베리안‘ 출신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일으킨 쿠데타로 새뮤얼 도 정권은 붕괴되었고, 이 나라는 내전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 P44

라이베리아 내전은 아프리카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분쟁으로 일컬어지는데, 시에라리온이나 코트디부아르와 같은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들도 말려들었고, 분쟁은 14년간 계속되었다.
분쟁이 계속된 14년간 약 30만 명이 사망했고,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분쟁을 피해 주변국으로 피신해 난민이 되었다. 부두부람캠프에서 생활하는 라이베리아 난민의 대부분은 이 장기간 이어진 내전이 한창이던 때 탈출하여 가나로 흘러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라이베리아 내전 자체는 2003년 정전 협정으로 끝이 보이는 듯했지만, 많은 난민들은 라이베리아에 돌아가지 않고 그 후에도 주변국에서 난민 생활을 계속했다. - P45

나는 2012년 난민연구센터에 합류했으며, 현재 전문 분야는 난민의 경제 활동에 대한 조사다. 조국을 떠나 그간의 생업을 잃게된 이들이 어떻게 언어와 법률, 사회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생계 수단을 구축하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 연구 주제는 최근 몇 년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앞서 설명한 ‘난민 상태의 장기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난민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아지는 것은 이들이 분쟁 등으로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비호를 구하는 ‘긴급 사태‘가 발생한 단계일 때다. 이 시점에는 미디어 또한 적극적으로 난민의 고통을 보도하며 공여국도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난민들의 수용국 체류기간이 장기화될수록 원조국의 관심은 줄어들고, 지원도 더 이상 모여들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난민들에게는 ‘스스로의 수입원을 확보하여 국제 원조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된 생활‘을 영위할 것이 요구된다. 탁 터놓고 말하자면, "당신들을 도와줄 돈이 없으니 힘내서 스스로 알아서 살아요."라는 것이다. - P47

어딜 봐도 개업을 위해서는 상당한 자본금이 필요한 곳뿐이었다. 난민 기업가의 대부분은 앞서 만난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존처럼 선진국에 가족이 있는 등 해외에서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특권층‘에 속했다. - P104


1990년대 후반부터 이미 UNHCR의 지원은 축소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에 라이베리아 내전의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2005년에 내전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평화적으로 실시되면서, 공여국의 관심은 난민 지원에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라이베리아의 재건으로 옮겨 갔다.
연간예산의 대부분을 선진국의 자금 협력에 의존하는 UNHCR은, 결과적으로 라이베리아 난민을 위한 예산을 대폭 삭감할 수밖에 없었다.
부두부람 캠프를 위한 예산이 축소되면서 UNHCR은 캠프의수도와 공중화장실 등의 서비스를 모두 유료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UNHCR은 이러한 기본 서비스에 대한 재정지원은 제공했지만, 그것만으로는 2만 명이 넘는 캠프 주민들 모두의 필요를 충족하는 게 불가능했다.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난민 스스로 요금을 징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내가 캠프에서 머물던 때 공중화장실의 1회 이용료와 물 한 동이의 가격은 각각 5 페세와(약 40원, 100페세와=1세디)였다.
캠프에는 UNHCR이 설립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는데, 학비는 6학년 아이의 연수업료가 45세디(약36,000원), 중학교 3학년은 203세디(약162,400원)로, 현지 물가 수준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비싼 금액이었다. - P87

들쑥날쑥한 원조
이처럼 장기화된 난민 캠프에서 난민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생활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난민 수용국의 정부로부터 협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는 더욱 큰 문제다.
가나 정부는 라이베리아 난민이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며 강한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특히 앞서 설명한 것처럼 노동 허가증 발급을 지체하거나 은행 대출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등 제도적 장벽을 통해 난민이 노동 시장에 유입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난민을 받아들인 고모아 지구의 경우, 지역 주민들도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데 왜 자국민도 아닌 난민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것이 가나 정부의 입장이었다.
또한, ‘인도적 지원‘과 ‘개발 원조‘를 둘러싼 국제기구의 복잡한 줄다리기 문제가 난민들의 경제생활을 한층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난민 지원은 본래 인도적 지원의 대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인도적 지원의 가장 큰 역할은, 분쟁과 재해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제공되는 것은주로 물이나 식료품, 텐트, 약, 담요 등이다.
하지만 장기화된 난민 캠프에서는 이러한 인도적 지원의 역할이 극히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P121

국제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난민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도록 돕는 개발 원조지만, 이는 인도적 지원에 중점을 두는 UNHCR의 영역에서 벗어나 UNDP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UNDP는 난민 원조의 전반은 어디까지나 UNHCR의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UNDP가 난민의 경제 활동에 대한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일은 없다.
부두부람 캠프에서도 UNHCR이 지금까지 몇 차례 난민의 경제 자립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조직했지만 들쑥날쑥한 부분이 많아 실효성은 미미했다.
예를 들어, 2009년에는 난민 중 희망자에게 6개월간 전기 공사,
석공, 미장이, 재봉, 컴퓨터, 미용 등의 분야에서 직업 훈련을 제공했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UNHCR은 2003년 이후 마이크로 파이낸스 등 대출 프로그램의 운영을 중지했다(106쪽참조).
가나 금융 기관으로부터 사실상 문전박대를 당하는 난민들은 새로운 직업 기술을 익히더라도 이를 실제로 비즈니스로 실현하기 위한 창업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 난민을 위한 직업 훈련 프로그램 수강자 사이에선 이러한 현실을 자조하는 말이 있다.
"We were trained but not economically empowered.
기슬만 배웠을 뿐 경제적인 힘을 얻은 건 아니다.)" - P122

난민의 생계 수단 형성을 지원한다는 프로그램의 근본적인 약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말이다.
여기에, 제1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장기화된 난민 캠프에 대한 공여국의 관심 또한 크지 않아 애초에 원조 자금 자체가 모이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조사 기간 중에 UNHCR 가나 사무소의 관리직 스태프들과의미팅 자리에서 캠프 빈곤층의 생활 상태가 너무나도 열악한 점을지적하고, 이러한 빈곤층에게 UNHCR을 포함한 국제기구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한 일이 있다. 이에 대해 한 미국인 스태프가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말했다.
"더 이상 여기(라이베리아 )난민들을 공여국에 ‘세일즈‘해 봐야 소용없어요 내전도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어느 공여국도 돈을 내지않을 겁니다. UNHCR도 곧 가나에서 철수할 예정이고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UNHCR은 2009년부터 2011년에 걸쳐 지원 프로그램을 하나둘 종료하고, 체류 중인 난민들에게 출신국인 라이베리아로 귀환하도록 적극적으로 권했다. - P123

경제 활동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같은 캠프에 사는 난민들 사이에도 상당한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고, 생활 수준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차차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차를 야기하는 가장 큰 요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국으로부터 ‘송금‘을 받는지의 여부였다. 개개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빈부가 결정되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하지만, UNHCR과 같은 원조 기구의 지원이 격감할수록 캠프에서 해외 송금이 갖는 영향력이 커져 가는 것을 목격한 난민들은 미국, 유럽 등에 대한 과장된 꿈을 꾸며 선진국으로의 이주를 갈망하게 되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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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UN에서 채택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은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의견 또는 특정 사회 집단에 속하는 것을 이유로 자국에서 박해를 받거나,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어 타국으로 피신한 자‘를 난민으로 정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박해 외에도 전쟁이나 내전 등의 무력 분쟁으로 인한 위험을 피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이동해 비호를 구하는 사람들 또한 난민으로 보는 게 국제적인 해석이다. 앞서 말한 일본에서 말하는 ‘○○ 난민‘이라는 신조어의 대부분이 ‘난민‘
이라는 단어가 갖는 본래의 뜻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난민이라는 개념의 요점은 ‘자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자국 밖에서 보호를 구할 수밖에 없는‘이라는 부분에 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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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2 가나
가나는 황금이 많이 생산되어 서구의 아프리카 유입 시기 ‘황금 해안Gold Cous‘이라고 불렸으며 1957년 독립을 이뤄내 이후 1960년대 많은아프리카 나라가 독립하는 데 시발점 역할을 했다. - P14

Answer. 3 카메 은크루마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Kaname Nikarmali는 전 아프리카 대륙의 단결과 통합을 주장함으로써 국내뿐 아니라 국외, 특히 전 아프리카대륙의 나라에 미친 영향이 크다. - P16

Answer. 4 케이프코스트
가나 센트럴주의 주도인 케이프코스트Cape Coast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인 케이프코스트성이 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을 통해 거래된 흑인의10퍼센트가 가나 지역의 아칸인이었을 정도로 많은 흑인이 가나 지역에서 팔려갔는데 그중에서도 많은 수가 특히 케이프코스트성을 통해 거래되었다. - P20

Q5.
카리브해 국가 및 미국 흑인 사이에널리 알려져 각종 거미와 관련한 설화 및영화 <스파이더맨>에 영향을 끼친 아칸인들의 신은 무엇일까요?
1 아난에이 2 아난비 3 아난시 4 아난디 5 아난다 - P21

Answer. 3 아난시
아난시는 거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교활하고 재치 있는 책략으로 적을 이겨내는 사기꾼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존 질서를 혼란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노예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아프리카 지역에서 팔려간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들에게 사랑받았다. - P22

가나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 연안에 접한 나라이다. 동쪽으로 토고, 북쪽으로 부르키나파소, 서쪽으로 코트디부아르와삼면을 맞대고 있으며 면적은 23만 8,535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 면적(22만748제곱킬로미터)보다 약간 더 크다. 수도인 아크라Accra가 위치한 남부 지역이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높으며 대서양과 접해 있는 해안선은 560킬로미터에 이른다.
가나는 적도에서 북쪽으로 단지 몇 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본초 자오선이 지나고 있어 그리니치 자오선이 존재하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아홉 시간의 시차가 있다. - P25

아프리카의 검은 별, 국기
빨간색, 노란색, 녹색을 범아프리카색이라고 부르며 이는 다양한 아프리카 나라의 국기에 차용되고 있다. 범아프리카색은 에티오피아 국기에서 비롯된 색깔이다.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은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는 달리 에티오피아는 식민 지배를 받은 경험이 없고 고유의 언어가 있으며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가 있어 아프리카인들의 자존감의 근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P33

가나는 서구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면서 범아프리카색을 국기에 차용한 최초의 국가이다. 가나 국기의 빨간색은 독립 투쟁을 한 선조들의 피를, 노란색은 국토의 풍족한 자원을, 녹색은 가나의 풍부한 숲과 자연을 뜻한다.
가나의 국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마커스 가비 Marcus Mosia Garvey이다. 미국 사업가이자 인권운동가인 마커스 가비는 1887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내 흑인 인권을 제고하기 위해 흑인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흑인 전용의 해운 회사인 블랙스타라인The Black SturLine(검은 별 해운 회사)을 설립했으며 사회 경제적 활동을 펼침으로써 그의 영향력은 미국뿐 아니라 카리브해 지역의 흑인들,
나아가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에게까지 미쳤다. 그래서 미국과 카리브해 제도를 그리고 가나 등에는 학교, 고속도로와 같은 사회 기반 시설의 명칭에 마커스 가비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 P35

가나의 코토카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면 만나게 되는 도시는 아크라이다. 가나의 수도이자 250만 인구(2020년 기준)가 모여 사는 광역 대도시로 한 나라의 수도인 만큼 인구 밀도가 가장 높고 정부 청사, 상업지구, 고급 주거 지구, 금융 허브 등이 모여있다.
아크라는 개미집을 뜻하는 아칸어인 ‘응크란Nkran‘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가나 주변에는 황토가 높게 쌓인 개미집을 많이 볼 수 있다.
- P43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아크라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아그보그블로시 Agboghiloshie 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제품 쓰레기 처리장 중 하나로 2013년 미국의 환경보호단체 블랙스미스 연구소와 스위스 녹십자가 이곳을 세계 10대 유독 물질 위험지역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아그보그블로시에서 처리되는 전자 제품은 대부분 유럽에서 불법 수출된 것인데 이 지역에 사는 8만 명의 주민이 이 폐기물들을 태워 각종 금속과 부품을 추출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곳의 토양은 허용치를 몇십 배 뛰어넘는 유해 금속을 품고 있고 최근에는 닭이 낳은 달걀에서도독성 강한 화학물질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쓰레기 문제를 이야기할 때 서부 아프리카의 해안을 빼놓을 수 없다. 쓰레기가 여기저기 떠 있고 쌓여있는 서부 아프리카의 해안을 보면서 단지 이곳만의 문제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해양쓰레기는 발생지와 무관하게 해류의 움직임에 따라 해안으로 모여든다는 것을 알았다.
서부 아프리카 해안은 아메리카 대륙 및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해류가 만나는 곳으로 이곳으로 모여드는 해양쓰레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외에도 조악하게 만들어진 각종 공산품이 아프리카로 들어와서 쓰레기가 되는데...... - P48

2018년 기준으로 가나의 인구는 약 3,000만 명이다. 가나에 사는 10여 개의 민족 중 아칸인이 인구의 절반 정도인 47.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 뒤로 몰레-닥바니인이 16.6퍼센트, 에웨인이 13.9퍼센트, 가-아당베인이 7.4퍼센트를 차지하며 그 외에 구안인, 구마인 등이 있다.
가나에서는 영어가 공식어로 통용되지만 그들 사이에 쓰이는 약 열두 개의 민족 언어도 공인되어있다. 여기서는 각 민족별, 언어별 주요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 P57

아칸인, 아칸어
아칸인은 가나 남부를 중심으로 코트디부아르 동부와 토고에 거주하고 있으며 인구는 2,400만 명 정도 된다. 이들은 아샨티인, 아콰인, 아보인, 콰후인, 아킴인, 판테인 등으로 분류된다.
원래 이집트 지역에서 살던 아칸인들은 5세기 악숨왕국의 팽창으로 수단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기원후 750~1200년 사이 이 지역에서 이슬람이 발흥하자 다시 한 번 민족 대이동을 해야 했다. 아칸인들은 사하라 사막 지역을 통과하여 오늘날의 코트디부아르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사바나 지역으로 이동한 아칸인들은 현대 가나 영토의 중부 지역에 자리 잡으며 현재까지 가나에서 가장 많고 주요한 민족으로 남았다.
역사적으로 아칸인은 일부 세력의 보노만 왕국, 아콰무 제국, 덴키라 제국, 아샨티 제국 외에 통일된 국가를 가지지 않았으나 니제르콩고어족의 아칸어를 사용하며 모계 사회의 전통과 같은 공통의 문화적 특질을 지니고 있다.
조상이 같다고 여겨지는 혈연 공동체인 씨족 속에서 분화된 여러 계급은 아칸인 사회의 정치 사회 기초 단위를 이룬다. 이 씨족들이 모여 마을이 되고 마을이 모여 지방 및 추장국을 이룬다.
전통적으로 조상 숭배가 종교 의식의 중심이지만 우주를 창조한 최고신과 그 외 하위 신 및 혼령 숭배도 이루어진다. - P58

 아칸인은 아크라를 포함한 남부 지역 인구의 63퍼센트를 차지하고 그중 40퍼센트가 아칸어를 제1언어로, 나머지 40퍼센트도 제2언어로 사용하므로 가나에서는 다양한 방언을 포함하는 아칸어를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다.
대서양 노예 무역 당시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간 흑인 중 10퍼센트가 아칸인이었다. 또 서부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가 프랑스어권인 반면 가나는 영어를 사용하고 연구 환경이 안정적으로 조성되어있어 아칸어는 미국의 주요 대학에서도 연구되며 아프리카 언어 연구자들에게도 주요한 언어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위키피디아 영어 항목이 580만 건인데 반해 아칸어는 648건에 불과하며 개설된 항목도 몇 줄 되지 않는다.
이에 2019년 4월 가나 몇몇 젊은이들이 가나 사람들이 인터넷과 정보에 더 잘 접근할 수 있도록 위키피디아 항목들을 아칸어로 번역하는 데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 독일의 웹 기반 언론사 <DW>에 의해 보도되었다.
이렇게 하나로 아우러지는 아칸인의 문화는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널리 발견된다. 우선 이 지역에 아칸어의 영향을 받은 언어가 많이 사용되며 아칸어 이름과 민화 그리고독특한 주조 예술 등도 제작되어 향유하고 있다. - P60

에웨인, 에웨어
에웨인은 가나에 가장 많이 살고 그 다음으로 토고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에웨인의 거주지는 국경 형성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를 증명하듯 많은 에웨인이 토고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볼타강동쪽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의 지명 대부분이 에웨어에서 비롯되었는데 볼타주의 주도인 호가 대표적이다. 호는 씨족 이름이라는 설, 마른 풀 더미라는 뜻을 가졌다는 설 그리고 짐을 들고 이사하는 사람이라는 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마지막 설이 가장 끌린다. 왜냐하면에웨인의 이주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토고의 놋세Note 지역에서 유래한 에웨인은 요루바인이 베냉과 토고 지역으로 팽창하면서 좀 더 서쪽 지역인 가나의 호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들이 정착한 볼타주의 또 다른 도시 호회도 에웨어로 ‘내가 이 땅을 가졌다‘라는 뜻이다.
에웨인은 독립적이고 집단 정체성이 부족해 중앙 집권적인정치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고 가족은 부계 혈통의 전통하에 유지된다.
에웨인을 포함한 서부 아프리카의 몇몇 민족을 이야기할 때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두교‘라는 종교이다. 부두 Veedoe는 폰어, 어웨어 등의 서부 아프리카 언어로 ‘영홍‘을 뜻하며 정령 신앙적인 요소를 가진 토착 종교이다. - P61

무늬개오지조개
세디는 아칸어로 ‘무늬개오지조개‘를 뜻한다. 개오지조개는 기원전16~15세기 중국 은나라에서도 화폐로 사용될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는데 오늘날 화폐와 관련된 한자에 ‘조개 패(貝)‘자가 쓰이는 이유도 이와 관련 있다.
이외에도 이라크의 선사 시대 유적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이 조개가 많이 발견되었다.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약 8세기부터 화폐 기능을 한 무늬개오지조개가 조형성과 주술적 상징성 등의 이유로 각종 장식품, 장신구에 많이 활용되었다. - P88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경은 대부분 1884년 개최된 ‘베를린-서아프리카회담‘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국경은 지리적 특성이나 민족 구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각 지역마다 국경과 상관없이 공유되는 민족적 정체성과 문화가 존재한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도 이러한 특징으로 정치·경제적인 협력과 공동 번영을 위한 움직임이 20세기 중반부터 생겨났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서부 아프리카 지역 프랑스어권 나라들의 단일 통화인 CFA 프랑이었다. 이후 1964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윌리엄 튜브만william Tubman이 서아프리카경제연합결정을 제안해 1970년대에 실현되었다. 1972년부터 나이지리아와 토고 대통령이 이 지역을 순회하며 초안을 작성했다. 이것은 1975년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를 탄생시킨 라고스 조약의 기초가 되었다. - P94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에는 가나를 포함해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니제르, 라이베리아, 말리, 베냉, 부르키나파소,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가 가입되어있으며 본부는 나이지리아의 아부자에 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는 입법, 사법, 행정부서로 구성되어 운영되며 세 조직은 15개국의 수장 중 선출된 자가 이끈다.
가나에서는 1994~1996년까지 제리 존 롤링스(erry John Racolings대통령이, 2003~2005년까지 존 쿠포르Join Kofi Agyekum Kiufuor 대통령이, 2014~2015년까지 존 마하마 Horn Mahama 대통령이 의장을 맡았다. - P95

2019년의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나라는 터키, 파키스탄, 우간다, 독일, 수단, 이란, 레바논,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등이고, 상위 25개국으로 범위를 넓히면 위의 아프리카 세 나라 외에도 콩고민주공화국 차드, 케냐, 카메룬 등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10개국이 포함되어있다. 게다가전 세계 150개 가까운 난민 캠프 중 3분의 2가 아프리카 지역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현실이 이런데도 난민 문제가 비교적 최근에서야 국제적인 이슈가 된 것은 이들이 서방 세계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도 손꼽히는 평화로운 나라인 가나에도1만 3,000명이 넘는 난민들이 살아가도 있다. - P102

원래 난민 캠프란 난민의 원인이 된 상황이 종료되면 즉시 그곳을 떠난다는 전제하에 ‘최소한의 필요‘에 맞추어 환경이 갖추어진 곳인데 유엔난민기구의 2015년 말 통계에 의하면 2,100만명이 넘는 난민이 평균 26년을 그런 환경에서 머문다고 한다.
26년이면 평균 수명이 60년이 채 되지 않는 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기간이다. - P103

부두부람 난민 캠프에 라이베리아 난민이 유입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라이베리아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초반 노예 노동이 사회적으로 불필요해지자 미국에서는 노예 해방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해방 노예들을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돌려보내면서 서부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 나라를 만들어 실질적으로 식민 지배를 했다. 그 나라가 바로 라이베리아이다. 라이베리아의 국명은 ‘해방 Liberate‘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이 지역에 원래 거주하던 흑인들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의 사이에 위계질서가 생겨났고 선주민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권 쟁탈 끝에 1989년 아메리코 라이베리안 출신인 찰스 테일러 Charles McArthur Ghankay Taylor가 정권을 잡았다. 이후 라이베리아에서는 내전이 발발했고 분쟁은14년 간 지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30만 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2003년 내전은 끝났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돌아가지 못한 난민이 적정한 거주 환경이나 노동환경도 가지지 못한 채 20년 넘게 타국을 떠돌고 있다.
가나의 경우 난민은 가나의 노동 허가증을 받아야만 일을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8~10개월 정도 소요되고 ...... - P104

노예라는 명칭의 맥락이 달라진 것은 15세기부터이다. 포투갈이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면서 탐험가들은 기니만연안에서 무역에 적당한 다양한 물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현재의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 가나의 해안을그 지역에서 거래되는 물품의 이름을 따서 후추 해안, 상아 해안, 황금 해안으로 불렀다.
골드코스트, 즉 황금 해안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그들이가지고 온 여러 가지 물건과 금을 교환하려 했으나 골드코스트 현지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당시 현지 지배 계층은 거래 물품으로 사회의 피지배 계층을 형성할 노예를 요구했고 이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인접한 베냉, 나이지리아 해안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황금 해안의 현지인들과 거래했다. 그래서 베냉, 나이지리아 해안은 노예 해안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얼마 안 가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노예 무역의 수요가 줄어들자 포르투갈 상인들은 노예들을 본국으로 데려갔고 1550년경 인구 조사에서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인구 중 10퍼센트가 흑인 노예였다고 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닿게된 것은 꽤나 달콤한 물질과 관련 있는데 바로 설탕이다. 이달콤한 물질이 남긴 씁쓰레한 역사를 뒤밟아보자. - P110

1만 년 전부터 뉴기니섬에서 재배되기 시작해 인도로 전파된 사탕수수는 인도인에 의해 결정 형태의 설탕으로 정제되었다. 유럽인들은 6세기 알렉산더의 군대가 인도를 침략했을 때 이 달콤한 물질의 존재를 처음알았다. 그후 오랫동안 설탕은 유럽에 존재하지 않는 향신료였지만 8세기 무렵 지중해 인근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던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침략했을 때 다시 설탕이 유럽사에 등장했다. 설탕은 엄청나게 인기를 끌며 가격이 폭등했는데 육로로 이송되면서 붙은 각종 세금으로 은과 비슷한 가격의 거래품이 되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인은 이 비싼 물질을 직접 재배하려고 했다. 그리고 세네갈 앞바다에 있는 카보베르데섬에서 시작한 노동 집약적인 설탕 사업에 수많은 아프리카 본토의 노예를 투입했다.
이에 자극받은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건너온 각종 질병이 아메리카대륙에 유입되면서 내성을 가지지 못한 카리브해 연안 도서 국가 및 브라질 등의 인디오들이 사망하하였고 이는 곧 노동력의 부족을 가져왔다.
이에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를 공급받았는데 이를 ‘대서양 삼각 무역‘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물품이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의 노예가 대서양을 건너 사탕수수 농장(아메리카)으로, 그리고 설탕은 유럽으로 전달되는 체계였다. 엄청난 수익률을 자랑한 이 사업에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이 앞다투어 뛰어들었고 17~19세기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이 무역을 장악했다. - P111

대부분 아칸의 역사에서는 통일된 중앙 집권 국가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아샨티 제국만은 예외이다. 17세기 말부터 오세이 코피 투투Osei Kofi Tutu 와 조언자 오콤보 아노체 Okomfo Anokye가 현재의 가나 중부지역 쿠마시를 중심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했으며 1701년에 아샨티 제국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획득했다.
아샨티 제국은 사하라 사막 남서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앙집권적 나라 중 하나였으며 대서양 해안 무역을 통해 유럽인과 교류하기도 했다. 이 덕분에 아샨티 제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토착 문화권 중에서 유럽인에 의해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기록으로 남아있는 편이다. - P116

범아프리카주의와 콰메 은크루마
콰메 은크루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범아프리카주의 Pan-Africanism‘이다. 콰메 은크루마는 범아프리카주의의 핵심인 전 아프리카 대륙의 단결과 통합을 주장함으로써 국내뿐 아니라 국외, 특히 전 아프리카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 P135

가나가 독립하기 전인 1924년 태어난 에푸아 서덜랜드는극작가이자 작가이며 학자교육자, 아동 권익 운동가,
사회 운동가로서 70여 년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케이프코스트에서 태어나 가나와 영국에서 공부했고 가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57년 가나가 독립하던 해 그녀는 가나작가협회Ghana Society of Writers, 후에는 Ghana Association of Writers
를 조직했다. 가나의 전통과 현대 그리고 서양 문화를 접합시킨 그녀의 작품은 선집이나 잡지, 라디오 등으로 발표되었다.
그녀가 설립한 가나드라마스튜디오는 전체 아프리카 연극실무자들의 훈련장이 되었고 이후 가나대학교의 산하 기관이 되었다. 후학 양성에 힘쓴 그녀는 센트럴 지역에 ‘코지단Kodzidan‘이라고 부르는 전통 구전 개발을 위한 지역 공동체 극장을 세웠고 이는 극장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
에푸아 서덜랜드는 지역의 많은 예술가와 교류하고 영감을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아프리카 창작자들과도 교류했다. 특히 1958년에는 범아프리카주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위리엄 듀보이스를 만났고, 1980년 그의 사후에는 아크라 듀보이스 생가에 범아프리카주의 문화를 위한 듀보이스기념관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 P139

그렇다면 현대 가나의 주요 구성원인 아칸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전통을 전달해왔을까? 바로 ‘아딘크라‘라는 도안을 통해서이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문자이자 철학이기도 한 이 상징체계는 일상에서 다양한 물건, 특히 직물의 문양으로 현대 사회에서도 많이 쓰인다.
특히 아샨티 제국의 수도였던 쿠마시를 중심으로 아딘크라문양을 활용한 직물을 만들어내는 장인촌이 있다. 알파벳을 차용해 그들의 말을 표기하고 영어를 공식 언어오 지정해 사용하는 터라 이 상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은 약해지고 있지만 아딘크라 상징은 여전히 사회를 구성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 P155

문화적 상징성을 띤 켄테
켄테는 가나의 전통 직물로 정확히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다양한 색깔의 실로 짜서 만든 켄테는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형태의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켄테로 만든 옷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왕(추장)이나 왕족이 주로 입었으나 지금은 조금 더 일상화되었다. 대부분의 민족 집단이 켄테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나의 문화적 상징물 역할을 한다.
켄테의 문양은 격언이나 교훈 등을 포함하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종종 문자나 숫자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켄테를 구성하는 색깔 또한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 P162

가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것은 푸푸, 반쿠, 켄키이다.
이것들은 옥수수와 카사바, 암, 플렌틴 등을 빻아 찌거나 발효시킨 후 끓여서 만든 인절미와 비슷한 식감을 가진 음식인데각각 맛이 조금씩 다르다. 인절미와 가장 유사한 푸푸가 먹기무난한 반면 켄키는 단맛, 반쿠는 신맛을 가지고 있다. 조금씩다르긴 하지만 생선, 닭고기, 각종 소스, 수프와 함께 먹는다.
조리용 바나나인 ‘플랜틴‘은 음식을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이다. 가나에서는 플랜턴을 이용해서 푸푸를 만들기도 하고 굵게 썰어 삶거나 쪄서 콘토므레 수프와 먹거나 튀겨서 플랜틴칩이라는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 P158


‘얌‘은 고구마와 밤, 감자의 중간 맛을 내는 뿌리 식물인데 튀기거나 쪄서 생선, 고기 등을 곁들어 콘토므레 수프와 함께 먹는다. 가나에서는 찐 얌, 찐 플랜틴 등을 ‘암페시‘라고 부른다.
개인적으로 칼로리가 조금 낮고 건강한 음식을 찾을 때 ‘와채‘라는 음식을 먹곤 했는데 팥밥과 비슷하다. 와채는 스파게티나 볶은 카사바 가루인 가리, 생선 소스인 시토나 토마토소스 그리고 치킨이나 생선 등 메인 요리와 함께 먹는다.
‘졸로푸‘도 빼놓을 수 없는 주식이다. 각종 야채와 토마토소스를 넣고 기름에 튀기듯이 볶은 밥이라 엄청난 칼로리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맛있다.
주식과 곁들여 주로 먹는 메인 요리는 치킨이다.  - P169

진짜 가나초콜릿
한국에서 ‘가나‘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초콜릿일 것이다. 코트디부아르에 이어 가나는 세계 코코아 수출국2위의 위상을 차지한다. 한국의 한 제과 회사가 초콜릿 이름을
‘가나초콜릿‘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가나산 코코아는 질이 좋다." 이 회사는 가나산 코코아를 세상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10월 ‘가나에 근거지가 없는‘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가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가나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카카오 산업을 장려하고 관리하고 있다. 1947년에 코코아마케팅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979년에는 가나코코아위원회로 개칭되어 가나의 모든 코코아 생산및 유통, 마케팅 등을 관리하고 있다.
코코아 생산과 수출은 가나의 국내 총생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가나코코아위원회에 의하면 코코아 재배 인구는 약80만 명에 이르며 16개 주 중 9개 주가 관여되어있다. 2018년과 2019년 수치에 따르면 가나에서는 약 812톤의 코코아가 생산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 P172

황금의 나라, 아샨티 제국에서는 황금, 구리, 아연 등을 틀에 붓고 굳혀서 예술품으로 만드는 주조 예술이 발달했다. 특히 저울로 무게를 달 때 표준이 되는 추로 사용하는 분동 제품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태양에 대한 지상의 대응물로 간주되며 생명력 혹은 영혼의 물리적 표현이었다. 많은 금이 공물이나 전쟁을 통해 강성했던 아샨티 제국으로 유입되었으므로 아칸인들은 계속해서 독특한 형태의 분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칸어로 라무Mrammon (영어로는 goldweights)라고 부르는 분동은 1400년경 즈음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1400~1600년대)에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중기 (1600~1700년대)에는 사람, 동물, 전통 문양으로 제조되었고, 후기 (1700~1900년대)에는 동작이나 의상 ㄷ.ㅇ이 세밀해진 기물들이 등장했다. - P178

장례와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고인을 안장하는 관의 모양이다. 가나 사람들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직육면체모양이 아닌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것, 갖고 싶어 했던 것 혹은 직업과 관련된 것, 토템 신앙과 관련된 동물 등 다양한 모양으로 관을 짠다. 이 풍습은 아타 오코Atan Oko, 세쓰 카네 퀘이Seth Kane Kwei 등 장인들이 선구적으로 시작해 1950년 가 사람들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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