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응규는 민간을 찾아다니면서 굿과 연희를 해주고, 아울러 전복 따위로 재물을 편취하는자가 틀림없다. 한마디로 영락없는 무당이다.
채용규와 같은 인간은 당시 사회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채응규가 살던 조선 전기에는 무당(때로는 승려)이 점복이나 여타 술수로 민중을 속이고 재물을 편취했던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해를 돕기위해 유사한 사례 몇몇을 검토해보자.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당이 자신을 신적 존재라고 말하고 대중을 현혹하여 재물을 편취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382년 고성의 백성 이금과 사노 무적은 미륵불로 자칭하여 백성들에게 재물을 편취했고, 합주의 어떤 사노 역시 검대장군이라 자칭하다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자신에게 귀신이 내렸다고 하는 것도 흔한 수법이었는데, 그중에는 중국 황제의 신이 내렸다면서그 신의 능력으로 인간의 운명과 화복을 맞히거나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예외 없이 어설픈 사기극이었으나 민중은 그것을 믿었다. 예컨대 과거 참형을 당한 장수와 재상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그것을 나무 장대에 매달고 ‘두박신‘이라 일컫자, 동네마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것에 놀란 백성들이 다투어 종이와 포를 내어 제사를 지낸 사건도 있었다." 거울을 달아놓고 그 안에 신이 있다면서 사람을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국가는 무당과승려가 주동이 된 사기성이 짙은 종교행사를 금지하려 하였다.
- P48

무속은 민중에게 하나의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다. 그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으로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사족체제 모두가 교체를 적극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사족사회 내에서는 유교(성리학)가 불교와 무속을 대체해 나갔지만, 민중과 여성은여전히 무속과 불교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여전히 무속을 신봉하는 남성-사족도 남아 있었다.
《실록> 등의 광범위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무풍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중과 여성은 물론 때로는 사족-남성들까지 재산을 헌납하는 등 샤머니즘에 깊이 빠져 있었다." 조선 정부는 무당과 사- 굿을 억제하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지만, 그것의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자료는 1431년(세종 13)의 것인데, 40년뒤인 1471년(성종 2) 대사헌 한치형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무풍의 성행을 비판했다.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