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지 않았나요? "마고가 씁쓸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지나간 세월 동안 그녀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것은 한사람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프랜시스 매컴버의 짧았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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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문학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하는데, 윌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그렇다. 월리스는 이를 "디폴트 세팅(default setting)", 즉 ‘초기설정‘ 이라고 부른다. 컴퓨터가그렇듯이 인간에게도 초기설정이라는 것이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자신이라는 렌즈로 만물을 보며 해석하도록 되어 있는 경향"이 그것.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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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에 대한 사랑" 이라는 말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으되, 니체로부터 몇 걸음 걸어 나와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알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그럴 때 나의 비판 또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태도와 연결돼 있다.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적을 사랑하면서 고귀해질 것인가,  적을 조롱하면서 공허해질 것인가. 수많은 매체가 생겨나고 수많은 비판들이 쏟아진다. 좋은 비판과 나쁜 비판이 있다. 전자는 어려워서 드물고 후자는 쉬워서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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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온전해진다. 다만 그것은 위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운명적 짝을 다시 만나 이뤄지는 기적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로 인해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상호 배려로 성취되는 일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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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비판‘과 ‘풍자‘와 ‘조롱‘은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비판은 어떤 논리에 대항 논리로 반박하는로서 나머지 둘과 명백히 다르다. 그러나 풍자와 조롱은 둘다 
웃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자주 혼동된다. 이 둘을 구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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