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과 사회 -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09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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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스코틀랜드 계몽운동과 근대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낳은 지적 기반은 이 지역의 대학제도에서 마련되었다. 16,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교회 자체의 개혁에서 더 나아가 대학교육을 통해 지역 젊은이들이 영적 갱신과 함께 새로운 지식과 도덕을 고양하기를 소망했다. 18세기에 에든버러대학, 글래스고대학, 애버딘대학, 세인트앤드루스대학의 명성은 전 유럽에까지 널리 퍼졌다. 다른 한편,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성취는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산업화 초기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변화의 진원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중심'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변화는 대체로 중심보다는 변두리에서 오히려 더 빨리 발견되고 또 더 분명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스미스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관점에서 국민경제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나, 퍼거슨이 시민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산업사회의 변화를 인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19)


"또한 18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문화적 성취는 정치적 종속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대(大)브리튼의 문화 창달자임을 자부하는 이중적 의식구조를 보여준다. 아마도 현실 정치에서 잉글랜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초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화두는 근대사회 형성과 근대사회에서 인간 삶의 변화였다. 이들이야말로 '근대성' 문제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지식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퍼거슨과 스미스가 보기에, 근대 상업사회란 시장의 위력에 인간의 삶이 그대로 노출된 사회였다. 인간과 시장의 관계, 원시사회에서 상업사회까지 이르는 사회 진보의 역사와 같은 문제야말로 이들이 눈여겨본 핵심 주제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대학에서 강의한 '도덕철학'은 상업사회 아래서 인간의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질문을 위한 성찰의 주 무대였다."(20-1)


제1장 에든버러, 18세기의 풍경


제2장 종교와 대학


"존 녹스는 일찍이 스코틀랜드 버윅에서 성공적으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설교자로 이름을 떨쳤다. 1550년대에 종교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망명했다가 1559년 귀국했다. 망명 시절 독일, 프랑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들과 교류하면서 장 칼뱅의 신학에 경도된 그는 에든버러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었다. 녹스와 그의 동료들은 장로교회를 사실상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들었다. 가톨릭은 짧은 시일 안에 소수 종파로 전락했으며 이제 칼뱅주의자들 사이에 교회조직을 둘러싸고 장로파와 주교파가 서로 대립했다." "17세기 중앙권력의 부재라는 특이한 상황 때문에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그 권력을 대신하는 정치적·사회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즉 교구의 개별 교회에서 전국 차원의 총회까지 교회는 위계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 조직체계가 교육과 구빈 행정을 맡으면서, 장로교회가 중앙권력이 없는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정치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60-1)


# 주교파(감독파) : 칼뱅주의 교리는 수용하되, 교회조직에 관해서는 가톨릭의 주교 제도를 따르는 영국국교회의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종파를 말한다.


"18세기에 들어와 스코틀랜드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장로교의 엄격한 교리와 생활윤리를 시대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시 장로교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로부터 '중도파'라고 불린 이 일단의 목회자들은 광신과 지나친 종교적 열광을 멀리하면서, 합리적인 사상과 풍조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정치적으로는 휘그파 정부에 협조관계를 유지했으며 사회적으로는 '영국화'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중도파는 당시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새로운 사상과 고급문화를 통해 교회를 성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의 표준적 교리와 의식은 그대로 따랐지만, 그 대신에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고 신학상의 논쟁은 가능하면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문필가로서의 활동에 관심을 갖거나 또는 문필가들을 존중했다. 아울러 현실생활에서 도덕과 윤리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종교생활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66-7)


"(세속화의 문제에 전향적으로 접근한) 중도파 목회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종교와 사회의 화합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종교는 인간의 사회적 조건과 그 통치에 필수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교회와 사회의 불가분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사회를 위한 교회의 역할을 더 중시했다." "윌리엄 로버트슨, 휴 블레어를 비롯한 중도파 인사들은 세련되고 계몽된 가치, 종교적 중도와 관용, 과학 및 문학 분야의 성취 등을 존중했는데, 이는 바로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기본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일상생활에 대한 간섭을 포기했다. 이는 교회가 종래 장로교회의 전통을 넘어서 세속생활의 자율권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젊은 목회자들은 세계가 설교와 신의 징벌 때문이 아니라 일반 사회의 지적 진보 때문에 나아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종교와 계몽운동이 서로 수렴된 것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 교회와 계몽운동을 분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75-6)


제3장 정치에서 문화로


"스코틀랜드 내에 브리튼 정체성 형성을 가속시킨 것은 18세기 프랑스와 벌인 일련의 전쟁과 미국독립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이 프랑스의 가톨릭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종교적 관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일깨우는 힘이자 자신들의 자유 및 부의 원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더 강렬했다. 또한 가톨릭 프랑스와의 대립은 제국의 문제와 관련된다. 영국의 식민지무역이 활발해질수록 유럽에서 무역적자를 해속하고 경제적 활력을 배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독립전쟁도 종교적 대립구도는 아니었지만,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고, 왕정주의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백인정착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 지배계급의 통합을 이루고 통합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110-2)


"1745년의 사건─재커바이트 세력이 스코틀랜드 고지대 사람들과 연합하여 스코틀랜드를 점령한 사건─은  스코틀랜드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에게 두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그들이 보기에 시대착오적인 재커바이트 운동은 오히려 문명화에 대한 당위성을 더욱더 강화시켜주었다. 존 흄과 윌리엄 로버트슨은 문명화과정이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문명화는 '영국화'와 거의 같은 의미다. 문명화 역사의 근저에는 강력한 주권국가의 형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1707년의 합병은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다. 둘째, 재커바이트 운동의 실패는 종교적으로는 가톨릭뿐 아니라 주교파와 장로교회 기존 교권주의자들 모두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 사건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갱신이 이제 시대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과정에 적극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목회자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이 바로 신이 부여한 섭리였다."(122)


# 재커바이트(Jacobite) 운동 : 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제임스 2세와 그 직계 후손을 복위시키려는 일련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이 단순히 스코틀랜드 정체성을 넘어서 '영국화'를 대안으로만 삼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1745~46년 사건의 비극적 종말은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스코틀랜드 정체성을 다시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수천여 희생자가 발생하고 다수 스코틀랜드인들이 패퇴한 그 사건에서 스코틀랜드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은 그 비극을 다른 형태로 승화해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정치적으로 대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영국과 영국문명이 바람직하고 뒤따를 만한 이미지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그 문명은 물질적 진보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바탕을 이루어야 할 도덕과 새로운 가치체계 및 문화를 갖추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잉글랜드의 문명화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오히려 그 문명을 한 차원 더 높게 고양하겠다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122-3)


제4장 중심과 주변


"16~17세기 유럽인의 대양 진출이 활발해지고 그 결과로 유럽 경제권이 확대되었을 때 영국만이 아니라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여러 유럽 나라들이 해외무역을 주도해나갔다. 여기에서 영국이 다른 나라와 달랐던 점은 이 나라만이 신대륙 무역과 동방 무역을 적절하게 서로 연결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에스파냐는 주로 신대륙 무역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인도 및 동아시아를 포함하는 동방 무역에 집중했다. 오직 영국만이 두 무역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있었다." "대니얼 디포는 당대의 세계사적 시각에서 영국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무역 네트워크를 제안한다. 아메리카 식민지 및 카리브 해 연안을 영국의 시장 확대를 위한 텃밭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이미 디포의 시대에 출현했다. 디포가 보기에, 두 무역 네트워크의 연결은 단순히 중개무역과 상품시장의 확대로 끝나지 않고, 영국의 재정과 국부 문제를 직간접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128-31)


# 대니얼 디포 : 『로빈슨 크루소』(1719~22)와 『몰 플랜더스』(1722)로 유명한 소설가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그리스 고전철학 전통의 일부를 이어받아 덕의 완성에서 행복을 찾고, 완전한 행복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의 고통과 천국의 보상을 연결함으로써 행복의 내용에 세속적 요소를 포함시켰다." "잉글랜드에서 행복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시대의 일이었다.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상상력은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더 소망하는 태도를 낳았다. 르네상스시대 유토피아 사상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그들이 유토피아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실의 시간적·공간적 연장선에서 자신들의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현세는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니며 따라서 지상의 삶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종교개혁가 특히 칼뱅주의자들의 의도는 이처럼 현세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려는 데 있었다."(156-7)


"18세기 행복론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존 로크의 저술이다. 그는 내란기에 크롬웰을 지지했으나, 정통 칼뱅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인간오성론』(1689)에서 제시한 메타포 '백지장(tabula rasa)'은 원죄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인간의 정신이란 원죄와 관련이 없이 기쁨과 고통의 지각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로크는 이 책 제2권에서 '행복의 추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낙하하는 돌이나 큐로 맞힌 당구공과 마찬가지로 자기 삶의 공간을 뚫고 앞으로 나가나는 추진체다. 로크는 그 추진력을 행복에의 열망에서 찾는다. 행복의 열망이 고통과 기쁨을 중력처럼 밀고 당기는 작용을 한다. 〈우리 안의 기쁨이 윌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우리 안의 고통은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완전한 행복이란 결국 인간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지고의 기쁨과 동의어가 된다. 로크는 인간이 이성의 인도를 받아 행복을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157-9)


"그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역사가들이 '감성적 개인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삶의 태도의 출현이었다." "이런 풍조를 선도한 집단은 지식인 외에 아무래도 해외무역과 상업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상인들이었다. 물론 개인주의와 자유로운 일탈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히 강했다. 개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과 로마, 이 모두는 급기야 멸망으로 이르지 않았는가. 계몽주의시대 영국 지식인들은 〈자아해방과 쾌락 추구〉가 〈도덕적 폐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음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명예혁명이야말로 군주의 전제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받은 정치적 기제이며, 시장경제 또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조화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 인간의 본질이 기쁨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는 기계적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161-2)


"잉글랜드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비하면,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정체되고 후진적인 사회였지만 합병 이후에 드디어 수 세기 동안 계속된 만성적 빈곤과 후진성에서 벗어날 호기를 맞았다." "그러나 에든버러를 비롯한 동부 저지대는 글래스고의 상황과 상당히 달랐다. 이 지역에서는 대외무역과 상공업의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적었다. 결국, 합병의 혜택은 서부지역에 돌아간 셈이었다." "이와 같이 에든버러는, 중앙정치권력은 실종된 도시였지만, 최고법원과 전통 있는 교회들이 있고 에든버러대학의 평판이 갈수록 높아졌기 때문에 합병 이후에 전문가집단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18세기 중엽 법률가 수는 같은 세기 초보다 2배 늘었고,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하지 못한 채 영지에서 농업 개량에 몰두했던 지주들도 농한기를 비롯해 수시로 에든버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회자, 법률가, 교수 등 전문가집단이 계몽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직접 문필 활동을 하거나 문필가 주위를 에워싼 독서층 또는 청중을 형성했다."(170-2)


"오늘날 중심과 주변은 경제적 맥락에서, 그리고 중심부 시각에서 주로 인식된다. 주변부에서 보면 중심은 언제나 따라잡기의 무대이자 대상이지만 중심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부여되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성취는 이런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했다. 그것은 도덕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후일의 경제학과 사회학이었다. 이들 학문은 유럽사의 근대 국면, 그리고 산업혁명 직전까지 유럽 지식인과 정부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개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에게 잉글랜드의 변화는 곧 미래에 나타날 보편적 변화였다. 그들은 잉글랜드의 정부, 사회, 과학, 여론에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의 원형을 발견했다. 이를 포착하고 관찰함으로써 상업(산업)사회의 본질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가설과 검증이라는 뉴턴의 방식이 사회 관찰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175-6)


제5장 문필공화국: 명사회에서 사변협회까지


"명사회나 사변협회 같은 모임은 일종의 담론공동체였는데, 1750년대 이후 활발하게 결성되었다. 이는 이전에 지연과 학연 또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계망을 통해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던 지식인들의 토론문화가 좀 더 공식적이고 정기적인 활동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시기의 토론문화와 담론공동체는 계몽운동의 산물이자 동시에 계몽운동을 낳은 바탕이기도 했다. 저명한 문필가뿐만 아니라, 직접 문필 활동을 펼치지 않더라도 지식과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목사·교수·의사·변호사 등 에든버러 식자층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러한 정규모임은 엄격한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폐쇄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모임은 자주 공개토론이나 공개강연을 개최했다. 공개토론과 공개강연은 에든버러 시민 누구나 방청할 수 있었다. 계몽운동이 문필가와 그 주위를 둘러싼 독자층의 상호 관계망을 통해 전개된다고 한다면, 18세기 중엽 에든버러야말로 그 전형적인 공간, 즉 '문필공화국'이었다."(182-3)


"명사회(Select Society)는 계몽운동기 에든버러의 가장 대표적인 담론공동체였다. 이 모임이 결성된 계기는 종교 갈등이었다. 1753년 조지 앤더슨이라는 교구학교 목사가 데이비드 흄과 또 다른 저명한 법조인 헨리 흄을 비난하는 팸플릿을 발간했다. 이 책자에서 그는 이들 〈무신론자들을 신성한 일에서 자신과의 교류와 동료관계뿐 아니라 다른 주제에 관한 긴요하지 않은 모든 대화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전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로버트슨과 블레어 등 중도파 젊은 목사들은 이러한 비난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세속 지식인들과 정기적인 교류를 활성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명사회는 이를 계기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명사회는 10여 년간 에든버러 지식인운동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애덤 스미스나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외지인이 이 무렵에 에든버러에 매료당한 것도 이 도시에 자리 잡은 '학자와 사상가들의 공동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사회는 10여 년이 지난 후 점차 활력을 잃었다."(193-7)


"포커 클럽(Poker Club)은 1757년 명사회 회원 일부가 시민군법 조항을 심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진 데서 유래했다. 이들은 민주적인 시민군이 국가의 존엄에 필수적이라는 인식 아래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퍼거슨에 따르면, 상업은 시민의 덕목과 '사회적 정신'의 쇠퇴를 가져온다. 이는 전쟁술을 전문기술로 만들어 시민의 삶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전문화된 전쟁술은 결국 참여적 덕목을 위협할뿐 아니라, 그 전문화를 사회정신의 중심에까지 확대시킨다. 결국 시민적 덕목의 쇠퇴를 막을 치유책은 고대적 자유의 토대를 되살리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시민군의 전통이 그것이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상업사회에서 정치적 열정의 쇠퇴를 우려하면서도, 시민군제도가 전 시대의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에게 훈련, 복종, 용기 등의 덕목은 당대에 절실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스미스도 포커 클럽의 회원이었지만, 그의 시민군에 대한 견해는 분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과 맥락이 같다."(198-201)


"사변협회(Speculative Society)는 일단의 박식한 문필가와 전문직업인,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들이 다수 참여한 단체였다. 프랑스 계몽운동에서 상당수가 회의주의자였던 것과 달리, 사변협회는 인간·사회·세계에 관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반종교적 성향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는 목회자들의 협회 참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회원들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지식인 문화가 굳건한 도덕적·종교적 토대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윌리엄 로버트슨은 〈기독교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우리의 행동을 품위 있게 만든다〉고 말했다. 휴 블레어 또한 〈종교가 인류를 문명화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근대성과 기독교의 밀접한 관련을 믿었고 또 그렇게 설파했다. 개신교 전통이 강한 에든버러 사회에서 사변협회가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에든버러가 지적 활력을 점차 잃어갔음에도 사변협회는 여전히 토론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다."(206)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전형적인 사례다. 사전 편찬자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함으로써 '대브리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백과사전의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문학, 예술, 사회과학, 생물학, 의학, 화학, 지질학 등 여러 학문분야를 일련의 조직화된 학문체계로 바꿔 후대에 전수하려는 열망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지식체계를 당대의 젊은이와 후대에 전하는 교육적 사명을 중시했다. 강의와 설교와 문필을 통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의 지적 생활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 백과사전의 편집자들 또한 처음부터 이 같은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했다." "백과사전은 어느덧 영국문화를 대변하는 상징물, 즉 영국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백과사전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221-5)


제6장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계몽운동기 스코틀랜드 지식인과 문필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배경은 공적 토론의 자유다. 이런 면에서 특히 에든버러의 문필가들은 동시대 어느 나라 지식인 못지않게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문필가들은 대체로 칼뱅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 자라났다. 그들은 인간 자신과 인간 사회의 불완전성을 당연시했다. 계몽지식인들은 인간의 본성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기애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과 동감을 통해 소통하고 연대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이 인간의 내면과 본성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시선은 바로 상업사회에서 살고 활동하는 독립적인 개인을 향해 있었다. 이들은 공동체와 집단에 매몰된 존재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주체로서 활동하는 그 개인의 내면과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높임으로써 상업사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229-30)


프랜시스 허치슨은 섀프츠베리, 존 로크, 토머스 홉스 등 17세기 잉글랜드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로크에게서 인간은 '생득관념'이 없으면 오직 경험으로부터 관념을 형성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 허치슨은 홉스의 사회관을 수용하고 있다. …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다. 허치슨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제어와 통제 없이는 자기 헌신과 희생을 할 수 없다. 허치슨은 이러한 기능을 국가만이 아니라 도덕률도 갖는다고 본다. 도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회적 형성물이다. 허치슨은 도덕성의 근거를 '도덕감각'에서 찾는다. 이는 말하자마녀, 오감 이외의 다른 감각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직감적으로 선한 행위를 선으로 인식하는 도덕감각을 지녔으며, 이에 힘입어 사회의 질서와 조화가 가능한 것이다. 허치슨이 보기에, 도덕감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자기애(self-love)와 다른 사람에 대한 자혜심(benevolence)이었다. 230-2)


문필가들은 '세련'으로 나아가는 진보 혹은 발전에 내포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소망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생활의 상업화를 뒤따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사치, 사익 추구, 도덕적 해이, 시민적 덕목의 쇠락 등이 그런 위험에 해당했다. 정치경제학을 수립하면서, 사회이론가들은 새로운 경제에 지배되는 사회에서 도덕적 행동의 문제를 설파했다. 흄과 스미스는 시급한 경제 발전과 필수적인 사회윤리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고 사회적 삶의 전 부문을 포함하는 이론을 세웠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에게 시급한 것은 〈옛 윤리와 새로운 경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들은 오늘날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 분야, 이를테면 인류학·사회학·심리학·경제학·역사학 등의 진정한 창조자였다. 이들 학문이 분화되기 전에 전체를 포괄하는 탐구 분야를 당대 사람들은 '도덕철학'이라 불렀다. 236-7)


당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도덕철학'을 원래 어의(語義)와 다르게 사용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철학 일반에 해당하며, 그 말 자체가 철학의 인식론을 탐구하는 '자연철학'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는 인간과 자연은 서로 분리된 존재로 이해된다. 자연은 인간이라는 인식 주체의 인식대상, 즉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이 동일하다는 인식이 영국의 지적 전통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인간본성(human nature)'이라는 영어식 표현도 그것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존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결국 도덕철학은 사회현상을 일으키는 소수의 일반원리를 밝혀내고 그 원리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학문이다. 스미스가 도덕철학을 과학이라 부른 것은 이런 의미다. 과학적 탐구로 그 원리를 밝히는 것이 도덕철학의 과제였다. 238-9)


흄은 다른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홉스와 허치슨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 그는 『인성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감(sympathy)'을 사회 성립의 또 다른 토대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바로 동감(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을 넘어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인간의 이성은 수학과 같은 학문과 지식세계에서나 엄밀하게 작용한다. 사회에서 합리적이라고 불리는 것도 관행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합리성에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승인과 부인의 문제이고, 이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직접 연결된 것이다. 자명한 도덕원칙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이성의 작용보다는 감성, 흄의 표현으로는 정념의 결과다. 242-3)


스미스는 인간의 이타적인 감정 가운데 '자혜'를 특히 중시한 허치슨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 관련된 개인의 다양한 감정을 탐색한다. 연민과 동정 같은 감정 외에도 동류의식(fellow-feeling), 동감, 단정함(politeness), 관용(generosity) 등의 감정은 다른 사람과 적극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반면에 증오나 분개 같은 비사회적 감정도 있다. 여기에서 스미스는 개인이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까지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동류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다른 사람이 직면한 상황을 연상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을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즉 자신과 상대방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 행위자와 관찰자 사이의 동감을 얻기 위한 성찰, 상호노력이라는 경험의 축적과정에서 인간 행위의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 즉 도덕의 판단기준이 성립된다는 것이 스미스의 결론이다. 248-52)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수준에 맞추려고 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에는 제각기 그와 같은 '공정한 관찰자'의 상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공정한 관찰자를 마음에 간직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감정과 행위가 그 상상 속 관찰자의 수준에 맞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 마음속의 공정한 관찰자를 가정할 경우, 인간은 대부분 그 공정한 관찰자가 부정하는 행위를 피하고 인정하는 행위를 적극 실행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된다. 스미스에 따르면, 관찰자가 부정하는 것을 회피하는 규칙이 정의이고, 인정하는 것을 적극 행하는 규칙이 자혜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바로 이들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며 이것이 바로 의무감, 곧 '도덕감'이다. 스미스에게는 이 의무감(도덕감)이야말로 사회 형성과 존립의 토대가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252-3)


제7장 사회와 역사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강조하면서도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합리적 존재임을 인정했지만 사회성을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사회계약론이 가설과 추측에 의존할 뿐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경험적으로도 그러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퍼거슨이 생각하기에, 홉스와 같은 이론가들은 사실(fact)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일반원리를 수립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설(hypothesis), 추측(conjecture), 상상(imagination), 운문(poetry)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데이비드 흄 또한 계약에서 비롯된 정부는 〈이 세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역사적으로나 또는 경험적으로 정당화된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사회의 기원에 대한 계약론적 설명이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면, 정부의 정당성이 개인의 동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258-60)


"애덤 퍼거슨은 근대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로 개인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더 넓은 장이 마련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상업사회는 개인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개인의 창발성이 높아지고 인간의 개성 또한 극대화된다. 이와 같이 상업사회는 진보, 개인의 자유, 정치적 안정, 법의 지배 등을 가져왔지만, 아울러 개인들이 무가치하고 비인간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낳아 시민적 덕목이 약화되었다. 근대사회는 오히려 개인이 전통적 덕목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이익만 쫓도록 만든다. 근대사회의 위협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열정이 정치적 열정, 즉 시민적 덕목을 앞지르기 시작할 때 비롯한다." "역설적으로, 정치적 열정의 쇠퇴는 시민사회 안에서 평화의 시기가 오래 지속되는 시기에 주로 볼 수 있다. 상업은 개성을 고양하고 시민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지만, 시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적 전통을 무너뜨린다. 근대 상업은 바로 이런 경향을 가속시킨 것이다."(275-6)


# 퍼거슨의 해결책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협약〉, 곧 법을 통해서 이기심을 제어하고 일탈을 방지하는 것이다.


"퍼거슨은 상업사회의 진보와 경제성장을 이끈 분업의 이중적 특징에 주목한다." "퍼거슨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직업의 분리가 〈기술적 개량〉을 약속하고 실제로 모든 기술적 생산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적으로 〈사회집단들〉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상업사회에서 정치적 열정을 생산적 열정이 대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많은 기계적 기술들은 어떤 탁월한 능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감정과 이성을 완전히 억압한 상태 아래서 최상의 결과를 얻는다. 무지는 미신만이 아니라 제조업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 따라서 제조업은 정신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상상력의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작업장이 각 부분을 인간으로 채워 넣은 어떤 동력기관으로 여겨지는 그런 곳에서 가장 번영한다.〉" "스미스는 맨더빌과 마찬가지로 분업의 사회적 기여에 좀 더 비중을 둔 반면, 퍼거슨은 인간 및 인간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결과들을 깊이 성찰했다."(278-80)


"데이비드 흄은 『잉글랜드의 역사』(1754~1762)를 집필해 당대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책은 영국인의 자유의 발전에 관한 서사로 알려졌다. 여기에서 영국인의 자유는 예절, 교양, 사교, 법과 재산에 대한 존중 등을 의미하며, 이러한 자유의 발전은 영국의 상업, 기술, 과학의 발전과 동일한 궤도를 그리며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흄은 단순히 자유의 발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상업과 무역을 진흥시키며 기예와 과학을 장려한 근대적 정부와 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문명화 및 문명 개념의 확산을 중시함과 동시에, 폭력과 국제질서를 독점한 국가의 발전에 주목한다. 흄은 영국 상업사회의 발전을 국가주권의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18세기 영국 문명의 성취, 이를테면 입헌군주정, 시장의 지배, 국제무역의 헤게모니, 국민적 자유의 신장 등을 잉글랜드의 발전과정을 넘어 근대 유럽인이 지향해야 할 '근대성'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286-9)


"윌리엄 로버트슨의 역사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를 5세 시대사』(1769)다." "15세기 유럽 여러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을 봉건제도의 급속한 쇠퇴다. 이는 군주권의 강화 및 상비군의 확대와 표리관계를 이룬다. 로버트슨은 이 시기에 〈유럽 체제에 속해 있는 모든 국가들 사이에 적절한 권력 배분〉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근대체제의 변화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종교적 관용 및 가톨릭 쇠퇴와 더불어 급속하게 전개된다. 이것이야말로 유럽에서 국제적 세력균형의 중심축이었다." "브루스 버컨에 따르면, 로버트슨의 역사서술은 데이비드 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경험, 귀족층의 몰락, 상업 발달, 관용과 예절의 확산, 국가 주권의 확대 등을 문명화과정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결합되었는가를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와 함께 국제적 세력균형 또한 중요한 변수의 하나다. 세력균형이야말로 유럽 문명화과정의 추진 궤도라는 것이다."(289-90)


"퍼거슨은 진보가 인류의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였지만, 그 추동력을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특히 사유재산제도의 대두, 발전 및 변화를 중시했다. 즉 사회 형태의 발전은 사적 소유의 구조와 발전에 크게 힘입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퍼거슨의 계급갈등론은 사회 진보의 동력 가운데 하나를 찾는 선에서 멈춰 있다. 퍼거슨과 마르크스 사회이론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퍼거슨은 단지 소유관계가 변화하는 방식과 발전단계를 관련짓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특정 유형의 경제활동을 기준으로 발전단계를 제시하는 스미스의 방식을 비판한다. 그 대신에 퍼거슨은 사유재산제도를 중심으로 이 제도가 없는 시대, 제도가 나타나지만 법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시대, 사적 소유의 제도화를 이룩한 시대로 구분한다. 이들 시대는 각기 미개, 야만, 문명 단계에 상응할 것이다." "퍼거슨에게 문명은 진보를 뜻하고, 그 진보야말로 근대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298-9)


# 사회갈등은 '비의도적'으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


제8장 계몽과 근대성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계몽'에 관해 간결한 정의를 내린다. 〈계몽이란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미성숙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한 것은 이성 자체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없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계몽사상은 그 내용이 아니라 사유의 형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를 계몽하려는 의도보다는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계몽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상정할 수 있다. 계몽은 의지의 자유는 물론, 사회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칸트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공적 영역에서 토론의 자유와 인간 이성에의 의존이다."(305-8)


"'근대성'이란 근대라는 시대를 가리킨다기보다 그 시대에 형성된 삶의 양식, 문화형태 전반을 뜻하는 용어다. 근대성은 자율적, 주체적 인간(개인)과 세계에 대한 기술적 지배 욕망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또한 근대성은 기적과 불가사의와 신화의 세계를 제거하고 확실하고 실증적이며 경험적인 사실을 중시한다. 한편으로는 탈신화화 또는 신비주의로부터 해방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성/합리주의의 지배를 의미한다. 근대성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통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삶과 경험 모두가 역사적 시간의 맥락에서 재구성된다. 이러한 '시간의 역사화'는 궁극적으로 인류사에 대한 진보의 시각을 낳았다. 공간적으로는 자연의 해방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또는 기술 지배의 추세와 관련된다. 궁극적으로 근대성이란 근대적 인간, 즉 이성적 주체이자 욕망하는 주체인 개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층적 문화형태를 일컫는 개념이다."(311-2)


"인간의 자기이익과 동감, 이 두 성향은 '이기적 정념'과 '사회적 정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의 사회성과 사회적 연대 및 참여는 모두 이 사회적 정념─이를테면 관용, 인간다움, 친절, 우정, 존경─등의 작용에서 비롯한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은 이 두 성향의 공존이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개인이 집단과 공동체의 외피를 쓰고 있을 때에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기존의 도덕률, 집단 또는 공동체의 규제, 그리고 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제도와 관행에 의해 제약받았다. 개인이 집단의 규제에서 해방되기 시작하면서 자기이익의 추구 경향이 두드러졌고, 이는 곧 주체적 개인의 욕망을 끝없이 발산하는 과정과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헤겔은 시민사회의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을 시민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바라보았다. 욕망의 표출은 기본적으로 자기이익의 추구에 따른 결과다. 이와 대조적으로 퍼거슨은 욕구의 분출과 충족으로 이어지는 그 시대의 풍조에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317, 321)


제9장 계몽운동과 오리엔탈리즘


"백과사전의 '인도' 항목은 인도 자체에 관한 정보를 별로 제공하지 않는다. 인도의 역사도, 인도인의 생활과 관습도, 종교와 문화도 소개하지 않는다. 오직 고대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인의 인도 진출과 지배를 연대순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인도' 항목의 필자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유럽인의 인도 진출 역사의 중요한 과정이자 완결점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인도 지배의 필연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말하자면, 고대 이래 유럽인들은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뚜렷하고도 일관된 경향을 보여왔다. 무수한 민족과 국가들이 제각기 여건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았다. 중세시대에 이슬람 세력의 확대와 함께 그 움직임이 멈춰졌지만, 그것은 중세 후기에 되살아났다. 베네치아, 제노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에 뒤이어 인도 진출의 사명은 영국인의 손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인도' 항목의 필자에 따르면, 영국인은 그 사명을 완수하였고 이는 오랜 역사 과정의 마침표를 뜻하는 것이다."(352-3)


제10장 지적 전통의 마지막 세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은 민족감정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문필가들은 사거하거나 또는 문필 활동을 중지했다. 19세기 브리튼 문화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토머스 칼라일, 월터 스콧, 프랜시스 제프리, 헨리 브루엄 등은 모두 1790년대에 사변협회를 주도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과 한 세대 선배 간의 가교 역할은 듀갈트 스튜어트가 맡았다." "이 밖에도 젊은 시절 에든버러에서 지적 세례를 받고 문필가로 활동한 인물은 무수하게 많다. 이들 모두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주로 1780~90년대에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한 이력을 공유한다. 특이한 것은 전 세대의 인물들과 달리 이들은 젊은 시절을 에든버러에서 보낸 후, 기회가 닿으면 잉글랜드, 대부분 런던으로 진출했다는 점이다. 이들 가운데 제프리와 스콧만이 스코틀랜드를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에든버러의 지적 잠재력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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