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들어가는 말


"나는 20세기 미국 정치사를 기독교 신학 용어에 빗대 두 개의 《통치 체제》로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제안한다. 첫째는 루스벨트 통치 체제로, 뉴딜 시대부터 1960년대 시민권 운동과 '위대한 사회'(린든 존슨 대통령이 내세운 구호)의 시대까지 이어지다가 1970년대에 소진되었다. 둘째 레이건 통치 체제는 198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 기회주의적이고 무원칙적인 대중영합주의에 의해 종결되는 중이다. 각각의 통치 체제는 미국의 미래에 관한 고무적 이미지와 정치적 의제들을 좌우하는 특징적인 원칙들을 동반했다. 루스벨트 체제는, 시민이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기본권의 부정否定에 맞서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그런 미국을 그렸다. 표어는 연대, 기회, 공적 의무였다. 레이건 체제는 국가의 속박에서 풀려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인 미국을 그렸다. 표어는 자기 신뢰, 최소 정부였다. 첫째 체제는 정치적이었고, 둘째는 반反정치적이었다."(12)


"진보의 중대한 기권은 레이건 시대에 시작되었다. 루스벨트 체제가 끝나고 야심찬 통합 우파가 부상하면서, 미국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과제에 직면했다. 미국 사회의 새로운 현실에 적합하게 과거 시도들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반영하여 미국민이 공유할 미래에 관한 신선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라는 과제에 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공유하는 바와 우리를 한 나라로 묶는 것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은 채 정체성 정치 운동에 몰두했다." 정체성에 매혹되고 집착하는 태도는 그 원리, 곧 개인주의를 강화했다. "루스벨트 진보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노동조합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서로 악수하는 두 개의 손이었다. 정체성 진보주의를 표현하는 흔한 이미지는 프리즘이 단일한 광선을 색깔 성분들로 분해하여 무지개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 두 상반된 이미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12-3)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원래 대규모 민중 계층들─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치 제도를 동원하고 정비함으로써 중대한 역사적 과오들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 즈음에 자기 존중과 점점 더 협소하고 배타적으로 되는 자기 정의定義를 내세우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날 우리의 학교와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그런 사이비정치다. 그로 인한 주요 결과는 젊은이들의 시선이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공익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익을 실현하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방치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과 무척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공동의 노력에 참여하게 하는 어렵고 생색나지 않는 과제를 맡을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13-4)


"그러나 정체성 진보주의에 대해서 제기할 수 있는 가장 뼈아픈 비난은 그 정치적 입장이 특정 집단들을 보살핀다면서 오히려 그 집단들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보주의자들이 소수자에게 추가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소수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할 위협이 가장 크니까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소수자들을─공허한 인정과 〈찬양〉의 몸짓에 머물지 않고─유의미하게 돕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장기적으로,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메시지로 그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 진보주의는 정반대의 일을 한다." "정체성 진보주의의 역설은 그 입장이 소망한다고 공언하는 바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에 있다."(15-7)


제1장 반反 정치


"한 혁명은 다른 혁명을 은폐할 수 있다. 역사적 기억 속에서 1989년의 대표적 사건은 소련의 붕괴다." "(소련 붕괴의) 가장 큰 역설은, 냉전의 마지막 10년에 걸쳐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진보하는 동안 미국인들이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에 투입하는 역량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공개적으로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를 비롯한 친민주주의 세력들을 지지하고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극적으로 촉구했지만, 미국 내에서 그는 공익이나 공익 달성을 위한 정치 참여을 운운하는 것이 더는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민중이 선출한 대통령이었다. 미국에서는 삶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이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그 관점은 사회의 필요와 욕망보다 개인들의 필요와 욕망에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했다. 이 부지불식간의 혁명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 더 강력하게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30-1)


"미국 사회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되었다. 물질적으로도 그러하고 문화적 신조들에서도 그러하다. 당사자의 선택. 개인의 권리. 자기 정의. 우리는 마치 혼인서약을 읊듯이 이 단어들을 말한다." "(개인주의 신조를 충실히 반영한) 레이건의 교리문답은 어떤 전통적 의미에서도 보수적이지 않다. 의존과 의무를 통한 전통적 결속보다 자기 결정이 우선이라는 점을 공리로 삼으니까 말이다. 자연적인 (가정부터 국가까지의) 집단 소속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나 우리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야 마땅하다는 것에 대해서 이 교리문답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것과 네 것을 따지기 위한 어휘는 있으나, 공익을 환기하거나 계급을 비롯한 사회적 실재들을 다루기 위한 어휘는 없다. 이 교리문답이 그리는 그림 속에서 우리는 공간 속에 뿔뿔이 흩어진 채로 제각기 고유한 속력으로 자전하며 고유한 궤적을 따라 운동하는 기본입자들이다."(33-6)


# 레이건의 교리문답

1. 좋은 삶은 독립적인 개인의 삶이다.

2. 부의 분배가 아니라 축적을 우선해야 한다. 

3. 시장이 자유로워질수록, 시장은 더 많이 성장하고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든다.

4. 독재적 정부나 비효율적 정부 혹은 부당한 정부가 아니라, 정부 그 자체가 문제다.


이 모든 것은 루스벨트 통치 체제에 동반되었던 교리문답과의 근본적 결별이었다. "무릇 교리문답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완고해지고 형식화하다가 결국 사회적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런 변화를 미국 진보주의가 1970년대에 겪었다. 공익을 위한 집단적 활동은 합법적인 것이라는 원칙에 더하여 미국 진보주의는 공익 달성을 위한 최선의 길은 언제나 세금, 재정 지출, 규제, 법원의 판결이라는 신앙고백을 추가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정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가정을 의문시할 이유들이 셀 수 없이 쌓여 있었다.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의 무능함 등이 그런 이유들이었다. 위대한 사회에 너무 많은 프로그램들이, 너무 서둘러, 거창한 미사여구와 함께 도입되어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렸고,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40-1)


"그들의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그들의 (또한 나의) 바람이 입법 과정에서 성취되지 않으면 그 과정을 우회하기 위해 법원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한 것이었다. 희귀어류 보호부터 낙태와 통학버스 같은 더 민감한 사안들까지 모든 것에 법원의 판결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진보주의자들은 여론의 동향을 살피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보폭을 좁히는 습관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대중은, 법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에 불과하다는 우파의 주장에 점점 더 귀가 솔깃해졌다. 결국 그 비난이 정착했고, 그때 이래로 사법부 공직 후보자에 대한 인준은 고도로 당파적인 절차가 되었다. 현재 그 절차를 주도하는 것은 우파다.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으로, 정부의 행위는 비효율적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역효과를 낸다, 혹은 제멋대로다, 라고 믿는 미국인이 (협력을 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점 더 늘어났다."(42)


"레이건의 공화당은 동부의 진보주의적 상류층과 억울함을 느끼는 남부 주민, 민주당을 저버린 중서부 소수민족 육체노동자들, 외곬의 자유시장주의자들, 반공 투사들, 정신 이상에 가까운 음모론자들, 1960년대의 분화적 변화에 밀려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이 집단을 경시할 수 없는데─여성주의를 어머니이자 주부인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 보수적 여성들을 결집했다. 그들이 이룬 집단은 이데올로기적으로나 기질적으로나 통합되기 어려운 연합체였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공통의 비전이 부재했다. 레이건이 그 비전을 제시하자 공화당은 연합체이기를 그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되었으며 선거 승리의 역량을 갖춘 세력이 되었다. 현재 미국 대통령의 특징적인 표현을 빌리면, 이후 공화당은 〈잘 정비된 기계well-tuned machine〉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러했다."(48-9)


제2장 사이비 정치


"새로운 반정치적 국가관에 직면한 진보주의자들은 정체성 정치의 덤불 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 덤불에 어울리는, 억울함을 토로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차이의 수사법을 개발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제도권 바깥에서 작동하는 사회운동들에 매혹되었고 민중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발전시켰다." "진보주의자들은 (학생들에게 시민의 책무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훈련하고 학생 자신의 머리 바깥에 펼쳐진 세계에 무관심하도록 방치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 및 급진진보 정치 활동가들은 주로 노동계급이나 농업 공동체 출신이었고 지역의 정치 클럽이나 직업 현장에서 육성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오늘날 진보 및 급진진보 정치 활동가들은 거의 다 대학교들에서 육성된다." "이는 진보주의의 전망이 우리의 고등교육기관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적잖이 의존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63-5)


"어떤 의미에서 시민권 운동은 더 과거에 있었던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 집단들의 투쟁과 공통점이 더 많았다. 양쪽 모두에서 관건은 시민으로서의 평등과 존엄을 인정받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여성주의의 1차 물결과 2차 물결, 그리고 초기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전이轉移가 시작되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한편으로 우리가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미국 내 다양한 사회집단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사이의 관계가 더는 아니었다. 시민의 지위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신에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인종, 성적 취향, 성별 등으로 물든 유일무이한 난쟁이, 내면의 호문쿨루스를 의미하는 개인적 정체성을 말이다.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존 F. 케네디의 도발적인 질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70)


"원래 신좌파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약간 맑스주의 식으로 해석하여, 겉보기에 개인적인 모든 것이 실은 정치적이라는 뜻으로, 권력투쟁에서 벗어난 영역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저 구호를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우리가 정치 활동이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그저 나를, 내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표현하는 개인적인 활동일 따름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정체성'은 신좌파를 산산이 분열시켰다. 흑인들은 대다수의 지도자가 백인이라는 점에 불만을 표했고, 여성주의자들은 대다수 지도자가 남성이라는 점을 불평했다. 머지않아 흑인 여성들은 급진주의적 흑인 남성들의 성차별과 백인 여성주의자들의 암묵적 인종차별을 싸잡아 불평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인 여성들 역시 여성동성애자들로부터 이성애 가족의 자연스러움을 전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집단들이 정치로부터 바라는 바는 사회정의와 전쟁 종식 그 이상이었다."(79-80)


"건강한 정당 안에서 작동하는 힘들은 구심력이다. 그 힘들은 파벌들과 이해 관심을 모아서 공통의 목표와 전략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한다. 그 힘들은 공통 이익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혹은 최소한 발언하는 것을 모든 각자의 의무로 만든다. 반면에 운동 정치에서 작동하는 힘들은 모두 원심력이다. 그 힘들은 점점 더 작은 파벌들로의 분열을 유도한다. 단일한 사안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을 엄숙하게 내세우는 파벌들로의 분열을 말이다." "사안 중심의 운동에서 정체성 중심의 운동으로 관심이 서서히 이동하면서, 미국 진보주의의 초점도 공통성에서 차이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폭넓은 정치적 비전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사이비정치가, 느끼는 자아와 그 자아의 인정 투쟁에 관한 뚜렷이 미국적인 수사법이 차지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수사법은 생산하는 자아와 그 자아의 이익 투쟁에 관한 레이건의 반정치적 수사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81-2)


"우리의 상상 속 대학생이 캠퍼스의 정체성 중심 사고방식에 깊이 빠져들수록, 그는 '우리'라는 단어를 더욱 불신하게 될 것이다. 집단들의 차이를 은폐하고 특권층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편주의자가 사용하는 계략이라고 선생들이 가르쳐 준 그 단어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학문적 경향들이, 사실상 우리 사회의 전 분야에서 권장되는 급진적 개인주의에 지적인 멋까지 부여한다는 점이다. 삶의 모든 것을 익명의 권력이 주무른다는 신비주의적 사상을 우리의 상상 속 대학생이 받아들인다면, 그가 민주 정치에서 발을 빼고 그것에 빈정거리는 시선을 던지더라도, 그 행동은 완벽하게 정당화될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페이스북 정체성 모형'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 모형에서 자아란, 내가 '개인 브랜드'와 유사하게 구성하는 홈페이지다. 그 자아는 타인들과 연결되는데, 나는 그 연결들을 나의 재량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다."(89-91)


"루스벨트 통치 체제 기간에 집단 정체성은 우리의 정치 시스템이 사회구성원들의 평등한 지위라는 약속을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필수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페이스북 모형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아, 바로 나의 자아다. 공통의 역사나 공통의 이익, 심지어 공통의 생각조차도 그 모형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늘날 좌파 성향의 젊은이들은─우파 성향의 젊은이들과 정반대로─자신의 정치적 참여를 이런저런 정치사상들과 관련지을 가능성이 작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X로서, 다른 X들에 관심이 있고 X성과 연관된 의제들에 관심이 있어서, 정치에 참여한다고 말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들은 Y들, Z들과 동맹할 전략적 필요성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각자의 정체성은 유동적이며 여러 차원을 지녔고 그 차원들 각각이 인정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동맹은 결코 정략결혼 이상일 수 없다."(93)


"지난 10년 동안 새롭고 매우 의미심장한 어법 하나가 대학교들에서 주류 언론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X로서 말하는데'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발언자가 특권적인 지위에서 이 사안에 관하여 말한다는 점을 듣는 이에게 알린다. 이 표현은 정의상 비X의 관점에서 유래한 질문들을 차단하는 장벽을 세운다. 그리고 의견 대립을 권력 관계로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논쟁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체성을 들먹이고 질문이 들어올 때 가장 강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그리하여 과거라면 '나는 A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는 이러이러해'라는 식으로 시작되었을 학급 토론이 지금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형태를 띤다. 만약에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논쟁 전술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은 공평한 대화의 장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금기가 논쟁을 대체한다."(94)


제3장 정치


"우리의 공적인 삶이 하루가 다르게 더 추해지고 있는 트럼프 집권 이후 진보주의자들이 트럼프에게 저항하기 위해 매우 신속하게 조직을 꾸리는 광경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저항은 본성적으로 반응이다. 저항은 앞을 내다보기가 아니다. 그리고 반反트럼프주의는 정치가 아니다. 나는 진보주의자들이 트럼프의 모든 행보 각각에 대응하는 데 몰두하느라 사실상 그가 원하는 게임을 하게 되는 불상사를 염려한다. 트럼프가 진보주의자들에게 내준 기회를 그들이 잡지─심지어 알아채지─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염려한다. 트럼프가 통상적인 공화당 정신과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원칙 있는 보수주의를 파괴해버린 지금, 경기장은 텅 비어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월을 통틀어 최초로 우리 진보주의자들 앞에 이렇다 할 이데올로기적 적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트럼프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105-6)


# 민주정치를 재학습하기 위한 4가지 교훈

1. 운동 정치보다 제도 정치가 먼저다.

2. 목표 없는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이 먼저다.

3. 집단 정체성이나 개인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가 먼저다.

4. 개인주의와 원자화를 막는 시민 교육이 긴요하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선거 승리가 정치 활동의 제일 목표라는 교훈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운동 정치의 마법에 걸려 있다." "미국 헌법의 기틀을 잡은 사람들은 정치 활동이 반드시 협의와 타협을 요구하는 제도를 통해 걸러지도록 만들고, 정치 활동이 빈번한 선거, 견제와 균형, 공무원의 자율성, 군대와 법규의 제정 및 공평한 집행에 대한 시민의 통제로 구성된 시스템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이 모든 일이 세 층위의 정부에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는 조금씩 쌓아가는 지루한 작업이 아주 많이 필요함을 의미했고, 미국 헌법의 입안자들은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낭만주의자들은 이같이 극적이지 않은 정치관을 꺼린다. 그들은 정치를 제로섬 대립─민중과 권력의 대립, 또는 문명과 폭도의 대립─으로 간주하는 쪽을 더 선호한다. 그쪽이 훨씬 더 가슴 설레는 일이기 때문이다."(109-11)


"그러나 운동 정치의 그 어떤 성취도 제도 정치를 통해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철칙이다. 반대로 제도 정치의 성취가 운동 정치를 통해 무효화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철칙이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을 개혁한 운동들은 많은 것을 해냈고 특히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어쩌면 이것이 무릇 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운동은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혼자 이뤄낼 능력이 없다. 운동은, 운동의 목표에 공감하지만 기꺼이 느리고 끈기 있게 선거운동을 벌이고 법안을 만들고 협상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료들을 감독하면서 법이 집행되는지 감시하는 시스템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을 필요로 한다. 마틴 루터 킹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 지도자였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이 옳게 지적한 대로, 파벌 정치가 린든 존슨의 노력이 없었다면 킹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113-4)


"입법 절차에 대한 불신과 당의 목표 성취를 위해 법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되면서 민주당 엘리트들은 폭넓은 민중에서 분리되었다." "의제를 법원으로 가져간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장이 절대적인 법에 따라 옳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되고 당신의 사건을 배당받은 판사들만 설득하면 된다." "이 전술은 모든 의제를 협상의 여지가 없는 불가침의 정의에 관한 문제로 간주하는 습관을 진보주의자들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이 전술은 불가피하게 반대자들을 다른 견해를 지닌 동료 시민들이 아니라 부도덕한 괴물들로 낙인찍어서 내친다. 더 나아가 이 전술은,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그들을 설득하려 애쓰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가는 끈기 있는 작업으로부터 진보주의자들을 해방시켰다." "이 접근법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자신들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이며 민주당 정치인들은 고위성직자 계급이라고 주장할 여지를 대폭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대중의 정신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117-8)


"민주 정치의 관건은 설득이지, 자기표현이 아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퀴어queer다'라는 말로는 머리 쓰다듬기나 곁눈질 이상의 반응을 결코 유발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과 사람들이 모든 사안에 대해서 동의하는 일은 영원히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여라. 민주주의에서는 다른 견해가 항상 존재하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정체성과 연결된 사회운동에 열중할 때 발생하는 결과 하나는 당신이 유사한 생각과 유사한 얼굴과 유사한 학력을 가진 사람들로 둘러싸이는 것이다. 당신이 설득하려는 사람들을 순수성 검사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만사가 원칙의 문제인 것은 아니며, 원칙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에도, 대개의 경우 이 원칙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 원칙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원칙들을 어쩌면 희생시켜야 함을 상기하라. 도덕적 가치들은 결국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서 전체를 이루도록 제작된 퍼즐의 조각들이 아니다."(121-2)


"선입견과 무관심은 뿌리가 깊다. 대다수 사람들은, 나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당할 수도 있는 고통이라고 (비록 추상적으로라도) 느끼지 않는 한, 타인들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동성애자 권익 보호 운동은 대중이 이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했지만, 태도의 변화는 미국 전역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식들이 부모에게 (때로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반면에 인종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 사회의 인종 분리를 감안할 때, 백인 가족들은 흑인 미국인들이 삶을 볼 기회가 거의 없고, 따라서 이해할 기회도 거의 없다. 나는 흑인 남성 운전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영원히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흑인 남성 운전자의 경험에 공분하려면 나 자신과 그를 동일시할 모종의 길이 더욱더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유일하게 공유한 것은 시민의 지위다. 우리 사이의 차이가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가 당한 학대에 내가 격분할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132-3)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자치self-government의 원리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민주적 시민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원리가 행동을 유발하려면, 우리가 타고나지 않은 감정 속에 그 원리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감정은 가르칠 수 없다. 감정은 우러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정치 분야가 존재하는 모든 일을 통틀어 가장 기적에 가깝다. 시민적 감정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 시민들 사이의 연대가 열악하거나 약화되면 자연스럽게 정치-아래의subpolitical 애착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자들이 없는 민주주의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그런 민주주의는 타락하여 과두정치, 신권정치, 인종적 민주주의, 부족주의, 권위적 일당독재, 혹은 이것들이 조합된 체제로 된다."(136-7)


"또 한 세대의 시민을 이전 세대와 유사하게 시민으로 키우는 것은 그리 끔찍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약간의 수정을 거친다면, 옛 모형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 열정과 헌신뿐 아니라, 지식과 논쟁도 그러하다. 당신의 머리 바깥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 당신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미국과 미국의 모든 시민들을 위하는 마음,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본받을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공통의 미래를 상상하는 야심도 그러하다. 이것들을 가르치는 부모나 교육자는 정치 활동─구체적으로 시민을 육성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들이 진보적 시민으로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진보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미국을 더 나은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을 바랄 수 있다. 당신이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당신의 출발점이어야 한다."(14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