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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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일본 근현대사를 생각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 주권·사회계약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상대국의 헌법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 〈전쟁 및 전쟁상태론〉, 루소


"통수권 독립이라는 발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야마가타는 세이난전쟁 이듬해인 1878년 8월 근위포병대가 급료에 대한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것을 보았고, 당시 자유민권운동이 사회에 퍼지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마가타는 1897년 스스로 참모본부장에 취임해 군령軍令에 관한 사항은 오로지 참모본부장이 관리한다는 규칙을 제정했습니다. 야마가타는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이 군대에 미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세이난전쟁의 교훈을 살려 군대 명령권자와 정치 지도자를 분리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반란을 막기 위해 그러한 분리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통수권 독립은 결과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통수권 독립으로 일본 군부는 정치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고, 이것이 더욱 전쟁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70-1)


1장 청일전쟁 - '침략·피침략'을 넘어 봐야 할 것


"1880년대에 이홍장은 중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또 1881년에는 신장 지역의 평정에 힘썼습니다. 중국의 서부 신장에 이리伊犁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권이지만 청의 지배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야쿠브 베그가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청 정부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질서 회복을 도모하는 한편, 러시아와는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이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홍장의 무력 대응이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이홍장의 단호한 결단력을 본 열강은 '오! 중국이 변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청은 조선을 대하는 태도마저 바꾸었습니다. 그때까지 청의 조선 관련 정책은 '예부禮部'가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이홍장은 1881년 조선과 안남을 자신이 직접 담당할 수 있게 제도를 고쳤습니다."(98-9)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은 톈진조약(1885.4) 이전에 쓰였습니다. 역사가 반노 준지는 후쿠자와가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한 여유가 없다"라고 한 것은 '개화파에 대한 지원을 통해 조선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일종의 패배 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웃 나라는 조선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지나와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임을 고려해 특별히 대하는 것이 아닌,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된다"라고 한 것은 '이제는 전쟁으로 청을 친 다음 조선 진출을 달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컨대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서구 열강의 아시아 분할이 임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대를 포기하고 조선과 중국을 저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진출은 조선 내부의 개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중국을 친 다음 무력을 통해 실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05-6)


"빈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슈타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이토에게 메이지헌법의 기둥이 되는 권력분립의 기본 구조, 국가가 행하는 사회정책의 필요성 등을 가르쳐주었습니다."(107) "슈타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는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주권이 미치는 국토의 범위가 '주권선'이고 그 국토의 존망에 관계되는 외국의 상태가 '이익선'인데,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이익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즉시 점령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나 벨기에 또는 수에즈운하처럼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에 대해 영국·러시아·청·독일·프랑스 등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이것이 슈타인의 조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논의에는 '중국 대신 일본이 조선의 중립을 보장한다. 담보擔保한다'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담보는 무력과 같은 실력으로 특정한 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두 사람의 만남에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1889년 6월의 일입니다."(111-2)


"요시노 사쿠조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이념적 기초를 만든 사람입니다." "요시노의 제자 오카 요시타케는 요시노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로,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부 해군과 함께 미국을 통한 화평을 극비리에 추진하던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 그룹 중의 한 명입니다." "오카는 일본의 민권파가 개인주의·자유주의 사상이 약한 것은 메이지 초기부터 국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없다면 상황에 따라 사람은 국가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근대 일본에서는 민권파나 반정부세력이라 할지라도 외교·군사에 관해서는 후쿠자와나 야마가타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평등조약 아래 근대 국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의 이상 이전에 '먼저 국권을 확립하자'는 '합리주의'가 부각됐던 것입니다."(116-7)


"후쿠자와 유키치는 '민당은 의회에서 중의원 의원의 8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정부의 법률안, 예산안 통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당은 정부에 대해서 번벌정부, 전제정부라는 비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정부에는 조슈·사쓰마·도사·히젠이라는 네 개의 번 세력이 있었고, 이들이 정부 요직을 독점했습니다. 그 때문에 민당인 자유당이나 개진당 소속 사람은 아무리 돈이 있고 우수해도 번벌정부의 내부로 파고들 수 없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지로 획득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종결 시점을 기준으로 타이완 총독부에는 4만 3870명의 일본인 관료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그래서 후쿠자와가 "지금이야말로 민당은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고, 거기서 지금껏 얻지 못했던 관료직을 얻어라"라고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자유당을 포함한 민당이 청일전쟁을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124-6)


2장 러일전쟁 - 조선이냐 만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먼저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의 '효용'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러일전쟁의 효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간신히 이겼습니다. 그 결과 서구 열강에 대사관을 둘 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당시에는 강대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나라는 대사관을 둘 수 없었습니다. 대사관 대신 공사관만을 두었지요. 영국 주재 일본공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된 것은 1905년 12월의 일입니다.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이 같은 해 9월에 맺어졌으니 국가의 격이 확 달라진 셈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국제 관계는 실로 엄격한 상하 관계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불평등조약 개정 등 당면의 국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 5년 뒤에 이루어진 1910년의 한일합병입니다. 이는 섬나라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획득한 타이완과 펑후제도가 섬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149-51)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습니다. 뤼순전투에서만도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사회에는 '일본은 20만 명의 희생과 20억 엔의 돈으로 만주를 획득했다'는 말이 널리 퍼졌습니다.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러일전쟁 4년 뒤인 1909년 〈제2대청정책淸政策〉이라는 의견서에서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사상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후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도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영령으로 획득한 만주의 권익을 지켜라"와 같은 슬로건이 등장합니다.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립했던 쇼와 시기에도 일본인은 러일전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주사변의 근저에는 러일전쟁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 간의 기억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전쟁의 뿌리는 러일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156-7)


# 1898년 러시아가 시모노세키조약의 배상금을 지원하는 담보로 중국에게 뤼순과 다롄을 얻으면서 랴오둥반도 남쪽에 부동항 확보 → 극동 지역의 군사력 운용폭 확대 : 일본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


"러시아가 만주를 잠식해 들어가던 1903년 10월경, 극동 총독에 임명된 베조브라조프는 황제를 잘 설득했습니다. '철도를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을 차지하면 돈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은 별 것 아닙니다'라는 식이었지요. 그는 '한국 또는 한반도를 차지하면 랴오둥반도의 뤼순·다례 항구를 지킬 수도 있다. 중둥 철도 남쪽 지선의 끝자락에 있는 뤼순·다롄을 방위하기 위해 육지에서 철도를 부설해 마을을 건설하는 것은 돈이 많이 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들이지 않고 뤼순·다롄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다 쪽, 즉 한반도를 잡아두는 편이 비용이 싸다. 일본이 진짜로 전쟁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청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일전쟁에는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추가됐군요. '철도 부설과 도시 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싸게 하는 것'과 '극동의 바다에 해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각각 경제 및 안전보장 문제와 연결됩니다."(173-4)


"어째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할 때 한국 문제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일본은 러일전쟁을 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돈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문제로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돈을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 이미 한국 문제로 청일전쟁 때 싸우지 않았나요?"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 확보는 미국과 영국에 관심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요? "남부의 목화로 만든 무명(면)을 수출하고 싶지요? 콩을 세계적으로 상품화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수출 시장으로서 만주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러시아에 맞서면서도, 서구 열강을 향해서는 만주의 문호 개방을 위해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 열강에 비해 늦게 '제국'이 된 일본으로서는 주변의 지원이 절실했습니다."(181-2)


"8만 4000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낳았지만, 러일전쟁 승리 덕분에 일본은 러일협상에서 요구했던 것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우세한 이익'이 포츠머스조약에서 '탁월한 이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청일전쟁 때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의 나라'라는 표현이 이제는 '정치·군사 및 경제적인 탁월한 이익'으로 바뀌었습니다." "〈제3조 : 러시아제국 정부는 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또는 기회균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일체의 영토상 이익 또는 우선적·전속적인 양여를 만주에서 얻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전까지는 러시아가 중국의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을 점령함으로써 다른 나라는 만주에서 배제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국이 평등하게 만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 영국 그리고 전쟁 중 러시아를 원조했던 독일, 프랑스도 포함됩니다. "자, 제국주의 국가 여러분! 어서 오세요"하고 중국 동북부의 문을 활짝 연 셈입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었습니다."(188)


3장 제1차 세계대전 - 일본이 느꼈던 주관적인 좌절감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이 호전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미일관계가 어색할 즈음 일본은 독일이 서태평양의 섬을 지배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마리아나, 팔라우, 캐롤라인, 마셜 등의 미크로네시아 지역은 미국이 태평양을 횡단해 동양으로 올 때의 길목에 있습니다. 일본은 이런 섬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영일동맹을 내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했습니다. 동맹국을 돕는다는 명분이었지요. 당시 영국은 일본의 개입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가토 외상은 영일동맹 협약 전반의 이익을 방호한다는 명목으로 참전을 강행했습니다. 영국이 대서양에서 안심하고 싸우는 동안 일본 해군은 1914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독일령 섬, 즉 남양군도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마셜제도의 잴루잇, 캐롤라인제도의 포나페·트루크·야프, 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 등지에 해군기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이 점령한 것입니다."(210-1)


남양군도 다음으로 일본이 노린 곳은 중국 산둥성의 권익입니다. "칭다오와 자오지 철도를 차지하면 일본은 유사시에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칭다오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통해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난까지 손쉽게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철도를 따라 톈진, 베이징까지 금방 북상이 가능합니다. 그전에는 베이징에 도달하려면 우선 한반도의 인천에 상륙하고, 거기서 다시 철도로 만주의 안둥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펑톈·진저우·산하이관을 넘어서 톈진·베이징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중국의 심장부를 달리는 가장 좋은 철도는 영국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독일령을 빼앗음으로써 영국 이외에는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중요한 철도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사실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베이징을 공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나라는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육해군 공동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제는 중국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216-7)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과 미국·영국·프랑스 간에 벌어진 격론은 일본이 차지한 독일령 산둥반도의 권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격론의 핵심은 산둥반도를 바로 중국에 돌려줘야 하느냐, 아니면 일본이 패전국 독일로부터 정식으로 수령한 다음 적절한 시기에 중국에 반환해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하라 내각과 정우회는 파리에서 있었던 외교상의 문제를 전부 이전 정권인 제2차 오쿠마 내각과 헌정회, 그리고 가토 외상의 책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 조명되어 왜곡된 기억을 낳게 했습니다. 이전 정권의 잘못으로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부당하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서구 국가가 중국에 동조해서 일본을 부당하게 비난했다는 이미지는 일본의 우익에 의해 확대되고 재생산됐습니다. 민간 우익으로 유명한 기타 잇키는 산둥 문제를 둘러싼 격론에 대해 일본이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됐다고 평가했습니다."(238-9)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의회가 한국의 3·1운동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를 비판하고 그런 일본과 타협한 윌슨 대통령을 비난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되어,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265-7)


4장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 일본의 자멸과 중국의 역할


"만주사변 발발 이전에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이 만몽 문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해야 한다고 답했던 것을 되새겨봅시다. 무려 9할에 가까운 사람이 무력행사에 찬성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일본인이 만몽 문제를 일본의 주권에 대한 위협 혹은 일본 사회의 기본 원리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중의원 의원인 마쓰오카는 1930년 12월에 개회한 통상회의에서 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만몽은 우리 나라의 생명선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이때는 만주사변 발발 9개월 전으로, 당시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의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가 미국·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협조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협조 외교를 비판하는 마쓰오카의 주장은 "첫째 경제적·군사적으로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것, 둘째 일본 국민의 요구는 "생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이라는 것이었습니다."(286-7)


"일본에서는 '생명선'·'생존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그렇다면 그 특수 권익의 실태는 어땠을까요?" "1926년의 통계에서, 만철과 일본 정부의 투자를 합하면 61퍼센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법인 기업이 31퍼센트인데, 여기에는 만철로부터 유입된 자본 약 3억 700만 엔이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약 3억 700만 엔을 만철의 것으로 계산하면 만철과 일본 정부의 대만몽 투자 비율은 무려 약 85퍼센트가 됩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운수업 외에도 정부로부터 광업 및 철도 부속지 사업을 넘겨받아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결국 만몽에 대한 투자는 대부분 국가 관련 투자였습니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기 어려운 구조였지요. 미국이나 영국처럼 사기업의 투자가 활발했다면 기업인의 비판이 정책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관련 지분이 85퍼센트에 달하는 상황에서 만몽에 대한 정책은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300-1)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은 양자 간 논의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뚜렷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독일 정부의 배상금 지불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만으로도 영국은 충분히 바빴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심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대일 융화'라는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는 "타인만을 상대하지 말고 자기 본분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잔혹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그 유명한 '리튼 조사단'입니다.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할 준비가 된 조사단이었습니다."(316-7)


"리튼 조사단은 일본이 '(장쉐량 정권에 의한 동북 3성의) 무법 상태로 인해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 중국이 국민당의 지시 아래 일본 상품을 불법적으로 '보이콧'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본이 만주에서 경제적 권익만을 노렸다면 리튼 조사단의 결론에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특히 일본 군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보고서는 일본의 행동을 국제연맹 규약 위반 또는 부전조약 위반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월 18일의 군사행동을 합법적인 자위 조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만주사변 이후 1932년 3월에 독립을 선언한 '만주국'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만주국이 국민의 독립 요구에 따라, 즉 민족자결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의 힘을 배경에 두고 만들어진 국가라고 명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만주 지역의 '중국적 특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주가 중국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318-9)


강경 발언을 거듭하면서도 내심 중국의 타협 요청을 기다리던 "우치다 외상의 계획을 망친 것은 쇼와 전전기에 항상 말썽을 일으켰던 문제아, 바로 육군이었습니다. 1933년 2월 육군은 만주국의 남쪽,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 중국의 러허성을 침공했습니다. 사실 작전은 현지군의 독단이나 폭주가 아니었습니다. 각의를 거쳐 결정된 작전을 천황 자신이 1개월 전에 재가裁可한 것입니다." "일본은 만주국을 국가로 승인하면서 1932년 9월 15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가 그것입니다. 일만의정서는 일본과 만주국 쌍방은 한쪽의 영토·치안에 대한 위협을 다른 한쪽에 대한 안녕·존립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동으로 방위에 임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개입은 조약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주국 내에 일본군이 주둔한다'는 이런 엉터리 조문을 강요한 것 자체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가임을 잘 보여줍니다."(331-2)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만들고 북만주까지 만주국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육군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대비책이 있었을까요? 육군은 만주국과 소련이 국경 지대에서 소련군을 효율적으로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주국의 서쪽이며 만리장성 이남인 화베이 지역에 주목했습니다. 그곳에 안전한 장소를 만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육군은 엄연한 중국 영토인 화베이 지역을 일본의 영향 아래 둔 다음, 그곳 비행장에 일본군 전투기를 배치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다음, 별도의 정치·경제권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육군이 1935년 무렵에 추진했던 '화베이 분리 공작'입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중국과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됐습니다. 중국 정부 내도 대일유화파가 있었지만, 화베이 지역을 분리하려는 일본 육군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43-4)


# 중국 정치가들의 예견

1. 후스 : 2~3년 간 중국이 일본의 공세를 홀로 버텨내면 소련과 미국의 개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2. 왕자오밍 : 그렇게 일본을 상대로 힘을 소진하면 중국은 공산화될 것이다.


5장 태평양전쟁 - 전사한 장소를 알려줄 수 없었던 나라


"일본은 미국과 일본의 절대적인 격차를 국민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야마토 정신이라고 하면서 국력 차이를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361) "당시의 중국통 다케우치는 중일전쟁은 내키지 않는 전쟁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은 강대국인 미국·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는 전쟁이 아니라 밝은 전쟁이라는 감회를 말했습니다. 다케우치의 글에는 전쟁을 '상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코하마 시내 다카시마역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는 개전 당일 일기에 "역장에게서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제까지의 나태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된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썼습니다.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을 듣고 어제까지의 느긋한 기분이 아니라, 안착된 기분이 들었다는 내용입니다."(364-5)


"육군성과 해군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두드러진) 외무성과 참모본부의 북진론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 방책으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41년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결정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반응입니다. 육군성과 해군은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곳은 프랑스령이기 때문에 미국의 권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모본부 전쟁반에서 기록한 일지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서 멈춘다면, 미국의 금수禁輸는 없다고 확신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단행하자 미국은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7월 25일에는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고, 8월 1일에는 대일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습니다."(392-3)


"왜 미국은 그토록 신속하게 반응했을까요? 미국은 독일군 300만 명의 공격을 받고 있는 소련이 10월까지 전선을 유지하고 버티면 이듬해 봄까지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에는 동장군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초 모스크바까지 진격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없었던 이유도 혹독한 겨울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1942년 봄까지 소련이 버텨낸다면 소련에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미국의 무기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1941년 9월 28일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협정을 맺고 소련에 군수물자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두 나라는 어쨌든 소련이 1942년 봄까지 전선을 지탱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1941년 여름, 소련의 힘을 북돋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남진에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함으로써 소련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일본을 걱정하지 말고 독일과의 싸움에 전념하라고 말입니다."(393-4)


국가의 안전에 대해 고심한 미즈노 히로노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우리 나라는 주요 물자의 8할을 외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통상 관계의 유지는 생명줄과도 같다. 외국과의 통상 관계는 일본이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유지될 것이다. 현대의 전쟁은 반드시 지구전·경제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고 기술이 저열하며, 주요 수출 품목은 생필품이 아닌 생사다. 전쟁에서 일본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셈이다. 따라서 일본은 무력전에는 이겨도 지구전·경제전에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탄압받았고, 국민도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관심사는 지구전은 불가능하니 독일과 함께 소련을 협공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상대를 선제공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이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일본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습니다."(411-3)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대개 수동형으로 표현합니다. 즉 죽은 일본인도 '피해자'라는 뉘앙스인데, 이것은 많은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와테현에서처럼 전체 전사자의 9할이 1944년부터 패전까지의 1년 반 동안에 발생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9할의 전사자는 머나먼 전장에서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유족에게 그 병사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위령慰靈에 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감안할 때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즉 레이테든, 과다카날이든 정글에서 죽은 사랑하는 아들의 뼈를 수습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하늘의 도리에도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엄청난 수의 전사자와 어우러져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421-4)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만주에 얽힌 국민적인 기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해외에 있던 일본인 민간인은 321만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육해군 군인이 대략 367만 명이었는데, 이 둘을 합치면 688만 명의 일본인이 해외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688만 명 중에 200만 명이 만주에 있었습니다. 그 200만 명 중에 소련 침공 후 사망한 사람이 모두 24만 5400명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사망자와 귀국하지 못한 고아나 부인 등을 제외하고 많은 일본인이 만주에서 철수했습니다. 패전 당시 일본은 총인구의 8.7퍼센트가 철수를 경험했습니다." "확실히 만주로부터의 철수 체험은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피해와 고통이 강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화를 낳은 근본 원인은 일본 정부의 정책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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