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워 1945-2005 2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플래닛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세계 경기 후퇴의 결정적 분기점

1. 닉슨의 고정환율제 포기 선언(1971.8.15)

2. 욤 키푸르 전쟁(1973.10.6)으로 촉발된 석유 파동


1970년대 들어 "서유럽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불리는 현상, 다시 말해 임금과 가격의 상승과 경제 침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표들은 1971년 이래의 높은 인플레이션 비율을 근거로 들며 1973년의 위기가 닥치기도 전에 이미 피로의 징후를 보이고 있던 경제에 더 많은 임금과 기타 보상을 강요했다. 실질 임금은 생산성 증가를 웃돌기 시작했다. 이윤은 하락했고 신규 투자는 감소했다. 과열되었던 전후 투자 전략으로 형성된 과잉 생산 능력은 인플레이션이나 실업으로만 해소될 수 있었다."(752-3) "몇 년 전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굴뚝 산업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철강 노동자와 광부, 자동차 산업 노동자, 방적공의 실직은 지역 경제의 경기가 하향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었고 나아가 석유 파동의 부산물도 아니었다. 서유럽의 유서 깊은 제조업 경제가 소멸하고 있었다."(755-6)


각국 정치인들은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전후의 합의를 고수했다. 다시 말해 가능하면 완전 고용을 추구했고, 완전 고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는 임금 인상으로, 실직한 자들에게는 사회적 소득 이전으로, 공공 부문이나 민간 부문 공히 허약한 고용주에게는 현금 보조금으로 보충하려 했다. 그러나 70년대가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가들이 이제 인플레이션은 높은 실업률보다 더 큰 위험을 일으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759) 1970년대에 전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중간 계급은 자신들이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인플레이션, 세금으로 조성된 사양 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 예산과 재정 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공공사업의 축소와 폐지 등 그들이 그렇게 느낄 만한 이유는 많았다. 과거에 그랬듯이 인플레이션의 재분배 효과는 현대 서비스 국가 특유의 높은 과세와 맞물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소위 중간 계급 시민들은 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꼈다."(761-2)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도 "서유럽에서 고전적인 형태의 공산주의와 파시즘에는 미래가 전혀 없었다. 시민적 평화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다가왔다."(764) 극단적 테러리즘을 고수한 바더-마인호프 집단에 대한 전반적인 "공감의 한 원천은 문학계와 예술계에서 증가하고 있던 독일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였다. 이 사람들은 독일이 이중으로 '상속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나치가 독일 국민에게서 훌륭하고 '유용한' 과거를 박탈했다면, 연방공화국에 들어와서는 미국이라는 감독이 거짓된 독일의 이미지를 강요했다." "타인의 조작과 이익에 희생된 자는 이제 '독일인'이라는 테러리스트들의 주장처럼, 미국 점령군과 다국적 기업들, '국제' 자본주의 질서를 표적으로 삼은 독일 극좌파 테러리즘의 뚜렷한 민족주의적 색채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라이츠와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적 억압에 맞서 양심으로 투쟁하는 현대의 안티고네로 그려진다."(776-8)


# 1970년대 서유럽을 혼란에 빠뜨린 두 가지 흐름

1. 소수 민족 분쟁(스페인 바스크, 북아일랜드, 코르시카 등)

2.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극단적 테러리즘(서독의 적군파RAF,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BR)


"정치 폭력이 '자기 긍정의 생산력'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은 현대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낯설지 않았다. 네그리가 확인하고 붉은여단과 그 동조자들이 실천했던 것은 파시스트가 찬양한 '폭력의 정화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극좌파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반민주주의적 우파의 '프롤레타리아적' 폭력으로 후퇴했다. 1980년이면 좌파와 우파의 테러리스트들은 그 표적과 방법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784) "이 시기 좌파 테러리즘이 거둔 단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은 지역의 정치 단체들에 남아 있던 혁명적 환상을 철저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1970년대의 '총탄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서유럽의 심장부에서 혁명적 전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시절의 순효과는 테러리스트들이 계획하고 기대했듯이 사회를 양극화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온갖 정파의 정치인들을 중도의 안전 지대에 결집하도록 몰아 댔다."(786)


"당대의 지식인 사회 전체가 매우 폭넓게 공유했던 인간 해방 이론의 밑바탕에는 두 가지 가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첫 번째는 권력의 토대는 계몽 사상 시대 이후 대부분의 사회 사상가들이 가정했듯이 자연 자원과 인간 자원의 통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 다시 말해 자연계에 관한 지식, 공적 영역에 관한 지식, 자신에 관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 자체가 생산되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관한 지식을 독점하는 데 있다는 가정이었다." "두 번째는 과거의 확실한 사실은 물론 확실함의 가능성 자체까지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혹적인 주장이었다. 모든 행위, 모든 견해, 모든 지식은 정확히 사회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했다. 판단이나 평가가 주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몇몇 영역에서는 당파적인 (그리고 암묵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적 태도의 표현이자 표상으로 간주되었다."(788-90)


# 회의론 : 니체 → 푸코 / 해체론 : 하이데거 → 데리다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을 비판하고 계몽된 합리주의와 그 정치적, 인식론적 부산물의 토대에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관심은 하이데거처럼 근대성과 기술적 진보를 비판했던 20세기 초의 비평가들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몽매에서 깨어난 회의론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그들의 과거 이력을 세탁하게 해주었다." "라캉과 데리다처럼 새로이 대가가 된 이론가들은 대학의 기존 청중에게 언어의 변덕과 역설을 완전한 철학으로, 말하자면 텍스트적 해석과 정치적 해석에 무한정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틀로 승격시켰다." "격세유전적으로 경제적 범주와 정치 제도들에 집착했던 마르크스주의도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구제되어 문화 비평으로 거듭났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부르주아를 마지못해 극복해야 하는 불편함은 이제 더는 장애물이 아니었다."(791-2)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굴복시키고 지배하려는 계몽 사상의 기획이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생각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술을 통해 냉전으로 분열된 양 진영의 독자들에게 이미 익숙했다. 특히 1944년에 출간된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 중요했다. 하이데거식으로 뒤틀린 이러한 반성─공산주의는 서구에서 수입한 부정한 것이며 끝없는 물질적 진보라는 지나치게 오만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은 70년대에 윤리적 반대파와 생태학적 비판자들의 결합으로 등장한 지식인 반대파의 토대를 형성했다." "1973년 프랑스와 영국에서 '생태' 후보들이 선거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서독에서는 녹색당의 선구자인 농민대회가 창설되던 해였다. 서독의 환경 운동은 1차 석유 파동으로 추동력을 얻어 순식간에 주류 정치에 합류했다."(811-2) '복고retro'의 유행과 더불어 "70년대는 스스로 반성하는 걱정스러웠던 시대로서 앞이 아니라 뒤를 바라보았다."(796)


"70년대 초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스가 단지 지리적인 의미에서만 유럽의 주변부였던 것은 아니다. 세 나라 모두 냉전에서 '서방'에 충성했지만 다른 점에서는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경제는 유럽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다른 국가들, 즉 유고슬라비아나 터키의 경제와 닮았다." "세 나라 모두 1970년대 초에 서유럽보다는 라틴아메리카에 더 친숙한 성격의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다스렸다. 전후의 정치적 변화는 대체로 그 나라들을 비켜간 듯했다.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1932년에서 1970년까지 통치했던 포르투갈과, 프랑코 장군이 1936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1939년부터 1975년에 죽을 때까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은 채 통치했던 스페인에서는 다른 시대에 속한 권력의 위계 제도가 고착되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군부 도당이 1967년에 국왕과 의회를 내쫓았다. 이후 그리스는 대령들의 혁명평의회가 통치했다. 세 나라의 불투명한 미래 위에는 불안정했던 과거의 망령들이 떠돌았다."(829)


"아이러니한 것은 지중해 유럽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변화들이 문화나 정치의 과격파와 혁신자들이 아니라 구체제 자체의 보수적 정치인들 덕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그리스),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포르투갈), 아돌포 수아레스(스페인)는 몇 년 뒤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처럼 모두 자신들이 해체시키는 데 기여한 구체제의 특징적 생산물이었다." "세 나라는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서방'에 그다지 어려움 없이 진입하거나 재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외교 정책이 언제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들의 외교 정책과 양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통의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냉전의 제도들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들과 군사 독재나 교권 독재 사이에서 소통과 협력을 증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 나라들의 경제는 다른 서방 국가들의 경제와 본질적으로 유사했으며 이미 화폐와 상품, 노동의 국제 시장에 잘 통합되어 있었다."(861-3)


"1930년대 이래 공공 정책은 많은 사람들이 신뢰한 '케인스주의' 정책에 의존했다. 이에 따르면 경제 계획과 적자 예산, 완전 고용은 원래 바람직하며 서로 지탱해 주는 관계에 있다. 비판자들은 두 가지 논거를 제시했다. 하나는 매우 단순했다. 서유럽인들에게 익숙한 사회 복지 사업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논거는 특히 전후 수십 년 동안 국민경제가 위기로 점철되었던 영국에서 집요하게 주장되었다. 사회 복지 사업을 지속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국가 개입은 근본적으로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국가가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보험, 주택, 연금, 보건, 교육 등 서비스의 대부분은 민간 부문이 더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사적 전략은 젊은 유권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견해가 반백 년 전 마지막으로 지적 우월성을 확보했을 때 보여 준 치명적인 귀결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882-3)


"공공 부문이 명백히 제거되었는데도 1988년 영국 총생산에서 공공 지출이 차지한 몫(41.7퍼센트)은 '국가를 국민에 등에서 내려놓겠다'던 대처의 약속과는 달리 10년 전(42.5퍼센트)과 사실상 동일했다. 보수당 정권이 실업 수당으로 전례 없이 많은 액수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철강, 석탄, 섬유, 조선 등 비효율적인 (그리고 국가의 보조를 받던) 산업에서 일하다 실직한 많은 사람들은 결코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일생 동안 이름만 제외하면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이 일했던 산업의 고용주들이 몇몇 경우(특히 철강)에 이윤을 내는 사기업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사적 소유가 일으킨 기적이라기보다는 마거릿 대처 정권이 높은 수준으로 고정된 노동 비용을 덜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필요 없는 노동자들의 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실업으로 '사회화' 했던 것이다."(891-2)


"대처가 권력에 오르기 전, 영국 공공 정책의 초기 입장은 국가가 정통성과 주도권의 자연적인 원천이라는 점이었다. 대처가 무대에서 떠날 때쯤이면, 이러한 견해는 뿌리 깊이 국가에 얽매인 영국 노동당에서도 소수파의 견해로 전락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전후 합의의 핵심 가정들이 우파 혁명으로 박살났다면, 프랑스에서 정치적 틀을 깨뜨린 것은 비공산주의 좌파의 부활과 변화였다."(898-9) "드골의 적대자와 비판자는 이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비민주적' 방식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를테면 프랑수아 미테랑은 1965년에 출간된 소책자에서 드골의 방식을 '영원한 쿠데타'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사실상 무제한적이었던 대통령의 권한은 드골의 후임자들에게는 정파를 불문하고 확실히 매력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독특한 제도는 개별 후보의 정치적 기술과 인성에 의지함으로써 5년마다 실시되는 의회 선거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901)


"전후 유럽의 자기 인식의 전환점은 1973년 12월 28일 파리에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서유럽 최초로 출간되면서 찾아왔다. W. L. 웹은 <가디언>지에 실은 영어 번역본에 대한 서평에서 "지금에 살면서 이 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종의 역사적 바보이다. 시대 의식의 결정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기이한 것은 솔제니친 자신도 인정했듯이 책이 전하는 전언, 즉 '현실 사회주의'는 야만스러운 사기극이며 노예 노동과 대량 학살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전체주의 독재라는 메시지가 전혀 새롭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중요했다. 비판의 영향력은 서유럽에서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동유럽에서 1960년대 내내) 무뎌졌다. 국가사회주의가 1917년에 러시아에서 최초로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래 대륙 전역에서 우르릉거렸던 국가사회주의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일말의 빛을 찾으려는 욕구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918-9)


"퓌레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의 자유주의적 낙관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과격한 사회 변혁의 전망이라는 쌍둥이 지주에 의존했던 이 이야기는 땅에 처박혔다. 급진적 변혁을 목적으로 삼은 이 이야기에서 혁명의 상속인으로 추정되었던 소련 공산주의가 반동적으로 유산 전체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퓌레가 펼친 논지의 정치적 함의는 그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었듯이 매우 중대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정치로서 실패한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늘 불운이나 환경을 탓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 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의심을 받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다시 말해 이성도 필연성도 역사 속에서 작용하지 않았다면, 스탈린의 모든 범죄, 국가의 명령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중에 희생된 모든 생명과 자원, 절대적 명령으로써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던 20세기의 과격한 실험이 남긴 그 모든 오류와 실패는 길은 옳았지만 잘못 움직였다는 식으로 '변증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923-4)


"1945년 이후 권리 담론은 개인에 집중되었다. 이 또한 전쟁의 교훈이었다." "개인 권리의 법률적 수사를 현실 정치의 영역에 밀어 넣은 동력은 동시에 발생한 마르크스주의의 후퇴와 유럽안보협력회의였다."(927) 동유럽 지식인들이 "시민 사회─70년대 중반 이래 동유럽의 지식인 반대파가 널리 채택했던 모호한 어구─를 재건하려는 노력에 담긴 의미는 이들이 1968년 이후에 당-국가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프라하의 후사크나 베를린의 호네커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권리-담론'의 논리를 인정하고 자국의 헌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리라고는 누구도 진정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이론상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실제로는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며, 국내외의 관찰자들에게 이 사회들이 사실상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반대파는 공산당 당국과 싸우는 대신 의도적으로 그들을 지나쳐 이야기했다."(930-1)


사회주의 경제권에서 생산된 조악한 품질의 상품은 수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사실상 동유럽의 상점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서방에서 돈을 빌리는 길뿐이었다. 서방은 확실히 돈을 빌려줄 열의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민간 은행들 모두 소련 진영 국가에 자금을 빌려주게 된 것을 기뻐했다." "동유럽 전체의 경화 채무는 1971년 61억 달러에서 1980년 661억 달러로 늘었다. 이는 1988년 956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수치에는 루마니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오랫동안 외국의 채무를 갚았고 그동안 국민은 등골이 휘었다. 이 채무는 70년대에 헝가리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가격 결정의 허용 폭이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공산주의 체제는 차관만이 아니라 빌려온 시간에도 의존하여 생존하고 있었다. 조만간 공산주의 체제는 고통스럽고 사회를 붕괴시킬 경제 조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954-5)


"레닌이 유럽사회에 기여한 독특한 점은 유럽 급진주의의 분권적 정치 유산을 빼앗아 지배력의 독점이라는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권력의 성격을 바꾼 것이었다. 레닌은 권력을 주저 없이 한 곳에 집중시켰으며 강제로 그곳에 존속시켰다. 공산주의 체제는 주변부에서 무한정 부식될 수도 있었지만, 최후의 붕괴를 주도할 자는 중앙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의 붕괴에 관한 이야기에서, 프라하나 바르샤바에서 놀랍도록 번창한 새로운 종류의 반대는 시작의 끝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출현한 새로운 성격의 지도부는 끝의 시작이 될 터였다."(957) "철저한 당원이었던 고르바초프는 당이나 당의 정책을 절대로 공개리에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흐루시초프 시대의 오류에 환멸을 느꼈고 이후 브레주네프 시절의 억압과 무기력에 실망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개혁 공산주의자였다."(974)


공식적으로 '자본주의'가 수십 년 동안 격한 비난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사회에서 "경제 개혁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1921년 이후 소련의 모든 개혁 정책은 레닌의 신경제 정책NEP을 필두로 똑같이 시작되어 똑같은 이유로 활력을 잃었다. 중대한 경제 개혁은 통제의 완화나 포기를 의미했다. 개혁은 해결하려는 문제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방금 말했듯이 통제력의 상실을 뜻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체제는 통제에 의존했다. 공산주의는 실로 통제 그 자체였다. 경제의 통제였으며 지식의 통제였고 운동과 여론과 인간의 통제였다. 그 외 모든 것은 변증법이었다." "소련은 중앙 통제 경제의 정치적, 제도적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운영했다. 소련 특유의 작은 모순들과 일상의 부패는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었다. 당이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 자체를 개혁해야 했다."(976-7)


"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서 두드러진 측면은 전염 그 자체가 아니었다. 모든 혁명은 그런 식으로 확산된다. 누적된 사례가 기존 권위의 정통성을 침식했다. 1848년과 1919년의 혁명, 그리고 정도는 약하지만 1968년의 혁명도 바로 그러했다. 1989년의 새로움은 몰락 과정의 속도였다." 즉석 정치 교육의 수단이 된 텔레비전 방송이 널리 퍼지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중대한 자산이었던 정보에 대한 통제권과 독점권이 소실되었다. 혼자라는 두려움은, 즉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갖게 되는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다. 심지어 루마니아에서도 국영 텔레비전 방송실의 장악이 봉기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1989년 혁명들의 두 번째 현저한 특징은 그 평화로운 성격이었다." "전 세계의 많은 시청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 국민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 정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빠졌다."(1026-8)


"동유럽의 군중과 지식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신속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산주의에서 질서정연하게 탈출한) '제3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이는 단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그들을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1989년 7월 6일, 고르바초프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청중에게 소련이 동유럽의 개혁을 가로막는 일은 없으리라고 밝혔다. 개혁은 '전적으로 인민들의 문제'였다." "고르바초프의 입장에는 전혀 모호함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에 미흐니크가 말했듯이, '외교 정책의 성공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제국의 중심이 주변부 식민지를 붙들지 않겠다고, 그럴 수 없다고 너무나 공공연히 인정했기에 또 그렇게 이야기한 데 대해 도처에서 갈채를 보냈기에, 제국은 식민지를 잃었으며 더불어 제국의 지역 내 협력자들도 잃었다. 나머지 결정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몰락 방식과 방향이 전부였다."(1033-4)


"독일의 재통합은 분열의 시기에 특이한 융합의 사례였는데, 그 공은 우선 헬무트 콜에게 돌아가야 한다." 한때 하루에 2,000명에 달했던 서독으로의 주민 유입을 멈추기 위해 헬무트 콜은 동독의 파괴에 착수했다. "1990년 5월 18일, 두 독일 사이에 '화폐, 경제, 사회의 연합'이 체결되었고, 7월 1일에는 그 핵심 조항인 도이치 마르크의 동독 확대 사용이 발효되었다. 동독인은 이제 사실상 무용지물인 동독 마르크를 4만 도이치 마르크까지 1대1이라는 엄청나게 유리한 환율로 교환할 수 있었다." "8월 23일, 동독 의회는 서독 정부와 사전에 체결한 협약에 따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기로 가결했다. 한 주 뒤, 통일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되었다. 3월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승인하고 1949년의 기본법 23조에 의해 허용된 대로였다. 10월 3일 통일 조약이 발효되었고, 독일민주공화국은 연방공화국에 '가입'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040-2)


동독 국민들은 자신들의 "괴로운 역사에 관여하기보다는 잊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1950년대 서독의 망각의 시절이 얄궂게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연방공화국 초기에 그랬듯이, 1989년 이후에도 해답은 번영이었다." "서독 유권자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콜은 세금 인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이 거대한 새로운 과제를 이행하기 위해 연방공화국은 그때까지 상당한 흑자를 보았던 재정을 적자로 돌리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연방 은행은 그러한 정책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에 깜짝 놀라 1991년부터 이자율을 꾸준히 올렸다. 1991년은 도이치 마르크가 예정에 따라 유럽 통화에 영원히 연동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자율 인상이 가져온 연쇄 효과인 실업 증가와 경제 성장의 둔화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화폐제도 가입국 전역에서 감지되었다. 헬무트 콜은 자국의 통일 비용을 밖으로 전가했으며, 독일의 유럽 내 협력자들은 부담을 나누어지게 되었다."(1048-50)


"고르바초프 시절에는 '러시아적 특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강해졌다. 그 이유는 동독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매우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독일민주공화국의 고유한 독일적 특성을 드높이기 시작한 이유와 동일했다. 인민공화국들이 무너지던 때에 애국심은 사회주의를 대신할 유용한 수단으로 재차 등장했다. 바로 이 때문에 애국심은 가장 편하고 위협이 가장 적은 형태의 정치적 반대이기도 했다." "보리스 옐친이 예기치 않게 등장하게 된 배경은 이러했다." "당과 관료 기구가 진정한 변화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지 관찰할 좋은 기회를 가졌던 옐친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정치적 본능을 발휘했다." "고르바초프가 국내 정치에서 저지른 주된 전술적 오류는 민족을 드러내며 실제적인 권력과 상당한 독립성을 갖는 민족 입법부의 등장을 장려한 것이었다."(1064-5)


# 1991년 6월 12일, 옐친의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통령 선출 / 12월 31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멸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로운 분열은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를 덮친 파국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서방 언론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취한 한 견해에 따르면, 발칸 지역은 희망이 없는 곳으로 불가사의한 싸움과 먼 옛날의 원한이 뒤섞인 가마솥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운명을 타고났다.' 자주 인용되듯이 유고슬라비아는 여섯 개의 공화국과 다섯 개의 민족, 네 개의 언어, 세 개의 종교, 두 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단일 정당이 이 전부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1989년 이후에 일어난 일은 단순했다. 솥뚜껑이 제거되자 가마솥이 폭발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었으며, 이 점에서 다른 공산 국가들의 해체와 유사했다. 유고슬라비아 비극의 압도적인 책임은 독일이나 다른 외국의 정부가 아니라 베오그라드의 정치인들에게 있었다."(1085-6)


종교와 민족을 연결짓는 일은 갈수록 희미해져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투르크의 전진을 막는 중세 세르비아의 마지막 거점이자 1389년 역사에 길이 남을 패전(코소보 전투)의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지역 내에서 알바니아인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을 일부 세르비아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인구 측면에서 골칫거리이며 역사적으로도 도발적인 일로 간주했다." "세르비아인들이 자신들과 바짝 붙어 불안을 조성하는 알바니아인들을 싫어한 반면, 유고슬라비아 북부에서는 무기력한 남부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증가했는데 이는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문제는 민족이 아니라 경제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북부가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남부에 분노하는 동안 "유고슬라비아의 빈부차는 극적인 수준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마침내 지리와 연관되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1091-2)


"민족주의는 (티토 사후의 정치적 공백기에)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를 장악하는 방법이었으며, 1989년 5월 그가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 효력은 이미 확인되었다."(1095) "발트 국가들이나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체제 이후의 정치인들은 소수 민족들의 존재를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없이 공산주의라는 과거를 벗어던지고 민족 독립에 호소하면서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민주주의를 즉시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달랐다. 연방이 구성 공화국들로 해체될 경우, 슬로베니아를 제외하고는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각국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 민족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분열의) 촉매제는 코소보였다." "세르비아의 수정 헌법은 이미 궁핍하고 불우한 최하층민이었던 알바니아인들에게서 자치권과 정치적 대표권을 사실상 박탈했다."(1096-7)


# 코소보 의회 해산과 병합


1992년에 벌어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전쟁, 그리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사이의 전쟁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창설된 코소보해방군은 코소보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알바니아와 연합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천명했다."(1109) 밀로셰비치의 주된 전략적 목표는 "반대 세력의 패배가 아니라 비세르비아계 시민들을 세르비아인의 영토라고 주장된 곳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어느 편을 막론하고 모두 관여했던 이러한 행위는 매우 오래된 관행으로 새롭게 '민족 청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군대가 단연 최악의 범죄자들이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무렵 약 30만 명이 살해되었고, 수백만 명이 추방되었다. 유럽공동체 보호 시설의 입소 신청자는 1988년에서 1992년 사이 세 배 이상 늘었다. 1991년에는 독일 한 나라에서만 25만 6,000명의 난민을 수용했다."(1101-2) 


# 스레브레니차 학살 : 1995년 7월 11일 국제연합이 정한 '안전지대'(보스니아 동부의 스레브레니차)에 진입한 세르비아 군대가 소년들을 포함한 이슬람계 남자들 7,400여 명을 나흘에 걸쳐 학살한 사건


"90년대 정치의 분열적 기질은 과거에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유럽 나라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도 중앙 집권적 통치의 구속을 벗어던지려는─또한 먼 지방의 가난한 동료 시민들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려는─똑같은 충동이 감지되었다. 스페인에서 영국까지 서유럽의 기존 영토 단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전통적인 국민 국가 형태를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대규모의 행정적 지방 분권을 경험했다."(1145) "자치에 대한 욕망은 이를테면 보헤미아보다는 카탈루냐에서 확실히 더 강했고, 플란데런과 왈론 사이의 간극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나 심지어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더 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처럼 분리를 감행하기보다는 국가 내 존속을 택한) 요인은 서유럽 국가들이 이제는 자국 백성에 대한 권위를 독점하는 독립적인 민족 단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점차 다른 무엇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1165)


#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동맹(북부 동맹), 프랑스의 코르시카 섬, 영국의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벨기에(플란데런 지방과 왈론 지방의 갈등)


"유럽연합 회원국들을 일련의 진정으로 새로운 제도적, 재정적 협정으로 몰아넣은 것은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5년 뒤에 이를 계승한 암스테르담 조약이었으며, 이 두 조약은 근본적으로 변한 외부 환경의 직접적인 귀결이었다."(1165)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공동 통화의 요구 조건을 엄격히 적용했으며, 가입을 희망하는 모든 나라는 빠르게 늘어났던 유럽연합의 실천 규약인 아키코뮈노테르acquis communautaire를 자국의 통치 체제에 통합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절차가 복잡한 관료적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조약은 북유럽의 신청국들이나 오스트리아에는 어떠한 지장도 초래하지 않았지만, 동유럽의 장래 후보들에게는 대단히 곤란한 장애들이었다. 유럽연합은 자체 헌장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유럽을 품 안에 끌어안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가능하면 배제하려 애썼다."(1171)


# 아키코뮈노테르acquis communautaire : '공동체의 경험'이란 뜻으로 현재까지 축적된 유럽연합 법규 전체를 말한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여파

1. 여전히 체질이 허약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에게 유럽연합 가입 이전 단계로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승인하면서 조약이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후원하게 되었다.

2. 유럽연합과 관련된 의제들이 대중들의 관심권에 들어오면서 익명의 관료 기구들이 조용히 계획하고 결정 내리던 시절이 막을 내렸다.

3. 유럽의 결합(최소한 서유럽만이라도)을 위한 길을 마련했다.


"한 국가의 정부는 자유롭게 세금을 거두어 예상되는 비용에 충당하는 반면, 유럽연합은 스스로 재원을 조달할 능력이 거의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유럽연합의 수입은 고정된 비율의 관세와 농업세, 연합 전역의 간접 판매세(부가가치세), 그리고 특히 국민총소득GNI의 겨우 1.24퍼센트가 상한선인 회원국들의 분담금에서 나왔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소득은 개별 회원국들 내부의 정치적 압력에 취약했다. "2004년 유럽연합이 동유럽으로 확대된 이후, 19개 회원국이 브뤼셀로부터 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연합 운영비는 사실상 순기여국인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 6개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충당되었다. 2003년 12월, 6개국 모두 앞으로는 유럽연합에 내는 국가별 분담금을 국민총소득의 1.24퍼센트에서 1퍼센트로 낮추어야 한다고 집행위원회에 청원했다. 이는 유럽연합의 미래에는 불길한 일이었다."(1181)


"독일은 무임 승차한 나라들의 도덕적 해이와 실질적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성장 안정 협정'을 고집했다. 유로화 체제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나라들은 공채를 국내총생산의 60퍼센트 미만으로 억제해야 했으며 재정 적자도 국내총생산의 3퍼센트 미만으로 운영해야 했다.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나라는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포함하는 연합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의 요점은 유로화 지역의 어떤 정부도 재정적으로 방심하거나 예산을 마음대로 초과하지 못하도록 보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회의론자들이 예견했듯이 '천편일률적' 통화가 주는 부담이 곧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유럽중앙은행은 처음부터 이자율을 비교적 높게 유지하여 새로운 통화를 지탱하고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려 했다. 그러나 유로화 지역 국가들의 경제는 발전 수준과 경기 순환 지점이 서로 달랐다."(1183-4)


"그러나 모든 점을 다 고려할 때, 유럽연합은 좋은 것이다. 단일 시장이 가져다준 경제적 이익은 영국의 가장 열렬한 유럽연합 회의론자조차 인정할 정도로 분명했다." "80년대 말부터 유럽공동체와 유럽연합의 예산은 명백히 재분배적 성격을 띠었다. 부유한 지역에서 가난한 지역으로 재원을 이전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격차를 꾸준히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하여 사실상 앞선 세대의 국가별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대체했다."(1193) "유럽연합은 간접 통치 제도로서 갖는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흥미롭고 독창적인 속성을 지녔다. 결정이 내려지고 법률이 통과되는 곳은 초정부적 차원이지만, 이러한 결정과 법률은 각국 정부를 통해서 이행된다. 모든 일은 협정에 의해 시행되어야 한다. 강제 수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징세 공무원도 없고, 유럽연합 경찰도 없다. 그러므로 유럽연합은 각국 정부에 의한 국제적 통치라는 특이한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1195)


유럽의 최하층이 빈곤과 실업뿐만 아니라 인종과 교리로도 결정되면서 "극우 정당들은 영국 국민당처럼 '소수 민족'에 반대하여 집결했든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처럼 '이민자'를 표적으로 삼았든 이 시기에 많은 소득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경제의 취약 계층으로 드러난 많은 노동자들은 더딘 경제 성장으로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경제적 불안정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좌파의 옛 기관들은 더는 그러한 불안정을 계급의 기치 아래 가두고 동원할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국민전선이 대체로 한때 프랑스 공산당의 보루였던 구역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소수 민족들이 자신들의 주변에 눈에 띄게 증가했기에, 그리고 동유럽에서 이어지는 수문이 일단 개방되면 훨씬 더 많은 외국인이 복지의 여물통으로 먹고 살거나, '우리의' 일자리를 앗아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극우파가 내세우는 주장의 호소력은 강했다."(1208-9)


"새로운 반체제 정당들은 다른 점에서도, 즉 청렴하다는 점에서도 이득을 보았다. 정권에서 배제되었기에 90년대 초까지도 유럽 제도의 토대를 갉아 먹고 있는 듯했던 부패에 오염되지 않았다."(1214) "진정으로 놀라운 일은 새로운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의 출현이 아니라 이들이 1989년 이후의 혼란과 불만을 이전보다 더 잘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유럽인들이 정치인들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지라도, 유럽 통치 체제의 핵심에는 가장 급진적인 반체제 정당들조차 감히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지지를 얻은 무언가가 있다. (민주주의나 자유 또는 법치 이념이 아니라) 실제 작동 방식에 이러저러한 결함들이 있다고 심각하게 지적될 때조차 유럽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이것은 바로 '유럽식 사회 모델European model of society'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미국식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과 대비될 때 비로소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1218)


"돌이켜 보건대 전후 몇 십 년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한때는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고착된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시기는 1914년에 시작된 유럽 내전의 연장된 에필로그였으며, 히틀러의 패배와 그의 전쟁이 미결로 남긴 사업이 최종적으로 해결되기까지 40년간 지속된 휴지기였다." "회복은 냉전을 극복하고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냉전 덕분에 가능했다. 소련 제국의 그림자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위협처럼 유럽을 줄어들게 했지만, 남은 유럽에게는 통합의 혜택을 부여했다. 서유럽 시민들은 동유럽인들이 감금되어 있는 중에 번창했다. 구대륙 제국들을 계승한 국가들의 빈곤과 후진성을 처리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은 덕택에 직전 과거의 정치적 여파로부터도 안전했다. 동쪽에서 보면 이는 언제나 협소한 시각이었다.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소련 제국이 붕괴된 뒤로는 이러한 시각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1220)


근대 국가가 세금을 걷고 전쟁을 수행하는 두 가지 밀접한 연관 기능을 수행한 것과 달리 "유럽연합은 초보적인 군사적 능력을 갖추는 데에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외교 정책을 마련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사정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반백 년 동안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1년 9·11 사건의 여파로 더 나은 유럽의 미래를 위한 탈국민국가적 처방의 한계는 명확해졌다. 어쨌든 전통적인 유럽 국가는 외부에서 전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평화를 강요했다. 이는 홉스가 오래전에 깨달았듯이 국가에 유일하고 독특한 정통성을 부여한다. 최근까지 비무장 시민에 대한 격렬한 정치적 전쟁이 만연했던 나라들(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독일)에서 국가의 중요성은, 말하자면 경찰과 군대, 정보부, 사법 기구의 중요성은 잊힌 적이 없다. '테러리즘'의 시대에 국가의 무력 독점은 대부분의 시민에게는 매력적인 재보험이다."(1295-6)


"유럽연합은 경제적 서비스와 기타 서비스의 주요 제공자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시민은 참여자라기보다는 소비자로 규정되며, 따라서 그처럼 야심적인 사업의 전례로는 유망하지 않았던 민주주의 이전의 스페인이나 폴란드, 또는 아데나워 시절 서독의 조용한 정치 문화와 노골적으로 비교될 위험성이 존재했다."(1297) 이처럼 "우리가 탈국민 시대나 탈국가 시대에 살고 있다는 환상은 '세계화된' 경제 발전에 지나치게 주목하고······ 인간의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유사한 초국적 발전이 틀림없이 진행 중이라고 추정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오로지 생산과 교환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유럽은 실로 초국적 물결이 깨끗이 연결된 플로우 차트가 되었지만, 권력이나 정치적 정통성, 문화적 친근성의 장소로 볼 때, 유럽은 여전히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개별 국가들이 모여 있는 익숙한 곳이었다. 민족주의는 대규모로 왔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민족들과 국가들은 여전하다."(1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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