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 전후 경제 호황의 종말과 보통 경제의 귀환
마크 레빈슨 지음, 조미현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1948년 1월에 미국 관료들은 점령지 일본의 경기 부진을 우려해 배상금을 받아내기보다 경제 재건에 역점을 두는, 머지않아 '역전 정책(reverse course)'이라고 명명할 새로운 정책을 공표했다." "4월에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마셜 플랜이라는 경제 원조 계획─소련과 그 의존국들은 즉각 거부한 원조─을 인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6월에 미국, 영국 및 프랑스의 군 당국은 새로운 화폐인 도이치마르크가 독일에서 소비에트연방이 점령하지 않은 지역의 법정 통화임을 선포했다." "역설적이게도 전후 세계를 동과 서, 독재 정권과 민주주의로 양분하며 유럽의 심장부에 드리웠던 '철의 장막'의 쇳소리는 부활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소련과 거기에 갇힌 동맹국 블록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장벽을 친 셈이었다. 투자자와 기업 경영자들은 프랑스나 일본이 결국 소련의 편에 설지에 관한 걱정에서 말끔하게 벗어났다." "1948년 하반기에는 공업 생산이 연 137퍼센트라는 믿기지 않는 비율로 증가했다."(34-5)


"경제적 중도주의는 정치적 중도주의와 손을 잡았다. 사회 복지 제도를 해체하려는 보수 정당은 한 곳도 없었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종교적 의무감의 발로이건, 재개된 계급 투쟁에 대한 공포 때문이건, 혹은 공공 지출이 더 건강한 경제를 만들 것이라는 투철한 신념에서건 많은 국가에서 그들은 열광적으로 사회 복지 제도를 지지했다." "처음에는 기적으로 보였던 경제 성과가 이내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해를 거듭해도 그런 상황은 지속됐다." "언제나 경제생활을 특정짓던 변동성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보내진 듯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적 성공은 자본주의의 야성적 충동이 아닌, 신중한 경제 계획 덕분이었다."(40-1) 존 케네디와 린든 존슨 대통령의 수석경제고문 헬러는 "향상된 통계와 컴퓨터 예측 기법을 통해서 물가를 상승시키지 않으면서도 실업을 정복하기 위해 지출과 세수를 조정하는 방법을 정부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역설했다. 헬러는 이러한 사고를 '신경제학'이라고 불렀다."(43)


장기 호황을 유지하는 정부의 역량에 대한 보편적인 신앙과도 같았던 이 신흥 경제학의 열렬한 신도인 서독 정치인 카를 실러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는 '합리적 완전체(rational whole)'였다. 정부가 할 일은 경제를 운용하는 게 아니라, 최적의 성과를 목표로 그것을 미세하게 조정하기 위해 세계와 지출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부가 고속도로에 쏟아부은 수백만 마르크의 지출이 어떻게 서서히 경제로 흘러들지를 보여주는 투입 산출 분석, 그리고 어떤 세금을 인하해야 일자리를 최대로 창출할 것인지를 밝혀내는 선형계획법 같은 기술로 달성될 터였다. 아울러 통계 분석의 새로운 방법론에 정통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데이터를 평가하고 중대한 판단을 내릴 터였다. 1956년 실러는 정부가 물가를 계속 안정시키면서도 완전 고용과 꾸준한 경제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법안으로 제출했다. 그는 이 경이로운 조합을 '마법의 삼각형(magic triangle)'이라고 불렀다."(48-9)


당시 '개발도상국'이라 부르던 나라들도 정부가 지휘하는 현대화를 향한 강행군에 착수했다. 프레비시에 따르면, "풍부한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공장의 제조품을 수입하는 것은 이들 주변부 국가들을 잘 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그들의 수출품 가격이 해외로부터 사들인 상품의 가격에 비해 장기간 하락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레비시는 무역에서 주변부 국가들이 갖는 열등한 지위가 그 나라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더 높일 수 있는 투자 재원 조달에 필요한 이윤 축적을 가로막는다고 피력했다. 따라서 불공정 무역은 라틴아메리카가 가난해진 근본 원인이었다."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에 관한 그의 생각은 어떤 면에서 카를 실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실러는 자본을 조합하고 어떤 산업이 투자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는 것은 민간 부문이 할 일이라 여긴 반면, 프레비시는 정부의 계획이 갖는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염두에 두었다."(59-60)


# 프레비시의 '종속 이론'


"프레비시는 유익한 정책을 집행하고 수입에 대해 보호책을 쓰면서도 나라 안에서는 경쟁을 장려하는 지혜로운 기술 관료들로 이뤄진 정부 부처를 마음속에 그렸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현실은 딴판이었다. 계획 부서는 나라가 무엇을 수입하고 수출할지, 새 공장의 부지는 어느 곳으로 하고 거기서 무엇을 생산할지, 그리고 위태롭게도 어떤 개인이 모두가 탐내는 허가를 받을지 결정하면서 민간 부문의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을 떠안았다. 끝없는 허가 요구는 지도자들의 가족 친지와 핵심 후원자가 수익성 좋은 독점 기업 운영권을 따냄에 따라 경쟁의 목줄을 죄었다. 가난한 소비자들이 부담할 비용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프레비시는 수입 대체를 개발도상국에 산업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면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할 단기 정책으로 간주했지만 투자자와 산업 노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수입 장벽을 그대로 유지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익과 부를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67-8)


"1960년대 중반 닉슨의 전임 대통령 린든 존슨은 세금 인상이나 사회 보장 프로그램 축소 없이 베트남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군비·민생 양립(guns and butter)' 정책을 펼쳐온 터였다. 연준은 정부가 전쟁 자금을 싸게 융통할 수 있도록 확실한 단기 저금리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존슨의 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했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양립 정책은 거의 모든 국민의 일자리와 임금의 급격한 상승을 보장했다."(71) 그러나 베트남 철수와 더불어 실업률 증가와 인플레이션 상승이라는 불행한 조합이 발생하자 "1970년 초 번스의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폈다. 몇 달 뒤에는 방향을 뒤집어 실업률을 낮출 거라는 희망 속에서 공격적일 정도로 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1970년 5월에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통화 정책만을 사용할 경우 '매우 심각한 경기 불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닉슨에게 임금 및 물가 상승을 검토는 하되 규제하지 않는 위원회의 창설을 촉구했다."(74)


"(미국의 저금리 정책이 초래한 불을 끄기 위해, 즉 물가를 잡기 위해) 각국 정부는 너무나도 감쪽같이 반反인플레이션 정책으로 전환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번스의 축복을 받으며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해 90일 간의 임금 및 물가 동결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또한 다른 나라 정부가 더 이상 그들의 달러와 금을 맞바꿀 수 없다고 돌연 선언─이른바 닉슨 쇼크(Nixon Shock)로 알려진 선언─했다."(77) "아서 번스의 금융 완화 정책은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고, 경제는 터보 엔진을 단 듯 급성장했다. 몇몇 나라에서는 단기 금리가 너무 떨어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기업이 대출 비용보다 적은 융자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대출을 해서라도 건물을 올리고, 설비를 구매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강력한 인센티브가 있었다." "그러나 청구서는 곧 만기가 도래할 터였다." "닉슨이 재선에 성공할 무렵, 세계 모든 주요 경제국의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79-80)


"되살아난 인플레이션과 환율의 혼란이 금융 시장을 뒤흔드는 동안, 여론층은 다른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세계가 곧 경제적 심연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문제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지금은 지나치게 경기가 좋은 때라는 현실이 걱정이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수준의 부를 창출한 성공적인 추진력이 경제적·환경적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새로운 환경주의는 1970년대 초 경제 성장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인구보다 확실히 더 풍족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단인 그 지지자들에게 소득 인상과 물질적 풍요 확대란 찬양할 성취가 아니라 맞서야 할 문제였다."(81) "환경에 대한 1970년대 초의 위기의식 증대는 또 하나의 떠오르는 관심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바로 인구 과잉이다." "환경 운동과 인구의 제로 성장을 위한 관련 운동은 놀라우리만치 정치적 국경을 초월했다." "어느 날 아주 갑자기 녹색은 좋은 것이 됐다."(85-6)


"새로운 환경 운동은 군림하던 경제학적 통설을 향한 직접적 도전이었다. 많은 논평가들이 관찰했듯 1인당 소득이나 국민총생산의 증대 같은 전통적인 경제 지표는 환경적 고려 사항을 왜곡된 방식으로 설명했다. 제련소와 정유소에서 나오는 산출량 증대는 그 결과로 유발된 오염 물질 증가의 악영향을 전혀 차감하지 않은 채 순 플러스(+)로 기록됐다. 그러나 터무니없게도 만일 기업이나 정부가 사후에 오염수 정화에 돈을 투입할 경우 그것 역시 경제 성장으로 집계됐다. 더 많이 오염시킬수록 경제가 더 빨리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환경주의자들의 불만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완전히 잘못된 결론이 도출됐다. 경제 성장은 단지 허구일 뿐이라는─혹은 더 나쁘게도 번영은 적이라는─것이었다." "이 새로운 관념에서 경제 성장이란 참을 수 없는 공해이자 헤아릴 수 없는 환경적 해악이며 천연자원의 무모한 고갈을 의미했다."(88)


"산유국들은 언제나 미국달러로 자국의 생산물 가격을 매겨왔는데, (브레턴우즈 체제의 폐기가 초래한) 달러 붕괴는 수백만 배럴의 석유로 더 적은 독일 트럭과 일본의 I빔(I-beam) 철재를 구입하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94) "1973년 10월 6일은 욤키푸르, 즉 속죄일로 유대인 달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이었다. 전후의 장기적 경제 성장이 단 하나의 날짜에 정점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욤키푸르보다 더 나은 후보는 없었다." "(골란 고원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진 지) 48시간 만에 중동 6개국은 유가를 2배 올리는 데 동의함으로써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석유 수출국들은 석유 회사 임원위원회와의 협상이 지연되자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10월 16일 그들은 새로운 기준 유가를 공표했다. 배럴당 5.12달러였다. 훗날 야마니는 "OPEC이 권력을 잡은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고 술회했다. 1973년 초부터 9개월 만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의 가격이 거의 2배로 올랐다."(102)


"1970년대에 중앙은행 총재들은 대략 한 달에 한 번 바젤에 모였는데, 여기서 일 이야기라 함은 보통 경기 여건에 관한 논의를 뜻했다. 1974년 3월과 4월의 화제는 석유 수출국들의 팽창하는 부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부자 나라의 은행들로 밀려드는 달러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다른 통화로 전환해 그 돈을 빌려줘야 했다. 이는 설령 채무자들이 대출금을 제때 갚는다 해도 갖가지 위험 요인을 창출했다. 만일 환율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대출 상환금이 은행의 예금주에 대한 달러 채무 가치보다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석유왕국이 갑자기 자국의 달러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기라도 하면, 그것을 영국의 파운드(pound)나 네덜란드의 휠던(gulden)으로 전환해 5년짜리 대출을 해주는 데 써버린 은행은 현찰이 절박한 상황에 봉착할 것이다. 이는 섬뜩한 전망이었다. 은행들은 글로벌 금융과 변동 환율이라는 신세계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18-9)


# 잉글랜드 은행 총재 리처드슨이 영국 금융가에 도입한 조치

1. 국내용 : 은행들이 은행감독부에 정기적으로 융자금, 예치금, 차입금 운용 상태를 상세히 기록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했다.

2. 국제용 : 전 세계로 대출된 해외 달러의 유입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바젤 논의를 제안했다.


(석유 가격의 상승으로 넘쳐나던 오일 달러가) "금융 시스템을 타고 빠르게 흘러들었으므로 전 세계 은행은 프랑크푸르트와 뉴욕에서, 베이루트와 애틀랜타에서 문을 활짝 열고는 앞다퉈 예탁금을 유치하고 예전에는 접촉하지 않던 대출자에게 융자를 제공했다. 수익 사업으로 몰려들던 은행 다수는 국제적인 대출에는 초보자였고, 자신들의 신규 고객에 대해 잘 몰랐다. 이는 시한폭탄이었고, 감독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한 은행이 대출을 더 많이 해줄수록 채무 불이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챙겨둬야 한다. 그러나 은행장들은 자본 보유분의 증대가 주주들에게는 더 낮은 수익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골치 아프지만 잘 알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많은 은행에 자본이 거의 없었다."(130-1) "오일 달러가 계속 밀려들고 국제적인 대출이 호황을 맞으면서 은행들의 인상적인 성장은 나날이 취약해져가는 그들의 토대를 가려줬다."(132)


"20세기 초 이래로 미국에서 주의 경계를 넘어가는 석유 파이프라인 하나당 부과하는 요금은 연방의 규제 아래 있었고, 1932년 연방 의회는 국내 생산업체의 기름 판매를 확실히 하기 위해 수입한 석유, 가솔린 및 윤활유에 세금을 부과했다." "미국 석유는 수입 석유보다 18퍼센트 더 팔렸지만 모든 정유사는 가솔린과 디젤 연료의 출처와 무관하게 똑같은 값을 받았고, 이는 국내 석유에 더 의존하는 정유사가 이윤 감소에 부딪치리라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정유사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능한 한 많은 배럴을 수입할 절박한 동기가 있었다." "값비싼 국산 석유 구매를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이들 대형 정유사는 정치적 이유로 특별 수입 쿼터를 할당받은 군소 정유사와의 거래에서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 군소 정유사는 자신들보다 큰 정유사의 '첩(妾)'이 되기로 계약서에 서명했고, 원유를 직접 정제하느라 힘들일 필요 없이 높은 가격에 자신들의 수입 쿼터를 되팔았다."(140-2)


"(석유 수입 쿼터제는) 닉슨의 반反인플레이션 프로그램이 물가 상승을 제압하려던 순간에 더 높은 가격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했다. 게다가 국산 석유 사용 의무 조항은 미국의 석유 비축분을 고갈시키고, 타국의 비축분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프로그램이 의도한 목적과 정확히 반대였다." "시카고 대학에 재직 중이던 조지 스티글러와 로널드 코스 같은 경제학자들은 특정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정부 기관의 지시보다 경쟁에 의해 결정할 때 경제가 호전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950년대부터 규제 완화의 학문적 틀을 제시해왔다." 정치인들은 미국에서 석유와 가스 생산이 늘어나길 바랐지만, 탐사용 시추공(wildcat wells, 상업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은 최초의 유정) 개발자들이 더 많은 유정을 뚫도록 부추길 여지가 있는 유가 인상은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에너지 정책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우왕좌왕했고,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헛된 노력 속에서 불행히도 규제 위에 또 규제를 쌓아 올렸다."(142-4)


높은 가격과 비효율성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규제 완화의 첫 번째 타겟이 된 "운송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의회는 1980년 은행이 예금주에게 지불할 이자율의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예상을 뒤엎고 그 법률은 금융 산업의 대규모 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경제의 어떤 부문이 가장 신용을 받을 만한지 결정하는 권한을 정부 관료에게서 빼앗아갔다. 전자통신, 전력 및 기타 산업에서 경쟁을 제한하던 미국의 규제는 곧이어 면밀한 조사 대상이 됐고, 석유와 천연가스의 규제 완화도 다시 정치적 의제로 등장했다. 이런 움직임은 신속하게 해외로 확산됐고, 비평가들은 상점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상점이 팔 수 있는 품목을 제한하고, 가격을 담합하는 카르텔 결성을 허용하고 높은 국제 항공 운임을 보호하는 법안을 표적으로 삼았다. 1978년에는 루이 14세 시대 이래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온 프랑스에서 185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가 빵 값에 대한 규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151)


"득실을 따져보면 규제 완화의 결과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옛날 직종과 옛날 회사가 사라진 반면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기업이 등장했고, 규제로 보류됐던 새로운 상품─변동 금리 예금 계좌, 휴대전화, 골퍼와 미식가의 구미에 맞춘 민영 텔레비전 채널─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가져다줬다. 예전에는 규제 기관에 의해 좌우됐던 가격과 서비스를 협상할 수 있게 된 회사들이 자신의 사업을 더욱 생산적으로 운영할 방법을 모색함에 따라 경제 성장은 힘을 받았다. 그러나 황금기의 본질적 양상이던 안정과 안전은 그걸 감싸주는 규제라는 틀이 없어지면서 심각하게 훼손됐다. 정부들이 생산성 증가를 회복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려 노력하면서, 안정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되고 말았다."(152-3) 규제 강화와 규제 완화라는 구호에는 이념과 이익 모두가 걸려 있었다. 정부 정책은 그 균형의 담장 위에 올라선 심판이었고, 심판은 경기 중에 거의 예외 없이 양쪽으로부터 비난받기 일쑤였다.


굴뚝 산업을 바탕으로 고도 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은 유가 인상에 직격탄을 맞았지만 석유 청구액을 지불할 만한 충분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여전히 수출에 박차를 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본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굴뚝 산업은 에너지 부족과 초과 작업에 짓눌려 시들기 시작했다." "정부는 구舊경제의 쇠퇴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대량 실업 방지 계획을 들고 개입했다. 하향 산업 부문의 노동자를 성장세에 있는 산업으로 이동시키는 고용주에게 리베이트를 줬다. 인건비 보조금, 직업 훈련 보조금 및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직장을 구하는 노동자를 돕는 장려금이 있었다. 근로 시간이 줄어든 노동자의 임금을 벌충해주는 보조금도 있었다." "구舊경제는 신新경제에 자리를 내줬다. 신경제에서는 공학과 디자인이 값싼 에너지와 값싼 노동보다 더 중요했다. 일본은 톤 단위로 팔리는 소비재가 아닌 자동차, 고급 전자 제품 및 정밀 기계를 만들어 잘 살게 될 터였다."(162-4)


"두꺼운 책자를 채울 만큼 많은 규제가 수입을 제한하는 한편, 새로 구조 조정을 마친 수출 기구가 기어를 고속으로 바꾸면서 일본은 전례 없는 규모의 무역 흑자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흑자가 죽은 경제를 부활시켰다. 1975년이 되자 일본은 1973년 이전보다 훨씬 느리긴 해도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산업화한 경제 대국을 앞질렀다. 그러한 이익이 일본 스스로 소정의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밝혀졌다. 정부는 지식 집약적인 제조업 구축에 세밀한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 나라의 놀라우리만치 비효율적인 서비스업 부문을 거의 간과했다. 1980년 일본의 서비스업 부문 생산성은 1970년보다도 낮았다. 대형 점포 개설의 장벽, 트럭 운송의 경쟁 억제, 그리고 은행의 주말 현금인출기 운용 금지를 비롯한 많은 유사한 규제는 향후 몇 년간 경제 성장의 걸림돌로 여겨졌다."(166)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정부도 산업 전체의 종말과 거기에 따라오는 일자리 손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167) "노동자 계층을 돕는다는 대의명분으로 곤경에 빠진 산업을 구제하는 것은 1973년 이후 10년간 산업화한 세계 전역에서 주요 프로젝트가 됐다. '구조 조정'이라는 지시문 아래 수익을 못 내던 제조업체는 정부의 직접적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를 챙겼고, 정부의 수입 제한 및 카르텔 합법화 같은 경쟁 완화 정책으로 가격을 높일 수 있게 되면서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거둬들였다. 그러나 실제 들어간 비용은 인상된 상품 가격과 특혜받은 회사가 빼먹은 보조금을 훨씬 넘어섰다. 전 세계가 생산성 증가의 둔화로 고전하던 시기에 대부분 국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산업보다는 성장 가능성이 희박한 부진한 산업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그 최종 결과는 생산성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심화하는 쪽이었다."(173-4)


"노동 임금 상승의 급격한 둔화와 소득 격차 증대의 이유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것은 정치적 결정─어떤 나라에서는 최저 임금 인상 실패, 다른 나라에서는 고용을 가로막는 규제 강화, 부국의 노동자를 저임금 국가와의 경쟁에서 더욱 취약하도록 만든 국제 무역 협약, 그리고 직원의 급료나 자신의 직무 성과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이 기업체 사장들이 스스료 급료를 책정할 수 있게 만든 법률─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순전히 국가 내부적인 설명만으로 미진하다. 사회적·정치적 영향은 나라마다 각기 달랐던 반면 임금 상승 둔화 및 격차 확대는 전 지구적 현상이었고 고소득 국가 전체와 중간 소득 국가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글로벌한 추세의 중요 원인은 역시 글로벌할 필요가 있다." 국민 소득 중에서 배당금이나 자본 수익, 정부 세금 등을 제외하고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노동 분배율(labor share)은 1970년대 하반기에 한 나라만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 하락하기 시작했다."(186-7)


"사회 복지 제도는 놀라운 성취였다. 수백만 명의 연금 수령자는 노령에도 더 이상 극심한 빈곤에 처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찾았다. 상해보험은 노동자의 가족이 작업 중 상해를 당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줬고, 의료보험은 최하층 아이들까지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실업보험은 실직자뿐 아니라 그들이 애용하던 상점과 그들이 제품을 구매하던 제조업체의 불황이 할퀸 고통을 다독여줬다. 경제학자들은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자동 안전장치'라고 표현했는데, 힘든 시기가 왔을 때 그것이 소비자의 손에 돈을 쥐어줬으므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베푸는 정부란 공짜로 생기는 게 아니었다."(195) "1970년대에 경제 환경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환율 및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가능하고 미래가 매우 불확실해 보이면서, 사회 복지 재원 조달을 위해 어느 때보다 세수를 많이 늘리려던 정부의 시도는 더욱 심한 저항에 부딪히기 시작했다."(200)


"통치 불능(ungovernability)은 1970년대 중반에 이 용어를 받아들인 대로 사회 불안보다는 정치 마비와 더 관련이 있었다. 이는 두 가지 근본적 사회 변화의 결과로 알려졌다. 하나는 교육과 풍요가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줬다는 것이다. 시민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그들이 속한 교회, 노조, 혹은 기업 조직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자기들에게 최대 이익이 되는지를 스스로 결정했다. 또 다른 변화는 정부가 많은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서비스와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실질적으로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시민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정부의 행동을 주시했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일어난 이 두 가지 변화는 정치인이 어떤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 아래 결정을 내리면 순종적인 유권자는 그걸 따를 거라고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 복지 제도가 안긴 선물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되었다."(208)


# 의제 대표 기능에서 특화된 소수 이익 집단이 다수가 공감하는 대규모 집단을 앞지르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


"철의 장막 뒤에서 비선출 공산당 정권에 지배당하던 소련 의존국들은 서유럽, 북미, 일본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던 나라들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 통치 불능의 위기에 돌입했다. 소비에트 블록 국가들은 흔히 경제가 마비된 나라들로 기억되지만, 이는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다." "공산 경제 계획자들은 규모의 경제에 관한 한 광신자였다.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를 통해 산업화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산 경제 국가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는 제법 강했지만, 소비자들이 실제 원하는 물건을 생산하는 데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무기류와 중공업 제품이 우선이었으므로 일반 가정을 위한 아파트와 자동차는 자원을 차지할 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산출된 결과물은 천편일률적으로 조잡하고 구닥다리였다. 왜냐하면 품질이나 혁신에 대한 보상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만족은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 요긴할 때에만 우선순위에 들었다."(212-4)


새롭게 등장한 이념적이기보다는 능력 있는 비즈니스형 지도자들은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침식하고 시민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드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은 사회 복지 제도의 한계를 인식했고, 대중의 세금 인상 반대가 심각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기업에 매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수익성만이 회사로 하여금 투자를 증대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즉각 인정했다. 그들은 높은 유가가 국내 제조업의 많은 부분을 쓸모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대중에게 말했던 것과 달리 폐쇄된 공장 대부분이 결코 다시 문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생산성 증가를 회복하는 것이 번영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에서 최대의 도전 과제가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서로 간의 잦은 회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기의 미미한 반등을 끌어냈을 뿐이다."(216)


#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일본의 미키 다케오, 미국의 지미 카터


"사민당은 1932년 이래 줄곧 스웨덴을 통치해온 정당이었다. 대부분의 스웨덴 국민은 다른 정당이 나라의 조타기를 조종하는 걸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기나긴 기간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침체기로 접어들던 1976년 9월 19일 유권자들은 정권에서 사민당을 쓸어버렸다. 충격의 여파는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런던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스웨덴식 모델이 개조에 들어간다"고 흥분해서 보도했다."(220) "독일, 네덜란드 및 스칸디나비아의 노조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노조원의 급료를 올리고 나머지 경제 부문에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거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전투적 역사를 간직하고 고용주들이 제안한 변화라면 무엇이건 완강하게 반대하던) 영국의 노조 위원장들 사이에서 그런 말은 거의 이단이었다. 전국광산노조는 국영인 전국석탄청(National Coal Board)이 심지어 200년간 파내 제 역할을 다한 광산을 폐쇄하려는 것마저 반대했다."(223)


1978년 노동당 정부가 임금 인상 5퍼센트 안을 제시하자 "자동차 제조공, 화물차 기사, 철도 근무자, 간호사, 심지어 무덤을 파는 사람(gravedigger)까지 일터를 박차고 나갔다. 병원은 환자를 돌려보냈고, 닭은 사료 부족으로 죽어갔다. 1978~1979년의 어둡고 눈 많던 겨울은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청소차들이 실어가길 거부한 탓에 런던 시민의 쓰레기가 레스터 광장에 수북이 쌓였던 겨울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거의 3000만 노동 일수(workday)가 파업으로 사라져버림에 따라 생산은 붕괴했다. 갈등이 마침내 타결됐을 때, 파업 노동자들은 정부의 기준선 5퍼센트보다 훨씬 높은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그리고 1979년 3월, 단 한 표 차이로 의회는 캘러헌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했다." "노동당을 사양길로 밀어낸 것은 비단 경쟁적인 사상이 등장해서만은 아니었다. 노동당의 몰락은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을 가져온 경제 모델이 파탄난 결과였다."(225-7)


# 마거릿 대처 정부의 등장


"레이건이 보수 정당의 기수가 된 1976년 전통적 온건파이던 공화당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어떻게든 그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당시 경제는 1973~1975년의 불황에서 회복 중이었고 물가 상승률은 하락세였으며 아직은 미국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1979년 하반기에 채권 시장이 예측한 불황이 예정대로 닥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11퍼센트를 상회하는 담보 대출 이자율이 언젠가는 집을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젊은 세대의 희망을 꺾고 건설 현장의 철골 조립공과 자동차 공장의 공구 제작공에게 강제 해고 통지가 나붙자, 비로소 보수 정당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왔다. 언어 구사와 그가 내뿜는 자신감에서, 레이건은 통치 불능의 세상이 됐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됐다. 그는 강인한 이미지를 투사했고, 미국 정부가 적절히 관리하기만 하면 대외적으로 적들에 맞서고 대내적으로 번영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어떤 확신을 보여줬다."(230)


"대처주의는 신화를 창조한 이들의 주장처럼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경제가 산소에 굶주려 있던 대처의 임기 초반 2년간 영국은 1930년대 초 이래로 가장 혹독한 모순을 참아냈다. 성장을 부활시킨 것은 멀리 북해 연안의 새로운 유전에서 뽑아 올린 세수를 제외하면 통화 정책에 대한 새롭고 한층 절충적인 접근법이었다. 정부는 M3에 대한 숭배(통화 공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인플레이션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견해)가 실수였음을 시인하지 않았지만 점진적으로 통화주의를 완전히 포기했다. 1982년 하우는 잉글랜드 은행이 향후 M3, M1, 환율 및 기타 요인의 조합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의회에서 말했다." "대처는 이 나라의 경화증이 시대에 뒤떨어진 기관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두 가지가 그녀의 분노를 자극했다. 바로 노조와 국영 기업이었다. 자신의 통화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을 때 대처는 시야를 양쪽으로 돌렸다. 그들이 대체로 노동당 지지의 온상이라는 사실은 보너스였다."(245-6)


# M1 : 현금 + 당좌예금 예치금 / M2 : M1 + 보통예금 / M3 : M2 + 예금 증서 + 은행 외부의 통화 시장 계좌에 있는 일부 단기 자금


"대처의 승리는 노조원, 보통 때는 노동당을 뽑았지만 집을 사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는 열망을 가진 국민 덕분이었다. 이 계층 상승 가구들은 노동당의 무능함에 질려 전통과 단절하고 1979년 보수당을 찍긴 했지만, 그럼에도 노조의 가치를 믿고 있었다. 보수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이들 유권자의 계층에 대한 충성심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대처는 기나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동당 유권자를 적대시하지 않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출발점은 노조를 공격하거나 영국철강을 매각하는 것이 아닌, 국민이 자신의 집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1979년 정부는 '공영 주택(council housing)'으로 알려진, 지역 당국이 소유한 주택의 세입자에게 시장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개별 주택을 구입할 권리를 승인하는 법안을 도입했다. 10가구당 1가구가 공공 주택에 살았으므로 이는 대중을 위한 민영화였다." "'매입권(Right to buy)'으로 알려진 이것은 노동당의 핵심 선거 구민을 겨냥했다."(250-1)


"1979~1981년까지 초기의 통화주의 실험은 어느모로 보나 재난이었다. 1981년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이후 서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제가 커지면서 상황이 호전됐지만, 아직 활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플레이션은 국제 표준으로는 여전히 높았다. 1979~1989년 소비자 물가는 연간 7.5퍼센트 비율로 상승했는데, 이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주요 경제국보다 높은 수치였다. 영국의 공장들이 대처가 처음 다우닝가 10번지로 이사했을 때만큼 많은 생산량을 기록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9년이 지난 1988년 겨울이 되어서였다. 대처가 재임 말기에 영국 경제의 성장을 부활시켰다고 설명하는 것도 역시 맞지 않다. 노동 생산성은 11년 재임 기간 동안 과거 10년 동안보다도 더디게 증가했다. 수년간의 형편없는 경제 성과에 이어 1980년대 하반기에는 몇 년간 강력한 성장이 있긴 했지만, 보수당의 정책 전환이 영국 경제를 아주 건강하게 되돌려놨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옳지 않다."(257-8)


"공산당 지지자로부터 표를 끌어오는 동시에 중도파 유권자를 지스카르 연합에서 분리시키는 데 맞춰진 프랑스 사회당의 1981년 선거 운동 공약은 상당히 정통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다. 이를테면 중공업의 국영화, 부유세 신설, 15만 개의 정부 일자리 창출, 대규모 공공사업 프로그램, 최저 임금 인상, 전 국민을 위한 유급 휴가 5주, 그리고 유자녀 가구의 보조금 인상이 그것이다." "미테랑 표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그의 각료 중 4개 장관직을 확보한 공산당은 사회당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부가 연금, 가족 수당 및 주택 수당을 늘리고 건설 프로젝트의 자금을 대기 위해 돈을 빌림에 따라 공공 지출은 1982년 27퍼센트나 부쩍 뛰었다. 그런 자극이 경제의 급성장을 불러오기는 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인당 소득은 1.7퍼센트 증가했다. 그러나 환호성을 지르는 신문 헤드라인 아래 1982년의 경제 지표는 대부분 마이너스였다."(268-9)


"아낌없는 적자 지출이 유발한 경제의 급성장은 1982년 하반기 들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고용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나쁜 소식만 접한 사회당은 수사법을 한풀 누그러뜨려 기업가를 노동자의 착취자 대신 일자리 창출자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장관들은 인상된 세금과 사회 보장 부담금이 수익을 압박하고 투자를 감소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주요 기업 임원들과의 소통을 조용히 재개했다."(273) "신성하게 여기던 사회주의 사상이 더 이상 자유 시장 사상을 대체할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국영 기업이 아닌 민간 부문에서 경제 회복을 꾀하는 새로운 버전의 사회주의를 창조해야 할 터였다. 경쟁을 장려하고, 규제 해제를 단행하고, 기업이 수익을 내도록 지원하고,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 모두가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는 새로운 사회주의 공식의 일부였다."(278-9)


"(레이건 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경제 고문 집단이자) 종교적 열정과 자유의지론적 광신이 조합된 공급 중시 학자들은 1973년 이래로 미국을 괴롭히는 경제적 슬럼프가 정부 대책의 결과라고 믿었다. 정부가 국민이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풍요롭다고 느끼게끔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경제 정책은 소비자 수요를 늘리려 애쓸 게 아니라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는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발명가, 사업가 및 투자자─다른 말로 하면, 경제의 공급 측면을 제공하는 사람들─를 장려해야 한다는 게 공급중시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공급만이 수요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역설했다. 공급을 확대해야만 경제의 산출량이 늘어나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급 중시 사상은 경제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는 정부가 특히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돈을 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293)


"공급 중시 경제학은 교수가 아닌 논객들의 창조물이었다." "경제학자 아서 래퍼가 워싱턴의 한 레스토랑 냅킨에 처음 그렸다고 전해지는 일명 '래퍼 곡선(Laffer Curve)'에 대해서도 실증적 뒷받침은 없었다. 래퍼 곡선은 세율을 얼마나 낮춰야 경제 활동을 많이 자극해 정부의 세수를 증대할 정도가 될 수 있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래퍼의 이론은 추상적 명제였으므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세율이 너무 높아지면 사람들이 더 이상 많은 소득을 벌려는 수고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로 그 시점에서 세금 수령액은 하락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했다. 그러나 래퍼의 스케치는 그 시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고, 공급 중시 진영의 어느 누구도 기꺼이 이를 추측해보려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증거가 있건 없건 세금 인하가 경제를 활성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295-6)


"미국에 투자한 외국인에게는 특히나 즐거운 시절이었다. 1983~1986년까지 미국 정부는 경제 규모 대비 국민소득의 평균 5퍼센트 연간 적자를 발표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즉각적 여파 이래 단연 최고치였다. 정부의 막대한 대출 수요는 인플레이션 폭락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잣대로 봤을 때 높은 금리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그 높은 금리가 해외로부터 전례 없는 액수의 돈을 끌어들였다." "투자자들은 달러의 상승세가 다른 통화로 환산했을 때 그들의 재산을 불려준 바로 그 시기에 미국의 주식과 채권 시장까지 호황을 누리면서 두 가지 방식으로 번창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조업체는 훨씬 더 힘든 상황에 봉착했다." "수입품을 더욱 저렴하게 만든 달러의 강세 덕분에 미국에서 수입하는 제품의 가치는 1981~1986년 40퍼센트 상승한 반면, 미국의 수출품 가치는 하락했다. 공업 도시는 일자리가 없어지고 소득이 떨어지면서 황폐해갔다."(302-3)


"1992년 연준의 경제학자들은 레이건 시대가 소수에게는 많이, 그러나 다수에게는 거의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논평했다." "레이건의 경제학자들은 투자자가 소득을 더 늘리도록 허용하면 경제를 현대화하고 생산성을 자극할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공급 중시 경제학은 실패작으로 판명났다." "이렇게 실망스러운 상황이 된 하나의 원인은 그레타 크리프너가 '금융화(financialization)'라고 지칭한 것이었다. 금융 규제 완화와 고금리의 조합은 급속히 팽창하는 신용 시장에서 기업들이 돈 놓고 돈 먹기에 주력하는 것을 온당하게 만들었다. 그런 전환은 "비금융 기업들이 공장의 장기적인 설비 투자로부터 자본을 빼내 금융 투자로 자원을 돌리는 형태를 취했다." 이런 추세는 일찍이 레이건이 지명한 산업경쟁력위원회가 금융 자산에 대한 투자 수익이 제조업 자산에 대한 수익보다 높다는 것을 관찰한 1983년 익히 알려졌고, 그 10년 동안 더욱 확연해졌다."(306-7)


"1970년대 제3세계의 폭발적 성장은 고든 리처드슨과 아서 번스 같은 중앙은행 총재들에게 그토록 심려를 끼치던 오일 달러가 부채질한 결과였다." "제3세계의 대출 수요는 어마어마했다. 은행장들은 베풀 수 있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 돈이 개발도상국에서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공산주의 사상 확산에 대한 방어벽을 구축하길 바란 정부는 은행장들을 재촉했다."(312) "차용국 중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국고를 돼지 저금통처럼 다루면서 조사는 고사하고 의회나 언론의 비판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는 독재자들이 다스렸다. 인상적인 경제 통계─1973~1980년 개발도상국의 생산량은 연간 4.6퍼센트의 높은 비율로 성장했다─로 인해 외환 대출 대부분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늘리거나 소작농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는 거의, 아니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겉보기에만 번드르르한 프로젝트에 투입됐다는 사실은 가려졌다."(315)


"파티는 1980년대 초 갑자기 잔인하게 끝났다. 1970년대 말 내내 인플레이션이 치솟으면서 런던과 뉴욕의 은행은 고정 금리 대출을 중단하고 변동 금리 대출로 전환해 이자율이 금융 시장 상황에 따라 변했다. 연준의 새로운 통화 원칙이 금리를 밀어 올린─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1년짜리 채권에 대한 총수익은 1978년 8퍼센트에서 1981년 17퍼센트까지 치솟았다─1979년 10월 이후 차용국들의 이자 지급액 역시 올라갔다."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투자가 목적이던 이 도피 자금은 대부분 신용을 연장해준 바로 그 부자 나라 은행으로 다시 들어갔고, 차용국 정부들은 자국에 아무런 경제적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은 대출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1981년 달러 가치가 다른 통화에 대비해 상승하기 시작하자, 그 압박은 훨씬 더 강해졌다. 차용국들은 단지 예전과 똑같은 액수의 달러를 벌기 위해 더 많은 커피, 밀, 야자유를 수출해야 했기 때문이다."(316)


# 멕시코 모라토리엄 선언과 금융 위기의 전염


"채무 위기는 단편적 해결책으로는 불가능했다. 은행이건 차용국이건 도망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은행이건 차용국이건 파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잠재적으로는 서유럽과 북미 그리고 일본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320) "IMF의 대출에는 조건이 붙었다. IMF는 차관을 요망하는 나라에 1센트라도 넘겨주기 전에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개발할 전문가팀을 파견했다. IMF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정부는 돈을 받지 못했다. 그런 다음에도 대출금을 일정 비율로 나누어 지급하는─분할 발행이라고 알려진─방식으로 넘겼으므로, 만일 차용국이 약속한 개혁을 시행하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서든 현금의 흐름이 끊길 수 있었다. 스스로를 정치에는 관심 없는 기술 관료로 여기는 경제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긴 했지만 IMF는 매우 정치적인 조직이었고, 차관을 희망하는 나라에 그들이 부과한 조건은 미국 및 유럽 관료의 시각을 반영했다. 관례상 총재는 유럽인이었다."(322-3)


"(레이건 행정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채무 위기의 기저에 있는 원인은 은행의 현명하지 못한 대출이나 소비재 하락 혹은 1979년 이후 급등한 금리가 아니라 채무국 자체의 행동이었다. 이제 워싱턴은 이런 나라들의 정부가 지나치게 크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통에 민간의 자율성을 짓누르고 번영을 망친다고 천명했다." "IMF와 세계은행은 자유 시장 정책이 마침내 채무국을 성장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새로운 통념을 널리 퍼뜨렸고, 과거 상향하달식 계획과 정부 지시에 의한 투자를 선호하던 자신들의 입장을 단숨에 뒤집었다. 채무국의 국민 다수도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프레비시가 오래도록 주창해온─수입 장벽으로 뒷받침된─정부 주도 산업화가 지속 가능한 번영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이 새로운 시장 지향적 사고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이를 개발도상국이 자신들의 부채를 딛고 일어나도록 도와줄 원칙이 담긴 반半공식적 개요서라고 말했다."(328-9)


정치적으로 조율된 경기 부양책이 "수명을 다하고 나면, 한 경제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은 전적으로 생산성 증가에 의존한다. 1970년대 초 이후 모든 경제 부국의 생산성 증가는 경제 정책과는 무관한 이유로 인해 예전보다 현저하게 느려졌다. 전후 시대에 더욱 생산적인 노동으로 옮아갔던 거대한 저활용 노동 인력을 다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소농과 소작인은 오래전에 도시로 이주했고, 예전에는 무직이던 여성 노동 인력의 유입도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건설과 항구의 현대화처럼 거의 즉각적으로 생산성 증대를 끌어낼 수 있는 유형의 공공 부문 지출도 시행됐다. 노동력에 유입되는 청년 인구는 부모 세대보다 학력이 높긴 했지만 읽고 쓰는 능력이 경제 부국에서 거의 보편화한 이상 평준화 교육으로 생산성이 급증하던 시대는 이제 과거가 되었다. 미래의 복리 증진은 얼마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338-9)


"전자통신과 화물 운송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정보를 여기저기로 전달할 수 있는 컴퓨터가 발전함에 따라 대규모 조직을 적은 부분으로 쪼개 각각을 노동 수급, 공항, 철도 노선, 정부 보조금 또는 그 밖의 매력적인 것을 활용하도록 배치하거나, 아니면 이제 원거리 관리가 한층 수월해진 회사에 특정 과제를 맡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전출된 노동자는 자신이 수년간 쌓은 경험과 훈련이 다른 산업에서는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급료가 더 적은 일자리 아니면 실직이었다. 주요 사업체가 사라진 지역 사회는 소득과 세수의 출혈이 심했고, 공공 서비스와 생활 편의 시설 비용을 댈 재원이 없어졌으며, 많은 경우 장기적인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기업은 새로운 과학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사업의 구조 조정은 결코 고통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1980년대에 이러한 변화는 국경을 초월했고, 이것이 장차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점이었다."(341-2)


"서민 가구에는 소득 증가의 둔화가 생활 수준 향상의 둔화를 의미했다. 가족 규모가 작아져 확실히 소득은 과거보다 약간 더 늘어났고, 거의 모든 사람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물질적 발전의 혜택을 입었다. 스마트폰과 가정용 컴퓨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건이 됐다." "그러나 성장 약화가 사회 복지 제도의 재정적 실행 가능성을 낮추면서, 실업 수당은 줄고 연금은 동결 또는 한꺼번에 삭감되고 수업료는 올랐다. 분노를 달랠 한 가지 수단은 신용 거래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생에서 더 이상 현찰로 사치품을 구입할 여유가 없던 사람들이 그걸 향유하기 위해 더욱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2008년 미국과 유럽에서 그러한 실험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정체된 생활 수준은 정치적 주류의 변방에서 싹튼 반체제 운동의 부상으로 전개됐고, 이것이 불만을 품은 다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냈다."(344-6)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조치는 노동을 위해 자본의 힘에 제한을 둔 것으로 종종 설명되어왔다. 그것은 실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었다. 전후의 협상은 노동자만큼이나 그들의 고용주에게도 굴러 들어온 복이었다. 당대의 가장 과격한 반자본주의자들조차 고용주가 안정적 일자리와 임금 인상을 제공할 경우에만 관대한 사회 수당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쟁은 수익을 부진하게 만들고 회사를 폐업으로 몰아감으로써 고용주가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전후의 사회 계약을 생성하는 데는 경제 전반에 걸쳐 경쟁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일부 산업 국가에서 국가 독점 기업을 강제하고, 회사의 운영 시간과 사업장 위치 그리고 허가와 다른 회사의 가격을 철저히 규제하고, 정부에 여신 통제와 수입 제한 및 투자 장벽을 통한 시장 지배권을 주는 것 등이 그 방법이었다." "이런 조치는 많은 사람을 더 잘 살게 만들었다─잠시 동안 말이다."(346-7)


경제 기적은 정말로 일어난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경제 성장을 누린 국가들 "역시 결국에는 궤도에서 이탈했고, 그들의 정치 지도자는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 "1970년대 위기의 후유증은 수십 년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일본의 가계 재정을 파탄나게 만든 거품 경제. 1980~1994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수천 건의 은행 도산. 그리고 2008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부적격 대출자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대출로 더욱 불거지면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높은 실업을 초래하고 유럽연합 자체의 생존을 위협했던 심각한 경기 침체.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경제를 생산성 증진이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더 빠르게 성장시키려던 정치적 노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 헛수고였다.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이를 잘 표현했다. "20세기의 3분기는 경제 발전의 황금기였다. 그 시대는 모든 합리적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지않아 그와 같은 시기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다."(3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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