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해하기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7
욘 엘스터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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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역사 이론


제5장 생산양식


5.1. 생산양식에 관한 일반 이론


"마르크스는 '생산력'이라는 용어 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다른 용어들도 사용한다. 노동자의 생산성이나 총산출의 크기를 증진시키는 인과적 효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생산력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요강》에서 〈과학, 발명, 분업, 노동의 결합, 향상된 교통수단, 세계시장의 창출, 기계 등에서 비롯되는〉 생산력의 증가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좁은 의미에서) 생산력의 증가를 '구성'하는 것─예컨대 발명─이 그러한 증가의 '원인'이 되는 것─예컨대 세계시장의 발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나열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후자 그 자체가 생산력의 증가라고 말한 것으로,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의 (최적의?) 발전을 촉진하는 한, 그것도 생산력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사회적 관계는, 만일 그 자체가 생산력이라면, 생산력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각각의 개념이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17-8)


"우리는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이며, 생산관계의 변화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생산관계의 변화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설명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강압에 의한 생산관계의 변화 같은 경우가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병행한다. 잠재적 잉여가 크면 동시에 현실적 잉여도 크고, 기술적 세련성도 높아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구조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으로 관련 있는 특징이 무엇인지는 밝혀야 한다. 노예제의 붕괴를 그 체제 내의 숙련노동의 사용에 대한 내재적 한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자본주의가 창출한 잉여의 비효율적 사용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흡족한 설명이 아니다. 이것이 노예제의 붕괴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솔깃해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29-30)


# 소유관계와 생산양식

1. 독립 생산자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함께 소유한 경우

2. 과도기적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부분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3. 농노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모두 '부분적으로' 소유한 경우

4. 노예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도 자신의 노동력도 소유하지 못한 경우

5.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1859년의 〈서문〉의 진술을 해석해보면, 각 생산양식의 초기단계에는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이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태'로서 그 둘은 서로 '상응한다'. 나중에 생산력의 정체가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된다. 그러므로 상응과 모순은 각각 기술적 진보와 기술적 정체로 해석된다." "이 독법에 따르면, 상응에서 충돌로의 변화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하위최적 상황일 때 일어난다. 생산력의 발전이 정체되었을 때가 아니다. 생산관계가 하위최적 상황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올 다른 생산관계가 있을 때이다. 여기에서 비교대상은 현재의 생산관계가 아니라, 반사실적 생산관계이다. 이 경우 하위최적성은 기술적 정체와 우연히 일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정체가 시작되면, 기술적 진보의 여지가 있다고 전제할 경우, 이를 하위최적의 징조로 여기게 된다. 다른 한편 하위최적 상황이 정체 없이 올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바로 이런 경우다."(38-9)


"생산양식의 모순을 생산력의 하위최적 '사용'으로 정의하면, 모순이 왜 정치적 행동을 가져오는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의 수립을 가져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모순이 급속한 기술진보와 함께 등장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생산력을 잘 활용하는 체제에서는 기술변혁의 속도가 오히려 '둔화된다'는 유명한 주장이 있다. 슘페터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낭비와 경기순환이 없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보다 낫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더 못하다. 이 예시는 다음과 같은 일반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어떤 체제든─경제체제든 다른 체제든─모든 주어진 시점에서 그 가능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체제는, 장기적으로는 그 어떤 시점에서도 그렇지 못한 체제보다 열등하다. 그렇지 못한 체제의 실패 그 자체가 장기적 성취를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소유권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기라면, 이것이 생산력의 변화율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48)


5.2. 역사적 생산양식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다. 세계시장의 창출과 전통적인 농업의 변형이 자본주의적 산업생산 체제와 내수시장을 창출했고, 이 내수시장이 그러한 체제의 확장을 위한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Ⅰ》에서 그는 소규모 소유 생산의, 〈경제적인 이유〉와 관계없는 〈폭력적 수단〉, 즉 (정치적인 이유로 발생한) 엔클로저 운동을 다룬다." "영국에서의 자본주의의 전개는 (엔클로저 운동 같은) 정치적 수단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고, 그럴 때에야 영국에서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에서 엔클로저 운동은 토지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시장으로 내몰았고, 이로써 도시 자본주의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창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엔클로저 운동은 이로 인해 토지를 잃은 노동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흡수했다. 따라서 도시 노동자들의 공급은 일반적인 인구증가의 결과였다."(65-7)


"공산주의는 그 체제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최적일 때 (혹은 최적이 되었을 때) 바람직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객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폐기하고자 하는 동기유인이 생겼을 때 가능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주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이 두 조건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서, 경제적·문화적 조건이 사회주의에 딱 맞는 그 순간에 정확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요인이 체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좀 완화하면,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은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즉 두 조건 모두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으로 발전하면 조성된다는 것이다."(84-5)


"공산주의 혁명의 주관적 조건이 존재하는 가장 빠른 시점을 현실화하기 위해 경제적 발전을 가속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똑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첫째, 노동자들이 봉건·절대·식민 정권에 대해 투쟁에 성공하고 나면, 이들의 투쟁은 이전의 동맹이었던 부르주아 계급을 향하게 되는데, 이 (때 이른) 투쟁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둘째, 부르주아 계급은 이러한 위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의 적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용의주도하게 경계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도와 권력을 장악하게 하고, 부르주아 계급과의 싸움에서는 실패하는 것이다. 이 패배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고, 미래의 투쟁을 위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강화시킨다. 노동자들은 굳건해야 하지만,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약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93-4)


5.3.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


"통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가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이라고 믿었다. 국지적인 혹은 일시적인 정체가 있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발전단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우연적인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발전의 진보적 성격을 주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잉여의 규모이다.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반드시 잉여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잉여는 노동시간의 강제적인 연장을 통해, 혹은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해, 혹은 임금 삭감을 통해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생산성에 변화가 없어도 잉여의 규모는 중단 없이 증대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직접 생산자로부터 잉여를 추출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제도들의 연속이 된다. 이론적 일관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견해가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를 주장하는 견해보다는 더 그럴듯하다. 계급투쟁과 직접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99-100)


"마르크스는 역사를 단순한 선형 진보의 형태로 보지는 않았다. 역사는 나선형을 보였다. 계급 사회는 일반적으로 퇴보단계를 나타내는데, 자본주의는 특히 그러하고, 인류는 이를 거쳐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진보의 기준은 생산성이나 잉여의 구묘가 아니라 사회적 통합의 정도이다. 전계급 사회의 원시적 통일성은 탈계급 사회의 더 높은 통일성 획득을 위해 붕괴되어야만 한다. 개개인은 전면적으로 일할 수 있는 원초적 능력을 상실하고 전문화된 다음에야 다시 전면적 능력을 회복하고 확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 인간적 발전과 사회적 통합의 중단 있는 진보." "이러한 일반적인 목적론적 전제로부터, 공산주의는 일어나게 되어 있고, 따라서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도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발전도식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작동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100, 107)


제6장 계급


6.1. 계급 정의하기


"계급은 생산요소들,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 또는 비소유의 관계가 동일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소유와 비소유로 정의할 경우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소자본가와 약간의 생산수단을 가진 임금노동자(선대제도의 경우)가 구별되지 않는다." "두 번째 방법은 계급을 착취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모든 착취자를 한 계급에 넣고, 모든 피착취자를 또 한 계급에 넣는 것은 너무 거칠다. 이렇게 하면 서로 다른 착취 계급, 즉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서로 다른 피착취 계급, 즉 동시대에 존재했던 노예와 가난한 자유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은 시장행위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이다. 노동력을 사는 자, 노동력을 파는 자, 사지도 팔지도 않는 소부르주아가 그것이다." "이 방법의 난점은 비시장경제를 연구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25-8)


"시장경제에서는 〈기본재산 구조에서 비롯되는 활동이 계급의 특징〉이다. 이것은 노동 혹은 비노동,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자본의 대부와 차용, 토지의 임대와 임차이다. 첫 번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개념 쌍들은 경제행위자 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게다가 노동 혹은 비노동의 속성은 그 자체만으로 계급의 특징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노동 및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 혹은 '비노동 및 토지 임대'와 같은 형태가 된다. 그러므로 계급의 특징은 반드시 관계적이다." "이 기준은 생산요소들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비시장경제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경제에서는 생산 행위자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통제의 결여는 소유재산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 인해 통제권을 가진 자가 생산자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물론 소유구조와 그에 따른 행위자의 강제된 활동 사이의 관계는 두 경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130)


# 시장경제에서는 행위자가 시장의 거래에 참여한다는 전제가 있고, 비시장경제(가령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는 거래에 앞서 존재하는 제도가 결정한다는 전제가 있다.


"마르크스는 계급의 기준으로서 재산을 과대평가하고, 권력을 과소평가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일정한 계급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내적 일관성과 이론적 직관에 있어서 그러했다는 뜻이다." "계급 분류를 착취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따라 결정하더라도, 지배와 복종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행위만 보고 구조에 대한 고찰은 불충분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가진 것에 의거하여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따라 계급을 나누었지만,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는 오로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나누어야만 한다. 록펠러가 하위 관리직에 취직했다고 해서 그의 계급적 지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동력의 고용과 판매를 소유재산에 결부시킨 것처럼, 지배와 복종에 대해서도 그 구조적 기초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 기초는 〈문화자본〉, 〈타고난 기술〉, 〈교육 기회〉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우연이라는 요소도 중요하다.)"(135-6)


"현대 사회학에서는 계급보다는 지위집단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 개념을 창안한 막스 베버는 지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순전히 경제적으로 결정된 '계급상황'과는 달리, 인간 생활의 전형적인 구성요소를 '지위상황'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이것은 '명예'에 대한 특정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사회적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계급은 생산에 대한 관계와 재화의 획득에 따라 계층화된다. 반면에 지위집단은 재화의 '소비'원칙에 따라 계층화된다. 이 소비원칙은 특정한 생활스타일로 나타난다.〉 지위집단은 〈실제로 그러하건 전통적으로 그러하건 그들이 함께 속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며, 〈당사자의 주관적인 감정에 기초한〉 닫힌 공동체이다. 따라서 동전의 양면처럼 국외자를 배제한다. 이를 기초로 그는 계급에 기초한 사회와 주로 지위에 기초한 사회를 구별한다. 마르크스와는 달리, 계급을 시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대조는 자연스럽다."(137-8)


"내가 이해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 간의 중심적인 관계는 아래로부터의 잉여의 이전과 위로부터의 권력의 행사이다.〉 이 둘은 종종 함께 간다. 노예, 농노, 계약상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임금노동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권력의 행사 없이 잉여가 이전될 수도 있다. 지주에게 지대를 지불하는 자본가, 은행에 의해 착취되는 소생산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반대로 잉여의 이전이 없는 권력 행사도 있을 수 있다.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들은 매우 특수한 경우들로서, '더 적게 버는' 그런 관계와는 다르다." "'더 적게 버는' 혹은 '더 착취당하는' 관계들이 분노와 적대를 유발할 수는 있지만, 잉여 이전 및 명령 발령 관계와는 달리, 항구적인 사회적 갈등을 산출하는 힘은 없다. 특수한 초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계층이 갈등, 혹은 '밥그릇 싸움'을 산출할 수 없다고 마르크스가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계급투쟁과 같은 안정성은 없다는 것이다."(151-2)


# '더 적게 버는' 관계의 계층도는 자신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상위에 놓는다.


6.2. 계급의식


계급의식은 '공동체', '결합', '조직'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요소들이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생긴 후에 그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나에 대한 인식은 당신이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인식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다. 계급의식도 그러한지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즉자적 계급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인식하게 된다. … 나는 (긍정적) 계급의식을 〈계급이익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무임승차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 노동 계급은 (집합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무임승차자의 배반행위도 극복해야 하고,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해치면서까지 당장의 정치적 가능성을 끝까지 이용하려는 '행동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즉 성숙한 노동 계급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157-61)


집합행위의 효용은 세 가지 변수로 계산된다. 첫째는 '협동의 이익'이며,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과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둘째는 '무임승차자 이익'이며,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모두가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마지막은 '단독행위의 손실'로, 집합행위에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자기 혼자 또는 소수만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헛수고에 든 비용이나 처벌 같은 것─간의 차이를 말한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집합행위의 가능성은 첫째 변수에서 증가하고, 둘째 및 셋째 변수에서 감소한다. … 일반적으로 집합행위는 '개인적으로 불안정'하거나(무임승차의 이익이 커서), '개인적으로 접근 불가능'하다(단독행위의 손실이 커서), 혹은 둘 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행위는 발생하기 때문에 이 장애들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5-6)


# 집합행위의 메커니즘

1. 합리성·이기심 : 노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상호작용 하면, 이들이 어떤 순간에 선택한 행위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 합리성단일 : 한 행위자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관찰되며, 각 행위자는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행동하리라고 예상되는 경우에 협력을 선호한다.

3. 비합리성 : 자신을 어떤 집단의 대표자 또는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정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는 집합행위의 미시적 기초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임금》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이 단결할 필요성이 있고, 이미 단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미래의 계급투쟁을 준비하는 일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은 그 투쟁이 요구하는 물질적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투쟁이 발전했을 때 생기는 성숙한 계급의식 자체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부산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어떤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바람직한 상태를 그 행위의 동기목표로 삼은 것이다. 노동자들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한다면 사용자와 충돌하면서 계급의식이 발전하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경제적 투쟁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투쟁의 지양이 경제적 투쟁에 가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187-8)


6.3. 계급투쟁


"두 계급의 경우, 두 가지 형태의 계급투쟁이 있다. 하나는 두 착취 계급이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분배 몫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전자는 순수 갈등게임, 즉 일정합 게임으로 보인다. 분배할 총량이 투쟁에 앞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계급들은 '순'소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익다툼이 있는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이 그러하듯이 그 게임은 실제로는 변동합 게임이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과,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총산출 자체가 그 투쟁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 비용을 생각해보자. 조직을 건설하고 노조간부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비용만 드는 것이 아니다. 파업이 일어나면 경제활동이 마비되고, 따라서 몫을 요구할 생산물의 크기 자체가 줄어든다. 이 경우 투쟁은 생산에 있어서나 분배에 있어서나 변동합 게임이다. 반면에 착취 계급 간의 투쟁은 분배 측면에서만 변동합 게임이다."(195)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1848년 이전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의 주역은 셋이다. 노동자, 금융자본가, 산업자본가. 전선의 형태는 단순하고 고전적이다. 산업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금융귀족'에 대항하여 동맹을 형성한다. 그런 다음 산업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항하여 금융자본가와 동맹을 맺는 반전이 일어난다." "영국의 계급투쟁에서 영국 공장주들은 토지소유자들과 싸우는 척하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인 노동자들의 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다. 프랑스 공업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부르주아 계급의 다른 분파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영국에서 부르주아 계급 내의 계급협력의 절정은 반곡물법동맹의 해체였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절정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에서는 지배 계급이 노동 계급의 계급의식 형성을 막기 위해 협력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협력하였다. 최소한 마르크스는 그렇게 보았다."(211-3)


"계급투쟁이 사회적 갈등의 전부는 아니다.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들의 투쟁도 계급투쟁 못지않게 폭력적으로 전개되고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페인의 지역갈등, 아일랜드나 중동의 종교갈등, 미국이나 남미의 인종갈등, 벨기에의 언어적 갈등, 폴란드의 민족주의 등도 계급갈등만큼이나 강력하고 파장이 큰 사회적 갈등이다." "마르크스는 객관적으로 정의된 계급은 계급의식을 획득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사라지며,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화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러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틀렸다. 다른 계급이 무대에 등장했다. 법인재산 혹은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농민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 통신수단 덕분에 다른 계급에 버금가는 계급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근대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조직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옳았다."(219-20)


제7장 정치와 국가


7.1. 국가의 본질과 국가에 대한 설명


"국가는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다. 베버의 정의, 즉 폭력의 합법적 사용의 독점이라는 정의는 둘째 유형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기능의 관점에서 국가를 정의한다. 이점에서 그는 정치 이론의 전통, 혹은 전통 중 하나를 따른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공공재 공급자로 간주되어왔다. 공공재에는 법과 질서는 물론, 개인들에 의해서는 효과적으로 공급될 수 없는 경제재도 포함된다. 크게 보면, 국가는 죄수의 딜레마에 놓인 개인들의 협동적 해결책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사회 속에 국가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의 과제는 이러한 딜레마의 관점에서 등장한다. 다만 행위자가 다를 뿐이다. 국가의 과제는 경제적 지배 계급이 직면한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협동적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과제의 일부로서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그들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이제 국가의 모든 과제는 자본을 위하여 수행되거나, 자본에 위임된다."(231)


"나는 마르크스가 권력에 대해 좁은, 전략 부재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단순히 자본가 계급의 봉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두 행위자 A(자본)와 B(정부)가 있고, 각각 일정한 수의 대안을 가지고 있다. B는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공식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 A는 특정 대안을 고려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B는 A의 봉토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B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B는 자신의 권력이 A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보유 또는 행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B가 A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B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A의 권력도 제한되어 있다. 이 제한은 권력을 직접 맡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행위자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다."(239-41)


# 이때 A가 직접적인 권력을 원치 않는 것은 제3의 행위자인 C(노동계급)의 관심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 마르크스는 이전과 달리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의지의 연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프랑스에서처럼) 양보하거나, (영국, 독일에서처럼) 자제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양위국가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848년 이전에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이 대리인으로서의 정부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50년대의 사건은 이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유럽 주요국들의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정치체제하에서도 번성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변을 역사적 유물론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수정해야 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제1의 계급이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가 정치를 설명한다는 견해는 그대로 유지했다."(246-8)


"말년에 이르러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의 가능한 전략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양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3년에 쓴 〈정치적 무관심〉에 관한 논설에서 그는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결정적인 '사회 청산'을 기다린다는 구실 아래 묵종주의를 조장하는 극좌 편향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와 싸우는 것은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적대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진정한 원칙을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은 설혹 지배 계급이 정치권력에 대한 독점을 포기하겠다고 하더라도 보통선거권의 수용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 견해에 반대한다. 첫째, 권력은 점진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 둘째, 현재 노동자들의 고통을 무시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체제 내의 정치적 행동으로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257-8)


7.2. 혁명론


"마르크스는 고전적 부르주아 혁명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았다. 그 사이에 간간이 공화정이 들어설 때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일시적 승리는 〈'부르주아 혁명' 그 자체에 봉사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한 싸움은, 1793년과 1794년 프랑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싸움의 '방식'이 부르주아 계급과 달랐을 뿐이다. '프랑스의 모든 테러'는 '부르주아 계급의 적'을 상대하는 '평민의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싸웠을 때 그들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였고, 이성의 간지가 구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분석한 것처럼, 부르주아적 질서가 수립되기 전에 과거가 깨끗이 청산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크르크에 따르면 이 과업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272-5)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필연적인 도래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공산주의를 수립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어떻게 공산주의의 효율성을 '보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의 결함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 나타난 혁명의 전술 및 전략에 관한 언급들은 주로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즉 혁명의 와중에 혹은 혁명을 기대하며 쓴 것이므로, 그러한 언급들은 혁명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가지 편향이 나타나는데, 각각 '타협편향'과 '권고편향'으로 부르겠다. 이 두 편향은 마르크스의 저작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희망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다. 희망적 사고는 그의 사고 자체가 왜곡된 것인 반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편향은 표현이 왜곡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독자들을 격려할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285-6)


# 편향의 두 종류

1. 타협편향 : 어떤 조직의 대변자로서 그 조직성원들과 타협한 주장을 나타내는 글을 쓰는 경우에 나타난다.

2. 권고편향 : 이론가의 '정세분석'(권고)는 혁명의 실현에 기여하는 수단이나 그 과정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무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에는 세 가지 전략이 있다. 소수 혁명론, 다수 혁명론, '경쟁체제' 전략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전략은 권력 장악, 다수의 획득, 사회의 변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서가 각각 다르다. 소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그런 다음 사회를 변혁하고, 마지막으로 다수를 획득한다. 이것은 레닌의 전략과 유사하다. 권력을 사용하여 농민을 산업노동자로 바꾸고 이들이 공산주의적 목표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레닌의 전략이었다. 다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노동자들이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이 혁명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가정 아래)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은 자본주의 사회를 안으로부터 변혁하고, 이로써 다수를 확보하고, 그런 다음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에서 자본주의 내에 수립된 공산주의적 성채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288)


"우리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소렐 류의 급진적 행동주의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지배 계급을 타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그도 수단이 목적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의 함의는 정반대였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수단이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으로 하여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한 반면, 훗날의 수정주의자들은 그러한 수단이 오히려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초기의 입장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그런 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내 추측으로는 평생에 걸쳐 혁명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마르크스로서는 전혀 새로운 도구주의적 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296-7)


7.3.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의 어법으로는 독재라는 말이 꼭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초법적 형태, 기존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최초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코뮌은 〈국가가 위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에게 군림했던 관리들을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공복으로 바꾸고, 항상 대중의 감시 아래 일하도록 하여 형식적인 책임이 아니라 진정한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에 들어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징은 다수 지배, 법외성, 국가기구의 해체 및 대의원의 소환가능성이다." "다만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독재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독재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독재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위헌적이어서가 아니라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였기 때문일 것이다."(298-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 혹은 과도적 상태는 국가자본주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두고자 한다. 시장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협동체들이 상호 간에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두 체제 모두 교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이 아니라 노동이 교환되고, 시장사회주의에서는 생산물과 화폐가 교환된다. 자본주의적 속성은 어떤 것은 그대로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없어진다. 시장사회주의에서 계급은 없어지지만, 착취는 남아 있을 것 같고, 소외는 확실히 그대로이다. 협동체에 따라 자연적·인적 자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노동시장이 없다 하더라도 시장교환을 통해 착취가 발생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계급과 착취가 다 없어지지만, 소외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완성을 위해 과도적 단계로서 국가자본주의를 선호했다."(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와 마지막 단계를 구분하여 제시한다. 첫 단계는 복지국가와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이다. 소비는 기여에 따라 이루어진다. 기여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사회보장을 제공한다. 〈생산수단이 공동소유이므로, 생산자들이 생산물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는 하지만, 자본가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팔기 때문에 계급은 형성되지 않는다. 착취도 없다. 기여에 상응하지 않는 소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어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는 제외) 이것은 어떤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 노동의 이질성 때문에 '노동으로 기여한 만큼 분배한다'는 원칙 자체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체의 재산 혹은 공유재산의 관리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 즉 권력관계가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형성의 기초라면, 이러한 현상은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303)


"마지막 단계의 공산주의에는 어떤 '구조'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사고에 공상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이 단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날고 싶다고 해도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중력의 법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다." "생산과 소비의 조직에 관하여는 폴라니가 제시하고 콤이 발전시킨 유용한 분석틀이 있다. 폴라니는 자급자족하는 사회가 아닌 한 재화의 유통은 필수적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밝혔다. 시장교환, 재분배(즉 주변에서 중심으로 간 다음, 일부를 뗀 나머지를 다시 주변으로 보내는 것), 상부상조(즉 가격을 정하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는, 제도화된 재화의 교환)가 그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재분배를 계획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결국 시장, 계획, 상부상조로 약칭할 수 있겠다. 콤에 따르면, 어느 사회든지 이 세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데 조합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306-7)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형공장도, 예술가 천국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사회주의는 불가피해 보인다. 회사(개인들의 집단)들은 상호 간에 물품을 교환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상품형태'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계획'에 가까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시장에서 먼 곳에, 다른 한편, 자율적인 노동자 협동체들은 일을 통해 최소한의 자아실현이 보장될 것이며, 대규모 생산단위와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핵심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은 시장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그 가치들을 동시에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모든 좋은 것은 함께 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그는 최대한의 자아실현과 최대한의 생산성과 최대한의 협동을 동시에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후기산업사회'가 이 목표들을 어느 정도 근접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격차는 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309)


제8장 이데올로기


8.1. 문제 제기


"나는 이데올로기를 기능적 관점이 아니라 구조적 관점에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어떤 존재물이 다른 존재물에 대해 가지는 일정한 효과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물로 정의하고자 한다. (정신적 실재로서의 이데올로기) 크게 보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이다. 이데올로기는 ① 존재하고, ②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③ 의식적으로 존재한다. 또 다른 정의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즉 현재의 상태 또는 특정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존재물'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존재물들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 용어도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기능적으로 정의한다) 중 강제적 성격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정의하면, 예컨대 대의정치제도가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는 식의 진술이 가능하다."(319)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설명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념소유자(혹은 여타 행위자)의 '이익'에 입각한 설명과 경제적·사회적 '위치'에 입각한 설명으로 나눈 것이다. 이것을 각각 이익 설명과 위치 설명으로 부르기로 하자. 또 하나는 인과적 설명과 기능적 설명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구별된 것들은 부분적으로 중첩된다. 모든 위치 설명은 인과적이지만, 이익 설명은 기능적 성격과 인과적 성격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즉 신념은 그것이 어떤 이익에 '봉사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고, 이익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속류 경제학자들의 '조화 이론'은 내생적인 경제적 환상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한 변론이라고 말한다." "노동자 계급이 민족주의적 감정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내생적인 정신적 메커니즘이고, 또 하나는 분할통치를 통해 자본가 계급이 얻는 이익이다."(324-8)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정신적 창조물이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연속적인 생산양식 A, B, C ··· 가 있고, 각각에 상응하는 관념 a, b, c ··· 가 있다고 하자.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생산양식 A가 주어지면 관념 a가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다. 또한 새로운 생산양식 B의 등장은 이전의 생산양식 A에 의해 완전히 설명된다. 이전의 이데올로기 a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지막으로 a-b-c의 연속성은 A-B-C에 존재하는 연속성에서 파생된 '겉보기' 연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으면, 이것은 새로운 생산양식에서 성립하게 될 가능한 이데올로기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새로운 이데올로기 b는 당대의 생산양식 B는 물론, a에도 상응해야 한다. 즉 이 두 요인의 제약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견해는 생산양식에만 연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역사에도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328-31)


8.2. 메커니즘


"사변적인 명제들(신 또는 정신)을 뒤집는 것은 이전에 뒤집혀 있던 것(경험적 인간), 즉 진짜 주어를 술어로 만들어놓은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전도(顚倒)는 이데올로기 형성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가 그다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전도는 추상화(abstraction)와 투사(projection)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추상화의 전형적인 예는 헤겔 철학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헤겔 철학은 존재와 의식이 전도되어 있다. 사유를 사고행위로부터 분리시키고, 의식(Bewusstsein)을 의식하는 존재(das bewusste Sein)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는 헤겔의 추상물들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그들이 내세운 인류, 인간, 유일자 역시 추상물이었다. '정신'의 술어였던 '인간'을 주어로 만들었지만, '인간' 역시 추상적인 인간이고 진정한 인간의 술어일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구체적인 개개인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고, 추상물들은 완전히 폐기된다."(341-3)


"투사의 관념은 포이어바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특히 종교적 사유가 인간의 본질을 초월적 존재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보았다. 종교에서 인간 〈자신의 본질은 타자의 본질로 나타난다.〉 이러한 투사는 소원성취의 한 형태이다. 〈인간의 비참함 그 자체가 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참함을 사상 속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소원성취를 위해 신이라는 '대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전유한다. 이 대상은 사실상 자신을 객체화한 것이며 그렇게 전유된다.〉 정신분석 이론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투사자와 투사물의 관계는 전도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종교이론뿐만 아니라, 정치 이론과 자본론의 골격이 바로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분석으로부터 나왔다. 세 영역의 공통된 주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만든 산물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자본론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서 인간이 자신의 두뇌의 산물에 의해 지배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인간은 자신의 손의 산물에 의해 지배된다.〉"(344-5)


"마르크스는 신념을 이익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특수한 계급이익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의 일반이익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념이 반드시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역사상 어떤 시기에는 한 계급의 특수한 이익이 사회 전반의 이익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즉 특수이익의 실현이 지배적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그 계급은 압도적인 힘을 얻는다. 특수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한다는 신념이 그릇된 것일 경우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인과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된 신념도 예외적이긴 하지만 진실일 수 있다. 모든 계급이 자신의 특수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이 신념이 진실일 때에는 권력을 얻게 된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한 사회계급과 그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다른 계급들에게 '계속판매'를 신청하는 셈이다."(350)


"《무월 18일》에서 마르크스는 〈크롬웰과 영국 백성들은 그들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하여 구약성서로부터 어법과 열정과 환상을 빌려왔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과거가 넘겨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관념이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역사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알려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위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포함한다. 확실히 이것은 이념에는 역사적 연속성이 없다는 견해와는 다른 것이다. 즉 인간의 사상은 현재의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의한 제약만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부구조의 '관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현상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요점은 과거의 사상이 오랫동안 잠복해 있다가 미래와 직면했을 때 분석과 행동에 쓸모가 있으면 부활한다는 것이다."(364-5)


8.3. 적용


# (마르크스가 파악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 이론

1. 중상주의자 : 중상주의자는 돈이 아무런 매개 없이 돈을 낳는다거나(이자부자본), 상품의 유통에서 이윤이 발생한다(누구나 그 물건을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여)고 주장한다. 이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성의 오류이다.

2. 중농주의자 : 중농주의자는 산업 이윤이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국부의 순증가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잉여가치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자연의 선물'인 것이다. 따라서 공업부문은 비과세, 농업부문은 과세를 해야 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산업자본가에게 유리하다.

3. 맬서스 : 마르크스가 보기에 맬서스 학설의 특징은 유효수요가 유지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 구매자 계급이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로써 맬서스는 (혁명적 단계의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토지귀족과 국가 관리의 더할 나위 없는 대변자가 되었다.

4. 속류 경제학자들 : 속류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자들과 달리 기존 체제를 변호한다. 이들의 핵심적인 오류는 토지·노동·자본을 각각 독립적인 생산요소로 동등하게 놓고, 각각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낸다고 본 점이다. 이러한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믿고, 이를 정당화한다. 


결론


제9장 자본주의, 공산주의, 혁명


자본주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탁월하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주체들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들이 그 체제와 이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그러한 신념은 체제의 산물이자 동시에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종 그릇된 틀 속에 들어 있기 대문에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곳곳에 헤겔식 방법의 잔재가 남아 있다. '자본'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신비한 행위주체로 등장한다. 공장법은 마법에 의해 자본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회적 이동성도 자본의 법칙을 강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중농주의자의 학설도 봉건체제 내에서 자본을 대변하기 위해 나타난다. 이러한 설명들은 방법론적 전체론과 기능적 설명과 변증법적 연역이 뒤범벅된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목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목적론의 한 축이요, 궁극적으로 자본을 파괴하는 과정의 필연성이 또 한 축이다."(395)


"대체로 마르크스는, 소비수준이 낮아진다는 의미에서 빈곤이 증대된다는 이유로,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생활수준이 낮아진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관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나타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의 비교기준은 현실의 상황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한 상황이었다." "대체로 소외는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모순은 생산력의 더 빠른 '발전'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 두 현상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소외를 진압하고 나면, 사회의 구성원들은 창조적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전대미문의 생산성 향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본주의가 창출한 기술적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토끼를 잡은 다음 버리게 될 올무 같은 것이다."(400-1)


공산주의


"확실히 마르크스의 일부 주장에는 과장이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일면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식물처럼 맥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전율했다. 직장에서 그들은 기계에 붙어 있는 부속품이었고, 집으로 돌아와도 너무 지친 나머지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곤 소비의 수동적 쾌락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그 반대편 극단에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조차도 그에게는 창조적인 힘이 넘쳐났다. 그는 창조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긴장이 해소되었을 때 어떤 기쁨이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의 좋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좋은 삶이 더 이상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를 갈망했다. 창조적인 일을 통한 자아실현,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의 본질이다. 여기에 모리스의 손으로 하는 창조활동을 추가하면 더욱 균형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404-5)


"공산주의에서도 자기중심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 ① 공산주의 사회도 완전히 풍요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재화는 희소할 것이며, 어느 한 사람이 차지하고 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가질 수 없게 된다. ②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들어 있는 분배적 정의의 원칙은 자아실현의 평등이다. ③ 자아실현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할 경우, 고비용 활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전제를(따라서 두 번째 전제도) 부정할 경우, 그런 사회는 이상향이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세 번째 전제를 부정하려면, 각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즉 타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자아실현을 일부 희생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기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이타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아실현이 '완전한' 공동체와 함께 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409)


혁명


"두 개의 유령이 공산주의 혁명을 괴롭히고 있다. 하나는 때 이른 혁명의 위험이다. 혁명사상은 앞서 가는데, 그 나라의 상황은 빈곤하여 공산주의를 할 정도로 성숙되지는 않은 경우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선제(先制) 혁명의 위험이다. 이것은 혁명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위로부터 개혁이 추진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때 이른 혁명의 사례를 많이 보았다. 이런 판단 자체가 때 이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개혁들이 없었더라면 미성숙 여부를 떠나 더 많은 혁명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옹호한 혁명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혁명의 호기가 언제인지, 어느 하나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언젠가 자본주의를 앞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나중에 가서 자신들의 혁명을 소급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418)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 일생의 과업은 실패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도덕적인 측면에서 혹은 지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가치설, 이윤율 하락 이론 등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긴 이론들 전부 혹은 대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와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는 있다. 나는 내가 중요한 진리라고 믿는 것 대부분을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다. 방법론에서도 구체적인 이론에서도, 특히 가치문제에서도 그렇다. 착취와 소외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창조하고, 발명하고,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일 테니까."(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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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해하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6
욘 엘스터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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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장 설명과 변증법


1.1. 방법론적 개체론


"방법론적 개체론이란 모든 사회현상의 구조와 변화를 원칙적으로 오직 개인만 포함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학설을 말한다." "첫째, 이 학설은 개개인의 행동 수준에서 이기심을 전제하지 않으며, 합리성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개개인의 행위에 이러한 특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경우에도, 오로지 방법론적 고려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지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 방법론적 개체론은 오직 외연적 맥락에서만 사용된다.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개별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감정에 관한 진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 계급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말은 개별 노동자들이 취한 행동의 결과에 관한 복합적인 진술로 환원될 수 있다. 셋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속성들, 예를 들면 '강력하다'와 같은 속성들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한 개인에 관한 정확한 기술이 다른 사람에 대한 언급을 포함할 수 있다."(21-3)


"반면 방법론적 전체론에서는 설명 순서상 개인에 우선하여 존재하는 초개인적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고(이러한 가정 자체가 방법론적 전체론이 설명을 시도하는 목적이다), 그러한 더 큰 실체들의 자기규제의 법칙, 혹은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설명을 진행한다. 여기에서 개인의 행동은 집합유형으로부터 도출된다. 이것은 종종 (둘 사이에 논리적 연관이 없는) 기능적 설명의 형태를 띠게 된다. 어떤 행동들이 집합적으로 이익을 낳는다면, 바로 그 객관적 이익이 그 행동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주장할 경우에 그렇게 된다." "방법론적 개체론은 사회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학설이지, 사회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관한 학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 단계까지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그리고 일관되게 개인을 설명의 중심에 놓지는 않았다."(24-6)


1.2. 의도적 설명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소비자 선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요강》의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동자는] 특별한 대상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특정한 욕구충족 방식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소비영역은 질적으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오직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소비자로서의 노동자가 가진 선택의 자유는 그를 자율적인 존재, 책임 있는 존재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자본론》에서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고정된 소비계수' 가정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고정된 소비계수'는 본질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그대로 답습해왔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화가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32-3)


"마르크스는 경제학에서 의도적 설명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자본가는 자본주의적 과정의 〈의식적 조연〉일 뿐이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들을 제정할 뿐이다. 자본가의 소비조차도 〈자본의 재생산비용〉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노동자가 능동적 인간, 예컨대 더 큰 소비집합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의 소비집합의 수동적 구현자일 뿐이라는 견해와 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종종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자본가는 그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시장에서 생존의 필요에 의해 '강제'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기업들은 어떤 의미로 보나 도저히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길을 따라간다. 현재 가는 길이 임계 수준 이하로 이윤의 하락을 가져올 때, 오직 그때에 이르러서야 능동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그 대안을 현상(status quo)과 비교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생산자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선택 모형으로부터의 근본적인 결별이다."(34-5)


"마르크스는 국제정치 연구에서 행위자가 공식적으로 공언한 동기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을 확대했다. 첫째, 그는 종종 그 행위가 기여하게 된 역사적 목표의 관점에서 정치적 행위를 설명했다. 예를 들면 터키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를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무의식중에 현대의 '숙명'인 혁명의 마지못한 노예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인도 지배도 아시아에서 근본적인 혁명을 야기할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였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그 의도와 목적을 가진 구체적인 행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기능적 설명이다. '역사'라는 허공에 떠 있는 행위자가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그의 저작에는 음모론적 설명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겉으로 드러난 의도 외에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방식은 경우에 따라 과장된 견해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파머스턴 경은 영국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러시아의 가신〉이었다는 식이다."(41)


1.3. 인과분석의 두 종류


# 인과분석의 두 종류

1. 준의도적(sub-intentional) 인과설명 : 선호를 비롯하여 신념, 정서 등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인과설명

2. 초의도적(supra-intentional) 인과설명 : 다수의 개인적 행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집합적 사회현상에 대한 인과설명


"신념 형성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는 내 생각으로는 이런 것이다. 즉 경제 행위의 주체들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견해를 전체적으로도 타당한 것처럼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일 조건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인과관계가 무한정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자는 '누구든' 최저 생계수준의 노동자로 간주될 수 있지만, '모든' 노동자가 최저 생계수준에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인식적 실패를 가져오는 국지·전역 오류이다. 이것은 행동의 실패를 초래하는 국지·전역 혼동과 관계는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가장 강력한 부분일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분권화된 경제에서는 자동적으로 합성의 오류─어떤 집합에 속하는 원소들의 성질과 그 집합 전체의 성질이 동일하다고 판단하는 오류─가 발생하며, 그 결과 이론과 실천에서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44)


"근대 사회과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일군의 개념들이 있다.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헤겔의 〈이성의 간지(奸智)〉, 머턴의 〈잠재기능〉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개념의 공통적인 생각은, 개인들은 자기 자신의 목표를 위해 행동하지만, 이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결과들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일군의 행동과 그 행동들의 집합적 결과 사이에 성립할 수 있는 관계는 다음 중 하나이다. ① 행위자들이 알고 있는 결과가 산출된다. 각자는 다른 사람의 행위 및 관련된 목표와 수단 간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가정 아래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② 행위자는 의도한 결과를 산출하지만, 그 일은 의도한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다." "③ 행위자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가 일어난다. 이것은 다른 행위자의 행동에 대한 그릇된 가정(이 상호 간에 존재하는 경우)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관련된 기술적 문제들을 오판하여 생길 수도 있다."(49-50)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연발생적인 위기를 체계적으로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위기에 대한 기업가들의 대응행동이 개인적으로는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집단적으로는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조안 로빈슨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역설〉이다. 그 역설이란 이런 것이다. 각 자본가는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을 주고 싶어 한다. 그래야 고이윤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자본가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고임금이 지급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가 생산한 상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역설의 밑바탕에는 케인즈가 연구한 유효수요의 위기가 깔려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종류의 위기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경제체제에서 노동자의 두 가지 역할로 인해 발생하는 모순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각 자본가에게,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를 제외한 전체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라는 것〉이다."(54-5)


1.4. 마르크스의 기능적 설명


"의도적 설명은 행위의 '의도된' 결과들을 설명으로 제시한다. 기능적 설명은 '사실상의' 결과들을 설명으로 제시한다. 특히 행위를 기능적으로 설명하는 일에는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혹은 어떤 것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논증이 포함된다.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이 설명 형식에 들어 있는 명백한 역설 하나를 제거해야 한다. 그 역설은,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 일어난 일로써 어떻게 그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피설명항이 개별적인 사건이어서는 안 된다. 오직 지속적인 행위유형이어야 한다." "이 설명들은, '단순히' 그 사건이 어떤 행위주체(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행위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르크스는 이런 종류의 설명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런 설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57-8)


"마르크스는 역사가 공산주의의 도래라는 목표를 향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행위의 유형들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사건들까지도 그 목적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가져오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해야 했고', 이리하여 노동자는 공산주의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의 역사철학은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도래에 유리한 결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사회제도와 행위양식들은 계급지배에 미치는 안정화 효과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마르크는 두 개의 음역(音域)에서 연주한다. 즉 때로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촉진하기 때문에, 또 때로는 자본주의의 존속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일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결과론'적 요소도 가미되는데, 여러 형태의 기능주의적 마르크스주의들이 여기에 감염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유형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현저하게 나타난다."(60)


1.5. 변증법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헤겔적 추론은 세 가닥으로 되어 있는데, 셋 중 어느 하나도 변증법적 방법(the dialectical method)이라는 이름을 '독점적으로' 가질 수는 없지만, 각각 '일종의' 변증법적 방법(a dialectical method)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가닥은 준연역적 절차로서 《요강》의 주요 부분과 《자본론Ⅰ》의 앞부분에서 이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헤겔의 《논리학》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둘째 가닥은 엥겔스가 정식화한 변증법으로서 부정의 부정 '법칙'과 양질 전화의 '법칙'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가닥은 사회적 모순들에 관한 이론으로서 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끌어온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지적인 가치가 거의 없고, 두 번째 것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지적 가치가 있고, 세 번째 것은 사회변동 이론에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좀더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식에서는 변증법적 방법이 일상적인 '분석적' 언어로 진술될 수 있다."(71-2)


# 마르크스 변증법의 세 갈래

1. 변증법적 연역 : 헤겔의 존재론적 논의의 잔해들에서 경제적 범주를 이끌어낸 것인데, 경제적 범주들(생산-상품-교환가치-화폐-자본-노동)의 역사적 등장 순서를 논리적 연쇄로 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2. 변증법의 법칙

  2-1. 부정의 부정 법칙 : 연속되는 과정 p-q-r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셋 중 어느 두 가지도 양립할 수 없다. (2) p에서 직접 r로 갈 수 없다. (3) q에서 p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예)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2-2. 양질 전화의 법칙 :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간에 불연속적 함수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물이 얼음이 되는 경우)와 비선형 함수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두 명의 마멜루크 인[중세 이집트의 노예 기병]은 세 명의 프랑스 인을 물리치지만, 1천 명의 프랑스 병사는 1,500 명의 마멜루크 인을 물리친다)가 있다.

3. 모순론 : 여러 사람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믿음은 그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각각 진실일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모두의 믿음이 다 진실일 수는 없다. 예) 개별 자본가가 이윤을 높일 목적으로 하는 행동이 집합적으로는 이윤율의 하락을 가져오는 경향


제1부 철학과 경제학


제2장 철학적 인류학


2.1. 인간과 자연


"외부 세계는 인간의 존재와는 관계없이, 인간의 존재에 앞서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다." "그렇지만 《신성가족》에 나와 있는 유물론의 언급에서도, 혹은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그가 실재론, 자연주의,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들에 대해 정력적인 반론을 제기한 논의에서도 일관성 있는 이론은 찾을 수가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물질'에 설명적 우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이 어느 의미로 보더라도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한다고 보는 견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나 언어도 기술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생산력이며, 사회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코헨의 말처럼, '물질어'의 대응어는 '사회적'이지 '정신적'이 아니다. 생산력을 '전체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회적 생산관계와 대립하는 것이지 정신의 산물 및 활동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98-9)


2.2. 인간의 본성


"인간의 '욕구'(needs)는 마르크스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욕구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이 대상은 일반적인 대상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특정한 책이 아니라 (일반적 대상으로서의) 책을 욕구할 수 있다. 특정한 책에 대한 심리적 태도 같은 것은 욕망(a desire)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어법에 따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각각의 욕망이 〈욕구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모든 욕구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충족된다. 그러나 그 반대는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적 욕구에서 비롯되지 않은 욕망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체물이 없는, 특별한 대상을 향한 욕망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특정한 옷에 대한 욕망이 옷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욕구, 예를 들면 위신에 대한 욕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시계가 있어도 동일한 위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시계가 바로 대체물이 될 수 있다."(119-20)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마르크스 저작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정신적 소외의 측면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면, 노동의 소외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들에게 '외적인' 것이라는 사실, 즉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내적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 그러므로 노동자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자기를 느끼고, 일을 할 때는 자기가 없다고 느낀다. 일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일을 할 때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자기가 없다고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인가? 부정적인 느낌의 존재인가, 아니면 긍정적인 느낌의 부재인가?" "두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적 부정과 내적 부정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현재 문맥에서 이러한 혼동은 치명적이다. 소외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취해야 할 집단적 행동 간의 관계는 어느 문장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129-30)


"소외 문제는 두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소외가 증가하면 소외된 사람들이 점점 불행해지고 불만을 느끼고 반항하기 쉬워진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소외가 증가한다 해도 불만은 증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현실적 욕구가 일정할 경우, 욕구충족의 객관적 가능성이 커진다고 해도 빈곤이 증대되지는 않는다. 욕구충족의 가능성이 증대해도 욕구가 감소한다면, 소외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빈곤은 오히려 감소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외는 현실적 욕구의 미충족 상태에서도 발견될 수 있고, 혹은 충족 가능한 욕구의 비충족 상태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소외는 집합행위를 야기하지만, 후자의 경우 오히려 집합행위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노동자들의) 욕구 역시 팽창하는데 욕구충족의 수단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좌절을 느끼고 불행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정신적 의미에서의 소외이다."(132-3)


"나는 물화(reification)라는 말을 욕구와 능력이 자신의 인격 전체에 통합되지 못하고, 고정되고, 고립되고, 독립되어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로 사용하겠다." "욕구(혹은 그에 상응하는 욕망)가 물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추상적, 고립적 성격을 지닐 경우, 낯선 힘으로 나와 대립할 경우, 따라서 하나의 정념이 편향적으로 충족되는 형태로 만족이 올 경우〉를 말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의 (진정한) 욕구는 하나같이 소비의 욕구이며 수동적 향락의 욕구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하는 일은 질식되고 만다. 이러한 진단은 일종의 고발이다. 이 고발의 전제는 좋은 사회에서는 일 그 자체가 하나의 욕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좋은 삶은 (근무시간이든, 근무 이외의 시간이든) 능동적인 창조의 삶이지 수동적인 소비생활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그리고 그 실현 가능성을 믿었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편향적인 '소비자 경제'라고 비판한다."(134-6)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옹호한 이유는 공산주의 사회야말로 중요한 면에서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훌륭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성과 정의의 문제는 마르크스에게 부차적인 문제다. 물론 그러한 고려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체제 전복에 나서도록 하는, 그렇게 해야 할 아주 좋은 이유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주로 인간적 발전과 자아실현을 좌절시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즉 전인적(全人的) 창조자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부산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적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면 생산성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분배 정의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혹은 해소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42-3)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은 창조와 생산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즉 창조적 과정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 즐겨 쓸 것들을 생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대립은 없으며, 양자가 완전한 보완관계에 있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 들어 있다. 창조를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가 '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비에 기대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창조에는 소비에 부여된 더 낮은 가치가 함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심하게 말하자면, 전적으로 활동적·창조적 개인들로만 구성된 사회에서는 아무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생산한 것을 즐기거나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타주의와 타인을 위한 행동을 강조하는 모든 사회운동에 이러한 문제가 들어 있다. 이타적 행위는 적어도 한순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149-50)


"마르크스는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간 개개인의 무조건적 자율성을 굳게 믿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이 가진 주요한 약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그는 보편개념으로서의 인간과 인간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인간이 가진 재능의 완전한 발전을 보장하는 체제에서는 그 부산물로 반드시 성공하지 못한 개인들의 좌절이 나타난다. ②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의 객관적 자아실현과 주관적 행복감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③ 그는 또한 개인의 전면적 발전과, 하나의 활동에 대한 편향적인 몰두─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특징인─가 서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④ 마지막으로 그는 과도한 충동의 문제를 간과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만든 장치들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완고한 성격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공산주의에서 개인은 이드(id)도 없고 슈퍼에고(superego)도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155-6)


2.3. 사회적 관계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물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대상들의 (자연적) 속성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자본론Ⅰ》에 나오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상품형태는 인간의 노동 속에 들어 있는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에 들어 있는 대상적 성격으로 보이게 만들고, 총 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관계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노동생산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물신숭배는 인간 간의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로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지, 사물들의 속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텍스트에서는 사물들의 속성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상품물신은 사물들에 각인된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생산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사물들의 물질적 성격에서 유래하는 자연적 속성으로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언급도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에 참여하는 자들은 마법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들 자신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로 보인다〉는 언급도 있다."(161-2)


"자본물신은, 코헨에 따르면, 〈생산에서 발휘하는 자본의 힘이 노동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본 그 자체에 들어 있는 능력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용가치의 생산에 대해서도, 잉여가치 혹은 이윤의 생산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자본에 들어 있는 관계들의 외면적 성격과 물신적 성격은 대부자본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화폐가 생산과정과 무관하게 증식되고 과실을 낳는다면, 그것이 신비하게도 생산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진다. 사실은 그것이 생산과정에 투자되어 생산적으로 사용될 때에만 생산적이지만, 금융자본가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금융자본가는 〈모든 자본가가 자신의 돈을 빌려주기만 하고, 아무도 그것을 생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화폐자본이 이자를 낳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처럼 화폐에 대한 환상은 상품에 대한 환상보다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166-7)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하에서 인간의 생산물이 독립적인 존재를 얻고서 생산자와 대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대표적인 사례가 세 가지 있는데, 종교, 국가, 자본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적 영역에 한정하여) 노동자가 소외되는 대상을 두 종류(소비재와 생산수단)로 나누어보면 뜻이 좀더 명확해진다. 마르크스도 초기의 원고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한 적이 있다. 〈노동자는 생활에 필요한 대상도 빼앗기고, 일에 필요한 대상도 빼앗긴다.〉 이 문장에서 소비수단이 먼저 강조되고, 그 다음 생산수단이 언급된다. 15년쯤 후에 쓴 글에서는 강조 순서가 바뀐다. 〈노동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대상적 요소들은 그에게 낯선 것으로 나타난다. 생계수단도 생산수단도 모두 자본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기 경제학 저작들에서는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가 훨씬 더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168, 172-3)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소비재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은 정신적 소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비재의 생산은 동시에 욕구의 창출을 가져오지만, 이 욕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하에서 종종 좌절된다. 이것은 확실히 투명한 연관관계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이 왜 노동자를 좌절하게 하는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노동자에게 소비재가 필요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생산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과거 노동의 산물인)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는 외견상 명백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곧 소비수단으로부터의 소외를 낳는 구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는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생산물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고, 노동과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도 가질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된다."(173)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지배는 착취 현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다. 사유재산만 보호하면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의 소유가 합법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그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 즉 노동자들이 현재 사용된 생산수단이 과거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아무 생각 없이 현 세대 자본가들의 재산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좀더 그럴듯하게 말하면, 생산수단이 과거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현재 자본가의 소유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이전 세대의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생산했고, 그 생산수단은 이전 세대 자본가들의 합법적인 재산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외와 착취는 서로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176)


2.4. 역사철학


"라이프니츠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역사에는 목적도 있고, 창조자도 있다. 물론 이 둘은 함께 간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불행하게도 역사에 목적은 있지만, 이 목적에 따라 행위를 일으키는 의도적인 행위 주체가 없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세속적 신정론인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그의 《역사철학 강의》와 《정신현상학》(정도는 약하지만)은 실체 없는 의도, 행위자가 결여된 행위, 주어 없는 동사에 의존한다. 그의 '이성의 간지'는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이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관계가 있지만, 같지는 않다. 헤겔은 행위자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의미나 목적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신유학 철학자들에 대한 논평에서, 그들이 질서 있는 우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창조자로서의 신을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현자(sage)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현명(sagacity)을 논하는 공허한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헤겔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182)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사고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진술은 종의 이익이 항상 실현된다는 전제이다. 마르크스의 '인류'는 헤겔의 '정신' 또는 '이성'이다. 둘 다 초개인적인 실체로서 이들의 완전한 발전이 역사의 목적이다. 이들은 의도를 가진 행위주체가 아니면서도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한다." "모든 사건을 두 번씩, 한 번은 목적론적으로, 또 한 번은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목적론적 전통의 특징이다. 〈작용인의 왕국과 목적인의 왕국 중 어느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신이 창조했을 때 그의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도록 인과의 사슬을 만들어놓았고, 따라서 어떤 사건이든지 인과사슬에서의 선행사건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그 사슬 자체를 최적으로 만드는 사건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역사관이 어떻게 세속적인 형태로 살아남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확실히 헤겔의 역사관이 그러했고, 마르크스에게서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192)


"일반적으로 미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여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그러한 신념의 불확실성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신념이 총체적인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면 거리낌 없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 바탕에 역사철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연관성'을 정당화하는 기능적 설명까지 있으면, 그러한 신념은 더욱 강화된다. 스탈린으로부터 홍위병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세계관은, '방법론적으로'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훨씬 넘어 개인을 경시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므로 '전진을 위한 후퇴'에 바탕을 둔 사변적인 역사철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실천적인 것이지 결코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지적 결함은 그 이론이 가져올 정치적 재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서 개인은 핵심적인 위치에 있고, 이 개인에 대한 존중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오기 전까지의 개인을 희생양으로 여기는 역사철학은 버려야 한다."(194-5)


제3장 경제학


3.1. 방법론


"마르크스는 경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제 모형으로 만들어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경제 모형을 만들려면 신중하게 단순화하면서 또한 수량적인 가정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성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정확성을 얻기 위한 것이다." "물론 부분균형 이론에서 이끌어낸 결론, 혹은 다른 조건들이 같다고 가정한 이론에서 이끌어낸 결론을 모두 모으면 일반균형 이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를 하려면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을 해야 하고, 그러한 국지적인 연구가 지니는 한계를 아는 한, 모형은 지식의 진보에서 매우 가치 있는 도구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풍의 학습 때문에 가끔 빗나가기도 했지만,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기본 주장들을 대수적으로 또는 기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이 분야에서의 수학의 힘을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서툴러 보이지만 말이다."(199-200)


"마르크스는 경제적 생활에 대해 논의하면서 '본질'(Wesen)과 '현상'(Erscheinung)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 두 용어는 헤겔에게서 가져온 것인데, 마르크스는 헤겔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현상의 반대말은 두 가지이다. 첫째, 감추어진 것, 명상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반대말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와 가격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대체로 이와 같다. 노동가치는 가격과는 다른, 가격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서이지만, 경제주체에게 나타나는 것은 가격뿐이다." "둘째, 현상의 '국지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타나는 것은 항상 특정한 지점에서, 그리고 특정한 관점에서 관찰하는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어진 현상의 반대말은 특정한 지점에 얽매여 있지 않은, 현상들의 '전체적인 연결망'이 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본질은 '상호 관련된 현상들의 전체성'이지, 그 현상들의 '이면'에 있는, 그 현상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인 질서가 아니다."(205-6)


3.2. 노동가치설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의 증가 혹은 감소는 생산가격을 상승 혹은 하락시킴으로써 가격의 움직임은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가치 변화가 가격 변화의 충분조건이라고 말하는데, 동시에 필요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리카도를 따라 단기가격과 장기가격(또는 균형가격)을 구분했다. 수요가 증가하여 소비자들이 현행 가격에서 생산된 것보다 더 많은 재화를 원하면 가격은 올라가고 그것을 생산하는 부문의 이윤율도 올라간다. 이윤율이 높아지면 다른 상품을 생산하던 자본가들도 그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하고, 이 부문의 이윤율이 다른 부문의 이윤율과 같아질 때까지 자본이 유입되고, 시장이 다시 균형에 이르면서 재화의 가격은 수요가 이동하기 이전과 같아진다. 이것이 바로 리카도의 해석에 따른 노동가치설이다." "이때 수요의 이동이라는 견해는 노동자가 화폐임금을 받는다는 가정을 할 때에만 유효하다."(222-3)


"그런데 마르크스는 일반적으로 화폐소득보다는 노동자의 소비집합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성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다.) 이러한 전제에서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으로 서로 다른 소비집합을 선택할 수 있는 경우, 그 개념은 쓸모가 없어진다. 서로 다른 소비집합이란 가격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가치는 서로 다른 경우를 말한다. 가격은 일반적으로 가치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절차로 인해 그는 리카도식 노동가치설의 확고한 기초를 확보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견해와 달리) 가격과 이윤율을 유도하는 데 가치는 필요하지 않다. 가치는 부속물(appendix)일 뿐이고, 막창자꼬리처럼 거의 쓸모가 없다. 노동가치의 개념이 비록 잘 정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도 않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225)


3.3. 축적과 기술변혁


"자본가는 두 가지 기술이 주어지면 더 높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 그 기술들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선택기준이 사회적으로 하위최적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생산물을 얻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기준이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이유는 '필요의 영역'을 줄이고, '자유의 영역'을 넓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개별 자본가의 동기는 더 높은 이윤이다. 마르크스는 《요강》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주어진 물건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이것은 최대한의 수량에서 최대한의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측면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자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노동, 즉 에너지의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이 해방되었을 때 도움이 될 것이며, 노동 해방의 조건이다.〉"(239)


# 하위최적 : 대량 생산 시대의 분업화로, 하위 조직인 개별 시스템의 성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향. 시스템 전체 성과를 극대화하는 전체 최적화와 반대되는 개념


"1861~1863년의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이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하의 기술진보는 문명의 발전을 위한 자유시간을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이윤극대화에 따른 우연한 부산물이며, 이로 인해 가능한 것보다는 작은 규모로 기술변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부르주아 생산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이 생산력의 발전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그 둘은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히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충돌의 한 측면은 계속되는 위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위기는 노동 계급의 한 부문에서 전통적인 직업이 쓸모없어진 것을 알아차릴 때 터진다. 그 바깥 한계는 노동자들의 잉여시간이다. 사회가 얻는 절대적인 잉여시간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물질적 생산 일반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시간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240)


3.4. 자본주의적 위기 이론


# 자본주의적 위기의 성질

1. 체제 내 위기 : 위기는 외부 충격이나 독점, 기타 피할 수 있는 과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적인 것이어야 한다.

2. 미시적인 기초 : 개별 행위주체들의 국지적 합리성이 총체적으로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3. 불가역성 :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정치적 규제로 해결할 수 없다.

4. 정치적 행동의 동기 제공 : 자본주의 체제를 폐기하려는 움직임을 촉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주요한 결점, 곧 착취와 소외 및 이윤율의 하락에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모순'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여기서 이윤율의 하락과 연결되는 역사적 유물론은 모든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때문에 종말을 고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로 인해 그 이상의 진보를 가로막을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자본주의의 한계이지 자본주의의 무능이 아니다. 이 한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항구적인 속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한계를 갖지 않는 다른 생산양식의 등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멸의 조건을 창출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힘을 위축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다른 체제의 수립을 촉진함으로써 이루어진다."(252-3)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잉여노동의 원천, 따라서 이윤의 원천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산 노동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계속 살리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집합적 이익이다. 그러나 또한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즉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다. 좀더 생산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개별 자본가는 초과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도입한 혁신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이 혁신이 일반화되어) 평균이윤율이 하락한다 하더라도, 이 하락분은 너무 미미하여 이 때문에 기계도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모든 산업분야에서 모든 사업가들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경우, 이윤율이 꾸준히 침식되는 심각한 결과가 나타난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본방정식이 보여주듯이, 착취율이 일정하다고 가정할 때, 기계가 도입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이윤율은 하락한다. 이 주장의 근본적인 약점은 산 노동이 이윤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가정이다."(254)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이론에 대한 세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마르크스는 혁신이 사전적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절약형이라는 가정을 당연시하면서, 이에 대해 별도의 논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폭약이나 무선 같이 자본을 극적으로 줄여주는 혁신도 있다." "둘째, 사전적 의미에서 노동절약형 진보가 많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들이 모두 일정할 때 주어진 혁신이 노동절약형이라는 사실로부터, 모든 혁신이 집합적으로 노동절약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이것은 합성의 오류에 해당한다." "셋째, 기술변혁이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에 영향을 줄 경우, 잉여가치율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실질임금이 상승해야 한다. (그러나) 발명이 노동절약적일수록 노동에 대한 총수요가 줄어들어 실질임금의 상승폭은 작아질 것이고, 잉여가치율의 상승폭은 커질 것이 분명하다. 즉 노동절약형 진보와 고정 잉여가치율 가정은 함께 할 수 없다."(255-6)


제4장 착취, 자유, 정의


4.1. 착취의 본질과 원인


"모든 계급 사회의 공통점은 잉여노동의 추출이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잉여노동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넘어선 노동을 말한다." "잉여노동은 소수의 비생산자 계급이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능하게'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차일드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계급의 등장과 착취를 잉여를 가능하게 한 기술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산자는 동일한 소비수준에서 일을 덜 할 수도 있고, 일을 더 해서 잉여를 창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선택이 사회적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잉여가 있는 한 계급 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계급 사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잉여의 가능성이다. 경제가 잉여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268-9)


"로머의 노동시장 착취 모형에서 우리는 행위자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① 가진 재산의 금전적 가치는 얼마인가? ② 자영인가, 노동력의 판매자인가, 노동력의 구매자인가? ③ 자신의 수입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노동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경제행위자의 '부'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계급'에 관한 것이고, 세 번째는 '착취' 지위에 관한 것이다. 로머는 이들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최적화를 위해 노동력을 고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착취자이며,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사람들은 착취당한다. 자영이 최적인 사람들에는 착취자도 있고 착취당하는 사람도 있고, '회색지대'에 속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수입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묶음 중, 그 묶음에 구현되어 있는 노동시간이 구매자의 노동시간보다 많은 경우도 있고, 적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회색지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가격과 가치의 불비례 때문이다."(275)


# 로머 모형(자본주의적 축적모형)의 특징

1. 착취와 계급은 양상(樣相)으로 정의된다. 자본가는 단순히 노동을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 최적을 위해 '반드시' 노동을 고용해야 하는 사람이다.

2. 착취는 개인들의 속성이 아니라 전체 경제체제의 속성이다. 관계 또한 아니다. 착취하거나 착취당하거나 둘 중 하나의 속성을 가진다.

3. 착취가 완전히 정태적인 개념이다. 개인재산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그 수익의 미래가치를 무시한다. 축적과 기술변혁에 대해서도 설명력이 떨어진다.

4. 완전한 경쟁 구도에 한정된다. 착취가 완전 경쟁의 '부재'에서만 일어난다면서 마르크스를 공략한 신고전파 착취 이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착취율의 결정 요소

1. 개별 자본가와 그에게 고용된 노동자들 간의 적대(특히, 노동강도)

2. 경쟁적 노동시장에서의 공급과 수요(산업예비군의 존재)

3. 조직된 노동자와 조직된 자본가 간의 단체협상

4. 기술진보의 간접적 일반균형 효과(노동자의 소비집합을 구성하는 상품의 가치가 하락하면 착취율은 증가한다)

5. 국가의 개입

6. 정치적 동맹의 형성(자본가는 지주들과의 싸움에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정 부분 양보하기도 한다)


4.2. 자유, 물리적 강제, 경제적 강제


"두 개념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는 소극적 자유를 〈형식적 자유〉라 하였다. 예를 들면 노동자는 고용주를 떠날 형식적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적극적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아실현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율로서의 자유의 개념인데,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능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시장에 있어서 형식적 자유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했다. 완전한 자아실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낯선 사람들과의 거래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또한 형식적 자유는 노동자가 진정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형식적 자유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 노동자를 자율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점도 인정한다. 이것은 소비자로서의 자유, 생산자로서의 자유, 그리고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에 모두 해당된다."(321-4)


"공장문을 나서면 어느 누구도 노동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그는 원하는 물품을 자신의 임금 범위 내에서 마음대로 구매할 수 있다. 일자리가 있으면 고용주를 바꿀 수도 있다. 심지어 자영업자가 될 수도 있고, 고용주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자유는,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에 위험한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유용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한다. 특별한 자본가로부터는 물론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고용주를 바꿀 수 있는 자유는 그 이전의 생산양식에서는 없었던 자유라는 생각은 마르크스 시대의 상식이었다. 그 스스로 랭게와 에드몽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토크빌도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 사실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단다. ① 노동자는 개별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② 개별 자본가로부터의 독립성이 자본에의 실질적 종속을 가린다는 것이 그것이다."(326)


"고용주를 바꿀 자유와 스스로 고용주가 될 자유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낳는다. 그것이 환상인 이유는 구성의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한 노동자가 '특정' 고용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사실에서 그가 '모든' 고용주로부터, 즉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후자의 경우 '특정' 노동자가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노동자가 그런 독립성을 얻을 수 있다고 추론한다." "여기서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노동자가 고용주를 바꿀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원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자본가 계급으로 진입할 자유는 그가 '남달리 영리하거나 기민한 사람'일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형식적 자유를 가리킬 뿐 실제로는 소수에 불과하다."(330-1)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되고 있는가? 나는 강압(force)과 강제(coercion)를 구별하고자 한다. 강제는 강제하는 행위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강압은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제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마르크스가 비시장 착취의 '직접적 강제'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져오는 '상황의 압력'을 구별한 이상, 그가 후자는 강제로 보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그는 '경제적 관계의 둔탁한 강요'와 '경제적 조건 외부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강압'을 구별했는데, 이러한 구별은 경제적 관계 내부의 직접적 강압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익명으로 이루어지고, 비인격적·경쟁적 시장을 통해 매개된다는 사실이었다. 독점의 존재를 가정하기보다는 자본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 방법론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31-4)


# 임금노동과 관련한 착취, 강제, 강압의 개념

1. 노동자가 자기 몫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더 나아진다면, 그는 '착취당하고' 있다.

2.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더 나아진다면, 그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된(coerced)' 것이다.

3.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으로 열악해진다면, 그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압된(forced)' 것이다.


4.3. 착취는 부당한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이상(理想) 담화를 배격한다. 〈공산주의는 확립되어야 할 상태, 현실이 그를 향해 나아가야 할 이상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현재 상태를 폐기하는 '현실의' 운동이다.〉 이것은 단순한 '당위'(Sollen)에 대한 헤겔 식의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공상가들이 비판을 받은 이유는 이상의 설교가 곧 실현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이상 그 자체를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이상은 그대로 가져왔고, 〈오직 수단이 다를 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인식, 즉 노동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믿음'과 같은 주관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불의가 자본주의에 관한 '사실'이라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의 지각이 최소한 자본주의의 폐기에 동반되는 것이며, 자본주의를 폐기하고자 하는 주요한 동기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340-3)


"마르크스는 〈어떤 제도든 일반적 규칙에 따라 적용되면 불공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반적 규칙은 개인차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두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다." "다른 한편 개인 간의 차이를 완전하게 반영할 수 있는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는 일정한 재화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진술하는 모든 원칙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간에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논증은 명백한 내적 일관성의 결여 때문에 실패했다. 그는 기여 원칙의 '폐단'을 언급하면서 더 높은 정의의 원칙을 암묵적으로 상정한다. 그것은 바로 필요에 따른 분배이다. 이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는 추상적인 정의 이론을 훌륭하게 논박했다고 믿었겠지만, 이로써 그가 폐기하려고 했던 그런 종류의 이론을 자신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산문으로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을 산문으로 하고 있다."(346-7)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분배의 원칙이 공산주의의 첫 단계와 마지막 단계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첫 단계의 원칙은 노동기여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이다. 이때 투자분과 공공재 및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기금 등은 분배대상에서 제외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기여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즉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의 차이를 잴 수 있는 공통의 척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보다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우월하여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오랫동안 노동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내포된 문제점을 여기에서 따지지는 않겠다. 그러한 환원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 그와 유사한 작업이 자본주의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즉 기여 원칙은 (분배의 두 번째 원칙인) 필요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차선책으로 적용하는 기준인 것이다."(358-9)


"필요 원칙은 평등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기여 원칙에 따르면, 자녀가 많은 노동자와 적은 노동자가 같은 임금을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했으므로, 일 인당 소득 혹은 복지의 측면에서 가족 간 불평등이 발생하는 결함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결함은 불평등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체제가 창출되면 제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 그런 체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상적인 해석이다. 혹은 평등한 분배 원칙에 의해 제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의 평등인가? 마르크스의 좋은 삶 이론에 비추어보면,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필요 원칙이 자아실현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가치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Man)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men)의 자아실현이라면, 개개인 모두에게 최고 수준의, 동시에 다른 사람과 동등한 수준의 자아실현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361-2)


"드워킨은 '값비싼 욕구'의 문제 때문에 그 이상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아실현의 방법 중 어떤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보다 비싸다. 시를 짓는 일은 물질적 자원이 거의 들지 않지만 대작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든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유로이 갖되, 비용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한을 둔다면, 값비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 일부만 충족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자아실현에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자원의 희소성은 실제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자아실현의 방법을 모르면 좌절할 수도 있다. 자원의 결핍으로 인한 좌절은 이보다 훨씬 심각한 재능의 결핍으로 인한 좌절을 방지해주는 순기능이 있다고 쉽게 말할 일만은 아니다. 전자의 제약에 직면하는 사람과 후자의 제약에 직면하는 사람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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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카를 마르크스 지음, 임지현.이종훈 옮김 / 소나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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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사람들은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가 (1871년의) 파리 코뮌과 함께 궁극적으로 매장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반대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코뮌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기점으로 가장 힘찬 전진을 시작했다.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주민 전체를 군대로 편성─수백만을 헤아리는─하는 것과 전대미문의 효력을 지닌 화기·탄약·폭탄의 사용은 군사 전반에 총체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한편으로 이로 인해 보나파르트식의 전쟁 시대는 급속히 종결되고 평화로운 산업 발전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전대미문의 잔혹함과 예측 불허의 결과를 가져올 세계대전 이외의 어떤 전쟁도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듯한 군비 경쟁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알자스-로렌의 병합이었는데, 이때문에 프랑스와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고 상대방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양국의 노동자에게 그것은 단결의 새로운 끈이 되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기념일은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 공동 기념일이 되었다."(30)


# 1895년 엥겔스의 서문에서


"루이 필립 시대에 프랑스를 지배했던 사람들은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그들의 한 분파인 은행가, 대증권업자, 철도왕, 탄광·철광·삼림의 소유자, 이들과 결탁한 일부 지주, 즉 금융 귀족 등이었다. 본래의 산업 부르주아지는 제도권 야당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들에 맞선 투쟁(1848년 2월 혁명)으로 보통선거를 기반으로 한 공화정이 선포되자, 프랑스 사회의 온갖 계급이 갑작스럽게 정치권력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극장의 칸막이 관람석의 정면 일등석이나 맨 위층 관람석을 떠나 혁명의 무대에서 자신이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공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입헌군주제가 사라짐과 동시에 국가 권력이 독자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에 맞서 있던 것 같던 가상도 사라졌으며, 마찬가지로 이러한 가상이 불러일으켰던 일련의 부수적 투쟁 모두가 사라졌다." "1830년 7월에 노동자들이 싸워서 부르주아 군주정을 얻었던 것처럼, 1848년 2월에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공화정을 쟁취했다."(45, 54-6)


"대체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은 산업 부르주아지의 발전에 의해 규정된다. 오직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배하에서만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을 전국적 혁명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또한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배하에서만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적 생산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러한 생산 수단은 동시에 자신들의 혁명적 해방을 위한 수단이 된다. 오직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배만이 봉건 사회의 물질적 근원을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닦아준다." "그러므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순간에 파리에서 실질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진 수단 이상으로 전진한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 분산된 산업 중심지에 몰려 있으므로 압도적 다수의 농민과 프티부르주아지 사이에 섞여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즉 산업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산업 임금노동자의 투쟁은 프랑스에서는 부분적인 사실이다."(58-9)


"따라서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이해를 사회 자체의 혁명적 이해로 관철시키는 대신에 부르주아지의 이해와 병행해서 관철하려 했다." "이렇게 금융 귀족을 부르주아지 일반과 혼동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생각 속에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기껏해야 계급을 입헌군주정의 결과로 인정했던 순진한 구공화파의 공상 속에서, 이제까지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부르주아 분파들의 위선적 문구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사라졌다. 당시 왕당파는 모두 공화파로 변신했으며 파리의 백만장자들은 모두 노동자로 둔갑했다. 이렇게 계급 관계를 공상 속에서 폐지하는 것에 상응하는 상투적 문구가 박애, 즉 모든 사람 사이의 무차별적인 우애와 형제애였다. 계급적 적대감을 이렇게 마음 편하게 도외시하는 것, 서로 모순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감상적으로 평균화하는 것, 계급투쟁을 몽상적으로 뛰어넘는 것, 다시 말해 박애, 이것이 2월 혁명의 본래 슬로건이었다."(59-61)


"부르주아지는 파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6월 폭동을 일으키도록 강요했다. 이 점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유죄 선고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요구에서 폭력적으로 부르주아지의 붕괴를 쟁취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고 이러한 과제를 담당할 능력도 없었다. 《세계 신보》는 공화국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환상에 경의를 표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야 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를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한다는 것이 부르주아 공화국 내에서는 하나의 공상일 뿐이며 그런 공상은 그것을 실현시키려 하면 곧 하나의 범죄로 변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제2공화국에서 획득하고 싶었던 요구, 형식상으로는 엄청나지만 내용상으로는 사소하고 부르주아적이기조차 한 요구 대신에 대담하고 혁명적인 투쟁 구호를 내놓았다. 〈부르주아지 타도! 노동계급의 독재!〉"(77)


"이제 노동자들이 진압되자 프티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꼼짝없이 채권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2월 이후 만성적인 형태로 계속 지연되었거나 불문에 붙여졌던 그들의 파산이 6월 이후에는 명백히 선고되었다. 그들의 명목상 재산이 침해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프티부르주아지를 전쟁터에 내보낼 필요가 있었던 한에서 가능했다." "대부분의 프티부르주아지는 완전히 파산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오직 자본의 절대적 노예가 된다는 조건하에서만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파리 프티부르주아지의 대규모 파산이 직접적인 희생자를 넘어서는 훨씬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부르주아 상업을 한 번 더 혼란 속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카베냐크와 국민의회는 새로운 공채라는 임시방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공채 때문에 그들은 훨씬 깊이 금융 귀족의 굴레에 매이게 되었다."(86-7)


"공화주의 헌법을 제정하는 것은 제헌국민의회의 '위대한 조직 사업'이었다. 6월 사건 이전에 작성된 최초의 헌법 초안에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요구를 요약한 최초의 서투른 공식인 '노동의 권리'라는 말이 들어 있었는데 이 노동의 권리는 국가로부터 부조를 받을 권리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어떤 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빈민을 먹여 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동의 권리는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는 터무니없는 것이며 가련하고 헛된 소망이다. 그러나 노동의 권리 배후에는 자본에 대한 지배 요구가 있고 자본에 대한 지배 요구의 배후에는 생산 수단을 전유하여 그것을 단결한 노동계급에게 종속시키고 그렇게 해서 자본과 노동 그리고 그들 상호 관계를 폐지하자는 요구가 있다. '노동의 권리' 배후에는 6월 봉기가 있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실상 법률의 보호 밖으로 몰아낸 제헌의회는 법 중의 법인 헌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식을 원천적으로 삭제했으며, '노동의 권리'에 저주를 내렸다."(90)


"그러나 이 헌법의 가장 포괄적인 모순은 다음과 같은 점에 내재해 있었다. 즉, 헌법은 프롤레타리아트·농민·프티부르주아계급의 사회적 노예 상태를 영구화하려는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급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옛 사회적 권력을 인정했던 계급인 부르주아지로부터는 그들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정치적 보증을 박탈했다. 헌법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를 민주적 조건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이 조건들은 매순간 적대 계급의 승리를 용이하게 하고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헌법은 프롤레타리아트·농민·프티부르주아지에게는 정치적 해방에서 사회적 해방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동시에 부르주아계급에게는 사회적 복고에서 정치적 복고로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결국 헌법 시행 첫날이 제헌의회 지배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울 카베냐크가 다윗 나폴레옹에게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다."(91-3)


"1848년 12월 20일에 입헌공화국의 야누스 머리는 아직 한쪽의 얼굴, 즉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트릿하고 넓적한 모습을 지닌 행정권의 얼굴만을 드러냈다. 1849년 5월 28일에 입헌공화국은 그 두 번째 얼굴, 즉 왕정복고와 7월 왕정의 방탕한 생활이 남긴 상처로 얼룩진 입법부의 얼굴을 드러냈다. 입법국민의회와 더불어 공화제적 국가 형태인 입헌공화국의 외양이 완성되었으며, 이 국가 형태와 더불어 부르주아계급의 지배가, 즉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구성하는 양대 왕당파인 정통 왕조파와 오를레앙파가 연합한 질서당의 공동 지배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프랑스 공화국이 연립 왕당파의 수중에 들어가는 동안에 유럽의 반혁명 열강 연합은 3월 혁명의 최종 피신처를 향해 전면적인 십자군 원정을 꾀했다. 러시아는 헝가리를 침공했고, 프로이센은 제국 헌법을 옹호하는 군대를 향해 진군했으며, 우디노는 로마를 포격했다. 유럽의 위기는 분명히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121)


"1848년 6월 23일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폭동을 일으킨 날이었다면, 1849년 6월 13일은 민주주의적 프티부르주아지가 폭동을 일으킨 날이었다. 이들 두 폭동은 각기 그것을 이끈 계급을 전형적이고도 순수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1849년 5월 28일에 입법의회 소집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시작한 입헌공화정의 생애 제1기는 6월 13일로 그 막을 내린다. 이 서막은 시종 질서당과 산악당, 부르주아지와 프티부르주아지 사이의 소란스러운 싸움으로 일관되었다. 프티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공화정의 체제 강화에 헛되이 대항했고, 이를 위해 임시정부와 집행위원회에서 부단히 음모를 꾸몄으며, 또 6월 사건 때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맹렬히 공격했다. 6월 13일은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연합 왕당파의 의회 독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계엄 선포를 정부의 재량에 맡기고 언론의 입을 더욱 굳게 다물게 하고 결사권을 폐지시킨 탄압법이 (질서당이 장악한) 6·7·8월 국민의회의 입법 활동 전부를 차지했다."(127-9)


"입헌공화국의 생애 제3기는 1849년 11월 1일에 시작되어 1850년 3월 10일에 끝났다. 기조가 그토록 감탄했던 헌법 기관들의 관례적인 경기, 즉 행정권과 입법권의 세력 다툼이 시작된다. 11월 1일에 루이 보나파르트는 꽤 신랄한 표현으로 바로 내각의 해산과 새 내각의 조각을 통고하는 교서를 통해 입법의회에 응수했다. 그뿐만 아니라 보나파르트는 연합한 오를레앙파와 정통 왕조파의 복고욕에 대항해 자신의 실제 권력의 근거인 공화정을 옹호하고, 질서당은 보나파르트 측의 복고욕에 대항애 자신들의 공동 지배의 근거인 공화정을 옹호하며, 정통 왕조파는 오를레앙파에 반대하여 그리고 오를레앙파는 정통 왕조파에 반대하여 현 상태, 즉 공화정을 옹호한다. 질서당의 모든 분파는 각기 자신의 왕과 자신의 복고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서로 경쟁자의 찬탈욕이나 반란 야욕에 대비하여 부르주아지의 공동 지배, 즉 각자의 특정 주장이 중화되고 유보된 채 유지되는 형태인 공화정을 주장한다."(137-8)


"헌법의 기반은 보통선거권이다. 보통선거권의 폐지, 그것은 질서당과 부르주아 독재의 마지막 말이다. 1848년 5월 4일, 1848년 12월 20일, 1849년 5월 13일, 1849년 7월 8일에 보통선거권을 질서당과 부르주아 독재가 옳다고 인정했다. 1850년 3월 10일에는 보통선거권이 스스로를 질책했다. 부르주아지의 통치를 보통선거권의 성과요 결과로 보는 것, 국민의 주권 의지가 명백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것, 그것이 부르주아 헌법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 선거권이, 주권 의지의 내용이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통치와 일치하지 않게 될 때 헌법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좋은 옷을 입혀주고 무한한 힘을 부여한 보통선거권을 거부하면서 공공연히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의 독재는 지금까지 인민의 뜻에 따라 존재해왔으니 이제 인민의 뜻에 거슬러서 공고히 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공화국은 단 하나의 공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 공화국이 혁명의 온실이었다는 점이다."(161-3)


2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1년 12월 2일의 정변)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현 세대가 자기 자신과 만물을 개조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데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도, 바로 그와 같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도 그들은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고 노심초사하면서 과거의 망령들을 주술로 불러내어 이 망령들로부터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려 유서 깊은 분장과 차용한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하여 루터는 사도 바울로 가장했으며 1789년부터 1814년까지의 혁명은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의상을 번갈아가며 몸에 걸쳤고, 1848년의 혁명은 때로는 1789년의 혁명 전통을, 때로는 1793년부터 1795년까지의 혁명 전통을 서투르게 모방했다."(190-1)


"이와 같이 여러 혁명에서 망령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과거의 투쟁을 서투르게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을 예찬하기 위해서였으며, 주어진 임무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에서 도피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임무를 상상 속에서 위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지나가버린 시대의 유령으로 하여금 다시 배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1848년부터 1851년까지 늙은 바이유의 옷을 입고 양피 장갑을 낀 공화주의자 마라스로부터, 천박한 나머지 거부감을 주는 자신의 모습을 나폴레옹의 철제 데스마스크 밑에 감춘 모험가(루이 보나파르트)에 이르기까지 오직 구혁명의 유령만이 떠돌아다녔다. 혁명으로 운동을 가속화할 힘을 갖게 되었다고 믿었던 한 민족 전체는 갑자기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로 되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다고 여겨졌던 권력의 앞잡이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192-3)


"(부르주아 공화파의 주도로 작성된) 헌법 제45조부터 70조까지에 규정된 조항에 따르면, 국민의회는 헌법상 대통령을 제거할 수 있는 반면 대통령은 오직 위헌적인 방법으로만, 다시 말해서 헌법 그 자체를 거부함으로써만 국민의회를 제거할 수 있다. 이렇게 여기서는 헌법이 그 자신의 폭력적 파멸을 도발하고 있다. 헌법은 1830년의 헌장과 마찬가지로 권력 분립을 신성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분립을 지탱될 수 없는 모순에 이르기까지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이른바 헌법에 입각한 권력 사이의 도박이라고 기조가 이름 붙인, 의회에서의 입법권과 행정권 간의 알력은 1848년 헌법에서도 줄기차게 결사적으로 계속되었다." "의회가 항상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매일매일 대중의 비판을 받기 쉽게 되었던 반면에 대통령은 엘리제 궁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지만 그러한 생활 속에서 헌법 제45조는 그의 눈앞에서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매일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다. 〈형제여, 죽음이 가까이 왔다!〉"(210-1)


# 1852년 5월에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날 예정이었다. 1848년 당시의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 선거를 4년마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에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헌법은 대통령이 모든 프랑스인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게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다. 프랑스의 전체 투표가 국민의회의 750명의 의원들 사이에 나뉘어 있는 한편 대통령의 경우에는 한 개인에게 집중된다. 인민의 각 대표자는 단지 이런저런 정파 또는 특정 도시, 특정 교두보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며, 심지어는 750명의 의석수를 채우기 위해 후보자의 인간됨됨이나 그의 대의명분을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못하고 어떤 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에 선출된 경우가 있다. 반면에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의해 선출되며, 대통령 선거 행위 그 자체는 국민이 4년마다 한 번씩 하게 되는 트럼프 놀이이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민의회는 국민과 형이상학적 관계에 놓여 있지만, 대통령은 국민과 개인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국회는 개별적인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정신의 다양한 측면을 대변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국민정신의 화신이다. 즉, 그는 국민의 은총을 입은 대통령인 것이다."(212)


"1849년 11월 1일 보나파르트는 바로-팔루 내각을 해임하고 새 내각을 구성한다는 교서를 내림으로써 의회를 놀라게 했다." "바로 내각은 정통 왕조파와 오를레앙파로 구성된 질서당의 내각이었다. 보나파르트는 공화주의적인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로마 원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리고 민주파를 와해시키기 위해 바로 내각을 필요로 했다. 겉보기에 그는 이 내각 뒤에 자기를 숨긴 채 정부 권력을 질서당의 수중에 양보하고 루이 필립 치하에서 신문의 책임 있는 보증인들이 썼던 겸소한 가면, 즉 꼭두각시의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다. 이제 그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 가면을 더 이상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있게 해주는 짧은 베일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막는 철가면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질서당의 이름으로 공화주의적 국민의회를 분쇄하기 위해 바로 내각을 임명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이름이 질서당의 국민의회와 독립해 있음을 천명하기 위해 바로 내각을 해임했다."(243)


"질서당과 대통령 간의 불화는 예기치 않은 한 사건이 대통령을 다시 질서당의 품속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때 위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예기치 않은 사건이란 바로 '1850년 3월 10일이 보궐 선거'였다. 이 선거는 6월 13일 이후에 투옥되거나 추방된 의원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실시되었다. 파리는 오로지 사회민주당의 후보자들만을 선출했다. 더욱이 파리는 대부분의 표를 1848년 6월 봉기 가담자인 드플로트에게 몰아주었다." "보나파르트는 갑자기 다시 한 번 혁명의 위기에 직면한 자신을 발견했다. 1849년 1월 29일과 1849년 6월 13일의 경우처럼 1850년 3월 10일에도 그는 질서당의 등 뒤로 도망쳤다. 그는 굴복했고 무기력하게 용서를 빌었으며, 의회 다수파의 명령에 따라 어떠한 내각이든 임명하겠다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오를레앙파와 정통 왕조파의 지도자들에게 정권을 잡아 달라고 간청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질서당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이러한 기회를 이용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251-2)


"이에 덧붙여서 우리는 1850년은 상업과 산업의 눈부신 발전이 이룩된 해이며, 따라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전 고용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보통선거권 폐지를 중점에 둔) 1850년 5월 31일의 선거법은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권력에 참가하는 것을 봉쇄했다. 이 선거법은 모든 투쟁의 영역에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차단시켜버렸다. 또한 그 법은 노동자들을 2월 혁명 이전과 같은 천민의 위치로 되돌려놓았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사건에 직면해 그들 자신을 민주파 인사들에게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순간적인 만족 때문에 자기 계급의 혁명적인 이해관계를 망각함으로써 정복자가 되는 명예를 포기하고 운명에 몸을 맡겨 버렸다." "보통선거는 3월 10일에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대한 정면 반대를 선언했다. 부르주아지는 이에 보통선거권의 불법화로 대응했다. 그러므로 5월 31일의 법률은 계급투쟁의 필연적인 산물 가운데 하나였다."(255-6)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친위조직인) '12월 10일회'에 1만 명의 불량배를 끌어 모았는데, 이들은 민중의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회주의적 노동자들의 국민작업장, 부르주아 공화파의 기동대 같은 것이 보나파르트의 12월 10일회였는데 이 조직은 보나파르트의 고유한 당파적 전투력이었다. 그가 여행하는 동안 도로를 가득 메운 이 단체의 분견대는 그의 즉석 청중이 되어 대중의 열광을 연출했고 황제 만세를 외쳤으며 공화파를 모욕하고 때려 눕혔는데, 물론 이 모든 일은 경찰의 비호 속에서 이루어졌다. 보나파르트가 파리로 귀환할 때 그들은 전위대가 되어 반대 시위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반대 시위자들을 쫓아버렸다. 12월 10일회는 그의 부속물이었으며 그의 작품이었고 그 자신의 아이디어였다. 그 외에 그가 갖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황의 힘에 의해 그의 수중에 들어왔고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황이 그를 대신해주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충족시킬 수 있었다."(261-3)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온을 요구한다.〉 이것은 2월 혁명 이래 질서당이 혁명에 대해 외친 말이었으며, 보나파르트의 교서가 질서당에 대해 외친 말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주권 찬탈을 목적으로 한 행동을 했다. 그러나 질서당이 보나파르트의 행동을 신경질적으로 해석해 소동을 일으킨다면 질서당이 '불안'을 조성한 것이 되고 만다. 사토리의 군대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쥐 죽은 듯 고요할 것이다. 따라서 보나파르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조용히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고 요구했으며, 의회의 정당들은 혁명적 불안을 다시 야기시킬 것이라는 공포와 자기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눈에 그들 자신이 불안을 교사하는 것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 가지 두려움으로 마비되었다.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온을 요구했기 때문에 질서당은 결과적으로 보나파르트가 그의 교서에서 '평화'를 이야기한 데 대해 감히 '전쟁'으로 맞설 수 없었다."(267-8)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된) 질서당은 개헌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결정을 통해 질서당이 지배할 수도 복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그들은 살 줄도 죽을 줄도, 공화제를 견뎌낼 줄도 타도할 줄도, 헌법을 보전할 줄도 파괴할 줄도 모르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질서당은 누구에게 이 모든 모순의 해결을 기대했는가? 그들은 그것을 세월과 사건의 흐름에 맡겼다. 질서당은 사건을 주도한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질서당은 이렇게 자신을 사건들의 힘에, 그리고 권력에 맡겼는데 국민과의 투쟁에서 질서당은 자신의 권리를 이 권력에 하나하나 양도하여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맞서게 되었다. 행정권의 수반이 질서당에 대한 반대 투쟁 계획을 방해받지 않고 작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공격 수단을 강화하고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며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질서당은 정확히 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대로부터 퇴장하여 8월 10일부터 11월 4일까지 3개월 간 휴회할 것을 결정했다."(291)


"장기 의회를 해산시킬 때 크롬웰은 홀로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부과한 시간의 한계를 일 분도 넘기지 못하도록 회중시계를 꺼내 보면서 유쾌하고 유머가 넘치는 욕지거리로 의원들을 하나하나 쫓아냈다. 나폴레옹은 크롬웰보다 작았지만 적어도 브뤼메르 18일에는 입법의회에 나가 비록 떨리는 목소리이기는 했으나 의회의 사형 선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크롬웰이나 나폴레옹이 소유했던 권력과는 아주 다른 행정권을 소유하고 있던 제2의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모델을 세계사 연표가 아니라 12월 10일회의 연대기 또는 형사재판소의 연대기에서 구했다. 그는 프랑스 은행에서 2,500만 프랑을 강탈하여 마냥 장군을 100만 프랑에 사고 병사들을 일인당 15프랑과 술로 매수했으며, 도둑과 같이 밤중에 공범자들과 만나 의회 지도자들을 투옥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국민의회와 국무회의 해산, 보통선거권 부활, 센 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을 알리는 현수막'을 벽이란 벽에는 모두 부착할 것을 명령했다."(305-6)


"〈이것은 바로 완전하고 최종적인 사회주의의 승리이다.〉 기조는 12월 2일을 이와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의회 공화정의 타도가 그 속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의 싹을 담고 있다 해도 그것의 직접적이고 뚜렷한 결과는 의회에 대한 보나파르트의 승리, 입법권에 대한 행정권의 승리, 문구의 힘에 대한 문구 없는 힘의 승리였다." "프랑스는 이렇게 한 개인의 독재 앞에, 그것도 권위 없는 한 개인의 권위 앞에 굴복하기 위해 한 계급의 독재에서 도망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혁명은 철저한 것이다. 혁명은 아직 고난 속을 방황하고 있지만, 자신의 과업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수행한다." "혁명은 우선 의회 권력을 타도할 수 있도록 의회 권력을 완성했다. 혁명은 이 과제를 완수했기 때문에 행정권을 완성시켜, 그 행정권을 자신이 맞서야 할 유일한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 혁명 준비 작업의 나머지 반이 이루어졌을 때 유럽은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의기양양하게 외칠 것이다. 〈잘 파냈다. 늙은 두더지여.〉"(310-1)


3 / 프랑스 내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자) 1870년 9월 4일에 파리 노동자들은 공화국을 선언했고, 이는 거의 즉각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받아들여졌으며 단 하나의 반대의 목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날 엽관·매직을 노리는 변호사 도당이 티에르를 자신들의 정치가로 하고 트로슈를 자신들의 장군으로 하여 시청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모든 역사적 위기의 시대에 프랑스를 대표했던 파리의 사명에 대한 광적인 신념에 차 있었습니다." "파리는 노동계급을 무장시키고 이들을 효과적인 군대로 조직하고 그 병사들을 전쟁 자체에 의해 단련시키지 않고서는 방어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장된 파리는 곧 무장 혁명을 의미했습니다. 프로이센 침략자들에 대한 파리의 승리는 프랑스 자본가 및 그 국가의 기생충에 대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승리였을 것입니다. 국민적 의무와 계급적 이해 사이의 이러한 갈등 속에서 국민방위 정부는 '국민 배반 정부'로 변절함에 일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373-4)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루이 보나파르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전쟁. 프랑스의 패배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제2제정에 종말을 고했다.


"사실상 (공화국과 그 보루인 파리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반혁명은 낭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2제정은 국가 부채를 두 배 이상 만들었고 대도시에 과중한 지방 부채를 씌웠습니다. 전쟁은 무섭게 빚더미를 불렸으며 무자비하게 국가 자원을 황폐화시켰습니다. 파멸을 마무리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샤일록(비스마르크)은 프랑스 영토에 50만 병력의 주둔과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그 미불 불입금에 대한 5퍼센트의 이자율이라는 채무 상환 청구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청구서에 대해 지불하게 되어 있었습니까? 부의 전유자들이 스스로 일으켰던 전쟁의 대가를 부의 생산자들(노동자들)의 어깨 위로 떠넘기도록 희망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공화정을 폭력적으로 타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엄청난 파멸은 토지 및 자본의 이 같은 애국적 대표들로 하여금 침입자의 감시와 후견하에 대외 전쟁에다가 내전을 접목시키는 일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388-9)


"1871년 3월 18일 새벽, 파리는 〈코뮌 만세〉라는 뇌성과 함께 일어섰습니다. 부르주아지의 마음을 그토록 번민케 하는 스핑크스인 코뮌은 과연 무엇입니까?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배 계급의 실패와 반역의 와중에서 공무 집행에 개입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할 때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스스로를 자기 운명의 주관자로 간주하는 것이 자신의 절박한 과제이며 절대적 권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 조직을 장악하여 이것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집중된 국가 권력은 상비군, 경찰, 관료제, 성직 제도 및 사법 제도 등의 광범위한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기관은 체계적이고 위계적인 분업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국가 권력은 절대 왕정 시대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태동하는 중간계급 사회에 반봉건주의 투쟁의 강력한 무기로 기여한 것입니다."(402-3)


"근대 산업상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적대가 확대·심화되는 속도에 따라 국가 권력은 점점 더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의 국가 권력으로서의 성격, 사회적 노예화를 위해 조직된 공권력으로서의 성격, 계급적 전제 정치의 동력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계급투쟁에서 발전적 국면을 나타냈던 모든 혁명이 지나간 후에는 순전히 억압적인 국가 권력이 더욱더 뚜렷이 부각되었습니다. 지주들로부터 자본가들로의 통치권 이전을 야기했던 1830년의 혁명은 노동자들과 좀 더 거리가 떨어진 적대자들로부터 노동자들의 좀 더 직접적인 적대자들에게로 통치권을 이전시켰던 것입니다." "이전 체제하에서 지배 계급의 자체 분열로 해서 국가 권력을 견제했던 장애 요소는 지배 계급의 단결로 제거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적인 대두를 목도하면서 지배 계급은 이제 노동을 적으로 삼는 자본에 의한 국가적 전쟁의 동력 기관으로서 국가 권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403-4)


"파리가 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원인은 포위의 결과로 파리가 군대를 배제한 가운데 이것을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이제 하나의 제도로 변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코뮌은 파리 시의 다양한 각 구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되어 시민에게 책임을 지며 즉시 소환 가능한 시 의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성원의 다수는 당연히 노동자들이거나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들이었습니다. 경찰은 중앙 정부의 하수인으로 계속 남았던 것이 아니라 즉각 그 정치적 속성을 벗게 되어 책임감 있고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코뮌의 집행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코뮌 의원을 필두로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 수준에서 수행되어야 했습니다." "구정부가 갖는 물리력의 요소인 상비군과 경찰을 제거한 후 코뮌은 노심초사 재산 기관으로서의 모든 교회를 해체하고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교육 시설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개방되었으며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모든 간섭은 배제되었습니다."(406-7)


"현 사회의 대변자들은 코뮌이 모든 문명의 기반인 재산의 철폐를 의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코뮌은 다수의 노동을 소수의 재산으로 만드는 바로 그 계급 재산을 철폐하고자 의도했던 것입니다. 코뮌은 착취자에 대한 착취를 목표로 했습니다. 코뮌은 토지 및 자본과 현재는 주로 노동의 노예화 및 착취의 수단인 생산 수단을 단지 자유롭고 협동적인 노동의 도구로 변형시킴으로써 개인적 소유를 하나의 진실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산주의, 그것도 '불가능한' 공산주의라고 말합니다! … 만일 협동적 생산이 협잡이나 함정으로 남게 되지 않는다면, 만일 협동 생산이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하게 된다면, 만일 단결된 사회들이 공동 계획에 의거해 국민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따라서 국민 경제를 그들 스스로가 통제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참화인 항구적인 무정부 상태와 주기적인 변동을 종식시키게 된다면, 신사 여러분, 이것 이외에 무엇이 공산주의, 그것도 '가능한' 공산주의가 되겠습니까?"(412)


"비스마르크는 파리의 폐허를, 파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시체들을 흡족한 듯이 바라봅니다. 그에게 이것은 혁명의 박멸일 뿐만 아니라 이제 실제로 참수된 그리고 프랑스 정부 자체에 의한 프랑스의 소멸인 것입니다." "현 시대의 가장 엄청난 전쟁 후에 정복 국가와 피정복 국가의 주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동으로 학살하기 위해 친교를 맺어야 했습니다. 이 미증유의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비스마르크가 생각하듯이 대두하는 신사회에 대한 최후의 탄압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가 먼지로 되어 사라지는 일입니다. 구사회가 아직도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영웅적 시도는 국가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국가적 전쟁은 이제 계급투쟁을 지연시키기 위해 의도된 단지 정부 측의 속임수라는 것이 드러날 판국이며,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폭발하게 되자 곧 버림받을 운명에 있습니다. 계급 지배는 더 이상 스스로를 국가적 형태 속에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각국 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하는 동일체인 것입니다!"(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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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회고록 -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
이해찬 지음 / 돌베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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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당을 정기노선으로 다니는 대형 노선버스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 지방자치 선거를 정기적으로 치러 내야 하는 정치조직입니다. 지향하는 노선이 있어야 하고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내야 합니다. 특정 후보가 선거 때 올라타서 패배하면 버리고 마는 중고 승용차가 아닙니다. 특히 언론, 노조, 시민사회가 취약한 우리나라에서는 정당의 역할과 책임이 매우 큽니다. 2018년 당대표로 취임한 이후 2년 동안 한 일들, 당원이 참여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경선 제도를 정비하며 시스템 공천으로 21대 총선을 치른 것 모두, 국민들의 뜻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민주적이고 유능한 국민정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21대 총선의 큰 승리도 그 여정에 있어 하나의 결과일 뿐입니다." "2022년 봄 대선 과정에서 보듯이 선거는 패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패배 이후에도 당과 진영이 흔들리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 내는 것, 그리고 그다음 선거를 준비할 수 있는 힘과 안정감이지요." (7)


"33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온전한 공인(公人)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려면 공인의식(Public Mind)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올바른 공인의식을 가지려면 역사와 현실을 함께 사고하는 사회과학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정치인은 책임과 열정과 균형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막스 베버는 정치인의 덕목으로 열정, 책임감, 균형을 강조했지요. 제 오랜 공직 생활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은, 이런 덕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책과 사안을 다룰 때 경중과 선후와 완급을 가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일이 더 중요한지,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급히 해야 할 일인지 좀 더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할 일인지를 생각해야 실수도 적고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일이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성실한 태도로 끈기 있게 해 나가며, 반드시 이 사안을 꼭 해결하겠다는 절실한 심정이 중요합니다." (8)


"이 책을 준비하고 구술하며 새삼 확인한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꿈이 모이면 현실이 되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어렵고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꿈을 나누고, 그 꿈을 향해 진실하고 성실하며 절실하게 오늘을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꿈꾸었던 일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한 하루하루 삶의 축적이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저는 그 꿈이 이루어지는 이야기,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 책에 담고자 했습니다." "2년 가까이 준비하고 구술한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모아 놓고 나니, 참으로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 그 시대를 함께 살아왔고 지금을 함께 사는 분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그분들이 제 입을 빌려 이야기를 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해찬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함께 살아온 모든 분들의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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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세계사 - 나폴레옹 전쟁은 어떻게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는가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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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혁명가도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도 아니었던 보나파르트는 (공화국의 제1통령이라는 직함을 취하면서) 프랑스에 일종의 '민주적 이상들'이라는 외관에 가려진 계몽 전제정을 선사했다. 주권은 인민이 아니라 오로지 통치자에게 있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그를 '혁명의 자식'으로 묘사하지만 그를 '계몽주의의 자식'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흔히 가져오는 혼돈과 혼란,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에 인내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경로를 좌지우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군중에 대한 멸시를 여러차례 공공연히 드러냈다. 혁명 대신 보나파르트는 관용과 법 앞에서의 평등, 합리주의와 강력한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는 전통 안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계몽 전제정의 신조에 충실하게, 그는 자신이 믿기에 인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줌으로써 강한 프랑스 국가를 건설하고자 애썼지만 민주공화정을 끌어안거나 주권을 인민의 의지에 넘긴다는 전망은 결코 제시하지 않았다."(13)


"나의 의도는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펼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 진동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반향을 낳았다는 사실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아우스터리츠, 트라팔가르, 라이프치히, 워털루는 모두 나폴레옹 전쟁의 표준적인 역사서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장소들과 더불어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올리언스, 퀸스턴하이츠, 루세, 아슬란두즈, 아사예, 마카오, 오라바이넨, 알렉사드리아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로 파견된 영국 원정군과 이란과 인도양에서의 프랑스-영국의 외교적 책략, 오스만 제국에 대한 프랑스-러시아의 공작, 핀란드를 둘러싼 러시아-스웨덴의 힘겨루기를 다루지 않고는 이 시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17)


1장 혁명적 서곡


"프랑스 혁명전쟁[엄밀하게는 1792년부터 1802년까지 벌어진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들을 지칭한다]에 대한 전통적인 서사는 특정한 패턴을 따른다. 그 서사는 1792년 무렵에서 출발하여, 이웃한 군주정들로부터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과, 결국 차례차례 프랑스와의 강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정들의 상황을 비롯해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법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을 제시하며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의 여러 중요한 사태들, 즉 프랑스의 정치적·군사적 취약성으로 인해 전개된 사태들을 간과한다. 혁명과 혁명전쟁은 프랑스 권력의 허약성을 노출시킨 기존의 정치적 긴장관계 속에서 벌어졌고, 그에 따라 세계 여타 지역에서 유럽 열강의 제국적 야심을 부추겼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유럽과 남동유럽, 북동태평양 지역, 카리브 해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혁명 전야에 국제 정치와 바다 건너 유럽 본토의 상황에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32-3)


"프랑스 혁명은 일단의 복잡한 정치적·재정적·지적·사회적 문제들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그 기원이 프랑스 외부에서 유래했다. 가장 결정적인 발전상으로는 1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대양 무역의 확립과 17세기 전 세계적인 상업 회로들의 등장이 있다. 둘 다 외교적·군사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유럽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어났다. 열강은 가공할 함대를 구축하고, 무역 회사를 인가하고, 해외 식민지 팽창을 장려하고,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함으로써 대륙 간 통상에 접근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7년 전쟁(1756~1763) 동안 겪은 정치적·군사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프랑스는 진짜 상업 제국을, 아메리카와 인도양, 아프리카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며, 늘어나는 국제 무역량을 수용하기 위해 급속히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가던 금융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상업 제국을 보유하고 있었다."(33-4)


"혁명전쟁은 국왕들의 사안이었던 전쟁을 국민들의 사안으로 탈바꿈시켰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거의 중단 없이 이어진 싸움은 국가의 자원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투입되고 소모되는 것을 목격하며 무력 충돌의 지속과 확대를 가능케 했다.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위협은 이 무력 충돌에서 혁명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배경을 이루었다. 프랑스 군대는 점령 지역에서 지금 우리가 〈정권 교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해 광범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결과들을 가져왔다. 혁명가들은 혁명이 유럽 전역에서 반갑게 맞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혁명가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만약 유럽 군주정들이 〈국왕들의 전쟁〉을 개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인민들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 그들은 왕위에서 쫓겨난 폭군들에 맞서 서로를 끌어안으리라.〉 인류는 임박한 무력 충돌에서 틀림없이 고통을 겪겠지만 혁명가들은 전 세계에 자유를 가져오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53-4)


2장 18세기 국제 질서


"18세기의 막이 올랐을 때, (유럽 대륙 전체로 확대된 세력 균형의) 평형 상태는 프랑스(에스파냐와 몇몇 독일 국가들에 의해 때로 지지를 받는) 대 오스트리아(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합세한)라는 구도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이 끝난 뒤에 평형 상태는 더 많은 강대국들을 포함하고 훨씬 넓은 지리적 범위를 아울렀다. 이 전쟁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희생시켜 해상과 식민지에서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세력 다툼의 분명한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즉 프랑스보다 두 배가 넘는 전함을 보유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함대가 앞바다에서 중요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물자 보급을 차단하고,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군사력을 대륙에서 봉쇄하는 사이, 영국은 대륙에서 동맹 세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해외에서 군사적·상업적 패권을 확립했다. 1789년에 이르자 영국은 분명히 유럽에서 앞서 나가는 상업, 식민 열강이었다."(58-9)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치하에서 프로이센의 혜성 같은 등장과 엘리자베타(재위 1740~1762)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치하에서 러시아의 부상은 오랫동안 서쪽에 있던 유럽의 무게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시켰고, 새로운 '문제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바로 발트해 지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운명을 둘러싼 '북방문제'와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둘러싼 '동방문제'였다. 신흥 강국과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열강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무력 분쟁에서 거듭 좌절을 겪었고, 재정적·정치적 난국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전야에 다섯 국가로 이루어진 명확한 집단이, '강대국'으로 이미 등장했다. 집단적으로,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는 일단 외교술이라는 고상한 수단이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면 전쟁을 통해 유럽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쟁쟁한 한 역사가가 적절하게 평가했듯이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포식자가 될 것인가 먹잇감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59)


"유럽 열강들 간 경쟁을 개관하는 가장 편리한 출발점은 오스트리아-러시아-오스만 제국 전쟁이 발발한 1787년이다. 이 전쟁은 강대국들 간의 기존 경쟁관계들─유럽 중심부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와 동부에서 러시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 남부에서 영국-러시아의 경쟁관계─을 특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경쟁관계들을 강화했다. 남동유럽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19세기에 가장 골치 아픈 외교 문제 가운데 하나, 즉 점차 약해지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유럽 국가들 간의 각축전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제의 시초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에서 강화를 중재하려는 프랑스의 시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사안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맡아왔던 역할이었다. 프로이센이 네덜란드 소요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프랑스의 무능력은, 프랑스가 더 이상 일류 강국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만큼 프랑스 군주정에 굴욕이었다."(73-9)


"영국과 프랑스는 카리브 해역에서도 충돌을 벌였다. 유럽의 통상에 미치는 식민지 생산의 경제적 중요성이 워낙 커서 서인도제도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식민지 경쟁관계는 혁명으로 불붙은 노예 봉기로 복잡해졌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혁명적 사건들, 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1789년 8월)은 프랑스령 식민지들, 특히 생도맹그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1791년 5월, 자유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재산 자격 기준을 갖춘 모든 남성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프랑스 국민의회의 결정은 생도맹그의 포르토프랭스에서 공공연한 시가전으로 이어졌고, 1791년 11월 초에 이르자 마르티니크의 여러 교구들은 노예 반란으로 들썩였다." "1792년 4월 4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모든 자유 유색인에게 시민권을 확대했고,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얻어내길 희망했다. 그로부터 고작 16일 뒤에 세상을 바꿀 전쟁이 시작되었다."(94-6)


3장 1차 대불동맹전쟁, 1792-1797


"혁명은 위협을 제기했지만, 혁명이 강력한 사상들에 의해 추동되어서가 아니라 그 사상들이 총포를 함께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혁명적 〈의견〉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질타를 받았을 때 영국 총리는 유명한 답변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골방의 의견들이나 학교의 사변들에 맞서 무기를 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장을 한 의견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 정부는 외교정책에서 진심 어린 이상주의를 한껏 드러냈고, 심지어 정복과 영토 확장을 배격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1792년 후반에 이르자, 첫 성공을 맛본 뒤 혁명의 〈자유를 위한 전쟁〉은 이미 더 전통적인 목표들을 향한 무력 충돌로 진화한 상태였다." "혁명의 보편적 원칙들은 많은 이웃나라들로부터 정말로 환영받았지만 그 해방의 수혜자들이 〈프랑스의 살인적인 박애〉의 희생자처럼 느끼기 시작하자 프랑스의 점령은 더 많은 주민들로부터 원망과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104-5)


"1794년 7월에 공안위원회를 전복하고 출범한 프랑스의 신정부는 사방으로부터 공격에 시달렸다. 오른편에서는 왕당파가 군주정을 복귀시키려고 한 반면, 왼편에서는 자코뱅파의 재집권 희망이 계속되는 경제적 문제들로 되살아났다. 총재 정부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다가 왕정주의의 재기로 위협을 받자 다시금 왼쪽으로 돌아갔고, 이러한 정치 스펙트럼의 이동은 다시금 자코뱅주의의 부활을 부추겼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총재 정부가 허약하고 부패했으며 국내외 정책과 재정에서 무능했다고 비판해왔고, 이러한 평가는 자연히 보나파르트 장군의 정권 타도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통령 정부와 제정의 핵심적인 제도들이 중앙집권화와 정부 행정의 공고화를 진지하게 추구한 총재 정부 치하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수년간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피로감에 쌓인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극복할 만큼 충분한 공적 신뢰는 받지 못했다."(109-10)


"1797년 10월 17일에 체결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혁명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차 대불동맹은 실질적으로 끝장났고 프랑스가 승리했다. 비록 조약은 바타비아(네덜란드) 공화국과 관련한 어떠한 단서 조항도 달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세력권 안에 바타비아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또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저지대 지방과 북부 이탈리아를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 아래 두어 프랑스를 서유럽의 헤게모니 세력으로 만들었고, 영국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맞수가 되었다. 과거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이오니아제도를 보유할 것을 고집한 보나파르트의 뜻이 관철됨에 따라 프랑스의 이해관계는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뻗게 되었고, 동지중해에서 그 입지가 적잖게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발칸반도, 특히 그리스에 혁명의 이상들을 전파했다. 대체로 파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합의한 조약은 공화국의 일개 군인에서 커다란 정치적 야심을 품은 정치가로서 보나파르트의 부상을 만천하에 과시했다."(114)


4장 라 그랑 나시옹la Grande Nation의 형성, 1797-1802


"1797년부터 1802년까지 5년간은 유럽사의 경로를 그리는 데 결정적이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와 재정상의 시급한 사안들은 새로운 점령지의 정치 사정들과 맞물려서 라 그랑 나시옹이란 관념을 향해 외교정책을 몰아가는 데 일조했다. 라 그랑 나시옹은 타민족을 '압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발상과 프랑스의 국익을 보호한다는 발상을 조화시키려는 관념이었지만, 물론 프랑스의 국익은 현지 애국자들의 열망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입장 변화였는데, 자유와 공화주의라는 초기의 혁명 원칙들을 암묵적으로 뒤엎고 그 대신 프랑스의 더 폭넓은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제국적인 힘의 정치machtpolitik의 요구들을 지지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1797년에 루이 드세 장군은 일기에 보나파르트가 〈이 모든 민족들에게 프랑스 국민이라는 원대한 관념을 부여하는 위대하고 기민한 정책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프랑스 최대의 적부터 시작해 지구적 규모로 그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139-41)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은 (영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동시에) 동지중해에서 프랑스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아시아에서 더 큰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을 터였다. 1798년 봄 총재 정부는 취약해 보이고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토양이 비옥한 이집트는 귀중한 상품 공급원이 될 수 있을 듯했다(생도맹그의 상실을 상쇄할 훌륭한 대체물이었다). 그러한 제안들은 고대 이집트의 영화榮華를 되살린다는 〈재문명화〉 임무라는 관념 안에 틀이 짜여 있었다. 이것은 '동방 전제정'에 관한 계몽주의 시대 논쟁들, 그리고 독재와 압제에 맞선 혁명 에토스의 연장이었다. 탈레랑은 총재 정부에 보내는 각서에서 〈이집트는 한때 로마 공화국의 속주였다. 이제 그곳은 프랑스 공화국의 속주가 되어야 한다. 로마 정복은 저 위대한 나라[이집트]에 퇴락의 시대였다. 프랑스 정복은 그 번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자애로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명했다."(147)


"바스티유 습격 이후 고작 9년 만에 북아프리카 바닷가에 프랑스 병사들이 상륙했다는 사실은 혁명이 얼마나 재빨리 프랑스 국경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계도 벗어났는지를 드러낸다. 이집트 원정은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 항구적인 유산─이집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을 남겼지만 본질적으로는 군사적·정치적 실패였다. 원정은 레반트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들을 정면으로 위배하며, 영국 식민 권력을 강타하는 대신 프랑스의 전통적 맹방(오스만 제국)이 숙적 러시아와 영국과 손을 잡게 몰아갔다. 정치적으로는 총재 정부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1798년 후반기에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도록 촉진했다. 그것은 공화주의 이상들을 식민주의와 영토 확장과 결합하려는 기획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제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이제 인도로의 해상 접근로만이 아니라 아대륙의 인접 영토들을 통한 접근 경로도 고려해야만 했다."(154-5)


"프랑스인들이 도입한 기본 원칙들이 너무 급진적이고 이질적이라 심한 저항에 부딪혔기에 점령 자체는 이집트 사회를 그다지 '근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진공 상태를 만들어냈고, 이 진공은 곧 카발랄리 메메트 알리 파샤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알리 파샤는 프랑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지 10년 안에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세력을 무찌르고, 이후 중동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근대화되고 강한 이집트 국가의 토대를 놓기 시작했다." "이집트 원정이 배태한 오리엔탈리즘은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집트 원정은 이슬람 사회를 유럽의 제국에 편입하려는 최초의 (그 마지막은 아니지만) 근대적 시도를 대변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으로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계기,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들이 수렴되고, 서구 지배의 온갖 수단들이 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하기 위해 이용되는 계기였다."(155-6)


5장 2차 대불동맹전쟁과 그레이트 게임의 기원들


"프랑스의 활동은 근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부활시켰지만 영국 정부는 다음 행보를 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윌리엄 그렌빌이 이끄는 외무부는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의 심각성을 경시했다. 그는 유럽에서 대불동맹을 떠받치는 데 더 열성적이었고, 동맹은 프랑스를 저지대 지방에서 축출하기를 원했다. 전쟁부 장관이자 동인도회사 인도 운영위원회 회장이던 헨리 던다스는 이러한 접근법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영국은 제국이며 제국의 전략적·상업적 이해관게를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반면, 유럽에서 프랑스를 억제하는 임무는 대륙 열강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운영위원회는 일단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면 필연적으로 아시아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무력으로 제국을 얻어냈고, 그 제국은 계속해서 무력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수단에 의해 더 우세한 열강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한 동인도회사의 임원은 말했다."(174-5)


"1780년대에 이르자 러시아는 남부 캅카스, 특히 카르틀리-카케티의 에레클레 국왕이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 맞서 러시아의 도움을 구하던 동부 조지아에 점차 관심을 보였다. 남부 캅카스는 여러 목적에서 유용한 교두보였고, 〈러시아 땅 끌어 모으기〉는 오랫동안 모스크바 정책의 특징이었다." "러시아의 정계, 상업계, 지성계는 그러한 개입이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여겼는데, 러시아가 서구 열강과 대등하다는 인식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식민지 수립 사업에서 빠져 있었던 러시아는 이제 그 주변부에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열강의 일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비춰볼 때 특히 중요했다. 1795년 이란의 티플리스 유린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개입에 전환점이었다 그 사건은 동부 조지아와 그 너머에서 러시아 군주정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추겼기에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구적인 개입에 기여했다."(185-90)


6장 평화의 의례들, 1801-1802


"1799년 10월, 이집트에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파리에 도착했을 때 명확한 계획이 없었지만 현 정부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일단의 정치가들이 그에게 접근해왔다. 스스로가 총재 정부의 일원인 에마뉘엘 시에예스가 주도하는 이 당파는 보나파르트 같은 어수룩한 군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전쟁 영웅인 그의 위상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트는 결코 어수룩하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겸손하고 학구적인 시민의 배역을 취하고서, 석학들을 만나고 프랑스 학사원에서 이집트 원정의 학문적 성과에 관해 연설을 하는 등 자신을 지식을 추구하고 지성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곳에서 변화가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고, 어느 한편에 가담하기 전에 모든 정파와 분파를 탐구하면서 정치적 저류─당시 총재 정부에 맞서 꾸며지고 있던 음모는 예닐곱 가지 이상이었던 것 같다─를 면밀히 주시했다."(200-1)


# 1799년 11월 9~10일(브뤼메르 18~19일) 쿠데타


"프랑스에서 통령 정부(1800~1804)는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혁명은 이제 끝났다. 급진적 자취들은 싹 치워졌고,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으며, 망명 귀족들은 귀환이 허락되었다. 화해와 질서 회복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새 정부에 대한 공적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고 보나파르트가 일련의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 개혁 정책들이야말로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건설적이고 항구적인 유산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민 다수가 새로운 국가수반에게 허락한 무비판적인 승인을 활용하는 다양한 전략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합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정치 지도자였고, 그런 관행은 20세기에 어디서나 만연하게 된다. 남성 보통선거권과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허울 속에서 보나파르트 정권은 통치받는 대중에게 아무런 실제 권력을 주지 않았고, 그 대신 정치 과정을 솜씨 좋게 형성하고 통제했다."(203-4)


"통령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궁극적으로는 나폴레옹 법전으로 알려지게 된 프랑스 민사법의 집대성이었다." "새로운 법전들의 혁신으로 꼽히는 첫 번째 원칙은 명료성이었다. 수백 가지 면제 조항과 변칙 사항을 둔 관습법에 젖어 있는 법률가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종교를 국가의 사안에서 분리시키는 세속주의였다. 이 원칙에 따라 혼인은 이제 세속적인 민사 계약으로 인식되고 이혼이 허용되며,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개인적·시민적 존재를 위한 길이 닦였다. 세 번째는 절대적이고 침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개인의 재산권 원칙이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법 앞의 평등 같은) 혁명의 주요 법적 승리들을 유지했지만 가정생활의 영역에서 가부장제로의 후퇴도 의미했다. 재산 소유 중간계급에게 크게 유리하도록 옹호된 사적 소유권의 불가침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노동계를 괴롭히게 된다."(206-7)


7장 전쟁으로 가는 길, 1802-1803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2년 동안 이어진 협상의 성과인 아미앵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지난 6년 동안 프랑스가 대륙에서 정복한 땅과 관련한 쟁점은 논의 자체를 거부했고, 영국이 이 점을 묵인한 것을 고려할 때, 아미앵 조약은 혁명전쟁의 결정적 성과 두 가지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지지했다. 바로 프랑스의 서유럽 지배와 영국의 해상 패권이었다."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가져왔다. 2차 대불동맹이 이제 누더기가 되었으니 영국은 부활한 프랑스를 쓰러뜨릴 전망이 별로 없음을 시인했고, 그러므로 분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 채 대륙의 현 상태를 대체로 수용했다. 아미앵 조약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완전한 전환을 가져왔고, 윌리엄 피트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수립된 국제 체제가 〈완전히 폐지되어 (···) (그것을) 유효한 것처럼 여겨봐야 부질없다〉고 시인해야 했다."(229-36)


"뤼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은 대륙의 상황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광범위한 양보는 8년간의 전쟁으로 얻어낸 전략적 이점들을 내주는 것처럼 보였기에 국내에서 우려와 허탈감을 자아냈다. 영국 정치인 오클랜드 경 윌리엄 이든이 지적한 것처럼 물론 그 조약들이 〈지나치고 무시무시하게 비대해진 프랑스 권력〉을 만들어내기는 했다. 영국 혼자서는 그 현실에 도전할 수 없었다. 필요한 것은 시간, 다시 말해 국내의 난제들을 처리할 시간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이 영국 제독 조지 키스 엘핀스톤이 표현한 대로 〈프랑스가 지금처럼 강한 상태로 있는 한 유럽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할 시간이었다. 〈유럽 대륙의 열강이 마침내 이 점을 확신하게 되면 프랑스를 합당한 경계 안으로 되돌아가게 하도록 모두 기꺼이 힘을 합치게 되지 않을까?〉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아미앵 강화는 단명하게 되고, 1802년 말에 이르자 벌써 뚜렷한 긴장의 신호가 보이기 시작했다."(239)


# 뤼네빌 조약 : 1801년 2월 9일에 체결된 프랑스-오스트리아 강화 회담


"한편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1804년 1월 1일, 아이티 독립 선언─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보나파르트는 생도맹그를 확고하게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위협과 영국과의 전쟁 재개 전망은 루이지애나 보유가 프랑스에 커다란 짐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한다면 영국이 서반구에서 전리품을 얻을 가능성을 초장에 제거하고, 미국과의 갈등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미국을 장래에 영국의 경쟁자로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보나파르트는 그러므로 뉴올리언스 매입에 관한 미국의 문의에 선뜻 반응했다."(252-4)


# 1803년 5월 2일, 루이지애나 영토 이전 합의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해체한) 남독일 국가들에 대한 프랑스의 헤게모니 수립은 군사적·외교적 승리 둘 다의 결과였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의 영토 변경을 좌절시키려고 무력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 보나파르트는 재빨리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에 후한 보상을 제안해 그들과 한편이 되었다. 1801년 프랑스와 러시아의 합의는 남독일에서 프랑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기보다는 그들과 공통의 대의명분을 찾고자 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이 동의하는 게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중유럽에서 오스트리아 권력이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자기편이 전혀 없는 오스트리아로서는 물러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협조를 얻고, 프랑스의 궤도 안으로 중급 규모의 독일 국가들을 끌어당김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중점을 둔 보나파르트의 외교는 그러므로 독일의 운명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268-9)


8장 파열, 1803


"아미앵 조약이 와해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몰타섬의 미래와 관련이 있었다.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은 몰타의 전략적 가치를 드러냈다. 그 섬은 동방으로 가는 관문이었고, 동방에서 프랑스의 정복은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영국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터였다." "진짜 장애물은 양측이 몰타의 가치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었다. 한 영국 장교가 표현한 대로 〈해협들[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의 입구와 시리아 해안으로부터 거의 동일 거리에 위치해, 전쟁 발발시 지중해와 레반트의 무역 전체가 몰타섬 소유자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몰타는 지중해의 무역을 쉽사리 좌지우지할 수 있을 테고, 파리와 런던 둘 다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런던으로서는, 프랑스의 의존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에 희망봉을 넘겨서 인도로 가는 도상의 핵심 지역에 대한 접근권을 이미 상실했다. 영국이 몰타에서 철수한다면 대안 경로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하게 될 터였다."(278-80)


"아미앵 조약의 파기는 근대사의 전환점 가운데 하나다. 전쟁과 참화의 12년 세월을 열었고, 유럽과 그 너머 세계의 운명들을 좌우했다." "보나파르트가 (다른 많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을 혐오했으며 그의 대륙 정책과 식민지 정책이 영국과의 전쟁 결정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1800년과 1815년 사이에 벌어진 모든 분란에 그 혼자만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기만적인 것 같다." "1800~1803년에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지구적 경제 체제에서 전통적인 라이벌에 맞서 프랑스의 지위에 대한 두려움에 뿌리박고 있는 지정학적 논리를 따랐다. 영국의 급속한 산업화, 국제 무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 폐쇄적인 식민지 체제, 우월한 해군력은 프랑스가 시장과 원자재로부터 차단되고, 더 넓은 국제 체제에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전망에 직면함을 의미했다. 프랑스 엘리트 계층은 그러한 우려를 공유했고, 보나파르트의 팽창 정책은 국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누렸다."(300-3)


#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가 1803년 3월에 시작된 12년간의 유혈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제1통령의 언행은 권력을 향한 강력한 추진력을 가리켰으니, 대륙의 평화를 유지했을 수도 있는 신중함과 유화적 특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실제로 전쟁을, 프로이센 군사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책의 연장일 뿐〉이라고 봤고,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은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이웃 국가를 최대한 자극하고 찔러보면서, 결국에는 전쟁의 열매를 맺은 원한의 씨앗을 뿌렸다. 개별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프랑스의 행위들은 도발적이었지만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그 행위들은 프랑스가 헤게모니 국가로서 유럽과 해외에서 제국적 구상을 공세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적 현실을 창출했다.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다."(306-7)


9장 코끼리 대 고래 : 프랑스 대 영국의 전쟁, 1803-1804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하기 위해 해군을 증강하는 동안 프랑스는 서유럽을 가능한 한 많이 지배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하노버점령은 영국-프랑스 전쟁 동안 유럽의 정세에서 핵심 지표였다. 선제후령은 10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1803년 한 해에만 프랑스는 1700만 프랑이 넘는 금액을 뜯어갔고, 하노버는 주변국들로부터 다시금 수백만 프랑을 융자해야 했다. 더 중요하게도, 하노버 위기는 유럽 열강에 만연한 태도─상호 불신, 협력의 결여, 지역적 이해관계에 대한 몰두─의 예시이며, 바로 그런 태도가 다음 10년 동안 프랑스가 유럽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비록 북독일은 유럽 열강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프랑스가 하노버를 침공해 북독일에서 패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조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1803년 봄 내내 애매모호한 정책을 추구했고 프로이센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스의 하노버 점령을 가능케 했다."(324)


"(보나파르트가 모든 것을 지휘·감독하는) 국가 원수와 총사령관의 권위의 결합은 뚜렷한 이점들을 지녔다. 나폴레옹은 적수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설정해 외교와 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던 반면, 그의 적수들은 동맹전쟁 수행에 따르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 회의나 군주에 의해 종종 손발이 묶였다. 전쟁 수행의 모든 측면을 확고하게 1인이 총괄할 때의 이점은 조타기를 잡은 그 사람이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역사상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로 더욱 커졌다. 정치적·군사적·병참적 그리고 무수한 여타 요인들의 세부 사항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경이로웠다. 하지만 의사 결정 권한의 극단적인 집중화는 이점과 더불어 대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통신이 속보로 가는 말보다 더 빠르지 않은 시대에 제아무리 유능할지라도 단 한 사람이 방대한 거리에 걸쳐 흔히 널찍이 분리된 전쟁 권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병력을 조율하는 것은 때로 불가능에 가까웠다."(337)


10장 황제의 정복, 1805-1807


"1804년 가을과 1805년 봄 내내 유럽 열강의 외교관들은 프랑스에 맞선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부지런히 오고 갔다. 그러나 주요 열강은 서로의 야심을 의심했고, 일부 국가들은 이미 프랑스에 두 번이나 패퇴한 동맹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힘겹게 결성된 3차 대불동맹은 하노버와 북독일에서 프랑스의 철수, 스위스와 네덜란드 독립의 재확립,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복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의 완전한 축출을 원했다. 이것만도 만만찮은 목표였지만 동맹 세력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조약 조항에 따르면 〈여러 국가들의 안보와 독립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향후의 찬탈을 막을 견고한 방벽을 제시하는 유럽 내 질서의 수립〉을 추구했다." "하지만 대불동맹은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프랑스 내 정권 교체를 실시할 생각은 없었다.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의 대관과 더불어 프랑스의 혁명 급진주의(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위협)는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356-9)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는 나폴레옹에게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패권을 안겼고 그 지역에서 그는 설득과 압박을 통해 남독일 핵심 국가들(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냈다. 다른 유럽 열강은 그가 거둔 승전들의 규모와 신속함에 깜짝 놀랐다. 이 전역으로 열강이 부활한 프랑스를 패배시킬 만큼 강력한 동맹을 결성하고 주도할 능력이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나마 허레이쇼 넬슨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의 3분의 2를 섬멸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위안거리였지만, 이 전투는 또한 해양 강국은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해상에서의 승전들은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지만 육상에 기반을 둔 강국을 상대할 때 내재한 제약들을 상쇄할 수 없었다." "다음 7년 동안 영국은 나폴레옹과 그의 제국을 몰락시키기 위한 시도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375-80)


"1800~1801년에 그랬던 것처럼 가장 심대한 변화는 독일에서 일어났다. 3차 대불동맹 소멸의 여파로 제국의회가 폐지되자(1806년 1월 20일) 나폴레옹은 독일 국가 재편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개시했다. 3월에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다스릴 새로운 독일 군소국을 처음 수립했다. 신설된 베르크 대공국은 매부인 뮈라에게 주었다. 더 중요하게도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을 프랑스가 지배하는 독일 정치체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맞선 완충국이자 프랑스 상품을 위한 시장, 제국을 위한 군대 인력의 원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1806년 7월, 독일 제후들이 파리 조약을 수용하고 카를 테오도어 폰 달베르크를 〈대제후〉로, 나폴레옹을 〈수호자〉로 인정하면서 라인연방이 정식으로 구성되었다. 최초의 16개 연방 가입 국가들 가운데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바덴, 베르크는 모두 8월 1일 신성로마제국에서 탈퇴해 사실상 제국에 종말을 고했다."(387)


11장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 유럽과 대륙 봉쇄 체제


"많은 이들이 나폴레옹의 최대 실수로 꼽는 대륙 봉쇄 체제는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훨씬 전에도 줄곧 시도되었던 전통적 정책들의 지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프랑스 배들이 트라팔가르만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야심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여전히 실현될 수 없었고, 프랑스 상선 자원은 꾸준히 감소했으며, 프랑스 산업가들은 영국과의 경쟁에서 확연히 뒤처졌으니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제도의 효과적인 고립만이 영국을 굴복시킬 유일한 수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 상품은 일체 통과할 수 없는 [무역] 장벽 뒤로 프랑스가 대륙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그에 따른 시장의 상실은 영국 경제에 처참한 타격을 입히고 어쩌면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소요를 야기해 나라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을 터였다. 반대로 유럽 대륙을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킴으로써, 이 체제는 제국에도 큰 혜택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412-4)


"대륙 봉쇄 체제는 고작 6년만 존속해, 영국을 굴복시키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실패 원인은 이 체제를 충분히 긴 기간 동안 철저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 있다. 실패를 야기한 요인들은 첫째, 에스파냐에서 나폴레옹의 패착과 더 중요하게도 러시아에서의 패착은 이 체제에 결정타를 가했다. 둘째, 영국의 국가적·경제적 안보는 봉쇄에 대처해 스스로를 조정한 영국 재정 시스템의 유연성 덕분에 진정으로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해군은 영국의 제해권을 위협하거나 유럽 대륙에서 영국 상품을 배제할 수 있는 봉쇄를 실효적으로 강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대륙 봉쇄 체제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영국이 프랑스의 해외 시장 접근을 막고 여타 지역에서 상품 판매를 늘림으로써 유럽 시장의 상실을 부분적으로 상쇄할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경제의 최악의 시기는 유럽과 미국 둘 다에 대해 수출이 막혔던 1810~1811년에 발생했다."(421-2)


"대륙 봉쇄 체제는 심대한 무역 교란, 산업에서 농업으로의 대규모 자본 이동, 사회적 불안과 인력 손실, 전쟁과 전쟁이 초래한 격변으로 인한 자본 파괴를 이미 경험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산업 공동화에 일조했다. 또한 대륙 상당 부분을 영국과의 활발한 교류로부터 고립시키고, 신기술과 공법의 유입을 저해해 일부 산업들은 영구적인 쇠락이 야기되었다." "대륙 봉쇄 체제가 설치한 보호 장벽은 대륙의 산업이 성숙할 만큼 오래가지 못했고, 그래서 1814~1815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관세 폐지와 시장 개방으로 대륙의 산업 부문들이 영국의 경쟁자들로부터 심한 타격을 받으면서 극심한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 "경제적 고통은 결국에는 나폴레옹의 전 유럽 지배의 꿈을 끝장낸 민족주의 부흥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대륙 전역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궁핍에 일조한다고 대륙 봉쇄 체제를 비난했다. 외국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분노는 깊고도 정당했다."(428-30)


12장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쟁탈전, 1807-1812


"1807년 여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정에 영국의 통상에 대해 포르투갈의 항구를 폐쇄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포르투갈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자신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자국의 해외 식민지(특히 브라질)와 상업적 번영이 위험에 빠지거나, 프랑스의 침공과 점령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1807년의 위기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군의 입성에 앞서) 포르투갈의 사적·공적인 자산, 정치 지도자 대다수, 사실상 나라의 해상력 전체가 빠져나갔다. 다음 15년 동안 브라질에 머물게 될 왕실의 망명은 포르투갈 구체제의 소멸과 심대한 정치적·문화적·경제적 결과를 낳은 대서양 건너편으로의 이전을 알렸다. 유럽 국가를 다스리는 왕가가 최초로 해외 식민지에 정착해, 본국의 삶에서 식민 영토가 하는 결정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상당한 재정적·물질적 원조를 받아 1808년부터 1821년까지 〈영국의 보호국〉이 되다시피 했다."(435, 445-6)


"프랑스 황제는 에스파냐에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정치적 혼란과 만연한 반反 고도이 정서를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16일,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맹방으로서 에스파냐 궁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좌시할 수 없으며 반목하는 정치 분파들을 중재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는 발표와 함께 부르봉 왕조에 개입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이 벌어지자 나폴레옹은 부자를 프랑스의 비욘시로 초대했고, 두 사람은 거기서 악명 높은 희비극의 일부가 되었다." "부자 모두를 강제로 퇴위시킨 바욘 퇴위는 추악한 강압과 기만을 결합한 것으로 한 저명한 역사학자의 결론을 정당화한다. 〈재능 면에서 나폴레옹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품성과 수법 측면에서는 대단한 마피아 두목이었다.〉 바욘 사건으로 황제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으니, 그 순간 나폴레옹은 곧 지극히 난감한 형국으로 탈바꿈할 상황에 확실하게 발을 담근 것이었다."(452-7)


#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 : 프랑스의 간섭 이후 흥분한 군중들이 왕가의 도피를 막기 위해 과격한 행동에 나서자, 페르난도 왕세자는 부모에게 그들의 신변안전과 대신 고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전면 퇴위 뿐이라고 설득하여, 자신이 새로운 왕위에 오른 사건


"에스파냐 점령은 나폴레옹의 가장 근본적인 판단 착오 가운데 하나이며,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될 실수였다. 그는 자신의 친척을 페르난도 왕세자와 결혼시킴으로써(왕세자 본인이 거듭 청한대로) 에스파냐와 혼인동맹을 수립하는 훨씬 더 안전한 경로를 추구할 수 있었다. 그 대신 황제는 황제는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를 축출하고 그 왕국을 직접 떠맡는 더 과격한 노선을 취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인들이 자국 왕실에 적대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외세의 지배를 열렬히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에스파냐에 속국(봉신 군주정)을 수립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에스파냐의 국가적 직조 표면 아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원심성 지방분권주의의 엄청난 힘을 풀어헤치는 혁명을 유발했다." "바일렌에서의 패배를 필두로, 그때까지 무적이었던 (프랑스) 제국 군대의 패배는 대륙 곳곳에서 들뜬 흥분을 불러와, 유럽 전역의 반프랑스 정서에 새로이 불을 지폈다."(458-64)


"한편 웰링턴이 리스본 반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구축한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은 반도전쟁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드러났다. 웰링턴에게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영국은 최소의 손실만 입으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대중은 꼼꼼하고 체계적인 웰링턴의 파비우스적Fabian 성격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이런 전략이 결정적 전투나 승리를 가져오지 않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링턴의 전략은 포르투갈의 시골 지방에 파괴적이긴 했어도 실용주의적이고 통찰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프랑스는 또 다른 포르투갈 침공 작전을 기획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영국은 이 성공을 발판 삼아 에스파냐로 반격에 나섰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이 혹독한 시험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리스본에서는 어떤 친프랑스 진영도 생겨나지 않았고, 포르투갈인들은 끝까지 결연하게 전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영국군을 지원했다."(490-1)


# 파비우스적 전략 :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한니발에 맞서 정면 전투를 회피하고 지연 전술을 써서 전략적 승리를 추구한 데서 나온 표현


13장 대제국, 1807-1812


"나폴레옹 제국은 어떤 목적들에 복무했는가? 이 제국 건설 뒤에 자리한 타당한 원동력으로서 '가족적 친밀성'을 내세우는 논의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일 것이다.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며, 주로 영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논의는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나폴레옹의 과대한 권력욕에 대한 주장이다. 한편 나폴레옹 예찬자들은 그를 행동하는 인간, 낡아빠지고 억압적인 제도들을 무너뜨리고 수 세기에 걸친 관습과 전통을 폐지했으며, 교육과 사법 체계를 개편하고, 개인의 권리들과 능력의 옹호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새 유럽을 위한 토대를 놓은 혁명가로 봤다(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본다). 이 질문에 대한 좀 더 분명한 뉘앙스가 담긴 답변은 나폴레옹은 한 가지 형태의 전제정을 또 다른 형태의 전제로 대체했다는 것, 개혁을 전파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를 약화시키고 점령지를 착취했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알렉산더 그랩의 표현을 빌리면 〈나폴레옹 지배의 야누스적 얼굴〉은 여전하다."(504)


"현재의 유럽연합 체제는 회원국들 간 평등에 바탕을 둔다. 유럽에 대한 나폴레옹의 비전은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강성함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모델을 수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가 우월한 행정 체제와 법적 체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럽 나머지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거기에는 이기적인 동기도 있었는데 프랑스 노선에 따라서 다른 나라들을 변모시키면 나폴레옹 자신의 지배와 자원 착취가 크게 용이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정권은 결코 하나의 '유럽적' 정체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에 제국의 생존 자체가 프랑스 무력의 지속적인 우위에 의존했지 제국 지배의 대중적 지지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초월적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것은 동등한 국가들로 구성된 연방의 이상이 아니라 보편 제국의 이상, 그 정신에서 유럽연합보다는 샤를마뉴 제국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510-1)


"나폴레옹 체제의 혜택들은 따라서 프랑스 치하 영토들에 대해 프랑스가 한 요구들과 나란히 놓고 고려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전쟁은 전쟁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었고, 실질적으로 그것은 프랑스 점령이 법 앞에서 평등과 종교의 자유 같은 높은 이상들만이 아니라 병력 모집과 물적 착취의 증대를 동반한다는 뜻이었다. 프랑스 벙력의 주둔은 그들의 군사적 필요 일체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지 인구에 무거운 부담을 지웠다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나폴레옹의 〈대제국〉은 본질적으로 소속 국가들이 각자 병력과 재정 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적 체제였고, 그것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정적 기여에 덧붙여 나폴레옹 정권은 그 군사적 위력을 유지하기 위해 징병을 요구했다." "나폴레옹 징병 메커니즘의 규모와 범위는 러시아 침공 준비 과정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당시 그는 전체 60만 병력의 절반을 위성국과 동맹국에 의존했다."(514-5)


"증세, 강제 분담금, 징병제, 탄압은 나폴레옹 정권이 유럽 곳곳에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지 못한 핵심 이유였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저지대 지방이든 간에 귀족층은 프랑스 개혁 조치들이 수반하는 결과들에 당연히 심기가 불편했고, 이런 변화들로부터 가장 혜택을 입는 부르주아들은 새로 얻은 권리와 지위에 대한 기쁨과 억압받고 검열당하고 과중한 세금과 대륙 봉쇄를 겪어야 하는 데 따른 괴로움을 조화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농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군대에 식량과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나폴레옹 주둔군의 부담을 주로 짊어졌다. 프랑스 황제는 혁명의 화신이라는 온갖 말들에도 불구하고 한때 자코뱅이었던 그는 1793~1794년의 원칙들을 체현하지 않았고 그의 개혁 정책들은 결코 사회경제적 평등의 달성을 겨냥하지 않았다. 그는 1789년의 원칙들을 온전히 대변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와 점령지에서 나폴레옹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거나 여론을 표현하는 모든 조직적 수단을 억압했다."(519)


14장 황제의 마지막 승리


"나폴레옹이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가를 몰아낸 것을 비춰볼 때 오스트리아 주전파─프랑스와의 공공연한 대립을 옹호하는 쪽─는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생존은 나폴레옹에 대한 단호한 도전으로만 보장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1808년 가을 주전파는 카를 대공의 반대를 극복하고 프랑스와 새로운 무력 분쟁을 벌여도 좋다는 프란츠 황제의 승인을 얻어냈으니, 이것이 5차 대불동맹전쟁이다." "1796년이나 1805년의 상황들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는 입지가 더 강력해진 것 같았다.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더 허약하고 군사적으로 지나치게 확대 배치되었다고 여겨졌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고위 관리가 자랑스럽게 천명한 대로 이전의 패배들은 비전과 지도력 결여의 결과었지만 그러한 과거의 잘못들에서 배운 바가 있었다. 〈다름 아닌 적의 무기들로 적과 싸우자. 그에게 자신의 총알들을 되돌려주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위신에 도전해 그것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야〉 했다."(543-6)


"1809년 4월 10일, 카를과 오스트리아 군의 주력이 바이에른을 침공하고, 요한 대공의 또 다른 오스트리아 군이 북부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시작된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565-6)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또 한 차례의 참패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과 굴종적인 동맹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 몇 년 동안 그 동맹에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가져온 최대의 충격파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승리로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는 기대치를 조정해야 했고 그에 따라 미래의 협력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전쟁은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나폴레옹 제국을 무너뜨리는 1813~1814년의 대동맹을 위한 길을 닦는 데 보탬이 되었다."(566)


15장 북방문제, 1807-1811


"덴마크는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보다는 영국의 해군력에 관해 더 걱정하면서 혁명전쟁 기간 내내 중립을 유지했다. 영국은 발트 지역과 교역을 유지하고 그곳에 영국 해군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영국의 해군력에 결정적인 요소였으므로 당연히 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덴마크가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면, 영국 해운이 발트 해역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인 좁은 외레순 해협이 폐쇄돼 영국의 무역과 접근권은 위협받게 될 터였다. 더욱이 덴마크 해군의 규모와 우수성을 감안하면, 덴마크, 프랑스-네덜란드, 에스파냐 해군력이 연합할 경우 대서양은 아니라고 해도 영국의 북해 지배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려는 덴마크의 노력을 간과하는 편을 택했다. 1807년 코펜하겐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 영국도 무거운 대가를 치렀다. 영국군이 떠난 지 고작 열흘 뒤에 덴마크는 나폴레옹과 동맹조약을 맺었고, 11월 4일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602-14)


"스웨덴과 영국의 동맹관계는 발트해에서 영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던 러시아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부동항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고 그 결과 수익성 높은 해외무역에 참여할 수 없었던 러시아에게 발트해는 특히 중요했다. 발트해는 서유럽으로 통하는 최단거리 통로를 제공했다. 발트해로 접근할 수 없다면 러시아는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유럽에서 강대국이 될 수 없었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존재는 그 제국적 정체성과 밀접하게 엮여 있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모든 외국(즉 영국) 전함에 대해 발트해를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 스웨덴 군주정이 응답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고, 1807년 12월 30일 러시아는 스웨덴이 계속 답변을 회피한다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808년 1월, 구스타브는 프랑스 병력이 발트해에 존재하고 나폴레옹이 독일 항구를 영국에 폐쇄하는 한, 이전의 합의 내용을 지킬 수 없다며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다. 러시아는 이 거절을 개전 사유로 여겼다."(622-5)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강화를 위한 세 가지 선결조건을 주장했다. 스웨덴은 핀란드 전체를 할양하고, 영국과의 동맹을 공식 파기하며, 프랑스·덴마크·노르웨이와 화평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대륙 봉쇄 체제에도 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 달 간의 협상 끝에 1809년 9월 17일에 서명된 강화조약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다. 이로써 스웨덴은 전체 영토 가운데 거의 절반을 상실한 반면, 러시아는 그 지역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발트해에서 입지를 다졌다. 아닌 게 아니라 핀란드 주민들은 600년 넘게 스웨덴의 패권 하에 살다가 이제는 새로운 제국의 주인을 맞게 되었다." "프레드릭스함 조약은 스웨덴이 외교정책도 재조정하도록 강요했는데,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러시아와 또 한 번 파멸적인 전쟁을 낳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쟁 대신에 스웨덴은 전략적 고려에서 아예 〈핀란드 문제〉를 제거하는 쪽을 택하고 동부에서의 영토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서 노르웨이에 초점을 맞췄다."(651-2)


"발트해 사안에서 영국의 개입은 영국의 의도를 불신하던 스웨덴의 냉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사실 저강도 영국-러시아 전쟁─한 러시아 역사학자가 인상적으로 표현한 대로 〈연기 없는 전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사실 프랑스-러시아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영국은 가능성 있는 동맹의 기초 작업에 나섰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뒤에 영국-러시아 동맹이 드디에 외레브로 조약(7월 18일)으로 현실화됐으니, 이 조약은 영국-러시아 전쟁을 정식으로 종결시키고 6차 대불동맹 수립의 토대를 놓았다."(638-42)


16장 사면초가의 제국 : 오스만 제국과 나폴레옹 전쟁


"동방문제의 기원은 오스만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계속되는 군사적 성공과, 그 결과 흑해 연안 지역을 따라 이뤄진 러시아의 영토 확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럽 정치가들에게 당대의 중요한 질문은 오스만이 러시아의 영토적·전략적 야망을 막아낼 수 있는가, 막아낼 수 없다면 상호 경쟁하는 열강이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였다. 프랑스 혁명전쟁 전야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오스만이 지배하는 발칸 지역 한 조각을 얻기를 기대하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전쟁에 가담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태도는 유럽에서 혁명적 격동이 시작되자 바뀌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라인란트와 이탈리아에서 패배한 뒤 빈의 태도는 당연히 중유럽과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오스만 국경지대는 뒤로 밀려났다. 인도에서 자국 세력이 증대함에 따라 영국 정부는 유럽 내 세력 균형유지와 더불어 인도 방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체로 오스만 제국을 떠받쳐주려고 애썼다."(672-3)


"그래서 19세기 초에 러시아 정부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할 때 비교적 운신의 자유를 누렸고 세 가지 상호 연결된 목표를 추구했다. 첫 번째는 일방적인 병합이나, 다른 유럽 열강과 함께 오스만 영토를 분할해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술탄의 기독교 신민들에 대한 가호와 민족주의적 정서의 유발을 통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을 얼마간 남겨두어 완충지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때로 〈허약한 이웃〉 정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지막 목표는, 1802년 한 러시아 대신의 표현으로는 〈현재의 영토 판도에서 러시아는 더는 확장이 필요하지 않고, 튀르크인들보다 더 고분고분한 이웃도 없으며, 우리의 이 자연스러운 적의 보존이 향후 우리 정책의 근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일단 러시아가 오스만한테서 충분한 영토를 빼앗으면 두 제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결코 대등하지는 않을 터였다."(673-4)


"프랑스와 오스만의 관계는 1798년, 프랑스 공화국이 오스만령 이집트를 장악해 영국 무역을 위협함으로써 영국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는 원대한 구상을 추구하면서 악화되었다.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은 치외법권 내 프랑스 상인들의 보호와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라틴(로마가톨릭) 기독교도 비호라는 레반트에 대한 프랑스의 전통적 정책들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침공은 영국의 식민 권력에 타격을 주는 대신, 전통적인 맹방인 오스만 제국이 적국 영국과 손잡게 만들었다. 오스만 정부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책의 중대한 전환으로서 1798년 9월에 러시아 해군 전대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가운데 양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고,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동부 지중해에서 영국-러시아 함대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러시아 및 영국과 조약을 체결해 대불동맹에 가담했으니, 오스만 제국이 유럽 동맹의 일원이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676)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806년 12월 29일 베오그라드, 1807년 2월 샤바츠 함락으로 이어진 일련의 군사적 승리들로 이전 베오그라드 피샬리크[파샤 관구]는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세르비아는 오스만튀르크의 저항을 무너뜨릴 중요한 압력 수단을 제시한 셈이었다." "러시아가 러시아인과 세르비아인을 잇는 공통의 정신적·종족적 유대를 언급하는 가운데 (세르비아의 지도자) 카라조르제는 자연스레 장래 세르비아 독립에 관한 러시아의 확약을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약속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사실 세르비아의 완전한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고 일정한 형태의 후원-의존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다." "비록 프랑스-러시아 간 틸지트 조약은 세르비아를 언급하지 않지만 두 나라는 오스만튀르크가 러시아-오스만 전쟁의 종식을 위한 프랑스의 중재 제의를 거절할 경우 발칸 지역을 〈해방〉시키기로 동의했다."(733-4)


"1809년 1월, 기회를 틈탄 영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자, 런던과 화평을 맺지 말라고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에 거듭 경고하는 가운데 석 달간의 협상을 거쳐 칼라이 술타니예(다르다넬스 해협) 강화는 영국-오스만 관계를 복원했다. 영국 정부는 오스만 영토 내 모든 병력을 소개하는 데 동의한 한편 술탄은 영국에 치외법권적인 특권들을 복원시켜주었다. 런던은 술탄의 영토를 보전하고 프랑스의 속셈을 저지할 오스만-러시아 강화를 이끌어내도록 러시아를 중재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조항 가운데 하나는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이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외국 전함에 대해 상시 폐쇄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지중해에서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 간 연합 가능성에 관한 영국의 우려를 반영한 조항이었다. 다음 3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오스만 전쟁을 틀어막고, 오스만튀크르·오스트리아와 삼자동맹을 발전시키며, 오스만 제국에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 둘 다를 억제하는 복잡한 전략을 추구했다."(730)


"1812년 5월 28일, 프랑스의 침공 위협이 높아짐에 따라 심한 압박감을 느낀 러시아가 전쟁 종식에 합의하면서, 술탄 마무드는 세르비아로 군사적 자원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오스만군은 1813년에 세르비아군을 궤멸했고, 그해 말에 이르면 베오그라드를 점령한다. 이로써 1차 세르비아 봉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카라조르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반면 카라조르제의 라이벌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일부 크네제스는 오스만 지배의 복귀를 수용했다." "하지만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그렇게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746-8)


17장 카자르 커넥션 : 이란과 유럽 열강, 1804-1814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캅카스에서 러시아-이란 분쟁을 배경으로 하는 핑켄슈타인 조약(1807년 5월 4일 체결)은 동방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떠받치고자 오스만 제국 및 이란과 삼자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대한 나폴레옹의 관심을 반영했다. 1월 17일자 샤에게 쓴 다소 아첨하는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자신의 승리를 알리고 공통의 적에 맞서 프랑스-오스만-이란 합동 전선의 전망을 내놓았다. 〈우리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영구적인 동맹을 결성합시다〉라고 그는 샤에게 촉구했다. 핑켄슈타인 조약은 이 같은 야심의 표명이었다. 그것은 파트 알리 샤를 이용해 공동의 적 러시아에 맞서 양동작전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고, 이란이 인도의 서쪽 이웃이라는 위치를 활용해 아대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약은 이란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동부 조지아와 여타 남부 캅카스의 정치체들을 카자르의 속령으로 인정하는 프랑스-이란 동맹을 수립했다."(764)


"카자르 군대의 최대 문제는 러시아군의 기술적 우위보다는 군사 조직과 유지, 그리고 전쟁 수행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에서 기인했다. 이란군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부족 병사들은 통제와 협조가 어려웠다. 그들은 자연스레 부족의 이해관계를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했고 서구식 전쟁 방식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므로 틸지트 조약 체결로 러시아와의 적대행위가 재개되었을 때, 새롭게 편성된 사르바즈 부대는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개혁 조치들이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은 개혁 조치들이 비非이슬람적이라고 맹비난했다. 이 시책들을 초기 이슬람 관행의 부활─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코란의 특정한 언급들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로 묘사하려던 카자르 군주정의 시도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사르바즈 병사들은 프랑스 장교들이 부과하는 엄격한 규율을 싫어했고 부족적 연대감을 없애려는 일체의 시도에 반발했다."(768-9)


"시간이 흐르면서 파트 알리 샤는 비록 본의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리란 점을 깨닫고 다시금 영국이란 대안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사절 존스는 틸지트 조약에 따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1809년 3월에 체결된 두 번째 영국-이란 조약은 카자르 왕조가 이전에 유럽 열강과 체결했던 조약들의 핵심 결함들을 바로잡았다. 영국은 이란 군대를 훈련·무장시키는 것은 물론 재정 지원도 약속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는 이란이 프랑스에 했던 모든 양보와 합의 사항을 폐지하고 유럽 열강이 인도에 도달하기 위해 이란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유럽'이란 자구의 삽입은 카자르 측의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란에게 그것은 러시아를 의미한 반면, 런던에게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프랑스를 의미했다. 영국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제국적 구상을 억지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776-7)


"1812년 6월에 개시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에서 영국을 애매한 입장에 빠뜨렸다." "러시아에 맞서 영국의 계속되는 지원을 기대한 파트 알리 샤는 영국인들로부터 이란은 적과 강화해야 한다는 말─그것도 아주 명확한 어조의─을 들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하고 프랑스에 맞서 새로운 유럽 동맹이 결성되는 마당에 영국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자 맹방인 러시아를 이 먼 구석에서까지〉 도울 결심이었고, 영제국의 이해관계에 더 이상 보탬이 되지 않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영국 대사 우즐리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해, 샤가 1813년 여름에 강화 회담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1813년 10월 24일, 마침내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확인하는 강화조약이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체결되었다. 그러나 남동부 캅카스 영토들에 대한 러시아의 지속적인 잠식은 무슬림에 대한 부당한 취급과 더불어 러시아-이란 관계를 심각하게 긴장시켰다."(787-8)


18장 영국의 해외 원정, 1805-1810


"영국은 남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서인도제도 등지에서 프랑스를 겨냥해 해외원정을 행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방대한 조선 프로그램으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새로운 전함들이 건조됨에 따라 다양한 항구들에서 출동 태세를 갖춘 전함들이 유지되었고, 영국 해군은 광대한 지역에 걸쳐 배치되어 적이 봉쇄를 뚫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인력과 선박을 상당히 소모시켰다. 함대는 몇 달씩 바다에 머물면서 식량을 소비하고 대서양이나 지중해의 강풍을 견뎌야 했다. 함대의 능률을 유지하는 일은 영국 해군부가 전쟁 동안 맞닥뜨린 최대의 과제로서, 대규모 선박 수리에 필요한 건선거 시설이 극히 드문 사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어려운 과업이었다.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나 에스파냐 조선소를 활용할 수 없었고, 몰타에 있는 것은 완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파도와 바람에 의한 지속적인 마모와 파손에 직면해 영국 전함들은 플리머스나 포츠머스, 채텀의 모항母港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816-7)


"이 모든 활동은 머잖아 미래에 나폴레옹이 영국 해군과 거의 대등한, 적어도 전열함 수에서는 거의 대등한 전력을 꿈꿀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력 균형은 화력을 고려한다면 프랑스 쪽으로 우세하게 기울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결정은 영국에게는 시기상으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영국 해군은 전력의 한계 수준까지 확대 전개되어, 발트해와 지중해만이 아니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서까지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반도전쟁에만 노력을 집중하고 해상에서 충분한 우세를 점했다면 유럽 패권 투쟁은 프랑스에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잘 보호되는 항만에서 해군을 건설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가 바다에서 영국 해군에 도전할 날을 준비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침공 준비는 프랑스 조선소에서의 작업들을 늦추고 나중에는 완전히 중단시켰는데, 조선공과 선원들이 프랑스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징발된 탓이었다."(822-3)


19장 영국의 동방 제국, 1800-1815


"영국 식민주의에 결정적인 요인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해상력이었다. 해상력이 없다면 아시아의 지배 영토는 그야말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상력 자체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인도는 중앙 권위를 파괴하다시피 한 세력 투쟁을 겪었다." "무굴 제국이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권위를 공고히 했다면 영국 동인도회사는 18세기 후반에 훨씬 더 만만찮은 적과 대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대륙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고, 중앙의 정치 리더십만이 아니라 단일한 정체성과 공통의 대의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인도 병사들은 국가에 헌신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에게 헌신했고, 그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경쟁관계, 시기심이 아대륙의 계속되는 내분을 지탱했다. 그 덕분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다양한 인도 세력의 연합 전선에 직면한 적이 없었고 강압적 조치와 위협, 외교를 통해 현지 통치자들의 단결 투쟁을 차단할 수 있었다."(833)


"1808년에 벌어진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남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그리고 그 이후로도) 영국은 중국을 향해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고 영국 경제와 전쟁 수행 노력을 지탱하는 무역으로부터 계속 이익을 얻는 편을 선호했다. 광둥 무역은 계속해서, 특히 동인도회사가 아편 공급에 뛰어들면서 성장했다." "1805년과 1813년 사이에 동인도회사는 무려 900퍼센트에 가까운 이윤을 거둬들였고 영국의 대중국 주요 수출품이던 면화를 아편이 대체했다. 이 밀수 무역은 막대한 통화 유출을 촉진하고 중국 정부가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재정 출혈에 기여했다. 1830년대 후반에 아편 무역을 둘러싸고 중국의 '강경' 자세에 직면하자 영국은 해군력과 포격 능력을 이용해 중국에 빠르고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860)


# 마카오 사건 : 1808년 9월, 드루리 제독 휘하의 해군 전대가 마카오를 무단 점령하면서 중국과 충돌한 사건. 중국의 강력한 대응에 굴복한 영국군은 12월 20~23일에 걸쳐 마카오에서 철수한다.


"1803년 이래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새로 영토를 획득할 때마다 동방 바다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영토 상실이 뒤따랐다. 1811년 자바 함락에 이어, 1812년이 되자 나폴레옹은 희망봉 동쪽에 더는 작전 근거지가 없었고, 프랑스 함대가 인도양에서 매우 철저하게 일소되어 프랑스 황제는 러시아와 진행 중인 갈등관계를 해소할 때까지 그 지역에서 해군 작전에 대한 생각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812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의 동인도제도 함대는 지금까지의 성과들을 단단히 다지고 가능한 위협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마땅히 거둔 성공에 만족했다. 인도, 중국, 아시아의 여타 지역들을 상대로 한 영국 무역은 번창했고 이베리아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가고 중유럽에서 동맹 수립을 위해 자금이 절실한 정부의 금고를 채워주었다." "1803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의 승리들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얻은 잡다한 속령들을 단단히 다져서 궁극적으로 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77)


20장 서방문제? : 아메리카 대륙 쟁탈전, 1808-1815


"1793년 에스파냐는 1차 대불동맹에 가담했지만, 불과 2년 뒤에는 바젤 조약에 의거해 일방적으로 프랑스와의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영국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영국이 에스파냐 해운을 공격하면서 에스파냐의 대서양 무역은 붕괴했고, 남아메리카 식민지들과의 연계가 약해지면서 외세의 침입을 부추겼다. 1796년 산로렌소 조약은 미국인들에게 미시시피강 항행권을 보장해, 오랫동안 에스파냐가 지배해 온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길을 닦았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지도부는 미국과 국경을 맞대는 에스파냐 영토를 유럽 열강이 일체 손 댈 수 없게 하고 싶었다." "미국인들은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가) 자신들이 아닌 (누구에게도) 넘겨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파냐가 그곳을 계속 소유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한 이웃이며 우리는 머잖아 틀림없이 이 (지역을) 미국에 병합하게 될 (···) 날을 조바심 내지 않고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888-9)


"19세기에 들어섰을 때 영국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프랑스와 미국 둘 다 에스파냐 영토를 탐내는 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1801~1803년 내내 영국 정치가들은 어떤 행동 노선을 취해야 할지를 놓고 머뭇거렸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영토를 이전하도록 에스파냐를 압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890)


"에스파냐-아메리카 세력 투쟁, 그리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촉발한 사건은 1808년 프랑스의 에스파냐 찬탈이었다." "포르투갈 군주정이 브라질로 탈출하고 에스파냐 부르봉 궁정이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은 에스파냐 식민지들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그들은 바욘에서 벌어진 희비극─에스파냐 왕실이 포로가 된 것─과 뒤이은 전국적 봉기에 관해 알게 되었고,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 곳곳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합법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부르봉 군주의 부재는 유례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일부 식민지 지도자들은 부르봉의 대의에 계속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군주의 부재라는 상황을 이용해 더 큰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랐다. 후자의 주장은 아메리카 대륙이 통치 군주하에 인적人的인 연합으로 에스파냐와 이어져 있으며, 페르난도 7세의 폐위로 식민지들과 본국을 하나로 묶는 그 끈이 끊어졌다는 전제에 근거했다."(894-6)


"한편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각종 시도를 이어갔다. 에스파냐 국왕에게 충성하는 당국자들로부터 계속되는 저항에 직면한 그는 정책을 조정해 이베리아 에스파냐와 아메리카 에스파냐 간의 공식적 단절을 재촉하고자 해다. 그는 1809년 12월 12일 입법원 연설에서 〈(나는) 아메리카 대륙 나라들의 독립에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음 몇 년 동안 식민지 훈타 정부와 에스파냐 훈타 정부(그리고 나중에는 섭정위원회) 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나폴레옹은 반란을 부추기고 선언서를 발표하도록 수십 명의 대리인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했다. 그는 남아메리카 군사 원정 계획을 고려하고 반란자들에게 재정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했지만, 결국 이 문제를 러시아 침공 준비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도들 중 어느 것도 뚜렷한 혜택을 가져오지 않았다. 영국 해군의 보호 속에서 해상을 통한 일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에스파냐 식민 정부는 내부의 난제들에만 집중했다."(900-1)


#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내부 분쟁

1.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현 멕시코) : 1813년 11월 6일 애국파가 독립을 선언했으나 1815년 근왕파에게 패배하면서 1차 멕시코 혁명 종결

2.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 1810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수립 선언 후 8년간 지속된 아르헨티나 독립전쟁 발발

3. 누에바그라나다(현 콜롬비아) : 근왕파가 우세를 점했으나 1816년, 시몬 볼리바르의 공화파 세력이 귀환하면서 10년간 지속된 독립전쟁 발발

4. 페루 부왕령 : 확고한 근왕파 지역으로 남았지만, 1812년 반도전쟁의 베테랑 산마르틴이 애국파에 합류하면서 칠레 재정복 투쟁의 기틀 마련


21장 전환점, 1812


"러시아와 프랑스 두 제국의 관계는 1808~1811년에 갈수록 긴장이 높아졌다. 알렉산드르가 틸지트 조약에 의거해 가담하기로 동의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체제는 러시아 경제에 대단히 불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러시아는 여전히 농업 근간의 제국이었으며 핵심 원자재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제조업 공장 수가 점차 늘어나기는 했어도 프랑스나 영국과 비교할 때 러시아의 산업적 기반은 한참 뒤쳐져 있었다. 러시아는 자원을 수출하기 위해 자국 상선보다는 외국 상선에 더 의존했고, 영국이 러시아의 주도적인 무역 상대국이었다." "러시아가 느끼는 답답함은 영국이 흉작으로 고생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는 풍작을 누린 1810년에 극에 달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지배하는 항구들에서 영국으로 곡물 수출을 허용했지만(그러면서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러시아는 대륙 어느 곳보다 최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단 한 톨도 팔 수 없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러시아 지주들은 이런 상황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926-7)


"폴란드는 양국 지도자 간 마찰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대공국 창설은, 알렉산드르 황제가 〈러시아라는 몸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한 대로, 폴란드 국토와 국가 정체성의 온전한 복원에 대한 러시아의 두려움을 일깨웠다.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복원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상의 보장을 받아내려는 러시아의 시도에 퇴짜를 놨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이 러시아에 맞선 전략적 장벽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러시아 이해관계는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놓고도 충돌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확보하려는 알렉산드르의 야심을 가로막으려고 나폴레옹은 작심한 것 같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발칸반도 분할에 관한 구상에서도 뜻이 일치하지 않았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라인연방 재편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핵심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첫 10년대가 끝날 무렵 틸지트에서 합의된 정치적 타협은 수명이 다했고, 새로운 유럽 전쟁이 곧 불붙을 것이라는 점이 명백했다."(929-30)


"정말이지 그렇게 어마어마한 군사와 방대한 거리, 병참상 난관들이 개입되고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결정적인 결과가 나온 전쟁의 실례도 드물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 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946-7)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은 '동장군'이었다고 오랫동안 얘기되어왔지만 그런 주장들은 근거가 의심스럽다. 기상관측소에서 나온 당대의 관측 자료들은 그해 겨울이 사실 11월 후반까지 온화했음을 드러내는데, 그때쯤이면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에서 졌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 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러시아 내 수송 기간시설의 미비는 가용한 물자를 병사들에게 때맞춰 전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전략적인 퇴각과 초토화 작전을 통한 러시아의 소모전 전략으로, 적군은 시골에서 식량, 특히 마초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이로 인해 짐을 나르는 동물과 군마가 엄청나게 희생되었다."(947-8)


22장 프랑스 제국의 몰락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세력 균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기회를 알리면서 유럽 전역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1812년 12월 러시아 협상가들과 프로이센 장군 요한 폰 요르크 사이에 체결된 타우로겐 협약은 나폴레옹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프랑스 군대 내 자신의 휘하에 있는 프로이센 분견대는 중립을 유지한다고 선언한 프로이센 장군의 결정은 프랑스 상관들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 대한 분명한 반역 행위였다. 여태까지 프로이센 국왕은 더 애국적 성향의 프로이센 장교들과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것을 줄곧 말려왔다. 비록 국왕은 협약을 공식 부인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공식적 규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행위들이 프로이센 전역에서 되풀이되어 광범위한 봉기를 촉발했고, 결국 프로이센 군주정도 편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967-8)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란츠 1세가 자기들 편에 가담하기를 바랐지만 독일에서 그들의 행보는 빈의 우려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궁정은 러시아에서 프랑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반겼고, 나폴레옹이 유럽에 부과한 제국적인 합의 내용들을 변경할 수 있으리란 전망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황제가 확실히 패배한다면 프랑스 헤게모니가 러시아의 지배로 대체될 게 뻔했고, 이는 오스트리아에게 전혀 반가운 전망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외무대신 메테르니히의 안보 목표들은 오스트리아가 1813년 봄 내내 와일드카드(예측 불가능한 수)로 남는 데 초점을 맞췄다." "빈에게 똑같이 걱정스러운 것은 독일 군주들에게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프랑스가 좌우하는 라인연방을 대체해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라고 촉구하는,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3월 후반에 발표한 선언이었다." "오스트리아에게 핵심 질문은 이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새로운 독일〉이 될 것인가였다."(970-1)


"영국의 전략은 세 가지 폭넓은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이 식민지와 해상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때쯤에 영국은 이미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식민지들을 모조리 점령했고, 아직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은 유일한 해외 영토는 영국 맹방들의 식민지였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륙의 전후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휘두를 수 있는 외교적 무기를 제공했다." "두 번째로, 영국은 이전 협정들에 의거해 떠맡은 책무들을 이행해야 했다. 여기에는 노르웨이에 대한 스웨덴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한다는 약속은 물론 포르투갈, 에스파냐, 나폴리에서 이전 정부들을 복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 이전 국경선으로 축소하고, 부상하는 러시아 세력을 억제함으로써 대륙에서 항구적인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런던은 오스트리아와 어느 정도 공통의 기반을 공유했다."(982-3)


"1813년 6월 26일,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과 긴 면담을 가졌다. 그것은 전쟁 전체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대신이 전달한 예비 제안들과 나중에 7월 12일과 8월 10일 사이에 프라하 강화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바르샤바 공국의 해체(바르샤바 공국은 동맹 열강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라인연방의 재편, 오스트리아에 일리리아 자치주 반환, 1810년 프랑스가 병합한 한자동맹 도시들의 복원, 1806년 이전 상태로 프로이센의 지위 복귀 등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열띤 대화를 이어가다가 제의를 거부했고, 그의 발언은 러시아 참사를 겪은 뒤에도 아무도 자신을 꺾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 결국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군주와 진정한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품고 드레스덴을 떠났다.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동맹 세력─6차 대불동맹 수립─에 가담해 나폴레옹에게 제시한 강화 조건들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약속했다."(985-6)


"나폴레옹이 (관대한 조건과는 거리가 먼) 협상을 내켜하지 않은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가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목표가 없었다거나 동맹국들이 최소 조건들을 바탕으로 나폴레옹과 강화를 맺는 데 합의했다는 주장은 상황을 잘못 짚은 것 같다. 상대방들처럼 프랑스 황제도 유럽 대륙의 평화에 관해 자신만의 특정한 비전을 추구하고 있었고, 여기서 승리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드레스덴에서 제시된 일단의 요구 사항은 오로지 예비 교섭을 시작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었고, 만약 나폴레옹이 요구들을 수용했다면 동맹국들은 최종 협상에서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더 제기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 점을 알았으며, 자신이 군사적으로 비교적 우위에 있는 한 그러한 조건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비타협성은 두 가지 구체적인 목적을 감추고 있었다. 동맹의 가장 강력한 구성원인 러시아와 직접 해결을 보겠다는 것과,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이탈한 오스트리아를 혼내주겠다는 것이었다."(987)


"1814년의 전역을 치르면서 러시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지원과 영국의 보조금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반대로 메테르니히는 영국-오스트리아 상호 이해가 확고한 한, 러시아의 야심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알았다." "영국 외무장관 캐슬레이는 동맹세력 대표들에게 군사적으로 동맹 세력의 입지가 여전히 강력하다고 지적하고, 상호 불신을 누그러뜨렸으며, 가장 결정적인 공헌으로서 대륙에 영국이 바라는 바와 같은 평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해외 식민지들을 원상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캐슬레이의 노력은 곧 반목하는 동맹 세력을 다시 규합하고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다는 공동의 목적의식을 되찾아주었다. 그들은 캐슬레이의 도움을 받아 체결한 쇼몽 조약에서 4국 동맹으로 알려진 것을 구성했다. 동맹 세력은 나폴레옹이 정전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의 〈유구한 국경선〉 제의를 수용할 때만 그의 제위 보유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1011-4)


"동맹군이 수도 파리의 목전에 이르자, 1814년 3월 31일 마르몽과 모르티에 원수는 항복 조건에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나폴레옹의 권력 부상에 그토록 결정적 역할을 한 탈레랑이 이제 그의 몰락에도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전직 외무대신은 사실상의 쿠데타를 도모해, 동맹 세력과 협상을 개시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프랑스 왕위에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키도록 동맹 새력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1814년 4월 2일 원로원으로 하여금 나폴레옹을 퇴위시키는 특별 선언문을 채택하게 한 것은 탈레랑과 그의 동료 변절자인 전직 치안대신 조제프 푸셰였다." "4월 11일 나폴레옹의 운명은 퐁텐블로 조약의 조건들로 공식적으로 정해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왕위를 공식 포기하고 그 대신 엘바섬의 군주로 인정되며 프랑스로부터 연 200만 프랑을 받기로 했다. 동맹 세력과 그렇게 지독하게,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던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가혹한 처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큰 몰락이었다."(1019-20)


"5월 30일에 서명된 파리 조약은 6차 대불동맹전쟁을 공식 종결시켰다." "그동안 프랑스에 경제적 착취를 당했고 향후에도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쉽다고 느끼는 프로이센과 독일 국가들은 프랑스의 핵심 국경지대를 박탈하고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리는 더 가혹한 조건들을 요구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영국은 과거의 숙적을 이류 국가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대륙에서 이제 간신히 도달한 위태로운 정치적 안정을 더욱 해칠 뿐이라고 판단해 좀 더 유화적이었다." "최종 조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패를 당한 프랑스에 대해 동맹 세력이 놀랄 만큼 관대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양보로서 그들은 최종 조약이 공식 비준되기도 전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군대의 향후 규모에 아무런 제한을 부과하지도 않았고, 프랑스가 내야 할 배상금을 산정하거나 프랑스 군대가 점령지와 정복지에서 뜯어낸 막대한 액수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1021-2)


23장 전쟁과 평화, 1814-1815


"나폴레옹의 귀환이 대단히 비범하긴 하지만 그가 엘바섬에 남았다면 나라에는 더 좋았을 것이다. 동맹 세력이 그를 무찌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러가며 10년 넘게 싸웠는데 이제 와서 그의 귀환을 순순히 묵인하리라는 희망을 나폴레옹이 진지하게 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동맹 구성원들은 내부 분열로 고생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입장 차이 중 일부는 깊이 뿌리박힌 것이라 해도, 무엇도 나폴레옹 제국과 상대해온 지난 과거를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한 지 닷새 뒤인 1815년 3월 25일에 이르자 8대 강국은 7차 대불동맹을 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군대를 제공하고, 나폴레옹이 확실하게 패배해 동맹조약의 표현대로 〈더는 말썽을 일으키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기로 서약했다." "나폴레옹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프랑스인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대불동맹을 쪼갤 신속하고 압도적인 승리였다."(1060-2)


"워털루는 전술적 수준(여기서 나폴레옹은 사실상 자신의 권한을 부관들, 특히 정면 공격을 감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전술을 들고 나오지 못하는 미셸네 원수에게 위임했다)과 작전적 수준(여기서의 실패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리니 전투 이후 그루시의 행위로 초래되었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약화되었다) 모두에서 프랑스군의 총체적인 패배였다. 이런 측면에서 워털루 전투는 유럽에서 프랑스 패권의 종식으로서 마땅히 기려질 만하다. 하지만 워털루는 새로운 한 세기를 연 전투가 아니었다. 유럽의 운명은 라이프치히의 굽이치는 언덕들에서 이미 결정되었고 빈의 무도회와 여러 경축 행사 와중에 굳어졌다. 역사 결정론처럼 들릴 위험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서 주장하자면 나폴레옹은 첫 포탄이 발사되기도 전에 전략적 수준에서 이미 전쟁에 졌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라도 동맹 세력이 그를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1069-70)


#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일~18일) : '민족들의 전투'라고도 불리며 병사 수와 화력 면에서 프랑스를 압도한 동맹군이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 군을 물리치고 사실상 6차 대불동맹전쟁의 승리를 확정지은 전투


24장 대전쟁의 여파


"빈 회의에서 도출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평화 정착은 네 가지 원칙을 토대로 했다. 첫째, 유럽 열강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 유지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장려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세력들 간의 국제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비록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수시로 충돌했지만 그들은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를 구축해 자신들의 주권을 잠재적 침략자(들)로부터 안전히 지키기에 충분한 상호 이해관계가 되었고, 유럽 협조 체제의 주요 목적은 평화와 안정이었다." "빈 회의 이후로 거의 한 세기 동안 유지된 이 평형 상태는 나폴레옹 이후 40년 간의 평화를 가져온 한편, 19세기 후반기의 무력분쟁들은 결코 더 커다란 전화戰禍로 탈바꿈하지 않았다.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들이 빠짐없이 개입한 장기 무력 분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18세기와 달리 탈나폴레옹 유럽의 무력 분쟁은 대체로 두 나라나 세 나라가 개입한 사건이었고, 2년 이상 지속된 적이 드물었다."(1077-9)


"두 번째는 정당성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합법적인 군주정들을 복귀시키고 그리하여 대륙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보전을 외견상으로는 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에서 많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이 주관하는 군주제 국가들의 구질서는 살아남았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주요 관념들─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방임 경제─은 1815년에 결코 패배한 게 아니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에 자유주의가 중간계급과 동일시되면서 많은 지식인들과 더 큰 사회집단들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만큼 더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군주제를 공화정으로 교체하길 열망한 새 세대의 급진주의자들은 더 큰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추구했고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수 정권들에 맞선 투쟁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때로는 힘을 합쳤지만 딱 어느 정도까지였다."(1079)


"(혁명적 행위들에 질겁한)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란 과거와 현재, 미래 세대 간 영구적인 동반자 관계, 다시 말해 러시아 보수주의적 작가 니콜라이 카람진의 표현을 빌리면,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해왔고 사멸하지 않으려면 과거로부터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살아 있는 사회적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만물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신의 피조물이며, 어느 한 세대도 사회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그보다는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것이 한 세대의 도리다." "그러므로 나폴레옹 이후 평화 정착의 세 번째 기둥은 '개입'이었다. 강대국들은 혁명 정신의 전염에 맞서 서로서로 그리고 유럽 일반을 보호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 나라가 동란으로 위협을 받을 때마다 열강은 기존의 조약에 의거하고 현행 영토상의 합의를 존중해, 그 나라에 개입해 합법적(이라고 쓰고 보수적이라고 읽는다) 질서를 옹호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협력했을 때 열강은 자유주의 혁명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당대의 보수적 질서를 유지했다."(1080-1)


"마지막으로 앞의 세 가지 원칙은 네 번째 원칙, 상호 보상의 원칙으로 조절되었다. 유럽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면서 승전국들은 만일 한 나라가 영토를 내놓거나 특정 이익을 놓고 타협한다면 일정한 형태나 형식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그러한 보상들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불러일으킨 민족자결의 정신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다." "유럽 대제국들의 문화와 정체성은 꽤 다양했다. 물론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은 군주에 대한 유대와 하나의 전체로서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체코인이나 폴란드인이나 헝가리인이나 불가리아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른 누구든 간에─은 점점 더 자신들의 문화적 고유성과 그 고유성을 보존하는 일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 민족적 개별성에 대한 의식은 민족자결로 가는 첫 단계였고, 민족자결은 제국들의 통합성을 위협하고 빈 회의에서 재편된 유럽 정치 질서를 위험에 빠뜨렸다."(1082-3)


"1815년의 합의는 1814년의 강화 조건보다 상당히 가혹했다. 프랑스는 국경지대의 영토와 요새들을 추가적으로 할양해야 했고, 국경선도 1792년이 아니라 1790년의 국경선으로 축소되었다. 프랑스가 1814년에는 보유했었던 사보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 라인란트의 일부를 내놓아야 했다는 소리다. 더욱이 확정 조약은 7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최대 5년까지 동맹국 군대의 점령 비용을 부담할 의무를 프랑스에 부과했다." "경제사가 유진 N. 화이트의 표현으로는 〈배상은 이제 새로운 유럽 질서를 위협한 잘못에 대한 벌금을 산정하고 장래의 (적대적인) 시도들을 억지하는 역할을 하며, 더 가혹한 강화 패키지의 일부가 되었다. 배상금 지불은 또한 인센티브이기도 했는데, 지불을 이행하면 프랑스는 유럽의 사안을 처리할 때 다시 강대국의 역할을 맡는 것이 허용될 예정이었다.〉 또 다른 혁신은 패전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군사 점령 체제의 운용이었다."(1084-6)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공산품과 설비 물자에 대한 수요가 곤두박질치면서, 오히려 전후 불황이 찾아왔고, 전 지구적인 기후 재앙(1815년 탐보라 화산 폭발)은 한 세기 이상 만에 최악의 흉작을 야기해 식량 가격의 급등을 초래했다. 무역 개방을 되살리려는 시도보다는 협소한 경제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고, 유럽의 농업과 산업은 유럽 국가들이 세운 새로운 관세 장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농업과 제조업 경기의 후퇴는 수만 명의 귀환병들에게 제공할 일자리가 별로 없음을 의미하는 한편, 빈곤층의 생활 조건은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여전히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개인적 자유와 성문成文 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시위를 부채질하고 민주적 대의제와 공평한 부의 분배를 옹호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출현에 기여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소요는 그러므로 근대 유럽의 탄생에 일조한, 변화의 힘들과 전통 사이에 벌어지는 더 큰 투쟁의 발로였다."(1107-8)


"나폴레옹 전쟁이 몰고 온 정치적 격동은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위협들에 대처할 때 유럽 정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한 가지 중요한 유산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전쟁이 낡은 행정적 결함과 부조리를 일소해버려서 유럽 정부들은 이제 관료제와 법 집행 과정, 과세를 더 단단히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억압적 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었다." "보수 지배 체제는 1820년, 민중 반란이 에스파냐와 나폴리 군주정을 위협했을 때 탄력을 얻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와 피에몬테에 개입하는 것을 지지한 한편, 프랑스는 반동적인 부르봉 왕가가 에스파냐에서 권력을 탈환하는 것을 도왔다. 1825년 러시아에서는 일단의 군 장교들이 알렉산드르 황제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제한적이나마 입헌 정체로의 변화를 꾀했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고작 하루를 간 뒤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1108-9)


"탈나폴레옹 시대의 혁명들 가운데 남아메리카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만이 결국 성공했다." "남아메리카의 1차 독립전쟁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파라과이를 제외하면 모든 독립운동은 사실상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왕가의 권위가 휘청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폴레옹 프랑스의 몰락은, 에스파냐 근왕파가 소망한 것과 달리 반란의 즉각적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마침내 1823년 멕시코는 공화국이 되었고 자결권을 끌어안아 중앙아메리카 연합주 구성을 위한 길을 닦았다."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애국파는 1821년 근왕파를 무찌르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합친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근왕파는 칠레에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산마르틴이 이끄는 아르헨티나 군대의 도움을 받은 칠레 크리오요들은 1817년에 근왕파를 무찌르고 독립을 선언했다." "페루 독립은 1820년 12월에 선언되었지만 공화파가 권력을 확실히 다지기까지는 6년이 더 걸렸다."(1110-15)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은 군주제, 귀족제, 노예제 같은 제도들의 정당성과 전통적 생활방식을 뒤흔들었다. 또한 해소되지 않은 여러 쟁점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후속 세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공화주의와 군주정주의, 산업화와 급진주의의 유산들을 두고 씨름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11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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