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요시미 슌야 지음, 서의동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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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헤이세이'라는 실패─'잃어버린 30년'이란 무엇인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는 17세기 초 유럽에서 최대최강을 목표로 군함 '바사vasa호'의 건조를 명했다. 1628년 8월 10일 마침내 완공된 바사호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항해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선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침몰했다." "바사호 참사는 일부 치명적인 미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계획이 지나치게 거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지나치게 큰 규모의 배에 과다한 중장비, 너무 높은 마스트 등 모두 최대이길 바라는 왕의 주문 자체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대국 국왕의 명령에 대해 어느 누구도 정면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기술자는 스스로의 지식을 구사해 부여된 직무 범위 내에서 왕의 의향을 좇아 일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직무에서 결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분의 최적화는 전체의 최적화와 다르다. 부분적으로는 아무리 똑바로 쌓아올려도, 전체가 똑바르게 되지는 않는다."(8-9)


# 헤이세이 30년 동안 발생한 4개의 쇼크

1. 버블경제의 붕괴(1989.1~1995.1)

2. 한신·아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1995.1~2001.9)

3. 9·11 테러와 국제정세의 불안정(2001.9~2011.3)

4.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2011.3~2019.4)


제1장 몰락하는 기업국가─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


"1980년대 말 일본은 자신감이 절정에 달했다. 경제는 호조였고, 그 기반도 약하지 않았다. 내수도 상승하고 있고, 실업률은 최저 수준, 학생의 취업 전선도 공급자에게 대단히 유리한 시장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므로 여유가 있을 때 산업의 체질 개선과 기술 혁신을 추진한다면 〈개인 소비도 솟아오르고 성장은 지속할 것〉으로 여겨졌다." "세련된 자신을 연출하는 것이 행복의 실체라고 모두들 믿을 수 있던 시대가 버불의 1980년대였다. 젊은이들은 아직 1990년 이후 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었고, 미래는 과거와 다름없이 밝고 풍요로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장 시대의 인간에게는 성장 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는다. 차를 운전하면서 앞이 잘 안 보일 경우 똑바른 길이 있을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과 같아, 커브를 꺾을 수 없는 상태로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버블시대에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43-5)


"(버블이 이미 제어불능 단계로 확대되어버린) 1980년대 말의 일본경제를 되돌아보면 한편으로는 (1985년 9월 G5에서 체결된 플라자합의가 촉발한) 엄청난 기세의 엔화강세로 국내 제조업은 대타격을 입었고, 이는 특히 중소 제조업에서 심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수 확대를 위해 금리가 대폭 완화됐고, 시중에는 대량의 자금이 풀렸지만, 이들은 엔화강세로 이윤이 감소한 제조업을 활성화시키기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로 돈을 벌려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갔던 것이다. 문제삼아야 할 것은, 당시 정말 필요했던 것이 금리인하나 재정투입이었던 것인가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목표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축소시키기 위해 일본의 내수확대와 수출주도형 산업의 구조전환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엔화강세를 진정한다는 이유로 추진된 금융완화는 내수를 확대시키고 제조업을 지지하기보다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과잉투자를 초래했다."(49-50)


"거대함선 일본호가 옆으로 쓰러지며, 마침내 침몰에 이르는 첫 충격이 나타난 것은 1995년부터였다. 이 해 7월, 코스모신용조합의 경영이 파탄했고, 8월에는 효고은행, 기즈신용조합도 파탄, '주센住專문제'가 결정적으로 심각해진다. 1990년 이후 땅값이 대폭락을 계속하는 가운데 땅값 상승을 전제로 확대노선을 밟아온 금융업계의 붕괴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붕괴는 1997년부터 1998년에 걸쳐 정점에 달한다. 1997년 11월 우선 산요증권이 파탄했고, 이어 20대 대형은행 중 하나인 훗카이도척식은행이 파탄했다. 이어 4대 증권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증권이 '자진폐업'한다. 붕괴는 일본경제의 중추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일본호는 이미 구멍이 뚫려 선내에 물이 차는 단계를 지나 배 전체가 바닷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이 잇따라 파탄을 맞았다."(54-5)


# 주센住專문제 : 주택금융전문회사가 버블붕괴 직후 떠안은 불량채권과 그 처리를 둘러싼 문제


"2000년대 이후 파탄의 중심은 금융계에서 과거 '재팬 이즈 넘버원'의 주역이던 제조업의 붕괴로 향해갔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실패를 두드러지게 드러낸 것은 전기電機산업이다. 1990년대 말 금융의 실패는 버블시대의 '재테크' 광풍에 휩쓸린 기업의 말로였지만, 2000년대 이후 전기산업의 실패는 보다 뿌리 깊었다. 일본기업의 체질 그 자체가 1990년대부터 진행된 글로벌화와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일본 대기업이 (종합전기 메이커라는) 수직적인 분업체계 유지에 집착하면서 글로벌한 수평분업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반도체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본업'〉으로는 간주하지 않았던 것과도 표리를 이룬다. 일본에서 '전기메이커가 사라지는 날'을 생생하게 묘사한 오니시 야스유키에 따르면 가전에서 중전重電까지 폭넓게 취급하는 일본기업에게 〈반도체는 여러 사업 중 하나에 불과하고 '실패해도 회사가 망할 일은 없다'는 안이함 속에서 경영이 이뤄졌다.〉"(64-9)


"헤이세이 시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으나 몰락으로 치달은 일본의 전기기업 중에서도 특히 실패 규모와 영향이 컸던 것은 (근대 일본의 전기화를 중추적으로 담당해 온) 도시바의 실추였다." "거함의 침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조직내부에 억압의 사슬이 엄존했으며 정보도 횡적으로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시바에서는 '챌린지'라는, 통상의 방법으로는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경영진이 각 부문에 강요했다. 그것이 상명하달식으로 전달되면서 이익을 부풀려 수익이 좋아진 것처럼 꾸미는 부정회계가 만연했다." "한편으로 도시바 몰락의 직접 요인은 그들이 2006년 거액을 쏟아부어 웨스팅하우스의 원자력 부문을 매수한 데 있다." "이미 당시, 1979년의 스리마일섬과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를 겪으면서 원자력은 결코 안전하지 않고 리스크가 큰 시설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시바가 원전건설에 집착한 이유는 원전수출이 국책사업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78-80)


제2장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개혁'이라는 포퓰리즘


"헤이세이 직전인 1988년 발각된 리쿠르트 사건은 헤이세이 정치의 액상화를 가속화하는 쇼크로 작용했다. 리쿠르트 사건이 원인이었다고 하긴 어렵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헤이세이 정치질서는 일거에 유동화로 나아갔다." "리쿠르트 사건의 특징은 제공된 것이 미공개 주식이라는 점인데, 종래 법적 규제의 바깥에 있던 금융상품이었을 뿐 아니라 양도대상도 극히 넓어 자민당 실력자 대부분이 포함됐고, 그 범위는 야당에까지 미쳤다. 뇌물 수수 목적도 상당히 애매했다. 일반적으로는 정계나 재계에서 리쿠르트사의 '지위'를 높일 목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지위'라는 것이 대단히 애매한 탓에 뇌물을 제공한 측은 실제로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미공개주식을 대량으로 건넨 것이었다. 뇌물을 건넨 목적도, 받은 쪽의 범위도, 수수 방법도 그 전까지의 상식을 크게 벗어난 사건이었다."(94-5)


"(스캔들의 여파로) 자민당 내 다케시타파가 분열하면서, 1993년 8월에는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등 8개 회파會派 연립의 지원으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정권이 탄생했다. 물론 정권의 탄생을 배후에서 연출하고, 전후 55년 체제의 숨통을 끊은 것은 오자와 이치로였다. 호소카와 정권은 오자와의 지원 내지는 조종을 받으며 소선거구 비례대표병립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과 정치자금규정법 개정 등을 실현했다. 호소카와가 스캔들로 사임한 후 연립의 중추에 있던 오자와는 하타를 총리로 세우지만, 하타 정권은 2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이 흐름을 타고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인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총리를 맡도록 하는 신공을 발휘해 정권복귀에 성공했고, 자민당 야당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무라야마 내각 이후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와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권이 이어지지만, 모두 단명으로 끝났다."(99-100)


"리쿠르트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 파벌의 정치역학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걸쳐 액상화되어갔다. 특히 이 액상화, 아니 멜트다운이 발생한 중심무대는 과거 다나카 카쿠에이에 의해 구축됐고,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으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계를 지배해온 거대한 정치 권익집단인 다나카파였다. 그리고 마치 핵폭발처럼 주위를 빨아들이며 이 멜트다운을 확대시킨 것은 오자와 이치로라는, 다나카 못지않은 개성 강한 정치가였다. 오자와는 199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민주당 정권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헤이세이 일본 정치는 오자와를 중심으로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의 파벌 역학이나 정당의 자기보존 능력으로 보자면 일어날 리 없는 중선거구제 파괴가 1990년대 일본에서 극적인 스피드로 추진된 것은 오자와 이치로라는, 다나카 가쿠에이로 시작하면 3대째에 해당하는, 극히 특이한 보수정치인의 움직임을 빼면 이해할 수 없다."(104)


"고이즈미와 자민당과의 관계는 1990년대에 걸쳐 치열한 대결을 거듭해온 오자와와 자민당 간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오자와의 경우, 자민당을 뛰쳐나와 신당을 만들고, 권모술수를 동원해 자민당을 궁지에 몰았지만, 그 정치 수법은 구 다나카=다케시다파와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가 자민당의 지배체제와 싸우기 위해 도입한 것은 오자와적인 수업 대신 직접 언론 앞에 나서 자신의 말과 퍼포먼스로 적이 누구인지를 시사하고,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세를 전환시키는 방법이었다." "고이즈미 내각은 헤이세이 기간의 모든 내각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내각이다. 역으로 말하면, 헤이세이의 일본에서 고이즈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성공한 정권은 없다." "문제는, 민주당 정권의 '대실패'와의 비교를 덧붙이면, 헤이세이 시대 정치의 성공은 고이즈미 같은 포퓰리즘적 방식으로만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129-32)


"2009년 8월 30일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115석에서 308석으로 의석수를 3배 가까이 늘리며 압승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가 되고 정권교체가 실현됐다."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를 비롯해 민주당이 매니페스토를 통해 표방한 정책에는 자민당이 오랜 기간 누려온 기득권의 굴레를 깨뜨리겠다는 임팩트가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먼저 거버넌스 설계에서 몇 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정'과 '당'을 일원화하겠다는 원칙을 관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제도적인 조정 시스템을 파괴해버린 탓에 '정치주도'의 이름 아래 '관'을 권력중추에서 배제하게 됐고, 이로써 내각이 과다한 조정 리스크를 지게 됐다. 게다가 정부 내에서도 핵심인 국가전략국 구상은 그간의 내각관방 체제와 모순됐다." "결국 2012년 12월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118석에서 294석으로 3배 가까이 의석을 늘리며 압승했다."(145-6)


"수차례 정치주도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베 정권은 민주당이 내건 래디컬한 정치주도를 부정하고, 이를 교활한 관저주도로 대체했다." "게다가 민주당 정권의 실패가 너무도 참담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식의 '정치주도'라면 딱 질색이었다." "헤이세이 시대 일본이 추구해온 정치주도란, 공적인 의사결정의 주체를 행정기관의 관할주의 메커니즘에서 끄집어내 총리관저가 됐건 시민과 정치인들의 이니셔티브가 됐건 누군가의 강력한 리더십 하에 두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행정에서 빼앗은 결정권은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확실히 기록되고 공개됨으로써 그 공정성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독재의 싹이된다. 제2차 아베정권은 민주당 정권의 실패를 뒤집고 관저주도의 기본형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최대 위험은 관저와 성청의 관계가 액상화하는 가운데 공적기록에 기반한 정치의 공정성이 뿌리부터 손상되면서 전체가 허구화한 것이다."(147-53)


제3장 쇼크 속에서 변모하는 일본─사회의 연속과 불연속


"일본 사회에는 다양한 참사를 사회 '실패'의 결과라기보다 외부에서 초래된 '쇼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단순한 '쇼크'로 간주하는 이는 적지만, 옴진리교 사건이나 미야자키 쓰토무의 유아연속유괴살인사건, 고베의 '사카키바라세이토'의 연속아동살상사건, 아키하바라 묻지마 살인사건, 사가미하라 시의 장애인 시설 '쓰쿠이야마유리원'에서 일어난 대량살인사건 등은 모두 범행동기가 불가해한 것으로, 광기에 의해 돌연 저질러진 '쇼크' 이상의 것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버블붕괴도, 중간층의 붕괴를 초래한 격차확대도 '1.57 쇼크'로 알려진 초저출산도 '지방소멸'로 일컬어지는 인구감소도, 모두 헤이세이 일본이 불가항력적으로 입은 사회적인 '쇼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쇼크'로 간주하고 요령부득의 일로 받아들이는 수용 패턴은 사회가 정책이나 정치적 타협이 야기한 실패들을 '실패'로 인식하며 그 구조적 문맥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161-2)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헤이세이뿐 아니라 전후를 통틀어 일본이 경험한 최대 사건이었으며, 1995년에도 일본을 근저에서 뒤흔든 한신·아와지대지진이 발생했었다." "두 대지진 모두 고도성장기 일본식 개발주의의 위험성을 근저에서 지적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지진은 원전이나 고속도로, 인공섬 같은 기술의 한계를 드러내 보였을 뿐 아니라 전후 흔들림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의 기반이 의외로 무르고, 불안정함을 일깨웠다. 1995년의 지진은 직하형이었기 때문에 붕괴 충격은 고층빌딩이나 고속도로 등 도시 인프라에서 두드러졌다. 2011년의 재해는 바다의 쓰나미에 의한 것으로 광대한 지역에 미쳤으며, 에너지 공급체계가 근본부터 의문시됐다. 두 차례 지진으로 현대 일본의 대도시와 그 광대한 배후지 양쪽 모두 도마에 오른 것이다. 또한 고도성장기에 발전해 1970년대에 확립된 도시개발과 에너지 공급체계 전체에 심각한 물음표가 붙게 됐다."(165-8)


"일본 전체가 고베시가지를 괴멸시킨 대지진의 충격 한가운데에 있던 1995년 3월 20일, 이번에는 도쿄 도심에서 사람들을 한층 격하게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옴진리교 신도에 의한 지하철 사린사건이다." "1995년 3월 이후 지하철 사린사건의 쇼크로 옴진리 교단 특유의 타자공포감을 이번엔 거꾸로 일본 사회가 갖게 됐다. 사건 후 TV에서는 엄청난 물량의 특별 보도프로그램이 편성됐고 높은 시청률을 획득했다. 이 시기 TV는 거의 전면적으로 '옴' 관련 소재로 뒤덮였다." "신문의 경우 스포츠지나 석간신문뿐 아니라 종합지에서도 속속 센세이셔널한 제목으로 보도가 이뤄졌고, 오보도 되풀이됐다. 이는 사람들이 극히 기괴한 사건에 대한 강박적인 호기심과 불안에 휘둘리는 과정이었다. 즉, 옴진리 사건의 '쇼크'란 교단 신도들에 의한 범행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런 쇼크로 촉발돼 일본사회 전체가 빠져든 타자에 대한 공포심의 고양, 강박적인 타자 배제 등 모든 활동을 포함했다."(168-72)


"신도들에게 행해진 '모략'이나 '마인드 컨트롤'의 결과물이라는 옴사건의 해석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회 쪽의 일상과는 철저히 이질적인 것으로 옴신자들을 타자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략'론은 옴 교단의 이해불능한 행위를, 현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반사회적 집단의 악랄한 의도에 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마인드 컨트롤'론은 옴 신자들의 행위를 교조의 '광기'로 조작된 집단적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이 광기와 우리들 자신의 정기正氣=일상은 철저히 불연속적이라고 여긴다. 어떤 것이든 '옴'이란 불쌍하긴 하되 '우리들'과는 다른 세계 사람들이고, 그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교조의 '광기' 혹은 '어둠'의 조직이라는 뜻이다. 1995년에 휘몰아친 옴 보도는 사건에 이러한 해석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공포심을 자극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리얼리티가 뿌리부터 추궁당할 가능성을 박탈하면서 사건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만으로 소비되는 것을 가능케 했다."(173-4)


"헤이세이 시대를 뒤흔든 쇼크에는 〈권투의〉 보디블로처럼 보다 지속적으로 사회를 변모시켜온 것도 있다. 보디블로처럼 일본을 덮친 쇼크에는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의 조류가 관통하고 있다." "헤이세이 직전은, 가장 격차를 보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 1억 총중류總中流의 상황이 헤이세이가 시작될 무렵, 버블경제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변화의 방아쇠는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었다. 버블경제 결과, 자산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격차가 확대됐다.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앞으로 평생 집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격차사회'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으로 자신은 하층에 속한다고 답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1980년대 말은 계층면에서 일본인들의 의식에 균열이 확실히 생겨나던 순간이었다." "일본이 다행증多幸症적인 소비사회에서 불안투성이의 격차사회로 바뀌었던 것이다."(182-5)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양극화로 나아간 것은 인구구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초소자화超少子化가 멈추지 않게 된 것이다." "여성 한 사람이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낳는 아이 수인 합계특수출생률이 연속해서 1.50을 밑돌고 있는 것은 그 국민의 인구가 자력으로 회복가능한 선을 넘었다는 것, 즉 사회의 기반이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인구동향에는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출생률 저하는 장기적인 추세로 유지된다. 실제로 합계특수출생률이 2.00을 밑돌기 시작한 뒤 반세기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이 추세는 이미 장기화되고 있다. 그리고 반세기 이상 전부터 출생률이 저하한 영향이 지금, 인구감소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출생률 변화가 인구구조를 확실하게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데까지는 반세기의 시차가 있다. 지금 당장 소자화의 근원적인 대책이 마련돼 출생률이 회복되더라도 인구가 회복기조로 바뀌는 것은 적어도 반세기 이상 지난 뒤의 일이라는 것이다."(199-201)


제4장 허구화하는 아이덴티티─'아메리카닛폰'의 행방


"헤이세이 경제가 버블 붕괴로 시작했고, 헤이세이 정치가 55년 체제를 무너뜨렸으며, 헤이세이 사회가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취직빙하기와 조우함으로써 초소자화가 멈추지 않을 것을 예고하듯, 헤이세이 문화는 '종말'의 예감을 이어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종말'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성장에 대한 '꿈'이 성장의 끝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는 순간에 부상한다. 1970년대 초는 바로 이런 불안감이 분출하던 시대였다. 이런 불안감은 1980년대의 다행증적인 시대를 넘어 재부상했고, 현실 속의 다양한 붕괴가 사회 전반에서 분출하던 것이 헤이세이 시대였다. 전후 일본의 '종말' 이미지의 원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1954년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의 참치어선이 피폭된 것을 계기로 제작된 영화 《고질라》다. 태평양 저편에서 등장한 고질라는 도쿄 도심부를 유린하며 수도를 철저히 파괴한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도쿄대공습의 재연이고 전후 일본인에게는 원풍경原風景적인 '종말'이었다."(216-8)


"1980년대의 '종말' 예감은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핵=방사능'으로 인한 문명 파멸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전쟁보다는 테러, 그것도 내면적인 파괴의 이미지로 결정화된 『AKIRA』가 있다." "두 작품은 헤이세이에 선행한 시대가 낳은 '종말' 서사의 쌍벽이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개가 나타내듯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후의 계보는 '종말'에서 '판타지'로 향했다. 반면 헤이세이의 '종말' 서사의 주류를 이룬 것은 『AKIRA』의 계보다. 이 계보는 안노 히데아키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을 거쳐 안노가 제작한 영화 《신 고질라》로 이어진다. 여기에 '종말' 서사를 집어넣은 오시이 마모루의 영화 《공각기동대》와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추가하면 '종말'은 헤이세이 일본 애니메이션계 서브컬처를 관통하는 기축 테마였음을 알 수 있다. 전후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종말'의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221-6)


"TV나 레코드에 의해 확산되고 소비된 주류 대중문화를 관통한 것은 '종말'의 예감만은 아니었다. 대중문화에 있던 것은 오히려 '미국'에 대한 희망이다." "1960년대 말 청년들의 '반란' 시대를 지나 1970년대는 '패배' 후의 침잠과 내향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아메리카닛폰'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균열에서 '포스트 전후사회'적인 감성이 부상했다." "해외에서 역수입돼 대히트한 YMO(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반전은 안과 밖, 자아와 타자, 일본과 미국, 내셔널과 글로벌 간 경계선의 위치바뀜을 나타낸다. 1970년대 초에는 아직 남아 있던 '내=일본'과 '외=미국'의 경계선은 1980년대가 되면, 서서히 부상하던 미디어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쉽게 조작가능한 것이 됐다. YMO는 〈'외'를 향해서는 '일본'과 '아시아'를 상징적으로 짊어지며, 서구인의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유도하는 것으로 주목을 끌었다. 반대로 '내'에서는 '외'에서의 평가를 지렛대로 이른바 박래품 대접을 받으며 인기를 획득했다.〉"(232-5)


"마릴린 아이비 콜럼비아대 교수는 1970년대 일본을 대표한 'Discover Japan'에서 '이그조틱 재팬'으로의 이행을, 동시대의 아이덴티티 정치와 연결지었다." "1980년대에 등장한 '이그조틱 재팬'에서 재발견되어야 할 자신은 이미 허구일 뿐이다. 아이비는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영어로 쓰여진 'Discover Japan'과는 달리, '이그조틱 재팬'이 가타카나로 쓰여진 것에 주목한다. 가타카나는 통상, 일본인이 자국에 수입된 외국 제품이나 개념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서체이다. 이것이 '일본'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은, 일본이 이미 일본인 자신에게도 '외국'으로 느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통상, '자/타'를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자면 '이그조틱'한 것은 '자아'가 아니라 '타자'다. 따라서 광고가 주장하듯 '재팬'이 '이그조틱'하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일본'이 타자화됐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설정된 것은 마치 서구 관광객처럼 자국의 풍경에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일본인 자신이다."(236-7)


"코스프레에서 스트리트 패션까지 1970년대에 나타나 1990년대 이후에 전국화, 일상화한 현상은 '미디어 속의 타자'와 '도시 속이 자신'이 반향하며 융합하는 현상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스타와 아이돌, 판타지 주인공은, 동경의 대상이긴 하되 자신이 아닌 타자이다. 그런 타자의 복장과 스타일, 몸짓의 일부를 자기표현에 인용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모방이었고, '오리지널'에 대한 '카피'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1990년대에 반전된다. 이미 인터넷 이전부터 젊은이들은 서브컬쳐, 패션, 음악 영역에서 누구나 오리지널 즉 발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넷 사회의 확대는, 이 경향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코스프레에서 청년들은 단순히 만화,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코스프레를 공연하는 청년들 스스로 자신을 '작품'화하고, 그 제작자, 즉 가공 이미지의 공급자가 된 것이다. 이제 와서는 '카피'가 '오리지널'이 된 것이다."(257-8)


"헤이세이 시대를 문화 차원에서 훑어보면 ①'종말'의 실현 ②허구로서의 '일본' ③새로운 집합성이라는 3가지 조류가 이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첫째로 1970년대부터 부상한 '종말'의 예감은 헤이세이 시대 들어 두 차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의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된다. 버블 붕괴와 급격한 경제적 쇠퇴, 격차사회화와 인구감소 등에 의해 장기적으로도 '종말'은 이 나라에서 실현되고 있다. 두 번째로, 역시 1970년대에 시작된 일본의 소비사회화는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일본'의 자아인식을 근저에서 변화시켰다. 1980년대에 등장한 것은 현실성이 존립할 지평의 상실이고 헤이세이의 리얼리티 전체가 이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세 번째로 1990년대말 이후 인터넷의 일상 침투는, 우리들의 집합성을 근본부터 바꿨다. 인터넷은 다른 입장을 연결하는 대화의 매개에서, 얼마 안 가 배제의 매개로 반전해가지만, 동시에 각 유저들을 '수용자'에서 '발신자'로 변모시켰다."(267-8)


마침글 세계사 속의 '헤이세이 시대'─잃어버린 반세기의 서곡


"헤이세이는 종언의 시대이고, 시작의 시대였다. 종언이라는 것은 인구증가의 종언, 경제성장의 종언, 총중류화의 종언이다. 뒤집어 말하면, 인구가 축소하고 경제가 장기적으로 정체하고 사회가 분열해가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정치는 전후 일본의 시스템을 '개혁'하려 거듭 노력했지만, 이 사회의 기반적 변화에 몇 번이고 걸려 넘어졌다. 또한 헤이세이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시대의 종언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 메이지유신을 달성한 일본은, 서양의 기술, 제도, 지식을 전력으로 도입해 불과 30년에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의 중심성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 이후에도 미국과 일체화하는 것으로 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냉전 후의 헤이세이 시대, 동아시아의 중심은 일본에서 중국으로 옮겨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원상복구로,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시기가 특수한 시대였던 것이다."(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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