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다 - 공자와 그의 말을 공부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3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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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어』의 연원


"공자의 가장 큰 공헌은 서주西周의 귀족 교육 체계인 '왕관학'王官學의 내용을, 출신 성분으로 봤을 때 그런 자격이 부족한 이들에게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귀족 교육의 핵심인 글쓰기가 공자를 통해 확대되고 전파되어 그 결과, 중국 최초의 민간 저술이 탄생했습니다. 『논어』 이전의 다른 문자 기록은 모두 왕조의 봉건 귀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시경』, 『서경』, 『춘추』는 다 귀족 교육의 중요한 교재였기에 문자로 기록된 겁니다. 『시경』은 관리가 민요를 수집해 민간의 사정을 살피던 채풍采風 및 귀족 연회의 여흥과 관계가 있으며, 『서경』은 조정의 문서를 모아 놓은 겁니다. 『춘추』는 사관이 자신의 직분에 따라 작성한 방대한 사건 기록이지요. 그렇게 기원전 5세기까지 이루어졌던 글쓰기에 대한 독점과 제한을 공자는 교육이라는 방식을 빌려 부수었으며, 이에 힘입어 그의 제자들은 최초의 민간 저술인 『논어』를 집필했습니다."(39)


"역사적으로 『논어』의 더 새롭고 혁명적인 의의는 바로 『논어』가 그 전에는 없었던 인간관계, 즉 사제 관계를 구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자 이전의 교육은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배울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르쳤는데, 그 자격은 혈연과 신분으로 정해졌습니다." "반면 공자와 그가 가르친 사람들은 혈연관게가 아니었습니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은 본래의 봉건 질서 속에서 그런 귀족 교육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자가 맡은 역할은 사실상 봉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마침 봉건 질서가 흔들리던 춘추 시대였기에, 공자가 옛 체제의 규범을 어기고 본래 폐쇄적이고 독점적이었던 귀족 교육의 내용을 차별 없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족 간의 유대를 통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공자를 좇아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41-3)


2 스승으로서의 공자


"그 시대에 구舊귀족의 태도는 자리와 직무가 생겼을 때 관련 지식과 기능을 잘 익히면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지식과 기능이란 군주와 다른 고관들을 대하는 예의, 연회에서 쓰이는 음악과 그 의미 그리고 시를 인용해 넌지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야인'들은 적극적인 태도로 알아서 예악을 배우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누가 자기를 필요로 하면 즉시 국정과 외교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사실상 공자의 주요 업무는 제자들이 〈먼저 예악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다시 말해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평소 공자의 가르침 아래 열심히 예악과 규범을 익히다가 언제든 국정과 외교 분야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정말로 국정에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간 사람', 즉 이미 준비를 마친 사람을 쓰겠다〉고 주장한 겁니다."(53-4)


#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야인野人이고 나중에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군자다. 만약 실제로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가는 쪽을 좇겠다.〉, 「선진」편 첫째 장


"공자가 보기에 스승은 학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특히 자신이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의문과 반박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정진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스승은 당연히 학생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지만, 만약 스승과 학생 사이에 스승이 학생을 돕고 영향을 주는 일방적인 관계만 있고 거꾸로 학생이 스승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공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기꺼워하기만 하는 안회를 두고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불평한 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중요하게 생각한 인물이었습니다." "어쨌든 안회에 대한 공자의 원망은 진짜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한마디에서 '기쁠 열說' 자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說'자는 '悅'자와 통하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기쁨과 희열을 뜻합니다."(64-6)


# 〈회는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니, 내 말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다.〉, 「선진」편 넷째 장


3 공자는 진리의 확성기가 아니었다


"공자가 '효'를 중시한 까닭은 나날이 혼란해지던 춘추 시대에 그가 목도한 인간 세상의 숱한 고통이 수백 년간 유지되었던 서주 봉건 질서의 파괴 및 와해와 근본적으로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봉건 질서는 친족의 인륜을 확장하여 사회적 인간관계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마땅히 봉건 질서를 회복해야 했고, 또한 봉건 질서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륜 관계의 각 주체들이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 된 자는 '효'에, 신하 된 자는 '충'에 힘쓰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공자는 결코 자식과 신하에게만 편파적으로 역할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동시에 아비 된 자도, 군왕인 자도 각기 아비답고 군왕다워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관계는 상대적이므로 행위에 대한 요구도 필연적으로 상대적이어야 했습니다."(78-9)


# 〈효성스럽도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와 형제가 그에 관해 하는 말에서 사람들이 흠을 잡지 못하는구나.〉, 「선진」편 다섯째 장


"공자가 보기에 배움을 향한 진실한 감정과 즐거움의 기준에 부합하는 제자는 안회밖에 없었습니다."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이 가졌던 모순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 매우 유용해서 무질서한 사회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인재를 키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본래 그런 용도의 가르침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공자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가르침은 주나라의 예악禮樂을 회복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윤리가 바탕인 봉건 시기의 예절과 의례 정신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했던 겁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공명과 이익이나 현실에 따르지 않음을 강조했으며, 유용하게 쓰이려고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모순은 그의 가르침이 인본주의로 돌아간 '무용한 학문'이면서도 결과적으로 유용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제자가 겨우 서른한 살의 나이에 요절했으니 공자로서는 당연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89-90)


# 〈계강자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했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고 지금은 없습니다."〉, 「선진」편 일곱째 장


4 본래의 공자로 돌아가기


"염유(염구)가 스승에게 한 말을 보면 내적인 능력을 들어 자신의 그리 훌륭하지 못한 외적 행동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내적인 느낌과 동기를 기준으로 그를 비판합니다. 스승이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행동을 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적으로 얼마나 강한 동기를 갖고 더 잘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확실히 '유심론자'입니다. 염유에 대한 그의 추궁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문제 삼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주관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관성은 공자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자신의 풍부하고 민감한 공감 능력에 의지해 공자는 어떤 가치, 즉 진실하고 성실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외적인 표현으로 남에게 잘 보이고 남을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공자는 염유가 정말로 '역부족'인지 아니면 '선을 그은 것'인지 그 내적인 차이를 한눈에 꿰뚫어본 것입니다."(126-7)


# 〈염구가 말했다. "스승님의 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부족일 따름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역부족인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는데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다."〉, 「옹야」편 열두째 장


"춘추 시대는 왜 그렇게 혼란하고 무질서해서 수많은 사람이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을까요? 공자의 견해는 시종일관 같았습니다. '예'를 잃었기 때문이었지요. '예'가 버려지고, 왜곡되고, 변질되었다고 본 겁니다." "묵가, 도가 그리고 훗날의 법가의 공통된 출발점은 기존의 '예'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었으며 적어도 '예'가 현실의 요구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예'를 밀어내고 '예'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의 외적 형식과 내적 정신이 서로 근본적으로 어긋나 버린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예'가 형식화되어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이어졌던 끊이 끊어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새상을 구하는 방법은 '예'의 정신을 탐구하고 처음에 설정된 '예'의 원초적인 의미로 돌아가 다시금 '예'가 인간 내면의 진실한 감정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130-1)


#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자 곁에서는 일찍이 배불리 드신 적이 없다.〉, 「술이」편 아홉째 장, 〈공자께서는 곡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술이」편 열째 장


"공자의 장점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많은 것을 기억하며 자기가 배운 것을 어떻게 가르질지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 지식과 기능은 공자 자신에게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실제 삶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자신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공자는 언제나 배운 다음의 일을 걱정했습니다." "공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고 제자들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당연히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능은 가르칠 수 있어도 가장 중요한, 그 지식과 기능이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게 하는 것만은 가르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이런 몇 가지 일을 끊임없이 걱정했는데 이 걱정 자체가 그의 꾸준한 수양인 동시에 제자들을 감화시키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솔선수범이었던 것이죠."(140-2)


# 〈덕을 닦지 못하고, 배운 것을 연구하지 못하고, 의로운 얘기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점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 「술이」편 세째 장


5 스승에게는 정답이 없었다


"자로와 염유가 차례로 공자에게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말을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각기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자로에게는 〈어른이 계시니 의견을 여쭤 봐야 하지 않느냐? 어찌 듣자마자 행하겠느냐?〉라고 답했고, 염유에게는 〈옳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공서화는 공자 옆에 가장 자주 있던 제자여서 그 두 번의 문답을 다 들었습니다. 당연히 무척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왜 다른 대답을 했는지 물으니 공자는 〈염유는 성격이 소극적인 편이어서 망설이지 말라고 격려한 것이고, 자로는 성격이 충동적이고 늘 혼자 두 사람 몫의 일을 하려고 해서 다소 늦춰 준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이른바 '인재시교'因材施敎로서 인물에 맞게 가르치는 교육 방식입니다. 진정한 교육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답이 아닌 답을 제자들에게 내줄 수 있는 사람만이 스승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173-4)


# 〈자로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형父兄이 있는데 어찌 듣고 바로 행하겠느냐?" 염유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 공서화가 물었다. "유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부형이 있다'고 하셨고 구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혼란스러워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는 물러나는 성격이라 격려한 것이고, 유는 두 사람 역할을 하므로 물러나게 했다."〉, 「선진」편 스물 두째 장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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