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다 -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문현선 옮김 / 유유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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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속된 세계관


"갑골문으로 쓰인 복사卜辭나 청동기에 보이는 상나라 문화와 『초사』에 보이는 초나라 문화 사이에는 아주 쉽게 교집합이 발견됩니다. 귀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과 귀신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묘사가 넘치지요. 주나라 사람과 문화의 관점(불연속 세계관)에서 보면 이는 모두 '괴력난신'怪力亂神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가치도 없는 일들입니다." "폭넓은 고대 문화를 살펴보건대, 상나라와 초나라의 문화는 고고학자 장광즈 선생이 주창한 '연속된 세계관'에 기초합니다. 사람과 외부 환경 사이에 명확한 구분과 단절이 없다는 의미지요. 세상 만물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것으로 변화할 수 있고, 저것 또한 이것으로 변화할 수 있지요." "이러한 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장자는 우언寓言이라는 형식을 골라 쓸 수 있었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34-8)


"장자가 묘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완벽하게 '연속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주류가 아닌 세계관으로 자신이 처한 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했지요. 이에 반해 노자는 여전히 주나라 문화의 '불연속 세계관' 입장에서 어떻게 인간관계를 처리할지, 어떻게 역발상의 논리로 이 인간 세상에 더욱 적합한 방식을 찾아낼지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양자 모두 '도'道를 이야기하고 '도'라는 말로 완전하고 신비한 원리 원칙을 통칭하며, 마찬가지로 '자연'自然을 강조하면서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사람이 자연을 광활한 공간으로 삼아 인간 세계라는 비좁은 범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유유히 누비며 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노자는 자연의 도리를 인간 세상에 적용해 인간관계를 처리하고 이를 통해 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장악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40-1)


2 상대성에서 시작하다


"연못에서 살면서 몇 길 높이를 채 오르지 못하는 작은 새가 거대한 붕새를 비웃습니다. 〈저이는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인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킬로미터를 날지 못하고 곧 내려오며 풀숲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닐 뿐이지만 이 역시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일일 뿐이다. 그런데 저이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 작은 새는 두 번이나 〈어디로 가는가?〉라고 되풀이 물음으로써 거대한 붕새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도리어 붕새에 대한 경멸을 드러냅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과 맞닥뜨렸을 때 자주 드러내는 반응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개념을 사용하자면 이는 서로 다른 잣대와 크기를 넘어서는 '공약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작은' 잣대의 크기로는 '큰' 잣대와 크기의 문제에 깊이 다가갈 수 없는 법입니다."(82-3)


# 〈연못 안의 작은 새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이[붕]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길을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며 쑥대밭 사이를 맴돌지만 이 또한 날 만큼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저이는 또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장자』 내편 제1편 「소요유」


# 공약불가능성 : 현대의 과학과 과거의 과학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로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사용한 개념


"(붕새의 비유를 사람에게 적용해보면) 〈지혜는 한 가지 벼슬을 감당할〉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고, 〈영예와 모욕의 경계를 가늠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으며, 〈바람을 타고 다니며 가볍고 묘하게 날기를 잘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에는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의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없고 육체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지인〉이 될 수 있지요.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공로를 세우고자 애쓰지도 않지만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신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지만 어떠한 명성도 굳이 바라지 않으므로 비로소 진정한 〈성인〉인 것이지요." "이것이 '작은 앎'과 '큰 앎'의 차이로, '작은 앎'을 가진 낮은 등급의 사람은 이해의 잣대와 크기가 훨씬 더 큰 '큰 앎'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89)


# 〈그러므로 말한다. "지인에게는 자기가 없으며 신인에게는 공로가 없고 성인에게는 이름이 없다."〉


3 절대성으로 상대성을 초월하다


"〈도〉를 감추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며, 작은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아는 듯 여기는 태도입니다. 말을 감추는 것은 갖가지 화려한 수식과 교묘한 화법입니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논쟁과 같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있습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작은 이룸〉을 얻어 각기 다른 입장에서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서로 대립합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과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이런 언어의 상대적인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불분명함에서 벗어나 맑고 깨어 있는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밝음〉일까요? '이것'과 '저것'이 서로 대응하여 이루어진다는 사물의 상대성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인 것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저것'이 됩니다. 고정된 '이것'과 '저것'은 없습니다."(151-2)


# 〈도는 작은 이룸에 감춰지며, 말은 화려함에 감춰진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있어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며 옳다고 하는 바를 그르다 한다.〉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고 그 옳다 하는 바를 그르다고 하려면 밝음을 따름만 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것이 아님도 없고 사물은 이것이 아님도 없다. 저것으로 말미암으면 보이지 않으나 스스로 알면 그것을 알게 된다.〉 『장자』 내편 제2편 「제물론」


"그래서 성인은 이러한 상대적인 이치에 기대지 않고 〈하늘〉에 의지합니다." "'樞'(추)는 가운데서 사물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로 '문지도리'는 문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문의 중심축입니다. 그렇다면 〈도의 지도리〉는 '도'가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심축을 뜻하겠지요. 어떻게 '도'를 회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회전의 가운데〉, 다시 말해 원심에 서는 것이죠. 원심은 원의 한가운데이며,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습니다. 모든 대립하는 입장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지요. 이쪽에 있지 않으며 저쪽에 있지도 않습니다. 중심점에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습니다. '저것'과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무궁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밝음〉은 옳고 그름, 저것과 이것의 상대성을 꿰뚫어보며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인 원점을 찾아내, 그 자리에 굳게 서서 바쁘고 번잡하며 상대적인 저것과 이것, 옳고 그름을 관찰하고 그에 대응합니다."(154-6)


# 〈이것 또한 한 가지 시비요, 저것 또한 한 가지 시비다.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있는가?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없는가?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 한다.〉


4 관점이 곧 편견이다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핵심입니다. '제물'齊物은 모든 것을 한 가지로 바꾸고, 한 가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이치를 보라고 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렇거나 그렇지 않음',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음'은 종종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름이나 이름 붙이기, 주관적인 규정에 우리 자신이 집착하면서 나온 편견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별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같지 않음'이 생겨나지요. 그래서 '제물'은 곧 구별과 편견을 꿰뚫어보는 것이며,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사실 어떤 사물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의 사물에는 나름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있고 모두 평등해집니다."(165)


"청나라 말 중화민국 초기의 학자 차오서우쿤은 『장자내편주』莊子內篇注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제물론」의 본문을 마치고 나면 그 뒤는 조항의 열거에 지나지 않으며 상술한 내용을 설명한다.〉 이런 관점은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장자 자신도 이미 '말'言에 대해, 해석이나 설명에 대해 경고한 바 있지요. 자신의 글에서 말했듯 〈이로써 그칠 따름입니다.〉 ... 도가 일단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는 더 이상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근원적인 '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이치는 교묘한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진정한 자애는 어디에나 두루 펼쳐지기에 특정한 방향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큰 도는 이름 부를 수 없다〉라는 말은 『노자』의 제1장 첫머리에 나오는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변함없는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와 같습니다." "『노자』에서는 이 역설의 원칙을 인간 세상에서 사는 방식으로 돌려 사상의 핵심을 이룹니다."(186-8)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모순 그리고 그가 웅변이라는 방식을 활용한 또 다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큰 바룸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이렇게 믿고 있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장자 자신의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하지요. 그런데도 그는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논쟁하거나 설명하는 '행위'와 논쟁하거나 설명하고자 하는 '이치'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과 갈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며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자신이 한 말과 할 수 있는 말에 질문을 던집니다. 갖가지 웅변 기술을 쓰면서, 그는 우리를 이해시키고 믿게 하려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웅변 기술이라는 것이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현대의 논리 언어로 설명하건대, 장자의 글은 끊임없이 첫 번째 진술로부터 멀어지며, 두 번째 진술은 첫 번째 진술에서 쓰인 언어와 이치를 '메타'meta 검증하지요."(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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