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단상

케이트는 카르텔의 무자비하고 적나라한 폭력에 맞서 물러서지 않는 굳은 용기와 신념으로 무장한 마약 단속반 경찰이다. 그녀는 법과 원칙이 작동하는 세계를 수호하는 임무에 헌신한다. 그러나, 그녀가 더 많은 조직원들을 잡아들이고, 살인귀들을 쫓을수록 그들은 케이트의 세상을 잠식해 들어온다. 그녀가 '질서'를 바로잡으려 할수록, 세계는 더욱 '무질서'해지고, 이성을 잃어간다. 그녀는 그 이유가 너무도 알고 싶었기에 기꺼이 지옥 심장부의 초대를 받아들인다.

이 타락한 수렁에 영문도 모른 채 합류한 케이트는 전쟁의 주요 행위자들과 달리 애써 지켜야 할 대상이 없다. 그녀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이혼녀로서, 제발 외모 좀 꾸미고 다니라고 말하는 동료 경찰 레지가 그나마 친밀한 지인이다. 그녀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 아니라 '진실'과 '원칙'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세계가 과연 그러한가? 이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정해진 경계를 넘어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는 세력을 응징하는 제국, 미국이다.

케이트는 그야말로 무기력하다. 작전의 전 과정에 이방인처럼 떠돌고 무시당하며, 궁극의 세력 균형과 질서 유지에 철저히 이용되는 소품에 불과하다. 케이트는 비정상 세계와 대립하는 정상 세계의 대등한 대변자가 아니라, 본래 정상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진실의 엑스트라이다. 세계는 그녀의 소망과 무관하게 제자리로 돌아간다. 영화는 케이트의 정당성을 옹호하거나 부각시키려 애쓰지 않으며, 감독이 바라본 세계를 충실히 복원하는데 주력한다.

여기서 두 가지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세계가 불가피하게 선악이 공존-거대한 악에 선이 매달려 있는 형태의-하는 곳이라면, 그 질서의 균형점은 도대체 어디인가? 그리고 그 질서를 주관하는 자는 누가 주관하는가? 과연 맷 그레이버의 주장처럼 세계의 마약 인구 20%를 설득할 수 없다면 기존 질서를 복원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은 질서의 균형점을 짚고 있는가?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균형의 조정자를 자처하는 가장 강한 폭력은 누가 관리할 수 있는가?

불안과 평온, 궁핍과 여유,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과 혼재는 인간사의 불가피한 모습이다. 한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어디에도 없으며, 우리는 그저 양 진자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피난처를 찾아 탐조등을 비추며 방황할 뿐이다. 누구나 후아레즈 바깥의 세계를 원하지만, 세계는 후아레즈와 후아레즈 바깥이 아니라 제국과 제국의 바깥으로 구분된다. 베트남의 정글과 아프가니스탄의 사막, 소말리아의 인종 학살, 콜롬비아의 메데인은 모두 후아레즈의 과거이다.  

후아레즈는 자연발생적인 장소가 아니라 제국이 빚어낸 인공의 산물이다. 제국은 균형의 조정자를 자처하고, 무질서한 세계를 관리하지만, 그것은 제국이 자신의 영속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신념을 지닌 제국의 일원, 케이트와 맷 그레이버는 가장 강한 폭력의 숭배자가 될 수도 있고 관리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들은 유동하는 경계를 부단히 일깨운다는 점에서 관리자 역할에 힘쓰는 동지이다. 무관심으로 '질서'에 편승하는 자들이 바로 제국의 숭배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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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상

영화는 시카리오의 어원을 설명하는 자막으로 출발한다. 시카리오는 이교도 로마 제국에 맞서 예루살렘 성전을 수호하는 광신적 유대인들의 분파인 젤롯당원들(Zealot)을 가리킨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궁극적 가치는 어떠한 언어로도 드러낼 수 없는 야훼의 신성함이다. 말로도, 몸짓으로도, 이미지로도 그려낼 수 없는 신의 신성함을 유한한 인간이 지상에서 조금이나마 실현하는 방식은 '오직 사랑'이며, 그들은 '오직 믿음'이 명령하는 암살로 성전을 사수한다.

늑대들의 도시 후아레스는 멕시코 국경에 자리잡은 인간 도축장이다. 마약 카르텔이 군림하는 이 도시는 당연히 법과 질서가 통용되지 않고, 살인과 생존이 일상과 완벽하게 뒤섞인 지옥이다. 체포된 카르텔의 핵심 인사를 미국으로 인계하기 위해 출동한 중무장한 멕시코 경찰차와 미 특수요원 차량이 횡단하는 거리의 풍경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고가도로에 걸려 있는 난도질당한 시체들과 길거리 낙서로 가득 찬 담벼락을 두고 공놀이를 하는 주민들의 모습)

멕시코 경찰 실비오도 '혼란'이라는 말이 부족한 이 악다구니 속에서 제나름의 몫을 챙기며 살아간다. 그의 삶의 중심은 축구를 좋아하고, 아빠와 축구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들이다. 아들이 자신의 총에 보이는 일말의 흥미를 단호히 끊어내는 그의 가장 큰 소망은 아들의 평범한 일상일 것이다. 아들을 진한 애정으로 감싸는 아빠 실비오와 순찰차로 마약을 운반하는 부패 경찰 실비오는 후아레스의 표본이다. 그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타락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시카리오를 체현한 인물 알레한드로를 밀고 나아가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키지 못한 사랑'이다. 그는 아내와 딸이 멕시코 카르텔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전직 검사로서, 복수를 위해 메데인(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암살자로 거듭난다. 미국은 국경을 넘어 살인을 저지르고, 마약 시장을 교란하는 멕시코 카르텔을 응징하기 위해 그와 손을 잡는다. 미국을 대변하는 특수부대 팀장 맷 그레이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질서'이다. 

사실, 냉혹한 살인 교사자들인 멕시코 카르텔의 핵심 인물들에게도 따스한 가정은 삶의 원천이다. 돈세탁 은행이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을 보고받는 2인자의 저택 수영장에서는 어린 소녀들이 즐겁게 물장구를 치며 논다.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알레한드로의 총구를 맞이한 보스의 마지막 요청은 아이들을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케이트를 감시하기 위해 접근한 미국 경찰 테드 역시 전처와 딸의 신상을 까발리겠다는 협박에 수사에 협조한다.

비정한 늑대들은 각자가 품고 있는 '사랑'에 충실히 복무한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신성에서부터 가장 원초적인 혈육에 이르기까지 시카리오들의 '사랑'은 피비린내로 가득 찬 호수를 이룬다. 그들은 세계를 자신의 '질서' 아래 두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이 각각의 '질서'가 충돌하는 세계를 장악하는 것은 오로지 가장 강한 '폭력'이다. 가장 강한 '폭력'이 원하는 '질서'는 날카로운 총성과 축구 시합의 함성이 공존하는, 어쨌든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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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위한 물리학 - 10년 후 세계를 움직일 5가지 과학 코드
리처드 뮬러 지음, 장종훈 옮김 / 살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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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과 지구 온난화를 다룬 파트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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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국가 일본 살림지식총서 189
이성환 지음 / 살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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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 국가의 머리는 천황이었고 심장은 전쟁욕慾이었다. 어느 쪽이든 국민들의 피를 원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며, 그들이 전장에 흘린 피는 자신의 원통함을 더 많은 피로 씻어낼 것을 갈구했다.





근대 일본은 전쟁과 함께 성장,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군사적 발전주의라 하며, 이것이 바로 근대 일본을 전쟁국가로 규정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덧붙여 메이지유신 후 1945년 패전일까지 일본은 60년 간 28명의 수상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군 출신 수상이 15명이었고, 그들의 총 재임 기간은 30년 11개월이었다. 8)

(1929년 대공황에 따른) 경제적 상황의 악화는 워싱턴 체제하에서의 군비 삭감, 정당 정치를 중심으로 한 국내 민주주의의 진전, 미국 등 열강과의 경제 협력을 통한 국가 발전이라는 구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워싱턴 체제의 붕괴와 함께 일본은 또다시 군사적 팽창주의로 회귀하게 된다. 59)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은) 일본 주둔 미군 약 8만 명을 우선 한국에 파견했는데, 그 하루 전 GHQ는 주일 미군의 한국 파견으로 생기는 국내의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같은 규모의 병력으로 무장하도록 일본 정부에 지시했다. 8월 10일 경찰예비대라는 이름으로 7만 5천 명의 무장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일본 자위대의 효시이다. 84)

미국은 아시아 공산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는 방파제로서 일본이 필요했다. 요시다 내각은 취약한 경제력을 핑계로 11만 명 정도의 무장에 합의했다. 이로써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면서 경무장을 통해 경제 발전을 도모한다는 `요시다 노선`이 확립되었다. 1954년 7월 1일에는 자위대법의 제정과 함께 방위청을 설치하고 보안대를 자위대로 재편했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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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하고 황량한 사막 풍경을 100% 활용한, 말 그대로의 "폭발적인" 추격 장면과,

 

억눌린 미치광이 맥스의 광기를 집어삼키며 폭주하는 임모탄 집단의 광기의 항연들,

 

스릴과 폭력이 난무하는 절망의 세계를 종국에 감싸안는 어설프지 않는 인간미까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서 오바하지 않는 이 영화의 "균형 감각"이 그야말로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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