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와 역사가들 - 서양사 연구를 위한 입문
마크 길더러스 지음, 강유원, 이재만 옮김 / 이론과실천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서문
1장 역사 연구의 목적과 의도
"지식체계로서의 역사학은 서구 문명에서 장구하고 영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강조점이 때때로 변해왔지만, 쓰여진 서사는 언제나 인간사에 집중했고 진실을 내세웠다. 역사가들이 진실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들의 서술이 타당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증거의 형태로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현대 미합중국 역사가 폴 콘킨은 간결한 정의를 제시했다. 역사란 〈인간의 과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다.〉 여기서는 〈진실한〉과 〈인간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역사를 전설, 우화, 그리고 신화와 구별하는 것은 진실의 질이며, 전설, 우화, 신화는 분명 어떤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대개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지 못하다. 역사가는 인간의 과거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주로 자연의 사건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만 주목한다. 예를 들어 화산 폭발의 경우 주로 폼페이 같은 도시들을 묻어버렸을 때 주목을 받았다."(17-8)
"철학자 칼 포퍼는 문제의 다른 측면을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사회과학자와 역사가가 의도적인 인간 활동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고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때로는 상황이 나빠진다. 역사적 행위자는 일련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뜻밖이거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포퍼는 인간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도와 결과 사이의 연계를 탐구하길 바랐다. 유럽을 정복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봉건적 구조를 무너뜨려 근대화를 위한 길을 닦았다. 미합중국은 남베트남의 자결권을 보호하려고 군사력을 동원했을 터이지만, 오히려 그 작은 나라의 소멸을 앞당기고 말았다.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희극적인 그러한 아이러니는 인간의 경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원대한 의도는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아주 흔하므로 그것을 추구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목적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보다 잘 추정할 수 있다면 더욱 건설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24)
# 역사적 탐구의 3단계 모델
1.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적 행위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탐구를 시작한다.
2. 〈왜?〉라는 질문을 던져 행위자들의 행동을 해명한다. 여기서 인간 활동에 대한 역사가들의 설명이나 해석이 제시된다.
3. 〈사태의 결과는 어떻게 판명되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고 누가 고통을 얻었는가? 그 결과는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사건의 결과를 평가한다.
2장 역사의식의 등장
"어떤 고대인들은 기록을 전혀 보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반면 이집트인, 수메르인, 아시리아인, 히타이트인은 서기전 3천~2천 년부터 쓰여진 유물을 남겼다. 그중 다수는 위대한 인물들의 위업을 자세히 기록한 목록과 비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기록들은 연대기에 대한 감각과 같은 원초적 역사의식의 등장은 입증했지만, 약간의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친다." "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고대인들보다 역사를 중시했다. 실제로 그들에게 역사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었고, 그들은 역사를 이해하여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정립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유대인들은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신 야훼와 특수한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유대인의 역사 저술은 비판적 혹은 이성적 탐구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종교적 경험과 신앙의 산물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굳건한 신념에 따라 해석했다."(33-5)
"희랍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시간 차원은 순환적 사고방식이었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같은 호메로스의 시는 웅장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과거의 영웅적·서사시적 이야기를 말했고, 희랍인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역사가 아니었고, 흔히 초자연적 힘이 사건의 진행을 좌우하는 전설, 신화, 우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 정신과 무관해 보이던) 희랍인들은 역사적 사유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방법으로 비판적 역사를 발명했다. 고대 희랍어 '히스토르(histor)'는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학식을 갖춘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사실을 조사했고, 탐구를 통해 그 정확성을 판별했다. 그랜트는 '히스토리에(historie)'가 〈이성적 설명을 위한 조사와 현상에 대한 이해〉를 의미했다고 설명한다. 서기전 5세기에 두 천재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이성적 기법을 사용하고 역사 저술을 창시하여 지적 혁명을 일으켰다."(36-5)
"희랍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로마인들 역시 통치 엘리트의 정치적·군사적 활동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희랍인들과 달리 공평성과 객관성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진지한 도덕주의자인 그들은 판단을 내리고 자신들이 보기에 타락한 것 혹은 모범적인 것을 묘사하는 편을 선호했다." "로마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정치적·군사적 주제에 관해 몇 권을 저술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로마제국 연대기》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위에 오른 서기 14년부터 네로 황제가 죽은 직후인 68년에 이르는 제국의 일들을 기술했다. 서기 2세기 초에 쓰여진 이 책은 로마 통치자들의 개성뿐 아니라 그들의 부패와 타락도 생생히 묘사했다. 전형적인 로마 역사가들처럼 한때 관리였던 타키투스는 공적인 덕을 칭찬하고 부도덕과 악행, 특히 황제들의 무절제와 그들을 둘러싼 이기적인 파벌을 비난했다. 그는 냉소적 아이러니와 깊은 비관론을 품은 채 그들을 책망하곤 했다."(41-3)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을 체계 원리로 정립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역사철학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유대인의 개념에서 유래한 그의 시간감각은 희랍의 원운동 관념을 명백히 거부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끝없는 회전과 덧없는 반복은 사실상 신의 영향력과 의도를 수포로 돌려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천지창조라는 분명한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 선을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은 중심적 사건을 나타냈고, 시간의 종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자의 구원은 과정의 완성을 의미했다. 인간의 도시에 대한 신의 도시의 최후의 승리는 마지막 목적의 달성, 곧 신자들이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두 도시와 선을 따라 움직이는 사건들이 특징인 그 도식은 중세 전체와 그 이후에 기독교 저술가들을 강하게 자극했다."(46-7)
"중세 동안 역사적 주제를 다룬 저술가들은 1천 년 이상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업했다." "중세 저술가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유일신은 논란의 여지 없이 인류 위에 위치하고 있었고, 사건들의 행로를 관찰했으며, 정기적으로 신성한 개입을 통해 그 사건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그러한 신앙의 표현은 인간 행위에 대한 논의와 현상에 대한 분석에 영향을 미쳤다. 연표와 연대기의 편자들은 종교를 인류의 궁극적인 관심사로 보았고, 역사는 목적론적인 설계에 따라 신이 미리 정한 결론을 향해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한 성향은 인간 경험을 도덕주의적으로 심사하는 경향을 낳았다. 중세의 저술은 흔히 평결과 판결을 내렸고, 그리하여 그 객관성과 진실성에 관한 현재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학자들은 객관성과 진실성이라는 쟁점을 근대적인 것으로 인정해왔다. 대다수 중세 연대기는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려는 의도였다."(48-50)
3장 근대의 역사의식
"중세 역사 서술과의 임박한 결별에 대한 최초의 암시들 중 하나는 14세기 르네상스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났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평생 고대 로마 전통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페트라르카는 (비록 기독교의 권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로마를 조사하여 인간 존재와 그 세계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내세웠으니,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실제 사건들은 단지 상징적 중요성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분투와 성취가 실재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16세기에 또 다른 피렌체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대한 저술을 통해 역사에서의 인간적 차원에 주의를 집중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역사란 자신의 처세술을 조명하기 위한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역사》에서 자신의 도시에서 벌어진, 정치의 특징인 음모와 책략을 상세히 다루었고, 인간의 행위를 기회주의와 자기강화에 의해 동기화되는 것으로 묘사했다."(60-2)
# 르네상스 역사가들의 결함 : 역사적 유물을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고, 고대인들을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들을 숭배하고 모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16~17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과 잇따른 종교적·정치적 격변은 적대하는 파벌들이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당파들이 논쟁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적대하는 세력들은 현재 자신의 입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측면에서 과거를 끌어들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의 통제가 초기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믿음과 실천의 순수성을 타락시켰다고 역설하며 적들을 공격했다." "일련의 논쟁은 기독교세계 전체를 갈라놓았고, 유럽 대학들에서 최초로 역사학 교수직이 마련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혁신은 장기적으로 보면 전문적 역사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획일적인 기독교적 역사 해석을 분열시키고, 역사에 대한 신성한 이해와 세속적 이해 사이의 간극을 벌렸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결과 보편사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던 합의가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롭고 통합적인 접근법은 곧장 등장하지 않았다."(64-5)
"17세기의 위대한 과학혁명은, 과거에 대한 신뢰할 만하고 정확한 서술을 고안하는 문제를 뒤흔드는, 또 다른 질문들을 제기했다. 뉴턴, 케플러, 갈릴레오의 발견에 이어진 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지식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역사처럼 부정확한 탐구 분야에서 입증 가능한 지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이 판단하기에) 역사가들이 수학적 이상에 부합하는 형태로 지식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들은 〈혼란스러운 지각에 대한, 해롭지는 않으나 부적절한 향락〉에 빠진 것이거나 심지어는 〈진리에 이르는 길에서 위험한 오류〉를 시작한 것이었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은 역사가들에게 지난 4세기 동안 가장 중요했던 인식론적 쟁점 가운데 하나를, 특히 자연과학이 인간사에 대한 연구에서 어느 정도로 지식과 이해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만 하는가라는 쟁점을 제기했다."(66-7)
"계몽주의 시대는 소나기를 퍼붓듯 역사 저술을 생산했고, 동시에 역사적 사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 유럽 철학자들은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신이 아닌 이성이 인간의 행위를 안내할 것이었다. 계몽주의 운동은, 일종의 필연적 결과로서, 전통적 종교의 권위에 대한 반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선의 역사가들─볼테르, 데이비드 흄,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은 종교를 인간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하여 종교의 역할을 비하했다. 볼테르는 성직자 계급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거대한 사기꾼이었다고 보았다. 실로 그들은 편협함, 불관용, 억압의 납품업자 역할을 했다. 인민을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계몽주의 역사가들에게 합리성과 해방을 향한 인간의 진보를 알리는 이정표였다."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열망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로의 일탈을 탈선이나 어리석은 시도로 여겼다."(70-1)
"비코는 지나치게 과장된 자연과학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서 〈새로운 학문〉을 내놓았다." "비코가 보기에 역사 연구의 적절한 수단은 철학에서, 곧 공리, 정의, 그리고 가설을 세우고 그로부터 추론하는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또한 그가 언어, 역사 문학에 대한 경험적 연구라고 여겼던 문헌학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비코는 말, 전승, 이야기, 신화, 전설, 그리고 법률 체계의 뿌리를 중요한 실마리로 여겨 면밀히 조사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지상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무지와 미신을 의미했다. 반면 비코가 보기에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관해, 그리고 우주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탐구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코는 맥락과 자기인식을 강조함으로써 19세기를 사로잡을 '역사주의'의 선구적 모형을 내놓았다."(78-9)
# 19세기 역사학의 갈래
1.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중에 생겨난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접근법(쥘 미슐레, 프랑수아 기조)
2.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며 역사의 흐름을 추상적·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헤르더, 칸트, 헤겔)
3. 기록 연구에 기초한 탐구를 통해 실제 일어난 일을 밝히고자 했던 전문 역사학(역사주의 학파, 랑케)
"헤겔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헤르더의 전체론적 개념, 곧 각 단계는 뒤따르는 모든 단계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통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지했다. 헤겔이 보기에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는 과거를 왜곡하고 진정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었다. 그는 역사가들이 지나간 시기와 시대를 그 자체의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헤겔의 방법론적 조언을 받아들인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 학파는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지적하였고, 서로 다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이 과거를 이해하려면 과거 행위자들의 정신 세계에 공감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의 현실상(像)을 재구축해야만 했다." "이러한 방법론을 실천했던 일선의 연구자들 가운데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 분과로, 전문적인 학문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86-7)
4장 역사철학 : 사변적 접근
"(칸트와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사변적 역사철학은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인 그 장대한 목적 때문에 20세기 들어 호소력을 일부 상실한 낡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점점 더 적은 것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안다〉는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고도로 전문화된 탐구를 수행하는 시대에 빈틈없는 관찰자들은 인간의 과거 전체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신념이 거의 없었다." "많은 학자들이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렸지만, 사변적 역사의 오래된 형태들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들은 어느 정도 변화된 형태로 살아남곤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념과 융합했고, 세계 각지에서 지적이고 혁명적인 호소력을 유지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아널드 토인비는 보편적·철학적 역사를 구성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사변적 저술체계를 내놓았고, 라인홀트 니부어 같은 종교 사상가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에 대한 접근법을 사용했다."(108)
# 마르크스 이후의 사변철학
1. 마르크스-레닌주의 :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들은 잉여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는 제국주의 국가들로서, 이들이 벌이는 만성적인 투쟁은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지속된다.
2. 종속이론 :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유의 변종으로서,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선진세계로 부를 유출하도록 설계된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빈곤과 저개발의 원인이다.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문화를 생물학적 세계의 유기체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문화가 탄생기-청년기-성숙기-노년기-죽음의 단계를 거친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부활시켰다.
4. 토인비의 〈역사 연구〉 : 각지의 문명들은 주어진 환경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노력에 따라 형태를 갖추었으며, 한 문명은 잇따르는 도전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때 성장해나간다.
5. 프로이트 : 개인들의 정신분석에서 발견한 통찰력을 더 큰 인간 영역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인간 본성과 문화적 발전 그리고 원초적 경험의 침전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6. 라인홀트 니부어 : 인간의 자유와 힘의 증대는 〈이기적인 욕망과 충동〉을 표출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을 뿐이며,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신의 주권이 인간 경험 전체를 주재한다.
5장 역사철학 : 분석적 접근
"(과학적 역사와 전통적 역사 간의) 논쟁은 19세기 중반 실증주의의 도래와 함께 특히 두드러졌다. 주로 프랑스인 오귀스트 콩트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뒤이어 두 영국인 헨리 토머스 버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받아들여 정교하게 가다듬은 이 사상체계는, 자연과학의 기법을 지지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연구를 보다 체계적인 종류의 탐구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독특하거나 개별적인 사건보다는 인간사의 궤적에서 나타나는 균일성과 유사성에 주의를 집중했고, 곧이어 같은 종류의 경험들을 연결하고 있는 불변의 관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기보다는 혁명의 현상들을 조사하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자연 세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결과들을 지배하는 일반법칙들을 가정했고, 그것들을 발견할 만한 지적 역량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132)
"콩트, 버클, 그리고 밀이 선언한 실증주의 철학은 격렬한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비판가들은 대개 〈관념론자〉라고 불렸는데, 이 학파는 독일인 빌헬름 딜타이, 이탈리아인 베네데토 크로체, 그리고 잉글랜드인 로빈 콜링우드로부터 나왔다. 그들 모두는 자연과학에서 이끌어낸 유추는 유효하지 않으며 복잡한 역사 저술에는 매우 다른 개념적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에 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정신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였다. 각각은 그 실천에 있어 확연히 다른 방법론을 필요로 했다. 딜타이에 따르면 자연과학자는 자연 내의 규칙성과 균일성을 다루는 반면, 역사가는 자연 밖의 독특하고 특정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루었다." "크로체는 역사가들이 과거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재사유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말했다. 콜링우드는 역사 연구의 대상은 (중층적인) 인간 정신의 활동이며, 역사가들은 정신의 작용을 연구함으로써 정신에 관해 배운다고 주장했다."(136-7)
"미합중국 역사가 칼 베커가 말했듯이, 〈실제 과거는 지나가버렸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재창조된 역사의 세계는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자연과학의 많은 형식들과는 달리, 역사가들이 실제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역사가들은 과거의 유물들을 이용해서 역사를 재구축하며, 언제나 관점의 제한을 받는 가능성(확실성이 아니라)에 대한 진술을 사용한다. 역사적 서사는 시각 혹은 관점을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시각이나 관점이 없다면 역사적 유물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 서사는 일관되게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들이 항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은 옳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반드시 지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거나 오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견해는 다른 견해들을 풍요롭게 있게 만들 것이며, 이론적으로 볼 때 역사가들이 과거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이야기들의 수는 무한하다."(150)
6장 최근의 전문적 역사학
# 역사방법론의 분화
1. 경제사 : 산업화가 가져온 극적인 변화에 주목한 역사가들은 생산 체계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벌이는 경제적 투쟁과 이익 추구를 분석하면서 수량화와 사회과학 방법론을 활용했다.
2. (새로운) 사회사 : 노동자, 농민, 인종, 여성 등의 범주에 속하는, 역사적 서사에서 완전히 익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도 않았던 이들의 역사적 행위에 초점에 맞추었다.
3. 비서구사 : 여타 지역에 대해 우위를 점한 서구 중심의 보편사 혹은 세계사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사 개념들, 세계체제 분석, 탈식민지 연구, 서발턴 연구 등이 행해졌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 가운데 비판적 사상가들은, 경제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순진한 변종들을 거부했으며, 인간 행위를 형성하는 영향력들의 다양성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역설했다. 예를 들어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과 융합된 형태를 찾았다." "프랑스 학자들 역시 인간의 과거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형태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마르크 블로흐와 뤼시앙 페브르가 창간한 영향력 있는 저널 〈경제사회사 연보〉를 중심으로 아날 학파를 구성한 역사가들은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역사의 흐름에 반대했다. 아날 집단은 페브르가 '사건사' 또는 '사건지향적 역사'라고 폄하한 정치, 전쟁, 외교에 국한된 강조를 거부했으며, 인간 실재의 많은 차원들을 보다 완전하게 파악하려 애썼다. 역사서술가 에른스트 브라이자흐가 설명했듯이, 이 프랑스 학자들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새롭고 보다 완전한 역사를 구상했다."(171-2)
"아날 학파의 저작에서는 두 가지 특성이 두드러진다. 첫째, 아날 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집단의식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심성구조〉라 이름 붙은 이 현상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인간집단의 정신적·심리적 특성에 주의를 집중했으며 그럼으로써 개인들에 대한 제한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심 너머로 역사가들을 이끌었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집단성은 총체적 역사로 이어지는 설명을 정식화하는 데 거의 모든 것을 포함시켰다. 둘째, 앞의 경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날 역사가들은 장기지속 개념을 사용했다. 실제로 시간 개념인 이 술어는 역사적 변화의 행로에 개입하는 구조적 연속성을 가리켰다. 장기지속은 무엇보다 토지, 바다, 기후, 그리고 식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조건들은 인간사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냈으며 정치, 전쟁, 외교와 관련된 일시적 사건들보다 더 느린 속도와 리듬에 주목하게 했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삶의 방식을 결정했다."(173)
"여러 종류의 특이성과 다양성이 오늘날 역사학의 기예를 특징짓고 있지만, 한 가지는 어느 정도 분명한 듯하다. 역사학은 더 이상 모든 독자의 정체성과 경험을 대변하는 공통의 이야기를 내놓지 않는다. 역사를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백인 남성 엘리트들의 활동에 집중하는 서사들은 더 이상 만족이나 자극, 또는 진실에 도달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과거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주의를 끌려고 경쟁하는 엘리트와 비엘리트,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중 하나만 강조하는 다수의 관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차이를 조화시킬 만한 뾰족한 방편은 없는 실정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그러한 차이와 비일관성이 끔찍한 난관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한 조건은 세계의 혼란과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196)
7장 문화전쟁, 포스트모더니즘, 그 밖에 다른 쟁점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이성, 객관성, 그리고 진보의 가능성에 관한 계몽주의적 관념들이 전혀 타당하지 않다면,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분과에서 진실을 확증하는 부분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달갑지 않은 전망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고도로 회의적인 형태의 철학 사상, 언어학, 그리고 문학 비평에서 흘러나왔다. 대체로 이 도전은 서구의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나타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권력과 권위의 이용과 남용에 대한 전형적인 정당화로 인식했다. 포스트모던적 반대자들에게는 객관성이라는 관념 그 자체가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관찰자도 편견, 선입견, 이기심, 개인적 선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무언가에 관해 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역사 속의 객관성이라는 관념은 두 배로 못마땅한 것이 되었는데, 객관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라 부르는 것은 순전히 상상력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213-4)
"프리드리히 니체는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한 서술이 역사가의 당파성 및 성향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사학을 지식의 형태라는 지위에서 내쫓았다. 20세기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의 과학적 합리성이 신화적 사유 형태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가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긴 하나 현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복잡한 분석을 전개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폴 드 만, 롤랑 바르트, 그리고 헤이든 화이트의 뒤이은 정교화 작업에서 언어 개념은 언어 그 자체를 가리킬 뿐 외부의 그 무엇도 가리키지 않는, 기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자기 충족적 체계로 등장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역사가는 언제나 자신이 사유하는 세계 안에 갇힌 죄수이며, 역사가의 사상과 인식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범주들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모든 역사적 작업은 문학 비평의 범주들에 의해 판단되어야만 하는 문학 작업〉이 된다."(2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