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문명 -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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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유럽 기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보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응용역학을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서 연구했다.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앗간mill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적절한 사례이다. 물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에 소아시아에 알려졌고 수직 형태의 풍차는 서기 7세기 페르시아에 알려져 있었지만, 방앗간 건설이 진정으로 크게 유행한 곳은 중세 유럽이었다. 무명의 수공업자들은 일련의 기발한 기계장치를 고안해 물이나 바람에서 나온 회전력을 망치, 압축기, 드릴, 맷돌 등 잘 분화된 여러 운동 장치로 전환했다. 유럽은 곧 놀랄 만큼 많은 방앗간으로 뒤덮이게 되었다."(30-1)


"실리주의적 풍조는 중세 도시 문명에서 탄생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촉진했으며 베이컨 철학에 의해 범위가 좁혀지고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풍조는 새로운 기계에 대한 커져가는 열광과 그러한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 역학, 화학, 현미경 관찰, 정성定性 천문학은 이제 막 태동했고 새로운 탐구 분야로의 진입 장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 도구 제작자 같은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많다." "아울러 유럽에는 학자와 수공업자 이외에도 학자나 수공업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아마추어 과학자 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기 과학의 진보에서 이 명인virtuosi들이 했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확실히 숙련공들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컸다."(48-9)


1장 유럽, 시계를 만들다


"종은 중세 도시 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종은 공동체의 삶을 지배했고 종소리는 〈만물을 질서와 평온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모두가 종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종소리는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했다.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불이 났거나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군대나 평화로운 모임에 소집하며,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때, 일터에 나갈 때, 기도할 때와 싸울 때를 알려주고 장을 열 때와 닫을 때를 알리고, 교황의 선출과 국왕의 즉위, 승전을 축하했다. 널리 퍼진 믿음에 따르면 종소리는 폭풍과 전염병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도시와 교회, 수도원이 아름다운 종이나 소리가 맑은 종을 갖는 것은 그곳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장치도 개발되었다. 톱니바퀴와 왕복 지렛대로 구성된 이러한 장치들이 기계식 시계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다."(54-5)


"도시는 급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도시 문화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꽃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제도와 전통, 기득권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될 경직성에 아직은 발목이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13세기는 대학과 고딕 성당의 확산, 조토 디 본도네와 조반니 치마부에가 가져온 미적 혁명,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려는 유럽인 최초의 시도를 목격한 시기였다. 그 세기 후반에는 최초로 대포가 제작되었다. 기계식 시계와 대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이 전적으로 우연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수적으로 또 질적으로, 금속 직공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소산이었으며 뒤에 가서 보겠지만 초창기 시계 제작자 다수가 또한 대포 제작자였다. 대포와 기계식 시계의 동시 출현은 유럽식 발전의 특징을 증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앞으로 전개될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56)


"시계, 특히 커다란 공공 시계는 당시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시계를 설치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은 대개 지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는 특별히 임명된 〈관리장〉의 정기적인 임금까지 포함되었다. 시계를 설치할지 말지의 문제는 종종 길고 열띤 논쟁 끝에 결정되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의 공공 시계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본질적으로 유용한 물건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58-9) "아무도 시계가 없거나 극소수만이 시계를 휴대하고 있던 시대에 시각을 알리는 공공 시계의 유용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용성만이 언제나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일보 도시들은 15세기 한 프랑스 문헌이 표현한 대로, 〈도시를 빛낼 크고 훌륭한〉 기계를 갖고 있다는 명성을 두고 다른 도시와 경쟁했다." "따라서 도시의 자부심, 실용성,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비교적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확산이 촉진되었다."(64)


공공 시계가 보급되면서 점차 가내용 시계가 확산되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추가 유일한 원동력인 한 가내용 시계는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그것들은 받침대로 받쳐야 하거나 벽에 단단히 고정시켜야 했다. 쉽게 옮길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원동력을 고안해야 했다. 동시대의 누군가에 따르면, 위대한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태엽 장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1410년이 되자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증거로 보았을 때 시계에서 태엽을 사용하게 된 시기는 적어도 15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태엽 발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태엽의 발명으로 쉽게 운반 가능한 시계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같은 휴대용 시계의 제작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76-7)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 시계였으므로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 대장장이, 일반적인 금속 노동자인 것은 이해할 만한다. 하지만 가내용 시계와 회중시계가 점차 흔해진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했다. 더 작은 시계들은 값비싼 장치였고 부유층이 소유했다. 시계는 사치품이라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를 특징짓는 장식 과잉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새로운 유행을 만족시켜야 하는 수공업자들은 이제 대장장이나 자물쇠공보다 보석 세공인의 기술이 필요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다란 공공 시계 제작자〉와 〈작은 시계 및 회중시계 제작자〉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직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었지만) 시계 제조업이 두드러진 산업으로 발전한 제네바 같은 중심지는 시계공들이 눈에 띄는 사회적 지위도 획득했다."(83-4)


"18세기가 밝아오자 런던과 제네바는 유럽 시계 제조업의 최대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두 중심지의 부상과 더불어 시계 제작 및 상업에서 새로운 원原산업적, 원原자본주의적 작업 방식이 출현했다. 특히 17세기 전반기 이후 시계 제작이 발달한 지역의 수공업자들은 특정 부품 생산을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태엽 제조공이 최초로 출현한 전문 직공으로 보이며 다른 전문가들도 곧 뒤를 따랐다. 18세기 초에 런던 클라컨웰 지구의 여러 거리들은 탈진기 제조공, 선반공, 원뿔형 도르래 절단공, 비밀 태엽 제조공, 마감공 같은 직공들이 차지했다. 이미 1701년에 회중시계 제작은 분업의 이점을 증명하는 실례로 꼽혔다. 제네바에서는 두 전문 직공 집단이 시계공 길드와 구분된, 자신들만의 길드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라 조립공들은 1698년에, 조각공들은 1701년에 길드를 조직했다. 이러한 발전은 자연히 다른 직종에도 영향을 미쳤다."(106-7)


2장 중국, 시계와 조우하다


"대포를 탑재한 원양 범선으로 유럽인들은 대해의 주인이 되어 이슬람의 해운과 교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아시아 내 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유럽으로, 그곳에서 다시 동쪽의 아시아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서양인들에게 서양 상품에 대한 동양의 낮은 수요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의 제품들이 주요 경제 부문에 걸쳐 유럽 시장에서 유럽의 상품과 성공적으로 경쟁한다는 사실이었다. 브리스톨의 상인이었던 존 캐리가 표현한 대로 〈동인도 무역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데 우리의 정금을 수출할 뿐 우리의 상품이나 제품은 거의 수출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제조된 상품을 수입해와 우리 제품의 소비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니 기계식 시계가 그중 하나였다."(118-22)


"시계는 예수회원들이 베이징의 궁성 문을 열 때도 활약했다. 소문에 따르면 예수회원들은 예를 갖춰 조정에 나가 황제에게 시계 두 점과 다른 공물을 몇 점 바치고 싶다고 간청했다. 시계 가운데 하나는 쇠로 만들어졌고, 도금된 용과 독수리 및 기타 형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형 시계였다. 나머지 하나는 도금을 한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태엽으로 돌아가는 작은 시계였다. 둘 다 종을 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125) "〈스스로 울리는 종〉에 대한 천자들의 애착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 내내 시계와 자동 창치, 그리고 그와 비슷한 아름답고 신기한 장치들이 끊임없이 베이징의 황궁으로 흘러들어갔다. 강희제(1662~1722년 재위)는 황궁에 크고 작은 시계를 만드는 제작소를 차리기까지 했고 특유의 유연성을 보인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에서 전문 시계공을 선발해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켰다."(129)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중국인들은 서양 시계와 천문학의 관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서양 시계를 장난감으로, 오직 장난감으로만 보았다." "16세기 말에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중국인들이 유럽의 어떤 물건에도 관심이 없지만 〈온갖 종류의 렌즈만은, 특히 형형색색의 렌즈만은 구입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럽인들이 렌즈를 가지고 현미경과 망원경, 안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렌즈를 멋진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렌즈와 시계, 여타 기기들은 유럽 사회가 느끼던 특정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되었고 그 필요는 다시 유럽이 자신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기계 장치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국인들은 그것을 그저 재미나고 특이한 물건으로 대했다."(131-2)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가 있다." "꼭 금전적으로 표현된 유효수요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다른 보람 있는 자극들이 수공업자들을 독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수공업자를 대하는 당시 관리들의 태도를 두고 권력 남용의 무수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쉽게 일축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명대 중국의 지배적인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는 실제로 수공업자와 기술을 천대했다. 올바르게 지적된 대로, 〈예술가artist와 수공업자artisan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양 있는 중국인은 수공업자의 작품을 감상할 때 마치 비버의 영리한 작품을 살펴볼 때처럼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명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체계는 수공업자를 억압하고 응용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방해했다."(147-8)


"사실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모호하고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중국은 산업화로 나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인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한다. 그러나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150-1)


에필로그


"시계가 등장한 직후부터 사람들은 활동 시기를 서로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간에 무척 민감해졌고 궁극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일은 필요이자, 미덕, 집착이 되었다. 따라서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갖게 될수록 다른 사람들도 그와 유사한 장치를 가져야만 했고 기계는 자신이 확산되는 조건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시계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유럽의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불가항력으로 진행되었다. 균등한 시간 체계가 계절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불균등한 시간 체계 그리고 그 밖의 시간 구분 방식들을 대체했다. 〈첫 미사 시간〉이나 〈저녁 기도 시간〉 같은 표현들이 완전히 폐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동일한 길이의 〈시계의of the clock〉 시간(정각o'clock)이란 더 추상적인 표현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156-7)


"기계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도구는 아니다. 우리는 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생텍쥐페리는 〈기계는 조금씩 인간성의 일부가 될 것〉이며 〈모든 기계는 자신의 기능 속에서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인간의] 녹이 끼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기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우리 역사 점차 녹이 껴가고 있고 인간사를 다루는 데 언제나 유용하거나 이롭지많은 않은 기계적 세계관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는 대로 〈기계가 끼치는 해악은 인간 자신도 기계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기계를 그렇게 덮어놓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기계와 더 좋은 기계가 절실하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계를 좋고 훌륭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철학의 발전과 인간사를 다루는 능력의 발전도 간절히 필요로 한다."(1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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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 중국사 연구를 위한 입문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강유원.임경준 옮김 / 이론과실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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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중국인의 역사관─만들어진 '정통正統'과 '중화사상中華思想'


"지중해 문명보다는 훨씬 나중인, 서기전 221년 진 시황제의 통일이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의 기원이 된다. 중국 문명의 3대 요소인 '황제'와 '도시' 그리고 '한자'가 이때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만 한자가 중국에서 극히 소수의 지배계급, 그중에서도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대중적인 문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만 한다. 한자에는 품사나 성性, 수數, 격格, 시제가 없으며, 한자를 엮어놓은 한문에는 문법이 없다. 한문의 의미를 해독하는 단서는 고전에서의 용례밖에 없다. 그래서 한자의 사용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고전 텍스트를 통째로 암기해야만 한다. 여기에 더하여, 한인漢人이 말하는 언어는 지역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정도 있다. 결국 중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언어[漢語]와 쓰는 언어[漢文] 사이의 이러한 단절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5-6)


"『사기』는 중국에서 쓰인 최초의 '정사正史'로 그 체제와 내용은 후세 중국인의 역사의식과 중국에 대한 의식을 결정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천하'라고 부르는 지역은 자신이 섬겼던 한漢 무제武帝의 지배가 미쳤던 범위를 가리키는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는 중국과 동의어가 된다. 게다가 사마천이 황제黃帝의 업적으로서 서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현실의 무제의 업적과 겹친다." "신화 속 황제와 현실의 무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정통'이라는 관념이다. 사마천이 그것을 채택하고 있는 까닭에 '정통'은 중국 문명 역사관의 근본이 되었다. 중국 문명 역사관은 '정통'의 역사관이다. '정통'의 역사관이란, 어떤 시대의 '천하天下'(지금으로 말하면 중국)든지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황제)가 분명히 한 명이어서 그 천자만이 천하를 통치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통'은 오제의 시대에서는 선양禪讓, 즉 어진 천자에서 다시 어진 천자로 물려주는 방식을 통해 이어졌다."(17-8)


"『사기』에서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가 다루는 시대가 되면 제위는 방벌放伐, 즉 추방이나 정벌을 통해 손에 넣는 것으로, 이긴 쪽에게는 천명이 부여되고, 패한 쪽에게서 천명이 제거된다. 이것이 본래 의미에서의 '혁명革命'으로, '혁革'은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이때부터 '천자'는 하늘이 혁명을 명하는 자, 즉 새로운 천명을 받은 군주가 '정통'의 천자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이 하夏에서 은殷으로, 은에서 주周로, 주에서 진秦으로 거듭하여 교체되어, 마지막으로 사마천이 섬기는 한 무제가 천명을 넘겨받은 '정통'의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쓰고 있는 것은 '정통' 황제의 역사인 것이다. 세계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이라는 관념이나 중국민족이라는 관념도, 사마천의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19~20세기 국민국가 시대의 산물이다."(18)


제1장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역사의 창조


# 『사기』의 구성

1. 「본기本紀」 : 황제나 왕의 재위 중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 기술

2. 「표表」 : 정치세력의 흥망과 교체의 시간적인 관계

3. 「서書」 : 제도, 학술, 경제 등 문명의 여러 측면 개괄

4. 「세가世家」 : 진 시황제 통일 이전에 있었던 지방 왕가와 통일 이후 지방에 세웠던 역대 제후들의 행적

5. 「열전列傳」 : 저명한 인사의 행적


"『사기』가 하夏, 은殷, 주周를 진 시황제나 한 무제 등과 나란히 「본기」에 싣고 있는 까닭은 '정통正統'이라는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정통'(중국세계의 통치권)이 천하 어느 곳에서나 늘 존재하고 그것이 오제에서 하로, 하에서 은으로, 은에서 주로, 주에서 진으로, 진에서 한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정통'을 이어받는 왕조만이 '전통傳統'이 될 수 있다. '전통'을 이어받는 절차는 세습이 원칙이다. 오제五帝는 황제와 그의 자손이며, 요는 순에게로 순은 우에게로, '선양禪讓'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력으로 하를 무너뜨린 은의 탕왕과 은을 무너뜨린 주의 무왕이 어떻게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조의 '덕德'(힘)이 쇠퇴하면 '천天'이 그 '명命'을 거두어들여('혁명革命') 새로운 왕조가 '천명'을 받게 되는 ('수명受命') 식으로 '정통'이 옮겨진다고 설명된다."(52-3)


제2장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단대사斷代史의 출현


"『사기』가 다루는 시대 범위는 오제五帝에서 시작하여 하, 은, 주, 진 왕조를 거쳐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치세의 중반까지이다. 이처럼 여러 왕조에 걸쳐 있는 체제의 역사서를 후세 중국사학사에서는 '통사通史'라 부른다. 반면 하나의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를 '단대사斷代史'라 부른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고 약 180년이 지난 뒤에 반고班固(32~92년)가 『한서』 100편을 저술했다. 『한서』는 『사기』와 다르게 '단대사' 체제를 취해 서기전 206년 한 고조의 즉위에서 시작하여 한의 찬탈자 왕망王莽이 서기 23년에 멸망하기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한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인 것이다. 『한서』 이후의 '정사'는 모두 '단대사'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서』를 보면 고조에서 무제까지의 부분은 『사기』를 그대로 본뜬 데 불과한데, 반고가 왜 『사기』처럼 '통사'가 아닌 '단대사' 체제를 취했는가가 문제로 남는다."(60)


"한漢 황실의 외척으로 왕망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반고는 왕망을 매우 존경하였다. 유교가 반고가 살았던 후한 초창기의 통치원리가 되었던 것은 왕망의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망의 행적만을 기술하는 것으로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왕망은 한 왕조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러한 전후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한 황실의 일대기를 기술해야만 하는 것이다. 앞서 사마천의 『사기』가 있어서 역사는 '기전체紀傳體'로 쓰는 것이 통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기』의 속편이라면 몰라도 이래서는 한 무제의 치세 중반부터 시작하게 되어 역사의 서술 체계를 잡을 수가 없다. 매듭을 짓고 역사를 새롭게 기술하기 좋은 때는 한 왕조 초대 황제인 고조 유방劉邦부터이다. 그러므로 『한서』가 취한 '단대사'라는 체제는 왕망의 공적을 기술하기 위해 형편상 채택한 것이지 처음부터 '단대사'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81-2)


제3장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정통'의 분열


"중국 문명에서 역사가 '정통正統' 황제가 지배한 변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서술이라는 점은 그로부터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세계의 현실에서는 '정사正史'가 표현하는 중국인의 역사관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변화가 진행되었다. '정사正史'의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들어맞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사기』와 『한서』를 통해 확정된 구조를 대체할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漢代에 만들어진 구조의 범위 안에서만 역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게 되었다." "『삼국지』가 서술하는 대상이 세 제국이니 그 체제가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吳書」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실 황제皇帝를 다루는 「본기本紀」를 수록하고 있는 것은 「위서」뿐으로 「촉서」의 유비나 「오서」의 손권에 관한 행적은 모두 「열전列傳」으로 기술되어 있다."(93-4)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장화張華의 비호庇護를 받았던 인물이다. 장화는 문벌門閥 출신이 아닌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사마소의 휘하에 들어갔고 마침내 진무제와 혜제의 측근으로까지 성장했다. 진수로서는 장화가 꺼릴 만한 얘기는 쓰지 않으려 했을 것이 당연하니 사마소의 부친인 사마의에게 불리한 내용은 가급적 생략하고 유리한 내용은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인지 『삼국지』는 정사正史 중에서도 그 서술이 간략하기로 유명한데 이를테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대개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당대의 역사를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폐해는 진수가 죽은 지 150년 정도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년)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다량의 사료를 인용함으로써 사실을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99-100)


제4장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중화사상의 억지


"수당隋唐 시대의 황실은 모두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와 함께 일어났다. 우문태는 선비인이었는데 534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서위의 문제文帝를 지지하여 장안長安에서 독립하였고 동위東魏 고환高歡(역시 선비계)과 대립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정사正史'로서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을 한데 묶어서 『남사南史』를,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를 한데 묶어서 『북사北史』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복수의 「본기本紀」가 있어서 각각의 국가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두 계열의 황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천명天命'이나 '정통正統'이 두 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비계가 세운 왕조를 북조를 계승한 당나라의 정치적 입장에서 본다면 북조 역시 '정통'이라 주장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나라와 그 이후 시대가 되면 '정사正史' 체제를 따라 역사를 충실하게 서술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 간다."(110-2)


"1004년 거란의 성종聖宗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북송을 침입하여 전주(하남성 북쪽의 복양현)에서 북송의 진종眞宗과 대치하였다. 여기서 진종이 거란의 황태후를 자신의 숙모로 대하면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바치겠다고 약조함으로써 거란과 북송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를 '전연의 맹약'이라 부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화의조건은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그리 문제될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정통'의 역사관에서 본다면, 북송으로서는 두 명의 황제가 병존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북송의 황제는 천하의 통치권을 가진 유일한 '정통' 황제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송에게는 굴욕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북방에서 대두한 유목민족제국을 가리켜 문화는 없고 무력만 강한 '이적夷狄'이라 멸시하는 식으로 울분을 토하였다. 바로 이것이 '중화사상'의 기원이다."(120-1)


"『자치통감』의 중화사상은 무엇보다도 남북조 시대를 다루는 태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치통감』은 진 시황제 이전인 서기전 403년에서 시작하여 북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해인 959년까지 약 1,362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여 기록한 역사서이다. 그런데 남북조 시대를 다루면서는 남조의 연호만을 표기하고 북조의 연호는 표기하지 않고 있으며, 동진東晉,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 남조에 속하는 황제들은 '황제'라 부르는 반면에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북조의 황제들은 '위주魏主' '제주齊主', '주주周主'라 부르고 있다." "『자치통감』의 이러한 태도에는 북송과 대립하고 있던 거란제국, 즉 요遼나라를 북조北朝로 상정함으로 해서 요나라 황제는 '정통' 아니며 따라서 천하를 지배하는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한 가짜 황제라는 것을 멀리 돌아서 주장하고픈 심정이 숨겨져 있다."(122-4)


제5장 송렴宋濂 등의 『원사元史』─진실을 은폐하는 악폐惡弊


"원元나라에서 편찬한 『송사宋史』는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모두를 '정통'으로 대우하고 있다. 그런데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서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황제들 역시 「본기」를 편찬하여 '정통'으로 취급하고 있다. 천하가 다시 한 번 둘로 갈라졌으며 그에 따라 '정통'도 둘이라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중국의 바깥을 지배했던 요나라의 지배권을 이어받아 중국의 북반부를 지배한 국가가 금나라이며, 금나라와 동맹부족이었던 몽골 부족에서 칭기즈 칸이 출현하여 금나라의 황제로부터 독립하였고 그가 건국한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남송까지도 멸망시켜 전 중국을 정복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금나라 그리고 원나라는 독자적인 일련의 '정통' 계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요나라의 황제나 금나라의 황제 모두 '정통'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원나라는 '정통'이 아닌 왕조가 되고 만다."(135)


"그러나 명나라의 시대가 되었어도 중국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방식은 전과 변함없이 『사기』와 『한서』의 틀을 답습하였다. 명나라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가 지시하여 1370년에 완성을 본, 송렴宋濂(1310~1381년) 등이 편찬한 『원사元史』 210권은, 물론 몽골인이 남겨놓은 사료를 활용하여 편찬한 것이기는 하나 그 체제는 이전의 정사正史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어서 역사 서술의 대상도 정사가 간주하는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138) "그렇기 때문에 정사의 전통에 따라 교육 받은 중국인이 『원사』를 읽게 되면, 원나라를 유목민이 중국에 들어와서 만들어놓은 중국식 왕조로 오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실제로 원나라는 온전한 유목제국이었으며, 중국식의 요소는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한자로 명기되어 있는 관직명을 사용했다는 것뿐이다." "결국 변하지 않은 것은 '정사'의 서술형식일 뿐이지 중국의 현실 상황은 시대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거듭했다."(143-4)


제6장 기운사祁韻士의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역사에 대한 새로운 도전


"청나라가 멸망한 지 2년 뒤인 1914년에 총 68명의 학자들이 『청사淸史』 편찬에 투입되었으나,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여 관련 업무가 정체되어 있는 데다가 편찬관도 점차 줄어듦에 따라 청사관에 남아 있던 이들도 마음 놓고 편찬에 전념하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에 겨우 원고가 대강이나마 갖추어져서 『청사고淸史稿』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150) "그런데 『청사고』에는 『명사明史』까지의 ‘정사’에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번부세표藩部世表」나 「번부열전藩部列傳」이 대표적이다. 청나라에서 '번부'란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를 뜻하면서 청나라가 간접 통치하는 중국 이외의 주민을 가리킨다. 몽골의 호르친Qorchin 부에서 티베트까지를 아우르는 각 부의 역사를 기재해놓는 것은 이제까지의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까닭은 건륭제乾隆帝 시대인 1789년에 만주어에 능통한 한인 기운사가 편찬한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120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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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역사가들 - 서양사 연구를 위한 입문
마크 길더러스 지음, 강유원, 이재만 옮김 / 이론과실천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서문


1장 역사 연구의 목적과 의도


"지식체계로서의 역사학은 서구 문명에서 장구하고 영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강조점이 때때로 변해왔지만, 쓰여진 서사는 언제나 인간사에 집중했고 진실을 내세웠다. 역사가들이 진실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들의 서술이 타당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증거의 형태로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현대 미합중국 역사가 폴 콘킨은 간결한 정의를 제시했다. 역사란 〈인간의 과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다.〉 여기서는 〈진실한〉과 〈인간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역사를 전설, 우화, 그리고 신화와 구별하는 것은 진실의 질이며, 전설, 우화, 신화는 분명 어떤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대개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지 못하다. 역사가는 인간의 과거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주로 자연의 사건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만 주목한다. 예를 들어 화산 폭발의 경우 주로 폼페이 같은 도시들을 묻어버렸을 때 주목을 받았다."(17-8)


"철학자 칼 포퍼는 문제의 다른 측면을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사회과학자와 역사가가 의도적인 인간 활동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고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때로는 상황이 나빠진다. 역사적 행위자는 일련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뜻밖이거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포퍼는 인간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도와 결과 사이의 연계를 탐구하길 바랐다. 유럽을 정복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봉건적 구조를 무너뜨려 근대화를 위한 길을 닦았다. 미합중국은 남베트남의 자결권을 보호하려고 군사력을 동원했을 터이지만, 오히려 그 작은 나라의 소멸을 앞당기고 말았다.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희극적인 그러한 아이러니는 인간의 경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원대한 의도는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아주 흔하므로 그것을 추구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목적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보다 잘 추정할 수 있다면 더욱 건설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24)


# 역사적 탐구의 3단계 모델

1.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적 행위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탐구를 시작한다.

2. 〈왜?〉라는 질문을 던져 행위자들의 행동을 해명한다. 여기서 인간 활동에 대한 역사가들의 설명이나 해석이 제시된다.

3. 〈사태의 결과는 어떻게 판명되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고 누가 고통을 얻었는가? 그 결과는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사건의 결과를 평가한다.


2장 역사의식의 등장


"어떤 고대인들은 기록을 전혀 보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반면 이집트인, 수메르인, 아시리아인, 히타이트인은 서기전 3천~2천 년부터 쓰여진 유물을 남겼다. 그중 다수는 위대한 인물들의 위업을 자세히 기록한 목록과 비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기록들은 연대기에 대한 감각과 같은 원초적 역사의식의 등장은 입증했지만, 약간의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친다." "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고대인들보다 역사를 중시했다. 실제로 그들에게 역사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었고, 그들은 역사를 이해하여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정립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유대인들은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신 야훼와 특수한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유대인의 역사 저술은 비판적 혹은 이성적 탐구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종교적 경험과 신앙의 산물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굳건한 신념에 따라 해석했다."(33-5)


"희랍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시간 차원은 순환적 사고방식이었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같은 호메로스의 시는 웅장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과거의 영웅적·서사시적 이야기를 말했고, 희랍인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역사가 아니었고, 흔히 초자연적 힘이 사건의 진행을 좌우하는 전설, 신화, 우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 정신과 무관해 보이던) 희랍인들은 역사적 사유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방법으로 비판적 역사를 발명했다. 고대 희랍어 '히스토르(histor)'는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학식을 갖춘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사실을 조사했고, 탐구를 통해 그 정확성을 판별했다. 그랜트는 '히스토리에(historie)'가 〈이성적 설명을 위한 조사와 현상에 대한 이해〉를 의미했다고 설명한다. 서기전 5세기에 두 천재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이성적 기법을 사용하고 역사 저술을 창시하여 지적 혁명을 일으켰다."(36-5)


"희랍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로마인들 역시 통치 엘리트의 정치적·군사적 활동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희랍인들과 달리 공평성과 객관성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진지한 도덕주의자인 그들은 판단을 내리고 자신들이 보기에 타락한 것 혹은 모범적인 것을 묘사하는 편을 선호했다." "로마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정치적·군사적 주제에 관해 몇 권을 저술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로마제국 연대기》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위에 오른 서기 14년부터 네로 황제가 죽은 직후인 68년에 이르는 제국의 일들을 기술했다. 서기 2세기 초에 쓰여진 이 책은 로마 통치자들의 개성뿐 아니라 그들의 부패와 타락도 생생히 묘사했다. 전형적인 로마 역사가들처럼 한때 관리였던 타키투스는 공적인 덕을 칭찬하고 부도덕과 악행, 특히 황제들의 무절제와 그들을 둘러싼 이기적인 파벌을 비난했다. 그는 냉소적 아이러니와 깊은 비관론을 품은 채 그들을 책망하곤 했다."(41-3)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을 체계 원리로 정립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역사철학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유대인의 개념에서 유래한 그의 시간감각은 희랍의 원운동 관념을 명백히 거부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끝없는 회전과 덧없는 반복은 사실상 신의 영향력과 의도를 수포로 돌려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천지창조라는 분명한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 선을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은 중심적 사건을 나타냈고, 시간의 종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자의 구원은 과정의 완성을 의미했다. 인간의 도시에 대한 신의 도시의 최후의 승리는 마지막 목적의 달성, 곧 신자들이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두 도시와 선을 따라 움직이는 사건들이 특징인 그 도식은 중세 전체와 그 이후에 기독교 저술가들을 강하게 자극했다."(46-7)


"중세 동안 역사적 주제를 다룬 저술가들은 1천 년 이상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업했다." "중세 저술가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유일신은 논란의 여지 없이 인류 위에 위치하고 있었고, 사건들의 행로를 관찰했으며, 정기적으로 신성한 개입을 통해 그 사건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그러한 신앙의 표현은 인간 행위에 대한 논의와 현상에 대한 분석에 영향을 미쳤다. 연표와 연대기의 편자들은 종교를 인류의 궁극적인 관심사로 보았고, 역사는 목적론적인 설계에 따라 신이 미리 정한 결론을 향해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한 성향은 인간 경험을 도덕주의적으로 심사하는 경향을 낳았다. 중세의 저술은 흔히 평결과 판결을 내렸고, 그리하여 그 객관성과 진실성에 관한 현재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학자들은 객관성과 진실성이라는 쟁점을 근대적인 것으로 인정해왔다. 대다수 중세 연대기는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려는 의도였다."(48-50)


3장 근대의 역사의식


"중세 역사 서술과의 임박한 결별에 대한 최초의 암시들 중 하나는 14세기 르네상스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났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평생 고대 로마 전통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페트라르카는 (비록 기독교의 권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로마를 조사하여 인간 존재와 그 세계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내세웠으니,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실제 사건들은 단지 상징적 중요성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분투와 성취가 실재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16세기에 또 다른 피렌체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대한 저술을 통해 역사에서의 인간적 차원에 주의를 집중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역사란 자신의 처세술을 조명하기 위한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역사》에서 자신의 도시에서 벌어진, 정치의 특징인 음모와 책략을 상세히 다루었고, 인간의 행위를 기회주의와 자기강화에 의해 동기화되는 것으로 묘사했다."(60-2)


# 르네상스 역사가들의 결함 : 역사적 유물을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고, 고대인들을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들을 숭배하고 모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16~17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과 잇따른 종교적·정치적 격변은 적대하는 파벌들이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당파들이 논쟁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적대하는 세력들은 현재 자신의 입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측면에서 과거를 끌어들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의 통제가 초기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믿음과 실천의 순수성을 타락시켰다고 역설하며 적들을 공격했다." "일련의 논쟁은 기독교세계 전체를 갈라놓았고, 유럽 대학들에서 최초로 역사학 교수직이 마련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혁신은 장기적으로 보면 전문적 역사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획일적인 기독교적 역사 해석을 분열시키고, 역사에 대한 신성한 이해와 세속적 이해 사이의 간극을 벌렸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결과 보편사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던 합의가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롭고 통합적인 접근법은 곧장 등장하지 않았다."(64-5)


"17세기의 위대한 과학혁명은, 과거에 대한 신뢰할 만하고 정확한 서술을 고안하는 문제를 뒤흔드는, 또 다른 질문들을 제기했다. 뉴턴, 케플러, 갈릴레오의 발견에 이어진 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지식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역사처럼 부정확한 탐구 분야에서 입증 가능한 지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이 판단하기에) 역사가들이 수학적 이상에 부합하는 형태로 지식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들은 〈혼란스러운 지각에 대한, 해롭지는 않으나 부적절한 향락〉에 빠진 것이거나 심지어는 〈진리에 이르는 길에서 위험한 오류〉를 시작한 것이었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은 역사가들에게 지난 4세기 동안 가장 중요했던 인식론적 쟁점 가운데 하나를, 특히 자연과학이 인간사에 대한 연구에서 어느 정도로 지식과 이해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만 하는가라는 쟁점을 제기했다."(66-7)


"계몽주의 시대는 소나기를 퍼붓듯 역사 저술을 생산했고, 동시에 역사적 사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 유럽 철학자들은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신이 아닌 이성이 인간의 행위를 안내할 것이었다. 계몽주의 운동은, 일종의 필연적 결과로서, 전통적 종교의 권위에 대한 반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선의 역사가들─볼테르, 데이비드 흄,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은 종교를 인간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하여 종교의 역할을 비하했다. 볼테르는 성직자 계급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거대한 사기꾼이었다고 보았다. 실로 그들은 편협함, 불관용, 억압의 납품업자 역할을 했다. 인민을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계몽주의 역사가들에게 합리성과 해방을 향한 인간의 진보를 알리는 이정표였다."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열망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로의 일탈을 탈선이나 어리석은 시도로 여겼다."(70-1)


"비코는 지나치게 과장된 자연과학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서 〈새로운 학문〉을 내놓았다." "비코가 보기에 역사 연구의 적절한 수단은 철학에서, 곧 공리, 정의, 그리고 가설을 세우고 그로부터 추론하는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또한 그가 언어, 역사 문학에 대한 경험적 연구라고 여겼던 문헌학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비코는 말, 전승, 이야기, 신화, 전설, 그리고 법률 체계의 뿌리를 중요한 실마리로 여겨 면밀히 조사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지상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무지와 미신을 의미했다. 반면 비코가 보기에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관해, 그리고 우주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탐구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코는 맥락과 자기인식을 강조함으로써 19세기를 사로잡을 '역사주의'의 선구적 모형을 내놓았다."(78-9)


# 19세기 역사학의 갈래

1.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중에 생겨난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접근법(쥘 미슐레, 프랑수아 기조)

2.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며 역사의 흐름을 추상적·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헤르더, 칸트, 헤겔)

3. 기록 연구에 기초한 탐구를 통해 실제 일어난 일을 밝히고자 했던 전문 역사학(역사주의 학파, 랑케)


"헤겔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헤르더의 전체론적 개념, 곧 각 단계는 뒤따르는 모든 단계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통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지했다. 헤겔이 보기에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는 과거를 왜곡하고 진정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었다. 그는 역사가들이 지나간 시기와 시대를 그 자체의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헤겔의 방법론적 조언을 받아들인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 학파는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지적하였고, 서로 다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이 과거를 이해하려면 과거 행위자들의 정신 세계에 공감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의 현실상(像)을 재구축해야만 했다." "이러한 방법론을 실천했던 일선의 연구자들 가운데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 분과로, 전문적인 학문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86-7)


4장 역사철학 : 사변적 접근


"(칸트와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사변적 역사철학은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인 그 장대한 목적 때문에 20세기 들어 호소력을 일부 상실한 낡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점점 더 적은 것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안다〉는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고도로 전문화된 탐구를 수행하는 시대에 빈틈없는 관찰자들은 인간의 과거 전체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신념이 거의 없었다." "많은 학자들이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렸지만, 사변적 역사의 오래된 형태들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들은 어느 정도 변화된 형태로 살아남곤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념과 융합했고, 세계 각지에서 지적이고 혁명적인 호소력을 유지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아널드 토인비는 보편적·철학적 역사를 구성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사변적 저술체계를 내놓았고, 라인홀트 니부어 같은 종교 사상가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에 대한 접근법을 사용했다."(108)


# 마르크스 이후의 사변철학

1. 마르크스-레닌주의 :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들은 잉여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는 제국주의 국가들로서, 이들이 벌이는 만성적인 투쟁은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지속된다.

2. 종속이론 :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유의 변종으로서,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선진세계로 부를 유출하도록 설계된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빈곤과 저개발의 원인이다.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문화를 생물학적 세계의 유기체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문화가 탄생기-청년기-성숙기-노년기-죽음의 단계를 거친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부활시켰다.

4. 토인비의 〈역사 연구〉 : 각지의 문명들은 주어진 환경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노력에 따라 형태를 갖추었으며, 한 문명은 잇따르는 도전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때 성장해나간다.

5. 프로이트 : 개인들의 정신분석에서 발견한 통찰력을 더 큰 인간 영역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인간 본성과 문화적 발전 그리고 원초적 경험의 침전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6. 라인홀트 니부어 : 인간의 자유와 힘의 증대는 〈이기적인 욕망과 충동〉을 표출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을 뿐이며,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신의 주권이 인간 경험 전체를 주재한다.


5장 역사철학 : 분석적 접근


"(과학적 역사와 전통적 역사 간의) 논쟁은 19세기 중반 실증주의의 도래와 함께 특히 두드러졌다. 주로 프랑스인 오귀스트 콩트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뒤이어 두 영국인 헨리 토머스 버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받아들여 정교하게 가다듬은 이 사상체계는, 자연과학의 기법을 지지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연구를 보다 체계적인 종류의 탐구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독특하거나 개별적인 사건보다는 인간사의 궤적에서 나타나는 균일성과 유사성에 주의를 집중했고, 곧이어 같은 종류의 경험들을 연결하고 있는 불변의 관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기보다는 혁명의 현상들을 조사하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자연 세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결과들을 지배하는 일반법칙들을 가정했고, 그것들을 발견할 만한 지적 역량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132)


"콩트, 버클, 그리고 밀이 선언한 실증주의 철학은 격렬한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비판가들은 대개 〈관념론자〉라고 불렸는데, 이 학파는 독일인 빌헬름 딜타이, 이탈리아인 베네데토 크로체, 그리고 잉글랜드인 로빈 콜링우드로부터 나왔다. 그들 모두는 자연과학에서 이끌어낸 유추는 유효하지 않으며 복잡한 역사 저술에는 매우 다른 개념적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에 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정신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였다. 각각은 그 실천에 있어 확연히 다른 방법론을 필요로 했다. 딜타이에 따르면 자연과학자는 자연 내의 규칙성과 균일성을 다루는 반면, 역사가는 자연 밖의 독특하고 특정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루었다." "크로체는 역사가들이 과거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재사유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말했다. 콜링우드는 역사 연구의 대상은 (중층적인) 인간 정신의 활동이며, 역사가들은 정신의 작용을 연구함으로써 정신에 관해 배운다고 주장했다."(136-7)


"미합중국 역사가 칼 베커가 말했듯이, 〈실제 과거는 지나가버렸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재창조된 역사의 세계는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자연과학의 많은 형식들과는 달리, 역사가들이 실제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역사가들은 과거의 유물들을 이용해서 역사를 재구축하며, 언제나 관점의 제한을 받는 가능성(확실성이 아니라)에 대한 진술을 사용한다. 역사적 서사는 시각 혹은 관점을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시각이나 관점이 없다면 역사적 유물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 서사는 일관되게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들이 항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은 옳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반드시 지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거나 오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견해는 다른 견해들을 풍요롭게 있게 만들 것이며, 이론적으로 볼 때 역사가들이 과거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이야기들의 수는 무한하다."(150)


6장 최근의 전문적 역사학


# 역사방법론의 분화

1. 경제사 : 산업화가 가져온 극적인 변화에 주목한 역사가들은 생산 체계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벌이는 경제적 투쟁과 이익 추구를 분석하면서 수량화와 사회과학 방법론을 활용했다.

2. (새로운) 사회사 : 노동자, 농민, 인종, 여성 등의 범주에 속하는, 역사적 서사에서 완전히 익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도 않았던 이들의 역사적 행위에 초점에 맞추었다.

3. 비서구사 : 여타 지역에 대해 우위를 점한 서구 중심의 보편사 혹은 세계사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사 개념들, 세계체제 분석, 탈식민지 연구, 서발턴 연구 등이 행해졌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 가운데 비판적 사상가들은, 경제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순진한 변종들을 거부했으며, 인간 행위를 형성하는 영향력들의 다양성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역설했다. 예를 들어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과 융합된 형태를 찾았다." "프랑스 학자들 역시 인간의 과거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형태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마르크 블로흐와 뤼시앙 페브르가 창간한 영향력 있는 저널 〈경제사회사 연보〉를 중심으로 아날 학파를 구성한 역사가들은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역사의 흐름에 반대했다. 아날 집단은 페브르가 '사건사' 또는 '사건지향적 역사'라고 폄하한 정치, 전쟁, 외교에 국한된 강조를 거부했으며, 인간 실재의 많은 차원들을 보다 완전하게 파악하려 애썼다. 역사서술가 에른스트 브라이자흐가 설명했듯이, 이 프랑스 학자들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새롭고 보다 완전한 역사를 구상했다."(171-2)


"아날 학파의 저작에서는 두 가지 특성이 두드러진다. 첫째, 아날 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집단의식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심성구조〉라 이름 붙은 이 현상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인간집단의 정신적·심리적 특성에 주의를 집중했으며 그럼으로써 개인들에 대한 제한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심 너머로 역사가들을 이끌었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집단성은 총체적 역사로 이어지는 설명을 정식화하는 데 거의 모든 것을 포함시켰다. 둘째, 앞의 경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날 역사가들은 장기지속 개념을 사용했다. 실제로 시간 개념인 이 술어는 역사적 변화의 행로에 개입하는 구조적 연속성을 가리켰다. 장기지속은 무엇보다 토지, 바다, 기후, 그리고 식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조건들은 인간사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냈으며 정치, 전쟁, 외교와 관련된 일시적 사건들보다 더 느린 속도와 리듬에 주목하게 했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삶의 방식을 결정했다."(173)


"여러 종류의 특이성과 다양성이 오늘날 역사학의 기예를 특징짓고 있지만, 한 가지는 어느 정도 분명한 듯하다. 역사학은 더 이상 모든 독자의 정체성과 경험을 대변하는 공통의 이야기를 내놓지 않는다. 역사를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백인 남성 엘리트들의 활동에 집중하는 서사들은 더 이상 만족이나 자극, 또는 진실에 도달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과거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주의를 끌려고 경쟁하는 엘리트와 비엘리트,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중 하나만 강조하는 다수의 관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차이를 조화시킬 만한 뾰족한 방편은 없는 실정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그러한 차이와 비일관성이 끔찍한 난관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한 조건은 세계의 혼란과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196)


7장 문화전쟁, 포스트모더니즘, 그 밖에 다른 쟁점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이성, 객관성, 그리고 진보의 가능성에 관한 계몽주의적 관념들이 전혀 타당하지 않다면,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분과에서 진실을 확증하는 부분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달갑지 않은 전망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고도로 회의적인 형태의 철학 사상, 언어학, 그리고 문학 비평에서 흘러나왔다. 대체로 이 도전은 서구의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나타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권력과 권위의 이용과 남용에 대한 전형적인 정당화로 인식했다. 포스트모던적 반대자들에게는 객관성이라는 관념 그 자체가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관찰자도 편견, 선입견, 이기심, 개인적 선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무언가에 관해 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역사 속의 객관성이라는 관념은 두 배로 못마땅한 것이 되었는데, 객관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라 부르는 것은 순전히 상상력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213-4)


"프리드리히 니체는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한 서술이 역사가의 당파성 및 성향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사학을 지식의 형태라는 지위에서 내쫓았다. 20세기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의 과학적 합리성이 신화적 사유 형태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가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긴 하나 현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복잡한 분석을 전개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폴 드 만, 롤랑 바르트, 그리고 헤이든 화이트의 뒤이은 정교화 작업에서 언어 개념은 언어 그 자체를 가리킬 뿐 외부의 그 무엇도 가리키지 않는, 기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자기 충족적 체계로 등장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역사가는 언제나 자신이 사유하는 세계 안에 갇힌 죄수이며, 역사가의 사상과 인식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범주들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모든 역사적 작업은 문학 비평의 범주들에 의해 판단되어야만 하는 문학 작업〉이 된다."(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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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엘리트 정치 -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조영남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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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엘리트 정치인가?


"중국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통치 엘리트라고 할 때는 공산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의 구성원인 중앙위원을 가리킨다. 개혁기에 중앙위원은 약 200인의 정(正)위원과 약 150인의 후보 위원(투표권 없음)을 합쳐 350인 전후다. 여기에는 공산당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인민해방군의 지도부가 포함된다. 또한 지방 31개 성급(省級) 단위의 당서기 및 성장·시장·주석, 중요한 인민 단체의 지도자, 중앙 소속 일부 국유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도 포함된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정치국 같은 다른 권력 기구, 혁명 원로의 비공식 모임, 혹은 중앙 공작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을 사후에 추인하는 역할에 머무는 일이 많다. 따라서 중앙위원회에 초점을 낮추어 분석할 경우에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엘리트 정치를 파악할 수 없다." 즉, 중국 엘리트 정치의 중심은 중앙 정치국(政治局, Politburo)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핵심이다.(19-20)


# 중앙 정치국 구성 인물들

1.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혹은 총서기 : 마오 주석과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총서기(1982년에 당 주석 폐지)를 가리킨다.

2. 정치국 상무위원회 : 공산당 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전국정협, 중앙 기율검사위원회(중앙기위) 등 '5대 권력 기구'의 현직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다.

3. 중앙 서기처(書記處) :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 기구로서, 공산당 중앙 판공청 주임, 조직부 부장, 선전부 부장, 통일전선부(통전부) 부장, 정법위원회 서기 등으로 구성되며, 서기처의 실질적 책임자인 상무 서기는 총서기의 후계자가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4. 중앙 군사위원회(중앙군위) : 인민해방군을 지도하는 군 지도자 중에서 두 명이 정치국원으로 선발된다. 중앙군위 주석은 공산당 총서기가 겸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유일한 예외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총서기 시절 덩샤오핑이 중앙군위 주석을 계속 유지한 경우다).

5. 지방 당서기 : 4대 직할시(베이징, 톈진, 상하이, 충칭)와 중요 성급 단위(성과 자치구)의 당서기들이 정치국 구성원에 포함된다. 4대 직할시는 고정이며 나머지 성과 자치구는 바뀔 수 있다.


# 중국 엘리트 정치의 유형

1. 일인지배(마오쩌둥) : 당 주석이나 총서기 개인이 정책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을 독점 행사한다.

2. 원로지배(덩샤오핑) : 혁명 원로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위의 권한을 행사한다. 원로지배는 혁명 원로가 주도하는 비공식 정치가 (공식 정치에 앞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이중 정치 구조’라는 점에서 집단지도와 다르다.

3. 집단지도(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이 위의 권한을 집단적, 공식적으로 행사한다.


"새롭게 선임된 총서기는 먼저 주어진 인사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파 세력을 권력 기관의 요직에 앉힌다. 장쩌민의 상하이방(上海幇), 후진타오의 공청단파(共靑團派), 시진핑의 '시진핑 세력' 등 다양한 파벌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이들은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反腐敗, anti-corruption)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경쟁 세력이나 반대파를 굴복시킨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이 집권하자마자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한 것은 권력 공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총서기는 여세를 몰아 자신의 통치 이념을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한다.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일명 '시진핑 사상')은 이렇게 해서 지도 이념이 되었다."(29-30)


"과두제의 딜레마로 인해 과두제가 일인지배로 변질되는 과정, 다시 말해 최고 지도자(소련의 경우 공산당 서기장)가 권력을 축적하여 과두제가 붕괴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 권력의 순환 이론(circular flow of power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공산당 서기장은 정책 집행의 권한을 갖고 있고, 이를 이용하여 지방 당서기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방 당서기는 서기장을 지지하는 사람을 당대회 대표로 선출하고, 당대회 대표는 다시 서기장을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출한다. 이 위원들이 서기장의 뜻에 따라 정치국원과 서기국 서기를 선출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기장의 권한은 강화되고, 과두제는 일인지배로 변질된다." "다만 중국의 총서기는 소련의 서기장과는 달리 집단지도를 붕괴시킬 정도로까지 권력을 축적하지는 못했기에 중국의 엘리트 정치는 지금까지 집단지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49-50)


1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의 엘리트 정치


"마오쩌둥 시대(1949~1976)의 엘리트 정치는 마오의 일인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먼저, 마오는 통치 기간 내내 최고 지도자로서 정책 결정, 인사 선임, 후계자 지명, 군대 동원과 관련된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중요한 회의를 소집하여 공산당의 노선이나 방침을 결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었다. 또한 후계자를 자기 마음대로 선정하거나 취소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오는 평생 동안 그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압도적 지위(predominant status)'를 누린 최고 지도자였다. 그러나 '압도적 지위'에 있었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항상 독재자로 군림했던 것은 아니다. 1949년 중국 건국부터 1958년 대약진운동 추진 전까지 마오는 동료들과 협의하여 주요 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반면 1958년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는 독재자처럼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63-4)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특징

1. 카리스마적 권위와 권력(정책 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 독점

2.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공산당 위에 군림하는 '사회주의 황제' 양상

3. 개인숭배가 일상화되면서 동료 지도자들과 주종 관계 형성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시기별 과정

1. 권위의 확립(1935~1948) : 중국 건국 직전까지의 시기로 마오를 정점으로 뭉친 혁명 세력이 엘리트 정치를 행사하는 '옌안 체제'가 성립된다.

2. 협의적 권력 운영(1949~1956) : 건국부터 공산당 8차 당대회까지의 시기로, 마오가 자신의 '압도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협의적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3. 일인지배의 발전(1957~1965) : 대약진운동 시기부터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시기로 1-2선 체제의 수정주의적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은 마오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면서 '독재 방식'이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1-2선 체제 : 공산당을 총괄하면서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류사오치의 1선과 국가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는 마오쩌둥의 2선으로 구성된 체제

4. 일인지배의 비극(1966~1976) :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마오 사망까지의 시기로 마오의 일인지배가 극단화되었고, 중국이 전체주의 체제로 전락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원로들은 1978년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회의(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마오쩌둥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계속혁명' 노선, 일명 문화대혁명(1966~1976) 노선을 과감히 폐기했다. 대신 공산당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새로운 당 노선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공산당은 ‘개혁 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유화(私有化, privatization), 시장화(市場化, marketization), 개방화(開放化, opening-up), 분권화(分權化, decentralization)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덩샤오핑 시대에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국을 주도했던 혁명 원로들이 엘리트 정치를 주도하는 원로지배(gerontocracy)가 나타났다. 이는 마오쩌둥의 일인지배를 벗어난 과도기의 엘리트 정치체제로, 장쩌민 시기에 들어 집단지도가 등장하면서 소멸했다."(237-8)


"이중 정치 구조에서는 공식 정치의 구성원, 즉 총서기,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원, 서기처 서기가 원로 정치의 결정에 의해 언제든지 임명되거나 파면될 수 있었다. 만약 공식 정치의 구성원이 원로 정치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로들의 결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고 원로들이 판단할 때, 원로 정치는 공식 정치를 개편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은 이런 이중 정치 구조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이들은 이중 정치 구조의 희생물이었다." "이중 정치 구조의 문제점은 집단지도가 수립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장쩌민 시기에 시작되어 후진타오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원로 정치의 종결이었다. 원로 정치는 개인적 명성과 인맥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가진 혁명 원로들이 주도한 것으로, 원로들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끝날 수 있었다."(251-2)


2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1 : 집단지도와 권력 운영


# 이중 정치 구조의 운영 사례

1. 후야오방의 실각(1986~1987) : 아직 공식 지위를 갖고 있던 혁명 원로들은 학생들의 자유화 요구에 우유부단하게 대처하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의 퇴진 문제를 거론한다는 등의 이유로 후야오방을 1987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2. 공산당 13차 당대회의 지도부 선출(1987) : 덩샤오핑의 제안으로 혁명 원로들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났지만, 후임 인선(자오쯔양, 리펑, 차오스, 야오이린, 후치리)의 권한은 여전히 원로들의 사전 결정 사항을 추인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3. 자오쯔양의 실각과 장쩌민 총서기 선임(1989) :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원로들은 톈안먼 사건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동란(動亂)〉으로 규정하고, 무력진압에 소극적이던 자오쯔양과 후치리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한편, 장쩌민을 총서기에, 리루이환과 쑹핑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새로 임명했다.


"장쩌민 시기에는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이 주도 세력이었지만, 이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장쩌민 집권 1기에는 장쩌민(총서기)-차오스(전국인표 위원장)-리펑(국무원 총리)의 삼두 체제, 집권 2기에는 장쩌민(총서기)-리펑(전국인대 위원장)의 이원 체제가 형성되었다. 후진타오 시기에 들어서는 공청단파(후진타오)와 상하이방(장쩌민)-태자당(쩡칭훙) 연합 세력이 중앙과 지방에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2002년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인선 과정에서는 최대 세력인 상하이방이 다수(9인 중 6인)를 차지하고 다른 세력이 일정한 지분을 인정받은 형태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2004년 9월 장쩌민의 중앙군위 주석 사임과 후진타오의 승계, 2006년 9월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 퇴진과 2007년 3월 시진핑 당서기 임명 등은 후진타오 세력과 쩡칭훙 세력 간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322)


# 집단지도가 자리잡은 배경

1. 공산당의 제도화 :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등 주요 권력 기구가 당헌과 당규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된다.

2. 혁명 원로의 퇴진 : 혁명 원로들의 퇴진으로 자연스럽게 특정 개인이나 파벌이 절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 세력 간에 타협을 중시하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 주요 파벌

1. 학연그룹 : 칭화방(칭화대학 출신), 베이다방(베이징대학 출신)

2. 지연그룹 : 베이징방, 상하이방, 간쑤방

3. 혈연그룹 : 태자당(혁명 원로의 자제들)

4. 기타 : 공청단파(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의 지도자들)


# 집단지도를 보완하는 제도

1. 연령제 및 임기제 : 장기집권을 막고 통치 엘리트의 정기적인 순환을 위해 .동직(同職) 2회 10년, 동급(同級) 15년 제한. 원칙을 수립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들(중앙군위 주석과 국가주석(부주석) 제외)의 연령을 68세까지로 제한한다.

2. 민주 추천제 : 혁명 원로나 공산당 총서기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라,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350~400인 정도의 통치 엘리트가 일종의 선거인단이 되어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을 추천한다.


3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2 : 집단지도와 권력 승계


# 권력승계의 규칙

1. 연령제

2. 임기제

3. 권력 기구 인선에서 세력 균형 유지

4. 후계자 사전 선임(민주 추천제)

5. 점진적 '집단' 승계


"시진핑의 권력 기반은 장쩌민 및 후진타오의 집권 초기와 비교했을 때 매우 공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정치국 상무위원의 분포에서 태자당과 상하이방이 절대 다수로, 시진핑 본인을 포함하여 총 7인 중에서 6인이나 되었다. 또한 퇴임 후 후진타오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진타오 본인이 중앙군위 주석까지 이양하고, 비공개 회의에서 정치 원로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 이상 최대한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7인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시진핑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9인제 상무위원회보다 유리했다. 시진핑이 주요 정책과 인사 문제를 결정할 때,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을 설득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작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7인제 상무위원회는 후진타오가 시진핑에게 준 커다란 선물 중의 하나였다."(492-4)


4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3 : 집단지도와 권력 공고화


"권력 공고화(power consolidation)란, 정치 지도자가 권력원을 확보하여 직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군 통수권, 이념적 권위(ideological authority), 개인적인 관계망(personal networks) 혹은 파벌(faction)을 장악해야 한다. 그 밖에도 국민이나 특정 집단, 예컨대 노동자, 농민, 지식인의 지지 역시 최고 지도자의 중요한 권력원이지만 앞서 말한 세 가지와 비교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 일당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고 자신을 잘 선전하여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화궈펑이 덩샤오핑 세력에 의해 권력에서 축출된 것이나, 대학생과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보수파 원로들에 의해 총서기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후야오방의 사례는 이를 잘 증명한다."(526)


# 장쩌민, 후진타오 , 시진핑의 권력 공고화

1. 자파 세력(파벌)의 충원 : 장쩌민(상하이파), 후진타오 (공청단파), 시진핑(태자당)

2.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 운동의 전개

※ 정풍 운동 : 당정 간부의 업무 태도와 사업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당 중앙이 전 조직과 당원을 대상으로 학습과 상호 비판 활동을 전개하는 일종의 공산당 정화 운동

3. 이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3-1.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 선진 생산력 발전, 선진 문화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 추구

3-2.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 균형 발전 및 지속 가능한 발전에 방점

3-3. 시진핑의 시진핑 사상 :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해 사개전면(四個全面) 추진(전면적 소강 사회 완성, 전면적 개혁 심화, 전면적 의법치국(依法治國), 전면적 당 엄격 관리)


"장쩌민은 2001년 7월 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삼개대표 이론을 공식화했다." "이때 공산당 내외에 포진하고 있던 '좌파(左派)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이 이론이 갖는 현실적 의의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 핵심은 사영 사업가의 입당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사영 사업가는 과학 기술자처럼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일부 사영 사업가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후 공산당은 이들의 입당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제 장쩌민의 삼개대표 이론이 발표됨으로써 이런 금지 결정은 정당성이 사라졌다. 반면 좌파 이론가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사영 기업가는 착취계급으로 노동자 계급의 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공산당 입당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00년 2월 장쩌민이 삼개대표 이론을 제기한 이후 이를 기정사실로 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활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후진타오는 이를 적극 지지하고 추진했다."(562-3)


결론 : 집단지도의 분화와 전망


"시진핑은 강력한 조직 체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먼저,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강화했다. 전에도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이 있었지만 성과는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달랐다. 전과는 다른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후진타오 시기에 유행했던 '구룡치수(九龍治水)', 즉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관리한다'와 같은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또한 시진핑은 영도소조를 대규모로 신설하여 당·정·군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영도소조를 신설하여 자신이 직접 조장이나 주임을 맡고, 요직에는 자파 세력을 충원했다." "마지막으로 시진핑은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다."(6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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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공부의 기초 - 역사가처럼 생각하기
피터 N. 스턴스 지음, 최재인 옮김 / 삼천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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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세계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공부의 목표는 역사적 렌즈를 통해 지구적 상황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몇몇 중요한 문화적 전통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두는 것을 수반한다. 지구적 상황들을 이해하는 것은 다양한 사회들 사이의 접촉을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고, 무역 패턴이나 기술의 교환 같은 커다란 동력이 특정 지역의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사 연구자들은 세계사의 중심 관점을 체득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주장한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몇몇 문화적·정치적 경험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주목하고, 단일 사회를 뛰어넘는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거창하게 말하지는 않아도, 일국적 또는 지역적 렌즈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세계를 제대로 파악해 낼 수 없음을 세계사 연구자들은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24-5)


"모든 세계사 프로그램에는 세 가지 기본 방법론의 적당한 결합이 반영되어 있다." "첫째,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주요 사회와 문명에 한정시킨 가운데 진행된다. 각 전개 과정과 상호작용을 추적하고 치밀하게 비교하면서 세계사가 연관성을 상실한 채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조직한다." "둘째, 점점 더, 세계사 연구자들은 주요 사회들 사이의 접촉에 대해, 이들 접촉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셋째, 세계사 연구자들은 비단 접촉만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사회, 심지어 직접 접촉이 없는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동력들을 알아내고 추적하는 것에도 관심을 갖는다." "주요 사회들을 추적하고 비교하는 것, 접촉의 전개와 결과를 보는 것, 거대한 동력들에 맞서는 대응들과 거대한 동력들의 성격 변화까지 추적하는 것, 이것이 감당할 수 있는 조직화 원칙의 목록이다. 이를 통해 세계사 연구자들은 시간과 지리(그리고 일정한 주제까지)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36-7)


1장 세계사의 골격


# 세계사 구분의 한 가지 사례

1. 초창기(기원전 250만 년~기원전 1만 년) : 초창기 인류는 수렵채집 경제 속에서 점차 도구 사용에 능숙해졌고, 전 세계로 이주해나갔다.

 1-1. 농업 : 신석기혁명은 연대기적으로 꽤 다양한 시점에서 출발했으며, 놀랄 만큼 더디고 불균등하게 전파되었지만, 인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1-2. 문명 : 활발하게 교역하는 도시들, 한층 세련되고 격식을 갖춘 정부, 최소한의 관료제, 구술 문화에서 기록 문화로의 전환 등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2. 고전시대(기원전 1000년~서기 600년) : 철기시대의 출발과 더불어 중국, 페르시아, 지중해 지역이 제국화되면서, 국가간 정복과 이민이 발생하고 종교와 문화들이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3. 고전시대 후기(500~1450년) : 다양한 지역에서 발생한 새로운 문명들은 의식적으로 고전시대의 기술과 문화를 활발하게 모방했고, 항해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무역과 교류의 폭을 한층 넓혀나갔다.

4. 근대 초기(1450~1800년) : 아메리카가 지구 차원의 상호작용에 편입되면서, 대규모의 생물학적 교류와 대량 학살, 노예 무역이 펼쳐지고, 과학혁명이 촉발한 앞선 군사 기술로 서유럽 국가들이 신생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5. 장기 19세기(1800~1918년) : 전면적인 산업화를 서유럽과 미국이 독점하면서 제국주의가 비상하고 지역적 불평등이 확대됐으며, 정치·사회적 혁명의 기운과 개인의 자유, 민족주의 같은 사상이 피지배 국가들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6. 현대 : 탈식민화 추세가 서구의 고전적 지배력을 약화시켰고, 인구가 유례없이 증가했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구적 차원의 테크놀로지 혁신, 젠더로 대표되는 정치사회적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장 역사가처럼 생각하기


# 역사가처럼 생각하기

1. 큰 그림 그리기 : 기초적인 전문지식을 확장하면서 사실의 나열보다는 주제에 맞게 관련 정보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기른다.

2. 사료를 활용하고 해석하기 : 역사 정보를 서로 다른 시대의 발전들과 비교하면서, 인간 행위나 역사적 패턴에 대한 더 큰 이론이나 가설을 검증해본다.

3. 일반화와 유추 : 포괄적인 일반화를 제시하는 역사모델의 타당성을 점검하고 과거의 사태에서 현재 혹은 미래의 사태를 미루어 짐작하는 일의 단순화를 경계한다.

4. 변화와 지속성 : 변화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그 변화는 중요했는가? 변화의 진행 과정은 지속적이었는가, 유동적이었는가? 변화는 어떤 마무리를 낳았는가? 등을 살펴본다.

5. 비교하는 능력 : 적어도 두 개의 사회 이상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측면들을 비교해야 한다. 대상을 설정하고, 주제를 선정하며, 차이와 유사성의 인과관계를 탐구하면서 두 쟁점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6. 지역과 세계 : 지역과 세계의 혼합 속에서 세계적 요소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확산됐는지, 반대로 지역적 발전과 다양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변화의 복잡한 인과관계에 주목한다.

7. 분석과 균형감각 : 일상생활에서도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고, 양식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밑바탕으로 삼는다.


3장 시간, 시대구분과 세계사


"시대구분의 첫 번째 전제는, 새로운 시대가 등장하기 전에 지배적이던 주제들은 비중이 작아지거나 심지어는 부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새 시대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일정한 지속성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전의 틀은 지배력을 상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 시대가 계속 작동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이 첫 번째 전제가 출발점이 된다. 시대구분의 틀에서 두 번째 전제는 불가피하게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전의 조직 원리들이 비중을 상실하거나 무언가로 대체되었다면, 새 주제들은 무엇이며 이 새 주제들이 어떻게 인간 경험의 주요 측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는지 설명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러 세계사 시대구분이 제공하는 일종의 세 번째 분별 지점은,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가 어떤 극적인 사건이나 과정(제1차 세계대전 같은)을 통해 촉발되거나 적어도 예고되는 지점이다."(128-9)


"시대구분을 할 때는 세 가지 공통된 복잡성에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는 새로운 체제가 자리잡았다 해도 한 시대가 끝나기 직전까지는 새 체제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변화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새 틀이 정착되어도, 하나의 과정으로서 변화는 계속된다." "둘째, 특정 지역에 해당되는 한 시대를 다른 지역에서도 새 패턴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가령 새 정치적 틀을 젠더 관계나 공업 생산의 변화에까지 꼭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복잡성은 주요 시대의 시작점과 끝점을 명확히 결정하는 방식에 내재해 있는 혼란과 관련되어 있다. 새 시대가 결국에는 꽤 명쾌하게 정의될 수 있다고 해도, 이행기에 발생하는 혼란들을 언급할 필요는 있다. 일련의 새로운 사상이 불쑥 등장하여 어느 정도 새로운 발전의 시작을 시사한다고 해도, 그런 사상이 받아들여지고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130-3)


4장 공간, 지역과 문명


"지구상에는 여러 지역들이 있다. 이들 거의 모두는 내부적 일관성이나 외부적 경계선, 지리적 이정표와 공유하는 역사 사이의 전체적인 조합에 대해 일정한 결정을 요구한다." "여러 지역은 저마다 중심 사회를 갖고 있는데, 중심 사회가 실제로 꽤 가운데에 자리한 경우도 많다. 또한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는 다른 영토들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잦은 상호작용 때문에 서로 공유하는 역사적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기후나 지형의 측면에서 볼 때 지역에는 내부적으로 다양한 지리대가 있을 수 있다. 인도아대륙이나 중국 남부와 북부, 그리고 유럽 남부와 북부가 그러하다." "어떤 지역은 좀 더 간접적으로 규정된다.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지방들은 가까이 모여 있고, 대부분 주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해왔다. 중앙아시아도 비슷하게 공유하는 지리적 조합을 통해 일정한 형태를 부여받는다." "많은 지역들은 완충지대를 갖고 있다. 동부와 중부 유럽의 국가들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양쪽 지역으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169-71)


"문명은 세계사 학자들이 지역적 다양성의 이슈와 시간에 따른 변화를 모두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 문명들은 비교 분석의 근본적 범주들을 제공한다(그러나 차이를 강조하는 익숙함에만 머물지 말고, 예상치 않았던 유사성들도 챙겨야 한다)." "문명이라는 틀로 전체 세계사 모두를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는 것 외에도, 문명 개념에 덧붙일 만한 몇 가지 기초적 주의 사항이 있다. 문명들 자체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문명들은 교환을 통해 서로 반응해 온 과정이 있었고 통합된 제도들과 가치관들을 만들기도 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놀랄 만한 공통의 특징들이 나타났다. 비교할 때는 차이와 함께 이런 공통점들도 명시되어야 한다." "문명이 일정한 내부적 성격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은 문명을 세계사를 보여주는 데 유용한 구성 요소이자 지역적 정의의 지침으로 삼는 데 있어 중요하다."(174-6)


5장 접촉과 교류


"접촉 패턴의 변화는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행하는 것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변화가 무역의 변화를 통해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접촉은 그저 한 문명과 만나는 것을 넘어 압박을 가하는 것이고, 접촉할 때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다양한 대응이 나온다는 점 또한 인정되고 있다." "세계사 학자들은 독자적 전통이 형성되고 때로는 지속적인 문명들이 등장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만남이 적응이나 혁신을 자극 또는 강제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많은 세계사 학자들은 오늘날 그 중요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만남들이 분명하고 꾸준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특히 밝히고 싶어한다." "결국, 세계사에서 접촉을 탐구하는 진짜 지점은 사회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었는가, 다양한 형태의 접촉이 갖는 비중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시간에 따라 접촉의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하는 점이다."(201-3)


"만남들을 놓고 장점과 단점을 평가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접촉 상황은 관계자 일부에게 정말 해를 입혔음이 아주 분명하기도 하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유럽인과 아프리카인, 그들이 가져온 병균을 접한 이래 200년 넘는 기간 동안 놀라운 비율로 죽어 갔다." "'나쁜' 접촉 결과는 특히 큰 불평등한 관계에서 만났을 때 나오는 경향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의 무력함을 과장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질병과 재산의 손실은 더 잘 무장한 침입자를 만났을 때 가장 크게 당하는 방식이다." "'좋은' 만남은 관련된 집단들이 새 기술을 배우고 문화적 지평을 넓히게 해준다. 한편, 좀 더 옛날 방식을 지키려는 태도와 일정한 긴장이 생기기도 한다. 균형에 대해서는, 1853년 이래 일본과 서구의 상호작용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확실히 일본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209-10)


6장 주제와 범주


"세계사의 몇 가지 공통된 논제를 살펴보자면, '무역 패턴'은 고전시대 이전 지역 간 교환의 징후, 가령 인도와 중동 사이의 교환에서부터 오늘날 지구화의 척추를 구성하고 있는 치열한 상업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에서 가장 지속적인 접촉의 주제이다." "서기 600년 이후 최고조에 이른 '선교하는 종교'들의 발전은 문화적 측면에서 중요하며, 만남에 더 큰 초점을 두고 있다." "'외교와 군사의 역사'와 관련한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근대 이전에 지역을 뛰어넘는 중대한 군사 작전은 몇 차례 안 되지만, 분명 주목할 만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과 몽골의 대규모 정복이 바로 그런 사례이다." "정기적인 외교적 상호작용은 주로 근대적 논제이다. 국가 간 대표단을 보내고 협약을 맺는 관행은 근대 초기 이후 일반화되었다." "(대규모 집단) 이주에 대한 관심은 아직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일관되기보다는 산발적이다." "마지막 공통의 접촉 논제는 '지역 간 질병 전파'이다. 이는 다행히 지속되기보다는 반복되는 현상이다."(232-4)


# 세계사의 표준 논제

1. 정치사 : 정치 구조의 특징, 정부의 기능, (군사적 측면을 포함한) 기술 변화, 국가와 국민의 관계 등을 다룬다.

2. 문화사 : 종교적 혹은 사상적 특징,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프레임 분석, 회화·조각·건축에 나타난 주요 예술 양식 등을 다룬다.

3. 경제사 : 무역 패턴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기술 변화, 상인과 도시의 역할, 농업과 제조업의 역사, 노동 시스템(노예제·농노제 등)의 형태 등을 다룬다.

4. 사회사 : 계급 구조와 그에 따른 경제적·정치적 지위 분포, 인종과 젠더에 기반한 사회 불평등 체제 분석 등을 다룬다.

5. 기타 : 음식의 역사, 환경사 등


7장 세계사의 쟁점


# 세계사의 주요 쟁점들

1. 역사에서 (뛰어난 한) 개인의 영향력

2. 보통 사람들의 역할

3. 아프리카의 유산

4. 로마의 몰락 요인

5. 이슬람의 정치 원리

6. 십자군의 역할

7. 러시아에 끼친 몽골의 영향

8. 중국의 (인도양) 원정

9. 아메리카인(아즈텍·잉카 제국 등)의 몰락 요인

10. (15세기) 유럽의 팽창

11. 산업혁명

12. 노예해방을 이끈 요인

13. 제국주의

...


8장 현대사, 우리 시대의 세계사


"현대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아주 분명하며 상당히 견고하다. 현대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붕괴와 함께 시작된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이 전쟁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 사건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과 정부의 권한 행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강화시켰다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소비에트와 파시스트 정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기간 동안 정부의 통제력이 커졌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경제적 우위가 끝나기 시작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 전쟁은 유럽 국가들 자체를 약화시켰다. 이는 유럽 밖에서 국가주의적 저항을 더욱 부추겼다." "전쟁은 다양한 지역에서 변화를 촉진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스만제국의 몰락으로 중동에서 새로운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또한 (멕시코혁명, 중국혁명과 함께 20세기를 만든) 러시아혁명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284-5)


# 현대를 분석할 때 고려할 사항들

1. 지속성 : 19세기 권력관계의 요소들을 바탕으로 서구가 여전히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가운데 약소국들의 경험이 반영되고 있다.

2. 열린 논쟁 : 지구화가 서구의 몰락을 가속화할 것인가? 문명 충돌로 세계가 덜 관용적으로 변할 것인가? 현대 사회는 폭력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인가? 등의 논제들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3. 문화적 트렌드 : 근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세속화된 문화 양식과 이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종교적 신념 체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

4. 전간기 : 통신·교통 기술의 발달로 지구적 접촉 증대, 국제적 정치 활동의 증가, 혁명의 열기와 내셔널리즘의 부상,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려는 노력 등을 통해 전간기의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는 작업처럼, 변화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는 현대의 역사를 세분화해서 바라보려는 노력은 타당하고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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