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엘리트 정치 -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조영남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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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엘리트 정치인가?


"중국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통치 엘리트라고 할 때는 공산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의 구성원인 중앙위원을 가리킨다. 개혁기에 중앙위원은 약 200인의 정(正)위원과 약 150인의 후보 위원(투표권 없음)을 합쳐 350인 전후다. 여기에는 공산당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인민해방군의 지도부가 포함된다. 또한 지방 31개 성급(省級) 단위의 당서기 및 성장·시장·주석, 중요한 인민 단체의 지도자, 중앙 소속 일부 국유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도 포함된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정치국 같은 다른 권력 기구, 혁명 원로의 비공식 모임, 혹은 중앙 공작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을 사후에 추인하는 역할에 머무는 일이 많다. 따라서 중앙위원회에 초점을 낮추어 분석할 경우에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엘리트 정치를 파악할 수 없다." 즉, 중국 엘리트 정치의 중심은 중앙 정치국(政治局, Politburo)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핵심이다.(19-20)


# 중앙 정치국 구성 인물들

1.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혹은 총서기 : 마오 주석과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총서기(1982년에 당 주석 폐지)를 가리킨다.

2. 정치국 상무위원회 : 공산당 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전국정협, 중앙 기율검사위원회(중앙기위) 등 '5대 권력 기구'의 현직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다.

3. 중앙 서기처(書記處) :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 기구로서, 공산당 중앙 판공청 주임, 조직부 부장, 선전부 부장, 통일전선부(통전부) 부장, 정법위원회 서기 등으로 구성되며, 서기처의 실질적 책임자인 상무 서기는 총서기의 후계자가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4. 중앙 군사위원회(중앙군위) : 인민해방군을 지도하는 군 지도자 중에서 두 명이 정치국원으로 선발된다. 중앙군위 주석은 공산당 총서기가 겸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유일한 예외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총서기 시절 덩샤오핑이 중앙군위 주석을 계속 유지한 경우다).

5. 지방 당서기 : 4대 직할시(베이징, 톈진, 상하이, 충칭)와 중요 성급 단위(성과 자치구)의 당서기들이 정치국 구성원에 포함된다. 4대 직할시는 고정이며 나머지 성과 자치구는 바뀔 수 있다.


# 중국 엘리트 정치의 유형

1. 일인지배(마오쩌둥) : 당 주석이나 총서기 개인이 정책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을 독점 행사한다.

2. 원로지배(덩샤오핑) : 혁명 원로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위의 권한을 행사한다. 원로지배는 혁명 원로가 주도하는 비공식 정치가 (공식 정치에 앞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이중 정치 구조’라는 점에서 집단지도와 다르다.

3. 집단지도(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이 위의 권한을 집단적, 공식적으로 행사한다.


"새롭게 선임된 총서기는 먼저 주어진 인사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파 세력을 권력 기관의 요직에 앉힌다. 장쩌민의 상하이방(上海幇), 후진타오의 공청단파(共靑團派), 시진핑의 '시진핑 세력' 등 다양한 파벌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이들은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反腐敗, anti-corruption)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경쟁 세력이나 반대파를 굴복시킨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이 집권하자마자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한 것은 권력 공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총서기는 여세를 몰아 자신의 통치 이념을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한다.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일명 '시진핑 사상')은 이렇게 해서 지도 이념이 되었다."(29-30)


"과두제의 딜레마로 인해 과두제가 일인지배로 변질되는 과정, 다시 말해 최고 지도자(소련의 경우 공산당 서기장)가 권력을 축적하여 과두제가 붕괴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 권력의 순환 이론(circular flow of power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공산당 서기장은 정책 집행의 권한을 갖고 있고, 이를 이용하여 지방 당서기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방 당서기는 서기장을 지지하는 사람을 당대회 대표로 선출하고, 당대회 대표는 다시 서기장을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출한다. 이 위원들이 서기장의 뜻에 따라 정치국원과 서기국 서기를 선출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기장의 권한은 강화되고, 과두제는 일인지배로 변질된다." "다만 중국의 총서기는 소련의 서기장과는 달리 집단지도를 붕괴시킬 정도로까지 권력을 축적하지는 못했기에 중국의 엘리트 정치는 지금까지 집단지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49-50)


1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의 엘리트 정치


"마오쩌둥 시대(1949~1976)의 엘리트 정치는 마오의 일인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먼저, 마오는 통치 기간 내내 최고 지도자로서 정책 결정, 인사 선임, 후계자 지명, 군대 동원과 관련된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중요한 회의를 소집하여 공산당의 노선이나 방침을 결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었다. 또한 후계자를 자기 마음대로 선정하거나 취소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오는 평생 동안 그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압도적 지위(predominant status)'를 누린 최고 지도자였다. 그러나 '압도적 지위'에 있었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항상 독재자로 군림했던 것은 아니다. 1949년 중국 건국부터 1958년 대약진운동 추진 전까지 마오는 동료들과 협의하여 주요 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반면 1958년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는 독재자처럼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63-4)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특징

1. 카리스마적 권위와 권력(정책 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 독점

2.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공산당 위에 군림하는 '사회주의 황제' 양상

3. 개인숭배가 일상화되면서 동료 지도자들과 주종 관계 형성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시기별 과정

1. 권위의 확립(1935~1948) : 중국 건국 직전까지의 시기로 마오를 정점으로 뭉친 혁명 세력이 엘리트 정치를 행사하는 '옌안 체제'가 성립된다.

2. 협의적 권력 운영(1949~1956) : 건국부터 공산당 8차 당대회까지의 시기로, 마오가 자신의 '압도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협의적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3. 일인지배의 발전(1957~1965) : 대약진운동 시기부터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시기로 1-2선 체제의 수정주의적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은 마오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면서 '독재 방식'이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1-2선 체제 : 공산당을 총괄하면서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류사오치의 1선과 국가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는 마오쩌둥의 2선으로 구성된 체제

4. 일인지배의 비극(1966~1976) :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마오 사망까지의 시기로 마오의 일인지배가 극단화되었고, 중국이 전체주의 체제로 전락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원로들은 1978년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회의(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마오쩌둥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계속혁명' 노선, 일명 문화대혁명(1966~1976) 노선을 과감히 폐기했다. 대신 공산당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새로운 당 노선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공산당은 ‘개혁 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유화(私有化, privatization), 시장화(市場化, marketization), 개방화(開放化, opening-up), 분권화(分權化, decentralization)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덩샤오핑 시대에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국을 주도했던 혁명 원로들이 엘리트 정치를 주도하는 원로지배(gerontocracy)가 나타났다. 이는 마오쩌둥의 일인지배를 벗어난 과도기의 엘리트 정치체제로, 장쩌민 시기에 들어 집단지도가 등장하면서 소멸했다."(237-8)


"이중 정치 구조에서는 공식 정치의 구성원, 즉 총서기,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원, 서기처 서기가 원로 정치의 결정에 의해 언제든지 임명되거나 파면될 수 있었다. 만약 공식 정치의 구성원이 원로 정치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로들의 결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고 원로들이 판단할 때, 원로 정치는 공식 정치를 개편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은 이런 이중 정치 구조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이들은 이중 정치 구조의 희생물이었다." "이중 정치 구조의 문제점은 집단지도가 수립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장쩌민 시기에 시작되어 후진타오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원로 정치의 종결이었다. 원로 정치는 개인적 명성과 인맥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가진 혁명 원로들이 주도한 것으로, 원로들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끝날 수 있었다."(251-2)


2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1 : 집단지도와 권력 운영


# 이중 정치 구조의 운영 사례

1. 후야오방의 실각(1986~1987) : 아직 공식 지위를 갖고 있던 혁명 원로들은 학생들의 자유화 요구에 우유부단하게 대처하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의 퇴진 문제를 거론한다는 등의 이유로 후야오방을 1987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2. 공산당 13차 당대회의 지도부 선출(1987) : 덩샤오핑의 제안으로 혁명 원로들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났지만, 후임 인선(자오쯔양, 리펑, 차오스, 야오이린, 후치리)의 권한은 여전히 원로들의 사전 결정 사항을 추인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3. 자오쯔양의 실각과 장쩌민 총서기 선임(1989) :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원로들은 톈안먼 사건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동란(動亂)〉으로 규정하고, 무력진압에 소극적이던 자오쯔양과 후치리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한편, 장쩌민을 총서기에, 리루이환과 쑹핑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새로 임명했다.


"장쩌민 시기에는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이 주도 세력이었지만, 이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장쩌민 집권 1기에는 장쩌민(총서기)-차오스(전국인표 위원장)-리펑(국무원 총리)의 삼두 체제, 집권 2기에는 장쩌민(총서기)-리펑(전국인대 위원장)의 이원 체제가 형성되었다. 후진타오 시기에 들어서는 공청단파(후진타오)와 상하이방(장쩌민)-태자당(쩡칭훙) 연합 세력이 중앙과 지방에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2002년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인선 과정에서는 최대 세력인 상하이방이 다수(9인 중 6인)를 차지하고 다른 세력이 일정한 지분을 인정받은 형태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2004년 9월 장쩌민의 중앙군위 주석 사임과 후진타오의 승계, 2006년 9월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 퇴진과 2007년 3월 시진핑 당서기 임명 등은 후진타오 세력과 쩡칭훙 세력 간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322)


# 집단지도가 자리잡은 배경

1. 공산당의 제도화 :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등 주요 권력 기구가 당헌과 당규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된다.

2. 혁명 원로의 퇴진 : 혁명 원로들의 퇴진으로 자연스럽게 특정 개인이나 파벌이 절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 세력 간에 타협을 중시하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 주요 파벌

1. 학연그룹 : 칭화방(칭화대학 출신), 베이다방(베이징대학 출신)

2. 지연그룹 : 베이징방, 상하이방, 간쑤방

3. 혈연그룹 : 태자당(혁명 원로의 자제들)

4. 기타 : 공청단파(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의 지도자들)


# 집단지도를 보완하는 제도

1. 연령제 및 임기제 : 장기집권을 막고 통치 엘리트의 정기적인 순환을 위해 .동직(同職) 2회 10년, 동급(同級) 15년 제한. 원칙을 수립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들(중앙군위 주석과 국가주석(부주석) 제외)의 연령을 68세까지로 제한한다.

2. 민주 추천제 : 혁명 원로나 공산당 총서기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라,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350~400인 정도의 통치 엘리트가 일종의 선거인단이 되어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을 추천한다.


3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2 : 집단지도와 권력 승계


# 권력승계의 규칙

1. 연령제

2. 임기제

3. 권력 기구 인선에서 세력 균형 유지

4. 후계자 사전 선임(민주 추천제)

5. 점진적 '집단' 승계


"시진핑의 권력 기반은 장쩌민 및 후진타오의 집권 초기와 비교했을 때 매우 공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정치국 상무위원의 분포에서 태자당과 상하이방이 절대 다수로, 시진핑 본인을 포함하여 총 7인 중에서 6인이나 되었다. 또한 퇴임 후 후진타오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진타오 본인이 중앙군위 주석까지 이양하고, 비공개 회의에서 정치 원로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 이상 최대한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7인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시진핑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9인제 상무위원회보다 유리했다. 시진핑이 주요 정책과 인사 문제를 결정할 때,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을 설득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작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7인제 상무위원회는 후진타오가 시진핑에게 준 커다란 선물 중의 하나였다."(492-4)


4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3 : 집단지도와 권력 공고화


"권력 공고화(power consolidation)란, 정치 지도자가 권력원을 확보하여 직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군 통수권, 이념적 권위(ideological authority), 개인적인 관계망(personal networks) 혹은 파벌(faction)을 장악해야 한다. 그 밖에도 국민이나 특정 집단, 예컨대 노동자, 농민, 지식인의 지지 역시 최고 지도자의 중요한 권력원이지만 앞서 말한 세 가지와 비교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 일당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고 자신을 잘 선전하여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화궈펑이 덩샤오핑 세력에 의해 권력에서 축출된 것이나, 대학생과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보수파 원로들에 의해 총서기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후야오방의 사례는 이를 잘 증명한다."(526)


# 장쩌민, 후진타오 , 시진핑의 권력 공고화

1. 자파 세력(파벌)의 충원 : 장쩌민(상하이파), 후진타오 (공청단파), 시진핑(태자당)

2.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 운동의 전개

※ 정풍 운동 : 당정 간부의 업무 태도와 사업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당 중앙이 전 조직과 당원을 대상으로 학습과 상호 비판 활동을 전개하는 일종의 공산당 정화 운동

3. 이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3-1.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 선진 생산력 발전, 선진 문화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 추구

3-2.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 균형 발전 및 지속 가능한 발전에 방점

3-3. 시진핑의 시진핑 사상 :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해 사개전면(四個全面) 추진(전면적 소강 사회 완성, 전면적 개혁 심화, 전면적 의법치국(依法治國), 전면적 당 엄격 관리)


"장쩌민은 2001년 7월 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삼개대표 이론을 공식화했다." "이때 공산당 내외에 포진하고 있던 '좌파(左派)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이 이론이 갖는 현실적 의의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 핵심은 사영 사업가의 입당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사영 사업가는 과학 기술자처럼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일부 사영 사업가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후 공산당은 이들의 입당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제 장쩌민의 삼개대표 이론이 발표됨으로써 이런 금지 결정은 정당성이 사라졌다. 반면 좌파 이론가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사영 기업가는 착취계급으로 노동자 계급의 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공산당 입당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00년 2월 장쩌민이 삼개대표 이론을 제기한 이후 이를 기정사실로 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활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후진타오는 이를 적극 지지하고 추진했다."(562-3)


결론 : 집단지도의 분화와 전망


"시진핑은 강력한 조직 체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먼저,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강화했다. 전에도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이 있었지만 성과는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달랐다. 전과는 다른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후진타오 시기에 유행했던 '구룡치수(九龍治水)', 즉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관리한다'와 같은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또한 시진핑은 영도소조를 대규모로 신설하여 당·정·군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영도소조를 신설하여 자신이 직접 조장이나 주임을 맡고, 요직에는 자파 세력을 충원했다." "마지막으로 시진핑은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다."(6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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