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 중국사 연구를 위한 입문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강유원.임경준 옮김 / 이론과실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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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중국인의 역사관─만들어진 '정통正統'과 '중화사상中華思想'


"지중해 문명보다는 훨씬 나중인, 서기전 221년 진 시황제의 통일이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의 기원이 된다. 중국 문명의 3대 요소인 '황제'와 '도시' 그리고 '한자'가 이때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만 한자가 중국에서 극히 소수의 지배계급, 그중에서도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대중적인 문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만 한다. 한자에는 품사나 성性, 수數, 격格, 시제가 없으며, 한자를 엮어놓은 한문에는 문법이 없다. 한문의 의미를 해독하는 단서는 고전에서의 용례밖에 없다. 그래서 한자의 사용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고전 텍스트를 통째로 암기해야만 한다. 여기에 더하여, 한인漢人이 말하는 언어는 지역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정도 있다. 결국 중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언어[漢語]와 쓰는 언어[漢文] 사이의 이러한 단절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5-6)


"『사기』는 중국에서 쓰인 최초의 '정사正史'로 그 체제와 내용은 후세 중국인의 역사의식과 중국에 대한 의식을 결정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천하'라고 부르는 지역은 자신이 섬겼던 한漢 무제武帝의 지배가 미쳤던 범위를 가리키는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는 중국과 동의어가 된다. 게다가 사마천이 황제黃帝의 업적으로서 서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현실의 무제의 업적과 겹친다." "신화 속 황제와 현실의 무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정통'이라는 관념이다. 사마천이 그것을 채택하고 있는 까닭에 '정통'은 중국 문명 역사관의 근본이 되었다. 중국 문명 역사관은 '정통'의 역사관이다. '정통'의 역사관이란, 어떤 시대의 '천하天下'(지금으로 말하면 중국)든지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황제)가 분명히 한 명이어서 그 천자만이 천하를 통치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통'은 오제의 시대에서는 선양禪讓, 즉 어진 천자에서 다시 어진 천자로 물려주는 방식을 통해 이어졌다."(17-8)


"『사기』에서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가 다루는 시대가 되면 제위는 방벌放伐, 즉 추방이나 정벌을 통해 손에 넣는 것으로, 이긴 쪽에게는 천명이 부여되고, 패한 쪽에게서 천명이 제거된다. 이것이 본래 의미에서의 '혁명革命'으로, '혁革'은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이때부터 '천자'는 하늘이 혁명을 명하는 자, 즉 새로운 천명을 받은 군주가 '정통'의 천자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이 하夏에서 은殷으로, 은에서 주周로, 주에서 진秦으로 거듭하여 교체되어, 마지막으로 사마천이 섬기는 한 무제가 천명을 넘겨받은 '정통'의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쓰고 있는 것은 '정통' 황제의 역사인 것이다. 세계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이라는 관념이나 중국민족이라는 관념도, 사마천의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19~20세기 국민국가 시대의 산물이다."(18)


제1장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역사의 창조


# 『사기』의 구성

1. 「본기本紀」 : 황제나 왕의 재위 중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 기술

2. 「표表」 : 정치세력의 흥망과 교체의 시간적인 관계

3. 「서書」 : 제도, 학술, 경제 등 문명의 여러 측면 개괄

4. 「세가世家」 : 진 시황제 통일 이전에 있었던 지방 왕가와 통일 이후 지방에 세웠던 역대 제후들의 행적

5. 「열전列傳」 : 저명한 인사의 행적


"『사기』가 하夏, 은殷, 주周를 진 시황제나 한 무제 등과 나란히 「본기」에 싣고 있는 까닭은 '정통正統'이라는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정통'(중국세계의 통치권)이 천하 어느 곳에서나 늘 존재하고 그것이 오제에서 하로, 하에서 은으로, 은에서 주로, 주에서 진으로, 진에서 한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정통'을 이어받는 왕조만이 '전통傳統'이 될 수 있다. '전통'을 이어받는 절차는 세습이 원칙이다. 오제五帝는 황제와 그의 자손이며, 요는 순에게로 순은 우에게로, '선양禪讓'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력으로 하를 무너뜨린 은의 탕왕과 은을 무너뜨린 주의 무왕이 어떻게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조의 '덕德'(힘)이 쇠퇴하면 '천天'이 그 '명命'을 거두어들여('혁명革命') 새로운 왕조가 '천명'을 받게 되는 ('수명受命') 식으로 '정통'이 옮겨진다고 설명된다."(52-3)


제2장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단대사斷代史의 출현


"『사기』가 다루는 시대 범위는 오제五帝에서 시작하여 하, 은, 주, 진 왕조를 거쳐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치세의 중반까지이다. 이처럼 여러 왕조에 걸쳐 있는 체제의 역사서를 후세 중국사학사에서는 '통사通史'라 부른다. 반면 하나의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를 '단대사斷代史'라 부른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고 약 180년이 지난 뒤에 반고班固(32~92년)가 『한서』 100편을 저술했다. 『한서』는 『사기』와 다르게 '단대사' 체제를 취해 서기전 206년 한 고조의 즉위에서 시작하여 한의 찬탈자 왕망王莽이 서기 23년에 멸망하기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한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인 것이다. 『한서』 이후의 '정사'는 모두 '단대사'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서』를 보면 고조에서 무제까지의 부분은 『사기』를 그대로 본뜬 데 불과한데, 반고가 왜 『사기』처럼 '통사'가 아닌 '단대사' 체제를 취했는가가 문제로 남는다."(60)


"한漢 황실의 외척으로 왕망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반고는 왕망을 매우 존경하였다. 유교가 반고가 살았던 후한 초창기의 통치원리가 되었던 것은 왕망의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망의 행적만을 기술하는 것으로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왕망은 한 왕조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러한 전후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한 황실의 일대기를 기술해야만 하는 것이다. 앞서 사마천의 『사기』가 있어서 역사는 '기전체紀傳體'로 쓰는 것이 통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기』의 속편이라면 몰라도 이래서는 한 무제의 치세 중반부터 시작하게 되어 역사의 서술 체계를 잡을 수가 없다. 매듭을 짓고 역사를 새롭게 기술하기 좋은 때는 한 왕조 초대 황제인 고조 유방劉邦부터이다. 그러므로 『한서』가 취한 '단대사'라는 체제는 왕망의 공적을 기술하기 위해 형편상 채택한 것이지 처음부터 '단대사'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81-2)


제3장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정통'의 분열


"중국 문명에서 역사가 '정통正統' 황제가 지배한 변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서술이라는 점은 그로부터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세계의 현실에서는 '정사正史'가 표현하는 중국인의 역사관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변화가 진행되었다. '정사正史'의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들어맞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사기』와 『한서』를 통해 확정된 구조를 대체할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漢代에 만들어진 구조의 범위 안에서만 역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게 되었다." "『삼국지』가 서술하는 대상이 세 제국이니 그 체제가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吳書」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실 황제皇帝를 다루는 「본기本紀」를 수록하고 있는 것은 「위서」뿐으로 「촉서」의 유비나 「오서」의 손권에 관한 행적은 모두 「열전列傳」으로 기술되어 있다."(93-4)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장화張華의 비호庇護를 받았던 인물이다. 장화는 문벌門閥 출신이 아닌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사마소의 휘하에 들어갔고 마침내 진무제와 혜제의 측근으로까지 성장했다. 진수로서는 장화가 꺼릴 만한 얘기는 쓰지 않으려 했을 것이 당연하니 사마소의 부친인 사마의에게 불리한 내용은 가급적 생략하고 유리한 내용은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인지 『삼국지』는 정사正史 중에서도 그 서술이 간략하기로 유명한데 이를테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대개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당대의 역사를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폐해는 진수가 죽은 지 150년 정도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년)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다량의 사료를 인용함으로써 사실을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99-100)


제4장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중화사상의 억지


"수당隋唐 시대의 황실은 모두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와 함께 일어났다. 우문태는 선비인이었는데 534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서위의 문제文帝를 지지하여 장안長安에서 독립하였고 동위東魏 고환高歡(역시 선비계)과 대립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정사正史'로서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을 한데 묶어서 『남사南史』를,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를 한데 묶어서 『북사北史』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복수의 「본기本紀」가 있어서 각각의 국가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두 계열의 황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천명天命'이나 '정통正統'이 두 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비계가 세운 왕조를 북조를 계승한 당나라의 정치적 입장에서 본다면 북조 역시 '정통'이라 주장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나라와 그 이후 시대가 되면 '정사正史' 체제를 따라 역사를 충실하게 서술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 간다."(110-2)


"1004년 거란의 성종聖宗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북송을 침입하여 전주(하남성 북쪽의 복양현)에서 북송의 진종眞宗과 대치하였다. 여기서 진종이 거란의 황태후를 자신의 숙모로 대하면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바치겠다고 약조함으로써 거란과 북송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를 '전연의 맹약'이라 부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화의조건은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그리 문제될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정통'의 역사관에서 본다면, 북송으로서는 두 명의 황제가 병존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북송의 황제는 천하의 통치권을 가진 유일한 '정통' 황제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송에게는 굴욕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북방에서 대두한 유목민족제국을 가리켜 문화는 없고 무력만 강한 '이적夷狄'이라 멸시하는 식으로 울분을 토하였다. 바로 이것이 '중화사상'의 기원이다."(120-1)


"『자치통감』의 중화사상은 무엇보다도 남북조 시대를 다루는 태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치통감』은 진 시황제 이전인 서기전 403년에서 시작하여 북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해인 959년까지 약 1,362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여 기록한 역사서이다. 그런데 남북조 시대를 다루면서는 남조의 연호만을 표기하고 북조의 연호는 표기하지 않고 있으며, 동진東晉,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 남조에 속하는 황제들은 '황제'라 부르는 반면에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북조의 황제들은 '위주魏主' '제주齊主', '주주周主'라 부르고 있다." "『자치통감』의 이러한 태도에는 북송과 대립하고 있던 거란제국, 즉 요遼나라를 북조北朝로 상정함으로 해서 요나라 황제는 '정통' 아니며 따라서 천하를 지배하는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한 가짜 황제라는 것을 멀리 돌아서 주장하고픈 심정이 숨겨져 있다."(122-4)


제5장 송렴宋濂 등의 『원사元史』─진실을 은폐하는 악폐惡弊


"원元나라에서 편찬한 『송사宋史』는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모두를 '정통'으로 대우하고 있다. 그런데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서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황제들 역시 「본기」를 편찬하여 '정통'으로 취급하고 있다. 천하가 다시 한 번 둘로 갈라졌으며 그에 따라 '정통'도 둘이라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중국의 바깥을 지배했던 요나라의 지배권을 이어받아 중국의 북반부를 지배한 국가가 금나라이며, 금나라와 동맹부족이었던 몽골 부족에서 칭기즈 칸이 출현하여 금나라의 황제로부터 독립하였고 그가 건국한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남송까지도 멸망시켜 전 중국을 정복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금나라 그리고 원나라는 독자적인 일련의 '정통' 계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요나라의 황제나 금나라의 황제 모두 '정통'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원나라는 '정통'이 아닌 왕조가 되고 만다."(135)


"그러나 명나라의 시대가 되었어도 중국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방식은 전과 변함없이 『사기』와 『한서』의 틀을 답습하였다. 명나라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가 지시하여 1370년에 완성을 본, 송렴宋濂(1310~1381년) 등이 편찬한 『원사元史』 210권은, 물론 몽골인이 남겨놓은 사료를 활용하여 편찬한 것이기는 하나 그 체제는 이전의 정사正史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어서 역사 서술의 대상도 정사가 간주하는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138) "그렇기 때문에 정사의 전통에 따라 교육 받은 중국인이 『원사』를 읽게 되면, 원나라를 유목민이 중국에 들어와서 만들어놓은 중국식 왕조로 오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실제로 원나라는 온전한 유목제국이었으며, 중국식의 요소는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한자로 명기되어 있는 관직명을 사용했다는 것뿐이다." "결국 변하지 않은 것은 '정사'의 서술형식일 뿐이지 중국의 현실 상황은 시대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거듭했다."(143-4)


제6장 기운사祁韻士의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역사에 대한 새로운 도전


"청나라가 멸망한 지 2년 뒤인 1914년에 총 68명의 학자들이 『청사淸史』 편찬에 투입되었으나,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여 관련 업무가 정체되어 있는 데다가 편찬관도 점차 줄어듦에 따라 청사관에 남아 있던 이들도 마음 놓고 편찬에 전념하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에 겨우 원고가 대강이나마 갖추어져서 『청사고淸史稿』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150) "그런데 『청사고』에는 『명사明史』까지의 ‘정사’에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번부세표藩部世表」나 「번부열전藩部列傳」이 대표적이다. 청나라에서 '번부'란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를 뜻하면서 청나라가 간접 통치하는 중국 이외의 주민을 가리킨다. 몽골의 호르친Qorchin 부에서 티베트까지를 아우르는 각 부의 역사를 기재해놓는 것은 이제까지의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까닭은 건륭제乾隆帝 시대인 1789년에 만주어에 능통한 한인 기운사가 편찬한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120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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