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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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여인의 편지」를 읽을 생각에 「체스이야기」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흥미롭다. 일석이조라는 상투적인 말이 뜻밖에도 반가운 이 책, 왐마 오진거!

 

작가는 한 가지에 집착하는 병증 또는 사람에 관심이 높은가보다. 두 가지 단편 모두 독특한 소재로 집착에 대해 말한다. 전체적인 번역이 조금 구식이어서 거슬리긴 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착착 감기는 번역이 참 드물다.

 

이 책을 산 이유가 「낯선여인의 편지」여서 두번째로 실려 있던 그 단편을 먼저 읽었다. 이 드물게도 낯선 여자도 그렇지만, 이 여자가 줄곧 지켜봐 온 남자 또한 독특하기 그지 없다.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 사실은 안면인식장애는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뭐 이런 관계가 다 있나.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중적인 심정이 드는  건 나도 몇 번 쯤 그런 편집증적인 열정 또는 열망 같은 것을 가졌던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다지 길게 가지는 못했지만. 긴 집착엔 단단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질리지도 않고 꿋꿋이 자신의 열망을 이어간다는 것이 보통 의지로는 될 수 없으니.

 

미대를 가보겠다고 재수할 때 친구랑 둘이서 홍대 시각디자인과에 무단침입(?) 해 거기에 내 이름과 같은 이름자(한 글자)를 가진사람의 사물함에 늘 목에 걸고 다니며 아끼던 일자형 호각을 두고 왔다. 일년 뒤 선배(?)에게 꼭 돌려받겠다고 차디찬 맹서(?)를 하였지만, 결국 홍대도 아닌 다른 미대에 떨어지고 말아 눈물나게 아까워 했다.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열망같은 것을 한번쯤 가슴에 품어보기도 하지 않는가. 이 글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열망에는 발끝에도 닿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 어린 나이에(10대 초반이면 초등학생인데) 어떻게 그리도 확고한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 시대적인 힘(?)도 있었겠지만.-현대사 이전 근대까지만 해도 10대, 20대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이뤘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대 사람들은 단명했기 때문인가, 이른 나이에 성숙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부나비' 같기도 하다. 농담처럼 "우리과(나같은 꼴통을 비롯해 나와 너무도 닮아 내 아들로 불리기도 하는 조카를 아울러 이르며)는 오늘만 살아, 내일은 없어." 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하는데. 이 부나비같은 여자, 무섭고 독하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독립적이다. 그 정도 되니까 그렇게 살아갔겠다. 어딘가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나 모르게 세상 참 다채롭게 흘러가네.

 

「체스이야기」또한 예상 외의 이야기였다. 일단 체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서 따분하고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집착병(?)을 앓게 된 사람과 그렇게 된 연유를 들려준다. 나치의 또다른 고문방식(?)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속 일화들도 떠오르고. 딱히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가막소(?)에 갇힌 상황만으로 그랬다. 체스라는 게임 자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곳에서라면 면벽수행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쭙잖은 충고를 하려고도 했는데 실제로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죽고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갑갑한 공간에 고립돼 책을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고 음악을 듣고 싶어도 들리지 않았던 그 겨울이 떠오르며 그보다 몇 배는 더 미쳐버릴 것 같은 공간에서 과연 무엇으로 자아를 놓지 않을 수 있었을지. 머리터지게 생각을 쥐어짜고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때 사실은 답이 없는 그 문제의 답을 알아맞힐 수 있을지. 그걸 해결하고도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러고도 나는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실존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작가는 병적인 집착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암울한 시대를 비관해 자살했다는 이력이 이해가 간다. 가만히 있어도 병들 수밖에 없었을 시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비정상일 때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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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08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정말 재미있게 쓰는 작가`입니다. 인정 ~~

samadhi(眞我) 2015-09-08 10:47   좋아요 0 | URL
곰발님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어요. 글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낯선여인 얘기는 여자가 쓴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여성의 시각에 접근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