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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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하면 구역질이지.

구토

술자리에서 술먹다 토한 얘기를 피자를 부쳐놨느니 비빔밥을 만들었느니 표현하곤 했다. 피자라면 조용히 구울텐데 그걸 굳이 "치이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치는' 파전처럼 묘사한 것은 붉은 빛을 띤 화려한 내용물임을 말하고 싶어서겠지. 비빔밥을 만들려면 이를 꽉 물고 물만 버리고 건더기를 어쩌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솟아날 듯한 말들을 꼭 먹으면서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술맛이 난다는 듯이. 내가 구토를 하는 경우엔 이미 필름이 끊겨서 처음 술을 마신 이후부터는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모자를 썼다면 모자부터 신발까지 토사물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끝도 없이 게워내는 나 때문에 화장실에 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도 내 기억이 아니라 술자리 일행이 말해줘서 알게 된 사실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구토한 뒤에야 비로소 진짜 술이 시작된다는 선배도 있었다.


그래도 집은 찾아가니까

참 신기한 것은 술먹고 아무리 꽐라(?)가 되어도 용케 집을 찾아간다. 집에 가는 버스를 그 흐리멍텅한 눈으로 잘도 인식해서 집에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산동네 꼭대기였던 우리집까지 찾아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넘어졌단다. 엄마 말씀으로는 "소 자빠지는" 소리가 들렸다는데. 집에서도 욕실을 토사물 범벅으로 만들어놔서 엄마가 온갖 쌍욕을 하시지만 이미 맨정신이 아니므로 들리지도 않는다. 


동아리 입회식 하나

깨어나보니 이 낯선 곳은 도대체 어드메인고. 알고 보니 선배 자취방이다. 자취 경력이 짱짱한 그 언니는 본지 며칠 되지도 않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새파란 새내기에게 "속은 괜찮아?" 라고 웃으며 여유롭게 밥상까지 차려내온다. "어제 기억 안나?" 전~혀 안난다. 술을 주는 대로 다 받아마시고 술먹은 이들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학내 구석구석을 미친듯이 걸어다니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러다가 지구를 들이받고. 얼굴에 세로로 긴 상처가 나 있다. 놀래라. 술먹고 끊긴 기억을 늦게나마 떠올리기도 한다는데 몇 십 년이 지나도 내겐 없는 기억이다. 지금은 광대 부근에 남아있던 흉터마저 사라진지 오래다. 


동아리 입회식 둘

처음에 치른 입회식은 동기 없이 나혼자 치렀고 몇 달 뒤 드디어 동기가 둘이나 생겨서 한껏 들뜬 동아리 선배들이 성대하게(?) 우리 기수 입회식을 치러줬다. 그 유~명한 사랑주를 준비해서. 내가 학교다닐 무렵엔 전국에서 거의 사라진 병폐인데도 우리 동아리에만 여전히 그 몹쓸 사랑주가 남아있었다. 내 대에서 끝났지만. 한번도 씻은 적 없는 커다란 징에 막걸리, 맥주, 소주를 가득 찰 만큼 들이붓고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뭐 하나씩을 집어넣는다. 깔끔하게 얼굴만 씻는 사람은 양반이다. 담뱃재도 털어넣고 바깥 풀밭에서 풀도 떼어다 넣고 흙도 집어넣고 이 정도는 그저 고마울 뿐. 가래 농도가 짙고 점도가 유난히 끈적하기로 알아주는 선배가 가래침도 뱉어넣고-이쯤되면 고개 돌리는 분들 벌써 있겠지만 아직 멀었어요.- 발을 씻는 선배, 마실 때 번거롭지 않게 하마고 그 모든 건더기를 양말에 밀어넣고 짜주는 선배. 마지막은 선배 두어 명이 징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조금 있다가 나온다. 진짜라구. 징을 얼굴에 대자마자 으악 지린내가 확 풍긴다. 진짜 이건. 하아~. 


지금이라면 죽어도 절대로 동아리고 뭐고 안 들어가고 말지 했을텐데 그땐 왜그리 바보같았는지 그래도 좋다고-좋을 리가 없지만- 하라는 대로 했다. 우리동기 셋이서 가운데에 서고 나머지 선배들은-다른 동아리 선배들까지 몰려와서- 빙 둘러 앉아 '사랑가'를 부르며 징 사발에 있는 술이 동날 때까지 마시고 토하고 마시고 토하고... 징을 실제로 뒤집어서 보면 알거다. 징이 얼마나 큰지를. 지금까지도 내 상태가 별로인 것을 보면 사랑주가 내 몸속 어딘가에 남아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도대체 어느시대 사람이길래 그런 걸 먹었냐고 하겠지만 그렇게 오랜 일 아니다. 우리 동아리가 좀 유난했다.


술 따를 때 나는 소리

작가가 쓴 이 소리에 대한 얘기를 읽기 전에 나도 떠올려서 메모해 두었는데 나처럼 술 따르는 소리를 좋아하는구나. 호리병에 가득 담긴 안동소주를 잔에 따를 때 나는 "꿀럭꿀럭",  "딸딸딸딸" 소리가 듣기 좋아 그 소리에 벌써 반은 취한다. 호리병 목이 조금 긴 편이어서 두 세 잔 따를 때까지도 그 소리가 난다. 그러면 잔을 놓고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감상에 빠진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저 좋다. 그 소리를 되새기고 향을 맡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헤벌쭉해진다. 중독성 강한 맑고 다정한 소리다. 이 소리가 맛있어서 자꾸만 술을 따르고 싶다. 45도 짜리 안동소주를 그렇게 따랐다가는 그냥 가는 수가 있어 각별히 절제해야 한다.


한 잔 더

술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남편은 바비킴 노래 '한 잔 더'를 좋아해 즐겨 들었다. 다 아는 노랫말인데도 들을 때마다 둘이서 키들대고 웃는다. 그 노래에서 묘사되는 술 마시는 장면들, 술꾼들 대화, 그리고 여러가지 술마시면 나는 소리들이 술을 부른다. "한 잔 더"가 화를 부르는데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순간 숙취라는 지옥을 맛보게 된다.   


골드스타 냉장고

이건 술 얘기가 아니지만 나도 이 냉장고를 떠올리면 가슴이 찌르르하다. 오래 전 2월 어느 날이 떠오른다. 중고로 7만원에 주고 산 냉장고가 기특해 가끔 쓰다듬으며 말도 걸고 예뻐했더랬다. 엘리베이터가 없던 3층 빌라에서 반지하로 이사하던 날, 이삿짐센터에 이사 맡길 비용도 없어서 남편과 남편 친구 둘이서 3층에서부터 1층까지 냉장고를 낑낑대며 지고 나르는데 눈물이 나는거야. 속상하고 이게 뭔 짓인가 싶고. 그나마 젊으니까 라고 자위하려 해도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고. 그깟 냉장고 그냥 굴려서 버려버리면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그렇게 힘들게 옮긴터라 냉장고 여기저기에 찍히고 긁힌 자국이 남았지만 그 뒤로도 제 몫을 너끈히 해주어서 늘 고마웠다. 하지만 가끔 이사하던 날이 떠올라 괜히 울컥하곤 했다. 그러다가 고장이 나서 양문형 냉장고로 바꿨는데 한동안 새 냉장고에 정을 못 붙였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함께한 동지는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니. 


내가 겪은 술에 관한 얘기만 해도 숱한 일들이 넘쳐난다. 많이 취한 선배가 역 광장에 앉아서 "누가 불켰어? 불 꺼" 라고 했던 얘기에 깔깔댔는데. 오토바이 뒤에 탔던 술취한 선수가 오토바이 운전하는 선수 등짝에 그대로 토한 얘기, 자기 토사물을 모래밭에 열심히 묻었다던 사람, 술마시던 컵에 그대로 게웠다는 사람 등 누구에게나 조금은 웃기고 황당하고 잊히지 않는 술에 얽힌 얘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책도 그런 얘기들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다. 첫 부분 김치 얘기에 목구멍을 깍깍 대며 웃었다. 작가가 몹시 유쾌한 사람이어서 각 장 마다 술 추억담을 재미나게 풀어낸다. 나와 비슷한 면도 있고. 술이 내는 소리에 집착(?)한다든가 하는. 


몇 가지 말이 조금 거슬렸다. 키링이라는 말에 좀 놀랐다. 열쇠고리 라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적응을 못해서 그러는건지. 요즘 사람들은 열쇠고리를 키링이라고 하나? 그것도 이상하고 "여자 밖혼술러" 굳이 명사형으로 이름을 붙이고자 해서 쓴 말인 줄은 알겠는데 그냥 "밖에서 혼자 술마시는 여자" 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까지 불친절(?)하게 말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한국어는 다른 언어들과 달리 '풀어쓰는' 게 특징인데 요즘 자꾸 말을 줄여쓰는 추세이다 보니 정체 모를 말들이 즐비하다. 줄여쓰려는 시도는 좋지만 자연스럽고 알아들을 수 있게 쓰면 좋겠다. 같은 발음을 빗댄 몇 가지 언어유희는 괜찮았다. 


가볍고 유쾌하고 발랄해 술술-작가 바람대로- 읽힌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깔깔깔 웃을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술 마시지 않고는 못배길걸. 술 한 잔에 추억 하나 아니, 여러 개를 안주삼아 실컷 떠들어도 좋겠다. 진짜 술꾼들에게는 조금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즐겁다면 그걸로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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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1-03-02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진아님처럼 너무 감정이입을 하게 될까봐 참았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술 이야기를 풀어놓으라고 하면 끝도 없이 떠들 수 있는 사람, 여기도 있어요.

저는 술 자체를 좋아하는 면도 있지만,
술을 함께 마시는 사람들을 참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문득 그시절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취했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서 뭐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samadhi(眞我) 2021-03-02 23:27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술자리가 좋았죠. 그래서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지키려고 기를 썼어요. 그럴 필요 없이 좀 더 흐트러져도 됐는데. 푸릇푸릇한 젊음 그 자체가 좋았지요. 의미도 없는 소리들을 그땐 참 진지하게 심각하게 떠들어대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들이 그저 즐거웠어요.

2021-03-05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5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6 1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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