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은 SF 라이프가 일천한 저에게, 코니 윌리스라는 이름은 낮선 이름이었습니다. 다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후에 계속 같은 판형, 같은 느낌을 주는 디자인만 낮설지 않았다고 해야겠습니다. 그저 책을 구매한 것은, 저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명성, 네뷸러 상이니 휴고상이니를 잔뜩 수상한 작가의 작품 선집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보여서 읽은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죠.


처음에는 첫 두 작품을 읽었습니다. <리알토에서>는 양자역학을 이야기 속에 녹여 놓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이상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으며, <나일강의 죽음>은 약간은 구식의 문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중력있게 읽기 어려웠습니다. 


지난 겨울에 이 두 편을 읽은 후에 그냥 덮어 두었는데, 하도 이런 식으로 덮어둔 책이 많다보니 정리를 좀 해야겠다 싶어서, 읽다가만 책들을 바지런을 떨면서 읽던 도중에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리알토에서>는, 마침 얼마 전에 [퀀텀 스토리]를 절반 가까이 읽게 된터라, 조금은 더 가깝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양자역학의 세미나 장소로 어울리지 않는 헐리우드에서, 양자역학의 신비를 머리로 배우려는 물리학자인 루스 베링거 박사가, 헐리우드의 매력을 마음껏 경험시켜주길 원하는 데이비드를 통해, 마침내 양자역학이 가진 불확정성을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기에 뚜껑 속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진리를 통찰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읽었지만, 실은 아직도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그런 이야기.


<나일강의 죽음>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듯 하지만, 막상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을 읽은지 너무 오래된 탓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람난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난 '나'의 이야기로, 하필이면 남편의 상대방도 함께 여행을 떠난 탓에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던 찰나에, 자신의 삶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과 함께 모든 것이 뒤틀리고 헝클어진 몽환의 여행을 계속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마침내 투탕카멘의 무덤에까지 이르는 이야기로, 마찬가지로 너무 뒤틀린 나머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도통 알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위 두 이야기에 비해,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명확합니다. 작가는 조금씩 보여주기를 하면서 독자를 작중 인물에게 조금씩 밀착시킵니다. 독자는 조금씩 주어지는 작중 인물의 처지에 대한 힌트를 통하여, 이들의 삶이 처음에 보았던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작중 인물들의 처지에 깊이 몰입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다룬 세기말적 느낌의 많은 영화나 소설들이 이미 있어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새로운 느낌은 좀 덜하지만 - 물론 소설은 1983년 작으로,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도 오래된 축에 들어가지만 - 이야기의 핵심에 접근하는 방식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치, 그림의 한 구석에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만을 일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조금씩 시야를 넓혀가면서, 실은 이 아이가 불타고 있는 저택에 갇혀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이며, 그 웃음은 죽음을 앞둔 광기의 웃음인 것을, 그림의 전부를 보게 되면서야 비로소 깨닫는 그런 느낌의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짧은 이야기인데, 이야기의 진행 방식도 워낙에 명확하고, 내용도 워낙에 분명한데, 30년도 더 지난 작품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에의 힘이 느껴지는 그런 단편이었습니다.


<화재감시원>은, 마찬가지로 1983년 작으로, 영국의 세인트폴 대성당을 나치의 공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1940년으로 시간 여행을 - 역사 수업 실습을 - 떠나는 한 역사학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통속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역사 인식을 작중 주인공을 통해서 담아내기 위하여 이야기의 플롯을 촘촘하기 진행해가는 작가의 매력이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작중 인물간의 갈등이 조금 설게 표현되는 듯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단편이라는 지면 상의 제약 때문이라고 이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역사적 사실 뒤에 숨겨진 많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을 조망하고자 하는 작가의 바램이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부 소행>이야말로, 가장 몰입하여 보았던 시리즈입니다. 가장 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위하여, 작가는 1925년의 그 유명한,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하는가 진화론을 가르쳐야 하는가로 공방을 벌였던 테네시 주 재판과, 당시에 실존하면서 창조론과 싸웠던 과학적 회의주의자 멩켄의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는 현재의 과학적 회의주의자로 살고 있는 롭에게 딱 붙여놓지요. 이야기 마지막에서 나오는 롭의 대사는, 과연 과학적 회의주의자다운 말인지, 혹은 어디가도 환영받기 어려운 과학적 회의주의자에게 찾아온 작고 짜릿한 변화를 의미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둘 중 어느 것이어도 이 이야기는 만족스러운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젯 밤, 늦은 시간까지 꽤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며, 아마도 코니 윌리스 선집의 두 번째 권도 구매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나쁘지 않았는데, 솔직히 다른 분들에게는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쿨럭)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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