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 신작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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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연히, 감상글이니까, 스포일러가 넘쳐납니다. 그걸 고려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아직 타자님의 글을 다 읽지 않으신 분들은 절대로 스크롤을 내리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D


0.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홈페이지에는, 속칭 영도빠가 많은 편입니다. 따라서 이번 타자 님의 신작에 대한 소식들이 빠르게 오고 갔고, 그에 대한 기대도 많았습니다. 아울러 쓴소리도 있었다는 것을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쓴소리는 바로, 타자 님의 작품에 열광하는 많은 독자들이 있는데, 과연 그 독자들이 타자 님의 작품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것이 열광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즉, 타자 님의 글에 대한 평가는 왜 없는가 라는 말이었죠.

'굉장하다!' '놀랍다!' 이런 감탄사만으로 점철된 평가 말구요. 굉장한데 왜 굉장한가, 놀라운데 왜 놀라운가, 같은 평가 말이죠.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서 이제 10주년 기념작을 낸, 게다가 과작(寡作)의 작가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의 작품을 출판한 - 10년 동안 드래곤라자, 퓨처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총 5편의, 분량도 상당한 글을 두드렸다면 분명히 과작은 아니겠죠 - 작가에 대해서, 작품과 작가에 대한 평가는 왜 이렇게 박하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정말 작가에게 열광한다면, 그 열광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저는 그런 지적에 별다르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이제 10년이 지난 작가이니,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평이 조금 더 다양하고 본격적으로, 그리고 조금 더 체계적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의 [그림자 자국]이, 타자 님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편으로, 쓴소리를 건네주셨던 분에게 변명아닌 변명을 드리자면... 타자 님의 작품은 읽으면... 비평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폴라리스 랩소디]는 아직 어줍잖게나마 비평글을 써내려갈 엄두도 나질 않는군요.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어줍잖게나마, 체계도 불분명하고 내용도 빈약하고 논리성도 상당히 결여한 글을 썼지만... [폴라리스 랩소디]는 한 5, 6년째 마음만 먹고 있고 글 읽는 횟수만 늘리고 있을 뿐이지 체계적인 글을 쓰질 못하겠네요.

그런 이유가, 타자 님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의 자세가 아무래도 분석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그렇지 않나, 이번 [그림자 자국]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더 하게 되었습니다. 글이 마치 보물찾기처럼 얽혀있어서, 한참 글을 읽다가보면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는 듯한 기분에, 보물을 하나 더 발견하려고 글을 읽지, 글이 독자의 삶에 던지는 주제에 천착하지 못하다보니까, 타자님의 글이 그렇다보니까 더더욱 그렇지 않나라는 변명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어줍잖은 감상을 시작해봅니다.


1.

이영도 氏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단호하게 '이영도 氏는 어떻게하면 인간이 서로를 더욱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가에 모든 관심이 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눈을 마시는 새(이하, 눈새)]에서는 그 관심이 케이건의 말을 통해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된 편이고, [폴라리스 랩소디(이하, 폴랩)]에서는 하리야 선장과 파킨슨 신부의 말을 통해 세련되게 표현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열렬한 독자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작가의 그런 의도가 작품을 더할 수록 너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작가가 한 innerview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감상론이라는 것은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감상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죠. 특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쓰는 글들과는 달리, 소설 장르의 글은 백인백색의 감상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독자는 모두 다른 별을 바라보죠. 그들이 바라보는 별이 같은 방향일 수는 있어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글은 권수가 늘어날수록, 그 글 속에서 점점 같은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작가의 주제를 향한 인식이 글로는 상당히 투박하게 드러남으로써, 독자는 갈림길에서 갈등할 기회를 잃었다는 느낌 말입니다. 물론, 기껏 읽었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글인지도 모르겠는 글이라면 정말 '대략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등산객이 산 정상을 바라보지만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버둥거린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글이겠지요. 그러나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한 다양한 경로와 흥미로운 과정이 있다면, 그 정상에 올라 별 흥미로운 것을 못느끼더라도 등산에 대한 호감을 가지는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작가의 근작들은,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흥미로운 과정과 끝내주는 정상에서의 탁트인 시야는 있지만, 경로는 하나뿐인 그런 느낌입니다. 한 편으로는, 작가가 자신이 가진 이야기의 주젯거리를 섣불리 버리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그런 경우 있잖습니까? 작가의 변신. 저는 이영도 氏가 어떤 식으로 변신할지 두려운 부분도 내심 있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작가의 주젯거리를 상당히 좋아하는 바라, 바라기에는 작가가 자신의 주젯거리를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에 실어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그림자 자국(이하, 그자)]는, 더 두고 읽어봐야 하겠지만, 그런 면에서 어중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산은 옅은데, 길은 짧은데, 흥미로운 과정은 너무 많고, 경로는 다양하지 못합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듣기보다는, 작가가 던지는 수수께끼를 푸느라고 정신 없이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모양새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책을 두 번 가량 읽었지만, 작가와 속내 있는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 듯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가 선사하는 모닝스타(강렬한 반전)는 독자에게 충분한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글에서 국가에 대한 의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최초작인 [드래곤 라자(이하, 드라)]에서 작가는 신화로서의 바이서스를 멸망시켜버렸습니다. 길시언 바이서스의 죽음은 바로, 마법검을 쥐고 소를 타고 다니는 기사의 낭만이 종막을 고했다는 신호죠. 이제 국가는 신화와 전설로 통치되는 곳이 아닌, 제도와 법으로써 통치되는 공간으로 바뀝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저의 어줍잖은 감상 [드래곤 라자]를 읽고, 에 적은 바 있습니다.)

이제 [그자]에서 바이서스는 또 한 번의 멸망을 예언받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이서스는 국가로서가 아닌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가 멸망합니다. 그러나,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자주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서도, 그리고 작년 말에 우리나라에서도 왕들이 자신의 권위를 잃게 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적 시대 배경'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작품을 보다보니까 독자들은 작가의 모닝스타를 줄기차게 맞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바이서스의 멸망은 왕가의 교체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중세적 프레임은 국가와 통치자를 하나로 보고 있는데 익숙합니다. 그리고 그런 프레임은 책을 볼 때만 유효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를 거세게 한 대 내려칠 수 있는 것이죠. 바로 우리의 제한된 프레임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그자]에서도 그런 모닝스타들이 여지없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가령 바이크를 타고 고글을 쓰는 이루릴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중세적 프레임 바깥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작가의 장치는 독자를 깜짝 놀래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작가가 이렇게 독자의 선입견을 파고드는 방식은 독서 행위에 유의미함을 줄 수 있는 기제가 됩니다. 그것이 다만 말초적이기만 하다면 금방 싫증이 나겠지만, 이영도 氏의 그런 방식은 비록 아직은 지엽적임에도 분명히 독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긍정직인 발전의 양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법이 신화가 되고 모험이 고전이 된 시대에, 바이서스 인간들은 '공존'이라는 단어 또한 옛사전 속에나 나올만한 단어로 치부하면서 마치 지금의 우리네 삶처럼 바쁘게 휘돌아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의미있는 부닥침이 있습니다. 위험은 가능성만으로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보다 성공은 희망만으로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런 의미있는 부닥침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희망만으로도 성공을 추구하는 목소리들은, 희망에 온통 기대이질 못하고 무언가 확실한 희망을 소망합니다. 마치 [퓨처 워커(이하, 퓨워)]의 할슈타일 후작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보다 희망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허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성공을 담보하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이 결혼이나 득자/녀의 수단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절망은 희망의 전제조건도 아닙니다. 절망한 자만이 희망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희망은 그것을 꿈꿀 자들이 아무런 이유나 원인없이,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희망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자]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은 희망 후의 성공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다그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들을 전쟁에서 잃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확실한 성공을 담보하기 위한 도구로 희망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은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미 v. 그라시엘이 할슈타일 후작의 구원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 대척점에는 '예언은 폭력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예언자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루한 사람입니다.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자신의 예언이 얼마든지 폭력적인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예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바이서스에뿐 아니라, 우리네 삶 속에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얼마전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이 생각납니다. 몇 백명이 한 날 한 시에 시간을 정해서 시험을 봐야하는데, 모두가 되는 시간에 딱 한 사람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한 사람만 희생을 감수하면 모두가 편할 수 있는데, 라면서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요즘은 그런 시대죠. 팍팍한 시대. 그래서 나의 한 마디가 99퍼센트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의 성공을 희망하면서 내뱉는. 그래서 요즘의 시대에 예언자같이 고루한 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신화가 되고 고전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요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단어들이 고루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겠지요.

결국 인간의 삶은 공존의 가능성을 시험받습니다. 성공을 희망하는 인간과, 위험의 가능성때문에 미래를 잃을 위험에 처한 드래곤은 자신들의 생을 걸고 무의미한 대결을 펼칩니다. 팽배했던 고립주의 때문에 드래곤은 인간과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하늘이 열린 상태에선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드래곤과 인간은 무시무시하게 충돌하게 됩니다. 지금 이 시대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처럼 말이죠. 그것은 무가치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은 미래를 잃었고, 인간은 현재를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화해의 탁자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바로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인물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자]에서 예언자는 그림자 지우개에 의해 무화(無化)하게 됩니다. 예언자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언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 빈 곳에는 드래곤과 인간의 공존을 돕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자리잡습니다.

무화한 아버지의 아들, 그는 결국 아버지 없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사생아는 아닙니다. 아버지가 인지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도는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구도입니다. 바로 기독교의 예수님 이미지와 같은 것이죠.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 있는 예수님. 그렇게 기독교의 예수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가장 먼저 연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소통이 있는 것이었죠. 사랑을 위해서 반드시 함께하는... 그래서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죠. 자신이 매개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꿈꾸는 삶은,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사는 삶은 아닙니다. 작가는 종교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작가의 글은 종교적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소통을 통한 사랑의 메시지는 종교적이니까요. 그리고 작가는 마음 더듬이가 긴 인간과 상처입은 드래곤처럼 인간은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고 싶어하는 개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테니까요.


3.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한 편으로, [그자]는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시간의 이야기를 그대로 닮아오고 있습니다. [퓨워]가 그랬었죠.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흘러온다. 인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죠.

작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자]에서도 미래는 변하지 않습니다.

늙은 왕이 젊은 왕으로 바뀌어도, 그는 에이다르 바데타에게 죽습니다. 프로타이스가 지워짐으로써 에이다르 바데타를 살리지 못하(ㄴ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래도 젊은 왕이 에이다르 바데타에게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미래는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은 예언자의 예언이 (어떻게든) 그대로 이루어짐을 통해 명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언자도, 미 v. 그라시엘처럼 놀라지 않은 놀람을 놀라야하고, 슬프지 않은 슬픔을 슬퍼해야하고, 이미 기쁜 기쁨을 기뻐해야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은 인간(본연)의 삶일까요?

인간은, 비록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뚜벅뚜벅 걸어야하는 존재입니다. 어두운 미래를 알기에 좌절하고 멈춰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바로 지금 사과나무를 심어야하는 존재입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미래를 알아야 하는 존재는 (본연의) 인간됨이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가 고정되어 있을지라도 오늘을 힘차게 살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알게된 미래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수동적인 인생은 스스로에게 허락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작가는 무릇 인간이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일 인육을 먹게 되더라도. 바이서스가 멸망을 향해 가더라도. 오늘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는 인간 본연의 마음가짐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단 강요이겠습니까. 희망은 성공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살아있기에, 혹시라도 미래가 고정되어 있더라도, 우리의 절멸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희망할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4. 그림자의 프로타이스한 자국

[그자]에서는 그림자 지우개라는 신비한 마법용구가 하나 등장합니다. 글의 전개에 핵심적인 소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지우개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립니다. 전작인 [드라]에서는 영원의 숲이 나옵니다. 스스로를 의심할 때 스스로의 일부가 조금씩 파멸되어 버리는. 결국 자신을 잃게되는 공간으로 영원의 숲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자]에서의 그림자 지우개는 타인에 의해서 인간 존재 자체가 창세 전부터 무효화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의 자신에 대한 폭력이 아닌, 타인의 자신에 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게 지워질 수 없습니다. 그 때 자신을 일깨우는 것은 지워진 자신 속의 흔적, 그림자 자국입니다. 그 자국이 단순한 찌꺼기라면 그것은 어떤 변화도 수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남다른 부분이었다면, 그래서 타인에게 깊숙히 각인되었다면, 그 자국은 자신을 오롯이 회복할 수 있도록하는 기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이 '프로타이스' - 프로타이스는 글 속에서 독특한 존재로 제시된 드래곤의 이름입니다. (너무) 쉽게 표현하자면 이단아입니다. 그래서 글 속에서는 '프로타이스하다'는 표현을 남다르게 행동한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글 속에서는 마치 엄친아같다 같은 형용사화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하게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작가의 전작인 [피를 마시는 새]에서 스카리 빌파라는 인물이 그렇게 독자를 화나게 하면서도 사랑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유추가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떼쟁이. 인간은 떼를 써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화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변화시켜야 하니까요. 미래가 고정되어 있기에 현재를 고정해야하는 삶의 비극은 미 v 그라시엘과 예언자라는 인물들을 통해서 충분히 넘겨보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인간도 미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래가 고정되어 있던 아니던 인간은 끊임없이 떼를 써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변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가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죠.

작품 속에서 황금드래곤인 아일페사스에게 가미가제를 날리는 바이서스 왕국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드라] 감상글을 통해 신화 시대를 뛰어넘은 국가가 이제 비로소 틀지어진 형태로 다스려지게 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가 변질된다면? 그 변질의 한가운데에는 애국심이라는 그럴듯한 논리가 있습니다. 개인 본연이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도구화되는 그 순간, 프로타이스는 없습니다. 그 현장 한가운데에는 변질된 '나는 단수가 아니다'가 있습니다. 내가 단수가 아니라면 복수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지만, 나는 하나입니다. 오롯한 하나가 되기위해 나는 단수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로써의 단수가 아닌 존재가 아니라, 다만 인간이 수량으로써 단수가 아닌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국가가 인간을 도구화해버린 변질의 의미죠.

그래서 인간은 반항해야합니다. - 그래서 인간은 프로타이스해야 합니다.

칼 헬턴트의 전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5.

이영도 氏의 최신작인 [그자]를 읽다보면 그의 전작(前作)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자]에서 전작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전지성은, 미래를 보는 무녀인 미 v. 그라시엘 그리고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인 노래의 불꽃 벨로린과 닮아 있습니다. 희뿌연 여명 전에 먼저 떠오르는 황금빛 드래곤은, 새벽의 사수가 쏘아 맞추었던 첫 일출을 연상시킵니다. 인간의 (조금 더 크고 자체적인 폭발력을 갖춘) 화살들이 첫 일출을 쏘아 떨어뜨리는 것까지. 따라서 [폴랩]에서 오스발이 '이 새벽에 두 태양 중 하나는 떨어져야 한다'고 말할 때의 그 느낌과도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비와 동거(!)하는 화가에게서 [마시는 새 연작] 속의 군령자를 떠올렸다면... 제가 너무 과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자]는 분명히 전작들의 향취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연하겠지만) 초기 두 작품인 [드라]와 [퓨워]의 것이 가장 진하죠. 발탄의 이름과 '말과 함께 친구 타기' 만으로도 작가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들은 즐겁습니다. 하물며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야물딱진 골조를 세운, 초장이 탐정의 추리소설이라면 아마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의 [드라]와 [퓨워]의 첫 독서를 추억하게 될 것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첫 작품 출간 10주년 만에 낸 기념작은, 따라서 독자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게 [그자]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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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08-12-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글 밑에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을 붙이시던데....동일인이시겠죠?^^

하리야 2008-12-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그그... 그렇겠죠? :D 아직 저런 꼬릿말을 다는 이는 저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