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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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사IN]이라는 잡지에 고 이청준 선생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김승옥 선생과의 일화를 기록한 글이 있어서 제 글의 서두에 게재해봅니다. 이청준 선생에 초점을 맞춘 글이지만, 김승옥 선생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합니다. 글은 문학평론가인 신형철 씨가 글을 썼습니다.


서울대 불문과 60학번 김승옥이 있었고 서울대 독문과 60학번 이청준이 있었다. 둘 다 문학을 사랑했고 또 둘 다 가난했다. 1961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되었던 김과 이는, 김의 주도 아래 이런 작당을 한다. 우리 신춘문예에 한번 덤벼보자. 까짓 거, 한국문학 별 거 있냐. 붙는다. 붙으면 그 상금으로 다음 학기 등록을 하고 혹여나 떨어지면 미련 없이 입대하자. 아니나 다를까 김승옥은 1962년 1월1일자 한국일보에 등단작 <생명연습>을 실었다. 이청준은? 입대했다.

곱씹을 만한 데가 있는 에피소드다. 김승옥은 ‘까짓 거’ 하면서 번뜩이는 소설을 써내는 타입이었다. 쓰고 나서 통속소설이라고 자평한 게 걸작 <무진기행>이었고, 코믹한 거 한 편 써보자고 온돌방에 엎드려 쓴 소설이 동인문학상 수상작 <서울, 1964년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청준은 달랐다. 그는 제대 후 1965년에야 <퇴원>으로 등단한다. 이청준은 까짓 거 하면서 써내려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시사인 제48호, 2008. 8. 12일자]


위의 글을 소개하면서 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참고로 제 글에서 인용되는 본문은 문학사상사에서 출판한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대표작품집 / 김승옥] 제 5판(1994. 2. 28. 발행)에 수록된 [무진기행]의 것을 사용했습니다.



1. 60년대의 작가, 김승옥. 그리고 무진기행

흔히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김승옥 氏가 단연 손꼽히고 있습니다. 서울대 문리대학 불어불문학과 60학번 입학, 65년 졸업.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 그리고 그의 등단작인 [생명연습]과 그의 중편 중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환상수첩]은 모두 그가 대학 재학 중인 20~25살 연간에 쓴 작품들입니다. 몇몇 꽁트를 제외하고는 24여편의 작품만을 남긴 김승옥 氏가 그의 대부분의 대표작을 쏟아낸 1960년대 초는 격동의 시기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우리 민족이 민주정체를 수립한 이후로 최초의 정권교체가 반정부 시위를 거쳐 대통령을 하야시키면서 얻어낸 혁명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국민들이 만들어준 정부가 1년도 채 견디지 못하고 군부 세력에 의하여 좌초한 상황 또한 혁명적인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1960년대는 그런 격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상황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권 당시의 원조 경제,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벗어버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무진기행]을 살펴볼 때, 주인공인 윤희중이 어느 제약회사의 간사로 곧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있다는 부분과, 윤희중의 후배인 무진중학교 교사 朴이 가장 성공한 선배로 윤희중의 기수에서는 윤희중과 세무서장인 조를 꼽는 장면, 그리고 무진중학교 발령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온 음악선생 하인숙이 끊임없이 서울행을 꿈꾸는 것들을 한군데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무진이라는 공간이 가진 도시와의 단절성이, 무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에 대한 하나의 환상을 갖도록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을, 작가는 여러 세부적 장치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무진의 단절성을 안개가 만듭니다.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 주변의 것들이 마치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는 듯이 무진은 단절되고 소외됩니다.

따라서, 김승옥 氏의 소설에서 도시는 바로 산업화의 장소이자 주인공을 제외한, 특히 무진으로 형상화되는 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동경의 장소입니다. 도시는 성공의 장소이자 이상의 장소이며 무릇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경해야 하는 장소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 초반의 공업 중심의 사회구조로의 재편은 우리나라의 인구 구조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를 흔들어놓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소설 첫머리에 무진을 찾아오는 시찰단의 대화는 의미심장합니다. 무진이라는 공간은 특산물도 하나 없이, 항구나 평야도 하나 없이 육만 몇천 명이 그냥저냥 살아가는 무진. 그 곳은 윤희중의 말대로 도회지의 동향인에 대해서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없는 공간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도시를 동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승옥 氏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누구에게나 동경의 공간인 도시를 탈주하고 또 탈주하고 싶어합니다. [환상수첩]에서, 선애를 잃고 영빈으로부터 문학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본마음을 '무관심한 표정으로 가려버리는 법을' 배우도록 해준 서울로부터 탈주하는 정우처럼, 윤희중도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옇든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에 '몇 차례 되지 않는 무진행'을 통해 서울에서의 탈주를 성사하였던 것입니다. 즉, 김승옥 氏의 주인공들에게 서울은 탈주의 장소일 뿐입니다. 다만 윤희중은 정우나  [서울, 1964년 겨울]에서의 김처럼 완전한 탈주 - 즉, 죽음 - 를 감행할 용기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무진기행]은 [서울, 1964년 겨울]이나 [환상수첩]과는 약간의 방향성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부분은 이후의 글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60년대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던 시간입니다. 김승옥 氏는 이런 도시화와 산업화의 시공간적 배경의 상징물인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인간에의 '무관심'에 대한 무기력함을 시니컬하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이 소통 없는 60년대 식의 인간상을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직접 다루고 있다면, [무진기행]이나 [환상수첩]의 경우에는 서울을 꿈꾸는 군상을 통하여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기력한 고향

이런 격동의 시기에, 그러나 고향이라는 공간은 그다지 바랄만한 공간만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시나 소설에서 우리가 만난 고향이라는 이미지은, 피안의 세계이며 이데아의 공간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친 영혼을 품어주는 공간이며 인간사의 애처로움을 보듬어주는 공간인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김승옥 氏의 고향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윤희중이 돌아간 무진은, 결단코 그의 부인이나 장인의 바람대로 '한 일주일 동안 긴장을 풀고 푹 쉬었다가 올' 수 있는 공간은 아닙니다. 고향은 외려 무관심보다 더 한 무기력을 심화시키는 공간입니다. [환상수첩]의 주인공인 정우가 돌아간 고향은, 생각하지 못하는 갈대가 되어버린 시인 윤수와 폣병에 걸려버려 약값을 위해 춘화를 파는 법대생 수영, 그리고 화마에 온가족과 자신의 눈을 잃은 형기가 무기력하게 도사리고 있는 공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희중이 돌아간 고향은 '모두가 전쟁터에 몰려갈 때' 골방에 갇혀버린 신세의 고향이며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를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수면제일 뿐인 무기력한 공간입니다. 고작해야 사람도 아닌 개들이나 '그 눈부신 햇볕 속에서, 정적 속에서 혀를 빼물고 교미하'는 공간일 뿐입니다.

마치 겨울바람의 스산함때문인 듯 마음이 소슬하여질 때, 우리는 있지도 않은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 안온함 속에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위로받으려 하지만, 작가는 냉정하게 그런 독자의 마음을 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향은 안락을 주는 공간이 아니라 무력함에 몸을 비틀며 하릴없이 골방에 처박혀 오지 않는 잠을 청해야만 하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윤희중은 고향에서 쓸쓸합니다.

만날 수 있는 인물들마저 이러한 윤희중의 쓸쓸함을 심화시킵니다. 도시의 무관심을 피해 돌아온 고향은 속물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일 뿐입니다. 조는 하인숙을, 하인숙은 무진의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박마저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속물적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박입니다. 고향이라는 공간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순수를 옷입고 있는 박이라는 인물마저도, 윤희중의 성공앞에서 열등합니다. 고향이라는 이미지와 가장 가깝게 연결되는 순수가, 도시의 세속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릎 꿇는 이미지를 통해서 작가는 갈곳없는 우리네 신세를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3. 유예된 죽음

김승옥 氏는 자신의 인물들을 모두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생명연습에서도,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환상수첩에서도, 그들은 모두 갈 곳 없어 죽음을 선택합니다. [환상수첩]에서 '될 수 있는대로 살아보'라던의 오영빈의 말은, 자신의 갈 곳을 잃어버린 정우에게도 혹은 선애에게도 단지 죽음을 확정짓는 선고였을 뿐입니다. 될 수 있는대로 사느니 그 삶을 마치겠다는 죽음에로의 선택. 선애는 뼈에 사무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혹은 한 번 쾌락을 맛본 자가 쾌락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감히 얘기할 수 있을까요? ... 아무리 발버둥쳐도 별 수 없이 눈에 보이는 구멍이지요. 찬바람이 술술 새어들어오고...' 선애의 이런 말은, 순수를 잃고 이제 생활인이 되어가는 자의 처절한 자기 독백일 뿐입니다. 작가의 눈에 그러한 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죽음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윤희중은 약간 다릅니다. 그는 군에 자원하려는 자신을 말리는 어머니,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오욕을 어떻게 넘길 줄 아는 인물입니다. 윤희중이 삶에 유연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작가의 눈에는 두 가지의 인간 부류가 있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의 나와 안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다만 만족할 수 있는 생활인과, 김처럼 아내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순수의 죽음 앞에서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예외가 있다면, [무진기행]의 첫머리에 나오는 미친 여자나, [환상수첩]의 수영처럼 미쳐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세상의 무관심과 무기력에 대해 스스로를 단절하는, 죽음의 다른 장치이므로. 결국 작가의 선택할 길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다만 윤희중은 아직 죽음을 유예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예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그의 아내인 영, 입니다. 4년전 그의 곁을 떠난 희 때문에 자신의 순수에 큰 타격을 받았던 윤희중은, 십수년 전에 6.25를 피해서 오욕에 떨며 골방에 갖혀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갔던 것처럼, 서울행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유예합니다. [환상수첩]에서 순수를 찾기위한 여행을 떠났던 정우는 결국 되찾은 순수와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오르지 못하지만, 윤희중은 순수와 죽음의 중간위치에 어중간하게 선채로 서울행 열차를 탔고, 자신'에게서 달아나 버렸던 여자에 대한 것과는 다른 사랑을 지금의 아내'인 영에게서 발견합니다. 자신의 순수했던 사랑을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상실한 채 죽음의 수렁에 직면했던 윤희중은, [환상수첩]의 오영빈이나 [서울, 1964년 겨울]의 나, 혹은 안처럼 생활인의 사랑을 가지고 지난 4년을 지내왔고, 그것은 바로 유예된 죽음입니다. 김승옥 氏의 주인공 답지 않은 생활인인 윤희중은, 그러나 이번에는 순수와는 무관하게 생활인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 잡다한 생활에서 기인한 사건들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던 무진행을 택하게 되었고, 이 곳에서 죽음에 직면합니다. 하인숙이 바로 윤희중을 죽음으로 안내하는 사신입니다. 하인숙이 암살자라는 말이 아니라, 하인숙은 바로 윤희중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을 상징한다는 말입니다. 도시를 동경하는 속물들을 싫어하지만, 그 자신도 도시를 동경하며 무관심한 도시의 면모까지도 함께 가지고 있는 하인숙은, 바로 4여년 전에 윤희중의 곁을 도망가버린 동거녀 희와 같은 인물입니다. 잠못이루던 윤희중이 통금해제 사이렌과 함께 잠드는 순간에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버린 술집여자의 죽음 앞에서, 그녀의 죽음에 무임승차하는 마음으로 윤희중은 하인숙에게 마음을 줍니다. 희를 잃고 무진으로 향했던 윤희중은, 하인숙을 얻어 서울로 향할 생각에 잠깁니다.

하인숙은, 순수와 죽음의 사이에서 다만 죽음을 유예하고 있는 윤희중의 손을 잡고 그가 잠시 잊고 있었던 내면의 순수에의 상실을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성악 전공자, 순수를 조롱하며 자신의 연애편지를 내보이기도 하는,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그런 하인숙에게서 윤희중은 '감상이나 연민으로써 세상을 향하고 서는 나이도 지난' 처지에, 그녀에게서 조바심을 빼앗고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기 위해 달려가지만, 그 달려감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마치 서로 조금씩 순수를 잃어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이후를 어쩔 줄 몰라 약간의 시차를 둔 채 죽음에 이르는 [환상수첩]의 정우와 선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희중은 깨닫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선입관' 때문이며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그래서 윤희중은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마 다음에, 자신이 순수를 상실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쯤이면 아마 윤희중은 죽음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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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1-0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룩하신 주님의 영광에 의지하여...
윤희중은 죽지 않습니다. 속물은... '한 가지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우기는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야, 거의 논문 수준의 리뷰인데요...^^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하리야헌처크 2008-12-06 20:37   좋아요 0 | URL
아우... 감사합니다. ^^a 부끄럽네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