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라, 하지 마라, 옳다, 옳지 않다, 같은 언명은, 아이를 존재함에서 주체됨으로 ‘성숙’해 갈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있도록 하는 셈이다. 어찌보면 교육자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상황을 버리지 않는다면, 교육자 또한 스스로를 존재함에 여전히 두고 있는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지도, 주체된 교육자로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균열은 양방향으로 작동해야 하는 것. 교사가 학생에게, 학생은 교사에게?

중단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으며, 일부는 교육적으로 성숙의 향상을 지향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필요도 있다. 비교육적으로 중단을 행하는 방식은 우리가 직접적인 도덕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단은 아이와 아이의 시작에 관해 교육자가 ‘틀렸어!‘ 같은 정죄나 ‘잘했어!‘ 같은 칭찬처럼 직접 판단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문제는 피드백 그 자체가 아니라(물론 이것도 중요하고 어느 정도는 유용하지만), 그 판단이 교육자로부터 나와서 아이에게 바로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판단 아래에서는 아이가 주체로 출현할 시간과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단지 교육자의 판단 대상이나 교육자의 판단에 종속된 자로 남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중략) 다시 말해 비성숙함과 성숙함의 차이는 자신의 욕구의 대상이 되느냐, 보다 정확하게는 자신의 욕구에 종속되느냐, 아니면 그것의 주체가 되느냐의 차이이다. 아이와 학생의 욕구가 바람직한지를 교육자가 결정짓는 한, 아이와 학생은 교육자의 의도와 활동의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의 핵심적 도전은 아이와 학생에게 그들의 욕구가 바람직한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학생의 삶에 이것이 살아 있는 질문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도덕교육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안에 욕구가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따르는 행위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아이와 학생이 자신의 욕구와 관계를 설정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진짜 공간과 은유적 공간을 열어줄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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