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를 열면 고양이가 죽는지 죽지 않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건 앎이 삶에 체화되는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알아차린 채 다음 앎을 위해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렇게 숨가쁘게 흘러가는 앎은 결코 삶에 가 닿을 수 없다. 관용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것과, 관용의 삶을 사는 것, 관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삶이 더 중요할 것인데, 우리는 앎의 창고를 게걸스레 채우는데 삶을 소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앎이 필요한 것은, 삶을 위해서가 아닌가? 그래서 삶과 유리된 앎을 지적 ‘허영’이라고 폄훼하는지도 모르겠다. 철학은 그런 것인가보다. 급한 호기심으로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고 마는 것이 아닌, 궁금함에 천천히 사유함으로써 다가서는 것.

우리는 종종 궁금해하는 것과 호기심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두 가지 다 무관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과 달리 본인과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냉철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냉철하게 궁금해할 순 없다. 호기심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며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발을 올려둔 것이 바로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절대로 반짝이는 대상을 쫓지 않는다. 절대로 고양이를 죽이지 않는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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