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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3 ㅣ 소설 보다
강보라.김나현.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평점 :
‘2023 봄’호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감흥으로 다가왔다고 얘기해야겠다. 이것은 자기 믿음의 변화란 외부 세계를 자기 내면으로 불러들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수용의 과정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에 대한 발견이다. 내 오랜 방어적인 인식이 이젠 찢어지고 벌어져 외부가 들어와 자리 잡고 섞이는 것에 제법 너그러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자기 계급이 가진 특권이라는 선민의식을 자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매일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것들이 자기 내면의 의도와 얼마나 무관하게 벌어지는지, 또한 자기 내부 밖의 모든 세계에 대한 이해란 것이 얼마나 자기 편의적인지를 확인하는 것, 이러한 사태들을 마주하게 되고 이것들이 빚어내는 고통의 원인을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만큼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이야기들이라 할 것 같다. 너절한 시작 말은 거두고 작품의 이야기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1) 수록된 순서를 조금 바꿔, 김나현 작가의 단편 「오늘 할 일」로 감상의 글을 시작하련다. 제목이 말하듯 다음 날 할 일을 하루 전날 식탁에 마주앉아 한 쌍의 맞벌이 신혼부부는 각자의 다이어리에 계획을 쓴다. 그 계획이라야 별 것 아닌 ‘출근할 때 책읽기. 바닐라라테 마시는 것, 일할 업체를 확정하는 것’처럼 단 세 줄을 넘지 않는 지극히 뻔한 평범한 일상이다. 자신들의 규모에 버거운 대출을 받아 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둘이 번다.”는 믿음에서 저지른 일이고, 그 믿음으로 결혼을 했다.
이야기는 초반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하는데, 남편 선일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갭이어, 이 단어의 자신만만함, 마치 계획에 다가가기 위한 준비의 어떤 완전성을 생각게 하지만, 이처럼 위선적인 단어도 없을 것 같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충전하는 시간이란 사실 언제든 시작하기만 되는 그런 조건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추상의 시간일 것이다. 선일의 행위에 대해 화자인 ‘나’는 술기운을 빌어 ‘사기 결혼’이라고 어그러진 결혼 생활에 항의한다.
‘나’는 출근할 때, 책을 읽지도 못하며, 그나마 다행스럽게 옆자리 동료가 사다준 바닐라라테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곤 촉박한 일정과 빠듯한 예산으로 포스터 발주조차 하지 못하며 일할 업체를 확정짓지도 못한다. 선일역시 자신이 주장해서 적는 ‘오늘 할 일’의 계획이지만, 갭이어라는 텅 빈 시간을 채울 일도 어긋나기만 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빗나가는 계획을 보면서 인문학자 ‘고미숙’의 말을 떠올린다. “이 끔찍한 계획을 버려!”, 삶의 울타리를 꽁꽁 묶어 놓는 “우라질 계획을 버리라”는 목소리를.
주인공 ‘나’의 상사로 등장하는 “게으른듯하지만 어느새 능청스럽게 일을 해내는” ‘백 팀장’이야말로 선일과 ‘나’가 체득하여야 할 삶의 하나의 요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인물은 외도로 이혼당하고 모텔 방을 거처로 외로운 삶을 전전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는 생명차원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 줄 줄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다이어리에 “두서없이 할 일을 욱여넣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백지로 남길 수”도 있지만, 무계획의 삶을 살아내는 것, 즉 ‘나’와 ‘선일’에게 요구되는 건 두 사람이 이룬 가족의 관계를 물질적 성취를 향한 달음질이 아니라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아무에게나 오늘이 괜찮은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일 것만 같다.
아무튼 김나현의 이 작품은 소박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문장으로 그야말로 만끽한 소설이라 하야겠다. 피식 피식거리게 하는 웃음 코드들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변화하려할 때마다 부드럽게 얼굴을 펴준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이다.
(2) 강보라 작가의 단편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마흔 줄에 접어 든 예술비평을 직업으로 하는 ‘재아’라는 인물이 발리 우붓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푸는 정경으로 시작된다. 이 인물은 자신의 눈과 귀에 들어 온 게스트하우스의 풍경을 스캔하며 “싸구려 향냄새”와 자신의 기억 속 환경과 다름을 감지하며 “그냥 호텔로 갔어야 했다.”고 자신의 결정을 자책한다.
이 시작 문장에서 이미 자신의 계급적 취향이 예전과는 다른 것이며, 사실혼 관계에 있는 ‘현오’란 인물의 인정에 좋은 기분을 느끼는, 즉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취향과 관점으로 정해진 길을 걷듯 편안하게 예술계에 진입한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에 안착한 일종의 문화 엘리트 계급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여성임을 예고한다. 이 인물이 유명 요가 구루가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한 며칠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기간, 사람들과 내키지 않는 어울림의 과정에서 무쌍하게 겪는 내면의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젊음과 나이듦에 대한 은근한 자격지심이며, 사회적 연결망에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경시와 우월적 감각, 그리고 자기의 계급적 안전에 대한 의식의 확인이다.
게스트하우스의 호경이란 젊은 여성의 일탈에 질시의 감정을 갖으며, 그녀가 재아 자신의 신분을 감지하면서 변화된 태도를 보이며 접근하는 것에 경계의 감정을 지닌다. 소설의 표제는 호경이 재아에게 선물한 우붓의 노점상에서 산 손바닥크기의 그림이다. 호경이 맥락없이 건네는 그림 선물에 느낀 불쾌했던 감정이 유명 영화감독의 딸이며 실험예술을 하는 아티스트임을 알게 되자, 이렇게 바뀐다. “누군가 그 작은 모험에 대해 묻는다면 즐거웠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인간은 자기 손아귀에 쥔 편익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존재이다. 그래서 계급적 특권에 한번 수렴한 인간이 주변의 인간들을 이해하는 것 역시 그 편익이라는 편협성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기 자각을 상실하는 것 같다. 나는 재아가 자기 계급의 불완전성이나 불온함을 온전히 깨달았다고 믿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비교적 오래된 비판의식이다. 새롭지 않은 문제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허위의식들은 계속 드러내어 해체되어야 할 이 세계의 과제일 것이다.
(3)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은 화자인 ‘나’가 고모인 ‘순정’과 함께하며 지닌 애증, 그리고 친구인 ‘수’에 대한 반감의 그늘에 있는 억압된 진심, 고모와 엄마 ‘미애’가 지녔을 법한 또 다른 애증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언뜻 뜬금없는 소재인 로봇청소기가 등장하는데, 그 기발한 상징성에 주목하게 한다. 내겐 소설 속 열연하는 수와 고모 희정과 엄마 미애를 넘어서는, 이들 모두를 담아낸 표상처럼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소원한 관계로 멀어졌다고 여기는 수에게서 “줄게 있다”는 문자가 수신됨을 계기로, ‘나’와 수와 고모와 미애의 사연들이 서로 엮여 ‘사랑과 그 결점’들의 자취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다. ‘나’가 ‘엄마’에게 선물한 식기세척기로 인해 야기된 고모의 질투를 삭이기 위해 엉겁결에 고모에게 선물한 것이 로봇 청소기다. 이 로봇 청소기가 수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다시금 ‘나’에게 돌아 온 것인데, 바로 이 순환의 역사를 온 몸에 새긴 실체가 로봇 청소기인 것 같다.
그것은 외롭게 암 투병을 하던 고모의 방에서 그녀의 삶의 현실을 고스란히 목격한 존재이며, 이제는 벽을 향해 무섭게 반복하여 돌진하는 고장 난 청소기이기도 하다. 수가 돌려주며 청소기가 그저 장애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딪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을 흘려버리고 자신의 집에서 작동시켰을 때 ‘나’는 그 무서운 돌진을 보고 달려가 로봇 청소기를 가슴에 안아든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스위치를 단순히 끄는 행동이 아니라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인데, 이 장면은 왠지 가슴이 뭉클한 감각을 일으킨다.
미움, 저주, 연민, 사랑, 그리고 고통과 우울, 이 온갖 감정이 충돌하는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이 겪는 이 한편의 풍속화는 아마도 그 그림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독자 저마다의 동일시가 가져다주는 위안의 창작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선 내 자신을 껴안아 주어야겠다. 그리고 말을 잊은 지 제법 오래된 가족들을 안아보아야 할 것 같다. 삶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잃고 사는 것만 같다.
세 편의 작품들, 어렴풋이나마 빈약한 자아의 인식을 하게 되는 문화 권력에 심취한 인물,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학습을 내면화하고 생에 대한 시선을 변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삶의 표준, 혹은 정상성이란 것이 망상임을, 경계를 표류하는 존재임을 흐릿하게나마 알아가며, 세상의 이해를 위한 작은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어느 소설이 이러한 얘기들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마는, 여기 수록된 김나현, 강보라, 예소연의 작품들은 딱딱하게 굳은 독자 내면의 벽을 허물어뜨릴 만큼 밀고 들어오는 힘이 강한 이야기들이었다고 해야겠다.
정말 감흥이 잇따르는 그런 작품들이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특히 김나현 작가는 아마도 그녀가 하는 창작의 걸음을 지켜보게 할 것 같다. 내가 지니지 못한 해학의 코드를 지닌 작가, “정말로 오긴 오는 것인가”하며 그 주춤거리며 둘러보는 시선에 깃든 마음이 정말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