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을 사로잡은 문장을 요즘 빈번하게 떠올리게 되는데, 현시(顯示)적 욕망에만 매달리는 가족주의 근간의 위기를 지적하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그 끔찍한 우라질 계획을 버려라!”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시하곤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취지이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란, 즉 계획이란 30,40평형 아파트를 사고, 수입차를 타야하며, 소위 일류대학이란 곳을 나와야하고....사 - 한글의 이 ‘사’자는 醫師, 判事, 辯護士와 같이 한자로는 모두 다르다 - 자를 붙인 전문직업 등등의 현시적, 물질적 욕망의 추구에 집중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의 일부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박탈감에 허우적대고, 이름뿐인 스위트 홈은 이내 박살나고 만다. 이러한 양상을 바라보면서 바로 이것, 계획이란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극단의 양극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 생각이란 개개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은 『물질과 기억』 2장에서 인간의 기억을 습관기억과 이미지기억으로 구분하고, ‘주의 깊은 식별(la reconnaissance attentive)'이라는 처음 본 대상이나 분석이 필요한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 참조해야 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 용어 개별을 설명하는 사치는 배제하고 습관기억만 짧게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습관기억이라는 것은 살고 있는 동네 골목길을 걷는다든가, 책을 읽다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밑줄을 긋기 위해 연필을 쥐는 것과 같은 어떤 의지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억이다. 개념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이것과 유사한 심리학 표현이라면 직관(直觀) 정도로 말해도 될 것 같다. 이것은 철저하게 평소 사람들의 관심이 준비된 반응행동, 즉 삶의 즉각적 유용성을 위한 기억이다. 습관으로 신체에 체화된, 익숙하여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이다.
그런데 자신이 잘 알고 있지 못하거나 새로운 것은 이 기억만으로 반응 할 수 없다. 즉 식별하고 파악하며 해석하여야 어떤 반응을 할 수 있다. 그저 침묵 할 것인지, 어떤 선택된 말이나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대중 언어로 말하자면 깊이 있는 사유와 많은 참고 기록들, 문헌을 참고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문제에 즉각 반응한다면 그것은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한 것, 즉 자신이 아는 그 편협하고 알량한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것이 올바를 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 한다.
참고 문헌을 찾아보아야겠다는 결정도 사유이고, 그 결과 이를 실천하는 것도 사유의 결과다. 그리고 나서야 새롭거나 알지 못하는 대상과 문제에 대해 최종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유와 사유의 실천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요한다. 즉 주의깊은 식별이란 습관기억의 유용성을 포기하고 내면의 심층에 있는 과거의 이미지 기억들을 층층이 소환하여 대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사용하지 않았던 부가적 에너지와 시간의 집중적 소비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부지런해야 하고, 능동적 행위가 요구된다.
나는 이 이미지 기억을 소환하여 층층이 대조 분석하는 판별이라는 사유의 과정을 하지 않고 습관 기억에 의존해 행동하고 말을 뱉어내는 것을 ‘지적 게으름’이라고 부르곤 한다. 또한 그것을 무지와 무관심이라고 싸잡아 부르기도 한다. 신경과학자 ‘나타샤 모트(Natasha Mott)’가 대뇌 반구의 활성화 연구를 통해 주장한 좌파와 우파의 뇌가 공명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시하듯, 진보와 보수주의자 행위의 구조적 차이의 근저에 있는 신경적 과정의 결과는 습관기억, 직관에 의해 끌려다니는 불온한 세계의 이유를 보여준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연구저술도 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 저술에서 시종일관 직관이 지닌 수많은 오류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속단과 어림짐작, 편향, 진실호도, 더 쉽게 문제찾기, 의심의 거절 등’ 인지적 압박감을 회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생각의 게으름이다. 사실 이 입증을 위한 수많은 연구 사례는 어쩌면 불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앙리 베르그손이 100년 전에 발표했던 생각들이다.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습관기억에 의한 행위만이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친일 행위에서부터 제반 경제, 노동 정책, 사회복지 정책 등 전(全) 부문에 걸쳐 황당한 퇴행을 일삼는 것과, 이에 의문을 가지지 못하는 대중 행태의 근저를 이루는 인식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일례를 들어보면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한 일본의 배상 문제는 외교적 갈등으로 대두 되었었다. 당시 국내 기업의 출연을 통해 배상금을 지급할 줄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 정권은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해자의 반성이나 배상도 없이 피해자가 배상을 결정했다. 이것이 카너먼이 지적한 직관이라는 지적 게으름이 불러온 ‘더 쉽게 문제 찾기’의 폐해이다.
대중들 또한 이러한 비판과 자기반성을 비켜날 수 없다. 습관기억이 아니라 추가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사유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익숙한, 그 좁아터진 편벽한 앎의 터전으로 이 세계의 무엇을 인식하고 반응하면 그것은 대개 편향이고, 왜곡이며, 진실을 지니지 못한 거짓이라는 점이다. 이제 이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 생각을 다시 이어가보면, ‘계획을 버리라’는 짐짓 과격해 보이는 이 말은 단순히 미래의 삶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현시적 욕망을 따르기 위해 세상 모두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욕망의 에너지를 변환해보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에게 제시된 강요된 그 익숙한 시대성의 산물에 노예처럼 따르지 말고 당신의 고귀한 생명의 차원에서 삶을 사유하고 실천하라는 요구의 조언이다.
여기서 다시금 귀에 거슬릴 정도로, 그리고 눈이 시릴 만큼 노출된 공생이나 연대의 언어를 반복하지 않겠다. 서로 힘차게 응원해 줄 수 있는 관계, 타자에 대한 경계와 단절이라는 부정성이 아닌 ‘생명의 플랫폼’이 되는 길로의 전환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의 밑바닥에 사유라는 과정, 즉 수고스럽더라도 조금 더 생명 에너지의 사치를 부려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하지 않던 일이어서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직관이라는 그 왜소한 생각의 불완전함, 혐오와 적대를 만들어내는 불온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진영에서만 활성화되는 좌뇌와 우뇌의 그 단절,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함에만 머물려는 게으름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둘 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멸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선지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 이 기회를 다시 나락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적 게으름이 눈앞의 유용성을 해치는 것이 당장 보이지는 않겠지만, 미래가 손상되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에 매달리는 것, 당장의 편익에 몰두하는 삶, 타자의 의지를 속단하는 즉각적 반응이 몰고 오는 장기적 폐해는 분명 숙고하는 삶의 태도가 바꾸어 줄 것이라 믿는다. 바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주의깊은 식별,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