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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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문을 열면서 세계의 석학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소리는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 진리의 혼돈, 철썩처럼 믿었던 진실의 흔들림으로‘가치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것이었다. 지구화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마구 뒤섞인 문화와 가치의 충돌과 융합, 그리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규칙과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한 눈을 파는 순간 낙오하고 도태될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의 파고(波高)는 경제 권력의 지구화를 촉진하고, 미처 지구화되지 못한 정치권력은 지구화된 세계 권력의 방호막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기탁하고 의지할 가치의 기준도 상실한 채, 더구나 보호막이 걷힌 벌판에서 스스로 야수에 대적하고 생존해야 하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놓였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지닌 이 저술『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이와같은 바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공포, 불확실성의 원인과 이의 규명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기획이다.
저자는 지금의 지구화는‘부정적으로 지구화된 세상’, 즉 인류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파편화시키며, 집단적 방어장치들의 결속력을 약화시켜 개인을 무력화하는, 그래서 두려움의 공포로 자신의 안전에 전전긍긍하는 문제만을 노정시키는 세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가 지향하는 약육강식의 시장경제 압력은 규제의 철폐를 강요하고, 약자들의 집단적 연대를 해체하며, 따라서 개인을 보호하는 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점점 와해시킨다. 이로인해 의지할, 보호할 안전지대와 장치들을 잃어버린 개인들은 스스로의 안전벽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국 국가나 집단의 안전보호 책임이‘개인의 몫’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사는 뱀과 같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의 마지막 풀까지 먹어치우고는 굶어죽는 근대성의 치명적 결과로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쓰레기(Wasted Human)' 를 처리할 배출구의 차단과 공급 불능성의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지구화가 만들어낸 인간적 유대의 소멸, 연대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로 잉여인구를 급격하게 양산하고 있으나, 역으로 전지구화된 세계는 이제 어디에도 배출지, 배출구가 들어설 여지를 없애버려 이미 지구의 관리 능력을 초과하고 있음에도 해결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지구적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하려는 사이비 해결방책이란 것으로 난민수용소와 같은 격리공간으로 대처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근원적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밖에 인종청소와 같은 부족간 전쟁과 학살, 상호조직의 살해 등으로 잉여 인구를 흡수하는 참혹한 해결이 그나마 현실로 자행되고 있을 뿐인 것이 오늘 인류의 실상이다. 즉 지구화된 문제를 이러한 모순적인 지역의 해결이 아니라 지구화의 문제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근원적 접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선두주자들인 선진국, 지역 내부적으로는 기득권을 확보한 지배 권력이 후발주자, 약자를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닌 공존의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지속가능한 인류사회를 위한 불가결의 대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잉여인력, 불필요해진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쓰레기 인간의 판정 기준은 갈수록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오늘의 정상이 내일의 비정상이 되는 잠재적인 인간-쓰레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소수의 권력자들, 특권층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가 될 개연성에 놓여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는‘일신의 권리’를 위해서는 게임 참가들을 속박하는 규칙을 만드는‘정치적 권리’를 획득하지 않으면, 이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일신의 권리마저 확보키 어려운 것이기에 일신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는 필연적으로 공히 확보되어야 하는 개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며, 이와 더불어 생존의 유지를 위한 실천적 권리인‘사회적 권리’가 없이는 정치적 권리 또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기에 이들 세 개의 권리는 시민들을 위한 필수적 권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급하지만 이쯤에서 지금의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를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예전의 성벽과 해자와 작은 탑, 총안(銃眼)을 기술적으로 갱신해 놓은”것의 다름 아닌 현대의 구분하고, 격리하며 배제하는 도시 공간의 모습은 곧 지금까지의 한계에 봉착한 쓰레기 처리와 안전망을 상실한 개인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안전위협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분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짜증나고 혼란스러우며 비위에 거슬리는 낯 선 감정은 특권층에게 분리주의적 충동을 자극하고, 함께 지내는 것의 위험을 단절하기 위해 선을 긋고 자신들만의 유배지, 섬을 지향하게 하지만, 이는 생활세계에서 두 범주의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완벽하게 단절하게하고 오히려 적대감으로 광범위한 긴장관계를 강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비탈공간을 만들고, 가시밭 공간을 조성하며, 순찰 경비원을 세워 접근을 방어하는 공간 분리는 거주자들의 차이에 대한 내성을 오히려 약화시켜 더욱더 위험을 증대시킬 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근대의 관리하고 보호하는‘정원사’의 마음가짐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자루를 채워줄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이 유일한 일인‘사냥꾼’의 자세에 밀려나, 모든 사람들이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사냥감이 되거나 아니면 사냥꾼의 대열에서 추방당하여 인간-쓰레기가 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이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죽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결코 이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소통이 단절되고 입구를 차단하며 서로를 분리하는 것, 사냥꾼으로 영원히 대열을 지켜야 하는 것, 점점 부정적인 지구화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소비자향의 시장경제 사회가 유토피아인가? 사람들은 이제 유토피아는 몰락했고,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예전의 미래의 행복을 찾아 헤매던 유토피아가 아니라 예상만큼 좋지 않은 현재의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는 것, 즉 실패한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기에 급급한 것, 유토피아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유토피아의 뒤를 쫒기에 바쁜 것이라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바로 지옥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은 계속 흐르므로 파도의 흐름을 타라! 가라앉기 싫은가? 그러면 파도를 타라!” 이 무참한 사냥꾼의 논리가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당당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지역의 그 참혹한 사이비 해결책에, 적대감으로 부글거리는 그 위험천만한 공포와 죽음의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아슬아슬한 잠정적 협정의 세상에서 개인의 확고한 안전과 자유를 확보키 위해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향한 외침은 더욱 더 크게 외치고 유대와 결속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온통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오늘의 우리들이 바로 이미 무력한 사회로 접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바우만’의 지적은 그래서 더욱 불안하게 유동하는 오늘을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은 문제와 지옥 같은 오늘을 극복하기 위한 번뜩이는 통찰과 담론의 세상이 유쾌한 지적 성찰로 잘 빚어진 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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