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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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우리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죽음, 이별이란 상실, 그리고 여러 유형의 회한 등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에 노출되었을 때,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고 오랜 방황과 심지어는 죽음까지를 선택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걸 살아오다보니 이러한 때가 역시 나를 피해가지도 않았고, 그 시간을 떠 올리면 지금도 속에서 밀려올라오는 울음이 있다. 더구나 소설 속‘정섭’이란 인물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지만”, 내 마음을 보여 줄 단 한 사람이 없어 너무나 쓸쓸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깊은 밤 홀로 이불을 감싸고 억눌렀던 울음을 남 몰래 터뜨렸고 그 후련한 여운에 비로소 정화된 느낌으로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작가의 말처럼 “슬픔의 사람이 어떻게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가”는 타인의 아픔에 조응하는 낯선 경험에서, 자신이 아프니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모양이다. 슬퍼하는 사람들, 바로 오늘의 우리들을 얘기한다. 아이를 잃고, 그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내 자살한 남편, 어느새 세상에 오직 혼자만이 된 여자의 그 고립이 슬픔을 넘어 두렵기조차 할 만큼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딱히 전할 의미도 없는 갚을 수 없게 된 인세를 이유로 만난 소설가‘정섭’을 따라 상가(喪家)의 문상을 위해 목포를 향해 가는 여자의 무력감과 연약하고 시린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소위‘변명의 여지없는’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독일로 떠나버린 아내와 딸을 등지고 세상의 온기를 온통 잃어버린 채 한기에 허우적거리는 중년의 남자, 자신의 삶 속에 꽁꽁 묶여있던 아이와 사랑하는 남편, 장미가 피어나는 그네들의 숨결이 배어든 집조차 훌훌 사라져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자, 쇠락하는 항구의 초라한 여관과 오랜 세월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고 사는 늙은 아낙, 귀머거리 딸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손끝이 닳아져라 낡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늙은 아비와 그 속의 울음을 아는 딸의 슬픈 미소가 오랜 세월 수탈과 강요된 희생의 사연을 간직한 항구 목포와 어울려 더욱 애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정섭이란 낯선 이를 따라 무작정 내려온 목포, 그리곤 사라진 남자, 갈 곳 없이 찾아든 여관에서 여자는 자살을 시도하고 여관의 노인과 손녀인 여자아이의 미소 속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허드렛일을 도우며 그네들의 일원으로 주저앉는다. 그래서 가진 이름은 영란여관의 이름을 따라‘영란’이가 된다. 한편 여자를 목포에 두고 떠나온 남자‘정섭’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너무 아파하던 여자의 행동이“나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노크였음을 깨닫고, 항구의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만 같은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향한 목포의 기행은 삶이 척박한 우리네 인생살이, 바로 사람들의 아픔에 공명하는 시간이 된다.

일명 통혁당 사건으로 불리는‘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희생자 가족인 영란여관의 할머니와 그녀의 아들‘김헌’, 그리고 잔혹한 고문을 피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수 밖에 없었던‘정영술’노인의 회한의 삶, 저마다 사랑과 이별의 아픔으로 곤혹스러워하는 빈약한 우리 민중들의 애환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유달산의 구슬픈 노래소리에 묻혀 그렇게 또 그러하게 흘러간다. 부모 잃은 아이의 까까머리에서 나는 어린아이 냄새, 그 슬픈 내음에서 자신의 상처가 어루만져지고, 늙은 아비의 울음 섞인 악기의 소리에서 슬픔을 토닥거리는 위안을 얻는다. 치매 얻은 노파의 웃음과 악다구니의 반복에서 아무에게도 해 끼치지 않고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본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 우리들은 또 다른 우리들의 슬픔을 보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간다.

생애 어느 한 때, 내 인생이 가장 환히 빛나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작품 속 한 구절이 왠지 잊혀지지 않는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삶이 충만하여 발그레하게 익은 볼을 하고 마냥 즐겁기만 했던 어느 날, 그 어느 시절을 떠 올리려 애쓰는 나를 보게 된다. 영란을 사랑하는 순수하기만 한 청년‘완규’의“대책 없이, 무방비로, 그냥, 좋다고, 헤, 하고” 웃는 그 표정처럼 웃어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 아득한 것만 같다. “세상의 아픈 것 짠 것 다 보듬어 불면 큰마음이 될 것이다.”는 영란여관의 안주인이 들려주는 말처럼 삶의 슬픔이란 또 사랑하고 이별하고 상처받으며 이겨내는 것일 것이다. 주류에서 소외된 남도의 항구도시, 목포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조폭어로 왜곡된 낯설지만 정감어린 친근한 사투리들과 오래되고 쇠락한 골목길을 닮은 사람들의 사연들에서 살아야만 하는, 아니 살지 않을 수 없는 정말의 위로를 받게 된다. 물리적 삶의 기반도, 정신적 토대도 빈약한 우리네들의 삶을, 우리네들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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