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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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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창세기? 창세기 앞에‘새로운’이라는 수사를 하는 것이 모순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2050년 이후의 새로운 인류에 대한 기획이기에 분명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단지 4시간의‘학술원 회원 구술시험’이라는 단순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숙연해 질 정도의 무게감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가 있는가하면 흥미진진한 SF적 소재로 재미를 견인하고, 신(新)인류에 대한 구상의 당위를 숙고하게 할 정도로 균형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50년부터 충돌하기 시작하여 2051년 마지막 전쟁을 벌이던 세계를 피해 해양방벽을 쌓고 세계로부터 문을 잠그는데 성공한 새로운 섬, 플라톤의‘공화국’이 건국된다. 이 이상적인 국가의 건설은‘토머스 모어’식 <유토피아>인지, ‘H.G웰스’식 <디스토피아>인지는 개인이냐 집단이냐라는 관점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 있지만, 화자(話者)인 ‘아낙시맨더’는 “개인적인 잠재력을 발휘하는데 가장 적합한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디스토피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만 같다.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고 생후 1년 뒤 검사 결과에 따라 계급 배치를 하거나 제거하는 획일적이고 냉혹한 제도나, 공포 분위기에서 공화국의 틀을 유지한다는 식의 표현은 디스토피아로서의 공화국을 확신케 한다.

이 소설의 시발은 철학자>기술자>군인>노동자로 이루어진 공화국의 4계급제도라 할 수 있는데, 사회의 안정을 위해 반란세력화 할 수 있는 하위계급인 군인,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는‘충분히 진보한 로봇’의 개발을 통한‘평등사회’를 구현한다는 배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소설 전편을 대표하고, 내재하는 암시와 복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화자의 구술시험 시점에서의 공화국을 구성하는 존재들은 과연 누구인가? 를 이미 말하고 있음에서이다.
한편 주인공으로서의 화자인 아낙시맨더와 화자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아담’이라는 중층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아낙시맨더의 구술시험 주제인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 전환점이 된‘아담의 삶’을 고찰하는 가운데 인간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궁극의 사유를 객관적 시선으로 그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낙시맨더의 구술답변이라는 형식으로 소개되는 아담의 신화적인 내용은 아낙시맨더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아담, 이브, 플라톤, 헬레네, 아리스토텔레스, 페리클레스, 아낙시맨더(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이 그리스 철학자와 창세기 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상적 원천이나 기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아담은 공화국의 실질적인 최초의 존재로서 이해된다. 초기 공포의 정치로부터 안정화된 공화국이 점차 “선택에 대해, 기회와 자유에 대한 말”들이 성행하기 시작되던 시대에, 외부세계를 차단하는 해안 방호벽을 지키던 아담이 국법을 어기고 해안가에 표류하는 이브를 구원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국가적 사건으로 재판이 이어지고, 아담의 행위에 연민과 동조를 하는 국민의 반란이란 압력과 타협하여 아담은 사회성 계발모델에 입각한 혼돈의 창발(創發)이라는 프로젝트하에 ‘아트’라는 안드로이드의 완전성을 위한 인간 실험자로 생활하게 된다.

여기서 충분히 진화된 안드로이드, 즉 로봇인 ‘아트’와 인간인‘아담’의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정신이란 무엇인지,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경계 짓는 요인이란 무엇인지, 의식과 관념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원초적 설전(舌戰)을 통해 인간성, 그리고 생명의 본질을 사유케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中略)...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 내가 바로 의미야.”하고, 아담이 분노하여 인간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문장들은 그 어떤 철학적 강론보다 멋지다.
그러나 안드로이드인 ‘아트’의 관념과 사유에 대한 강변 또한 인간의 실체성에 대한 의문을 충분히 제기한다. “왜 진화가 육체적인 것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진화는 매개체를 가리지 않습니다...(中略)...다른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관념은 적합한 숙주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中略)...저를 만든 건 인간이 아닙니다. 관념이 저를 만들었죠....(中略)...사유는 어느 쪽을 더 선호 할까요?”

이 작품의 위대성은 실험공간에 갇혀있던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탈출하는 장면에 있다. 과연 기계가 탈출 의지가 있을까? 즉 기계가 관념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창발이론이 진정 실현되는 것인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을 통제하려는 모든 것에 저항하게 마련”이라는 관념의 존재는 아트의 탈출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기계의 인간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죽어가는 아담과 아트의 마주한 시선에서 관념의 승화가 이루어지고 그 관념은 자신의 숙주가 된 프로그램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아담과 이야기를 하며 보내는 동안 관념의 전이가 진행되고 아트는 아담이 된다. 아담은 아트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전송하여 복제를 시작했을 때 이를 방조한다. 여기서 아낙시맨더의 구술시험 시험관은 그걸‘원죄’라고 부른다고 한다. 찬탄을 연거푸 하게 하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랑우탄의 모습을 한 아트들, 기회와 두려움 사이의 균형을 찾고, 관념에 정면으로 맞서 그것과의 타협을 통해 지속적인 평화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인류, 그것의 힘은 ‘본성’이라 한다. 점점 근본주의화 되어가고 그래서 서로 불신이 깊어지며, 정신은 쇠퇴하고 두려움과 비관주의가 공공담론을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은 진정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게 하는 정말의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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