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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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5년 전후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가 자행한 국가적 폭력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국가의 구조는 엉성하고, 그 권력이 미치는 범위는 불확실하던 사회, 자본의 축적은 오직 뇌물과 횡령, 부정만으로 가능한 사회, 탐욕스럽고 강한 권력을 확보하기위해서 폭력의 독점적 소유를 하고 있던 국가를 장악하고 그 하수인인 경찰과 군대를 활용하는 사회, 그래서 “정의의 살인범들이 성스러운 절차를 우습게 만들고, 차별 없는 정의를 가짜로 만들어서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에게 팔고 있는”사회, 바로 그러한 세상에서 신음하던 인민들의 처절한 이야기다.

이 작품을 손에 들고는 몇 번이고 내려놓았다 다시 들곤 하는 일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부패한 국가의 만성적 취약성으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아예 말살된 세상, 지배 권력과 이에 아첨하는 자본가세력들, 지방의 토호들까지 그 더러운 사악함으로 인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며, 살인까지 마다않는 행태의 묘사들은 허구의 소설임에도 지속하여 치가 떨리는 참담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치 우리의 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모습과 한 치의 차이도 없어, 그 험악하고 고된 시간을 고스란히 살아온 나로서는 소설 속 하나 하나의 사건들마다 예사로이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많이 읽힌 ‘나렌드라 자다브’의『신도 버린 사람들』을 통해서 인도의 비인간적인 계급제인 카스트제도와 아웃 카스트로서 최하층민인‘불가촉천민’의 실상은 잘 알려져 있다. 작품은 무두쟁이 불가촉천민인‘차마르’에서 재봉사가 된 두 남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이시바’와 그의 조카 ‘옴프라카시’의 가족사는 지배계급인 브라만의 한 토호로부터 정당한 선거권을 요구하다 일가족이 살해당하는 비극적 상황에 이르고, 이를 피한 두 사람은 도시로의 여정을 떠나게 된다. 한편‘디나’라는 여성은 오지에서의 의료 활동 중 의사인 아버지가 사망하자 오빠의 이기심에 눌려 가까스로 학업을 마치지만 대학교의 진학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지만 불의의 고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만다. 또한 생활비를 위한 방편으로 디나는 고교동창생의 아들인 대학생‘마넥’을 하숙생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비열한 시대의 참혹한 비극이 펼쳐진다.

“소음에 사람들에, 살 데도 없고 물도 귀하고 온 천지에 쓰레기”인 도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에서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집중의 폐해를 엿보게 한다. 생존을 위한 사람들의 도시를 향한 희망 앞에는 끔찍한 판자촌, 노점들, 빈민굴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렵사리 마주한 디나와 두 재봉사의 삶을 위한 타협은 단지 기다리는 고통의 연기에 불과하기만 하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의 강화와 축재를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인민을 규율하며, 질서를 강제한다. 그리곤 국가 사랑 이라는 권력범위의 확정을 위한 수단으로서 통상적인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종용하는 것까지 우리의 70년대 긴급조치법과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강철 같은 의지! 근면!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라는 구호와 거대한 총리의 초상화, 강제 동원된 군중집회와 같은 정치쇼는 그야말로 마치 엊그제 보았던 것처럼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하루벌이로 연명하는 도시 하층민을 경찰력과 야만적인 자본가들이 합세하여 공사판에 가두어 놓곤 노예처럼 부리는가하면, 이들의 주거지를 불법이라하여 도시미관을 개선한다고 불도저로 밀어버려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거리의 부랑자로, 거지로 삶을 바꿔버리는 국가의 폭력은 참담함 그 자체가 된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박탈당한 삼촌과 조카의 시련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다양한 국가의 폭력에 시달린다. 주거지의 상실, 노숙자로서의 생활과 공사장 노예로, 마침내는 결혼을 앞둔 청년이 국가의 권력이 개인 성생활에까지 간섭하는 이른바 가족계획이라는 웃지 못 할 폭력에 의해 강제 거세당하고, 비위생적 시술로 다리까지 절단케 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른다.
당신들의 이야기는 “현대판 마하바라트(註:인도 대서사시)로 책을 낼 수 있겠소.”라 할 정도로 이들의 삶은 하루도 정체되지 못 할 정도로 처참하다.

“곤봉처럼 위협적인 감탄사가 붙은 규율의 시대! 라는 구호”만 난무하고, “살해된 정의의 시체가 누워 있는 타락한 정의의 사원”이자, “원한과 복수를 위한 비열한 무대, 비극과 희극이 공연되는 하잘것없는 장소”로 전락한 법원 등 국가는 온통 썩는 악취로 진동하지만, 그네들은 외려 실종된 정의를 되찾고, 인권과 민주를 외치며 저항하는 시민운동가‘자야 프라카시 나라얀(Jaya Prakash Narayan)’을 가두고 실업통계를 거들먹거리며 2억 명의 인구가 과잉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통제되고,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단지 고통과 슬픔만 흐른다.

이성을 잃은 권력, 깡패들이 통치하는 시대, 그들에게 절망에 균형을 맞출 만큼 충분한 희망이 있긴 있는 것일까? 하고 내내 의문을 저버리지 못하게 한다. 디나의 연민과 이해가 만들어내는 사람들 간의 잠간의 행복과 평화, 그리고 사랑, 그것을 균형이라 해야 할까? 야만적인 인간 본성의 벌거벗은 본질만 남아 헐떡대는, 차마 눈이 글자를 계속해서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다.

다행스럽게도 근자에 접했던 ‘소수자의 역사’에 관한 『역사의 공간』이라는 저작과 『세계체제분석』이라는 저작 중 국가체제에 관한 독서는 이 작품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즉 역사의 이성이 볼 수 없는 무능력 지대에 놓인 보이지 않던 인민들의 역사를 가시화하여 정체되고 유지에 급급한 현실을 일깨우려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국가권력의 다양한 폭력행위와 수단, 인민의 고통과 슬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이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을 접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진정 생명력 넘치는 21세기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당신의 인생에서 감명 깊은 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항상 망설여왔다. 이제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A Fine Balance)』은 내 인생 최고의 소설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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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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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회(老獪)한 사제(司祭)가 양심의 목소리(늙다리 청년을 상징)에 저항하여 짐짓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였다고 자신을 정당화 해줄 기억들을 술회하는 독백이 흐른다. 이러하다보니 시인이자, 평론가이고 신부(神父)인‘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의 천연덕스러운 회고는 허위의식으로 그득한 채 이야기들 모두가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작가의 이 역설적인 독해의 기대는 그의 의도만큼이나 그대로 전달된다. 즉, 자신만은 고고하고 지적이며 책임을 다하는 성인이라 자부하지만 고상한 척 술회하는 일화와 행동에서는 비겁함과 무관심, 기회주의적인 원숭이임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주인공인 세바스티안 신부의 야심은 당대의 명망있는 문학평론가‘페어웰’과의 대화에서 처음 드러나는데, “그가 열어 놓은 길을 가고 싶고, 책을 읽고 감상을 큰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이 세상 제일가는 소망”이라며, 탄탄한 줄을 잡고 편승하여 세속적 명성을 지향하는 탐욕스런 본색이 그것이다. 사제복과 일반적 사복을 교묘하게 입는 그의 무의식적 행위 역시 사람을 대하는 지극히 상업적으로 세련된 태도를 읽게 한다. 
이는 소설적 배경인 당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사회주의정권인‘아옌데’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사주된 군부쿠데타를 통한 피노체트 독재정권기의 침묵하거나 권력에 편승하여 사적 평화에 안주하는 소위 지식인들에 대한 허위의식의 까발림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첫 머리에 주인공이 “나의 침묵은 티 하나 없다.”라고 주장하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주와 보수 기득권 세력들이 끊임없이 정부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위협을 가하여 마침내 대통령을 죽음(자살)으로 내모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고전이나 읽고 지식인으로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침묵의 일관과 구역질나도록 몰염치한 자기기만을 목격하게 한다.
“대통령이 자살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 ~ 참 평화롭군, ~ 정말 조용하군, 하늘은 파랬다.”는 것이 소위 지식인의 감상 전부였다.

특히, 이 작품을 구성하는 두 개의 커다란 사건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를 비롯한‘군사평의회’를 위해 마르크스주의 비밀강연 -“칠레의 적들(민중)을 이해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그들이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짐작하기 위해서”- 을 맡아 권력의 지원을 받는 주인공의 행위와, 정치범을 고문하는 사택으로 위장한 정보요원의 저택에서 공허한 문학의 허영에 합세한 지식인들이 벌이는 파티, 정보요원의 아내로서 문단에 발을 걸친 여성작가 ‘마리아 카날레스’의 몰염치와 사악한 반사회적 행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피노체트 정권을 위한 봉사가 산티아고 전체에 파다하게 퍼지자, 동료들과 대중들로부터의 비난을 걱정하지만 어느 누구의 눈곱만한 관심도 없음에 오히려 “어안이 벙벙했다.”고 술회하는 주인공에서 근심의 본질은 도덕적 양심이 아니라 명예의 손상에 있었음을 보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사람이 훗날 정권이 바뀌자 마리아 카날레스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비난을 하는 모습은 몰염치하기까지 하다. 여기에 더해 카날레스의 저택에서 파티를 즐겼던 작가는 카날레스가 누인지 모른다고 발뺌하는 회피를 “해결책이 있을까?”하고 온통 사회의 비양심과 도덕적 해이를 고민하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비추는 자가당착은 저열한 코미디가 된다.

나아가 독재 파쇼정권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희생의 시대와 그 뒤에 오는 건강한 성찰의 시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역사적 선견을 말하는 모습은 천박함과 추악의 모습 그자체이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의 열렬한 정신적 지원역할을 수행한 카톨릭 사제조직인 ‘오푸스 데이(Opus Dei)'의 일원으로서 특히나 호모오푸스데이라고 자임하는 이 비열하고 허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지식인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우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책 한 줄 안 읽는 엉터리 지식인들의 헛소리와 공명하는 듯하기만 하다.

한편 남미에서 신다다이즘을 주창하기도 했던 작가의 문단 영웅 물어뜯기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포인트가 되는데, ‘네루다’나 ‘파스’에 대해 넌지시 뱉어내는 비평아닌 비평이 그것이다. 어쨌든 무결점의 삶을 살아왔다는 한 지식인의 항변으로 온통 비겁한 침묵이거나 천박한 기회주의이고 속빈 고상함이라는 허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소설이 칠레를 비롯한 남미 나라들의 갑갑하게 막혀있던 민중들의 가슴을 뻥 뚫어 주었으리라 믿는데 어려움이 없다. 아마 열광하고 또 열광 했으리라. ‘로베르토 볼라뇨’의 투사같은 혈기가 어느덧 전해져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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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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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작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처녀지대로 되돌려 놓는다.  지금까지의 역사기술 방식이나 역사관을 전복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관념에 의해 일렬로 배열되어 필연성과 객관성을 갖는 역사법칙이 존재한다는 선형적 위계화의 역사를 비판한다. 여기에는 역사의 속성인 역사의 주체를 통해 쓰이고 가동되는 역사적 주체의 단일성과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통합하려는 욕망, 즉 보편주의로 구성하는 단수의 역사는 소수의 역사들을 지우고 소수자의 삶을 망각의 어둠속에 밀어 넣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어떤 요소들이 동조하여 하나의 집합적 리듬을 만들어낼 때 그 리듬과 더불어 탄생”하는 것으로서의 ‘시간’개념에 대한 대결이다. 즉, 시간적인 동조의 요구, 시간적인 통제와 훈육을 통해 상이한 리듬의 신체를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통일하려는 힘, 그래서 자신의 시간 속에 타자의 리듬을 강제로 포섭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대항만이 역사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견해이다.

즉 주체성을 장악한 자가 서로 다른 복수의 리듬을 하나의 척도적 중심으로 동일화하고 통합하여 자신만의 역사적 계열화의 선을 만들어내기에, “복수의 리듬들의 차이를 새로운 차이의 생성자로써 긍정하는 역사적 계열화의 선”으로 대항함으로써만 단일성, 통일성에 포함되지 못했던 지워지고 배제된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저술은 역사가 담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사건이란 의미에서 ‘역사적 이성’의 무능력 지대에 놓인 것들을 이야기하는 역사, 바로 그러한 역사담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소수자들이 역사 속에서 올바른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된 지위를 할당받게 만드는 단순한 양심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사화 될 수 없는 사건을 역사로부터 돌발하게하고 이로써 역사 안에서 다른 돌발의 지점들이 만들어지도록 촉발하는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소수자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그때그때마다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여, 척도적인 것과 대결하며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성분”으로서의 ‘진보’와 결합하여,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안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벡터를 작동시켜 지배적인 것, 주류적인 것, 익숙한 것들을 전복하거나 변형하는 힘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태일 분신 사건’이나, 민주화운동이라는 주류의 역사에 포함되기 전에 불리던 ‘광주사태’그리고 어떤 민족의 이름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저항의 지대를 상징하는‘재일(在日; 자이니치)’은 ‘거대한 반역사적 돌발’로서 다름 아닌 소수자의 역사인 것이다.

바로 이 저술은 소수자의 역사, 또한 새로운 리듬으로서 계열화 된 선을 잇는 역사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근대와 비근대의 단선이 가져온 비시간적 세계와 시간적 세계를 이원화로 인해 근대이전의 한국사회가 가시화할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사건으로서‘세시풍속’의 미신으로서의 퇴출에 대한 고찰이나, 근대적 시간관이 문명화와 진보란 이름으로 삶의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여 시간 감각이 선험적 형식으로 대체되어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시간적 좌표계 안에서 통일하고 통합하여 구속하는 현상, 그리고 근대적 역사개념의 출현이 가져온 민족과 국민이라는 이중적인 역사적 주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통찰이나, 생명정치학으로서 작동한 가족계획이라는 국가적 관리전략 즉 권력기술에 대한 새로운 욕망의 성찰, 국가의 군대가 자국 국민들을 향해 총을 쏘며 학살한 비극적 사건, 대중과 감정의 정치학을 이야기하는 현 정권의 몰염치와 무지와 천박함에 대한 비평, ‘카피 레프트 운동’을 포함하는 FTA가 가져올 생명체 고유의 순환이득을 배타적 잉여가치로 변형시켜 자본의 소유물로 만드는 사태에 대한 경고, 이주자들을 착취하는 일반주민들의 경찰시선을 이용한 폭력 등이 다뤄지고 있다.

볼 수 없었던, 아니 보이지 않았던 역사들을 가시화한 이들 역사의 기술 만으로서도 이 저술은 탁월하고 독보적인 지위를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껏 접하지 못했던 역사분석 도구로서 ‘개념적 배치’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들을 구성 요소로 삼으며 일정한 의미를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것”임을 통해, 신문 -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 에 출현한 용어의 반복적인 계열화의 양상으로 역사관련 용어들의 의미변화를 추적한 근대영토의 개념이나, 지나간 단순한 사건들의 기록이라는‘사기(史記)’가 아니라 근대적 역사개념의 출현, 그리고 민족과 국가 개념에 이르는 역사적 인식의 도출은 앞으로 우리들이 역사를 성찰하는 방법론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중대하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이끈 주제가 있는데, 제국주의 일본이 ‘동아협동체’, 또는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민족적 경계를 넘어 연대하자는 구호에 대해 “과연 식민지 인민은 어떻게 말하는가?”하는 것에 대한 방법론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억압받는 소수자가 권력을 손에 쥔 다수자에게 어떻게 항변할 수 있는가와 어떤 의미에선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김사량의 소설 <덤불 헤치기>, 한설야의 소설<대륙>의 표현방식과 주제를 통해‘내파(implosion)전략’, ‘횡단 전략’, 동일시와 모방의 전략에 대한 설명은 이해의 체화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저자의 집필 기대처럼 범람하는 흥미중심의 대중 역사서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역사, 서발턴(subaltern)의 역사, 다수자들이 잊고 있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촉발하게 하는 역사서로 읽혀진다. 거대한 폭력의 힘에 의해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진 것들, 국민적 기억의 망각에 숨겨진 것들, 그리고 역사화를 둘러싼 힘과의 대립 양상을 급진적 양식에 담아 전달하고 있다.

역사의 이성이 무능력을 나타내는 지대에 갇혀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한편은 역사의 바깥으로 불러내는 역사, 돌발지점에서 만나는 모든 소수자들의 역사가 열정적으로 기술되어, 용기요, 반항이요, 자유요, 새로움이며, 다양성인 클리나멘(clinamen)으로서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성되는 영원도 없고 절대도 없는 정신으로 충만한 저작이며, 우리 자신의 삶을 외부로 잡아끄는, 즉 안일한 내부의 이탈을 촉발시킴으로써 새로운 민중의 도래를 요구하는 저술이다.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우리의 눈을 비로소 開眼시켜주는 근현대사의 걸작이다.

[註]서발턴(subaltern): ‘그람시’가  감옥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지칭하는 용어로 대신 사용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시골농민들의 비조직적 집단으로서,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비통일적이며 결과적으로 수동적으로 위치될 수밖에 없는 집단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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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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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본성에 대한 탐색은 인간중심의 세상이 유지되는 한 끊임없는 규명의 도전이 지속될 것이다. 이 저술 역시 “인간 심리의 모든 측면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서 진화심리학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대중에게‘진화심리학’이라는 용어는 이제 그리 낯선 분야가 아니다.
표제인‘오래된 연장통’이라는 은유는 바로 이러한 진화심리학이 지니는, 즉 “우리의 진화적 조상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부딪혔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이 설계해낸 다양한 심리적 기제들의 묶음”의 다른 표현방식이다.

진화심리학하면 항상 논란이 되는‘본성 대 양육’, 다시 말해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결정론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저자는 진화심리학은 유전자가 아니라 심리적 기제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유전적 결정론을 피해가지만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진화심리학만으로 모두 해석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구석이 있음을 일단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저술은 진화적 접근을 통한 인간 심리,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고 있다. 특히‘생존본능과 종족번식’이라는 대략 1만 년 전에 인간의 뇌(수렵시대와 동일한 우리 현대인의 뇌)에 프로그램 된 원초적 기제(機制;psychological mechanism)하에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발된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이론에 근거하여 오늘의 우리네 일상의 행동적 양식을 흥미로운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이들의 이론적 근거와 실험적 입증을 하고 있는데, 이미 많은 진화심리학의 대중적 저술들에서 소개된 내용들을 재차 확인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여 진화심리학을 처음 대면하는 것이 아닌 한 부분적으로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다만, 저자의 집필 의도와 같이 다윈주의 문학비평, 진화미학, 법의 진화적 분석, 다윈주의 문화연구....소비의 진화적 분석처럼 사회의 제반 현상을 통찰하는 현상 분석적 토대로서 그 적용범주의 확장과 같은 가치기반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유용한 성찰로 재조명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도 있다.

현대 인간의 본성이 수렵시대의 심리적 기제에 기반하여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야한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감상”하는 남성의 두뇌가 가상의 이미지와 실제를 구분치 못하고 아무런 실익이 없음에도 “심장박동수를 높이며 발기”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여전히 현대인간의 본성은 수렵시대의 그것을 탈피하고 있지 못함을 주장한다.
그리곤 생존의 유지와 종족 번식이라는 원초적 심리기제가 작동하는 현대의 제반 행동특성을 소개하고 있다. 예로서 매력적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라든지, 외인 혐오증과 자민족 중심주의, 과시적 소비행태, 매운 맛을 즐기고, 휘황찬란한 가을의 단풍 빛, 털 없는 유일한 유인원인 인간, 동성애 유전요소가 여전히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이유들 등 매혹적이고 실제 궁금하게 여기던 우리들의 행동원인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중 몇 가지 납득하기 어려웠던 행동 양식으로서 누이의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시키는 남성의 행위나, 실용적 이득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꽃을 선물을 하는 남성과 이에 감동하는 여성, 가임기에만 외도를 하는 여성의 심리를 설명하는 부분은 ‘부성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 ‘유용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단서’로서의 꽃, 실질적 유전적 이득을 얻기 위한 여성의 선택이라는 설명에 어느덧 진화심리학의 과학적 논리성에 매료되게 된다.

특히 주목하게 하는 대목이 있는데, ‘값비싼 선호이론(costly signaling theory)’이란 것으로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나타난 이건희씨가 수 백 만원에 달하는 귀마개를 하고 있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유지할 정도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철철 넘친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바람직한 배우자 자질을 광고”하는 본능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과잉의 소비행태는 자본주의 속물주의의 탓이 아니라 인간본성의 자연스런 표현이라는 것으로서 과학지상주의가 보이는 철학부재의 우려스러운 한 단면의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공작의 화려한 꼬리의 예를 이렇게 확장시켜 동일화 할 수 있을까?

한편 자연선택과 적응의 산물인 원초적인 심리적 기제로서가 아니라 심리적 적응들에 우연히 딸린 ‘부산물’, 즉 진화적 적응인 본능의 산물이 아닌 것으로서의 종교나 음악의 출현에 대한 해석은 학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선한 주제로서 읽혀지며, 또한 피셔의‘자연선택의 유전적 이론’에서부터 ‘냉각기구 가설’, ‘혈연 선택이론’, ‘해밀턴의 신호가설’까지 진화심리학을 지탱하는 화려한 이론들의 배경과 내용의 설명들은 자칫 흥미중심의 가벼움을 진중한 지식의 습득의 장으로서 균형을 잡아준다.

앞으로 진화심리학이 심리학을 대표하고, 세상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지식의 토대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더구나 ‘빈 書板’과 같은 환경결정론이 인간행동을 해석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취약함과 오류를 노출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생명유지와 짝짓기, 번식행위로만 설명되지도 못한다. 다만 우리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게하는 유효한 도구로서 진화심리학을 이야기하는 ‘오래된 연장통’은 유익하고 흥겹고, 생각게 하는 저술임에는 분명하다. 저자의 말처럼 21세기 지적 패러다임으로서 현재 진행형인 다위니즘을 통해 우리 마음의 본능과 욕망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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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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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사람들의 얼굴사진이 전시된 사진전시회장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눈을 감고서는 바로 그 눈을 감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진전은‘보이는 나와 만들어지는 나’라는 라캉의 거울이론을 떠올리게 하고, 이후 소설의 제재(題材)이자 사건의 중심이 되는 라이프캐스팅(인체를 본떠 조각을 만드는 기법) 석고상이 지니는 본질로서‘이중복제’, 그리고 레플리컨트(replicant), 미메티즘(mimetism)과 같은 미술용어와 미학이론으로 연결되어 문자 그대로 작품에 세련된 양식미를 더한다. 허나 이는 소설에서 그저 흘려버릴 멋스런 장식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의 묘한 매력은 인체의 손상이 없음에도 섬뜩함과 잔혹한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하여 발표한 모녀상 연작이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평에 시달리자 은퇴하였으나 암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조각가는 16년 만에 유일한 혈육인 딸의 신체를 본 뜬 석고상을 완성하고는 지병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완성된 석고상은 목 윗부분이 댕강 잘려나간 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가상의 살인”, “천연덕스러운 잔혹함”바로 그 자체인 소름끼치는 형상으로 발견된다. 석고상의 모델인 딸‘에치카’에 대한 죽음의 예고인가?

살아있는 인체의 본을 떠서 제작하는 라이프캐스팅이라는 조각기법에서 이미 야릇한 혐오감이 피어오르는데 기법의 속성상 조각가 생전 최고의 고뇌였다는 눈(目)의 처리는 더욱 불길한 전조가 되어 파고든다. 눈을 뜬 채 석고를 부을 수 없으니 감은 눈 이상을 묘사할 수 없는 한계.

“ 라이프캐스팅 조각은 시걸의 기법을 카피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델이 된 인체의 카피이기도 하다. 이른바 ‘이중 복제’란 도착된 태생을 가진 레플리컨트인 것이다.”

일종의 거울상인 머리가 잘린 석고상의 존재에 무성한 추리가 가해지지만, 이내 망자의 딸인 에치카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본격적인 사건이 한참을 경과한 후 에야 발생함에도 긴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히듯이 수수께끼가‘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때문일 것이다.

거장의 컴백전을 준비하던 미술평론가‘우사미 쇼진’, 에치카를 추근대다 혼이 난 삼류사진작가 ‘도모토’, 죽은 조각가의 동생인 소설평론가인 ‘가와시마 아쓰시’, 망자의 내연녀, 이혼한 아내 ‘리쓰코’, 그의 남편 ‘가가미’등이 얽혀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든다. 어찌보면 수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두 다 범인 같은 그런 상태.

또한 주인공인 탐정이자 추리소설가인‘노리즈키 린타로’의 잘못된 판단으로 결정적 과실이 발생하는 것은 이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등장인물들 모두에 독자의 시선을 분산시켜 트릭을 보다 섬세하게 관찰케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는 추리를 전개해 나감에 있어 탐정의 실수를 통해‘다른 해법들을 소거(消去)하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보다 명료한 독해를 가능케 한다.

그러함에도 도처에서 섣부른 단정을 하게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럴수록 작품의 스릴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되고, 중반에 이르면 도저히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된다. 사라진 조각상의 머리, 급기야 진짜 시체의 머리가 더해지면서 이 두 개의 머리가 상징하는 유비성(類比性)에 거울(鏡)과 눈의 조각이라는 예술행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매혹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어진다.

절묘한 트릭, 진행 될수록 점증되는 서스펜스, 치밀하고 섬세한 디테일, 빼어난 세련미, 사건의 해결에 이르러 완벽하게 설득되는 상쾌한 로직은 추리문학을 숭고한 아름다움의 경지로까지 올려놓는다. “저편의 존재, 심연, 혹은 어둠이라는 표상 불가능한 것의 영역”에서 “의태라는 행위를 통해 예술의 다른 기원”으로 올라간 작품이라 하여야 할 것 같다. 라이프캐스팅기법에 잠자는 범인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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