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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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사람들의 얼굴사진이 전시된 사진전시회장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눈을 감고서는 바로 그 눈을 감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진전은‘보이는 나와 만들어지는 나’라는 라캉의 거울이론을 떠올리게 하고, 이후 소설의 제재(題材)이자 사건의 중심이 되는 라이프캐스팅(인체를 본떠 조각을 만드는 기법) 석고상이 지니는 본질로서‘이중복제’, 그리고 레플리컨트(replicant), 미메티즘(mimetism)과 같은 미술용어와 미학이론으로 연결되어 문자 그대로 작품에 세련된 양식미를 더한다. 허나 이는 소설에서 그저 흘려버릴 멋스런 장식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의 묘한 매력은 인체의 손상이 없음에도 섬뜩함과 잔혹한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하여 발표한 모녀상 연작이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평에 시달리자 은퇴하였으나 암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조각가는 16년 만에 유일한 혈육인 딸의 신체를 본 뜬 석고상을 완성하고는 지병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완성된 석고상은 목 윗부분이 댕강 잘려나간 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가상의 살인”, “천연덕스러운 잔혹함”바로 그 자체인 소름끼치는 형상으로 발견된다. 석고상의 모델인 딸‘에치카’에 대한 죽음의 예고인가?

살아있는 인체의 본을 떠서 제작하는 라이프캐스팅이라는 조각기법에서 이미 야릇한 혐오감이 피어오르는데 기법의 속성상 조각가 생전 최고의 고뇌였다는 눈(目)의 처리는 더욱 불길한 전조가 되어 파고든다. 눈을 뜬 채 석고를 부을 수 없으니 감은 눈 이상을 묘사할 수 없는 한계.

“ 라이프캐스팅 조각은 시걸의 기법을 카피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델이 된 인체의 카피이기도 하다. 이른바 ‘이중 복제’란 도착된 태생을 가진 레플리컨트인 것이다.”

일종의 거울상인 머리가 잘린 석고상의 존재에 무성한 추리가 가해지지만, 이내 망자의 딸인 에치카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본격적인 사건이 한참을 경과한 후 에야 발생함에도 긴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히듯이 수수께끼가‘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때문일 것이다.

거장의 컴백전을 준비하던 미술평론가‘우사미 쇼진’, 에치카를 추근대다 혼이 난 삼류사진작가 ‘도모토’, 죽은 조각가의 동생인 소설평론가인 ‘가와시마 아쓰시’, 망자의 내연녀, 이혼한 아내 ‘리쓰코’, 그의 남편 ‘가가미’등이 얽혀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든다. 어찌보면 수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두 다 범인 같은 그런 상태.

또한 주인공인 탐정이자 추리소설가인‘노리즈키 린타로’의 잘못된 판단으로 결정적 과실이 발생하는 것은 이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등장인물들 모두에 독자의 시선을 분산시켜 트릭을 보다 섬세하게 관찰케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는 추리를 전개해 나감에 있어 탐정의 실수를 통해‘다른 해법들을 소거(消去)하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보다 명료한 독해를 가능케 한다.

그러함에도 도처에서 섣부른 단정을 하게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럴수록 작품의 스릴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되고, 중반에 이르면 도저히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된다. 사라진 조각상의 머리, 급기야 진짜 시체의 머리가 더해지면서 이 두 개의 머리가 상징하는 유비성(類比性)에 거울(鏡)과 눈의 조각이라는 예술행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매혹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어진다.

절묘한 트릭, 진행 될수록 점증되는 서스펜스, 치밀하고 섬세한 디테일, 빼어난 세련미, 사건의 해결에 이르러 완벽하게 설득되는 상쾌한 로직은 추리문학을 숭고한 아름다움의 경지로까지 올려놓는다. “저편의 존재, 심연, 혹은 어둠이라는 표상 불가능한 것의 영역”에서 “의태라는 행위를 통해 예술의 다른 기원”으로 올라간 작품이라 하여야 할 것 같다. 라이프캐스팅기법에 잠자는 범인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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