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배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신문의 경제섹션은 우리사회에서 저소득층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50%를 넘어섰다는 내용을 머릿기사로 장식했다. 급속하게 중산층 의식마저 하락하고 가난의 대중화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다. 실로 정치 권력자에게 주어진 5년이란 시간은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고도로 양극화되고 빈곤을 촉진하는 탐욕스런 세력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한국은 빈곤의 보편화를 강력하게 추진 중인 듯하다. 극소수의 거부와 대다수의 빈민이라는 두 국민 정책이 이제 그 결실을 드러내고 있다. 현 정권은 성공했다. 아마 상위 1%만 모이는 그네들의 파티에선 연일 칭송이 잦을 것이다. 수고했습니다! 라고.

 

정권을 잡자마자 재벌 감세와 규제 완화부터 시작하고, 서민들의 소득세 감면 항목들을 삭제하거나 부과기준을 상향 조정함으로써 부자들을 위한 감세로 인해 부족해진 세수를 서민의 얄팍한 급여로 충당할 정도로 사악했다. 재벌을 살찌우면 샤워효과로 그 부의 상당부분이 아래로 흘러내려갈 것이라고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런 예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것은 그 뻔뻔함의 정도를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부자는 더욱 부를 늘려가기만 했을 뿐, 국민 대다수는 점점 가난해졌다. 실질 소득은 급격하게 감소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땀을 뻘뻘 흘려 열심히 일해도 갈수록 먹고살기 아주 힘겨울 정도가 되고 있다. 육체와 정신적 손상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구조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에게“사회계약을 구성하는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의 다름 아님이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기 시작했다면 과연 그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할까? 잘못된 구조, 권력이 왜곡시켜버린 경제구조를 신속하게 교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각하고 직시하기는 하는 것일까? 나도 언젠가는 저 1%에 들어 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이 망상을 자극하는, 바보 상자들이 쏟아내는 미혹에 걸려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을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우민화를 위한 각종 미디어 정책들 역시 성공적이다. 재벌들에게 이 정권은 이처럼 정말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그 결과는 가난은 대중화되고 빈곤은 만성적이 되어감에도 마치 이것이 없는 것처럼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가 된다. 그렇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그 고유의 시각적 특성 때문에 경제적 우위에 있는 자들의 눈에 빈민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계층의 구별 짓기가 이젠 완전 고착되는 단계에 들어서 서로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눈앞에 서는 빈민들의 옷차림새는 실제와는 다른 것이기에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상상력 부족의 시대! 마치 빈민들이 사라지고 있는 듯한 이 역설적인 현상은 ‘빈곤의 발견’을 더더욱 위장한다.

그러다보니‘게으르고 의존적이며 자식만 주렁주렁한 자들이 실업급여 창구를 메운다’는 어느 시장만능의 자유주의 신봉자가 하는 돼먹지 못한 말처럼 빈곤을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몰염치에 이르는 양태까지 보이는 것일 게다.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가난해지고 빚만 늘어나는 구조”는 좀체 생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저임금 노동에 참여해보라. 체험해 보라. 책은 바로 노동 현장, 만성적인 빈곤으로부터 헤어 날 수 없게 구조화된 저임금 노동 시장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다. 과연 게을러서 가난하고, 의존적이어서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는 보수 자유주의자들의 헛소리가 혹여 조금이라도 진실인지를 말이다.

아마 자유주의 신봉자가 뱉어낸 가증스런 그 말은 한 가정집에 청소용역을 할 때 주인 여자가 하는“정말 운동이 되죠?”라고 청소부에게 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청소가 운동이겠는 말이다. “완전 비대칭적이고 무자비하게 반복적이어서 근육과 뼈를 망가뜨리는” 중노동이 어찌 운동일 수 있겠는가? 몰지각과 중산층의 이 뻔뻔한 상상력은 오늘 우리들의 도덕적 인식능력이 얼마나 마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일 것이다.

 

책을 빌려 무지하고 탐욕으로 그득한 신자유주의 신봉자의 악질적 발언의 진위를 들여다보자. 한 몸을 의탁할 싸구려 주택의 보증금,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시간당 임금으로 교통비, 공과금,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육신이 부서지고 골병이 들 정도로 노동을 해내도 가능할까 말까이다. 청소부로 웨이트리스로, 대형 할인점의 의류 점원으로, 노인병원의 조무사로 종횡하고, 이 하찮은 저임금 직업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모욕과 수모를 견뎌내야 하는가를 목격하는 것은 고통이란 단어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빈곤 속의 삶의 시작 조건은 모든 것을 결정” 할 정도로 그것을 탈피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 그럴까? 먹고 살기 위한 기초 생활자금에도 모자라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축?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자식만 주렁주렁 낳는 무책임한 사람들로 묘사한 신자유주의 꼴통의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지쳐 쓰러진 노동자가 무슨 재주로 자식들을 갖는다는 말인가?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데 말이다. 오히려 부자, 중산층들의 여유있는 삶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세 자녀에 대한 각종 정부 지원금과 육아 지원제도는 서민의 복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빈민들은 아이를 낳을 기력도, 낳아 기를 능력도, 더구나 세 자녀씩이나 낳는다는 것은 그들 삶의 현실에서는 요원한 사치일 뿐일테니 말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가난한 여성들은‘번식녀 계급’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다. 빈민은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경제적 장막이 쳐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일까?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게으른 것도 아니요, 자녀를 무책임하게 생산하는 자들도 아니며, 의존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사람들이다. 그들의 세계는 통증이 지배하고 정말의 피땀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다. 대체 알량한 실업급여를 기다리는 서민들과 실직자, 저임금 노동자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인가!

신자유주의 찬사로 가득한 보수주의자의 황당한 서적들과 마주칠 때면 화장실 변기를 닦아 “대장균이 듬뿍 묻어있는 헝겊으로 부엌 싱크대를 그냥 한 번 쓱 닦아주기만” 하면 되는데 하고 소심한 생각에 머무는 청소부‘바버라’의 상상을 그대로 이 승냥이들의 낯짝에 문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란 생활임금에 턱없이 모자란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항변에 “아니오, 임금은 계속 오르고 있다”고 반론한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 탁상공론은 최하위층 임금이 얼마나 하찮게 오르고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더구나 서민들의 실제 경험과 공식적 지표로 정의되는 빈곤이 불일치하는 것은 가계경비를 산출하는 부적절한 방식에 있음에 주의를 가지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식비를 근거로 산출하는 구시대적 집계 방식 같은 것들...

부서져라 일하고 끊임없이 직업을 찾아 헤매며, 파김치가 된 몸으로 하루 두 개의 직업을 오가도 살기 힘든 임금 구조는 노동의 가치 운운하는 세력들의 허위만을 입증 할 뿐이다. ‘노동의 배신’을 만들어내는 이 같은 사회가 지속 가능한 세상이 될 수 있겠는가?

워킹푸어가 사라지는 세상, 진정 노동이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헛된 꿈에 불과 한 것일까? 저임금 노동현장에 뛰어 들어 그 배신의 속살을 비로소 발견하고 분개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 고발은 보이지 않는 가난, 빈곤을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의 비장한 마지막 문구, “넘어진 사람을 발로 차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 어떤 너절한 언어보다 엄중하게 우리들의 사회에 각성을 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개미 2012-08-27 0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변을 토하셨네요. 그리고 동감합니다. 저도 이 책 보면서 완전 분노했었는데, 정말 변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필리아 2012-08-27 14:52   좋아요 0 | URL
비판정신이 마비된 젊은이들을 양산하는 교육구조이다보니 보수 시장지상주의자의 노동자 모욕의 논리에도 아랑곳 없이 열광하는 한국의 주류 의식이 안타까워서 말이죠...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뱀파이어란 존재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 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먹고 살며, 낮과 밤(빛과 어둠)으로 은유되는 삶과 죽음의 이원적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존재이다. 물론 이러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불과 2세기 안팎이긴 하지만 이 기이한 존재에 대한 대강의 실체를 설명하는 데 부족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의는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존재로서 생기를 먹고사는 사신(死神)이라는 우리의 귀신(鬼神)에 대한 정의와 거의 일치 한다.

 

이렇듯 유사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형상의 이질성은 물론이거니와 출현의 배경이나 사회적 인식의 출발점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게 한 동력은 동서(東西)의 귀신이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을 갖게 된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의 <트와일라잇>이나 <렛미인>과 같이 신비로움과 달콤한 사랑의 고통을 수반하는 뱀파이어의 등장에 이르면 뱀파이어가 현실의 인간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21세기에 이르러 어떻게 변화된 것인지를 은근히 추적케 한다.

 

1. 귀신과 뱀파이어

 

서구의 뱀파이어란 존재는 언제, 어떻게 등장한 것일까? 그리고 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러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일까? 역시 이 존재의 출현에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한 몫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종교가 항상 그러해왔듯이 자신들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면 악의적으로 형상화해서 그것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쓴 것처럼 “뱀파이어 사례가 보고된 시기는 항상 치명적 질병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의 자비를 얻지 못한 망자들이 중간 세계에서 방황하는 것이며, ‘마르틴 루터’가 그의 저술 《탁상 담화》에서 “그 불쾌한 소음은 사탄의 소행”이라고 언급하는 것과 같다.

 

이 지옥의 망상적 존재가 오늘의 뱀파이어로 형상화되는 것은 이처럼 종교적 산물이며, 사회적 반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귀신과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다. 한국의 귀신은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 발설하여 불합리한 현실을 준열하게 비판하고자 한 반면에 뱀파이어는 오히려 부조리함을 은폐시키기 위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환기하는 장치로서의 귀신과 대비하여 서구의 정신세계는 책임회피를 위한 망상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귀신은 현실적 규범과 질서의 균열로 인한 부정에 의해 희생된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어 사회적 건강성을 회복시키려는 시대적 합의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사탄이고 악마이며 신의 권위에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로 치부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나,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하는 어떤 것에 불온한 이미지를 씌워 배제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권위와 영역을 지키겠다는 내심의 반영에 머무르고 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6~7세기에 대두된 이 존재의 이러한 정체성은 세기가 흐르면서 꾸준히 변화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우리의 귀신, 특히 처녀귀신 등, 여전히 과거의 전통적 산물에 머물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측면이다.

 

2. 뱀파이어의 진화?

 

책은 이 혼란스러운 망상의 산물인 흡혈귀가 서구사회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그것은 문학과 회화, 음악과 영화 등 문화적 도구들을 통해 그 형상과 정체성을 확립해나가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추가해 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성에 의해 망상이 짓눌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곧 이은 낭만주의 시대는 이 망상의 산물에 휘황찬란한 형상을 입히기 시작한다. 괴테를 비롯한 무수한 작가들의 작품을 토대로 1836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흡혈귀의 상당부분을 형상화한 작품인‘테오필 고티에’의 《죽은 연인》을 낳는다. 인간적 감정을 지닌 존재이며 자신의 희생자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최초의 흡혈귀, 게다가 뱀파이어와의 결합이 영생(永生)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도 이 소설이 처음인 모양이다.

 

그리고 최고의 판타지 문학상의 이름이 된 그 유명한‘브램 스토커’의 소설,《드라큘라》의 출현은 바로 뱀파이어의 모든 변형들의 전범(典範)이 된다. 아마 대략 이 시기부터 문학과 영화, 음악 등이 상호 교섭하며 각양각색의 정체성을 지닌 뱀파이어들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비록 저작권 문제로 인해 《노스페라투》라는 이름으로 발표될 수밖에 없었으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가장 탁월하게 영화화한 감독‘무르나우’의 천재성에 기초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햇빛은 뱀파이어에 치명적이다.”, “길고 뾰족한 송곳니” 처럼 뱀파이어의 기호가 된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여기에서 형상화되었다고 전하니 말이다.

 

이것을 기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뱀파이어류의 소설과 영화, 오페라와 연극 등이 발표 되었으니 책에 소개된 특유의 시학적 감각으로 컬트적 지위를 지닌 B급 영화들까지 쫓다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 망상적 존재의 매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가늠케 된다.

이와 같이 뱀파이어가 사회문화 전반에 양적으로 양산되는 것과 함께 질적 변화도 수반되어 왔음을 목격하게 된다. 모두(冒頭)에서 말한 바와 같이 초기의 뱀파이어는 그저 종교와 사회적 부조리를 은폐하고 배제하기 위한 존재였다. 그러나 브램 스토커에 이르러 신에게 맞서는 대적자로서의 사탄으로 변형되고, 노스페라투에 가서는‘인간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철학적 대화에 이른다.

 

드디어 양산과정에서의 경쟁은 단지 혐오와 헌신 사이를 오가는 긴장이나, 피안의 존재가 지닌 어두운 마성위에 보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동기를 부어 넣기 시작한다. 희생자 여인과의 성적 결합, 피에 대한 욕망과 같이 관능과 관음증을 집중 공략하는 트래쉬 무비들을 낳지만 이 대량생산은 자연스레 인간적, 사회적 반영을 내재하게 된다. 즉 진화의 도약을 이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도태와 선택의 과정을 겪으면서, 신의 창조에 맞선 자부심으로서, 섬뜩함의 정체에 대한 자연의 경외에 대한 탐색으로, 환생과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써, 인간의 영생에 대한 은유로써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급기야 “육체와 피의 봉헌극”이라는 도식을 벗어나《트와일라잇》같은 청교도적 동화 같은 뱀파이어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어떤 존재가 만들어졌다면 분명 이유가 있다. 그런데 수세기를 변모해서 오늘에 이른 뱀파이어는 어떤 이유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3. 마무리 말

 

21세기 문화로써의 뱀파이어는 사실 그 동기를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망상적 존재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가 될까? 고작 매력적인 남자친구와 이를 원하는 소녀와의 이룰 수 없는 달콤한 좌절의 고통을 매개로 한 사랑이야기가 전부일 정도다. 본래 태생이 건강한 것이 아니다보니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한낱 상품으로서 전락한 것이 아닐까? 본디가 상품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은폐 상품, 주류의 위장 상품, 그리곤 인간의 영원한 욕망인 생명에 대한 희구라고 구색을 맞추긴 하지만 사실 그 사회적 존재로서의 생명은 이미 끝 난 것인지도 모른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이처럼 상품시장에서의 도태를 피하기 위한 처절한 변신, 신상품 기획의 요구에 대한 고달픔이 느껴진다. 정체성이 달라진 귀신은 이미 또 다른 존재인 것이지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지 않을까? 아무튼 서구의 흡혈귀에 대한 통속적 고찰이랄 수 있는 이 책의 망라적 소개는 충분히 흥미로운 자료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항우 강의
왕리췬 지음, 홍순도.홍광훈 옮김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를 말하면 의례히 초패왕‘항우’의 쓸쓸한 죽음을 연상케 된다. 한(漢)나라 고조가 된‘유방’에게 패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실패한 인물이 승자보다 더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왜 항우를 말하는가? 왜 패자(敗者)를 노래하는가? 더더욱 승자에 집착하며 패자를 조롱하기에 여념 없는 비정의 세상인 지금에서. 그런데 과연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무언가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이기는 것인가? 부, 권력, 부릴 수 있는 인간들, 명예 같은 것들? 아니면 도덕성, 배려심, 연민, 고통에의 공감 같은 사랑은?

 

책은 강력한 군사적 천재성을 지닌, 그리고 초의 대대손손 명망 귀족의 배경으로 가볍게 정치 무대의 상석에 서는 유리한 출발선까지 가졌던 항우가 왜 천하통일의 패업(霸業)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인물, 전략, 사회적 배경, 정치적 인식 등을 토대로 분석해 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저자는 때론 일반적 통설을 뒤엎는 주장도 하며 항우의 인간적 매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실패 요인의 분석에 있어서는 냉철한 통찰로 수장(首長)의 자질, 시쳇말로 리더의 경영학적 모델이랄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쟁자인 유방이나 배신하여 유방을 도운 한신에 대한 평가는 항우의 그것과 비교하여 참말의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게도 한다.

 

항우의 정치적 인식

 

항우의 패배이유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정치적 인식의 미성숙이다. 군사적 역량의 천재성은 항우의 성장기에서 시작하여 그가 참여하는 전투에서의 압도적 승리로 인해 반박할 여지없이 승인되는 사항이고, 사가(史家)들 역시 입을 모아 그의 군사능력의 탁월함에는 어떠한 이의도 붙이지 않는다. 항우 자신의 주장이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와 같이 잘 알려진 비유처럼 그가 참여하는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 싸움에서 지지 않는 장수가 졌다는 얘기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여기에 바로 정치라고 하는 권모술수가 개입한다.

 

한마디로 그는 술수를 부리지 못하는 영웅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유방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모든 분야에서 이류에 불과하던 유방이 뛰어난 것이 이 점이었기에 항우의 정치적 유치성은 더욱 부각된다. 진나라를 멸하고 관중에 진입하면서 이를 제지하던 유방에 대한 항우의 분노를 교묘한 변설과 임기웅변으로 위기를 피하는 유명한‘홍문연’사건은 대표적인 항우의 정치적 패착과 유아(幼兒)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군사적 규모나 영향력에서 상대가 되지 못하던 유방이 항우의 명예심을 자극하고, 당면한 갈등을 모호하게 하기 위하여 진나라의 멸(滅)을 위하여 공동으로 일어선 역사적 단계로 항우의 경각심을 돌린 교활성에 놀아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무식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항우의 인척으로 유방과 그의 모사인 장량의 술책에 놀아난 항백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이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을 무위로 바꾸어 버린 점이라든가, 유독 애정과 친정(親情)에 취약했던 항우의 편협성에 근인을 두고 있다. 초한(楚漢)전쟁이라 불리는 항우와 유방의 4년간의 싸움에서 국부적 전장에서는 줄 곧 유방에 승리하면서도 전체 국면에 대한 전략적 관심 부족으로 유방의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되는 형국에 이르는 것은 그의 정치적 인식 능력의 취약성을 거듭 확인하게 한다.

 

또한 유방과 달리 항우에게는‘범증’이라는 별로 뛰어나지도 못한 모사가 유일한 것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 있다. 즉 간언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인식능력에 이미 제약, 한계가 있었다는 측면을 말한다. 그러하다 보니 사람을 잘못 판단하는 실찰(失察)로 좋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실인(失人)은 그의 실패를 예견케 하는 지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궁지에 빠뜨리는 적과의 내통으로 자기이익만 챙기는 삼촌 항백은 보지 못하고 장량의 이간책에 말려 하나뿐인 모사인 범증까지 쫓아버리는 항우의 전략적 인식능력은 사실 유치함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아마 한국의 대다수 기업의 오너들에서 항우의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족벌경영은 거의 예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고, 경영적 판단이라는 소위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오너의 독단적 판단에 좌우되는 낙후된 관습이 여전하다는데 동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간언을 참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는 장을 봉쇄하는 한국사회를 예측하는데 이보다 좋은 교훈이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왜 항우인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국 사회는 이긴 자가 선하고 진 자는 악하다는 해괴한 신념이 있다. 그래서 무지하고 분별없는 자들은 실패자, 혹은 낙오자라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배제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우월성인 듯이 행동하는 것에 수치를 알지 못하는 천박한 뻔뻔함을 보인다.

항우는 소위 말하는 루저다! 그러나 사가들을 비롯한 후대인들은 항우를 이러한 해괴한 신념의 선상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다음의 전해오는 영사시(詠史詩)처럼 여전히 영웅으로 회자되고 그의 실패를 안타까워한다.

 

살아서는 사람 중의 인걸이요,

죽어서는 귀신중의 영웅이구나.

사람들이 아직까지 항우를 생각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몰래 강동을 건너지 않았음이리라.

 

이것은 비록 역사적 터닝 포인트를 인식하는 능력이 부족하긴 하였으나, 그의 인간됨됨이는 인걸이자 영웅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엇이 그러했다는 것일까? 이러한 일면은 그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제업(帝業)이라는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통치권자이기보다는 패업을 선택한 그의 행로라든가, 홍구를 경계로 유방과 휴전을 취할 때에도 유방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패업을 위해 백성들을 고생시키는 것이라는 이기심에 대한 참회의식이 그것이다. 물론 유방은 이것마저도 자기 이익의 편취를 위해 사용할 정도로 교활하였지만 말이다.

 

또한 오강에서 강을 건너 도피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패착을 인정하고 자결을 택했으며, 더구나 배신한 부하에게 자신의 목을 내 놓는 장면은 더 이상의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연장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시대의 환경이 이익을 보면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아무런 수치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였다는 것 또한 항우의 불운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오늘처럼.

그저 자신들의 이익만 쫓는 사회, 타인은 단지 딛고 일어서야 할 물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항우를 배신한 한신, 경포,...등이 이러한 인간들의 표상일 것이다. 그들의 말로는 어떠했을까?

 

유방의 모사 중 괴통이 전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짐승을 다잡으면 사냥개는 삶겨 죽습니다... 공훈이 탁월한 사람은 종종 상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유방은 결코 사람을 아끼는 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신의라는 것을 품고 있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만 활용할 가치가 있는 재능을 확실히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뿐이니, 천하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고 황제를 칭하게 되었을 때 한신 등을 주살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로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진리처럼 신봉하는 사회가 과연 인간의 주류사회여야 한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지금도 한국의 조직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비뚤어진 신념에 의해 희생당하는 인재들이 무수하게 양산되고 있을 것이다. 진정 인재들은 소외되고 얼치기들이 세상을 차지하는 양태에서 무슨 바른 판단과 정신이 서겠는가?

 

결어

 

잔혹한 폭정으로 백성을 학대한 진을 멸한다는 공동의 이익과 목표가 사라질 때, 바로 그것이 정치적 환경의 전환점임을 알지 못했으며, 유방의 경쟁자로서의 성장을 인식하지 못했던 어리석음, 또한 타인을 이용할 줄 모르고 믿지 못했던 약점이 분명 있는 인물이지만 이것들은 일컬어 전략이라는 술수를 부리지 않았으며, 남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으로 해석하게 되면 더없이 진실한 인물이 된다.

 

더구나 그의 실패를 야기한 배경에는 백성을 먼저 생각한, 전장에서 자신이 행사한 무참한 폭력에 대한 참회가 있다. 또한 칭 황제 이후에야 관용을 버리고 잔혹해진 유방과 달리 전쟁 중 관용에 인색했던 항우의 우직함 역시 교활함과는 한 참이나 다른 곧은 성품을 짐작케 한다. 우린 패자를 노래해야 한다. 비극의 영웅을 말해야 한다. 잃어버린,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격려하고 그들의 분노를 위로해야 한다. 진짜배기 사람들은 패자들인 바로 우리들이니까 말이다.

 

항우의 우미인(虞姬)과의 사랑 얘기인 패왕별희의 일담(逸談)도, 고구려의 살수대첩을 연상시키는 용수와 한신의 유수(㶙水)전투도, 장량, 진평, 소하, 역이기 등 모사들의 기지도, 두목, 왕안석, 이청조 등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영사시(詠史詩)까지 더해 초한(楚漢)의 쟁패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맛깔나게 재해석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 왜 우리들이 패자에 연민의 눈길을 보내야 하는지의 이유를 즐겁고 명쾌하게 깨우치게 한다. 오강에서 딱 한 번 웃으며 생을 마감한 항우의 그 호탕한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2-08-1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사내입니다. 패자이면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인물은 인물인가 봅니다. 항우를 인간적인 면에서 재조명했다니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필리아 2012-08-14 16:49   좋아요 0 | URL
제가 지나치게 인간적 측면을 강조했나 보네요. 책은 정치,전략,환경적 측면을 모두 아우르고 있답니다.

saint236 2012-08-1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의 책소개 때문에 구입했습니다.^^

필리아 2012-08-18 18:07   좋아요 0 | URL
혹여 기대하셨던 내용에 미치지 못하면..., 제 편협한 감상이 폐를 끼친것이 아니기만을 바랍니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성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계몽주의가 설쳐대던 18세기에 서구의 기독교 수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조적이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권위를 유지할 공간이 여전히 필요했으리라. 그것은 식민지들이었고, 자기들과 다른 모든 종교와 풍습,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에 대한 악랄한 불용과 배제를 통한 기독교적 쾌락이었을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거행되고 묵인되는 식민지배자들의 야만성은 시간을 거스르며 18세기를 중세의 암흑기로 되돌려 놓았다. 소설은 이러한 기독교의 수구성, 폭력성이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요, 자신들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들에 악마의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그 악마는 바로 그들 자신이었음을 밝히는 일환이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광기만큼 공포를 담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는 것이 없으니 거침없다. 여기에다 죽음을 조장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내세를 말하는 종교, 즉 죽음의 종교인 기독교 교리가 더해지면 정말 끔찍한 일들을 사람에게 저지른다. 이 광기는 인간을 자신들의 권위에 묵어두는 파렴치한 수단이 되고, 그것은 바로 마녀사냥이자, 종교재판이라는 잔혹하고 탐욕스런 정치적 권력이 된다.

나와 다른 타자는 모두 이단이요, 악마이며,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는 포악성은 선량한 무수한 인간들을 끔찍하게 처단했다. 그래서 희생자들의 문화와 종교, 전통, 풍습, 언어는 소멸되고, 그 자리에는 탐욕스런 서구의 종교만 남았다.

 

부모의 무관심에 방치되어 흑인 노예들의 손에 양육되던 후작의 열두 살 외동 딸 ‘시에르바 마리아’는 생일 파티를 위해 장에 갔다가 개에게 한 쪽 다리를 물린다. 그러나 그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광견병으로 사망하자 마리아 역시 발병을 의심받는다. 뒤 늦게 딸의 사고를 알게 된 후작은 그녀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계몽주의자인 명의(名醫)‘아브레눈시우’에게 치료를 의뢰한다. 광견병의 소견이 없음에도 흑인의 풍습과 언어에 능한 마리아에 대한 소문은 점차 사악함, 악마의 기운으로 확산되고 이윽고 지역의 주교는 후작을 소환하고, 아이의 광기, 사악한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 수녀원에 감금되어야 함을 명령한다.

 

기독교의 교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곧 악마라는 것이다. 더구나 항상 기독교의 야만적 폭력을 포장하는 말처럼, 자신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종교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 이 얼마나 기만적인 목소리인가! 자신들은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교활한 술책이다. 또한 “우리는 소녀가 아니라 소녀의 안에 있는 악마와 전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녀 안의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소녀를 죽여야 한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것이라 말하며 이원론을 고집하는 기독교의 이 모순된 악의는 대체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열두 살 소녀는 종교의 무지와 야만성에 이끌려 수녀원에 인도되고, 편협과 아집, 독단에 사로잡힌 수녀원장에 의해 마녀가 되고, 악마가 된다. 멀쩡한 소녀가 서구 백인의 언어와 풍습과 다른 표현과 이해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말이다. 주교는 자신이 총애하는 사제인 ‘델라우라’에게 소녀를 감시하고 엑소시즘을 시행할 소임을 맡긴다. 그러나 사제는 마리아가 광기에 젖어있는 것도, 악마가 깃든 것도 아니요, 단지 후작 내외의 방치 탓에 흑인 풍습을 습득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소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쌓아간다. 사제는 그와 반목하는 수녀원장의 진정에 의해 주교로부터 임무를 박탈당하고 정신병원 간호인으로 쫓겨나지만 깊은 밤 수녀원 감방에 몰래 잠입할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 간다.

 

이윽고 주교가 직접 나서 고위 사제단을 이끌고 후작의 딸 마리아에게 엑소시즘을 실행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기독교의 광기에 어린 야만성 그 자체이다. 주교의 신들린 고함소리, 성가대의 굉음, 격정으로 이글거리는 주교의 눈 빛, 그것은 바로 원한의 악마, 관용을 모르는 악마, 백치의 악마, 혐오스러움이다. 델라우라에게 끔찍했던 엑소시즘의 순간을 토해내는 마리아의 창백한 목소리, “마치 악마 같았어요!”는 악마란 과연 누구인가를 역설한다.

그런데 또 하나 아주 우스운 기독교인들의 단골 언어가 떠오른다. “악마는 심지어 진실을 말하고 있을 때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아퀴나스의 모순어이다. 대체 악마자체가 모호한 것을, 전체주의자, 파시스트들의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의 독선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서구 식민 지배자들의 탐욕과 이들의 체제 수호적이고 회귀적이며 수구적인 기독교의 악의성이 어떻게 식민지민들의 언어와 종교, 풍습을 억압하고 압살했는지를 사랑과 악마라는 그네들의 이분법적 언어에 담아 아릿한 환상적 사랑의 얘기로 풀어낸 걸작이다. 도시개발로 허물어지는 옛 수녀원의 묘지 이장(移葬) 현장에서 발굴된, 죽어서도 길게 자란 머리를 한 소녀의 사체를 모티브로 식민지 남미의 역사를 거슬러 서구의 종교적 문화적 이중성을 고발한 이 작품은 거장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유감없는 소산(所産)이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것들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소설이 마치 자신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 같다면 그 느낌이 어떤 것일까? 나는 객관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해야 하겠다. 작중 화자의 넋두리에 내가 앓고 있는 분노를 대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염세적인 한 마리의 늙은 짐승처럼?” 나쁜 것들!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에 말이다. 굳이 관계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지하고 부도덕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함을 고작 오만과 고독이나 즐기려는 삶의 회피자로 몰아세우면서 절에나 들어가 사시지 왜! 하는 반응같은 것. 웃을 일이 없어 입을 앙다문 사람에게, 슬픔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는 꼴 아닌가. 상처입고, 막막하고, 망가지고, 짓밟혀 신음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반응이란 고작 이런 것일 게다.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지 않은가?

 

육십 줄에 접어 든 소설가, 십여 년 전 눈앞에서 아내와 큰 딸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모습을 작은 딸 아이와 함께 절망적으로 지켜 본 남자, 그래서 그 고통의 환영이 온 몸에 새겨진 남자가 있다. 소설은 현실의 삶들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생의 분절을 만들어 낸 사건 전후의 시간들을 오가면서 인생이란, 운명이란 것의 회한을 쏟아 놓는다.

그것은 차마, 혹은 미처 용서 할 수 없었고, 용서 받지 못했던 것들의 얘기이자, 어쩌면 삶을 구성하는 본질의 모습들일지도 모른다.

 

영화배우가 된 둘째 딸, ‘알리스’와의 끔찍할 정도의 반목, 그 근원에는 죽은 아내‘조아나’의 일기가 있다. 남자의 외도사실을 꼼꼼히 적어 놓은 일기, 알리스는 남자에게 ‘추잡한 인간’이라 길게 악을 써대며 집어 던진다. 남자는 이 우발적이고 일회적 외도의 사실을 아내에게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런 딸아이가 실종 되었다는 소식을 사위로부터 전해 듣게 되고, 노년의 남자는‘안 마르’라는 대학동창인 여자에게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탐정 일을 의뢰한다. 아내를 잃고 난 후, 이년이 지나 결혼한 아내‘쥐디트’는 남자의 고통에 뛰어들지 않으며, 자신의 일로 바쁠 뿐이다. 더 이상 그는 딸에게도, 사위에게도, 아내에게도, 아무런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이자 남편일 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동정도, 연민도 스며들어 있지 않다. 그저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며, 자신들의 고통과 욕망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탐정 일을 맡겼던 안 마르에게 살인죄로 형량을 채우고 출감하는 아들‘제레미’가 있고, 그 상처 받은 영혼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 만큼 고통스러운 존재의 음울함을 발견한다. 노 작가와 마음의 손상으로 짓밟힌 젊은이와의 교우는 서로를 보면서 현실을 견뎌내는 위안이 된다. 청년의 트라우마가 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증오에는 역시 모자(母子)의 치유할 수 없는 불용(不容)이 있다.

 

소설에는 이처럼 부모와 자식의 얘기가 있고, 그 자식들에게 애를 먹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런 운명에서 벗어난 부모는 드물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다. 마약에 절어 살던 딸 내외의 거침없는, 무례한, 교활한 삶의 방식, 그러한 것까지 인정해야 했던 남자에게 딸의 실종은 지독히 잔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실종 사건이란 것이 단지 여배우로서 인기에 대한 병적 집착 때문에, 대중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벌인, 소설가 아버지를 제물로 삼은 딸 내외의 자작극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심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타인들이 알기나 할까?

 

이해 할 수 없고, 이해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싸여 혹여라도 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 사소한 말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남자에게 나는 동류의 연민을 느낀다.

한 때 남자의 소설을 읽고 독자로서의 열정을 보여 주었던 아내 쥐디트의 무심함이 남자의 입에서 “나쁜 년, 내가 지금 『전쟁과 평화』나 『길 위에서』 같은 작품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니.”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래서 미행을 붙일 만큼, 피폐해진 남자의 불안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여자의 이기심에 또한 불용의 장막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 인한 감정의 소비에 일말의 동정을 보낼 여지는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그만 움찔해질 것 같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반은 자신의 내면에, 나머지 반은 자신의 개를 향해”있다는 청년 제레미에 대한 조롱의 견해는 남자에게 또한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한다. 점점 용서하기가 힘들어진다. 완고한 늙은이처럼 변해가는 내 모습을 문득 느끼게 될 때면 그 나쁜 것들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인식에 도리질을 하게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십년 만에 다시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여전히 숨 쉴 수 있어 다행스럽다는 남자의 표현은 더더욱 가슴을 파고든다. 자식에 대한 관용과 용서는 부모로서 어쩌지 못하는 것일 게다. 갈수록 회의적이고 견유(犬儒)주의자처럼 세상과의 차단을 바라게 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궤도를 달리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한 남자의 자기 관찰적 소회(所懷)인 이 소설은 이처럼 내겐 깊은 동료적 울림으로 태연히 읽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다. 염세적인 늙은 짐승의 추악한 외침이라고 누군가 비난할지라도. 제레미가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길을 잘못 들어선 남자의 내면을 종식시키는 상징인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이 허둥대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한 소설이 있었던가? 하고 자문하게 하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