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모자이크 - 뇌는 남녀로 나눌 수 없다
다프나 조엘.루바 비칸스키 지음, 김혜림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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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음식점에서 공깃밥을 주문하면 남자는 가득 담아주고 여자는 덜 담아주는 경우가 있다. 같은 가격을 받으면서 말이다. 분명 '차별'이다. 하지만 이유는 있다. 밥 한 공기로 양이 차지 않는 건장한 남성이 배부르게 먹으려면 가득 담아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여성은 의도적으로(?) 공깃밥의 반을 남기면서 덜 먹으려 한다. 한 공기를 다 먹으면 배가 부르는 여성도 많지만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남기는 여성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런가보다 할 수 있다. 근데 남자들 중에도 밥 한 공기를 다 못 먹는 소식가들이 있다. 물론 여자들 중에도 밥 한 공기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는 대식가가 있고 말이다. 그런데 식당 아줌마가 재량껏(!) 빼빼 마른 남성에게는 살 좀 찌라며 더 많은 밥을 퍼주고 덩치 큰 여성에게는 그만 좀 먹으라며 밥을 더 달라는 여성의 요청을 묵살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곤 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과연 식당 아줌마는 왜 '차별'을 했을까? 같은 가격을 받는 '밥 한 공기'에는 어떤 사연이 담긴 걸까?

 

  <젠더 모자이크>는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애써 남녀로 '구분'을 했을 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예로 들기도 한다. 이를 테면, 복용약 가운데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따로 판매하는 약이 있다. 성분은 똑같지만 복용하는 양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임상실험결과를 근거로 남자는 1알 전부를, 여자는 1알의 반만 복용하도록 따로 포장해서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남성용', '여성용'으로 알맞게(?) 복용했을 때 효과가 미약하거나 때론 심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서다. 그 까닭은 잘못된 구분법으로 판매한 탓이다. 애초에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않았으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예를 들어, 수면제의 경우, 건장한 남성이 1알을 먹으면 푹 잠을 잘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은 '반알'을 먹으면 역시 푹 잘 수 있다. 하지만 저체중의 남성이 1알을 먹으면 아침이 되어도 잠을 깨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곤 한다. 반대로 과체중의 여성이 반알을 먹으면 아침이 되어도 개운하지 못한 느낌을 받곤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단다. 분명히 '남성용'과 '여성용'을 제대로 복용했는데 말이다. 이는 수면제의 약효가 '근육량'이나 '신진대사'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나눈 것도 바로 평균적인 남성과 여성의 '근육량'을 기준으로 삼아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남녀로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라 '체중별'로 몇 알씩 복용하라는 기준을 삼았으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각각 남자와 여자의 고유의 특성이 아닌 '보편적인 특성'에 남녀의 명칭만 갖다 붙였을 뿐이다. 이를 테면, '힘이 세다'는 특성은 보편적으로 남성에 해당하는 것이고, '화장을 하다'는 특성은 보편적으로 여성이 더 많이, 더 잘 할 뿐이다. 그런데 힘이 센 여성도 있고, 화장을 잘 하는 남성도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젠더(사회적인 성)'의 문제점이라고 지칭했다.

 

  우리는 종종 '생리적인 성별(섹스)'의 차이를 '젠더의 문제'로 심화시키곤 한다. 오늘날의 한남충이니 메갈리안이니 하는 '페미니즘 문제'도 바로 이러한 오해와 편견에서 시작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애써 '남녀를 구분하려 들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책이 패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 그닥 없다'는 사실을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심오하고 세심하게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결론은 '남녀는 구분할 수 없는 모자이크의 성향을 띤다'라고 내렸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100% 남성성을 지닌 남성과 100% 여성성만 갖춘 여성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뇌과학적으로 증명하면서, 각각의 영역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 파랑과 분홍으로(중간은 하얀색으로) 나누어서 '뇌지도'를 그려보았더니, 다양한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각각의 남성과 여성의 뇌지도를 펼쳐보이면서 '구분'해보라고 했더니 대다수는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더라는 사실도 함께 발표했다.

 

  이는 우리의 상식과 매우 다른 결론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전형적인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뇌영역을 그린 지도를 보았을 때, 파랑색이 우세한 뇌지도는 '남성의 뇌', 분홍색이 우세하면 '여성의 뇌'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서로 다른 다양한 색색의 모자이크만 발견했을 뿐,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로 따로 구분할 수 있는 뇌지도는 없었던 셈이다.

 

  이런 결론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만끽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런 '다름(차이)'로 인해서 보여지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천편일률적인 남성과 여성의 '기준'을 억지로 정하고 애써 '구분'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전형적인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지으려 들면 생기지 말아야 할 문제점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분명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기에 더욱 아름답다. 우리가 남자다운 남자와 여자다운 여자에게 큰 매력을 느끼는 것도 바로 '다름의 아름다움'에 끌린 탓이다. 그러나 그런 매력을 '고정관념'으로 삼아서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고 애써 '구분'짓게 되면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남자와 여자는 이래저래 피곤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남녀의 갈등이 복잡해지고 심화되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잃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패니미즘 갈등이 전혀 아름답지 못한 까닭이다. 이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의 아름다움'을 만끽해야 하지 않을까?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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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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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등장하는 '회색신사'는 참 인상적이다. 분명히 악당과 같은 존재인데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심지어 끌릴 정도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아닌 것 같다고? 회색신사가 하는 말을 곰곰히 곱씹어보면 <자기계발서>에서 한 번쯤 들어본 말일 것이다. 또, 어릴 적부터 신물나게 들어본 말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을 아껴라', '시간을 관리하라'...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을 살면 '성공'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환상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너무나도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한 아이가 등장했다. 모모라는 아이는 옷도 허름하고 집도 없으며 먹는 것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소녀를 너무도 사랑한다. 왜냐면 모모와 함께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고, 누군가에게는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게 해주며, 동네 아이들에게는 값비싼 장난감이 아니어도 저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이 되어 모험을 떠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는 멋진 친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돈 한 푼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나 바라는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소녀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 동화책에는 현대인들이 바라마지 않는 두 가지 소망을 '양 끝단'에 달아놓고 저울질하게 만든다. 바로 '성공'과 '행복' 말이다. 회색신사가 성공을 이야기한다면, 모모는 행복을 꿈꾸게 한다. 그럼 '성공'하면 '행복'해질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욕심을 끝이 없어서 두 마리 토끼 가운데 한 가지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공을 이루면 당연히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일단, '회색신사'처럼 시간을 쪼개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모든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서 성공에 다다르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시간을 '성공'을 위해서 투자해버리고 나면 성공에 다다랐을 때 내 주위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가족도 나몰라라하고, 친구도 내버리고, 오직 성공을 위해서 시간을 아껴 최선을 다한 뒤에 '성공의 문턱'을 넘게 되면 엄청난 부와 명예는 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회색신사'가 가져다 준 성공은 진짜 성공과는 거리가 먼 부질없는 성공이었지만, 실제의 삶에서 그렇게 성공을 가지고 온 이들이 꽤나 많을 것이다. 흔히 앞만 보고 걸어간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성공을 이룬 뒤에 가족도 챙기고, 친구도 만나며 행복한 시간을 나누면 삶이 풍요로워질 것 같은데, 막상 성공한 뒤에는 모두 잃어버린 뒤가 되고 만다.

 

  한편, 모모처럼 사는 것도 현대인들은 바라마지 않는다. 늘 부족하지만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사는 모모는 여유와 만족을 만끽하며 가슴 따뜻하게 살아가고 있다. 늘 가족과 함께하고, 언제라도 친구와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꿈꾸지 않느냔 말이다. 여기에 딱 한 가지만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바로 '돈' 말이다. 현대인들에게 돈은 '욕망'이다.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는 돈이 부족해지지 않는 삶을 꿈꾼단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행복'을 꿈꾸면서 동시에 '성공'을 꿈꾼다.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 부단히 '시간관리'에 아낌없이 투자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곤 한다. 과연 현대인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회색신사처럼 성공을 꿈꾸는가? 모모처럼 행복을 바라는가?

 

  성공과 행복은 '같은 말'인줄 알았는데, 살다보니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성공하고 적절히 행복해지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이야기속에서는 모모가 회색신사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행복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맞았지만, 과연 현실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이런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제라도 '회색신사'가 다시 나타나게 될 거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결코 모모처럼 살 수는 없다. 딴에는 모모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게으름'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모모의 모습이 그닥 행복해 보이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하긴 사람이 '직업'을 가지게 되는 근원도 '보람'을 얻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 '자아실현'을 통한 쾌감과 뿌듯함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 단순히 '돈'을 벌겠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쫓겨가며 허덕이며 일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쪼개며 성공의 문턱을 넘기 위해 아둥바둥거리는 것이 아닌,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사는 삶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삶'이 아닐까 싶다. 물론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정말로 꿈 같은 일일테지만 말이다.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며 살 수 있는 삶이 말처럼 쉽다면 고민거리도 아예 생기지 않을 테고 말이다.

 

  결국 <모모>는 '시간'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얘기고 말이다. '회색신사'의 꾐에 빠져서 거짓된 성공을 꿈꾸며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모모'에게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원천을 우리 가슴속에 새기며 살면 돈 따위가 부족해도 얼마든지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슴 따뜻한 동화책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삶을 살라고 권해줘야 할까? 명문고, 명문대,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서 학습하고 또 학습하며 친구 따위는 '성공'을 한 뒤에 사귀어도 늦지 않다고 권해야 할까? 이거 어째 '회색신사'처럼 말하고 말았다. 그러면 모모처럼 살라고 권해야 할까? 공부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하루종일 유유자적하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나누며 살라고 말이다.

 

  심각한 고민 끝에 '성공'과 '행복'을 모두 놓치지 않고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도 아이들에게는 '회색신사'처럼 말하고 말았다. '모모'처럼 살면 안 된다면서 말이다. 성공과 행복은 같은 말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성공한 다음에 행복을 꿈꾸라고 하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참내...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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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루션 SOULUTION - 정신질환 치유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다
노영범.김지영 지음 / 미다스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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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들은 온갖 병을 달고 산다. 육체적인 고통부터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듯 끊임없이 새로운 병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의학은 매우 발달한 덕분에 팔다리가 부러지고 신경이 손상되어도 곧잘 고쳐내곤 한다. 심지어 장기가 손상되어도 '인공장기'로 갈아끼우는(!) 방식까지 서슴지 않으며 회복치료에 적극적이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면 어쩔 줄 모른다. 이른바 '정신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온 사회에 퍼져있다. 일부 연예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공황장애', '조울증', '우울증', '조현병' 등과 같은 정신질환의 명칭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누가 알아채기라고 할까봐 조용히 입다물고 있는 편을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이래서는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식의 '사회분위기'가 [정신병=범죄자]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이를 테면, '조현병'을 앓고 있던 환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뉴스기사는 '사실'은 맞지만 '접근법'은 매우 잘못된 경우다. 조현병은 환각과 환청을 불러오는 무서운 병이고, 적절한 약을 처방함으로써 환각과 환청 증세를 치유할 수 있는 현대병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족 가운데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쉬쉬하는 분위기이다보니 '적절한 치유시기'를 놓치고 방관을 일삼다 끝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안타까운 사연인 셈이다.

 

  따라서 '정신병'을 감추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정신병원'에 들락거린다는 걸 숨길 필요도 없다. 또한, 지인이 정신병(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조현병)을 앓고 있어서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휠체어에 타고 있는 사람이 계단을 오를 때, 또는 앞 못 보는 사람이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 아무런 거리낌없이 도와주는 것처럼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분들을 도와주면 그뿐이다. 실제로 시도때도 없이 욕설을 내뱉는 환자에게 "괜찮아, 괜찮아, 속에 있는 말을 참지 말고 마음껏 해. 나는 아무런 편견없이 들어줄 수 있으니까"라고 말을 건내주는 것만으로도 욕설을 단박에 멈추게 하는 기적(?)을 선보여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자들이 더는 숨지 말고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그러나 병이 심하면 치유도 힘든 법이다. 정신질환을 고치기 위한 의료진들의 노력이 절실한 까닭이다. 이 책도 그동안 고치기 힘들거나 다양한 치유방법으로도 효과를 볼 수 없었던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유법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치유사례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의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사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멈추고 엄마가 아이의 배를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다 나은 것 같은 기적을 만나는 것은 '신뢰의 영역'이지 '믿음(종교)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먼 옛날부터 전해오는 책 한 권에 '만병통치의 비법'이 담겨 있을 거라는 생각도 그닥 좋은 접근법은 아니다. 더구나 '심리학'이 정신병의 근원을 뿌리부터 찾아내서 완치를 해줄 것이라는 생각도 그닥 추천하고 싶은 치유법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의 권위자'가 한 명이면 충분하지 여러 명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딱 맞는 치유법은 저마다 다른 법이다. 이 책의 치유법으로 고통에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례는 맹신이 아닌 참고 정도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상한론>과 칼 융의 정신분석학이 큰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더 많은 정신질환자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명약이 되길 바란단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병은 증상만큼이나 '원인'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환영받아야 한다. 100번의 시도 끝에 단 한 번의 성공을 얻었다면 또 다른 성공과 더 많은 성공을 위해서 더욱 정진해야 하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정신질환의 아픔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는 기쁨을 만끽하길 바란다.

 

책드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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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시대 - 기술이 인류를 소외시키는 사회에 대한 통찰과 예측
브래드 스미스.캐럴 앤 브라운 지음, 이지연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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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를 활용한 'IT(정보통신)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라고 부르는 지금은 컴퓨터 기반의 온갖 기술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급속한 기술 변화의 시대에는 기술 자체의 문제보다 발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인간들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일자리를 비롯해서 안전, 인권,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가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들까지...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점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변화의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기술 혁신으로 얻는 이득이 너무나도 많은 까닭에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혁신의 속도가 늦어질수록 경제적인 문제 등등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늦출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혁신과 전통의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마치 '사극드라마'에서 '카카오톡'을 쓰는 것처럼 어색한 느낌부터 들 수도 있는 해법이지만, 그래도 기술의 변화 속도에 뒤쳐져 버린다면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대안이라는 사실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IT 기술의 발전'을 살펴보자. 인류는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인류의 지식 축적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문자'가 없을 땐 몽땅 외웠다. '문자'가 등장하자 인류는 '기록'하기 시작했다. 종이의 발명은 '기록'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이 특정한 이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인류는 문자와 종이, 인쇄술이라는 기술을 발전시켜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지식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방대한 양의 지식을 삽시간에 처리해버리는 기술을 고민하다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 컴퓨터는 실로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처리하는데 유용한 기술이었다. 이렇게 세대를 거듭하며 발전한 컴퓨터는 놀라운 '처리속도'를 자랑하며 점점 더 발전하기 시작했다. 처리속도가 빨라지면서 대두된 문제점은 '저장공간'이었다. 플로피 디스크와 하드 디스크에 매달리던 시대를 지나 'CD'가 등장하면서 엄청 날씬한(?) 저장공간이 생겨버린 셈이다. 하지만 날씬해도 금새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게 되어 버리곤 한다. 그러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서버'와 같은 대형저장공간이 곳곳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초기엔 그마저도 부족해서 먹통이 되다시피 했지만, 엄청나게 방대한 서버가 점점 많이 만들어지면서 공간에 여유가 생길 지경에 다다랐다.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지식정보의 양은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개개인의 정보'를 대신 저장해주는 아이디어가 번뜩이게 되었다. 바로 '클라우드'의 등장이다. 이제 인류는 어마어마한 저장공간에 '개인의 정보'를 올려두면 '누구나' 편리하게 그 정보를 쓸 수 있는 기술 혁신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없이 저장하고 원없이 뽑아 쓸 수 있는 지식 저장공간이 생기자 그 편리함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되거나 '개인 정보'가 누출되거나, 심지어 그런 정보들을 노리는 범죄집단과 그런 정보들 덕분에 발생하는 또 다른 범죄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위험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어지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이 도덕의 발전보다 빠르게 되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인 셈이다.

 

  한편, 'AI(인공지능)의 발전'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바로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해진다는 점이다. "아리야, 오늘 날씨는 어때?", "아리야, 오늘 점심 뭐 먹지?", "아리야, 데이트 장소로 알맞은 곳을 선택해줘", "아리야~~~" 인류는 컴퓨터와 '대화'를 하며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른바 '특이점'이라고 불리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펼쳐질 미래인 셈이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과연 행복해질까?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척척 해내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양날의 검이 아닐 수 없다. 인간보다 똑똑해진 컴퓨터가 인간들의 일자리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서서 '정신적 노동'까지 대신하게 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필요해질 것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암울한 영화 속에서는 인간이 기계를 움직일 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생체 건전지'가 되어 버리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쯤 되면, '기술 혁신'은 윤리적인 문제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개인 정보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능력을 넘어버린 '기술'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미 '기술 혁신'의 대부분은 인간의 발전 속도를 훨씬 뛰어넘어서 발전하고 있다. 이제 인류는 뒤쫓을 여력조차 없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기술 혁신의 속도'에 딴죽을 걸어 속도를 늦추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니, 아주 늦추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인류가 따라잡을 수 있을 때까지만 혁신의 속도를 늦추어 나가는 방안은 어떤가?

 

 기술 혁신의 속도는 결코 늦춰지는 법이 없을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혁신을 뒤쫓을 생각만 하다가는 정작 중요한 답을 놓칠 수 있다. 그건 바로 '기술 혁신' 자체를 인류에게 유용한 도구이자 강력한 무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류가 컴퓨터에게 지배 당해선 절대로 안 된다. 유용한 컴퓨터를 편리한 도구로, 때론 강력한 무기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인간의 패배로 결론이 났다. 이제 '기술 혁신'과 인간이 대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앞으로 인간은 '기술 혁신'과 대결했을 때 번번히 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과 터미네이터와의 싸움이랄까?

 

  이제는 인간은 '기술 혁신'의 파도를 타고 즐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원리를 배우려고' 아둥바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 고민하면 그뿐인 셈이다. 새 스마트폰이 나왔을 때, 사용법을 익히느라 고민하지 말고, 스마트폰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써먹어야 좋을지 고민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마트폰을 잘 쓰기 위해서 '스마트폰 만드는 방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기술 혁신이 필요한 까닭을 곰곰히 생각하고,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면 '어떤 일'에 써먹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단 말이다.

 

  물론,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하곤 한다. 바로 '범죄'에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유용한 기술 혁신으로 다른 사람의 '개인 정보'를 손쉽게 빼낼 수 있고, 이것을 가지고 정부가 '억압'과 '감시'의 수단으로 활용해버린다면 끝내 '디스토피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 '도덕윤리적 가치관'이 뒷받침 되어야 하며, 이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법이나 규율을 발빠르게 마련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 민주사회를 완성해야만 한다. 온 국민, 나아가 전 세계인이 도덕과 윤리의 가치관으로 '기술 혁신'을 다룰 수 있을 때, 진정한 기술 혁신이 보장되고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이 '기술 혁신'을 다룰 수 있는 자신감으로만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는 더욱 빠르게 '기술 혁신'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도 결국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이자 무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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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 자본론으로 21세기 경제를 해설하다
한지원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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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들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심지어 공산주의든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잘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기본 전제는 '자유, 평등, 풍요'인 탓이다. 물론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하였다. 계급을 타파하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평등을 추구했던 공산주의는 현실에선 자본가를 쫓아내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자본가의 자리를 '공산당'이 차지해버리는 모순을 보였기 때문에 동유럽의 공산국가의 몰락을 시작으로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북한이 고립되는 결말로 치닫고 말았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유도 보장하지 못하고, 평등은 지켜지지 못했으며, 풍요는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논외로 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어떤가? 마르크스가 주창한 <자본>의 결말은 자본주의가 끝장나면 사회주의가 완성된다고 했다. 허나 '이론'으로서만 그렇고 '현실'은 그렇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용케 버티고, 또 버티고, 또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 불안하다. 자본주의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어서 계속 이어오고 있긴 하지만, 현대인들이 꿈꾸던 '자유, 평등, 풍요'가 좀처럼 보편화되지 않은 까닭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날로 심각해지고 '상위 1%의 부'가 전세계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자산과 맞먹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주목 받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이다.

 

  이 책도 그렇다. 21세기에 걸맞는 관점으로 <자본>을 들여다보고 자본주의의 맹점을 다시금 돌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당사자는 보지 못하는 수를 옆에서 관망하는 이의 눈에는 잘 띄어서 곧잘 훈수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자본>은 '자본가의 착취'를 파헤쳐서 '노동자의 해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 당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덜 착취 당할 수 있도록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서 써놓은 책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서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은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가 점점 벌어져서 더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피착취자(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오게 되어 끝내 사회주의가 시작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자본주의가 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끝내 사회주의가 펼쳐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직까지는 마르크스의 상상에 머물러 있는 단계일 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삐걱거릴 때마다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요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길 즐긴다(?)고 한다. 그래 봤자, '복지정책'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정도이지만, 기꺼이 '자유, 평등, 풍요'를 이루기 위해서 가치관을 바꿀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심상찮은 분위기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무상급식'으로 시작해서 '기본소득'에 이르기까지 보다 적극적인 공공근로와 복지정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애써 무식한 이들은 이를 '공산주의의 책동'이라며 무식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지만, 이것들 모두가 바로 '자본주의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이 책에서도 수없이 언급하지만 '자본주의의 결함'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현실이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과연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인가? '뉴노멀 시대'에도 자본주의는 굳건하게 경제시스템의 지휘를 누리고 있을 것인가?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경제시스템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더욱 어두운 미래를 점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더욱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긍정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긍정의 힘은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만이 '자본주의의 허점'을 제대로 지적한 덕분이다. 물론 '사회주의의 이상향'으로 귀결된 것은 안타깝지만, 그것마저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상향을 꿈꾸는 것'으로 돌파구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대변혁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결국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원대한 몽상가들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깨어나야만 한다. 꿈은 꾸되 무지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몽상가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몽상가들의 꿈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함께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벽한 자유와 평등, 풍요로운 시장경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큰 정부의 힘'이 필요하지만 '커다란 정부'는 위험요소가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정부담'이다. 원대한 이상향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모한 도전'이 계속된다면 자본주의 변혁을 완수하기도 전에 파탄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전세계가 '같은 꿈'을 꾸어야만 한다. 더는 '약소국의 피땀눈물'을 착취하여 선진국의 경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착취자(자본가)'와 '피착취자(노동자)'의 밀접한 관계로 성장을 한다지만, 전세계의 경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버리면 '자본주의 변혁'은 또다시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꿈을 동시에 꾸어야 한다. <동물농장> 속의 '복서' 같은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지만, 결코 이용 당하고 착취 당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깨어 있는 경제 시민'이 되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더는 영웅적인 정치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일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멈추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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