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중록 4 아르테 오리지널 4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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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극로맨스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따로 '역사공부'를 한 것은 처음이다. 드라마 <보보경심 려>를 보고서 소설 <보보경심>을 읽을 때도 청나라 옹정제의 치세 따위를 따로 챙겨보지 않을 정도로 무심한(?) 나였는데 말이다. 이 책의 배경이 '당나라 의종의 치세'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하도 '대당의 멸망'을 운운하고 있으니 궁금해서 좀 뒤적거리게 되었다. 그랬더니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서 관심이 갔더랬다. 신라 6두품 출신의 천재적 인물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했을 당시가 바로 의종시절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 최치원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곧이어 벌어질 '황소의 난' 때 최치원이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 간담이 서늘하게 하였다고 하여 그의 문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니, 이 소설에서 '대당의 멸망'을 소재로 삼아 미스테리한추리극을 연출하는 것이 마냥 소설속의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일까? 그것까지 자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의종의 넷째 아우 '기왕 이서백'은 실존인물이며 무능한 의종에 비해 뛰어난 왕재를 지녔다는 풍문의 주인공인 것은 사실인 듯 싶다. 물론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는 치밀한 지략가였는지도 확인불가인 탓에 '로맨스소설' 특유의 설정인 듯 싶다. 그런 고로 여주인공인 '황재하'도 허구의 인물일 것이다. 허나 냥야 왕가의 왕온은 실존인물이지 않을까 싶다. 비록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실재 역사속 인물들 중에서 골라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 주자진도 고귀한 신분으로 '시체 검안'에 특기를 지녔다는 설정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순 없을 것이다. 허나 이 모든 인물은 '사극로맨스미스터리추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기 위해 작가의 고심과 철저한 안배였을 것이다. 이를 테면 역사에도 도통하고 추리에도 능한 작가의 뛰어난 재능이 만들어낸 역작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여자작가'인 탓에 여주인공의 심리묘사가 탁월한 점도 '로맨스소설'로 탄탄하게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의 감정굴곡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미스터리추리 소설'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로맨스 소설'로는 자격미달이었을테니 말이다. 암튼 이토록 기묘한 장르로 '대하소설' 못지 않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 작가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세 남녀의 밀고 당기는 달콤한 감정선이 '정치적 궁중암투'가 전하는 <역사 소설>의 무게감까지는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데, 여주인공이 추리수사를 할 수밖에 없는 설정이라서 '연애감정'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시체해부'를 하면서 코를 움켜쥐는 장면이 연출될 때는 달달해진 장면에 기껏 몰입했던 독자로서 감정선이 와장창 무너지길 여러 차례 반복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맨스 소설>의 속성상 어쩔 수 없이 '해피 엔딩'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나라가 망하고, 국운이 기울며, 여기저기 가까운 인물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피비린내를 연출하면서 '두 남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될 것이고, '한 여자를 두고서 두 남자가'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니..."그만 좀 죽이면 안 되겠니?" 라는 갑갑한 심정이 극에 달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대단원에 이르러서야 기왕과 황 수사관(?)의 사랑은 아름다운 결실을 이루었다. <로맨스 소설>로써는 당연한 결말이니 스포일러일 수도 없는 팩트다. 물론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이 독자들에게 신선한 재미가 충격적(!)으로 다가갈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충격적'이라는 표현이 이 소설에서는 아주 딱 걸맞는 수식어일 것이다.

 

  암튼, 이 소설은 '기이한 소설'이었다. 사극 중에서도 '당나라'를 소재로 한 것이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정치에는 무능하고 그저 놀기만 좋아했던 당나라 황제' 중에서도 으뜸가는 의종을 선택한 것도 신선(?)하기 그지 없었다. 흔히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다면 태종 이세민, 헌종과 양귀비, 그리고 측천무후를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상을 반영하여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는 딱이었을 것이다. 거기다 추리소설이라면 '기이한 살인사건'이 꼭 있어야 했을 테니 폭군보다는 '무능한 임금'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배경선택이었다. 또한 무능한 임금과 상반된 느낌의 뛰어난 인재였는데도 '황제'가 되지 못한 비운의 인물 '기왕 이서백'의 등장은 뭘 좀 아는 독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비운의 주인공이 <로맨스 소설>속 주인공으로 재해석되어 등장하였단 것으로도 독자들에게 환호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구르미 그린 달빛>처럼 말이다.

 

  그렇다. 나는 이 소설에서 '조선의 마지막 희망'으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환영받았던 비운의 왕세자 이영,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구르미 그린 달빛> 말이다. 이 소설이 '로맨틱코미디'를 사극버전으로 풀어낸 역작이었기에 <잠중록>도 그런 느낌으로 읽기 시작했었다. 물론 드라마에서와는 달리 원작소설에서는 <사극로맨스 소설>의 분위기에 더욱 충실했지만 '구중궁궐에 잠입한 여자내시'라는 설정 자체가 코믹, 그 잡채였다. 그래서 <잠중록>도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려 도망친 여주인공이 '기왕의 소환관'으로 잠입하는 것까지는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의문의 일가족 살인사건을 풀기도 전에 '기이한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여주인공은 어느새 '수사관'이 되어 '시체검안'을 하는 검시관과 짝을 이뤄 추리수사극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장르의 전환은 이 소설이 처음이었기에 매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런 살인사건을 풀어내고 또 풀어내는 과정을 거쳐 드디어 '대당의 멸망'에 감춰진 비밀이 하나씩 풀려나가고 두 남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대단원에 이르고보니, 이 소설만이 가진 '색다른 맛'이 무엇인지 겨우 감을 잡게 되었다. 하긴 <보보경심> 때에도 '타임슬립'을 한 역사천재 여주인공이 '역사속 인물'과 조우하며 벌이는 암투와 사랑을 보며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는데, 이 소설도 그에 못지 않았던 셈이다. 뭐, 이것이 '대륙의 스케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결정은 내리지 못하겠다. 이제 <외전>이 나왔으니, 그 책까지 섭렵한 뒤에 뭐라도 결정을 내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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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2 - 위기의 신들 한빛비즈 교양툰 29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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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리뷰에 이어...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어떻게 알려졌나? 가장 흔하게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전해줌으로써 제우스의 노여움을 '인간을 대신해서' 한 몸에 받게 된 것을 부각시킨 까닭에 압제자의 독단에 굴하지 않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처한 현대사의 아픔을 정곡으로 관통한 '메시지(해석)'인 까닭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어 널리 회자되었고, 프로메테우스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인간의 편'에 선 '정의로운 신'으로 우리 가슴속에 새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2권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러한 상징과 해석에 대해서 '반전에 반전'을 더하고 있다. 이를 테면, 신의 형상을 본따 인간을 창조한 신이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원래는 '제우스'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위해 불을 가져다준 것도 무한한 '인간사랑' 때문이 아니라 불멸의 존재로서 무료한 세월을 보내기보다 '제우스가 만든 올림푸스 12신 체제'가 만든 안정을 송두리채 뒤흔들 파란을 일으키기 위해 '필멸의 존재'를 만들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재미난(?) 세상을 관람(!)하기 위해 심심풀이 땅콩 삼아 창조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해석하였을 때, '논리적 근거'가 타당한 것이냐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힘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면 '신화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정답'을 정해놓고 나면 '신화'는 더는 연구할 가치를 잃게 된다. 모든 학문에 해당되는 당연한 진리이고 말이다. 그러니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흥미롭고 반가운 책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또한 그런 흥미로움이 '교양툰'에 녹아들어 누구나 쉽게 즐기고 교양을 쑥쑥 쌓아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유익할 따름이고 말이다. 암튼, 색다른 해석을 즐길 준비가 되었으면 따라오길 바란다.

 

  사실, 이 책의 1권에서는 '프로메테우스'보다 '가이아의 복수'라는 관점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이었다. 기존의 '신화책'들이 죄다 '남성중심적인 해석'을 늘어놓았던터라 '여성중심적인 해석'에 대한 매력이 더욱 돋보였었다. 그렇게 '가이아의 복수'는 티타노마키아를 일으키며 '1차 신들의 전쟁'의 막을 올렸고, 그 다음에는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하며 '2차 신들의 전쟁'과 뒤이어 단번에 제우스를 파멸케 한 튀폰이 등장하는 '3차 신들의 전쟁'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런데 그러한 '가이아의 복수'가 이어지는 와중에 '프로메테우스의 장난기(?)'를 첨가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의 줄거리'에 엄청나게 공들인 '각색의 맛'을 더한 셈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원곡'도 좋지만 '편곡'을 해서 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있듯이, '기존의 신화 줄거리'에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서 신화가 지닌 이야기의 맛을 더욱 풍미롭게 한 셈이다.

 

  다시 말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 하였던 일이고, 인간을 창조하는데 깊이 관여한 신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제우스' 였단 말이다. 이것이 무슨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까? 애초에 제우스는 우라노스, 크로노스에 이어 '올림푸스 12신 체제'를 완성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그렇게 만든 '신들의 세상'은 완벽 그 자체였으며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완성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안정시켜 나가는 것도 좋았겠지만, 제우스는 자신들을 숭배하며 두려워할 '존재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로 하여금 그러한 '필멸의 존재'를 창조하라고 명령하였고, 에피메테우스로 하여금 '그 존재'를 위해 알맞은 능력을 부여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유쾌함은 이처럼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데서 찾아볼 수도 있다.

 

  암튼, '미리 생각하는 신'은 무슨 일이든 행하기에 앞서 꼼꼼히 생각을 먼저 하며 실수가 없도록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는 신'은 생각하기에 앞서 행동을 먼저 하니 종종 의도치 않은 실수를 범하곤 한다. 그러고나서 '반성'이나 '후회'라도 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련만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다보니 그런 것을 해본 적도 없다. 하긴, '신'이라는 존재가 반성이나 후회를 하는 종자가 아니기도 하다. 그저 '저지르기'만 할 뿐인 존재가 바로 '신의 속성'이라는 점에서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덕분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별다른 신체적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추위나 맹수의 위협 앞에 벌벌 떠는 '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익숙한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 때문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신의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전해줌으로써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재능, 다시 말해 '문명'을 일으켜세우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까지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기까지도 '제우스의 속셈'이었다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의 편을 들고 신들에게 '반역'을 저질러야 제우스가 자신들의 적이었던 '티탄족'이 까불고 기고만장한 일이 없기 때문이었단다. 다시 말해, 프로메테우스가 1차 신들의 전쟁에서 제우스의 편을 들어 승리할 수 있는 '공신'이었지만, 올림푸스 체제가 완성된 이후에는 그닥 필요하지 않았기에 '숙청 대상'으로 삼았다는 해석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렇게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하며 기고만장해진 인간들과 함께 프로메테우스를 제거할 수 있는 안배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프로메테우스가 '저항의 아이콘'의 상징으로 해석된 것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세계 곳곳에서 '독재자의 그늘'에서 시름하는 민중들이 많았기에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저항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를 대신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제우스의 신화'가 필요했던 것일까? 바람둥이의 상징인 제우스가 하필 '인간창조'와 '인간사랑'을 도맡아서 한 주역이라는 해석은 과연 무슨 의도이냔 말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으며 제우스를 오해하고 있었다. 바람둥이, 난봉꾼의 신으로만 싸잡아서 비난만 하기에 '제우스의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났고, '제우스의 통치력'은 모든 세상을 안정시키는데 탁월함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우스의 바람기(?)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라노스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로노스는 제 자식을 낳자마자 삼켜버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 저주라는 것이 "너도 똑같은 방법으로 권좌에서 쫓겨날 것이다"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해하고 그 자리에 올라선 크라노스와 제우스도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제우스는 자신이 완성한 세상에 혼돈(전쟁)이 찾아오면 '불멸의 존재'로는 승리할 수 없고, 오직 '필멸의 존재'의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신탁을 받았던 터라 신나게 자식농사(?)를 짓는데 열을 올릴 수 있는 핑계가 성립하는 셈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리스문화(헬레니즘)가 전세계에 퍼져나가면서 여러 민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나 선조를 '제우스'에서 따오는 바람에 제우스의 의도와 상관없이 '난봉꾼의 신'이 될 수밖에 없었단다. 왜냐면 '신화'라는 것이 신들이 직접 적어 전승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손을 보면서 전승해온 덕분에 자기 민족의 위대함과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최고신인 제우스는 수없이 많은 나라의 여왕과 왕비, 공주, 그리고 예쁜 처녀들을 납치하고 강간했다는 전설을 퍼뜨리게 되었다고 한다. 제우스의 정실부인이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그럴듯한 변명'이었겠지만, 헤라라는 여신이 두눈을 부릅뜨고 '정실부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감히 '정식 혼인절차'를 밟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매우 부적절한 방법이지만 제우스를 '난봉꾼'에 '성폭행범'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그럴듯했다는 논리다.

 

  어쨌든 간에, 그런 최고신이 '인간창조'와 '인간사랑'의 아이콘으로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건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본색'을 까발렸더니 그다지 '좋은 신'이랄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변절', '배신'을 한 셈이다. 같은 티탄족의 편을 들지 않고 상대편인 제우스의 편을 들어 자신의 종족을 '배신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배신자가 '한 번만' 배신한다는 상식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는 '제우스의 분노'에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보다 자신의 후손인 '데우칼리온'만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프로메테우스는 그토록 사랑했다는 인간들을 '제우스의 분노'로부터 막아주거나 대신 받거나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인간멸종'을 선택하고, 선택받은 단 한 사람 '데우칼리온'이라는 자신의 후손(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한)만으로 살려내 '새로운 인간'을 다시 번성하게 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피할 수 없는 천벌에서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었던 것일까? 인류의 절멸이란 선택이 말이다. 이게 과연 '인간창조', '인간사랑'의 아이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일까? 압제자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저항의 아이콘'은 어쩌고 말이다.

 

  이쯤해서 '프로메테우스'는 결코 '저항의 아이콘'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의 수호신'으로 믿었는데 제대로 발등이 찍혀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기' 딱 좋은 시기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과연 대한민국를 제대로 살려낼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란 말인가? 부유한 상류층부터 가난한 서민들까지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리더는 과연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한단 말인가? 해묵은 이념갈등과 지역대립, 세대갈등, 남녀갈등 등을 눈녹듯 사라지게 만들 카리스마 넘치는 인재는 누구란 말인가? 아마도 이 책에서 말하는 '해석의 의미'는 배신을 일삼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최고의 권능을 가진 '제우스'에게서 찾아야 옳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대단히 뛰어난 '능력자'를 리더로 바라고 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세계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을 흔들림없이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최고신 '제우스의 권능'을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끄는 가장 훌륭한 리더는 바로 대한민국 시민들 '모두가 가진 역량'일 것이다. 낡은 이념에 흔들리지 않고, 수많은 갈등의 본질도 '모두의 이익(공공의 이익)'을 위해 공평과 형평의 잣대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 때론 대한민국 '모두'를 위해 자신의 불이익 따위를 셈하지 않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시민들이 모두 훌륭한 리더의 역할을 발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믿음이 어마무시한 튀폰 앞에서도 두려움으로 온몸을 적시면서도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서는 '최고신'을 닮은 대한민국 시민리더를 양성할 것이다. 이젠 '프로메테우스'의 뒤에 서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절은 지났다. 거대한 불의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공포가 엄습할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감한 시민리더들이 절실한 시절에 꼭맞는 해석이 아닌가 싶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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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BEER천가 - 본격 맥주 교양 원샷툰 한빛비즈 교양툰 27
몰트다운 지음, 블리자두 그림 / 한빛비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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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을 끊었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술을 끊은 까닭도 있지만, 나와 감히 '술대작'을 할 깜냥 있는 술친구가 없기에 덩달아 술을 끊은게 결정적 이유였다. 그렇게 나는 술을 멀리하면서 자연스레 술친구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저 마시기 위해 모였고 취할 때까지 그저 마실 줄밖에 모르던 시끄럽고 변변치 못한 술친구들이었기에 술을 끊은 것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2018년에 마지막 캔맥주('카스'...난 이 맥주만이 좋았다)을 따면서 촛불을 안주 삼았고, 변변찮은 술친구들과도 안녕을 고했다.

 

  그렇게 5년이 흘러 지금 가장 땡기는 술은 바로 맥주다. 시원한 생맥주와 얼큰한 해물탕을 안주 삼아 마시는 것이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합이 별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드셔보시면 자꾸 땡기게 되실 거다. 그런데 이렇게 '환상의 조합'도 진한 느낌의 흑맥주나 걸죽한 에일과 곁들이면 그 맛이 별로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없이 꿀조합으로 마시기만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사실 우리 나라의 생맥주는 맛도, 향도 '밍밍(드라이)한 라거 스타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얼음처럼 차갑기만한 '시원한 맛'과 얼큰하다 못해 '앗! 뜨겁고 매운 맛'의 해물탕이 조합을 이뤘으니, 흔히 말하는 '단짠단짠의 효과'를 그대로 적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예상했겠지만 이 책은 <맥주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맥주에 관한 정보로 가득한 교양툰이다. 그래서 읽기만 해도 '세계맥주'를 맛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고, 이 책을 탐독하고 나면 웬만한 맥주 전문가보다 더 그럴 듯한 전문지식을 뽐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무릇 '주류 전문가'는 어딜 가든 환영받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와인'이 그렇지 않느냔 말이다. 고급 식당에서 음식주문은 대충시키더라도 와인 하나만이라도 '탁월한 선택'을 한다면 결코 푸대접 받지 않게 되니 말이다. 이젠 맥주도 '소물리에' 같은 지식을 갖춰야 장소와 격식에 꼭맞는 맥주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맥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백과사전'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맥주의 역사>를 엿볼 수 있어서 독서의 즐거움을 높일 수 있다. 독일의 '맥주 순수령'이 맥주, '본연의 맛'을 지키는데 유용하게 작용했다면, 옆나라 벨기에에서는 '순수령'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맥주에 별에 별 첨가물을 쏟아부어 '맥주의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보였다. 물론, 둘 다 '맛있는 맥주'만 살아남이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고 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흑맥주'가 고급화 전략으로 인해 고급맥주로 유명하지만, 애초에는 몰트(맥아)로스팅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흑맥주'는 대충 만들어져서 저렴하게 팔려 '서민(짐꾼) 맥주'로 통했단다. 당연히 부유한 이들은 '맑은 맥주'를 즐겨 마셨고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맛과 향을 즐기면서 자신에게 딱맞는 맥주를 골라마시면 되겠지만 말이다. 거기에다 극심한 온도차를 이겨내며 긴 항해를 거친 뒤에도 즐길 수 있는 '인도 맥주(IPA)의 탄생 일화'나 미국의 금주법이란 기이한 시대에 탄생한 '무알콜 맥주' 따위의 비하인드 스토리만 골라 읽어도 맥주를 즐기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무엇보다 '과학적이고 위생적인 방식'으로 연구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다양한 맥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술꾼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이제는 '수입맥주'를 즐기는 것을 넘어 우리 나라에서 직접 빗은 '로컬(수제) 맥주'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라거나 에일이라도 '지역의 정서(맥주의 주재료인 물, 몰트, 홉, 기타등등)'와 '장인의 노력', 그리고 '술꾼의 기호'라는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져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맥주에 따라 '병'이나 '캔', 그 자체로 마셔야 제맛인 경우도 있고, 꼭 '전용잔'에 부어마셔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고도 하며, 그러기 위해서 '수십 개'가 넘는 전용잔을 구비해야 맥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정말 까다롭기 그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게 된 셈이고,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 발품을 파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제맛의 맥주'를 즐길 수 없다고 하니 머리가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런 '복잡한 공식(?)'이나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퇴근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즐기는 여유를 갖길 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맥주 한 잔을 제대로 마시는 것도 좋지만, 아무런 부담없이 노곤해진 몸에 싱그러운 기력을 충전시켜줄 '맥주 한 잔'을 고대하고 있다. 그때 너무 많아진 맥주 종류로 고민스럽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다. 하나는 '일일이' 다 마셔보면서 나에게 딱맞는 맥주를 선별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 책 , <용BEER천가>를 읽고서 맥주전문가 못지 않은 전문지식을 사용해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방식을 선택한다면 '유용한 맥주상식'은 덤으로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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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1 - 올림포스 연대기 한빛비즈 교양툰 28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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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수없이 많은 <그리스로마신화> 가운데 무엇을 골라 읽을 것인지 고민인가? 그렇다면 아주 훌륭한 고민에 빠졌다고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왜냐면 <그리스로마신화> 만큼 수없이 많은 '변주'를 거친 책도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르기 힘든 일이고, 그걸 고민할 정도의 독자라면 이미 상당 수준의 '독서가'임을 인증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면 <그리스로마신화>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그 수많은 원전들을 섭렵해야 겨우 제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지적 숙련을 거듭하고나서야 겨우 '이책은 이런 맛, 저책은 저런 맛이 난다'고 맛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 김재훈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가 대단히 훌륭한 원전해석을 선보인 '수준급, 신화인문서'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 사실 이 책에 대한 리뷰는 벌써 '두 번째'인데, 같은 책으로 열 번이라도 더 리뷰를 써낼 수 있을 정도로 '대서사극'을 감상한 뒤의 여운이 찐~하게 밀려들고 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번 리뷰에서는 '제우스 중심'이 아닌 '또 다른 신'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한다. 어차피 새로 출간한 2권에서도 '같은 인물(신)'에 포커스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 신은 바로 '프로메테우스(미리 생각하는자)'다.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1권의 내용은 신들의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를 거쳐 올림포스 12신이 정립하는 일대기를 보여주었고, 2권에서는 또 다른 신들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를 치룬 뒤 제우스가 신들 중의 제왕임을 확인해주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쟁에서 '제우스'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니라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고, 제우스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왜 제우스의 편을 들었을까? 라는 의문이 저절로 들기 마련이다. 이제부터 1권의 내용에 집중해보련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두 차례의 '신들의 전쟁'을 선보인다. '북유럽신화'에서도 라그라로크라는 모든 신들이 참전하는 최후의 결전을 치루며 신들의 세상이 저물어가고 인간들의 세상이 펼쳐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지만, '그리스로마신화'에서도 '신들의 전쟁'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이후에 인간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 이렇게나 비슷한 양상으로 신화가 전개된 까닭은 다름 아니라 '신화'를 만든 이가 바로 '인간'인 탓이다. 아무리 전능한 신들이 세상을 창조하고 불사의 몸을 갖고 만물 위에 군림하더라도 끝내는 '신들의 전성시대'가 저물고 필멸의 몸을 가진 부족한 이들, 즉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은 '북유럽신화'에서는 거의 모든 신들이 전멸한 뒤에 인간세상이 펼쳐지지만,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제우스가 최고신임을 재확인한 뒤에 서서히 잊혀져 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들 중심의 신화가 영웅 중심 서사로 바뀌었다가 끝내는 인간 중심의 스토리 라인을 펼쳐낸다는 말이다. 물론, 그 인간들이 '제우스'를 비롯해서 여러 신과 영웅들의 후손임을 밝히는 '족보전쟁'의 양상을 띠지만 말이다. 그런 까닭에 '신화'는 '역사'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신화는 허구맹랑한 상상의 소산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역사의 빈틈'을 메워주는 소중한 사료로 다뤄져야 한다. 마치 우리가 '단군할아버지'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는 말그대로 '티탄(타이탄)과 벌인 전쟁'이다. 그렇다면 '티탄'은 누구인가?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태초에는 카오스(혼돈)이 있었고, 그 무질서한 곳에서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가이아'가 탄생하였다. 가이아는 자신이 낳은 우라노스(하늘신)를 지아비로 삼아 12명의 신을 낳았는데, 바로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낳은 신들이 바로 '티탄족'이었다. 그런데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가이아가 티탄족만 낳은 것이 아니라 괴물들도 여럿 낳았기 때문이다. 우라노스는 괴기망측한 그 괴물들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가이아의 자궁속(타르타로스, 깊은 땅속)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막되먹은 처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 괴물들은 바로 외눈박이 키클롭스 삼형제와 머리 50개, 팔 100개인 괴력의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다. 이렇게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땅속 깊이 유배된 처사에 불만을 들어내고 우라노스를 물리칠 방도를 떠올렸던 것이다.

 

  이때의 주역이 바로 '티탄족의 우두머리(사실은 막내)' 크로노스다. 가이아의 흉계에 빠진 우라노스가 방심한 틈(!)을 타고 크로노스가 가장 단단한 금속, 아다마스로 벼린 거대한 낫을 들고 제 아버지의 거시기를 싹뚝 잘라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거사에 성공한 가이아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크로노스가 어머니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거사는 성공하였고 크로노스는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신들의 세상에도 '질서'는 있는 법이어서 가이아는 울분을 삼키고 또 다른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왕의 자리에 오른 크로노스도 마음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거시기가 잘리면서 저주를 남겼기 때문이다. "크로노스, 너도 네 자식에게 똑같이 당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크로노스는 자신의 누이이자 아내인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낳는 족족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다섯 명의 자식을 제 아빠가 삼켜버리는 광경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레아는 여섯 번째 아이(제우스)만큼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를 기회로 삼아 가이아는 크로노스를 몰아낼 궁리를 하면서 자신의 손자이기도 한 제우스를 지지하는 편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 제우스는 쑥쑥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우라노스의 저주를 실현시키며 크로노스에게서 왕좌를 탈환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크로노스를 한 방에 처리하지 못했기에 기력을 회복한 크로노스는 자신의 형제인 '티탄족'을 이끌고 제우스의 형제들과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신들의 전쟁 '티타노마키아'다. 우리의 또 다른 주인공인 '프로메테우스'가 티탄족인데도 제우스의 편을 들어 제우스가 승리할 수 있게 한 숨은 공신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자신의 형제를 배신하고 제우스의 편을 든 까닭이 무엇이었냐는 점이다.

 

  수많은 신화학자들은 '프로메테우스(미리 생각하는 자)'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10년이나 이어졌던 '티타노마키아'에서 제우스가 끝내 승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미리' 알고 있었던 탓이라고 해석한다. 과연 그뿐이었을까? 이 책에서는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훗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의 창조주'로 활약하는 장면과 연관지으면서 신들의 세계를 '티탄'이 지배하는 것보다 '티탄의 자식들'이 지배하는 것이 더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썰을 풀어놓았다. 더 재미난 일 말이다. 사실 이 말이 좀 무시무시한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재미'를 말할 때, 질서정연한 곳에서 느끼기보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인 무질서한 곳에서 더 찐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재미없고 지루한 천국보다 하루하루가 짜릿하고 화끈한 지옥이 더 낫다는 말에 열광하는 이들이 더 많겠냔 말이다. 이런 짜릿한 미래를 예견한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동족을 배반하고 말았다.

 

  물론, 배반의 대가는 치욕, 그 잡채였다. 이건 2권에서 다시 이야기하련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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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6 : 젊은 예술가의 초상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6
박성문 글, 이철희 그림, 손영운 기획, 제임스 조이스 원작 / 채우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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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자전적인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한 대목에서 '좋은 작품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은 작품은 인간의 감정을 사로잡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라는 표현을 빌리는데, 무언가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의 감정이 생긴다면 좋은 작품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저 밋밋한 좋지 못한 작품이라고 한 구분하였다. 여기에 한 눈에 사로잡을 만한 '형식'까지 갖춘 작품이라면 미인을 바라볼 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일까? 어디에 살까? 남자 친구는 있을까? 무엇을 좋아할까? 말을 한 번 걸어볼까? 하고 꼬리에 꼬리는 물며 궁금해하는 것이 생기는데, 바로 이런 감정이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런 궁금증이나 관심이 '광휘'를 만든다고 했고, 조이스는 다시, 광휘를 '무언가에 사로잡히고, 더 깊이 몰두하여 진실된 모습을 깨닫는 것'이라고 풀었다.

 

  그렇다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좋은 소설'일까? 많은 이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기존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현대소설(모더니즘)의 기틀을 닦았다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설이 '행위 중심'으로 서술한데 반해, 조이스는 '의식 중심(떠오르는 이미지)'으로 이야기를 서술함으로써 소설속에 '초현실주의'를 실현시키는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평가하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독자들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필요한데,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무작정 '좋은 소설'이라는 평만 믿고서 소설속으로 뛰어들다보면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에라도 어질어질 멍한 채 이리저리 헤매기만하다가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리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허나, 작품속에 담긴 '배경지식'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책'이 왜 그토록 극찬을 받는 소설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 중심'으로도 읽어도 좋고, 영국의 식민지로 신음해야만 했던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며 '민족주의의 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도 있으며, 종교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안정적인 직장인으로써의 '종교에 대한 성찰' 등등 하나의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독자가 지니고 있는 '배경지식'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다양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펼쳐내는 소설이야말로 훌륭한 소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서울대선정 문학고전'으로 읽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고전문학의 깊이를 체험하지 못한 예비독자들에게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길라잡이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만 달달 암기하듯 '감상'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진정 '고전문학'에 담긴 참뜻을 이해하는데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작업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은 '만화형식'이라서 '원작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대로 맛볼 수도 없으며, 그런 기법을 통해 선보여지는 '작가의 분신'인 소설속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수많은 갈등과 고민도 생생하게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원작에서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정보'만 달달 외우고 '시험대비'만을 위한 독서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법답안처럼 제시되어 있는 '작품해석'을 이해한 뒤에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길 바란다. 이 책은 그런 '재해석'을 위한 첫 디딤돌로 활용해야 더욱 바람직하며,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토록 두서없이 서론이 장황한 까닭은 나 역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으며 엄청 헤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의식의 흐름기법'이지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기도 전에 확확 바뀌는 장면연출과 부족한 배경지식으로 인해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기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는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썰을 풀어보아야겠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예술가의 자전적인 소설인 까닭에 작품속의 인물과 배경이 마냥 '허구성'을 띤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진심 가운데 나는, 작가의 고국이 '아일랜드'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강대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하는 민족주의자가 있는 반면에, 어둡고 아픈 현실 앞에 '삶의 당위성'을 빌미로 내세우며 그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삶의 길을 찾아나서는 현실주의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나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상가(?)'들이 모두 아일랜드인이라는 점이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의 눈에는 조국의 어두운 앞날이 예견되는데도 비굴하게 압제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포를 배신하면서도 오직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반면에 현실주의자들의 눈에는 거대한 바위에 달걀던지기 꼴로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마저 헛되게 낭비(?)하며 불가능에 가까운 '조국의 독립'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부추기는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현실을 제임스 조이스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이스는 소설속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반민족적인 행태'를 일삼는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아니, 어린시절에도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 당당히 '옳음'을 밝히고 한 점 부끄럼없이 떳떳한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겼던 자신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런 올곧은 성품이었기에 '성직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고민하던 시절에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사창가를 들락거렸던 자신에게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은 자신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가정의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청년시절'이 되자 생계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야 하는가? '자신의 꿈(자아)'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술가의 혼을 갈고 닦아야 하는가?로 고민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민족적인 고뇌'를 내려놓지 않았다. 당시의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출세와 안녕을 위해서 조국을 배신하고 '영국의 입맛'에 딱맞는 설교를 늘어놓는 비겁한 모습과 예술이란 이름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수준 낮은 창작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베끼면(도둑질)서도 부와 명예를 적당히 건져올려 배를 채우면서도 부끄러울 줄 모르는 몰염치함도 서슴없이 비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작중화자인 '스티븐 디덜러스'는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리스의 뛰어난 장인 '다이달로스'처럼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화려한 비행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을 보여준다. 어려움에 빠진 '조국'과 '가정'의 비참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도 '예술가의 혼'을 불태울 열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는데도, 현실은 중국에 이어 미국을 '종주국'으로 삼고, 강대국(?) 일본의 식민지인처럼 '강자의 입맛대로' 시키는 일에만 충실히 따르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말이다. 이런 멍충이들은 미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일본이 '아직'도 강대국이라는 꿈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미국의 간섭 없이도 잘살 수 있고 일본 따위는 한 수 아래로 보아도 될 정도로 후진국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어찌하여 외면하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할 지경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멍충이들이 대한민국에 절반 가까이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절반이나 되는 멍충이들을 깨우쳐주는 일이 아니다. 이미 깨어있는 나머지 절반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멍충이들이 활개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멍충이들을 깨우치게 하는 일보다는 분명 쉬운 일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무어냐고? 그 첫 번째는 무엇보다, '돈, 많은 놈'이 부럽다면 그놈들이 '사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돈, 많은 놈'은 그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돈, 많은 놈'을 '돈도 많은 분'으로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 문화 등등 총체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부익부빈익빈이 만연하고, 계층사다리가 사라져버려서 '없는 사람'은 출세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그럼 당당히 요구해라! 대한민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해야 할 일'이다. 정치인들이 후진적으로 썪어서 서민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런 놈들을 '찍어준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정치는 '선거'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하는 것이다. 당당히 요구해라!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돈도 많은 분'만이 이 땅에 충만해질 때까지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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