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3 - 전국 칠웅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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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3 : 전국칠웅>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0)

[My Review MMXCVI / 휴머니스트 45번째 리뷰] 역사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수많은 이들이 묻는 질문이고, 그에 대한 해답도 제각각이지만, 꼭 하나로 귀결되는 의견은 있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쓰는 것이기에 완벽하게 주관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뒤이어 나오는 반박이다. 그래서 역사책은 될 수 있으면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게 쓰이지만,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역사관'을 고려하면서 되도록 객관적으로 읽으려 수고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역사책이 다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 사마천이 쓴 <사기>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고대에 쓰여진 역사책은 대부분 '국가기관'의 주도로 쓰여지기 마련인데, 사마천은 '국가기관'에서 쫓겨난(?) 처지에 있을 때 '개인적인 명예회복(?)'을 위해서 <사기>를 편찬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역사책과 비교해봤을 때에도 사마천의 개인적인 주관이 상당히 많이 서술되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비교분석을 하기 위해선 '동시대의 역사서술'을 여러 책을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요즘에는 웬만한 책의 주석에 그러한 비교분석이 수록되어 있는 책들이 많이 있기에 덜 수고스럽게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챌 수 있다. 다만, 주의할 점은 그런 '주석'조차 각각의 역사책을 읽고 분석한 저자들의 '주관'이 담겨 있을 수 있으니, 책에 쓰여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그러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기>를 읽어야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으로 쓰여진 역사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수없이 읽고 검토하고, 비판하면서 얻을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의견을 살짝 어필해본다면, 같은 <사기>라도 적어도 3명의 다른 저자가 풀어쓴 역사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까닭은 공자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三人行이면 必有我師라'고 말이다. 이는 세 사람이 있다면, 그 가운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보다 못난 사람도 있을 것인데, 잘난 사람에게는 좋은 점을 본받고, 못난 사람에게는 나쁜 점을 경계한다면,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책에 적용하면, 첫 번째로 읽은 책은 '기준점'이 될 것이고, 나머지 책들은 그 기준점으로 인해 '상중하'로 평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훗날 자기만의 잣대가 될 지혜로 삼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최적의 독서법은 아닐 것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데, 언제 그 정보의 옥석을 일일이 가리며 살아가느냔 말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실제로 그럴 시간도 없다는데, 딱히 반박한 답은 없다. 매우 옳은 지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학문을 하면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오픈AI 시대를 넘어 '자율형 인공지능(AGI) 시대'가 곧 도래한다고 하는데,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에게 맡겨버리고 말 것이냔 말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똑똑해지더라도 '최종 판단'은 인간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더욱더 정교하고 완벽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사회가 될수록 더 많은 옥석을 가릴 수 있는 혜안을 가지도록 요구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기왕 학업을 한다면 진심을 담아서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난 번에 '대만작가 장자화'가 집필한 <사기>를 읽었으니, 이번엔 '한국작가 이희재'가 쓴 <사기>를 살펴보려 한다. 두 책 모두 '청소년'을 독자로 상정하고 출간한 책이니 비교하기에도 딱 좋을 것이다. 먼저 대략적인 총평을 한다면, 사마천의 <사기>를 '이해'하기 쉬운 기준으로 책을 고른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무릇 역사책을 읽은 뒤에 감흥을 논하기에 앞서서 '내용이해'가 절대적으로 중요할텐데, 고대 역사의 내용을 읽고 난 뒤에 '무슨 뜻'으로 쓰인 것인지 이해조차 난해하기 십상인데 반해,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전7권)는 만화형식으로 쓰여져 있고, 주요 줄거리에서 바로 '주제'를 뽑아내어서 이해하기에 아주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챕터마다 맨 마지막에 '사마천의 평가'에 관한 내용이 짤막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대략적인 '편찬의도'가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서 <사기>에 담긴 교훈과 더불어 사마천의 집필의도까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장자화의 사기>(전5권)는 중국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기>에 대한 감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고, '3분 키워드' 같은 토막내용을 통해서 '잘못 수록' 되거나 '잘못된 상식' 등의 오류를 바로 잡아주고 있기 때문에 사마천의 <사기>뿐 아니라 다른 역사책도 함께 읽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단지 아쉬운 점은 '대만작가'인 까닭에 중국청소년의 상식선만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때때로 '낯설게만' 느껴지는 대목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뜬금 없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런 '낯섦' 또한 다수의 정보가 쌓이면 깨알 정보가 되어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만, 이제 막 독서를 시작하는 청소년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런 군더더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 작가의 책을 읽을 땐 이런 점을 고려하며 읽으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자, 서론이 길었다.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3>의 내용이다. 중국의 고대사는 '하, 은, 주'로 시작해서 주 나라를 중심으로 한 봉건체제가 쭉 이어지면서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가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로 통일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 이전에 삼황오제 시절부터 거론하고 있지만, 그조차 그냥 '하은주'로 퉁쳐도 무방하다. 암튼 대략적으로 기원전 11세기에 주나라가 건국되고, 도읍을 호경에서 낙양으로 옮긴 때부터 '동주시대'라 불리며, 이때를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기원전 770년 경이다. 이때는 수많은 제후국이 등장하는데, 그 중심에는 주나라 천자를 으뜸으로 모시긴 하지만, 일종의 허수아비 왕으로 여길 뿐이었고, 실질적인 권한은 '패자'라고 하는 강성한 제후가 실질적 권한 행세를 하던 시절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 뒤를 잇는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인데, 실질적으로 주나라도 사라지고, 전국칠웅이라는 일곱나라의 왕이 서로 패권다툼을 본격적으로 하던 시대라고 이해하면 좋다. 전국칠웅에는 '연, 제, 조, 위, 한, 초, 그리고 진' 있다. 이 시절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3권에는 크게 '병가', '법가', '종횡가'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병가로는 '무패의 전략가, 오기'와 '다리를 잃은 지략가, 손빈'을 다루고 있다. 오기와 손빈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는 패배할 줄 모르는 무서운 지략과 싸웠다 하면 승리를 꿰차는 용맹함까지 갖추고 있는 무장이었지만, 오기는 출세하기 위해서 부모도 모른 척하는 불효를 저질렀고, 심지어 헌신하는 아내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냉혈한'이었다. 그런 그가 전쟁에 나가서는 장군의 몸으로 졸병과 한데잠을 자고, 거친 식사를 하며, 병든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 병졸들의 신임을 한몸에 사서 오기 장군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강병을 조련하는데 능수능란한 재능을 선보인 인물이다. 한편, 손빈은 동문수학을 했던 친구 방연에게 속임을 당해 '두 무릎'을 도려내는 욕을 당하고, 불구의 몸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돼지똥까지 먹으며 미치광이 짓을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뒤에는 방연을 향한 처절한 복수를 해내는 처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인가? 완벽한 승리를 위한 완전한 계책을 엿보며 '전략적인 지혜'를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완전무결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하여 '자신의 신변'을 소중히 하는 데에는 써먹지 못하고, 최소한의 인간관계조차 어그러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병가의 사상이 승패에는 크게 효용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별다른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법가 사상가로 '상앙'을 선보였다. 법치주의를 내세워서 진 나라를 짧은 기간에 다른 제후국보다 월등히 앞선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런 상앙이 '자신이 만든 법' 때문에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다는 결말을 마주하면서 법치주의라는 것이 '실용'을 앞세우다보니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대원칙을 고수하다보면, 피치 못하게 '적'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의 죄까지 공정하게 형벌을 내려서 법의 엄중함을 내세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상앙을 어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조량이란 인물은 상앙에게 조언하길, 덕을 행하고 힘을 멀리하라는 옛말을 들먹이며 상앙의 처지가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다고 귀띔해주지만, 상앙은 이조차 무시하고 '법치주의'만 고집하다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법의 엄정함을 누가 탓하겠는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대원칙이 지켜지길 바라마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법이 '공정함'을 잃고, 더 나아가 '도덕'과 '인륜'마저 저버리는 상황을 만든다면 차라리 지켜지지 않는 것만 못한 경우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법을 악용해서 '소수'가 다수를 군림하는 악법을 자행하게 된다면, 그 나라는 필멸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론 '종횡가'의 최후를 아주 잘 보여주었다. 바로 '합종연횡'의 대가로 잘 알려진 소진과 장의다. 사실 '종횡가'라는 이름도 소진이 주장한 '합종'과 장의가 펼친 '연횡'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든 이름이다. 이처럼 종횡무진하며 입을 놀려서 권세를 한 몸에 다 가지게 된 부류를 통틀어서 모두 '종횡가'라고 명명한다. 이들을 흔히 '유세객'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털털이 주제에 각국을 떠돌며 그럴 듯한 '입'만 놀려서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일례로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에 오르기 이전에 오랜 유학생활(귀곡자에게 수학했다고 함)을 한 뒤에 무일푼으로 고향에 돌아오니 부모도 실망하고, 형수는 백수라며 놀렸다고 한다. 그 덕분에 온 동네사람들이 소진이 가족친지에게까지 개무시를 당한다며 놀려대곤 했단다. 장의도 귀곡자에게 수학을 한 뒤에 고향에 돌아와 똑똑함을 자랑하다가 한 재상의 잔치에 참가했다가 도둑으로 몰려 죽기 직전까지 몰매를 맞았다고 한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뒤에 집에 도착해서 부인에게 '혀'가 온전한지 묻고서 '혀만 말짱하다'는 대답을 듣고서는 '좋다'를 연발했다고 한다. 소진과 장의는 이런 무시를 절치부심 삼아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는데 반석으로 삼았으니, 종횡가의 수완이 정말 좋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수완이 좋은 것과 그들의 최후가 일치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재주가 좋다면 운수도 좋아야 할 것을, 종횡가들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그랬을까?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의 신분이 비천한데서 원인을 찾곤 한다. 낮은 신분이었다가 졸지에 '벼락 출세'를 하니 기고만장하고, 그로 인해 주위에 적을 많이 만들어서 권력의 자리에서 내몰리는 순간, 참극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말재주가 좋은 사람의 최후가 모두 그러하다면, '좋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행복한 여생을 살기도 한다는 점을 보면 반박하기 쉽다. 그러니 종횡가들이 끔살을 곧잘 당하는 까닭으로 '말재주' 탓만 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그 좋은 '말재주'로 벼락 출세를 했다면, 자기 주위에 '자기 편'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음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정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무릇 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말재주를 끊임없이 써먹으며 말로써 설득하길 즐기곤 한다. 그로 인해 '권력자의 이익'을 챙겨주는 공을 세운다면 권력자는 종횡가를 중히 쓰곤 하지만, 반면에 그 종횡가와 '말씨름'을 했다가 패배한 이들은 어찌 했을까? 속으로 부글부글 하면서 복수를 다짐하거나, 때로는 종횡가의 주둥이에 휘둘려서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면 국가적 망신을 당하기 때문에, 그 원한 또한 결코 작지 않다. 그렇게 크고 작은 원한들이 쌓이고 나면 결국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종횡가의 사상'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다.

다음 책에는 '난세의 인걸들'을 소개한단다. 어지러운 세상에 걸출한 인물들은 과연 누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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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문, 휴가를 즐기다 이사도라 문 시리즈 11
해리엇 먼캐스터 지음, 심연희 옮김 / 을파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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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문, 휴가를 즐기다>  해리엇 먼캐스터 / 심연희 / 을파소 (2021) [원제 : Isadora Moon Goes on Holiday]

[My Review MMXCV / 을파소 12번째 리뷰] 어린이책을 읽으며 논술수업을 준비하다 보면 늘 두 가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 마련이다. 첫째는 '재미'다. 물론 어른을 위한 수업도 재미가 없으면 수업의 효과는 반감이 되고 만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재미가 전부다'. 모든 수업은 '재미'가 없으면 시작도 할 수 없고, 아무리 좋은 수업 목표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말짱 꽝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재미난 책을 고르고 또 고르지만, 문제는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책의 주제가 어린이들에게 딱 들어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린이도 깊이 공감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바로 잡기 위한 의지를 불태울 수 있게 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둘째는 다름 아닌 '교훈'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교훈이라도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를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어린이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담긴 어린이책을 골라야 비로소 논술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책이 무엇일까? 다름 아닌, <이사도라 문, 휴가를 즐기다>다. 이 책의 재미는 벌써 11번째 시리즈라는 점만 보아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한 번도 안 읽은 어린이는 있어도, 딱 한 권만 읽은 어린이는 없다"는 책이 바로 '이사도라 문' 시리즈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이사도라의 가족 모두가 즐거운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그것도 온 가족이 공짜로 비행기를 타고 해변을 낀 호텔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름, 바닷가, 그리고 아름다운 호텔! 이 정도면 최고의 여름 휴가 아니겠는가? 나는 모솔이라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쿨럭쿨럭

자, 그럼 이렇게 완벽한 낭만이 가득한 '휴양지'에서 이사도라 문이 마주하고, 어린이들에게 심어줄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그걸 밝히기에 앞서 이사도라 문은 바닷속에서 이미 만났던 '인어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둘은 마법 소라의 도움을 받아 바닷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된 이사도라와 마음껏 수영을 즐기며 신 나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때 도움이 필요한 바다거북을 만나게 된다. 온 몸에 그물을 휘감고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가엾은 바다거북을 발견한 것이다. 이사도라와 인어 친구는 서둘러 그물을 끊어버리고 바다거북을 살려내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어떤 광경을 보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어린이들이 마주할 '교훈'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는가? 바로 바다에 함부로 버려진 어마어마한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지금도 태평양 한가운데 커다란 섬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쓰레기섬'에 관한 뉴스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정보'가 담겨 있지는 않다. 그러나 논술수업을 준비할 때는 그런 '최신뉴스'도 함께 곁들여서 배경지식으로 쌓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바다에 버리는 쓰레기 양이 얼마나 많으면 그 광활한 태평양 한가운데 '쓰레기섬'이 만들어졌겠느냔 말이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보고된 것만 해도 3개나 된다고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커지고 갯수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쓰레기섬은 왜 생겨난 것일까? 그건 인간이 쓰레기를 엄청나게 버린다는 사실로 결론 내릴 일이 아니다. 왜냐면 '썩지 않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 결과가 이런 재앙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바로 '플라스틱' 말이다.

그럼 '쓰레기섬'을 발견했으니 치우고 없애버리면 될 일 아니겠는가? 어차피 '쓰레기'로 만들어졌으니 불태워버리면 깔끔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플라스틱을 함부로 태우면 어떤 결과를 낳겠는가? 바로 '유독 가스(다이옥신)'가 대기에 그대로 방출될 것이며, 거대한 섬 크기를 불태운다면 그 유독 가스의 양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유독 가스를 아무런 조치도 없이 흡입한 '생태계의 생물들'은 아주 적은 양만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럼 불태우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수거'해서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점이 단점이다. 그리고 그 막대한 비용을 어느 나라가 치뤄야 할까? 한두 국가가 해결하기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라 감당할 수 없을테고, 전세계가 모두 합심해서 그 비용을 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전세계가 얼마씩 걷어야 할지 논의하는데만 수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쓰레기섬을 수거해서 치우려는 의지도 없어서 결국엔 토론만 하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치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썩지 않고 바다에 그대로 방치된 플라스틱 쓰레기의 운명은 결국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모든 생태계 생물의 몸속으로 돌고 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까지도 미세 플라스틱을 품고 있다고 한다. 왜냐면 엄마가 섭취한 음식에 포함된 '미세 플라스틱'이 태아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라는데, 그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면 좋겠지만, 크기가 작은 태아일수록 상대적으로 '미세 플라스틱'조차 미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정말 운이 좋아야 한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엄마가 '해양의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전할까? 안타깝지만 바닷속 플랑크톤까지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점령했고, 그 플라크톤을 섭취한 물고기를 바닷새가 먹고, 바닷새가 싼 똥이 육지를 오염시켰고, 육지에서 자란 풀에 미세 플라스틱이 함유되어 있으며, 그 풀을 뜯어 먹은 초식동물과, 그 초식동물을 잡아 먹은 육식동물에 이르기까지 미세 플라스틱이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을 정도다. 맞다. 이미 '대기중'에도 미세 플라스틱은 가득 찼다. 그래서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 '쓰레기섬'에 이미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을 정도란다. 그 섬에 쥐떼도 살고 있으며, 그 플라스틱 섬은 둥지 삼아 온갖 작은 해양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그 쓰레기섬을 주변으로 수많은 생물종들이 살아가고 있단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쓰레기섬'이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서 자연스럽게 파괴되고, 분해되어 '미세 플라스틱'이 점점 늘어나고, 그 안의 생태계를 통해서 점점 더 짙게, 점점 더 광활하게 오염되고 있단다. 이쯤 되면 벌써 재앙 수준으로까지 위험수위가 올라간 상태다. 이런 상태인데도 세계 각국은 아무런 조치도 하고 있지 않다. 지금도 어업활동을 통해서 버려지는 '해양 쓰레기'는 바닷속과 저 깊은 해저까지 차곡차곡 쌓이고 있으며, 태풍과 홍수로 인해서 육지에 방치되었던 '쓰레기'들이 한꺼번에 바다로 밀려와서 그대로 환경오염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이사도라 문, 휴가를 즐기다>에서도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고사리손 같은 어린이들이 직접 나서서 말이다. 바로 이사도라 문 가족과 인어 친구의 가족들이 힘을 합쳐서 '해변 호텔 앞'에다 바닷속 쓰레기를 건져다 쌓아 놓은 것이다. 이렇게 쌓아 놓은 엄청난 양의 쓰레기산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으면 좋을까? 우리 어린이 친구들은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른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우리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 어린이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분명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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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화의 사기 5 : 역사에 이름을 새기다 장자화의 사기 5
장자화 지음, 전수정 옮김, 사마천 원작 / 사계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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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자화의 사기 5 : 역사에 이름을 새기다>  사마천 / 장자화 / 전수정 / 사계절 (2018)

[My Review MMXCIV / 사계절 15번째 리뷰] 이 책은 사마천 이 쓴 <사기>에 실린 내용 가운데 '작가 장자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여기는 대목을 '간추려서' 옮겨 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마천이 쓴 '원작' 그대로를 옮기지 못하고, 대략적인 얼개가 어그러지지 않을 정도로 '축약본' 형태로 5권을 추려 놓았다. 그래서 어린이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원작'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으면, 짤막해진 줄거리만으로 각각의 역사적 인물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편이다. 혹여 이 책을 재밌게 읽고서 <사기>에 관심이 생겼다면 '원본'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아무래도 이 책만으로는 살짝 부족하다. 딴에는 '원전 <사기>'에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다른 역사서'를 참고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어 완성도를 높이긴 했지만, 이 책 자체가 '축약된 내용'이라 인물의 됨됨이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고, 널리 유명한 사건만 추려서 늘어놓은 탓에 '변죽'만 들끓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아쉬웠다.

암튼, 이 책의 시리즈는 5권으로 마무리했다. 그럼 총정리를 해보자. 사마천은 한 나라 때 사람으로 '역사'를 편찬했지만, 그가 쓴 <사기>는 '유가'적 느낌보다는 '법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국가기관'에 속하지 않고 '개인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기>가 쓰여진 뒤에 집필된 반고의 <한서>나 좌구명의 <좌전> 등이 모두 '유가'적 관점으로 쓰여진 것만 보아도 그렇다. '국가기관'을 대표해서 집필했거나 '한 나라의 충신 자격'으로 역사를 기술했을 때에는 '유가'를 강조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조금은 '실리적 관점'으로 서술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법가'를 강조하는 기술이 엿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 고조 유방'이 진시황이 세운 진(秦)을 멸망시키고 한(漢)을 건국했으나, 진시황이 기틀을 세운 '법가사상'을 완전히 몰아내고 '유가사상'만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웠던 탓에 국가의 큰 틀은 '유가사상'을 따랐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의 것들은 여전히 진시황이 터를 닦은 '법가사상'을 크게 고치지 않고 그래도 써왔기에 사마천도 그런 식으로 '역사'를 서술했을 거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까닭에 사마천의 <사기>는 유가적으로 숭상 받는 이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가사상에서는 욕을 들어도 좋을 인물들을 높이 평가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협객'을 칭송한 대목인데,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점이라도 봐도 좋을 것이다. 이를 테면, 사람을 죽인 살인자, 남을 다치게 한 강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 심지어 불량배나 깡패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도 '의(義)'를 행했다면 '성인(聖人)' 못지 않은 칭송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형가'다. 그는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자결을 한 사람이다. 과연 이런 사람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진시황을 폭군으로 상정하고, 폭정을 일삼는 나쁜 임금이 천심을 잃고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백정들마저 편히 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임금이라면, '암살'을 해도 괜찮다는 논리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원한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 천하의 대세를 따르고 만민의 평화를 위해서 결행한 구국의 결단이니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셈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히틀러, 트럼프, 윤석열, 때려 잡자는 구도와 다를 바가 없으니 마땅한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나쁜 놈들은 법과 원칙도 없이 제 맘대로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망쳐버릴 수 있어도 착한 사람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쁜 놈들을 처단(?)하려 든다면 똑같은 폭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형가가 죽이고자 한 인물이 진정 '폭군'이 맞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은 죽어 마땅한 암군이자, 폭군인가?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탄생한 멋진 시대이지만, 영웅의 탄생이 평화로운 시대가 아닌 혼란스런 시대에 등장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춘추전국시대는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기에는 너무 혹독한 혼란기였던 셈이다. 그런 혼란을 일거에 잠재우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 도량형을 통일하고, 문자를 통합하는 과정을 강행하여 얻은 이득이 분명 더 크다는 점을 들어서 진시황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보기보다 희대의 영웅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형가'는 위대한 성군을 암살하려 한 '암살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원한도 아닌 '연나라 태자 단'의 원한을 대신 실행에 옮긴 '살인청부업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아무런 원한도 갖지 않은 형가가 아무런 이득도 얻지 않고, 오직 '의'로움만 앞세워서 태자 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암살을 시행하려 했다는 점을 들어서 참으로 뛰어나다고 극찬을 한 것이다. 이런 예는 자주 반복 되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은연중에 사마천과 비슷한 논리를 내세워서 '의협의 영웅들'을 양산(?)하는 경향까지 내비칠 정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호전>에서 양산박의 108 도적들을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일반대중에게는 '무협지'로 대변되는 영웅들이 대개가 다 그런 살인을 눈 감고도 해내는 실력자들이다. 물론, 무협지나 무협영화를 즐겨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이기에 '의협'을 내세워서 불구대천의 복수를 완수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에 열광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솔직히 멋지긴 하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런 영웅들의 행보가 자못 '유치'하다는 느낌이 부쩍 들곤 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까닭으로 <사기>를 비롯해서 고전에서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의로운 죽음으로 오래도록 이름을 날리는 경우가 참 많고 다양하다. 백이와 숙제처럼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 충성스런 행동으로 죽기를 각오한 결의는 고개가 절로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주인을 살리고자 '천한 목숨'을 희생시켜 '귀한 목숨'을 구하는 행위를 온당케 여기는 대목은 삐딱하게 읽힐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행태는 <고전>을 읽으면서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무튼,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유가사상에서 중시하는 '충'을 무턱대고 강조하지 않았다. 임금도 임금다워야 충성을 바칠만 하지, 그렇지 못한 임금은 '의협'의 이름으로 죽여도 좋다는 메시지를 뿌리 깊게 담아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역사서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색다른 점으로 봐도 좋다. 허나 '의협'의 이름이라도 해도 될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사기>에서는 이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아서 <사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은 '의협'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영웅행세를 하는 얼토당토 않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중국의 고전'을 더욱 제대로 읽어야 한다. 어설픈 중국 '찬양'도 볼 품 없지만, 무지한 중국 '비난'도 꼴불견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잣대'는 안에서든 밖에서든 올곧아야 쓰임새가 톡톡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적 한계를 이해하고, '그 시대' 상황에 알맞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기울이되, 오늘날에 맞지 않는 것에는 과감히 철퇴를 내릴 자세도 필요하다. 그때 맞다고 지금도 맞지는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때 틀렸다고 지금도 틀리지는 않을 수도 있음을 알고, 올곧은 '잣대'로 <고전>을 즐기면 좋겠다.

이쯤해서 장자화의 <사기>는 마무리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이희재의 <사기> 시리즈에서 하겠다. 아무래도 '대만 작가'가 풀어놓은 관점보다는 '한국 작가'가 풀어놓은 관점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수월할 듯 싶어서 그런다. 조만간 다시 이야기 물꼬를 터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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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
서정욱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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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  서정욱 / 중앙books(중앙북스) (2025)

[My Review MMXCIII / 중앙books(중앙북스) 4번째 리뷰] 철학의 과제는 '우주, 자연,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이런 물음에 나름의 답을 구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모양이다. 그런데 철학자라고 하면 왠지 '고독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너무 무겁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기껏 내놓은 답이 너무 난해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어떤 답이든 '철학'은 너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므로 '철학자'와는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의외로 철학은 '인간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도 철학 못지 않게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철학자들도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고독을 즐기는 철학자라면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대화'는 혼자 할 수 없고, 둘 이상의 사람과 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소크라테스도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 유명한 '산파법'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 물음을 통해서 끝끝내 '너 자신을 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니, 기껏 대화를 한 상대가 기분 좋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철학자들은 유창한(?)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통달한 지혜를 전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 그랬을까? 그게 궁금했는데, 이 책 <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을 읽어보니, 그 답을 알겠다. 그건 바로 '인간관계'를 좋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철학에 관한 나름의 비법을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10명의 철학자'는 각자 나름의 '인간관계의 핵심 코드'를 풀어냈다. 먼저, 프로타고라스는 '나 자신을 먼저 보호할 줄 알아야,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설 자리'도 마련하지 않고서 무작정 배려부터 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남'을 배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설령 '자기희생'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셈이다. 그리고 '상대의 배려'를 존중해주고 드높여 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배려를 받고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른다면, 배려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끝없는 배려를 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관계'가 아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제논은 '이성'이 중요하단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중용)'을 실천하란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할 것이다. 바로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인간은 '이성'을 중시한다. 감성과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다보면 자신을 망치기 쉽지만 '이성'을 추구하면서 살다보면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선과 악 가운데 '선'을 추구하며 살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말이다. 그런데 매번 선한 행동만 하며 살기는 쉬울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지키라고 했다. 중용은 '정중앙'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적당하고 적절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매번 선(이성적)한 것만 추구하는 삶도 힘들고, 매양 악(본능적)한 것만 추구하는 삶도 식상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쉬이 지치지 않게 '적당한 선'을 지키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선한 것'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우렐리우스는 한 술 더 떠서 '금욕적인 삶'을 살라고 권한다. 그래야 적을 만들지 않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적이라도 '그 앞에서' 금욕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적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였다. 황제가 스스로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고, 그 삶을 '의무'로 여기고 있는데, 누가 감히 로마 황제 앞에서 적이 되어 맞서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럼 황제 정도의 '권력'과 '권위'가 없는 사람은 금욕적인 삶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걸까? 그건 아니다. 아무런 권세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금욕'을 지키며 사는 삶, 그 자체가 아름답기에 그 앞에서 두 눈을 다시 씻고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중받게 된다는 말이다. 설령 내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선한 행동'만을 보고 진심으로 칭찬을 해준다면 '악한 행동'으로 앙갚음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그런 사람도 있겠다 싶으면, 다음 철학자를 만나러 가보자.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영국에서 계몽주의를 배워서 프랑스에서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자신과 의견이 달라도 들어주고 존중하면서 논쟁을 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프랑스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몽주의자들은 중세의 신앙이 너무 맹목적이라면서 비판하는 입장이었는데,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던 '프랑스 권력자'들에게 계몽주의는 너무도 위험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한 철학자였다. 그럼에도 볼테르는 '관용(똘레랑스)'를 강조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비난하는 이들의 의견조차 끝까지 '경청'하며 존중해주는 볼테르였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그럴 수 있던 까닭으로 '다름'을 설명했다. 비록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지만, 그건 상대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볼테르 자신과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일축해버리곤 한 것이다. 그리고 '내 의견'을 존중받기 원한다면 '상대 의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면서 '관용정신'을 설파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똘레랑스'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볼테르가 있기 전까지는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 앞에서 '악한 의도'를 가진 이가 '악한 행동'까지 일삼고 있다면, 나와 '다름'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자. 악하다고 보이던 것이 그저 '다른 의도'와 '다른 행동'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물론, 미친 놈이 칼을 들고 설치고 있다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관계법을 상기시켜야 좋을 것이다. 먼저 자신부터 보호하는 것이 첫번째다.

이제 영국의 '경험론', 프랑스의 '합리론'을 만났다면, 독일의 '관념론'을 만날 차례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긴 버겁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정언명령)'만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 의무는 반드시 선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만 지켜도 '인간관계'는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 아시다시피 칸트는 '정확한 시계'보다 더 정확한 일상을 살았다. 칸트는 일상생활까지도 '의무'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산책'하는 것으로도 이웃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셈이다. 만약 칸트가 그 의무를 저버리고 '오늘은 피곤하니까 산책을 쉬어야지'라는 식으로 스스로 의무를 어긴다면, 이웃사람들도 칸트가 산책을 제 시간에 나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의무'로 삼고서 '반드시' 지켰다. 그랬기에 이웃사람들에게 뭔가 '울림'을 전해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관계의 시작'이란 것이다. 상대에게 진하디 진한 '울림'을 전하면 인간관계는 저절로 성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인생이 참 엿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지만,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밝음'만 보면서 살라고 조언해주었다. 또한, 인간은 욕심도 많아서 불행해지기 쉽지만, 쇼펜하우어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남들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 보고만 있으면 욕심만 부추기게 되고 결국은 그 욕심 때문에 불행에 빠진다고 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즐길지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어둠'이 짙게 깔렸더라도 '밝음'에 집중하라고 말한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게 좋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아무리 엿 같은 상황이더라도 '부정'적인 것을 보지 말고 '긍정'적인 것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럼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엿 같은 세상은 '전쟁'도 불사하며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다. 내가 원하든 말든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쓸려 세계대전을 치뤘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강제적인 힘을 가진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니체가 답했다. 힘(권력)이 인간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말이다. 인간은 힘(권력) 앞에 약한 모습은 보인다. 절대복종도 하고, 굴욕적인 모습도 보이며, 때로는 힘을 향한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등등 말이다. 그러니 '인간관계' 나부랭이도 어쩔 수 없이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를 향상시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선택이 있을까? 힘을 길러야 한다.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권위적인 존재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때 '선한 힘'이 '악한 힘'보다 인간관계를 더 좋게 만들 거라는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한 힘'을 가지려 애쓰지만, 그게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악한 힘'을 가지려 들곤 하지만, '인간관계'만 더 나빠질 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니체는 이를 '아폴론(이성)'과 '디오니소스(감성)'로 표상했다. 이성은 좋은 것, 감성은 나쁜 것으로 '대변'할 순 없어도, '대신'할 수는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갈고 닦기 힘들어서 감성에 쉽게 휘둘리곤 하지만, 그래도 더 밝은 태양에 끌리는 것처럼 '아폴론적인 힘'에 큰 의의를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없는 것처럼 '군주적인 힘'은 소수의 몫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같이 '다수의 군중'이 힘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감성)적인 힘이 필요한 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그너의 음악'이라고 니체는 예를 들었다. 음악이야말로 '군중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니체는 너무 '강한 힘'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위버멘쉬(초인)' 같은 이의 등장을 꿈꿨다. 물론 나중에는 '탄생'이 아니라 '진화'라는 개념으로 전환시켰지만, 그조차 '인간관계'에 있어서 넘치는 힘이 없으면 무용하다고 말한 것 뿐이다. 이는 니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시대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전후시대를 맞아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끝으로 레비나스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10명의 철학자가 말하는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핵심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를 존중하고 남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든 싫든 '자신'과 '타인'이 관계를 만들어가야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까닭도 '철학자들의 조언'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직접적인 답이 되지는 않을지언정 '실마리'는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더해지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권위적(?)인 철학자들의 눈에 프롬의 철학은 허섭스레기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지 못해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이 부족해서 운명적인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인간관계'를 어려워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다람쥐 챗바퀴를 돌듯 '주변'만을 맴돌 뿐이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싶어도 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정말 없느냐? 그건 아니다. 인구 1000만 도시에 살고 있어도 '아는 사람'이 1000만 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알려고 노력한 사람'이 몇 명이냐다. 인간관계는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조언에 집중해보길 바란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위의 '10가지 조언' 가운데 2~3가지만 실천해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바로 당신부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실천하며 '도덕적 의무(정언명령)'에 철저히 따르면, 아무리 엿 같은 세상이고, 독재자 같은 나쁜 권력에 휘둘리는 상황일지라도 당신 자신부터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넘지 않는 선'을 지키는 초인이 되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람이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이렇게나 심오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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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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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안정효 / 소담출판사 (2015) [원제 : Brave New World(1932)]

[My Review MMXCII / 소담출판사 6번째 리뷰]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짓꿎은 질문이지만, 그때 그때마다 선택이 달라지는 질문이 있다. 바로 '똥맛 나는 카레'와 '카레맛 나는 똥' 가운데 하나를 먹어야 한다면 무엇을 먹겠느냐는 질문이다. 10대 때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본질'을 더 중시했기에 비록 똥맛일지언정 카레를 먹겠다고 선택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선택에 흔들리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똥맛'보다는 '카레맛'을 선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비록 '생체건전지'로 전락할지언정 비극적인 현실을 마주하며 처참함을 느끼며 힘겹게 살아가느니 '허상'에 불과하지만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환상(꿈)속에서 맛난 음식과 안락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꿈속에서 깨어나면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제되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뜬금없는 질문으로 서두를 꺼냈지만,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미래가 바로 이런 세상을 펼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때는 2540년, 영국의 도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DNA 나선구조'가 밝혀지기 20여 년 전이었던 탓에, 오늘날의 정교한 유전자 조작까지는 아니어도 아주 그럴 듯한 방식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애초부터 '계급적 분화'에 성공했다는 설정을 보여주었다. 지배자 계급은 알파와 베타다. 이들은 외모도 훌륭할 뿐더러 지능까지 뛰어나서 태어날 때부터 '권력자'가 되거나 '관리자'가 되어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쾌락적인 삶을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인 감마와 델타, 그리고 엡실론은 난자 하나에서 가지를 쳐서 '96개의 쌍둥이'를 생산(?) 해낼 수 있다. 이들은 외모부터 작고 볼품 없으며, 엡실론 계급인 경우에는 얼굴에서 콧구멍 2개만 겨우 보일 정도로 괴상한 형체를 띄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힘이 쎄서 노동력을 전담하기에 딱 알맞은 계급이다. 심지어 노동자 계급은 애초부터 '책과 꽃'을 멀리하도록 세뇌를 시켰기 때문에 하릴 없는 지능을 발달시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화된 계급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를 테면, 노동자 계급이 지도자 계급을 보면서, 저들은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며 살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그럴 걱정은 전혀 없다. 이 세계에는 '소마'라는 합법적이고 부작용이 전혀 없는 안정적인 마약이 있는데, 이것을 일정량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애초에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사회구조인 셈이다. 심지어 '소마'는 알약 형태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즐겨 먹는 '음식'에도 첨가될 수 있기에 울적하고 괴로울 때, '쾌락'을 원하는 만큼 복용하기만 하면 온몸에 '쾌락'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를 통해서 '소마'를 강제로 흡입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불행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주인공이 나타난다. 계급은 알파 플러스 계급인데 외모는 '노동자 계급'으로 오해할 정도로 왜소하고 못생겼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멋진 신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인공부화장'을 관리하던 이가 실수로 마르크스의 수정란에 알콜을 부어버리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지능은 뛰어난데 외모는 볼품 없게 태어났다고 한다. 그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마르크스는 '자유 연애'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소마로 외로움을 달래고 불만을 잠재우는 일을 반복했다. 사실 이 세계에서는 '가족' 같은 개념을 가장 경멸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 출산, 육아 같은 일은 '야만인'들이 할 법한 일이고, 이들은 오직 '쾌락'만을 위한 섹스를 즐길 뿐이다. 그것도 '한 명의 이성'에게만 매달리는 것은 바보짓이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멍청이 취급을 한다. 날마다 섹스 대상은 바뀌며 '사랑'이란 감정도 유치하다 여기며 오직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에서는 '노화'라는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서른 살 정도의 젊음을 유지하며 '그 이상'의 나이를 먹어도 절대 늙지 않는다. 늙는 것은 오직 '심장'뿐이다. 그렇게 심장만 노화를 겪다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되면 '고통'도, '질병'도 없이 '즉사'할 뿐이다. 그래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저 인생 가득 '쾌락'만 즐기다 떠날 뿐인 셈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런 쾌락을 즐기지 못한다. 왜냐면 '못생겼기' 때문에 알파나 베타 계급의 여성들은 섹스 상대로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은 애초에 마르크스 같은 지배 계급과 상종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베타 계급의 여성인 '레니나'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베타 계급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미녀였다. 그녀의 눈에는 마르크스가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둘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둘은 '여행'을 함께 떠나기로 약속한다. 바로 '야만인 보호구역'인 뉴멕시코로 말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도착한 그곳에서 둘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그곳에서는 '가족'이 존재했고, '임신, 출산, 육아, 심지어 모유수유까지' 직접 다하는 불결하고 불쾌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니나는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게 된다. 분명 '야만인'이 틀림없는데 완벽한 외모에, 똑똑한 지성까지 겸비한 '최고의 매력남' 존을 만났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야만인 보호구역'을 벗어나 '문명세계'로 함께 건너 오게 된다. 한편, 마르크스는 여행을 오기 전에 총통에게서 전달 받은 '린다'라는 여성과 만나게 된다. 린다는 원래 '문명세계'에서 살던 여성이었는데,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던 여성이었다. 그렇게 행방불명이 되었던 린다는 '존'이란 아들을 그곳에서 출산하고, 손수 길렀던 것이다. 사실 린다는 '야만인'과 사랑에 빠져서 문명세계를 벗어나 야만인 보호구역에 정착하고 아들도 낳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문명세계를 떠났던 탓에 야만스런(?) 삶에 지쳤고, 아들 존에게 '문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버텼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르크스와 레니나는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린다와 존을 함께 동행하기로 한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문명세계'로 되돌아온 린다와 존은 처음 얼마 동안은 행복해 한다. 린다는 오랜만에 '문명세계의 향락'에 푹 빠졌고, 존은 레니나와 '정신적 사랑'을 완성(?)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레니나는 오직 쾌락만을 쫓아 존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려고만 한다. 애초에 '정신적 사랑'이 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갈등하게 되고, 그 사이에 엄마 린다가 '소마 과도 복용'으로 사망하게 된다. 사실 린다는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오랫동안 험하게 살았던 탓에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있었고, 알파 계급답게 훌륭했던 외모도 뒤룩뒤룩 살이 쪄서 뚱뚱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화된 상태에서 다시 '쾌락적인 삶'을 누리다 그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족스런 삶을 살다간 린다와는 달리 아들 존은 충격을 받았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의 죽음이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명세계에서는 아무도 존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가족이란 개념을 경멸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정한 '문명세계'에 반감이 든 존은 반사회적인 행동을 일삼다 총통의 제지를 받게 된다. 그렇게 마주한 두 사람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데, 이게 이 소설의 '백미'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문명세계'와 '비문명세계'의 개념이 완전히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문명세계'로 그려졌지만, 사실은 '비인간적인 모습'만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묘사된 곳이 더욱더 '인간적'으로 비춰질 정도다. 존은 총통이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인간답게 살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괴로워하다 끝내 목을 매어 죽음을 택하고 만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슬픔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원초적인 슬픔'을 겪고 있는 이에게 위로할 줄 모르는 '비정한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을 동경하며 살아왔던 '문명세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멋진 신세계>가 정말 형편없는 세계라는 사실만 다시금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이 매력적인 까닭은 분명 '그 세계'가 멋지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는데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세계'를 동경하고 꿈꾸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녹록치 않을 때 더욱 그렇다.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약 중독'에 빠지게 된 원인이 바로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현실이 너무도 비극적이기에 잠시 잠깐이라도 '행복'을 느껴보기 위해서 마약을 스스로 투입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마약이 주는 행복감이 너무 짧고, 비극적 현실에서 헤어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적은 비용'으로 극한의 고통으로부터 '일탈'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마약 투여'밖에 없기에 그렇다. 차라리 소설에서처럼 '부작용'이 없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더욱 끔찍할 뿐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멋진 신세계> 속에 그려진 문명세계가 바로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밸트 위에서 착착 만들어지는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고, 그 차가 팔려서 얻은 엄청난 자본으로 풍요로운 부를 창출해낸 세상이 바로 '문명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축된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은 '무한한 노동력'이 무제한으로 투입되었을 때 가능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 세계의 노동계급은 정말로 '비인간적인 형태'였다. 오직 노동만을 위해서 '대량생산(!)'된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가치로 존중받지도 못하고, 오직 노동을 위해서만 소비되다가, 불평과 불만이란 감정이 싹트지 못하게끔 '책과 꽃'을 경멸하도록 세뇌 당하고, 그런 세뇌로도 감출 수 없는 불행함은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로 제거해버린다. 만약 현실 세계의 '노동자'들도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면 정녕 행복할 수 있을까? 두 번 물으면 입 아플 것이다.

또한, 고도로 발달된 과학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경각심도 심어준다. 오히려 비윤리적으로 과학의 고도화를 실현시킨다면 '과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마저 보여준다. 그렇다고 '과학의 발전'을 임의적으로 멈추게 할 수도 없으니 더욱 황망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멋진 신세계'를 꿈꿔야 하는 걸까? 적어도 이 소설과는 정반대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쾌락 추구'와 '소마'만큼은 탐나지 않을까? 늘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아주 가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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