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인문학 수업 : 뉴노멀 -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표준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 퇴근길 인문학 수업
김경미 외 지음, 백상경제연구원 엮음 / 한빛비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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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코로나의 유행도 수그러들면서 '엔데믹(감염병 주기적 유행, 일명 '풍토병')'을 향해 가고 있다. 2019년 말에 시작하여 이듬해 전세계로 번져나갔고, 2023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19 감염병'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이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외출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으니, 우리의 일상이 그간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마스크 뿐만 아니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감염병이 대유행을 하는 시기에도 별다른 경제적, 심리적 타격을 받지 않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첨단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어쩔 도리도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극과 극의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우리 모두가 지켜보았다. 이를 일컬어 '뉴노멀(새로운 일상)'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대변혁', '대격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국가적인 대처방안도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펜데믹(감염병 세계적 유행)' 초기에는 선진국조차 변변한 대처를 하지 못해 허둥거리기 일쑤였지만, 거대제약회사가 발빠르게 '백신 처방'을 내놓자 확실히 선진국들이 우선적으로 일상을 회복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에 반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저개발국가나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인구는 많은데 의료시스템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일부국가에서는 변변한 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병원 복도나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현실적인 일상을 목도하게 되기도 했다.

 

  한편, 비현실적인 일상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가장 먼저 '비대면수업'이나 '재택근무' 같이 사람과 사람이 '한 장소'에서 만나지 않고도 일상을 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편리한 일상도 차이는 극명했다. 선진국들은 발빠르게 '비대면' 시스템을 구축해 일상을 빠르게 회복해나간 반면에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펜데믹의 수렁' 속에서 변변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채 맨몸으로 부딪혀나갔던 것이다. 그로 인해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이'는 무서운 속도로 변화해나갔고, 그때마다 전세계는 '새로운 변종바이러스'와 싸우는 공포를 계속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바뀌어가는 것일까?

 

  '뉴노멀'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전제로 한다. 이미 첨단 과학기술의 맛(?)을 본 인류가 예전처럼 퇴보할 수 없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감염병 세계적 유행'이라는 공포를 함께 느낀 인류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일상을 겪어 나가게 될 거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지 3년이 되어가는 지금을 보면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첨단 과학기술의 맛'을 느꼈다고 해도 인류가 받아들이는 '체감속도'는 현저히 느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를 테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감염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져서 서로가 조심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느림과 불편'을 감수하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다녀도 된다는 '시그널(신호)'가 보이기 시작하자 조금쯤의 '느림과 불편'에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단 말이다. 이제 곧 '마스크 해제'라는 정부의 방침이 나올 전망이라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는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그 사이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겪었다. 오랜만에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시그널이 나오자 너나할 것 없이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모인 젊은이들에게 충격적인 사고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안전사고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기에 '참사발발' 이전부터 경찰서와 소방서에 안전조치를 취해달라는 요구전화가 빗발쳤지만, 끝내 '위기대응 메뉴얼'이 없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당국의 변명과 정부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처로 결국 애꿎은 젊은 목숨만 안타까울 뿐이고, 남겨진 유족들의 가슴엔 대못을 박아버리고 말았다. 이게 과연 '뉴노멀'이란 말인가? 아무리 '첨단 과학기술'이 날로 발달한다지만 결국 그 혜택은 '일부계층의 점유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 혜택 또한 전혀 '공평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져 극심한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절대 바라지 않은 '뉴노멀'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뉴노멀'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침맞게 이 책의 제목이 '인문학 수업'이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교양을 쌓고 철학적인 삶을 위해서는 '인문학 공부'가 해법이기 때문이다. <논어>에도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 지식을 통해 새로움을 터득해 나간다는 말에 '뉴노멀의 해법'이 담겨 있다고 본다. 우리의 미래는 매우 빠르게 변모해나갈 것이다. 인공지능로봇, 감염병, 생명공학, 뇌과학 등등 기존의 패러다임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울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2040년을 주목하고 있고, 세계의 석학들도 2050년을 정점으로 인류가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라는 '경고성 멘트(!)'를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세계경제위기 속 국지적인 전쟁과 분쟁, 그리고 갈등을 멈추지 않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B에서 D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가는 형국이다. 탄생(Birth)에서 죽음(Death)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선택(Choice)가 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지녔단 말이다. 그 기회는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고 말이다.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궁금하다면 '인문학'을 들춰보아야만 한다. 내 삶이 '위기'에 빠졌다면 더더군다나 '인문학'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다면 그 원인도 '인문학'에서 찾아봐야 한다. 물론 인문학이 직접적인 해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신탁의 예언이나 점쟁이의 점괘처럼 두루뭉술하고 아리송할 따름이다. 하지만 지나고보면 딱 들어맞는 예언이었고, 신통한 점괘였던 것처럼 느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당신이 놓친 '인문학이 제시한 기회'였다는 것만 알아도 좋다. 나 자신의 철학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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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1 : 도원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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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내용은 아니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는 있지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원본에 가깝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사 삼국지>보다는 <삼국지연의>에 열광하는 까닭은 '조조'가 아닌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촉한정통론'이라 부르는 것인데, 역사의 승리자는 위나라를 세운 조조(실제로는 조조의 아들 조비)였지만, 수많은 독자들은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한나라의 정통을 이어받은 '유비'의 손을 들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애독자들이 '유관장 삼형제'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여전히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실리'와 '실력', 그리고 '성과'를 중시한 까닭에 유비가 아닌 '조조'를 주인공으로 세운 색다른 해석을 가미한 <삼국지>가 등장했지만, 유관장 삼형제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여전하다.

 

  한편, 이 책은 1940년대 초에 일본신문에 연재된 <삼국지>로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을 하며 이후에 쓰여진 여러 <삼국지>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역시나 '촉한정통론'을 따라 '유관장 삼형제'가 벌인 화려한 '도원결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실제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과 큰 차이점을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게 된 까닭도 바로 '요시카와 에이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물론, 도원결의의 원조는 나관중이다. 하지만 요시카와는 유비와 관우, 장비가 서로 만나 인연을 맺고 '한 왕실의 부흥'을 결의하며 의형제를 맺는다는 설정을 대단히 설득력 있게 묘사한 덕분에, 이후에 출간된 모든 <삼국지>에서 '도원결의'는 빼놓지 않는 명장면이 되고 만 것이다.

 

  암튼, 오랜만에 <삼국지>를 다시 정독하게 되었으니 리뷰로 써보려 한다. 책속으로 들어가 보련다. 시작은 '유비의 등장'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유비는 '중상정왕 경제의 후손'으로 황실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일찍이 할아버지 대부터 '돗자리'를 짜서 내다 팔아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가난한 살림을 살았다. 하지만 허리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명검을 찼기에 허름한 돗자리 장수 차림이라도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흐른다고 묘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때는 '황건적의 난'이 한창이라 여기저기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헐벗은 삶을 살고 있고, 황건적들의 행패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기에 '난세를 바로잡으려는 영웅의 기개'만은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황실의 피가 흐르고 난세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뜻은 높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알뜰살뜰 어머니와 단 둘이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런 무의미한 나날들이 이어진 어느 날, 돗자리를 팔고 수중에 모은 돈이 있어 어머님께 드릴 '귀한 차'를 구해다 돌아가는 길에 황건적을 만나게 된다. 칼도 빼앗기고 차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길 찰나에 유비의 목숨을 구해주는 은인을 만나게 되니 바로 '연인(연나라 사람) 장비'다. 그렇게 목숨을 구해준 은인은 훗날, 서당 선생으로 초야에 묻혀 아이들을 가르치던 '운장 관우'와 함께 유비를 형님으로 모시는 '도원결의'를 맺게 된다. 허나 이들은 보다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의형제'의 관계를 보다 격상시켜 '군신 관계'로 맺으려 한다. 왜냐면 유비가 '한나라 황제 경제의 후손'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허나 유비가 아무런 기틀도 없이 '군신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난세를 바로 잡고 공을 세워 군사를 모으고 성주가 된 뒤에 뜻을 펼쳐보는 것이 낫겠다고 제안을 하자, 관우와 장비가 따르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격문을 내걸고 '황건적 토벌군'을 조직하여 나아가 싸우니 가는 곳마다 공을 세우고 '유비'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다. 허나 아무리 혁혁한 공을 세운들 '의용군'이라는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애초에 황건적이란 도당의 무리가 일어난 까닭도 황실에서부터 말단관료까지 썩어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 밖에까지 썩은내를 풍기게 되니 나라가 혼란스럽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아무리 공을 세웠다한들 아첨과 아부를 하는 약삭빠른 이들이 출세하는 세상이고, 공적을 세우기보단 뇌물을 바치는 이들이 더 쉽게 관직을 얻게 되니 '유비의 세력'은 좀처럼 출세의 길로 접어들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유관장 삼형제는 목숨받쳐 헛수고만 한 셈이라며 한탄을 내뱉고서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한편, 황실 내부에서는 '십상시'라는 환관들이 정사를 그르치고 자신들의 이득만을 챙기며 충신을 역적으로 만들고 아첨하는 이들로만 주변을 가득 채우니 나라는 날로 기울어가기만 했다. 모처럼 군웅들이 모여 '황건적의 난'을 정리했건만 황실과 중앙정부를 어지럽히는 '열 명의 내시들'이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뜻이 있는 신하들은 환관들을 죽이지 못해 분을 참지 못할 뿐이다.

 

  이에 황제의 모후인 '하태후의 오라버니' 하진을 중심으로 십상시를 처단하고 국정을 바로잡으려는 충신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런 충신들의 이름은 노식, 왕윤, 원소, 조조, 손견 등등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이들이지만, 아직은 때를 만나지 못해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하고 '십상시'를 처단하는데 결의를 다질 뿐이다. 허나 하진은 잘난 동생을 두어 대장군으로 출세를 했지만, 원래는 짐승을 잡아 고기를 팔던 백정으로 천한 출신인 탓에 '눈앞의 이익'만을 셈할 뿐, 정세를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십상시의 잔당'을 처단하지 못하고 뒷통수를 맞아 비명횡사하게 된다. 이런 혼란을 틈타 황실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동탁'이다.

 

  동탁은 일찍부터 하진의 부름을 받고 도성 근처까지 군사를 몰고 왔으나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다가 하진이 죽고 십상시들이 몰락하여 '권력의 공백'으로 인한 대혼란이 벌어지자, 뒤늦게 등장을 하더니 엄청난 군세를 몰아 '권력의 자리'를 공짜로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서는 '어린 황제'를 새로 세우는 등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더니 결국은 '어린 황제'를 볼모로 삼아 국정을 농단하는 횡포를 자행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뜻을 거역하거나 반대하는 무리를 숙청하니 '동탁의 공포정치'가 시작된 셈이다.

 

  이런 와중에 그 유명한 '여포의 배신'과 '조조의 탈주극'이 펼쳐지니, 2권에서 이어질 '반동탁 연맹'의 서막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다. 한편, 우리의 주인공 유비는 황건적 토벌의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아 '평원 태수'로 조그만 영지를 받게 되니, 애초에 세운 '한 황실의 부흥'의 기치를 실현시키려 노력한다. 아직 자신에게 닥칠 고생길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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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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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적인 책이다. 고전문학을 읽는 맛은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는 점에서 분명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가 느껴진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까닭이기에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널리 읽히고 입소문을 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주홍 글자>에서 느낄 수 있는 맛과 깊이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윤리적인 접근'를 통해서 '죄와 벌'에 대한 고민을 풀어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헤스터의 가슴 한복판에 '선명한 주홍빛'으로 빛나는 글자 'A'는 원래 간통(Adultery)를 뜻하는 앞글자다. 결혼한 여인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통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으니 '일곱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청교도적인 종교적 윤리관에 따라 '사형판결'을 받아 마땅했다. 허나 그녀의 남편이 2년간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여인의 몸으로 홀로 지내기 힘들었다는 정상을 참작하여, 가슴엔 '낙인'을 찍고, 지은 죄를 널리 알린다는 목적으로 '조리돌림'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간통'에 따른 벌을 받는 장면만을 보여줄 뿐, '간통'을 저지른 정황이나 두 남녀의 사정 따위는 '건너띄기'를 해버렸다. 만약 건너띄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통속소설'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작가는 '문제의 장면'을 과감히 삭제하고 '죄'가 아닌 '벌'에 집중조명을 비춰낸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문제를 과감히 드러내며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효과도 얻어냈다. '죄값'을 치뤄낸 사람에게 냉담하기 그지없는 '낙인찍기'를 멈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말이다. 또한 '여성'이 감내해야 할 사회적 무게감이 얼마나 무거우며 무한한 희생을 강요하는지에 대한 비판도 함께 싣고, '패미니즘(여성주의)'의 정신도 아울러 전하고 있다.

 

  이런 메시지는 '선홍빛 글자(The Scarlet Letter)' A가 뜻하는 바가 '능력(Able)'과 '천사(Angel)'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이는 헤스터에게 주어진 '죄값'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감내하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죄를 짓지 않은 평범한 이들보다 오히려 죄를 지은 헤스터가 이토록 숭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이 소설의 '백미'일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더욱더 면밀히 돌아보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반성을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죄인의 신분을 '낙인'을 품고 살아가지만, 지울 수 없는 '낙인' 덕분에 더 바르고 더욱 올바른 도덕심으로 살아가게 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헤스터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해내는 능력을 갖게 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배려심 깊은 행동으로 '천사'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일테다.

 

  이는 우리가 사는 인간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효과도 낳게 된다. 일명 '도덕군자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들춰냈다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도덕적인 일만 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을 일상으로 실천하는 이가 진정한 천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는 삶을 살아야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인정'만을 추구하는 삶은 스스로를 추레하게 만드는 근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도덕적이지도 않으면서 윤리적인 심판을 받을만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작은 만족감'만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가 밝고 건강해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차라리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철저히 반성한 사람이 더욱 위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면 '잘못'을 저질러 본 경험을 통해 '무엇'이 잘못인지 더욱 잘 알게 되고, 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딤스데일의 고통을 통해서 더 잘 드러난다. 딤스데일을 헤스터와 달리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밝히지 못했다. 목사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는지, 혹은 헤스터의 의지를 존중한 탓이었을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제대로 삼지 못하고 끝없는 고통속으로 침잠해버리고 만 것이다. 차라리 헤스터와 같이 '죄값'을 처절하게 치르고 나서 헤스터처럼 '철저한 반성'을 통해 지은 죄를 말끔히 털어버리고 '새출발'을 했더라면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이어나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또한, 칠링워스의 악마와 같은 괴롭힘에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등장인물 가운데 독자들에게 가장 용서받지 못할 자는 바로 칠링워스일 게다. 그는 자칭 '지식인'이라면서도 해박한 지식을 쌓아올리고도 고작해야 자신의 아내와 연적(?)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런 악행의 결과가 심히 참혹했기에 마땅한 결론이라고 박수를 아끼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우리들이 가장 '따르기 쉬운 캐릭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지상정이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칠링워스같은 '복수심'에 빠져 자신을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주홍 글자>를 통해서 자신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되돌아보고, 적어도 '칠링워스'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는 '반면교사'로 삼기 딱 좋다.

 

  이처럼 이 소설은 '도덕교과서' 같은 주제로 이해하기 딱 좋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의 삶'에 대한 메시지를 하나 더 건져냄으로써 고전의 매력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의 대명사가 바로 '여성'을 온전한 주체적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동적이고 타율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단정 짓는 일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여성의 행복은 오직 '남성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는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할 때다. 여성도 얼마든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으며, '독립적인 삶'을 선택해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헤스터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헤스터는 낙인 찍힌 죄인이었지만 남편이나 연인(?), 심지어 사회적 시스템의 도움 없이 '수놓기'라는 재능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떨쳐내고, 나아가 '조금의 여유'라도 생기면 아낌없이 남을 위해 내놓고, 베푸는 삶을 살아갔다. 즉,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갔고,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는 '위대한 삶'을 여성의 몸으로 직접 증명했단 말이다. 주위의 남성인 딤스데일은 '고뇌'를 하고, 칠링워스는 '복수심'에 불타고, 그밖의 남자들은 헤스터에게서 펄을 빼앗아갈 생각만 할 때, 헤스터는 스스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와 문제를 척척 해결하며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났단 말이다.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이런 소설을 그저 그런 '삼류 막장드라마'에 버금가는 '불륜소설'로 치부하는 목회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오히려 훌륭한 종교인들이라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죄 지은 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위인들이 '날 선 비난'만을 앞세워 궁지로 모는 어리석음은 절대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실수'에 관대한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실수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실수를 거울 삼아 더욱더 정진하는 사람이 더욱 굳센 법이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는 이치와 상통할 것이다. 그리고 실수를 해본 사람만이 더 많은 지혜를 얻는 법이다. 늘 성공만 한 사람은 '실패'했을 때의 슬픔과 고통, 아쉬움과 비참함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수를 거듭하면서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이는 성공했을 때의 기쁨과 만족, 그리고 성취감을 2배 이상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실수'를 한 이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제공하고 북돋아주는 응원을 아끼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면, 우리는 더 멋진 사회를 만들게 될 것이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고쳐나갈 줄 아는 위대함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실수도, 실패도 소중한 경험으로 삼아 위대함을 이룰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주홍 글자>를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삼는 까닭도 바로 이런 위대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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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꼭 필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 - 내 삶이 가벼워지는 21일 프로젝트
조안 타탐 지음, 조민영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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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필요한 것을 줄여가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2005년에 난 '논술쌤'으로 새출발을 하며 '두 번째 삶'을 시작하며 거실 한 켠을 꽉 채우는 거대한 책꽂이를 장만했더랬다. 그리고 그 책꽂이에 책 한 권을 꽂으며, 이 책꽂이에 책이 가득할 때즈음에 난 '최고의 논술쌤'이 되어 있을 거라는 주문을 걸어두었다. 18년이 지난 지금, 난 주문대로 '최고의 논술쌤'이 되었지만, 책은 책꽂이가 모자라 '한 개의 작은방'을 가득 채우고, '또 다른 작은방'을 서서히 잠식해나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작은 집구석에 어느새 책이 16000여 권의 책으로 넘쳐나게 된 것이다. 그간 '오래되고 낡은 책들'을 약간 버리긴 했지만, 나머지는 한권 한권에 켜켜이 쌓아둔 추억들이 있다는 핑계를 변명삼아 버리지도 못하고, 누구를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읽지도 않으면서 그저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그렇다. 난 '모으는 재주'는 있어도, '버리는 재주'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움의 비결'을 배우고자 이 책을 펼쳐들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물건들이나 방구석을 '신박하게 정리'를 할 수 있는 비법이 적힌 책은 아니어서 아쉬움이 컸더랬다. 대신 '마음'을 비우고, '일상'을 가볍게 할 수 있는 [21일간의 프로젝트]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333 비법' 같은 것이다. 3달 동안 33벌의 옷으로 생활해보는 방법인데, 옷장 속의 옷을 '한 눈에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만드는 비법이다. 일단 '버릴 수 있는 옷'과 '꼭 입을 옷'으로 구분해놓은 뒤에 '낡은 옷', '유행이 지난 옷', '스타일이 같은 옷', 그리고 '두 번 다시 입지 않을 옷' 따위는 미련없이 버리고 비우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남은 33벌의 옷만으로 3달을 버텨보는 것이다. 일단, 옷장이 가벼워지니 '라이프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지게 될 것이고, 옷장 속의 옷을 '한 눈에' 다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뒤적거릴 필요없이 '스타일'을 결정할 수 있어서 시간도 확연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볍게 비웠기' 때문에 어떤 옷이 나에게 딱 맞는지, 내게 더 필요하고, 꼭 필요한 옷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단다.

 

  하지만 난 이런 비결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왜냐면 난 '단벌신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옷이 얼마 없다. 1년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고, 속옷도 딱 3벌로 빨아입기 때문이다. 가끔 새옷을 사 입기도 하지만 5년에 한 번 살까말까하는 정도라서 '쇼핑'이랄 것도 없다. 앞으로 5년간 더 입을 정도의 무난한 옷이면 그뿐이다. 옷 쇼핑에 걸리는 시간도 길어야 1시간 남짓...그것도 시장(그렇다. 난 백화점도 안 간다)에 갔다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니 난 이 책 속에 적힌 나름의 비법들을 '내 일상'에 접목시킬 것들이 그닥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정리'나 '수납법' 따위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괜히 '최고의 논술쌤'인 것만은 아니다. 옷 정리하는 비법을 통해서 '책 정리하는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눈에 간파했기 때문이다. 일단,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낡고 오래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오래된 책이라도 무작정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추억'이 쌓인 책들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 가운데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은 꼭 버릴 것이다. 그리고 '서평이벤트'로 받은 책도 그동안 계속 쌓아두었는데, 사실 이 책들이 내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범이다. 역시 '두 번 읽지 않을 책'은 모조리 아웃이다. 특별한 '출판사의 책들'은 애정을 담아 보내주었으니 차마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남을 줄 수도 없으니 나의 '애장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밖의 출판사는 얄짤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사놓고 읽지도 못한 책들'이다. 이리저리 시간에 쫓겨 그저 책꽂이에 꽂아둔 채 '장식용'이 되어버린 책들인데, 일단 이 책들은 서둘러 '읽고', '리뷰'하고, '선별'할 것이다.

 

  이렇게만 해도 일단 1만 권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그런 뒤에 또다시 '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확실히 줄여나갈 계획이다. 일단 '읽고 써야 하는 만큼' 빠른 시일 안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중고시장'에 되팔 수 있는 책들을 팔기 시작했다. 이벤트나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들은 '책선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을 했으니 반드시 끝을 볼 것이다. 나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결심'을 하면 '끝장'을 보기 때문이다. 또, '한다'고 했으면 꼭 하고, '안 한다'고 하면 절대 안 한다. 그 덕에 난 술담배를 안 한다. 담배는 애초에 피우지 않았고, 술은 끊은 지 4년이 넘었다.

 

  이 책은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비우기'를 결심하기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을 책의 앞과 뒤에 그려진 '수레바퀴'에 적어놓고 자신의 결심으로 인해 '나의 모습'이 얼마만큼 변화했는지 주목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변화된 모습에 '자신감'을 갖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길 바라는 글쓴이의 마음이 이 책속에 가득하고 말이다.

 

  그리고 '비움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예찬하고 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먹고, 몸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여 꽉 채움으로써 누구나 건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곧잘 가지곤 한다. 하지만 진짜 건강해지는 비법은 '채움'보다 '비움'을 먼저 시작해야만 한단다. 특히, 현대인들은 '과식의 시대'를 누리고 있는 탓에 '배고픔'보다는 '배부름'으로 인한 질병이 더 늘어나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풍요로운 먹거리'를 누리지 못한 탓에 먹을 수 있을 때 쟁여두고 먹는 식습관 형태로 진화해 온 것이다. 그래서 배고픔은 두 달 이상 버틸 수 있지만, 배부름은 단 두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우리 몸을 키워 '몸속 지방질의 형태'로 쟁여두곤 한다. 이로 인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이고 말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건강해지고 싶다면 우리 몸속을 '비워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온갖 물건들로 가득그득 채워놓고 만족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인 셈이다. 이제는 방구석을 깔끔하게 비워나가면서 살아보자. 그러면 삶이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비워나가면 나갈수록 '진짜'로 필요해지는 무엇이 생길 거란다. '그것'으로 내 삶에 신선한 충전을 해나간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나도 방구석 가득한 책들을 비워나가면서 '진짜'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다. 기대해도 좋다. 홀쭉해질 '나의 행복한 독서 라이프'를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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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박정은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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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인문학책으로 세 가지 논점에서 '인간다움'을 논하고 있다. 1부에선 '코로나 시대'를 맞아 달라진 일상을 맞이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그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기로움을 이야기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어쩌면 불편한 주제인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낯선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방법론을 고찰하고, 대립과 갈등이 아닌 '공존'을 모색하는 마당을 제시했다.

 

  지은이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고 있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책을 쓸 당시에는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리고 수녀이며 학자다. 미국 홀리네임즈대학의 영성학 교수라고도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다분히 '종교적'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딱히 주제가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책제목조차 '인간다움'이 적혀 있으니 말이다. 그저 시종일관 '인간'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딱히 어느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논하지 않는 것이 퍽 맘에 들었다.

 

  책 속에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였다. 나는 '남성'이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나에게 "남자는 페미니즘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공격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난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라 얘기하지 않는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를 한다면, '페미니스트'는 다분히 '백인여성만을 위한 이상주의자'로 백인여성이 아닌 유색인에 대한 편견도 심하며, 남성들은 모두 성범죄자, 아니면 예비 강간범 취급을 하는 지독한 편견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여성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는 큰 반감이 없다. 나는 차라리 '여성주의자'라고 불리우고 싶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를 '문제시'하고 바로 잡기 위해 운동을 펼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불평등을 눈앞에 두고서도 여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할라치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느니, 남성과 여성을 '편가르기'하려는 모략이라느니...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일삼는 인간답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아주 가관일지경이다. 여성에 대한 우대정책이라고 여겨진다면 '당신네 엄마를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리고 당신의 아내와 딸이 살아갈 사회인데, 차별로도 모자라서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엉망진창인 사회시스템을 계속 유지하자고 고집부릴 셈이냔 말이다. 당장 '남성'들이 손해를 보는 정책일 것 같아도 큰 그림으로 보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일뿐인 것이 훨씬 더 많다. 왜 그런 '최소한 것'조차 열린 마음으로 남성과 여성이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단 말인가.

 

  여성 운동은 좁게 보면 '유리천장'을 없애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론 '양성평등'을 이루어 남녀차별이 없어진 세상을 만들어 '운동, 그 잡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세상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 운동'은 여성만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남성도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페미니즘'이란 명칭을 빼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복잡하다 못해 난잡해진 개념을 다시 '단순화' 시킴과 동시에 '누구'에게나 열린 운동으로 다시 시작하기 위함이다. 물론, '여성 운동'이란 명칭도 이미 어디선가 쓰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이미 활약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을 여자만의 전유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 편협함을 깨고 '남성'도 동참할 수 있는 진정한 여성주의운동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꼭 그래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간다움'을 이런 관점에서 출발하면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남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도 힘든 상황이지만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제주도에 낯선 이주민이 왔을 때도, 일각에선 '종교적 배타성'을 앞세워 예멘 난민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날선 주장을 했지만, 그들이 체류하고 있던 30일 남짓한 기간동안 많은 제주도민들이 그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잠시나마 평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는 소식을 듣고, 새삼 '인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AI가 지배할 미래에도 '인간다움'은 필수조건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러면서 AI가 '인간다움'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들이 인간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도 담았다. 하긴, '인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입력했다고 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AI가 인간을 어찌 대할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살아간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그러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곤 한다. 마치, 깨끗한 공기를 당연하게 여기다가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나서야 콜록거리며 괴로워하다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공기'도 '인간다움'도 청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다운'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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