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이야기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3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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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끔찍한 신탁 때문에 버림 받은 아이가 끝내 '정해진 신탁'대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정해진 운명'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통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일설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현실보다 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적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저런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닥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픈 이야기를 통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거침으로써 삶의 활력소를 되찾을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펑펑 울고 나면 한결 속이 시원한 느낌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비극은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고, 비극이 덜할 수도 있어야,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할텐데, '한 번 정해진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전개에 어쩌라는 거냐는 반문이 끝없이 되묻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신의 뜻 앞에 '순종'하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순종'한다면 끔찍한 운명은 피할 수는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면 '순종'하는 의미가 무색해질 뿐이잖은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적당한 교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도덕적인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는 했다.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전의 축약본'이긴 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만 수록된 책들과는 달리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를 모두 수록되어 있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단독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으니, 이 책이 아니고서는 3부작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책도 바로 이 책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과연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자식까지 낳는 반인륜적인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친아버지가 오이디푸스를 어릴 적에 내다버렸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자신을 길러진 '양부모'를 친부, 친모로 알고 자랐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은 신탁,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이란 신탁을 받았기에 양부모 곁을 떠나 방랑을 하던 차에 그만 '친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죽이고 만 것이다. 그 사이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되었다. 괴물 스핑크스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서 말이다. 그렇게 영웅이 되어 홀로 된 왕비,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오이디푸스는 결혼을 하고 왕과 왕비가 되어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런데 자식을 넷이나 낳는 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는데도 불운한 일들이 왕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왕국내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란다. 너그럽고 현명한 오이디푸스는 그 부정한 사람을 찾아 왕국에 다시금 평화를 가져다주려 했는데, 그만 그 부정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슬픔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묻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오디이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테베의 영웅이 된 뒤에 자신이 '테베의 왕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는 일을 제정신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의 친부, 친모도 자신들이 죽여 버린 자식이 장성해서 되돌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죄에도 마땅히 벌을 내려야만 하는가? 독자마다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다. 물론 이유도 다를 것이고 말이다.

  다음 이야기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와 큰 딸 안티고네가 오랜 방랑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속죄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난제'가 시작된다. 바로 테베의 왕위 자리를 놓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전쟁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크레온와 짜고서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첫째 아들을 왕국에서 내쫓고 왕위에 오른다. 이에 불복한 첫째 아들은 '외국의 용병'을 모아서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쳐들어가고, 둘째 아들과 숙부는 이에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운한 신탁 하나가 또 등장하게 된다. [둘 중 아버지를 모시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내다버린 아버지를 모셔오려는 두 아들의 눈물 겨운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결론은 양쪽을 모두 돕지 않고, 제3자의 힘(테세우스 왕)을 빌어 두 아들 모두 벌을 주는 것이었다. 이때 독자들은 또다시 난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들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말이다.

  부모의 처지에서 곤경에 처한 자식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가? 그런데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쯤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자식을 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만, 그 자식들이 애초에 아버지를 내다버린 원죄가 있다면, 괘씸해서라도 돕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꽤씸하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어찌 두 아들을 벌주기 위해서 '제3자(테세우스, 이웃의 왕)'에게 이득을 내어줄 수 있겠느냔 말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이디푸스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돕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인 판단이란 말인가?

  마지막 이야기 <안티고네>는 더 끔찍하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결전을 벌인 끝에 모두 죽고 숙부 크레온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테베를 지킨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대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 반면에,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외국군'까지 끌고 와서 조국을 공격한 반역자였기에 그의 주검을 들판에 방치하고서 그 누구라도 주검에 손을 대거나 묻어주거나 슬퍼한다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새로운 국법을 정해버린 것이다. 허나 아무리 국법이라고 하지만 '혈육의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기에 큰 딸 안티고네와 둘째 딸 이스메네가 장례식을 대신해 오빠의 주검 위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이에 숙부 크레온은 두 여인을 국법으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해버린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그건 너무나 과한 처사라며 사형을 면하게 해주라고 권하지만, 크레온은 끝끝내 "국법은 지엄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끝내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바위로 입구를 막아버리는 형벌을 시행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사이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사형을 멈춰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안티고네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고야 만다. 하이몬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레온의 아내도 덩달아서 자살을 해버리니, 그제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과격했고, 용서를 하는 것도 너무 뒤늦었다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나라가 정한 법'이 우선인지, '자연이 정한 법'이 우선인지 둘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연이 정한 법'이란 '혈육의 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도덕적 관습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국법'은 반드시 지켜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왕이 정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의 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동생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동생이 있다면 국법에는 없더라도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욕해야 마땅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티고네는 과연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동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마저 가로 막는 '국법'이 과연 온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고 국가가 정한 법을 함부로 어기는 짓을 방관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사사로운 이유로 국법을 어긴다면 애당초 국법을 지킬 까닭도 없을 것이다. 어떤가?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운명'은 신이 정하는 것이지만 '판단'은 인간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끝없이 묻고 답을 해도 '정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판단'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 지혜로운 판단에는 수많은 '경우'가 달라붙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때로는 "이런 경우일지라도 요로케..." 해야 마땅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만 하고 말이다. 그 질문이 많고,  고, 결정적으로 '남'을 위한 결정을 위한다면, 그 질문 끝에 내 '단'은 더욱더 위대해질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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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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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점점 발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디지털 치매'라는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지인들의 '전화번호' 정도는 누구나 거뜬히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노래방에 가면 '좋아하는 노래의 번호' 정도는 습관적으로 눌러 신나게 불러재끼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지인들의 연락처'도 같이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백업'을 미리 받아놓아서 그럴 염려가 없을 수도 있지만, 결국엔 '지인들의 연락처'를 척척 눌러서 연락하지는 못한다. '검색기능'이 너무 익숙해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다 보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는데, 이 책은 '거꾸로' 생각을 해보란다. '처지를 바꾸서 생각해보기'는커녕 '내 처지조차 생각해보지' 않는데 익숙해져버린 요즘 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일 수도 있겠다.

  허나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해보았을 것이다. '내 처지'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해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전문용어(?)로 '배려'라고 한다. 이 책에는 8명의 명사들이 나름의 생각을 '뒤집어서' 펼쳐보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도를 해보았다. '승자독식', '공정무역', '과학기술', '생명', '시', '공동체', 그리고 '평화'에 관한 각각의 편견들을 한껏 뒤집어 보았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 볼 때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뒤집힌 세상이 불편할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를 위해서 또 한 번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려'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인 것이다. 그런 '배려'가 전문용어인 까닭은 '그것'은 아무리 남발되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려' 받는 사람은 고마워하고, '배려'를 배푸는 사람은 박수를 받기 때문이다. 설령 그 '배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배려'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이자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2008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벌써 16년이나 지난 책이라서 '책내용'을 읽다보면 옛날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책이 신박한 까닭은 십여 년 전에 '미래예측'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 당시의 '미래'가 바로 지금의 '현재'인 까닭에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 당시에 '예상'했던대로 지금 이루어진 점도 있지만, 그 예측이 사뭇 달라지게 진행된 것도 있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불평등'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당시엔 '예측'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엔 '심각한 현실문제'가 되어 버린 '불평등'은 너무나 정확해서 놀랄 지경이었다. 이를 테면, 2008년 당시엔 '중산층의 몰락'을 위험하다고 경고했었는데, 2024년인 지금은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나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내용이다. 이 책은 '승자독식 사회'의 위기를 경고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위기가 '현실'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이젠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폐기처분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계층사다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회속에서 '경제적 계급사회', 즉 '새로운 신분제도'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자, 이렇게 몇몇 '소수'가 경제적 부를 독차지한 세상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99%의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족한 상태'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우스운 일이지만 '경제적 부의 불균형'이 벌어진 사회현실에 별로 불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 꽤나 많다. 오히려 좋단다. 소위 말하는 '하우스 푸어'들이 그 대표적이다. '아파트 공화국'인 현실에서 어떻게 '아파트 몇 채'를 손에 쥔 이들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에 대해서 자신의 부가 늘어난다는 착각(?)에 빠져 '내집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경제적 무능' 때문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자신들은 '경제적 유능(?)'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사회적 전반적인 문제를 오히려 '문제없음'으로 인식하고, 집값이 더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방관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오르는 '집값' 말고는 이들도 변변한 재산이 없는 형편이다. 대한민국 상위 1%라는 '재벌계급'에 낑기지도 못하면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부동산 재벌'이 될 것처럼 '승자독식의 세상'을 찬양할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이 '배려'라는 것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한민국 1%'만 만족스럽게 만드는 '승자독식'이 판을 치게 냅둘 것인가? '언제까지' 말이다. 현재의 2, 30대 청년들은 온통 불만투성이다. 사회는 점점 팍팍해지고, 비전은커녕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도록 깜깜한 세상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점점 물가는 오르고, 정규직 취직은 '뽑지를 않으니' 애초에 포기할 수밖에 없고, 비정규직이 되느니 알바나 뛰면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비극을 살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열정페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니' 따위는 헛소리나 나불거린다. '라떼'는 사절이다. 기성세대들은 그나마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청춘들은 '노력한 만큼 골병만 드는 암흑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정책은커녕 '실업급여'마저 '시럽급여'를 받아먹는다며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퍼붓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앞서 말한대로 '생각'이란걸 하지 않기 때문인 듯 싶다. 정보의 바다를 넘어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지만, 정작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엄지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습관적'으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엄지를 놀려서 '시선'을 사로잡는 미디어들을 보면서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 각양각색의 미디어를 보면서 '생각'이란 걸 해보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그 생각에 '진입'하기도 전에 넘겨버리기 바쁘다. 그러니 '거꾸로' 생각해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온통 불만투성이라고 투덜거릴 뿐이다.

  변화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온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태클을 걸어주면 '땡큐'다. 나는 거기에 수백만 가지 '반박'을 날려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법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는 '긍정에너지'는 현대인들의 눈에 '미친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론 '미쳐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왜냐고?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각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미쳤다. '강대국'이란 이유로 '주변국'을 간섭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펴는가하면, '납치'를 당했으니 '테러집단'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학교나 병원, 심지어 '유엔'일지라도 대량살상무기를 터뜨리고 보는 '피의 보복'이 당연하다고 나불대고 있다. 또한, 핵오염수를 자국내에서 처리하는 것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바다에 '걸러서' 버리겠다는데도 소위 강대국이란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위험하다고 증명되지 않았으니 '안전'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해도 아무도 막으려 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끔찍한 만행들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자칭 선진국들의 방관'은 이미 도를 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남'이 해결해주겠지라면서 넋을 놓고 기다리면 될까? 택도 없는 소리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맘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돼! 아무리 납치를 당한 처지라고 해도 '테러단체'만 골라 잡아야 곱게 봐줄 수 있지 마구잡이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향해 폭력을 저지르면 누가 '응원'해줄 수 있겠어.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네가 저지른 폭력만큼 너도 똑같이 당하는 날이 반드시 올꺼야. 피의 보복은 언제나 그랬거든! 핵오염수가 그렇게 안전하다면 너희 식수로 쓰라고 말했잖아. 그 오염수를 쬐끔 '누출'했을 때 질색하고 난감해하던 모습을 보니 결코 안전해보이지 않더만. 그런데도 또 방류하겠다고, 더 많이 방류하겠다고?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지 않겠니!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왜 말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진 않다. 그저 '생각'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할 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혼자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아리가 잘 울리는 '환경'이 있는 법이다. 나의 외침에 '공명'이 울려서 여기저기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다. 만약,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을 경우, 그런 때가 찾아왔을 경우에 내가 외치지 않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나'라도 계속 외치고 있어야 한다. 나의 외침이 '공허'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화답'이 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뭐, '희망고문'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변화를 바란다면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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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4
베르길리우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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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네이스>의 줄거리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뒤를 이어 트로이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3부작'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리스인인 호메로스에 의해 기원전 8세기에 쓰인 작품이며, <아이네이스>는 로마인인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기원전 1세기에 쓰인 작품으로 엄연히 말하면 전혀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도 세 작품은 교묘하게 줄거리가 이어진다. 그 까닭은 바로 <아이네이스>를 쓴 목적이 '로마의 건국 이야기'에 신묘한 힘을 덧붙이기 위한 '밑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베르길리우스에게 '건국신화'를 한 편 쓰라고 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이를 위해 마지막 필력을 다하다 병에 걸려 '미완성'인채로 전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직전에 '미완의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불에 태우지 말고 발표하라 명령을 내린 덕분(?)에 오늘날까지 '전 12권' 모두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베르길리우스는 평생 호메로스를 흠모했기에 그의 작품을 본따서 <아이네이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이 <아이네이스>가 로마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그때까지도 덜 알려졌던 '호메로스'도 덩달아서 널리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베르길리우스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던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에서 서술자 단테를 지옥으로 데리고 안내를 맡은 이가 베르길리우스였다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단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거의 모든 영웅들이 죽어가는 전투에서 가족과 함께 떠나라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충고를 받고 온가족과 그를 따르는 '트로이인 생존자들'과 함께 정처없는 항해를 떠난다. 이렇게 아이네이아스가 떠나는 긴 항해는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 올랐던 이야기 <오디세이아>와 정말 많이 닮았고, 아이네이아스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라틴인들의 땅(이탈리아)'에 도착하고부터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일리아스>와 꼭 닮았다. 하지만 완전 판박이로 베낀 것은 절대 아니다. 왜냐면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분노와 복수'다. 그런데 <아이네이스>의 주제는 '로마 건국'이다. <오디세이아>의 주제는 '생존과 귀향'이다. 물론 <아이네이스>의 주제도 '생존'이긴 하지만, 그 생존 목적이 바로 '로마 건국'에 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애초에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아이네이스>를 썼기 때문에 '로마 건국'을 주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초의 황제가 등장할 자신의 조국이 고작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들'에서 유래되었다는 볼품 없는 건국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그보다 훨씬 더 신비하고, 신묘한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아들'이 로마 건국의 시조라는 썰을 풀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로마명 '베누스')'다. 또한 베르길리우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우라노스의 '거시기'가 아닌 '제우스의 딸'로 못을 박았다. 이로 인해 로마 건국의 시조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이지만, 그 로물루스의 조상이 트로이인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이며, 아이네이아스의 엄마는 여신 '아프로디테'이고, 그 여신의 아버지가 바로 '제우스'라는 점을 밝힌 셈이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은 '제우스의 후손'이 건국을 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아이네이스>의 골자 되겠다. 어쩌면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 현지 답사까지 하면서 '제우스의 후손'인 점을 더 명확하게 꾸미려 했으나, 여행중에 걸린 병이 악화되는 바람이 그 뜻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그렇게 '미완'으로 남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완의 유작으로도 로마제국이 여신 아프로디테의 후예가 세웠다는 정설(?)을 만들어냈으니 그 목적은 '완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아이네이스>는 '여신들의 전쟁'이라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온갖 모험과 전쟁은 '인간의 몫'이었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목숨을 잃은 것은 바로 '여신들의 끝없는 다툼'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신이 바로 '헤라'와 '아프로디테'였다. 그리고 두 여신이 다투게 된 까닭은 바로 '파리스의 심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말이다. 불화의 여신이 결혼식장에 던져두고 간 '황금사과'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세 명의 여신 앞에서 누구에게 황금사과를 줄 것인지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라를 뽑으면 '최고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아테나를 뽑으면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었으며, 아프로디테를 뽑으면 '최고의 미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스는 '최고의 미녀'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헤라와 아테나는 아프로디테와 '미모대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아프로디테'가 하는 일마다 딴죽을 걸기 일쑤였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전쟁의 패배로 '트로이'는 멸망하게 되었고, 그후 '트로이인들'은 거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트로이인에 대한 아프로디테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그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는 <일리아스>의 격렬한 전투속에서도 여신의 도움으로 번번히 살아남게 되었고, '트로이 목마'로 인해 끝내 멸망에 이른 트로이 성에서도 무사히 탈출에 성공해 '로마건국'이라는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갖은 모험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허나 아이네이아스의 고난은 곧 '여신들의 전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헤라는 아이네이아스를 죽이고 싶었고, 죽이지 못한다면 생고생을 시켜야 속이 풀렸으며, 위기나 고난에서 벗어나는 꼴을 보기만해도 화가 치밀어서 '또 다른 저주'를 퍼부으며 아이네이아스와 그 일행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맞보게 한다. 허나 그럴 때마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심지어 제우스에게도 찾아가서 자기 아들 살려달라고 확답을 받아냈고,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를 찾아가 최강의 무구를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포세이돈과 하데스에게까지 달려가 '아들의 안위'를 봐달라고 통사정을 할 정도였다. 어렵사리 이탈리아에 도착하고서 주변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질 때에도 어김없이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안배하며 '로마건국'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쉼없는 사랑을 퍼부어 준다. 물론, 전쟁의 막바지에는 제우스의 명령으로 모든 신들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 오직 아이네이아스만의 힘으로 적들을 제거하고 '건국'을 완성하지만, 그 전에 이미 '아프로디테'가 거의 모든 것을 다 안배한 뒤에 벌어진 일이었을 뿐일 정도였다. 그만큼 여신들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신들의 전쟁'을 슬며시 벗겨내고 읽으면 '한 편의 역사서'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과정이 세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네이스>는 당시 로마인들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신들에 의해 운명적으로 '건국'될 수밖에 없었던 조국 로마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아이네이스>를 로마 건국의 '당위성'이란 주제로 읽어야만 하는가? 독자는 나는 '로마인'도 아닌데 말이다. 더구나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을 뻔히 아는 정황에서 '승자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 읽어야만 할까?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 책 <아이네이스>를 오늘날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어야만 할까? 애초에 '이야기'는 만들어질 뿐이다. 바로 '목적'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순수'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의 시조를 '트로이'에서 찾았다. 로마는 '신화'조차 그리스에서 빌려왔다. 그러니 '시조'를 빌려오는 것도 그리 어색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들이 사랑했던 '그리스'와 '트로이'에서 각각 '신화'와 '신조'를 빌려와서 '균형(?)'을 맞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들의 조상을 '트로이'에서 왔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트로이인'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그것이 '로마인'이 갖춘 포용력(?), 관대함(?)의 표상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장점을 부각하지 않고, 배울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포용하는 관대함으로 일관하였더랬다. 그리고 그런 장점을 '로마'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나타냈다. 그렇게 로마인들은 순수한 목적으로 '배타성'을 배제하고 배울 것을 확실히 배우며,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미덕'을 갖춰나갔다. 그런 로마인들의 장점이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를 잘 알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책을 널리 반포하라 명령했던 것이고 말이다. 물론, 로마는 '황제정'으로 바뀐 뒤에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알았던 '순수함'을 잃고, 스스로 최고라는 생각에 너무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들더니 끝내 '배타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타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이다. 그렇게 로마는 <아이네이스>로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망해갔다. 그 정점을 이룬 '책'을 읽으며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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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듄 그래픽노블 2 - 무앗딥 Muad’Dib 듄 그래픽노블 2
프랭크 허버트 지음, 라울 앨런 외 그림, 진서희 옮김, 브라이언 허버트 외 각색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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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리뷰에 이어 <듄 그래픽노블 2>의 줄거리는 레토 공작 사후에 하코넨 병사로 가장한 '사다우카(황제의 군대)'의 공격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폴 아트레이데스와 레이디 제시카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폴이 프레멘 전사와 결투를 벌여서 승리를 거두고 '무앗딥('사막쥐'라는 뜻을 지녔지만, 프레멘들의 전설속 구원자의 이름이기도 함)'으로 거듭나고, 제시카는 프레멘 종족의 '대모'에 의해 시험을 받지만 극복해내고 프레멘들의 새로운 대모가 되어 두 사람 모두 프레멘 무리에 합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아직 3권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24년에 '출간예정'이라고 하니, 영화 <듄2>가 개봉하는 시기에 맞춰서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듄>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한 법이다. 이번엔 '프레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프레멘은 모래로 이루어진 행성 '아라키스'에 적응해서 살아남은 종족이다. 비록 '스파이스'로 가득하여서 엄청나게 값비싼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생명의 원천인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이라서 낮과 밤의 일교차를 이용해서 얻는 '이슬'을 한두 방울 모아서 하루를 연명하는 매우 척박한 곳이다. 그래서 프레멘에게 '사막복'은 절대적이다. 프레멘이 만든 사막복을 입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증발하는 수분을 '집수기'에 모아서 다시 수분보충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막복을 제대로 입고 있다면 하룻동안 소비하는 물의 양은 '땀 한두 방울' 정도일 정도다. 그래서 프레멘은 자신들이 손수 만든 사막복을 입고서 '사막횡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듄'의 모래사막에는 '모래벌레'가 산다. 이 모래벌레가 어떻게 생겨나고 살아가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허나 거대한 모래벌레는 사람이 만든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하다. 그리고 모래벌레는 사막을 '이동'하는 인위적인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개걸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덩치가 웬만큼 커지면 그 어떤 무기로도 죽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모래벌레를 '프레멘'은 적절히 이용하며 심지어 '탈것'으로 쓰기도 한다. 이렇게 모래벌레를 프레멘 전사들이 '탈것'으로 이용하는 장면은 3권에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물론 무앗딥이 프레멘 전사의 우두머리가 되어 하코넨과 사다우카와 대결하는 장면은 압권일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이렇게나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이니 '프레멘'은 자연스럽게 물을 소중히 여기고 다룬다. 그래서 가장 존경한다는 뜻으로 상대에게 '침'을 뱉거나, '눈물'을 흘리면, '나의 물'을 아낌없이 '나눠준다'는 의미로 쓰여서 성스러운 행위로 여기는 것이다. 허나 이렇게 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마냥 좋은 모습으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프레멘 전사들은 '죽은 사람'에게서 물을 모조리 채취하고 남은 빈 껍때기만으로 장례를 치룬다. 허나 그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물을 낭비하는 행위'에 속하므로 그냥 내버린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람의 몸에 70%가 수분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물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주검까지 매장이나 애도를 하지 않고서 '수분 채취'만하고서 나머지는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미개하고 야만스런 풍습이 아닐 수 없다. 때에 따라서는 '혐오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프레멘들은 '물의 맹약'이 무엇보다 우선일 수밖에 없다. 물이 흐르는 곳이 하나도 없는 '듄'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한 방울의 물'이라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레멘들이 이토록 물을 아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프레멘들이 그간 모은 물은 상당한 양이다. 바위틈 깊은 곳에 호수처럼 깊게 물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많은 물을 모았지만 프레멘들은 결코 '한 방울의 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왜냐면 먼 미래에는 이렇게 모은 물로 사막 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을 길러내서 풍요로운 대지를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프레멘들은 '그날'이 오길 고대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렇게나 물이 절대부족한 행성을 그려낸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물이 풍부한 환경'에 젖어서 '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인류에게 뼈저린 각성을 일깨워주고, 그 소중함을 애써 모른 체하며 '생명의 원천'을 오염시켜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싶다. 이제 지구도 머지 않아 '아라키스'와 닮은 꼴로 바뀌고 말 것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사막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으며,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가 '생명의 원천'으로 쓰고 있는 '담수의 양'은 고갈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하수는 펑펑 써서 곳곳에서 '싱크홀'이 생겨나고 있으며, 극심한 기후변화로 인해 홍수와 가뭄이 무작위적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극지방의 빙하는 거의 다 녹아서 '맨땅'이 드러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빙하가 있던 자리에 식물이 자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엄청 따뜻해졌다는 증거란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담수)이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다. 물론, 바닷물을 '담수화 장치'를 거쳐서 깨끗한 물로 바꾸어 마시기도 하고 농업용수로 쓰기도 하고 있긴 하다. 그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을 오염시키면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경각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큰일이다.

  암튼, 프레멘들을 보고 있으면 '지구의 미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황제를 비롯한 대가문들은 수많은 영지를 통해서 얻은 수익으로 '모든 것'을 누리고 살고 있는데 반해, 이들의 지배를 받는 프레멘들은 대가문들의 시중이나 들면서 그들이 '버린 물'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바닥에 엎드려 마른 걸레로 물기를 훔쳐내며 감격할 뿐이다. 이런 모욕적인 처사는 그마저 '황공'할 따름이다. 황제와 하코넨들이 프레멘들의 것을 약탈하고, 프레멘의 노동을 약탈하며, 프레멘의 목숨마저 '하찮게' 여기며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구인들의 먼 미래도 '프레멘'과 다를 것이 없겠다 싶다. 몇몇 소수만이 '모두'를 지배하는 세상이 판을 치는 먼 미래의 지구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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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듄 그래픽노블 1 듄 그래픽노블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라울 앨런 외 그림, 진서희 옮김, 브라이언 허버트 외 각색 / 황금가지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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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키스. '듄'이라고도 불리는 모래행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새주인이 찾아온다. 공작가문인 '아트레이데스'가 남작가문인 '하코넨'의 뒤를 이어 아라키스를 영지로 삼게 되었다. 물론 '사담 4세'라 불리는 황제의 재가를 받아서 아트레이데스의 레토 공작이 정식임명되긴 했지만, 공작으로서는 황제조차 믿을 수 없는 처지이다. 왜냐면 아라키스에서 생산되는 '스파이스'가 엄청난 이윤이 남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하코넨을 이용해서 아트레이데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선심을 쓰듯 아라키스, 즉 '듄'을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욕심이 난다면 황제가 자신의 권력과 권위로 '듄'을 독차지하면 될 것을 왜 복잡하게 '줬다가 빼았느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최고권력자가 혼자서 독식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면 괜한 '반발심'만 키우기 때문에 하사하는 척하면서 온갖 이권은 황제가 차지하고, '황제의 몫'까지 챙기느라 영주였던 '하코넨'은 듄의 사람들을 혹사시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을 착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착착 착취를 해오던 것까지도 눈치를 보게 될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국 안에서 평판이 좋은 편인 '아트레이데스'에게 듄을 새로 하사하고서 '하코넨'과 짜고서 공작을 암살해버리면, 다시 황제에게 엄청난 이득을 챙겨줄 '하코넨'이 다시 듄을 재점령하는 방식을 취하려는 '감춰진 뒷배경'을 이해하면 <듄>의 줄거리가 술술 읽히게 될 것이다.


  암튼, <듄>의 첫 장면은 물이 풍부한 '칼라단 행성'에서 모래투성이인 '듄 행성'으로 이주하는 아트레이데스의 분주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픽노블'에서는 그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펼쳐지기 때문에 '초심자(입문자)'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듄>의 매력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를 관람한 분들이라면 더욱더 생생할 것이지만, 앞서 설명한 뒷배경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과거의 독자들처럼 '읽고 또 읽고'서야 겨우 머릿속에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그려낼 수 있는 노고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면에 이번 '그래픽노블'은 그런 불편함을 싹 해소하는 면에서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의 주인공 '티모시 살라메'는 영화에서 감상하시고, 폴 아트레이데스에 집중해보자. 훗날 '퀴사츠 헤더락'이라 불리며 모래행성의 주민 '프레멘'을 이끌고 황제와 대결해서 승리를 거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운명인 아이다. 전형적인 영웅 등장의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태생부터 영웅이 될 자질을 타고났으며, 그렇기에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깨우치고, 적절한 때가 되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며, 그 위기 속에서도 기적과 같이 살아남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고, 숙명적인 적들을 처지하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꿈꾸던 미래를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다. 어찌보면 이런 '영웅의 탄생'이 전체 1부의 내용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듄 그래픽노블 1권>에서는 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는 순간까지 보여준다.


  한편, <듄>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설'과 달리 '그래픽노블'에서는 그 공부에 해당하는 '용어해설'이 빠져 있다. 그래서 '그래픽노블'만 읽은 초심자라면 뒷배경의 전반적인 이해가 힘들 수도 있다. 이는 '영화'만 관람한 관객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소설'은 필독이다. 그밖에도 부수적으로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트레이데스 VS 하코넨'의 갈등양상일 것이다. 왜 이 두 가문은 숙명적으로 싸우기만 하는가 말이다.


  사실, 두 가문은 '베네 게세리트'라는 종교집단에 의해 '하나의 가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미 섞여있는 상태다. 왜냐면 두 가문의 남자들이 대부분 '베네 게세리트 교단' 출신의 여자들과 혼인을 한 상태이고, 이들이 낳은 딸은 어김없이 두 가문의 남자와 혼인을 하니, 두 가문을 따로 구분할 유전적 개별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쓰일 당시에는 '유전학'이 그닥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대가문의 혈통'은 오직 남자쪽으로만 이어져내려 온 탓에 '하코넨'과 '아트레이데스', 그 밖의 대가문들로 구분할 뿐이다. 따라서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넨'이 대립하는 까닭은 '두 가문의 뿌리깊은 성정'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하코넨'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족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품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자신들의 명예가 신하와 부하들의 안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서, 꽤나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문의 일원들을 관대하게 통치하는 품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듄' 행성을 통치하는 방식도 차별적인 것이다. 하코넨은 듄의 주민들인 '프레멘'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쓰레기를 보듯 하찮게 푸대접을 한 반면에 아트레이데스는 '프레멘'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들을 지배하기보다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대우해주는 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프레멘은 레토 공작의 아들인 '폴 아트레이데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이며, '공통의 적'인 하코넨과 황제를 향해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대해 물리치게 된다.


  1권에서는 이쯤하고 2권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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