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이야기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3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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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끔찍한 신탁 때문에 버림 받은 아이가 끝내 '정해진 신탁'대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정해진 운명'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통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일설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현실보다 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적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저런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닥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픈 이야기를 통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거침으로써 삶의 활력소를 되찾을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펑펑 울고 나면 한결 속이 시원한 느낌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비극은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고, 비극이 덜할 수도 있어야,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할텐데, '한 번 정해진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전개에 어쩌라는 거냐는 반문이 끝없이 되묻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신의 뜻 앞에 '순종'하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순종'한다면 끔찍한 운명은 피할 수는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면 '순종'하는 의미가 무색해질 뿐이잖은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적당한 교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도덕적인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는 했다.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전의 축약본'이긴 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만 수록된 책들과는 달리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를 모두 수록되어 있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단독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으니, 이 책이 아니고서는 3부작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책도 바로 이 책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과연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자식까지 낳는 반인륜적인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친아버지가 오이디푸스를 어릴 적에 내다버렸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자신을 길러진 '양부모'를 친부, 친모로 알고 자랐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은 신탁,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이란 신탁을 받았기에 양부모 곁을 떠나 방랑을 하던 차에 그만 '친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죽이고 만 것이다. 그 사이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되었다. 괴물 스핑크스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서 말이다. 그렇게 영웅이 되어 홀로 된 왕비,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오이디푸스는 결혼을 하고 왕과 왕비가 되어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런데 자식을 넷이나 낳는 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는데도 불운한 일들이 왕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왕국내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란다. 너그럽고 현명한 오이디푸스는 그 부정한 사람을 찾아 왕국에 다시금 평화를 가져다주려 했는데, 그만 그 부정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슬픔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묻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오디이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테베의 영웅이 된 뒤에 자신이 '테베의 왕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는 일을 제정신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의 친부, 친모도 자신들이 죽여 버린 자식이 장성해서 되돌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죄에도 마땅히 벌을 내려야만 하는가? 독자마다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다. 물론 이유도 다를 것이고 말이다.

  다음 이야기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와 큰 딸 안티고네가 오랜 방랑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속죄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난제'가 시작된다. 바로 테베의 왕위 자리를 놓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전쟁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크레온와 짜고서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첫째 아들을 왕국에서 내쫓고 왕위에 오른다. 이에 불복한 첫째 아들은 '외국의 용병'을 모아서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쳐들어가고, 둘째 아들과 숙부는 이에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운한 신탁 하나가 또 등장하게 된다. [둘 중 아버지를 모시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내다버린 아버지를 모셔오려는 두 아들의 눈물 겨운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결론은 양쪽을 모두 돕지 않고, 제3자의 힘(테세우스 왕)을 빌어 두 아들 모두 벌을 주는 것이었다. 이때 독자들은 또다시 난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들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말이다.

  부모의 처지에서 곤경에 처한 자식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가? 그런데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쯤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자식을 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만, 그 자식들이 애초에 아버지를 내다버린 원죄가 있다면, 괘씸해서라도 돕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꽤씸하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어찌 두 아들을 벌주기 위해서 '제3자(테세우스, 이웃의 왕)'에게 이득을 내어줄 수 있겠느냔 말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이디푸스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돕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인 판단이란 말인가?

  마지막 이야기 <안티고네>는 더 끔찍하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결전을 벌인 끝에 모두 죽고 숙부 크레온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테베를 지킨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대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 반면에,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외국군'까지 끌고 와서 조국을 공격한 반역자였기에 그의 주검을 들판에 방치하고서 그 누구라도 주검에 손을 대거나 묻어주거나 슬퍼한다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새로운 국법을 정해버린 것이다. 허나 아무리 국법이라고 하지만 '혈육의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기에 큰 딸 안티고네와 둘째 딸 이스메네가 장례식을 대신해 오빠의 주검 위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이에 숙부 크레온은 두 여인을 국법으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해버린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그건 너무나 과한 처사라며 사형을 면하게 해주라고 권하지만, 크레온은 끝끝내 "국법은 지엄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끝내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바위로 입구를 막아버리는 형벌을 시행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사이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사형을 멈춰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안티고네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고야 만다. 하이몬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레온의 아내도 덩달아서 자살을 해버리니, 그제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과격했고, 용서를 하는 것도 너무 뒤늦었다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나라가 정한 법'이 우선인지, '자연이 정한 법'이 우선인지 둘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연이 정한 법'이란 '혈육의 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도덕적 관습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국법'은 반드시 지켜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왕이 정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의 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동생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동생이 있다면 국법에는 없더라도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욕해야 마땅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티고네는 과연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동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마저 가로 막는 '국법'이 과연 온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고 국가가 정한 법을 함부로 어기는 짓을 방관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사사로운 이유로 국법을 어긴다면 애당초 국법을 지킬 까닭도 없을 것이다. 어떤가?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운명'은 신이 정하는 것이지만 '판단'은 인간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끝없이 묻고 답을 해도 '정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판단'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 지혜로운 판단에는 수많은 '경우'가 달라붙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때로는 "이런 경우일지라도 요로케..." 해야 마땅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만 하고 말이다. 그 질문이 많고,  고, 결정적으로 '남'을 위한 결정을 위한다면, 그 질문 끝에 내 '단'은 더욱더 위대해질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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