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세계사 - 고대 로마부터 21세기 실리콘밸리까지 인류사를 결정지은 기업의 탄생과 진화
윌리엄 매그너슨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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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VI / 한빛비즈 143번째 리뷰] 기업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 '이윤추구'라고 답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쉽게 말해 '열심히 일해서' 남 좋은 일하고, '뼈 빠지게 일해서' 남에게 다 퍼주는 기업은 오래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해 자본주의체제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명언으로 삼아 무한대로 잡았고, 공산주의체제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들이밀며 굶어죽지 않을 만큼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세계시장에서 공산주의는 패배했다. 그리고 당연히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그렇게나 '경고'하고 '경계'했는데도 그 문제점은 제동장치를 잃어버린 것처럼 '돌진'을 했고, 그로 인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폐해를 선보이며 스스로 문제점을 만들어내며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결국 기업의 원초적인 목적인 '이윤추구'에 제동을 걸 무엇이 필요하다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된 셈이다.

  이 책의 맺음말에는 자본주의체제의 기업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8가지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국가를 위태롭게 하지 마라', 둘은 '장기적으로 생각하라', 셋은 '주주와 공유하자', 넷은 '경쟁하라, 공정하게', 다섯은 '직원들을 제대로 대우하라', 여섯은 '환경을 파괴하지 마라', 일곱은 '모든 파이를 혼자 다 가지려 하지 마라', 마지막은 '너무 빨리 움직이지 말고 너무 많은 틀을 깨지 마라'다. 제시된 제목만 보이도 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은가? 그렇다. 오늘날의 기업이 너무나도 '이윤추구'에 매몰된 바람에 '비도덕적/비윤리적인 기업'이 양산되었고, 그로 인해 작게는 한 나라의 경제가 '기업'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으며, 크게는 지구 전체가 '기업'에 의해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거기다 기업의 경제활동으로 인해 '한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조차 묵살되는 현장을 우리는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바른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기업에 '생계'를 맡겨 놓은 처지라서, 차마 기업의 나쁜 행태에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기업에 종속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곤 한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기업은 '사회악'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기업,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기업을 운영하는 '나쁜 경영자'가 진짜 원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업에서 일을 하는 '종사자'들은 착한 경영자보다 나쁜 경영자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나쁜 경영자가 '더 많은 이익(성과)'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쁜 경영자를 핑계(?) 삼아 자신들의 소소한 이익추구를 정당화시킨다. 최소한 자신들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면서 말이다. 또한 기업(주식회사)에 자금을 지원한 '투자자'들도 자신들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나쁜 경영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왜냐면 자신들은 기업의 '주인(주주)'이면서도 경영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더 큰 이익'을 선사하는 경영진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그런 기업의 행태로 인해 한 사회와 국가, 그리고 지구 전체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업의 '이윤추구'에 적절한 제동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제동장치보다 더 필요한 것이 바로 '기업 윤리'다. 이는 비단 '기업가'에게만 요구하는 자질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한 '도덕'과 '윤리'적 규범이 있어야 하고, 이것에 하등 상관치 않는 '짐승'같은 인간들에 대해 적절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선량한 인간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량한 인간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도 망가지고, 든든한 울타리를 제공하는 국가시스템도 허물어지게 되며,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지구환경까지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윤추구'를 하는 기업에 적절한 '윤리도덕'이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러나 기업의 이윤추구에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윤택한 삶을 가져다주는 '경제적 풍요로움'에 한 번 맛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최대한의 이윤추구'에 정당성을 부과하려 들기 때문이다. 거대 자본, 그 자체로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주는 '은행업(메디치 은행)'과 '주식회사(동인도회사)'를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취한 것이 아니라 '주거래자'에게까지 거대 자본의 편리함과 윤택함을 선사했다. 하지만 '기업의 오너'가 한순간에 타락하게 되자 메디치 가의 몰락과 함께 국가(피렌체)의 운명까지 멸망에 이르게 하였고, 동인도회사의 타락과 함께 인도제국은 단박에 '식민지노예'가 되어 버렸고, 이를 수수방관한 대영제국은 '전범국가(?)'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최대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 가장 악랄한 수단까지도 허용해 버렸는데, 바로 '독점기업(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등장이고, '대량생산체제(포드 자동차회사)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각각 시장경제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으며, 동시에 끔찍한 '악영향'을 가져왔다. 독점은 경쟁상대가 없는 상태이니 '무한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대량생산으로 '단가'를 낮춰 다른 경쟁사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왔지만, 그로 인한 '근무환경'은 저질적이고 열악하게 바뀌며 인간을 '컨베이어밸트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어디 이뿐인가? 하나의 국가보다 더 큰 '다국적 기업(액슨)'이 만들어지자 국민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관계자조차 '기업 오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까 노심초사하게 만들었고, '기업사냥꾼(KKR)'들의 등장으로 거대한 기업조차 '상품'으로 전락해버려 사고 팔아 넘길 수 있게 되자,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줄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모두 '기업의 이윤추구'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피해 사례'다.

  과연 자본주의는 이러한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거대 기업은 '최대한의 이윤추구'를 통해서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아직까지는 없는 듯 싶다.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된 이들에겐 '게으름(나태)'이라는 낙인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비난을 퍼붓곤 한다. "그러길래 부지런히 일해서 풍요롭게 살아야지. 왜 '게으름'을 피워서 가난해졌느냐?"말이다. 거기까지만 해도 비참할 지경인데, "가난은 나랏님(엄청난 부자)도 고치지 못하는 '망국의 병'이니, '각자도생'은 기본옵션인 거 알고 있지?"라며 비아냥거리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복지정책 같은 것은 하등 불필요한 것이라고 망발을 아낌없이 퍼붓는다. 어차피 '개돼지'들에게 희망 따위는 사치라면서 말이다.

  이러한 비도덕적인 '기업윤리'와 부도덕한 마인드를 지닌 '기업오너'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할까? 그래서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재미없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기업이 타락하지 않도록 '소비자의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결국 거대 기업도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판매'를 해야 이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대 기업이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짓을 한다면 과감한 '실력행사'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 개개인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거대하게 '뭉친' 소비자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즉,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불매운동' 같은 것이 있다. 비윤리적인 '기업제품(갑양유업)'에, 부도덕한 '기업오너(대한항콩)'에 소비자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이런 실력행사가 '기업오너'에게 타격을 주어야지 '그 밑선'에 폐해를 끼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결국 '없는 자들끼리의 다툼'이 되고 마니까 말이다. 그리고 정작 '기업오너'들은 오만하게도 '찻잔속의 폭풍'으로 취급하며 호로록 해버리고 말 것이 틀림없다. 이를 위해 '범국가적인 실력행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 전세계에 걸쳐 있는 '다국적 기업' 같은 경우에 한 국가에서 제재를 가해봐야 그냥 '철수'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나라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도, 정작 '다국적 기업'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럴 때도 전세계적인 '올곧은 소비자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해, '소비자 연대'가 필요하단 말이다. 다국적 기업이 특정 국가에서 '횡포'를 부린다는 소식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꼭 필요한 일이다. 기업의 이윤추구가 지구마저 파괴하는 '무분별함'을 보여주는 마당에 가만 냅둘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착한 기업'을 찾아내는 노력도 함께 필요하다. 지구를 지키고, 국가를 안정시키며,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는 '착한 기업'을 발굴해내 돈쭐내줘야 한다. 이런 긍정적인 사례가 쌓이고 또 쌓여서 모든 기업이 착해지기 위해 저마다 노력하는 '기업생태'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가장 살기 좋은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그런 시대가 없었다. 왜냐면 소비자가 '연대할 수 있는 마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전달할 메신저가 없던 시대에는 기업들의 횡포가 극에 달해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타락한 기업 때문에 '국가'조차 망해서 없어질지경에 이르러도 어디 하소연할 구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중계'처럼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생긴 것이다. '페이스북'이 그렇다. 물론 이것이 '언론'도 아니고, '사회고발' 기능이 탑재된 것도 아니다. 그저 '메신저'일 뿐이다. 전세계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는 메신저가 '소비자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관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짜뉴스'를 선별해낼 수 있는 현명함도 갖춰야 한다. 뭐, 거대 기업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역량이겠지만 말이다.

  이 책 <기업의 세계사>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속에서 익히 알려졌거나, 혹은 감춰졌던 '기업의 진실'이 담겨 있다. 건실한 기업이 타락하는 순간 역사는 소용돌이 치기 시작한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경제사'였음을 잊지 않았다면, '경제 주체'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기업의 세계사'에도 큰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기업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면, '경제 주체'의 또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는 개개인의 '가계'가 해야 할 역할에도 눈을 뜨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 책이 바로 당신에게 그 안목을 선사할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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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만화로 보는 좌충우돌 몽골제국사 한빛비즈 교양툰 32
봉닭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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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V / 한빛비즈 142번째 리뷰] 몽골역사는 우리에게 생소하게 다가온다. 왜냐면 '기록(역사사료)'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는데도 현재의 우리에게 거의 잊혀버린 '비운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 무신정권과 조선건국 사이에 '고려 원간섭기'가 존재했던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면도 없지 않다. 우리가 전통혼례 때 신부가 입는 '활옷'과 머리에 쓰는 '족두리', 그리고 얼굴에 찍어바르던 '연지곤지'는 모두 몽골의 풍습에서 비롯되었고, 조선 군대의 행진 때 요란하게 들리는 '태평소'도 원래는 몽골의 군대에서 쓰던 악기였다. 원나라의 다루가치였던 '이성계의 군대'에도 자신의 참전을 알릴 때 바로 '태평소'를 울려퍼지게 했는데, 원나라 군대든, 명나라 군대든 이 '태평소' 소리를 들으면 기겁을 하고 싸우기도 전에 도망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벼슬아치', '양아치'라는 말도 원나라의 관직 '다루가치'의 '치' 또는 '아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알게 모르게 우리는 몽골에서 유래된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을 정도다. 참, '소주'를 빼먹었는데, 유통기한이 짧은 '막걸리'를 증류시켜서 '도수'도 확 높이고, 보존기간도 대폭적으로 늘릴 수 있었던 '소주'는 고려뿐만 아니라 조선사람들의 입맛도 사로잡아 오늘날까지도 한국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술로 인기를 끌고 있다. 소주를 만들 때 '소줏고리' 윗부분에 '이슬'이 맺히기 때문에 소주를 '이슬'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암튼, 우리는 이렇게나 '몽골'에 영향을 받았는데도 정작 우리의 '몽골제국'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중국인들이 몽골사람들을 낮잡아 부를 때 쓰는 '몽고'라는 단어를 아무 거리낌없이 쓰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어리석을 蒙'에 '낡고 고루할 古'를 써서 '비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일본인을 부를 때 '쪽발이'라고 부르는 격이다. 심지어 중국인들은 지금도 한국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꺼우리(고려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일본인이 한국사람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들은 모두 '고려사람'과 '조선사람'을 '이름, 그 자체'로 욕지거리로 만든 아주 야비한 짓이다. 요즘 말로 젊잖게 복수(?)를 하자면 "중국이 또 중국했네", "일본이 하는 짓이 늘 그렇지. 뭐!"라고 대꾸해주고 싶다. 그러니 우리 나라 사람들 만이라도 '몽고'라고 쓰지 말고, '몽골'이라고 제대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몽골사람들은 아직도 우리를 '솔롱고스'라고 부른단다. 몽골어로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이란다.

  그렇다면 '몽골제국'은 얼마나 큰 나라였을까?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넓은 영토'를 자랑하지만, 중국제국의 일부라고 우기고(?) 있는 '원나라'는 사실 '몽골제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영역이었다. 그리고 원나라 역시 '몽골제국의 지도자' 카안(대칸)이 지배하던 지역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 영토는 '몽골제국'의 초원지대 상단부만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몽골제국'은 거대한 '유라시아 지역' 거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몽골제국이 아니었던 곳을 표시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다. 서쪽으로 '헝가리', 남쪽으로 '중동', 동쪽으로 '만주'까지 지금의 중동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인도'를 제외한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거의 전역을 몽골이 차지했었고, 인도의 '무굴제국', 고려도 사실상 '몽골제국'의 영향하에 있었으므로 '유라시아 대륙' 전부가 몽골제국의 영역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광대한 지역을 단 한 사람의 통치자(카안)이 다스리던 나라가 바로 '몽골제국'이었다.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말이다. 이렇게나 강력했던 '몽골제국'이 불과 200여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페스트'라는 질병이 엄청난 양의 사람과 가축이 '이동'을 하게 되니, 지역풍토병이었던 '페스트'가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확산하게 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를 증명할 '확실한 증거'는 지금 찾는중이라고 한다. 워낙 사료가 태부족한 관계로 이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학술적 증거가 아직 부족한 셈인데, 현재의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 나니, '몽골제국의 흥망사'가 한 눈에 들어오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들게 된 것이다. 유럽이 페스트로 인해 전체 인구의 3/4이 줄어든 것처럼 '몽골제국'도 절반 이하로 줄었들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기후변화'로 추정한단다. 오늘날의 '고기후 데이터'로 14세기 무렵의 기후를 추정해보니, 농사를 짓기에 적당한 기후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른바 '소빙하기'라고 불리는 '이상기온'이 당시의 농업인구를 굶주리게 만들었고, 소와 말 등에게 먹일 '대초원의 풀'도 덩달아서 줄어들게 되니 '몽골제국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정치'도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카안의 수명'이 줄어든 것을 들고 있다. 쿠빌라이 칸의 후예들의 평균수명이 10세~30세였다고 하니, 이는 몽골제국 내에 '질병확산'과 '경제악화'가 전반적으로 폭넓게 퍼졌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황실의 건강상태가 이 모양이니, 몽골제국 내 백성들의 삶도 상상이상으로 열악했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안 좋은 상황은 제국 안에서 벌어지는 '내전'이 확전되는 분위기를 연출하게 되었을 것이다. 흔히 'ㅇㅇ한국(칸의 나라)'이라 불리던 '울루스' 사이에 갈등이 높아지면서 황실 간 갈등은 높아져만 갔고, 이런 내부의 갈등은 '외부의 침략'으로 제국은 갈갈이 찢기게 되었다. 이때 훗날 명나라 황제가 되는 홍건적의 우두머리 주원장이 등장하는데, 장강 이남의 강남 출신이었던 주원장이 '원나라의 남쪽'을 차지하고 지금의 북경(원나라의 대도)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원나라는 '북원'으로 밀려나고, 홍건적 떼거리의 일부가 고려 국경을 넘어 난리부르스를 치게 된다. 침략 이유는 다름 아닌 '원나라 사람들'이 대거 고려로 넘어왔기 때문이란다. 이들 '홍건적의 잔당'을 물리친 고려의 영웅이 바로 최영과 젊은 이성계였다. 그래서 최영은 깝죽거리는 명나라 군대를 만만히 보았던 것이고, 이성계도 조선 건국 이후 명나라 주원장이 깝죽거리면 "내가 직접 조선군을 이끌고 명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고려 말 '요동정벌'이 결코 불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몽골'과 관련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아쉬운 것은 이를 증빙할 사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집대성'한 역사서가 우리에게 너무 낯설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이 책 <만화로 보는 좌충우돌 몽골제국사>도 읽다가 의아한 대목이 많은 편이다. 아니 '몰랐었다'는 표현이 더 솔직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와 비교하면서 읽어나간다면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띄엄띄엄' 어색했던 역사적 흐름이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몽골제국사'를 쉽게 풀어준 글쓴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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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4 - 구음진경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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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V / 김영사 26번째 리뷰] <사조영웅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 등장한다. 바로 '곽정과 황용의 약혼'이다. 이야기 초반에는 '완안강과 목염자의 비무초친(무예로 베필을 구한다)'가 나왔다면, <사조영웅전>의 진정한 주인공인 곽정과 황용이 '운명적인 만남'에 이어 장인어른(동사 황약사)께 두 사람의 혼례를 약조 받게 되는 극적인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그것도 [구음진경]이란 절세무공비급이 동시에 등장하며 이야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구음진경]은 곽정이 여섯 살 무렵에 이미 등장했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이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이라는 악랄한 무공을 선보이며 이미 한 차례 등장했었는데, 이번에 그 [구음진경]의 전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무공을 '곽정'이 완벽하게 익히게 된다. 이로써 곽정은 '동사서독 북개남제 중신통'이라는 무림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실력이 크게 증진되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영웅 후보'가 성립된 셈이다.

  이제 본격적인 '무림고수'가 등장한다. 바로 '동사서독 북개남제 중신통'이라 불리는 다섯 명이다. '천하오절'이라고도 불린다. 각각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방위'에 다섯 명의 무림고수를 나열한 이름인데, 그 이름에서 그 인물의 성격까지 알 수 있다. 먼저 '동사 황약사'는 도화도의 주인으로 성격이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가 창안한 탄지신통, 낙영신검장, 난화불혈수, 옥소검법 등의 무공은 변화무쌍함과 동시에 초식 하나하나가 절정에 다달았다. 이런 절정의 무공뿐 아니라 머리도 똑똑하여 다양한 학문의 조예가 깊다. '서독 구양봉'은 서역 백타산의 주인이다. 이름 그대로 '독'을 다루는 능력이 타고나서 엄청난 수의 뱀을 다루며 음험한 기운을 내뿜어 <사조영웅전>의 '악역'을 자처한다. 그의 무공 중에 '합마공'은 몸을 움추렸다 한 방향으로 일격을 내뿜는 단순한 무공이지만, 그 내공의 응집력은 어마무시한 까닭에 '절대무림고수'조차 합마공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이겨내지 못할 정도다. 다음으로 '북개 홍칠공'은 이미 등장해서 곽정과 황용의 사부가 되었지만, 다시 소개하자면, 거지들의 우두머리로 '개방의 18대 방주'를 맡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무공은 '힘' 위주의 외가무공인 '항룡십팔장'이고 '곽정'이 물려받았으며, '대나무 막대기'를 무기로 삼은 '타구봉법'은 신묘한 기술로 개를 때려잡는 무공인데, 훗날 황용이 개방 방주를 맡게 되면서 홍칠공에게 전수를 받는다. 아직 '남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대리국의 황제'이며, '일양지'라고 하는 절세무공으로 천하를 들었다놨다하는 불세출의 무림고수이다. 마지막으로 '중신통 왕중양'은 전진교의 창시자다. 그에 대해선 잠시 소개를 미루고, '천하오절'에 대해 마무리하련다.

  '천하오절'은 앞서 말한 다섯 명의 무림고수를 일컫는 말인데, '화산논검대회'에서 무공의 우열을 가린 뒤에 불린 이름이다. 명색이 '대회'란 이름이 붙었는데, 마땅히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목적은 다름 아닌, [구음진경]의 소유를 정하려 했던 것이다. 대회는 7일 낮밤 동안 쭉 이어졌고, 다섯 명 가운데 '왕중양'이 가장 강했고, 나머지 네 사람은 서로 '무승부'로 끝맺었다. 그래서 [구음진경]은 왕중양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해적판'에서는 [구음진경]의 유래에 대해서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었는데, '정식 라이센스'를 받은 이 책에서는 그 유래를 밝혔다. 바로 '황상'이라는 도사가 5000권이 넘는 '도교'에서 유래한 경전을 집대성한 뒤에 저절로 엄청난 무공을 쌓게 되었는데, 그 무공과 맞대응할 수 있는 무림고수는 '명교(나중에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서역의 종파)의 사대천왕' 뿐이었는데, 황상은 혼자의 몸으로 중과부적이었으나 용케 살아남았고,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금 경전속의 무공들을 하나하나 되새겼는데, 그 수련기간이 무려 40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통한 '내공수련'을 겸한 탓에 황상은 오히려 늙지 않고 건강해진 반면에 황상보다 무공이 높았던 적수들은 이미 늙어 죽은 지 오래 되었던 터라 복수는커녕 허탈감만 느끼게 되었단다. 그렇게 '인생무상'을 느끼고 나서 자신이 쌓은 절세무공을 한 권의 책으로 써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구음진경]이었단다. 천하오절은 바로 그 무공비급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자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화산논검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왕중양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그는 천하오절 가운데 유일한 '실존인물'이다. 그는 '전진교'를 창시하였는데, '전진교'는 12세기 중국 도교 종파의 하나로, '금련정종'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왕중양의 제자에 해당하는 '전진칠자'도 모두 실존인물이다. 순서대로 '단양자 마옥', '장진자 담처단', '장생자 유처현', '장춘자 구처기', '옥양자 왕처일', '광녕자 학대통', '청정산인 손불이'다. 전진파의 도사들은 도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교, 불교, 도교'의 일치를 주장하며 교세를 확장했더랬다. 그중 옥양자 왕처일은 금나라 세종에게, 장춘자 구처기는 몽골 칭기즈 칸에게 초빙을 받아 '불로장생의 비법'을 강의하는 등 '남송시대'에 대대적인 유명세를 이끈 교파였다. 이후 윤지평, 이지상이 물려받은 교단은 원나라 헌종 때까지 흥하다가 '몽골제국'이 확장하면서 불교가 크게 흥했고, 불교의 위세에 위축되며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저자 김용은 이들 실존인물을 소설속 '정중앙'에 배치시켜 놓고 '구음진경'이라는 무공비급을 곁들여서 실제 역사와도 같은 '흐름'을 전개시키며 독자들에게 유쾌한 몰입감을 선사하였다. 이렇게 '실제 역사'와 '허구 소설'을 이어주는 역할을 '가상 인물'들로 연결시킨 것이다. 바로 왕중양에게 의형제 '노완동 주백통'이 있었다는 설정이다. 비록 왕중양은 오래 살지 못했지만, [구음진경]을 차지한 뒤에 그 무공을 취하지 않았다. 그가 [구음진경]을 차지한 까닭은 너무 강력한 무공이 세상에 퍼졌을 때, 부도덕한 인물들이 힘만 믿고 악행을 저지를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중양은 자신은 물론, 자신들의 제자에게도 '그 무공'을 배우고 익히지 못하게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왕중양의 유지를 받아 [구음진경]을 갖게 된 주백통의 실수로 세상에 유포되었고, 그 무공이 세상을 할딱 뒤집어 놓게 되었다는 스토리를 전개시킨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구음진경]의 무공을 최초로 전수받게 된 인물이 너무 착해서 탈인 '곽정'이라는 점이다. 물론 곽정에게 '구음진경의 무공'을 가르치다 본의 아니게(?) 무공을 익혀버리고 만 '주백통'도 엄청난 무공실력을 갖게 되어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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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 삼국간섭과 갑오개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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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II / 위즈덤하우스 32번째 리뷰]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조선에선 '동학도'들의 막바지 항거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 당한 뒤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도리어 일본군의 뒷배를 믿고 '동학도'들을 토벌하러 내려오는 '경군(조선군)'은 막강한 화력으로 쓸어버리고 만다. 이렇게나 막강한(?) 화력으로 애초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경군'을 보내 해산을 시켰더라면 일본군에 의해 그리 전쟁에 휘말리는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종은 '경군'을 보내지 않고 '청나라 원병'을 요청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흥선대원군'이 호시탐탐 경복궁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으로서는 '임오군란'의 참담함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흥선대원군'이 정말로 실력행사를 할 정도로 힘을 갖췄을까?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흥선군의 적손자인 '이용준'이 있었기에 고종으로서는 '경복궁 수비'를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동학도 토벌을 위해 경군을 내려보냈다면 흥선군은 보란듯이 '쿠데타'를 일으켜 경복궁을 포위했을 것이고, 고종의 반대세력(개화파)과 연합한 흥선군은 또다시 고종을 괴롭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흥선군은 '동학도'들과도 접선을 하며 고종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증거도 있었단다. 그렇기에 고종의 '청병 요청'은 피치 못할 호구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멍청함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외세의 힘'을 빌리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간단한 이치도 예측하지 못하고, 그저 '왕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이는 향후 '고종의 행보'를 보아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는 시점에서도 일본군에 순순히 붙잡히는 쪽을 '선택'했고, '삼국간섭'으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화'하려는 시도가 무산될 때에도 자신의 왕권이 보장만 된다면 '러시아의 간섭'조차 큰 문제가 없다고 본 듯 싶다. 어디 이뿐인가. 대한제국 시절 '만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국 논의가 공공연하게 진행되자 '보부상'에 힘을 실어줘서 집회방해를 일삼았고, 끝내 '독립협회'까지 해산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을 겪고 난리블루스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오직 '왕권 욕심'에만 매몰되어 다른 사안은 등한시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전제군주국가였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 파멸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상황을 뻔히 지켜보면서도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저 '외세의 힘'에 의지해서 권력의 끈을 놓치 않으려는 모습만 보여주었으니 실망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왕실의 무능'을 지켜보았던 덕분일까? 3·1만세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대한사람들은 '왕정복귀'가 아니라 '공화국 건설'로 마음을 모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일단락이 되고, 청나라는 패전국이 되어 치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러 일본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돌발상황이 펼쳐진다. 패전으로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청나라에 요구하는 일본군부를 향해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청일전쟁을 '종전'시키지 말고 이참에 청나라 패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이다. 3차례의 전쟁양상에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맛본 일본국민들은 아주 그냥 제대로 취한 것이다. 그래서 '만주'를 넘어 '요동' 찍고, '대만'까지 후루룩 말아잡숩고서 '북경'까지 진격을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숙원이었던 대륙정벌도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겨우 조약으로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시도를 원천차단 시키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렬한 응원까지 보태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일본국민들은 '일본정부'나 '군부'에 대해 마뜩찮게 보고 무슨 일이든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것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전환된 것이다. 그만큼 '청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자부심으로 작용했고, 이는 '문명국 일본'이 '야만국 지나(중국을 낮잡아 이르는 명칭)'를 상대로 단단히 혼쭐 내주었다는 뿌듯함까지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패전회담을 마치고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러 온 이홍장을 향해 한 일본청년이 총탄 저격을 한 것이다. 다행히(?) 이홍장은 총알을 비껴 맞았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문명국'이라 자랑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야만스런 짓을 하고 말았으니, 조약은 애초에 일본에 유리하게 작성되어야 했으나, 이로 인해 청나라가 '패전 조약'에 서명하길 거부하고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일본이 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 '난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 된다면 일본측에 유리하게 끝맺음을 할 수 있었던 조약조차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게 되고, 청나라의 결사항전에 대해 더 많은 전쟁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일본의 처지에서도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이홍장'에게 심심한 위로와 함께 쾌유를 비는 일본국민들의 염원까지 선보여야 했다. 그렇게 이홍장은 죽지 않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성사시키고 귀국했다. 이렇게 '청일전쟁'은 일본측이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할양(요동과 대만)을 받는 선에서 일단락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일본은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경험하게 된다.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던 계획이 차츰차츰 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홍장이 '시모노세키'로 떠나기 전에 러시아측 대표와 밀약을 주고 받았는데, 일본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는 '요동반도'를 일본이 뱉어내게 만드는 묘수였던 것이다. 이른바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다. 러시아는 연해주까지 영토를 넓히고서 '시베리아 철도'를 준공하며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로 '요동의 뤼순'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청나라를 돕는 척하면서 '요동'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으로 계획을 진행 시킨 것이다. 어차피 청나라로서는 일본에 내어주나, 러시아에 내어주나 피해를 보는 것을 매한가지지만, 이를 통해 '이이제이', 즉,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과 갈등관계를 일으켜 '어부지리'라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자 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청나라의 속셈은 애초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한편,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요동 뤼순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두 곳도 '일년 내내' 드나들 수 있는 항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반도'는 러시아가 놓칠 수 없는 이익이었다. 만약 조선 남쪽에 위치한 '거제도'에 러시아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만 있다면 일본을 견제하는 것을 넘어 태평양까지 언제라도 넘나들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선점하게 되니, 러시아로서는 조선이 우호적인 것이 한없이 반갑기만 한 것이었다.

  또다시 한편, 조선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군국기무처'를 통해서 강제로 개혁조치가 선행되었고, 이를 통해 '갑오개혁'과 '제1차 김홍집내각(갑오파)'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더욱더 자신들의 입김이 통하길 원했기에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철종의 사위, 갑신파)를 내세워 견제와 간섭을 동시에 시전하였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근대화 정책이었던 '갑오경장'은 일본의 영향력을 크게 받으면서 '강제'로 간섭받기 시작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히 '고종'이다. 이에 고종은 자신들의 측근을 내세워 '왕권회복'을 꾀했으니, 이들이 바로 '정동파'다. 특히, 친러파와 친미파로 구성된 '정동파'는 러시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점점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때마침 '삼국간섭'으로 일본조차 러시아의 힘에 밀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새를 보자, 고종과 민왕후(훗날 명성황후)는 러시아공사관의 '손탁 부인'과 날마다 회동을 하며 일본의 앞잡이들을 러시아의 힘으로 밀어내는 일에 착수하고, 성공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부는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있었음에도 '러시아의 간섭'을 두려워(?)하여 고종과 민왕후의 '행동'에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못하고 수수방관만 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친러관계를 내세워 '자주국'임을 내세우려 했으나, 열강들이 순순히 약소국의 이익을 챙겨줄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왜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일본이 애초부터 '보호국'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야심이 컸는데,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턱이 없다는 사실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일본은 조선을 마음대로 후릴 새로운 인물을 내세웠으니, 그가 바로 '미우라 고로'다. 본격적인 '여우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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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3 - 항룡십팔장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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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I / 김영사 25번째 리뷰] 2권에 이어지는 줄거리는, 금나라 여섯번째 황자 완안홍렬의 궁궐에 초빙된 무림고수들과 곽정, 황용 사이의 대결이 펼쳐진다. 완안홍렬은 남송을 일거에 물리칠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 무림고수들을 섭외한 뒤에 악비가 숨겨둔 '무목유서'라는 비급을 찾아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를 우연히 들은 곽정과 황용은 금나라의 음모를 저지하려 들지만 중과부적으로 인해 여러 고수들에게 도리어 포위되고 만다. 이렇게 곽정과 황용의 탈출기가 그려지면서 완안강(훗날 양강)의 스승인 매초풍이 등장하고, 장춘자 구처기, 그리고 곽정의 사부들인 강남육괴까지 마침맞게 등장해서 곽정과 황용이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사이 양철심과 포석약도 궁궐에서 도망을 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잡히게 되고, 자신들 때문에 곽정과 황용을 비롯한 구처기와 왕처일, 그리고 강남육괴까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이하자 스스로 자결을 하여 위기를 일단락 시킨다. 그렇게 두 부부의 사후에 곽정과 양강은 의형제로 맺어지게 되고 자신들의 부모를 죽인 원수 완안홍렬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을 하며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뒤에 곽정과 황용은 홍칠공이란 거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화산논검대결에서 '다섯 명의 무림고수' 가운데 한 명인 '북개'다. 그는 거지들의 모임인 '개방'의 방주이고, '항룡십팔장'과 '타구봉법' 등 외가무공의 달인이다. 이 만남을 통해 곽정은 홍칠공에게서 '항룡십팔장'을 전수받게 된다. 항룡이란 이름에 걸맞게 '용이 내린듯'한 강력한 외공을 다루며 주로 손바닥으로 치고 때리고 막는 '공격 겸 방어술'의 최고 무술이다. 십팔장이란 동서남북을 쪼개 주위 십육방위와 함께 머리 위와 다리 아래까지 모두 '십팔방위'를 철통같이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무공의 기초가 탄탄한 곽정이 홍칠공의 '항룡십팔장'까지 더하게 되니 곽정의 무술실력은 한층 업그레이드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홍칠공은 아직까지 정식으로 '제자'를 받아들인 적이 없기 때문에 곽정과 황용에게 무술(황용에겐 '소요유' 등)을 전수했지만 '사제지간의 예'를 올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곽정에게도 '항룡십오장'만을 전수하며 진짜 제자가 되지는 못했다.

  한편, 홍칠공과 헤어진 곽정과 황용은 태호의 주인인 '육승풍'과 만나 기이한 인연을 맺는다. 육승풍은 동사 황약사의 제자로 진현풍, 매초풍이 사부님을 배반하고 '구음진경'을 훔쳐 도화도에서 달아나자 분노한 황약사에 의해 다리가 절단나서 무공을 모르는 '앉은뱅이' 선비로 신분을 감추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집에 황약사의 딸인 황용이 찾아들었으니 묘한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황용은 그녀 나름대로 도화도의 '기문둔갑술'과 흡사한 풍경에 놀라움을 감추고 육승풍을 몰래 관찰한다. 그러는 사이에 매초풍이 완안강을 구하기 위해 육승풍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완안강이 육승풍의 집에 잡혀오게 된 까닭은 친부친모의 죽음에도 '부유한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완안홍렬의 아들로 남았고, 이번 남송정벌을 위해서 '남송과 몽골'이 서로 연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 출병을 했던 것이다. 이를 육승풍의 아들이 강남 태호 근방의 영웅들을 모아서 '금군의 야욕'을 기습했고, 그 결과 완안강이 사로잡혀 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완안강이 잡혀오자 그를 사랑하는 목염자가 몰래 찾아와 완안강을 구해주겠다고 약조를 했고, 그 약조로 완안간의 사부인 '매초풍'에게도 연락이 닿아 육승풍의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그런데 매초풍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눈먼 매초풍의 뒤를 따라 '청의서생'이 함께 따라왔는데, 그가 바로 '동사 황약사'였던 것이다.

  황약사의 이야기를 먼저 하기에 앞서 '철장수상표 구천인'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화산논검' 당시에 초청을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였고, 호남의 '철장방' 방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송나라 사람이면서도 '금나라'에 포섭되어 한족을 배신하게 된다. 그래서 육승풍의 집에 귀한 손님으로 모셔져서 대접을 받으면서 육승풍과 곽정, 황용, 그리고 강남육괴까지 모두 '곧 멸망한 송을 배신하고 금을 받들 것'을 요구한다. 이에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인 구천인과 목숨을 건 대결을 펼쳐지게 되는데, 웬걸! 구천인의 무공이 곽정 한 사람만 못할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더니, 엄청난 내공을 지닌 것처럼 보여주었던 것이 사실은 모두 '눈속임'에 불과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게 된다. 그가 정말 '철장수상표 구천인'이 맞는 걸까?

  한편, 황약사의 등장으로 황용은 도화도로 되돌아가게 되고 곽정을 비롯해서 여러 고수들이 도화도로 가게 된다. 그 뒤의 이야기는 4권에 이어진다. 드디어 '절대무림고수'들이 등장했다. 바로 '동사서독 북개남제 중신통'이라는 다섯 명과 함께, 이들과 대결을 할 뻔했던 '철장수상표 구천인'까지 등장했다. 아직 '서독'과 '남제', 그리고 명운을 다한 '중신통'은 이야기에 본격 등장하진 않았지만, 곧이어 등장할 것이 분명하고, 이미 죽은 '중신통'을 대신해서 그의 의동생으로 등장하는 '노완동 주백통'이 곽정과 의형제를 맺으며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질 터이니 기대하셔도 좋다.

  <사조영웅전>은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3권까지는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무협지'의 성격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스토리가 전개되어 장황한 느낌이 들어 살짝 지루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간중간이나마 '곽정과 황용의 만남'을 다루면서 기대를 불어넣어두고 있기에 그닥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참에 '중국사'에 대해 잠깐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남송시대'다. 여진족이 발흥하여 송나라를 괴롭한 결과 '북송'에 해당하는 강남 이북 지역(장강 이북)은 모두 '금나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렇게 금나라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남송'을 압박하고, 몽골을 비롯해서 주변 국가들과 대치된 상황이 전개된다. 하지만 현대의 중국사의 관점은 이들 모두를 '중국사'로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소수민족'에게까지 '한족정통론'에 입각한 중국사를 강요하며, 거대한 용광로처럼 모두를 한데 뭉뚱그리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민족차별'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어찌보면 '소수민족 차별'을 하면서 '한족 우대'를 강화하고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제대로 굴러갈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보여지는 '한족, 여진족, 몽골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그들의 후손에 해당하는 '현대의 중국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자못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조영웅전>의 주제는 '영웅이란 무엇인가?'다. 그러면서 '영웅의 조건'으로 애국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애국의 주체'는 한족이다. 아무리 '여진족'과 '몽골족' 가운데서 영웅적 위상을 타고난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들을 '영웅'이라 단정짓기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면 여진과 몽골의 영웅이 '애국'을 위하면 자연스레 '송나라'에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한족'을 괴롭히는 영웅은 영웅이라 칭할 수 없다는 기조를 바탕으로 깔아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곽정이 칭기즈칸의 부마이고, 곽정이 칭기즈칸 덕분에 '살길'이 열렸던 은덕이 있더라도, 곽정은 '한족'이 까닭에 민족을 배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몽골이 송나라를 도와(?) 금나라와 함께 싸울 때에는 '우방'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던 일도, 금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배은망덕하게 남송을 공격한 몽골이 '적대국'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해버린다. 이런 이야기를 읽은 현대 중국의 '내몽골족'과 '만주족'은 어떤 기분이 들겠느냔 말이다. 그들도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통크고 대범하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다르다'라고 '하나의 중국'에 동조할 수 있을까?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인들은 대국(大國)적인 관용정신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하나의 중국'을 내세울 것 같으면, '소수민족차별'과 같은 억압적인 정책을 버리고 '소수민족과 한족'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각각의 고유문화를 포용하는 정책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 중국의 정책은 '공정(工程, 역사왜곡)'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역사왜곡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하나의 중국'으로 아우르는 역사연구프로젝트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며 온갖 폐해를 일삼고 있는 점이다. 이로 인해 티베트인, 신장 위그루인, 내몽골인, 그리고 연변조선인 들의 '고유한 문화'를 말살하고, 중국의 문화(한족중심)와 사상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소수민족'을 한족으로 동화시킨 뒤에 오직 '한족만을 위한 애국정신'을 강조할 속셈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일까? 한족도 '청나라'때 변발을 강요 당하면서도 스스로 '한족'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으면서 말이다.

  이렇듯 '소수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현대 중국의 '하나의 중국' 프로젝트는 이웃나라를 넘어 전세계를 '중국'의 발 아래 놓겠다는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종이의 원조가 한나라 때 '채륜'이 만든 것이 최초라면서 '페이퍼'의 어원으로 불리는 '파피루스'조차 부정하기에 이르렀고, 전세계 무술은 모두 '중국무술의 아류'라고 폄훼할 뿐만 아니라, 한류열풍을 틈타 '한국 고유의 문화'까지 모조리 '중국의 것을 베낀 수준'이라고 폄훼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얼탱이가 없을 정도다. 그런 까닭에 나는 '중국'을 '中國'라고 불리는 까닭을 大國이라고 불리기엔 속갈딱지가 벤댕이보다 작고, 小國이라고 불리기엔 땅덩어리가 너무 크니 그 '중간격'인 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딱 적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국은 대국다워야 대국인 것이다. 이 책이 쓰인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중국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2차 국공내전' 이후 모택동은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후 등소평이 '일국양제'의 지혜로 홍콩문제를 돌파해 우리에게 익숙한 '홍콩의 부흥'을 이끌기도 했다. 이 소설도 그 부흥의 흐름에서 탄생한 소설이고 말이다. 그래서 <사조영웅전> 속의 내용이 현대 중국의 기조와 잘 들어맞지 않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중국이 '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안도 이 책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보다 더 큰 포용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할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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