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 삼국간섭과 갑오개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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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II / 위즈덤하우스 32번째 리뷰]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조선에선 '동학도'들의 막바지 항거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 당한 뒤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도리어 일본군의 뒷배를 믿고 '동학도'들을 토벌하러 내려오는 '경군(조선군)'은 막강한 화력으로 쓸어버리고 만다. 이렇게나 막강한(?) 화력으로 애초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경군'을 보내 해산을 시켰더라면 일본군에 의해 그리 전쟁에 휘말리는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종은 '경군'을 보내지 않고 '청나라 원병'을 요청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흥선대원군'이 호시탐탐 경복궁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으로서는 '임오군란'의 참담함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흥선대원군'이 정말로 실력행사를 할 정도로 힘을 갖췄을까?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흥선군의 적손자인 '이용준'이 있었기에 고종으로서는 '경복궁 수비'를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동학도 토벌을 위해 경군을 내려보냈다면 흥선군은 보란듯이 '쿠데타'를 일으켜 경복궁을 포위했을 것이고, 고종의 반대세력(개화파)과 연합한 흥선군은 또다시 고종을 괴롭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흥선군은 '동학도'들과도 접선을 하며 고종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증거도 있었단다. 그렇기에 고종의 '청병 요청'은 피치 못할 호구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멍청함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외세의 힘'을 빌리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간단한 이치도 예측하지 못하고, 그저 '왕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이는 향후 '고종의 행보'를 보아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는 시점에서도 일본군에 순순히 붙잡히는 쪽을 '선택'했고, '삼국간섭'으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화'하려는 시도가 무산될 때에도 자신의 왕권이 보장만 된다면 '러시아의 간섭'조차 큰 문제가 없다고 본 듯 싶다. 어디 이뿐인가. 대한제국 시절 '만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국 논의가 공공연하게 진행되자 '보부상'에 힘을 실어줘서 집회방해를 일삼았고, 끝내 '독립협회'까지 해산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을 겪고 난리블루스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오직 '왕권 욕심'에만 매몰되어 다른 사안은 등한시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전제군주국가였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 파멸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상황을 뻔히 지켜보면서도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저 '외세의 힘'에 의지해서 권력의 끈을 놓치 않으려는 모습만 보여주었으니 실망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왕실의 무능'을 지켜보았던 덕분일까? 3·1만세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대한사람들은 '왕정복귀'가 아니라 '공화국 건설'로 마음을 모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일단락이 되고, 청나라는 패전국이 되어 치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러 일본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돌발상황이 펼쳐진다. 패전으로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청나라에 요구하는 일본군부를 향해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청일전쟁을 '종전'시키지 말고 이참에 청나라 패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이다. 3차례의 전쟁양상에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맛본 일본국민들은 아주 그냥 제대로 취한 것이다. 그래서 '만주'를 넘어 '요동' 찍고, '대만'까지 후루룩 말아잡숩고서 '북경'까지 진격을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숙원이었던 대륙정벌도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겨우 조약으로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시도를 원천차단 시키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렬한 응원까지 보태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일본국민들은 '일본정부'나 '군부'에 대해 마뜩찮게 보고 무슨 일이든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것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전환된 것이다. 그만큼 '청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자부심으로 작용했고, 이는 '문명국 일본'이 '야만국 지나(중국을 낮잡아 이르는 명칭)'를 상대로 단단히 혼쭐 내주었다는 뿌듯함까지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패전회담을 마치고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러 온 이홍장을 향해 한 일본청년이 총탄 저격을 한 것이다. 다행히(?) 이홍장은 총알을 비껴 맞았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문명국'이라 자랑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야만스런 짓을 하고 말았으니, 조약은 애초에 일본에 유리하게 작성되어야 했으나, 이로 인해 청나라가 '패전 조약'에 서명하길 거부하고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일본이 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 '난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 된다면 일본측에 유리하게 끝맺음을 할 수 있었던 조약조차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게 되고, 청나라의 결사항전에 대해 더 많은 전쟁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일본의 처지에서도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이홍장'에게 심심한 위로와 함께 쾌유를 비는 일본국민들의 염원까지 선보여야 했다. 그렇게 이홍장은 죽지 않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성사시키고 귀국했다. 이렇게 '청일전쟁'은 일본측이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할양(요동과 대만)을 받는 선에서 일단락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일본은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경험하게 된다.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던 계획이 차츰차츰 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홍장이 '시모노세키'로 떠나기 전에 러시아측 대표와 밀약을 주고 받았는데, 일본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는 '요동반도'를 일본이 뱉어내게 만드는 묘수였던 것이다. 이른바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다. 러시아는 연해주까지 영토를 넓히고서 '시베리아 철도'를 준공하며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로 '요동의 뤼순'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청나라를 돕는 척하면서 '요동'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으로 계획을 진행 시킨 것이다. 어차피 청나라로서는 일본에 내어주나, 러시아에 내어주나 피해를 보는 것을 매한가지지만, 이를 통해 '이이제이', 즉,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과 갈등관계를 일으켜 '어부지리'라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자 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청나라의 속셈은 애초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한편,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요동 뤼순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두 곳도 '일년 내내' 드나들 수 있는 항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반도'는 러시아가 놓칠 수 없는 이익이었다. 만약 조선 남쪽에 위치한 '거제도'에 러시아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만 있다면 일본을 견제하는 것을 넘어 태평양까지 언제라도 넘나들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선점하게 되니, 러시아로서는 조선이 우호적인 것이 한없이 반갑기만 한 것이었다.

  또다시 한편, 조선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군국기무처'를 통해서 강제로 개혁조치가 선행되었고, 이를 통해 '갑오개혁'과 '제1차 김홍집내각(갑오파)'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더욱더 자신들의 입김이 통하길 원했기에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철종의 사위, 갑신파)를 내세워 견제와 간섭을 동시에 시전하였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근대화 정책이었던 '갑오경장'은 일본의 영향력을 크게 받으면서 '강제'로 간섭받기 시작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히 '고종'이다. 이에 고종은 자신들의 측근을 내세워 '왕권회복'을 꾀했으니, 이들이 바로 '정동파'다. 특히, 친러파와 친미파로 구성된 '정동파'는 러시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점점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때마침 '삼국간섭'으로 일본조차 러시아의 힘에 밀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새를 보자, 고종과 민왕후(훗날 명성황후)는 러시아공사관의 '손탁 부인'과 날마다 회동을 하며 일본의 앞잡이들을 러시아의 힘으로 밀어내는 일에 착수하고, 성공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부는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있었음에도 '러시아의 간섭'을 두려워(?)하여 고종과 민왕후의 '행동'에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못하고 수수방관만 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친러관계를 내세워 '자주국'임을 내세우려 했으나, 열강들이 순순히 약소국의 이익을 챙겨줄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왜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일본이 애초부터 '보호국'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야심이 컸는데,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턱이 없다는 사실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일본은 조선을 마음대로 후릴 새로운 인물을 내세웠으니, 그가 바로 '미우라 고로'다. 본격적인 '여우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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