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 산책 12 - 미국 '1극 체제'의 탄생 미국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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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VI / 인물과사상사 19번째 리뷰] 미국이 초강대국인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정의로운 나라일까? 미국이 하는 일은 아무런 의심할 것도 없이 믿어도 되는 걸까? '미국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이들이라면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올리기 힘들 것이다. 물론 미국이 세계평화를 위해 앞장 서서 한 일들도 많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전범국 독일을 패망시킨 것이 그렇다. 600만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독재자 히틀러를 힘으로 억눌러 제압한 것으로 '미국의 힘'은 세계평화를 지키는 상징이 되었다. 또한 냉전시대에는 공산진영의 확산을 막아내고 자유진영을 지키는 최선봉으로 자리매김하며 오늘날까지도 세계경제의 주축이 되어 경제질서를 바로 잡은 공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이었던 '일제'에 대해서는 전범국 독일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지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전범자들에게 혹독한 처벌을 내린 것과는 달리 일왕을 위시한 일제군국주의의 전범자들에겐 관대하다 싶을 정도로 너그러운 판결을 내렸고, 수감된 몇몇 전범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석방하고서 미국을 도와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돕도록 조치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은 해방이후에 전쟁과 분단이라는 끔찍한 처벌 아닌 처벌을 받았고, 가해국인 일본은 패망했음에도 '미국의 배려(?)'로 인해 빠르게 경제대국으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패전국'이라는 멍에마저 미국 덕분에 훌훌 벗어던지고 세계무대에 당당한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며,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톡톡히 받아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일본이 미국의 꼬붕 역할을 충실히 하는 단초가 되긴 하지만, 미국의 꼬붕이 된 것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기에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슈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여튼, 중요한 사실은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지위를 누리는 자리에 있으면서 도덕적, 윤리적, 인권적으로 하등 문제가 전혀 없는 범접할 수 없는 대국이 아니라 속으로 곪을대로 곪아터져서 썩어빠진 정치를 하면서도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전세계의 이익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악의 제국'처럼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힘 센 나라면서 가장 도덕적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텐데, 초강대국인 주제에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무한 자국이기주의'에 빠져서 약소국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조폭과도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낄 정도란 점이다.

  이는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집권기만 봐도 그렇다. 그가 집권하던 1980년대는 '강력한 미국'을 표방할 정도로 전세게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소비에트 연방도 경제가 흔들리자 정계까지 막바지에 내몰리며 '개혁(페레스트로이카), 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했지만 스탈린의 폭정으로 이미 내리막을 탄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고 소련이 해체하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당에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에 미국은 미국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를 찾아 '적수(훗날 '악의 축'에 해당하는)'를 찾으려 애썼지만 마땅한 후보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만만한 상대를 고르기 시작했는데, 레이건이 찾은 만만한 맞수가 바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었다. 훗날 '아랍의 봄'의 여파로 내전이 발발하였고 42년간 철권통치를 해오던 무아마르 알 카다피이 사살되면서 막을 내렸던, 바로 그 '카다피'가 맞다. 분명 악독한 독재자가 맞긴 하지만 1981년 당시 리비아가 어찌 단독으로 미국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란 말인가? 그럼에도 레이건은 자신의 정권 안정을 위해서 '리비아 폭격'을 강행하였다. 결과는 리비아가 변변한 반항도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한 미국은 승리를 자축하며 공공연하게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데 성공하고 미국내의 정권안정을 꾀할 수 있었단다. 허나 이는 반쪽짜리 승리였다. '리비아 폭격'을 강행한 미국의 편을 든 나라는 영국, 캐나다, 이스라엘, 세 나라 뿐이었고, 제3세계 국가들을 비롯한 95개국의 나라가 '반미주의의 깃발'을 높이 드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기회만 된다면 '미국의 힘'에 편승하는 각 나라 '친미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일을 일삼았다. 설령 '친미정권'의 지도자가 그 나라의 독재자라고 할지라도 '친미정책'을 유지하는데 앞장서기만 한다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한민국의 전두환 등등 이들이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그 나라의 국민들을 학살하는 일에는 눈을 감고 오직 '미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만을 바라며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하긴 미국내부의 '인종차별'도 자국의 백인들을 위해서라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행하는 것을 보면 의아해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미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에 어김없이 내세우는 명분이 '인권탄압' 아니었던가? 힘없는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악의 축'으로 삼고 전쟁도 불사하는 미국의 모습과는 사뭇 상반된 모습 아닌가? 그토록 '인권보호'에 앞장 설 요량이면 자국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고, 빈곤한 계층이 죽지 못해 들고 일어난 시위들에게 '폭도'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면서 강경진압하지 말고,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한 것 아닌가? 도대체 어느 것이 미국의 진면목이란 말인가?

  <미국사 산책>을 통해 미국을 주욱 살펴보니, 미국이란 나라는 기승전 '자국이익'으로 결말을 맺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모든 나라가 '자국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계 유일한 초강대국이 '자국이익'에 목을 매다는 모습을 펼치면 전세계가 들썩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왜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쳤는지도 이제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초강대국인 미국도 경제가 휘청거리면 앞뒤 잴 것도 없이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며 전세계가 어떤 영향을 받든 '나중 일'이라는 냉혹한 국제관계의 질서로 새삼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런 초강대국 미국이 '브레이크 망가진 자동차'처럼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다시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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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1 - '성찰하는 미국'에서 '강력한 미국'으로 미국사 산책 1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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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V / 인물과사상사 18번째 리뷰] 미국의 70년대와 80년대에는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과 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다. 두 대통령은 그 성향부터 극명하게 달랐는데, 이를 저자는 '성찰하는 미국'과 '강력한 미국'으로 함축해서 설명하였다. 한마디로 카터 대통령은 '인권'을 중시하는 도덕적인 정치를 지향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힘'을 바탕으로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미국으로 거듭나길 바랐다고 한다. 하긴 38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였기에 뒤를 이은 카터 대통령은 도덕적으로도 깨끗한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카터 정부를 지내며 위축되었던 '미국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픈 분위기가 띄워지자 '강한 미국'을 표방한 대통령이 당선되어 미국을 이끌어 나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와중에 한미간에 중대한 사건들이 터져나왔는데, 박정희 정권 때에 '코리아 게이트' 사건과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광주민주화혁명' 사건이다. 각각 카터 대통령 시절과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전이었는다.

  '코리아 게이트'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이 '박동선'이란 한 개인을 통해서 미국의 고위급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 자금'을 뿌린 사건인데, 이것이 미국에겐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 있었는지 미국의 정치인과 언론인 들이 들고 일어서서 한국을 맹비난하며 쌍욕까지 서슴지 않아 대한민국에 심각한 정치, 경제, 안보 등에 악영향을 끼친 사건이 되고 말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약소국 한국이 강대국 미국에게 잘 좀 보아달라며 '뇌물'을 갖다 바친 것인데, 뇌물을 받아쳐먹은 미국놈들을 벌주기는커녕 감히 한국 따위가 미국에 돈을 펑펑 쓰면서 '로비'를 일삼다니 괘씸하다는 듯이 열불을 내고 만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능력도 없으면서 미국 고위관리층에게 '거액의 로비 자금'을 퍼줄 여력이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경제원조 중단', '주한미군 철수', '미국 농부들 밥줄 끊길뻔 했으니 미농산물 한국 니네가 싹다 수입해' 등등 한국에게 덤터기를 씌워도 이만저만 씌운 것이 아닌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는 이런 모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미국의 경제원조가 끊기면 '대미 수출길'이 막히는 것인데, 미국에 '완성품'을 수출하는 것으로 겨우 경제를 살려나가고 있는 판국에 이걸 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한미군 철수'는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얼마전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져 가뜩이나 남북간의 긴장감이 고조된 판국에 '주한미군'이 철수까지 해버리면 만에 하나 전쟁이라도 발생했을 시에 한국이 단독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경제성장의 싹을 틔웠을 뿐, 70년대 대한민국은 아직도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런 판국에 또다시 전쟁까지 나버린다면 그야말로 폭망하는 일밖에 남지 않게 되니 '미군철수'는 아직이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으로 '한국의 농부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미국의 농산물을 대량으로 수입하도록 허가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바닥을 찍게 되었다. 좁다란 땅에서 겨우 자급자족할 식량을 근근히 생산하던 시절이었는데, 미국에서 '값싼 농산물'이 대량으로 수입해서 들여오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곡식들은 내다 팔지도 못하고 갈아엎어야만 했으며,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던 이들은 땅을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시노동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이른바 '이촌향도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이것이 어찌어찌 80년대 고도성장기와 맞물려 '공장노동자'를 충당하는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70년대에는 그야말로 농촌도, 도시도 빈곤하고 가난한 이들이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는 일이 되었다. 특히 '코리아 게이트'의 여파로 인해 대한민국의 농업은 아직까지도 '자급률'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단다. 망가지긴 쉬워도 다시 회복하긴 어려운 법이다.

  한편, 박정희가 피살되고 혼란했던 정국을 수습한 건 '전두환 신군부'였다. 허나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공수부대로 짓밟으며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런 폭정의 시대가 다시금 도래했는데도 미국은 '신군부의 편'이었다. 자국민을 짓밟는 무뢰배를 향해 꾸짖기는커녕 도리어 신속히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자(?)'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과연 미국은 도덕적인 나라인가? 인권을 중시하던 카터 대통령은 어디 갔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알만한 지식인들은 하나 같이 이런 행태를 자행하는 미국에 대해 '비난'을 쏟아부었다. 이른바 '반미주의의 탄생'이다. 광주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신군부의 행태를 두둔하는 듯한 미국의 언론도 한몫을 하였다. 신군부에 저항하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을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레밍 떼'에 비유한 것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모한 '죽음의 행진'을 멈추지 않는 레밍처럼 신군부의 총칼과 몽둥이 앞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광주의 시민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의아해했단다. 광주에서는 저렇듯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광주밖에서는' 어찌도 그리 조용한 것이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광주의 시민들은 신군부의 총칼과 몽둥이 세례를 받으면서도 한줄기 빛을 기다렸다. 자신들의 저항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미국이 알게 된다면 미국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란 것을 말이다. 인권유린을 참지 않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미국이 신군부의 폭력을 잠재워줄 막강한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나 그 빛이 사그라들었다. 전두환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신속히 '정국안정'을 이룰 적임자로 '선택'하면서 말이다. 그리고서 미국은 뒷짐을 지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그렇게 미국이 뒷짐진 사이에 신속하게 광주를 쓸어버렸다.

  그렇지만 '광주밖에서' 조용히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설처대는 신군부와 뒷짐진 미국을 그대로 좌시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반미주의'를 외치기 시작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그저 소소한 시작일 뿐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는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과격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군부를 향한 데모는 끊이질 않았다. 정의롭지 못한 전두환을 두둔한 미국을 향해서도 확실히 반대했다. 이러한 일련의 '반미주의'는 당시의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과 맞물려 계속 울려퍼지게 된다. 이는 1987년 6월의 그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과연 대한민국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두 나라의 운명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느냔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을 때까지 나의 '미국사 관련 책읽기'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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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전 : 왜 금지된 사랑에 빠질까? 물음표로 따라가는 인문고전 3
임치균 지음, 김유경 그림 / 아르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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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IV / 아르볼 3번째 리뷰] '금지된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너무도 많다. 그래서 너무 식상한 주제일 것도 같은데, 최신 유행가 가사만 보아도 '사랑타령'은 여전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그럴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모양이다. 그런데 '금지된 사랑'이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불륜'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과거에는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한 것이 더 많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원수 가문인 탓에 서로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두 남녀가 죽음에 이를 지경까지 이르는 사랑이야기를 담았고, <춘향전>에서도 양반과 기생이라는 신분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하는 두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담았다. 이 두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운영전>에서도 이런 '방해요소'와 '극복노력'이 담겨 있다.

  <운영전>의 주인공은 곧 과거급제를 할 유망한 청년 '김진사'와 안평대군의 궁궐, 수성궁에 살고 있는 궁녀 '운영'이란 두 남녀다. 이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는 바로 여주인공인 운영이 안평대군의 '궁녀'이기 때문이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건만 왜 '궁녀'이라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일까? 그건 바로 '궁 안에 살고 있는 여자'는 궁의 주인에게 속한 여자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운영은 안평대군의 수성궁에 살고 있는 까닭에 이미 '안평대군의 여자'인 셈이다. 정식 부인은 아니지만 '부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여자라서 '외갓남자'와 마주쳐서도 안 되고 심한 경우에는 '궁궐밖으로' 한발짝도 나설 수 없는 감옥 아닌 감옥에 살고 있는 것처럼 갇혀서 살아갈 운명이다. 그래서 운영은 안평대군을 지아비로 섬기는 '후궁'이 되는 길이 아니고서는 평생 정절을 지키고 수절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운명을 지닌 여인이 외갓남자인 '김진사'와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다. 안평대군이 심심풀이 삼아 운영을 비롯한 열 명의 궁녀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시를 짓는 교육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인의 신분으로 글공부를 하게 되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밖에 나가 실력을 뽐내지는 못하고 오직 '수성궁' 안에서만 글을 짓는 것이 허락된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배우지 않았으면 모르겠으나 이미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읽혔으니 자연스레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이 생길 수밖에 없다. 비록 궁궐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는 없지만, 글을 통해서나마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글을 짓는 실력이 나날이 늘어 안평대군을 기쁘게 해주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에 운영을 비롯한 아홉 명의 궁녀들은 시를 통해서나마 자신의 심사를 드러내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된다. 그러다 어느 날, 수성궁에 바깥 손님들이 찾아왔고 안평대군의 명을 받아 손님들이 시를 짓는 시중을 들도록 열 명의 궁녀들을 부른다. 그렇게 마주한 김진사와 운영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 만남에서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 인연이 되어 둘은 남몰래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 말이다. 비록 김진사의 붓끝에서 운영의 손가락으로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지만, 운영은 그 먹물을 지우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먹물을 떨어뜨린 김진사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사랑한다는 감정을 말하지 못하는 '궁궐의 여인'이자 '안평대군의 여자'인 운영에게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남녀는 말 없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나날이 야위워만 갈 뿐이었다.

  그러다 김진사가 먼저 용기를 내어본다. 용한 무당의 도움으로 수성궁 안으로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본 것이다. 그렇게 어찌어찌 소식을 전했지만, 어디 사랑에 빠진 남녀가 그것만으로 만족할 리가 있겠는가. 이번에는 김진사의 노비 특의 도움을 받아 수성궁의 담장을 넘어 운영과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수성궁의 높은 담을 넘어 둘의 만남은 계속 이어지니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음이라. 허나 새벽닭이 울기 전에 다시 담장을 넘어야 하는 김진사와 담장을 넘지 못하고 그저 멀어지는 님의 모습만 바라봐야하는 운영의 마음은 점점 더 애달퍼지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안평대군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둘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기에 비밀스런 만남은 그렇게 몰래몰래 어둠을 빌어서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허나 오래되면 비밀도 탄로가 나는 법이라, 운영의 마음에 변화가 있음을 안평대군이 짐작하게 된다. 바로 운영이 지은 시의 내용에 '따로 정을 통한 연인이 있다'는 내용을 짐작한 것이다. 평소 시는 마음 깊은 곳에 감춰진 본심이 드러나기 마련이라 입버릇처럼 말했던 대군이기에 더욱 심증을 굳혔다. 그렇게 운영을 추궁하자 드디어 진실이 밝혀지며, 운영이 외갓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사실까지 발각이 되고 만다. 이에 죽을 일만 남게 된 운영은 대군에게 잘못을 고하고 자결을 하려 하나 다른 궁녀들이 나서서 운영을 감싸고 도니 안평대군은 그런 운영을 용서하게 된다. 허나 용서를 받았다고해서 운영과 김진사가 백년해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인 제약 때문에 둘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운영은 끝내 자결을 하였고, 김진사도 곡기를 끊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둘은 저승에서 만나 사랑을 이루게 된다. 애초에 둘은 천상의 선남선녀였는데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인간세상의 고통을 겪으러 내려왔다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맛보고나서야 천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는 뻔한 핑계와 함께 말이다.

  비록 '금지된 사랑'을 주제로 다루었으나 <운영전>에서는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끝맺음을 하였다. 살아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죽어서는 사랑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다만 조선이라는 '현실'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에 '꿈속에서(몽유록계 소설)' 이룰 수 있었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그런 제한적 조건을 달지 않고서는 허락되지 않은 '꽉 막힌 사회'였던 것이다. 특히 '여인들'에게 야박한 족쇄를 채운 것을 잘못되었다 여기기까지 꽤나 오랜 시일이 지나야만 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게 왜 안타까운 일일까? 조선시대에 여성들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사회적 활동'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바깥일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몫'이었지, 여성들은 '집안에만' 갇혀지내며 남성들의 '부속품' 쯤으로 천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시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성의 재주를 인정해주는 유일한 직장이 바로 '궁녀'였다. 요즘말로 하면 '궁녀=직장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문직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하는 궁녀일지라도, '궁궐안에서'만 생활을 해야하는 여인들의 숙명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또한 궁녀는 원천적으로 '왕의 여자'였기에 마음대로 사랑에 빠지고 혼인을 할 수도 없었다. 예외적으로 나이가 차서 더는 궁궐 일을 할 수 없거나 공을 세워서 혼인을 허락받은 궁녀가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궁녀가 유일하게 혼인할 수 있는 경우는 '왕의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왕의 첩'이 되어 왕자를 생산(?)하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것이다. 허나 구중궁궐 속 수많은 궁녀들 가운데 임금의 승은을 받아 '후궁'이 되는 일은 정말 흔치 않는 일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궁녀의 운명은 평생 처녀의 몸으로 늙어 죽는 일이었다. 남몰래 '사랑'에 빠지게 되면 행복한 결말은커녕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일뿐이었고 말이다. 감히 '왕의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죽을죄였던 것이다.

  이토록 궁녀에게 '사랑'은 금기시 되던 일이다. 그게 설령 '안평대군'일지라도 '궁녀 운영'은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왜냐면 왕족이 사대부 가문의 여인이 아닌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조차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왕족의 욕정에 의해 범해졌다하더라도 천한 궁녀쯤이야 언제든지 내다버릴 수 있는 '권력'을 지녔고, 이를 용납하는 사회분위기였기 때문에 안평대군 또한 몸가짐을 반듯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거지로 인해 애꿎은 여인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평대군이 운영의 잘못을 용서해준 것도 애초에 대군이 '운영'을 사사로이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열 명의 궁녀에게 글을 가르칠 때에도 유독 운영의 재주에만 관심을 보였으며, 운영의 시를 통해서 '운영의 마음'을 엿보려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안평대군의 여인'인 궁녀였기에 대군과 함께 동침을 하며 사랑을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영은 대군을 사랑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안평대군도 운영에게 목을 매는 일도 없었고, 사랑을 구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런 운영이 김진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 심각하게 질투심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이렇게 '삼각관계'를 다루기라도 했다면 <운영전>은 전근대를 넘어 현대적인 사랑이야기로 초월하는 기염을 토했을 것이다. 왕자와 선비의 사랑을 독차지한 위풍당당한 궁녀의 러브스토리라면서 말이다. "왕비냐, 마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가 <운영전>에서 먼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운영전>은 묘한 고전소설이다. 일면 대단히 단순한 소설 같고, 뻔한 사랑이야기를 담아놓은 것 같은데도, 그 이야기에 덧붙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른 책을 통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좀더 찌끄려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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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이야기 - 자연에게 배운, 영원히 지켜내야 할 것들
이본 쉬나드 지음, 추선영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LXXXIII / 한빛비즈 149번째 리뷰] 지구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는 것은 지구환경을 위해 '좋은 일'일까? 이런 고민에 빠진 기업이 있다. 바로 '파타고니아'다. 기업에서 만든 제품은 어쩔 수 없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값싼 원재료'를 이용해서 '온갖 화공약품'을 첨가해서 '대량생산'을 해서 전세계에 많이 팔아재낀다. 이는 거의 모든 기업들의 숙명이다. 그래야 임직원을 비롯해서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정부에 세금을 납부해서 국가를 경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인 효과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기업들은 '지구환경'보다는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마구잡이로 제품을 생산하고, 그 제품을 '대량'으로 소비하도록 갖은 애를 쓰기 마련이고,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한 '환경파괴'나 '질 낮은 나쁜 제품' 따위가 지구환경과 인간의 건강을 해치더라도 살짜쿵 눈감아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시 되던 관례에 제동을 걸며 "지구환경을 위해 우리가 만든 제품을 사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이는 기업이 등장했다. 바로 '파타고니아'다. 파타고니아는 "최고의 제품 생산, 불필요한 환경 피해의 최소화, 환경보호를 위한 활동"을 기업이념이자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여러 차례의 경제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꾸준한 환경보호에 앞장 서 온 기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파타고니아는 어떻게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걸까? 바로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비결을 찾는다. DON'T BUY THIS JACKET(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라고 광고를 내면서, 제품 소비를 줄이고 의류 수선 및 재사용을 해서 궁극적으로 의류를 '재활용'한다는 개념을 선보였다. 그렇게 재활용하면서도 '제품의 기능'이 떨어지면 안 되는 등산용품을 만드는 기업이기에 재료의 품질만큼은 보장되어야 한다. 왜냐면 등산용품은 제품의 기능이 곧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유 원료'로 네오프렌 같은 걸을 만들지 않고 '천연고무'를 사용해서 제품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성능도 최고로 높이며, 최종적으로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제품들을 '재활용'하고 손수 수선하면서 불필요한 환경 파괴를 일으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은 '파타고니아' 제품을 선호하는 것이다.

  사실 '파타고니아' 제품이라고 해서 환경파괴를 전혀 일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재활용'을 기반으로 삼는다고 해도 결국엔 제품생산과정에서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석유원료'와 '화공약품'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제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도 물류창고에서 전세계 매장까지 '탄소배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타고니아'는 가급적 자사의 제품을 사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안 사면 안 만들고, 안 만들면 지구환경은 더욱 좋아질테니 말이다. 그러나 '파타고니아'에 취직한 일꾼들은 안정된 고용이 보장되지 않은가 말이다. 기업 경영이 침체되면 일자리 보장은커녕 기업이 망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나 무책임한 경영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파타고니아는 이미 1990년대 최고의 성장을 이룬 터라 이런 고민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는 모양이다. 90년대까지는 기업 성장을 위해서 '환경 파괴'를 일삼던(?) 기업 가운데 하나였지만, 자신들의 성장이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기업 성장 0%'로 못을 박고 제품 생산에 제동을 걸고 '재활용'을 하는 것으로 우선 순위를 바꾸었다.

  어떻게 기업 경영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손주의 탄생' 때문이다. 자신은 자연을 너무 사랑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스포티한 삶을 살았지만, 손주가 성장했을 때에도 지구가 그런 아름다운 환경을 보존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되자 '경영 마인드'를 바꾼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서 '파타고니아'가 망할 수도 있다. 신제품을 선보이고 매출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도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책임감' 없는 기업이 많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자신의 기업만이라도 그 책임감의 무게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고자 한 것이다. 파타고니아는 말한다. "지구가 죽어버리면 기업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이다.

  물론, 고작 하나의 기업이 실천에 옮기고 참여해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다르다. 기업은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이윤추구'를 멈출 수 없다고 해도 소비자는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아나바다 운동'으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쓸데없이 소비를 많이 하고 있다. 소비가 활성화되는 경제가 살아나고 풍요로운 삶을 통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렇게 풍족하다 못해 헤프게 산 대가로 지구는 병들었고 '기후위기'가 찾아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풍요로운 삶을 추구한다며 소비를 부추길 셈인가. 이젠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도 거짓으로 판명이 났다. 발전을 하며 파괴된 자연환경만큼 훼손된 자연환경을 '복구'하며 되살리는 일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장밋빛 미래를 그려왔지만, '지속적인 발전'은 '끝없는 자연환경 파괴'를 일삼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난 2~30년 동안 경험할 뿐이었다. 그 결과, 2035년이면 기후위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적인 재앙으로 우리 눈앞에 현실이 되어 펼쳐질 것이다. 2~3개의 태풍이 동시에 불어닥칠 것이고, 그로 인한 홍수와 해일이 전세계 주요도시들을 집어 삼킬 것이며, 화산폭발과 지진은 일상이 되어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를 장식할 것이다. 거기에다 사계절이 실종되고 50도가 넘는 불볕더위와 영하40의 맹추위가 반복되는 기상이변으로 인간은 살아남기 힘든 지구환경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멀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예측한 시기는 2035년이고, 이제 불과 10년 남짓 남았지만, 이상기후의 도래는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해가 거듭할수록 '재확인'하고 있으니 그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금도 '탄소중립'이니 '탄소제로'니 전세계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다. 허나 완전한 중립을 약속한 날짜는 빠르면 2035년, 늦어도 2050년에는 중립을 이루겠다는 노력일 뿐이다. 이 정도 노력을 가지고 기후위기가 해결될 것 같진 않다. '파타고니아'도 이런 문제가 그 정도 노력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혁명의 시작은 '농업'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남발하는 기존의 농법이 아닌 '땅의 힘'을 되살리는 과거의 농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땅을 되살리는 방법을 '농부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고도 말한다. 화학비료와 농약 대신 퇴비 주기, 윤작, 방목 기법 등으로 농부들은 2년 만에 다시 건강한 토양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런 건강한 토양에서 생산된 작물이 더 건강하고 더 영양가 높은 작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면서 말이다. 더구나 이런 농법은 가뭄에도 물을 더 적게 쓰고,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건강해진 토양은 '더 많은 양의 탄소'도 격리시킬 수 있기에 지구온난화를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되돌아간다면 일손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어 '농작물의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높아진 곡물가격에 '가공식품의 가격'도 덩달아 오르고 소비자들은 더욱더 허리띠를 졸라매야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의 농법 변화가 일자리의 양상을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도시로 쏠리던 인구가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왜냐면 '일자리'가 농촌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곡물의 유통망을 좁혀서 '로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유도하면 하릴없는 '탄소발자국 낭비'도 현저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지구환경'이 회복단계로 접어들면 우리 모두는 더 살기좋은 세상에서 과거처럼 살게 될 것이다. 파타고니아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책에는 새로운 지혜가 없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만 담고 있다. 파타고니아가 이룩하려는 혁명적인 일들은 사실 우리 모두가 이미 '해왔던 방식'일 뿐이다. 단지 그것을 '잊고' 살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사업을 합니다"라는 파타고니아의 사업마인드는 별난 것이 아니라 희망찬 것이다. 이런 파타고니아가 망한다면 지구도 이미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면, 그건 '파타고니아'가 아니라 '소비자'다. 소비자가 파타고니아와 같은 기업의 제품만 구입하려고 들면 온세상의 기업들은 '파타고니아'처럼 사업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소비자가 달라져야 한다. 이런 멋진 기업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여러분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등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회사 창업주가 이산을 오르고 저산을 올랐다는 내용만 한가득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등반 이야기'가 아닌 '파타고니아 이야기'다. 파타고니아의 기업가들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아름다운 자연'를 선보이며,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기 위해 '환경보호'에 앞장서는 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산악등반과 같은 스포츠를 즐기면서, 그 즐거움을 자신만 즐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주도 즐길 수 있도록 '지구환경'에 더욱 관심을 갖고 반드시 '환경보호'를 해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지구에 흠뻑 빠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런 '사업마인드'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분들께도 이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먼저 충분히 감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말 멋진 생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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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6-22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멋진 생각입니다! 감동이네요.
다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힘든...
각성해야겠습니다. 소비자로서.
잘 읽었습니다^^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2 : 나아가기 - 1일 10분, 술술 읽히는 이야기 교양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2
박선영 외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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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II / 한빛비즈 148번째 리뷰] 독서는 꾸준해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 사람이 평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수를 생각해보자. 요즘 '100세 시대'라고 외쳐대고 있으니 100살까지 산다고 계산해보겠다. 하루에 1권씩 독파하는 독자가 있다고 치자. 1년이 365일이니 1년동안 365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100을 곱하면 36500권을 읽을 수 있다. 4년마다 윤달이 낑겨 있으니 25권의 책을 더하면, 모두 36525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부터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시력과 체력이 감퇴되어 책읽기가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10살 전후부터 시작해서 70세까지 꾸준한 독서를 할 수 있다고치면 한 사람은 대략 60년 정도 읽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 40년치가 깎여서 365권X40년+10권(윤달)=14610권을 빼야 한다. 그럼 대략 22000권 정도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매일 한 권씩 읽을 수 있겠는가. 이틀에 한 권꼴이면 절반인 11000권이고, 일주일에 한 궐꼴이면 약 3000권 정도, 한 달에 한 궐꼴이면 약 700권 정도밖에 읽을 수 없다.

  그럼 이제 거꾸로 생각을 해보자. 한 사람이 몇 권의 책을 독파해야 '지적인 담론'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로워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책 한 권 읽어가지고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처음으로 '완독'한 기쁨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기쁠 테지만, 안타깝게도 담론을 나눌 만큼 똑똑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0권쯤 읽으면 굉장히 뿌듯해질 것이다. 어디가서 취미가 고상하게도 '독서'라고 자랑하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고작 10권의 지식을 쌓았다고 해박한 지적교양을 뽐내기 힘들 것이다. 100권쯤 읽으면 어떤가? 자랑할 만한 수에 도달하긴 했지만, 여전히 지적교양으론 어딘가 부족한 수임에 틀림없다. 그럼 200권, 300권쯤 읽으면 지적담론을 논할 수 있을까? 오, 가능해진다. 해볼만 하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대단한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자신이 2~300권의 책을 읽었다고 자랑할 즈음에 이미 1000권을 독파한 지식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과 글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씻고 다시 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1000권의 책을 독파하는 순간 '지적담론'을 나눌 만큼 자신감이 붙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많이 늙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면 3년 정도면 돌파할 수이건만 일주일에 한 권씩 읽으니 어느새 30대에 접어든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한 달에 한 권씩이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책읽은 숫자과 지적교양과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증명된 바가 없음을 밝힌다.

  문제는 '속도'다. 교양을 쌓았어도 자신이 충분히 젊지 못하다면 그 지적교양을 얻은 것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써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20대에는 1000권을 독파할 정도로 지적교양을 쌓아야 남은 여생을 지적교양으로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 10대에서 20대로 접어드는 십 몇년 사이에 1000권 이상의 책을 독파할 정도로 '지적교양'을 쌓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10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으려면 적어도 1년에 100권 정도를 책읽는 습관으로 길들여야 한다. 1년은 52주이므로 '일주일에 2권 정도'의 책을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학창시절에 엄청난 학업 분량을 충분히 소화시키면서 책읽는 습관까지 너끈히 해내야만 한다는 '또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 시험기간이고, 가족여행이고, 쉴틈없이 부지런하게 읽어대야 한다.

  반가운 소식은 대한민국 학생들의 '독서력'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학창시절에 '참고서'를 제외한 서적을 연평균 90권 이상을 읽는다고 한다. 위에 열거한 수치가 '불가능'은 아니라는 얘기다. 굉장히 고무적인 소식인데 안타까운 것은 초등에서 중등으로 올라오면 절반으로 줄어들고, 중등에서 고등으로 진학하면 거기에 또 절반으로 줄어들며, 대학생 이후 성인들의 독서력은 고작해야 한 달에 1~2권꼴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마저 대한민국 성인의 '독서력 편차'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많이 읽는 사람이 한 달에 30권을 읽고, 안 읽는 사람들을 견인해서 전체 평균이 1~2권 정도라는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은 책을 읽는 경향이 뚜렷한데, 대한민국은 여전히 '거꾸로'다. 성인이 되면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지적담론'을 나눌 수 있겠는가? 날로 심각해지는 사회문제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빈부격차,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을 위기로 내몰고 있는 현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방법을 온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텐데,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할 수 있는 지적능력들을 갖고 있냔 말이다. 대통령 하나 잘 뽑았냐 못 뽑았냐를 따지는 것으론 아무런 해결방법을 내놓을 수 없다. 국민들 개개인이 뛰어난 지적담론 실력을 뽐내야 권력자들과 엘리트들이 국민들이 무서워서라도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속여 먹기 딱 좋은 지적수준을 갖고 있으니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국민들을 윽박지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법적조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아니냔 말이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개소리 삼 년동안 국민들은 뭘 배웠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똑같은 300만 원이라도 권력자가 받으면 뇌물이고, 배우자가 받으면 선물이란다. 공직자윤리법에 적용해도 마누라는 공직자가 아니니 처벌할 수 없단다.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었던가? 그럼 그동안 본인이 아닌 자식이 받아먹고 형제가 받아먹고 친인척이 받아먹고, 그래서 '처벌' 받은 사람들은 억울한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이걸 '권력비리'가 아니니 수사선상에 올리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 사람들은 도대체 머리에 ㄸ...쿨럭쿨럭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걸 밝혀두는 바다. 그보다는 더 심오한 내용을 다루며 하루 10분이면 머리에 쏙쏙 담을 수 있는 '하루지식습관'을 기를 수 있는 유용한 책이라는 사실을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다. 다시 원론으로 되돌아가서, 교양 많은 책을 꾸준히 읽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며, 그 습관에 '속도'를 붙여 20대에 지적담론을 나눌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몇 자 적어보았다. 그리고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2>에서는 '나아가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1권이 '홀로서기'였다면, 2권에서는 '나아가기'다. 마치 어린아이가 두 발로 우뚝 서는 기쁨을 1권에서 채웠다면, 2권에서는 위풍당당하게 발을 내딛으며 걸어가는 즐거움을 맛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걸맞게 2권에서는 '인류의 발자취'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두 발로 걸어서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내용부터 교통의 발달로 세계를 누비다 드디어 우주까지 누비게는 되는 교양지식들을 말이다. 어찌보면 '서고', '걷고', '달리고', '날으는' 단계별로 시리즈가 차곡차곡 진행될 것 같은데 벌써 우주까지 지적영역을 확장시켰으니 너무 앞서간 것처럼 느껴질 법 하다. 하지만 각 단계별로 '또 다른 지적향연'이 마련되어 있을테니 그런 걱정을 하덜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지식을 통해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알면 알수록 고뇌와 고통에 빠지는 경험도 했더랬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푸념도 즐겨 쓰곤 한다. 하지만 모르는 게 정말 약이 될까? 내 남편, 내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더라도 '나만 모르면 행복'이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나만 모르면 바보'가 정답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부정한 사실'인데, 나만 모르고서 허허하며 웃고 지내는 것이 어찌 행복이란 말인가. 그렇게 행복한 나를 향해 주변 사람들은 뭐라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그럼 주변 사람들까지 '완벽하게 비밀스런 불륜'을 저지르면 되겠다는 생각에 다다른 멍청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언제까지 '속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완벽이란 것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꼭 직접적으로 체험을 해봐야 깨닫는 멍청이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나쁜 짓은 할 생각도 말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지적교양을 쌓은 사람들이 부정, 부패, 비리 따위를 싫어하는 까닭도 그런 것이다. 단순히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단순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해서 교양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지적교양이란 결코 부도덕할 수 없는 법이다.

  예를 들어보자.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전공의 파업' 사태 말이다.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망가진 탓이 과연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파업에 동참한 의사들 탓인가? 아님 '의대정원 확대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탓인가? 지적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둘 모두에게 있다고 탓할 것이다. 왜냐면 두 집단(?)이 모두 파렴치하게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외과, 소와과 같은 필수의료를 행하는 의사수가 부족하다며 의대생을 더 많이 뽑겠다고 하지만, 의사들이 왜 '필수의료과'에 지원하지 않는지 잘 알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의대생을 많이 뽑으면 해결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고, 이에 발끈한 '전공의들'은 파업도 불사하면서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돈벌이에 비해 힘들고 고된 일이라며 외과나 소아과에 가지도 않으면서, 늘어나는 의대생 때문에 자기몫(의사 평균 연봉 3억원)이 줄어들까봐 환자들의 생명까지 내팽개치고서 거리로 나섰다. 이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일삼는 무식쟁이들에게 생명을 맡기고 나라를 맡겼다. 그러니 선량한 국민들이 무식한 탓이라도 해야 하는가? 이는 부도덕한 가해자들이 즐겨(?) 써먹는 '피해자 탓'이고 궤변이다. 잘못은 저들이 저질러 놓고서 되레 '억울하게 당한 사람'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교양을 가진 이들은 누구 탓을 해야 옳을까? 당연히 '무능한 정부탓'을 해야 하고, '이기적인 전공의 탓'을 해야 한다. 응급실 뺑뺑이로 죽은 환자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냔 말이다. 생명이 위독한 중환자를 방치하고도 과연 의사 자격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환자 돌보기에도 바쁜 의사들을 거리로 나설 지경으로 만든 '정부의 무능함'은 지적교양을 가진 국민들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에서는 '지식'이 곧 '무기'라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적교양으로 '무장'한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에게 맞서는 무지랭이들이 없어질 것이란 말이다. 맹자는 '인자무적'이라고 했다. 어진 사람에겐 대적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토록 어진이가 지혜까지 충만하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도덕적인 윤리의식을 바탕에 두고 널리 사람에게 이로운 지혜를 발휘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는 뜻도 된다. 지적수준을 높게 쌓았어도 '자기이익'만을 위해서 써먹는 사람들은 권력자나 엘리트라고 불릴 수는 있어도 결코 '지적교양'을 쌓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영혼은 더더군다나 깃들 수 없는 고깃덩어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몸에 걸치고 있는 명품이 부럽고 반짝이는 보석들이 아름답다고 여긴다면 지적교양을 더 수련해야 할 것이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으로 올바른 지적교양으로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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