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국사 산책 11 - '성찰하는 미국'에서 '강력한 미국'으로 ㅣ 미국사 산책 1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1월
평점 :
[My Review MDCCLXXXV / 인물과사상사 18번째 리뷰] 미국의 70년대와 80년대에는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과 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다. 두 대통령은 그 성향부터 극명하게 달랐는데, 이를 저자는 '성찰하는 미국'과 '강력한 미국'으로 함축해서 설명하였다. 한마디로 카터 대통령은 '인권'을 중시하는 도덕적인 정치를 지향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힘'을 바탕으로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미국으로 거듭나길 바랐다고 한다. 하긴 38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였기에 뒤를 이은 카터 대통령은 도덕적으로도 깨끗한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카터 정부를 지내며 위축되었던 '미국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픈 분위기가 띄워지자 '강한 미국'을 표방한 대통령이 당선되어 미국을 이끌어 나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와중에 한미간에 중대한 사건들이 터져나왔는데, 박정희 정권 때에 '코리아 게이트' 사건과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광주민주화혁명' 사건이다. 각각 카터 대통령 시절과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전이었는다.
'코리아 게이트'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이 '박동선'이란 한 개인을 통해서 미국의 고위급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 자금'을 뿌린 사건인데, 이것이 미국에겐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 있었는지 미국의 정치인과 언론인 들이 들고 일어서서 한국을 맹비난하며 쌍욕까지 서슴지 않아 대한민국에 심각한 정치, 경제, 안보 등에 악영향을 끼친 사건이 되고 말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약소국 한국이 강대국 미국에게 잘 좀 보아달라며 '뇌물'을 갖다 바친 것인데, 뇌물을 받아쳐먹은 미국놈들을 벌주기는커녕 감히 한국 따위가 미국에 돈을 펑펑 쓰면서 '로비'를 일삼다니 괘씸하다는 듯이 열불을 내고 만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능력도 없으면서 미국 고위관리층에게 '거액의 로비 자금'을 퍼줄 여력이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경제원조 중단', '주한미군 철수', '미국 농부들 밥줄 끊길뻔 했으니 미농산물 한국 니네가 싹다 수입해' 등등 한국에게 덤터기를 씌워도 이만저만 씌운 것이 아닌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는 이런 모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미국의 경제원조가 끊기면 '대미 수출길'이 막히는 것인데, 미국에 '완성품'을 수출하는 것으로 겨우 경제를 살려나가고 있는 판국에 이걸 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한미군 철수'는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얼마전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져 가뜩이나 남북간의 긴장감이 고조된 판국에 '주한미군'이 철수까지 해버리면 만에 하나 전쟁이라도 발생했을 시에 한국이 단독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경제성장의 싹을 틔웠을 뿐, 70년대 대한민국은 아직도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런 판국에 또다시 전쟁까지 나버린다면 그야말로 폭망하는 일밖에 남지 않게 되니 '미군철수'는 아직이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으로 '한국의 농부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미국의 농산물을 대량으로 수입하도록 허가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바닥을 찍게 되었다. 좁다란 땅에서 겨우 자급자족할 식량을 근근히 생산하던 시절이었는데, 미국에서 '값싼 농산물'이 대량으로 수입해서 들여오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곡식들은 내다 팔지도 못하고 갈아엎어야만 했으며,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던 이들은 땅을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시노동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이른바 '이촌향도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이것이 어찌어찌 80년대 고도성장기와 맞물려 '공장노동자'를 충당하는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70년대에는 그야말로 농촌도, 도시도 빈곤하고 가난한 이들이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는 일이 되었다. 특히 '코리아 게이트'의 여파로 인해 대한민국의 농업은 아직까지도 '자급률'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단다. 망가지긴 쉬워도 다시 회복하긴 어려운 법이다.
한편, 박정희가 피살되고 혼란했던 정국을 수습한 건 '전두환 신군부'였다. 허나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공수부대로 짓밟으며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런 폭정의 시대가 다시금 도래했는데도 미국은 '신군부의 편'이었다. 자국민을 짓밟는 무뢰배를 향해 꾸짖기는커녕 도리어 신속히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자(?)'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과연 미국은 도덕적인 나라인가? 인권을 중시하던 카터 대통령은 어디 갔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알만한 지식인들은 하나 같이 이런 행태를 자행하는 미국에 대해 '비난'을 쏟아부었다. 이른바 '반미주의의 탄생'이다. 광주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신군부의 행태를 두둔하는 듯한 미국의 언론도 한몫을 하였다. 신군부에 저항하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을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레밍 떼'에 비유한 것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모한 '죽음의 행진'을 멈추지 않는 레밍처럼 신군부의 총칼과 몽둥이 앞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광주의 시민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의아해했단다. 광주에서는 저렇듯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광주밖에서는' 어찌도 그리 조용한 것이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광주의 시민들은 신군부의 총칼과 몽둥이 세례를 받으면서도 한줄기 빛을 기다렸다. 자신들의 저항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미국이 알게 된다면 미국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란 것을 말이다. 인권유린을 참지 않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미국이 신군부의 폭력을 잠재워줄 막강한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나 그 빛이 사그라들었다. 전두환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신속히 '정국안정'을 이룰 적임자로 '선택'하면서 말이다. 그리고서 미국은 뒷짐을 지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그렇게 미국이 뒷짐진 사이에 신속하게 광주를 쓸어버렸다.
그렇지만 '광주밖에서' 조용히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설처대는 신군부와 뒷짐진 미국을 그대로 좌시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반미주의'를 외치기 시작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그저 소소한 시작일 뿐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는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과격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군부를 향한 데모는 끊이질 않았다. 정의롭지 못한 전두환을 두둔한 미국을 향해서도 확실히 반대했다. 이러한 일련의 '반미주의'는 당시의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과 맞물려 계속 울려퍼지게 된다. 이는 1987년 6월의 그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과연 대한민국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두 나라의 운명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느냔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을 때까지 나의 '미국사 관련 책읽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