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5
우용곡 지음, 전인혁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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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와 종교,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참으로 묘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선을 그을 수도 없고, 이렇게 보거나 저렇게 볼 때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싸그리 뭉뚱그려서 '낡은 것'으로 폄하되면서 '비현실적'이라고까지 매도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역사왜곡'이니 '동북공정'이니 떠들면서 '그 옛날의 것'으로 과거를 평가하고 오늘과 미래를 재고 점치는 등의 일을 여전히 벌이고 있다. 심지어 고대에 벌어진 일로 한중일 삼국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놀랄 지경이다.

 

  이를 테면, 중국의 고서에 나오는 '황제와 치우의 대결'을 이야기하며 중국인들은 끝내 황제가 이겼으니 중국이 최고라고 평가하고, 한국인은 열 번 싸워 아홉 번 이기고 겨우 한 번 졌으니 황제보다 치우가 더 위대하다면서 '동이족의 신화'를 부풀려서 현대 한국이 중국의 국력을 넘어선다고까지 평가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일본의 고서에 나오는 한 대목에 '여자천황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바다 건너 신라를 쳤으니' 한국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마땅하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허구맹랑한 논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개인적으론 신화나 종교, 역사를 통해서 제 잇속만 챙기려는 탐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화나 종교, 역사는 모두 '문화의 일부분'인데, 포괄적인 문화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문화의 우월성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그 광대한 문화마저 '한국의 것', '중국의 것', 그리고 '일본의 것'으로 조그맣게 규정하려는 속좁은 심보의 결과물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다. 그런 까닭에 신화, 종교, 역사는 크게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정보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문화는 한 나라에만 국한 되지 않고 이웃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형성되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활발히 교류했던 한중일 삼국을 비롯해서 베트남과 대만, 유구까지 서로 비슷한 문화와 전통을 저마다 계승발전 시켜온 결과물인 셈이다. 이러한 문화에 우열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생각의 저변으로 이 책 <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를 읽으면, 우리 나라의 신화를 통해 유교, 불교, 도교, 무속신앙 등의 우리의 종교와 더불어 고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신화가 중국에서 비롯된 거였어?', '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와 관련이 없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거지?', '어? 치우는 우리 조상신인데, 왜 중국신인 황제에게만 제사를 지내는 거야?' 등과 같은 질문은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우리에게 '신화'가 왜 필요한 것인지 의미를 파악하면서 이 책을 풀어보려 한다. 앞서 밝혔듯이 조선은 '유교의 나라'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인데, 그 까닭은 음양의 이치를 조화롭게 하여야 세상만물이 평안하게 된다고 조선사람(성리학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단 유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바라는 이치이고, 신화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 까닭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유교'를 표방하였던 탓에 모든 것이 '유교식'으로 표현되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화를 통해서 민족의 우월을 따지는 행위는 지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한 것이니 개무시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무속신앙에 따른 제사 뿐 아니라 도교식, 불교식 제례까지 지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조선을 건국한 이들은 숭유억불을 내세우며 전국의 사찰을 축소하고 승려들을 핍박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천주학(서학)'을 탄합하며 수많은 천주신자들을 절두산에서 목을 베던 철저한 '유학자'들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고 막으려고 막아지고 골라담으려고 담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교의 나라'인데도 그 이전 왕조에서 시행되던 행사를 이어 나간 것이다. 또한, '단군제'나 '관왕묘 제례'와 같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제사방식만 살짝 유교식으로 바꾸어서 '민족의 정기'를 북돋우고 '충성스런 신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요긴하게 써먹었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는 중국신으로 여기는 신농, 황제, 기자 따위도 조선에서 적극 받아들여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지낸 수많은 제사와 제례를 살펴보면 '우리 고유의 신앙'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화'까지 모두 엿볼 수 있다. 먼 옛날 공자나 맹자도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공맹의 도'가 무엇인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를 테면, 풍백, 우사, 뇌사, 운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날씨의 신'에게 기원을 하는 주술적인 면 뿐만 아니라 '농업'이 나라 경제와 정치, 그리고 일상에까지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점을 엿볼 수 있고, 성현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음복을 바라던 유학자들이 명산대천과 성황신에게 제사를 고하는 모습을 통해서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오래전부터 깨닫고 실천하였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끝으로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신화를 품고 살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단연 '홍익인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고조선의 건국신화 속에서만 '홍익인간'을 찾곤 하지만, 반만 년전에는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사상이었다. 바로 '홍범구주'라는 말인데, 바로 뒤치면 '아홉 주를 평정해 천하를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사상을 펼쳤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지내던 제사는 모두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어 모두가 평안하게 지내라는 뜻을 담아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 선한 신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 빌었고, 악한 신에게는 제물을 바쳐 인간에게 해악이 미치지 않게 했으며, 자연신에게는 풍요를 빌고, 조상신에게는 후손들에게 복을 빌어주라는 뜻을 담아 정성스럽게 모셨던 것이다. 이쯤 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놈이 나쁜 셈이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신화'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신화'만 떠올리지 말고, '우리 신화'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실제로 외국의 신화보다 '우리 신화'가 알고 나면 더 재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다가올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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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업분석이 처음인데요 - 꼼꼼한 생초보의 기업분석 입문기, 2022년 개정판 처음인데요 시리즈 (경제)
강병욱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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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도 잘 모르고 하지도 않는 내가 '주식책'을 읽고 있는 게 이상할 따름이지만, 그 누구도 '주식'을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주식공부 차원'에서 관련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닥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다만, '주린이'인 처지에 주식책에 대해서 나불거리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주린이들을 위해서 몇 자 적어보련다.

 

  이 책은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의 '후속작'으로 주식에 대해서 기초를 닦았다고 여기는 분이 좀더 심화된 '종목투자'에 대한 공부를 하기 딱 좋은 책이다. 주식투자자의 목표는 주식를 사고 파는 과정을 통해서 '이득을 최대한 많이 내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운빨에만 맡긴 채 '투자원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투자를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앞서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에서도 투자에는 '원칙'이 필요하고, '철학'을 세워야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투자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좋은 종목을 고르는 안목'이 필요한 법이다.

 

  여기서 '좋은 종목'이란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 수 있는 종목이며, '매수시점'과 '매도시점'의 차익을 크게 할수록 좋은 종목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을 하는 투자자라면 '당연한 얘기'고, 주식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데, 투자를 하면 할수록 '좋은 종목'을 고르기가 힘들어지 때문에 고민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흔히 '초보자의 행운'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투자한 종목이 대박을 터트리며 많은 수익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행운도 잠시, 종합주가는 오르는데 투자한 종목만 내리막을 타거나 지지부진한 상황에 처해 매수를 할지, 매도를 할지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종목'을 고르는 안목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쳐보지만 '주린이'의 눈에는 그마저도 어려울 따름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좋은 종목'을 고르기 위해선 '기업분석'이 필수라고 한다. 그러나 '기업분석'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영역인 탓에 초보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을 따름이다. 이를 테면,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완제품'을 판매하는 종목은 주가가 하락하고, '원자재'를 판매하는 종목은 주가가 상승한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상식인데, 원자재 가격은 폭등하는데 완제품을 팔면서도 주가가 상승하는 종목도 있다는 것이다. 신개발을 통해서 신상품에 대한 기대가 모아지는 종목이라든지, 당장은 수익을 창출하기 어렵지만 신기술로 대박이 점쳐지는 종목 따위는 상황이 역전되어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편, 국내 투자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이 '사자세'로 돌아서서 마구마구 주가가 폭등하는 장세가 펼쳐지기도 하니 기업분석을 할 때는 '이론'만 따질 것이 아니라 '정보'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초보자들에게는 이것저것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 많아서 '간접투자'의 형식인 애널리스트에게 대신 투자를 맡기는 방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또는 기업분석을 전적으로 전문가인 애널리스트의 분석정보에만 의존해서 믿고 따르는 '매뉴얼'로 삼아 투자하기도 한다는데, 글쓴이는 '좋은 투자방법'은 아니라고 조언한다. 왜냐면 애널리스트의 분석정보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란다. 애널리스트가 투자전문가인 것은 맞지만 그들의 분석으로 인해 '주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긍정적인 시그널은 소신껏 발표하지만, 부정적인 시그널은 애써 모른 척하거나, 부정적인데도 긍정적인 것처럼 바꿔서 발표하기도 하기 때문이란다. 왜냐면 애널리스트들도 '월급쟁이'인 탓에 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투자전문가의 말만 믿고 투자하는 방식은 결코 '좋은 투자방식'이 될 수 없고, 오직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소신과 철학에 따라 '자기만의 투자방법'을 익혀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바람직한 투자를 위한 '기업분석의 AtoZ'가 담겨 있고, 'Q&A' 방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웬만큼 주식투자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기업분석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주식투자에도 '철학'이 필요했다면 기업분석에도 '철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주식투자를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팔랑귀'가 되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면 '가장 좋은 종목'은 '가장 수익이 많이 나는 종목'인데, 그런 투자처를 손쉽게 남들과 정보공유를 할 바보는 없기 때문이란다. 고로 주식투자는 '고독'하기 마련이란다.

 

  예를 들어, 기업분석의 대가인 '피터 린치'는 자기만의 철학으로 투자하기로 유명한데, 그의 투자원칙 가운데 유명한 것이 '이름이 이상한 주식'을 사모으는 것이란다. 그가 밝힌 이유는 '이름이 그럴싸 하면' 남들의 주목을 받기 쉽고 기업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 십상이지만, '이름이 이상하면' 투자자들에게 외면받기 일쑤고, 그래서 '기업가치'보다 더 낮은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더욱 큰 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쌩뚱맞은 투자방식이지만 '자기만의 투자이유가 분명한 까닭'에 투자에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에 '원인분석'을 정리하기도 편리해진다. 이렇게 쌓인 '자기만의 투자원칙'은 아무도 따라하지 못하는 '성공노하우'로 거듭날 수 있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피터 린치는 그 가운데서도 '실패'를 줄이고 '성공'을 높이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했을 것이 분명하다. 투자철학이란 모름지기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난 '주식'은 잘 몰라도 '철학'은 웬만큼 안다. 또한 '철학'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실천하고 소신껏 행동한 다음에 원칙으로 승화시키는 것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철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 주식의 투자철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만의 '기업분석 노하우'를 쌓고 또 쌓으면 누구나 자기만의 철학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할 것이다. 실패는 줄이고 성공은 높이는 '원칙'을 찾는 것, 그것이 성공적인 투자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수많은 '분석방법'을 토대로 공부한 뒤에 '자기만의 투자철학'대로 전략적인 투자자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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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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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의 시선으로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는 것은 '역지사지'라는 효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간단하게 '우리의 역사를 제3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도 볼 수 있다'고 표현하면 될 것을 말을 어렵게 하느냐고 따진다면 '일본인 저자의 글쓰기'가 늘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에둘러서 말을 길게 끌다 못해 말꼬리를 붙잡기까지 한다고 핑계를 대련다. 이를 흔히, '혼네(감춘 속마음)와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낸 표현)'라면서 상대에게 폐를 끼치기 싫고 예를 다하기 위하는 일본인의 이중적인 표현법이라고 소개하지만, 이것조차 간단하지 못하니, 그냥 '일본의 사고방식'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고 싶다.

 

  이 책의 골자는 전세계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까닭을 살펴보면서 '이해당사국들의 셈법'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21세기에 들어서도 전쟁은 계속 일어나는 것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일본은 '타자의 관점'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일본의 관점'에서만 세계사를 이해하려 들고, 특히 '청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까지'의 세계사를 일본편향적으로만 이해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일본인 저자의 입을 통해서 처절한 '역사반성'이 나오는 것인가 기대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다다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릴 뿐, 여전히 '일본은 잘났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연이어 '일본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질타를 서슴지 않는데, 일본인 치고는 '참 잘 때린다' 싶을 정도로 속시원하고, 역시 일본답지 않게 '빠른 전개'로 역사서술을 펼치고 있어서 색다른 느낌이 들 정도로 시원시원한 역사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 근현대사'에 대해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저자의 관점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 스스로 "정정당당하지 못했던 전쟁이었으며 일본에게 유리한 결론도 내지 못한 전쟁이었다"는 평가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의 결론은 '일본 청년들에게 바라는 바람직한 역사관 형성'으로 끝맺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닥 중요한 내용은 아니겠으나, <손자병법>에 이르길 '지피지기'하라 했으니 철저한 탐색은 필수라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일본의 잘못된 선택'이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청일전쟁 승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인에겐 대국과 싸워 이긴 첫 번째 전쟁이었고, 근대화로 이룬 최대의 성과라는 점에서 일본에게 이득만 가져온 '청일전쟁의 승리'가 왜 일본인에게 독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청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뒤이어 벌어진 전쟁에서 일본과 일본인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연이은 헛발질을 하게 된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에 벌인 전쟁에서 "얻은 것은 없고, 얻은 것이 있더라도 수많은 젊은이들의 주검 위에 차린 밥상"이라는 식으로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이런 식의 표현 때문에 일본 청소년들 앞에서 강연을 한 저자가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꿋꿋하게 주장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전쟁은 돈이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면서 일본은 패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말이다. 물론,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초반까지 일본은 승승장구 했고, 일본을 '제국주의국가의 대열'에 낑기게 하여 대(大)일본인의 자긍심을 우주너머까지 찌르게 만들기도 했지만,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인해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죽어나간 것을 필두로, 청일전쟁을 빼고는 승리한 뒤에 '배상금'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으며 어마어마한 빚만 잔뜩 지게 되어 모든 일본인들을 경제난에 빠뜨렸으며, 심지어 '전쟁을 승리한 비결' 또한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비겁한 기습'이었다고 일본 청소년들에게 강연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청소년들에게 "세계사적 관점으로 일본사를 보아야 진실을 보게 된다"며 역사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밖에도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지만, 피해국의 관점에서 보면 '새발의 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허나 일본 내부에서는 그정도만으로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릴지경이라는 것이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 뿐이고 말이다.

 

  암튼, 글쓴이는 일본이 전쟁을 통해서 얻을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과거의 집권세력들'이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면서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감이나 우리가 바라는 처절한 반성 따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일본인의 역사관점은 이런 것이다'라는 대략적인 그림이 보여질 뿐이다. 물론, 그 그림이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허나 '일본이 자랑스러워하는 과거의 전쟁의 진상은 이랬다'고 말하는 일본저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기에 색다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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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현의 친절한 인문학 - 고전 20권 쉽게 읽기
임수현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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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노타우르스가 갇혀 있는 미궁속으로 들어간 테세우스가 무사히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까닭은 아리아드네가 미리 마련해준 실타래 덕분이었습니다. 한 번 발을 들이면 살아선 나올 수 없는 복잡한 미로 속에서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워서 이겨내고 아테네 청년들을 무사히 구출해낸 영웅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영웅 서사시'로 딱 어울리지만, 정작 생사의 갈림길의 최종 미션은 괴물도 때려잡는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지혜가 필요했던 겁니다. 뜬금없이 '그리스신화'의 한 토막을 끄집어냈지만, 고전읽기의 중요성과 고전읽기를 도와줄 '길라잡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썰을 좀 풀까 합니다.

 

  고전은 어렵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말할 것도 없도 어른조차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질색할 정도로 고전은 읽기 싫은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고전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고전의 제목'은 읽지 않았어도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신통할 따름이지만, 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로 고전은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의 '원전'이 바로 <고전>인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를 테면, 플라톤의 <국가>를 읽지 않았어도 '동굴의 우화' 내용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은 어떤가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말했던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도 역시, 읽지 않아도 교과서를 통해 누구나 한 번쯤 배웠던 내용일 겁니다. 심지어 게임을 즐기는 어린 친구들은 게임 캐릭터 가운데 '리바이어던'이라는 고대 괴물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어디서 유래한 괴물인지 몰라도, 어쨌든 '들어는 봤다'는 것이 <고전>입니다.

 

  이토록 유명한 <고전>이라면 우리가 읽어줘야 하는 게 예의입니다. 그리고 읽어보면 의외로 재밌다는 소감을 풀어놓는 이들도 꽤나 많습니다. 어릴 적에는 너무 어려워서 손도 댈 수 없었는데 나이가 드니 어렴풋이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잡힌다는 얘기도 곧잘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르니까 어렵고 알면 쉽다'는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면서 곧잘 써먹는 '격언'인데, '아는 것이 힘이다'와 '아는 만큼 보인다'를 적절히 섞어서 제가 만든 문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조차 제가 처음 쓴 말은 아닐 겁니다. <고전>의 어느 한 구석에서 잠들어 있을 문구를 제가 우연히 써먹게 된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고전>은 인류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암튼 샛길로 더 빠지기 전에 본론을 얘기하려 합니다.

 

  <임수현의 친절한 인문학>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가가 엄청 미인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어려운 고전을 '미모의 길라잡이'와 함께 읽으니 하나도 어렵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책표지'를 보면 수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미인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서 '뷰티책'인가 싶지만, '책제목'을 보면 <인문학>이라는 제목이 있어서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심지어 '써니피디아'라는 너튜브를 검색하면 아름다운 피아니스트가 쇼팽을 연주하는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인문학책을 소개하는데, 저자의 미모를 따지는 어리석음은 도대체 무슨 의도냐? 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법도 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남자나 여자를 가릴 것 없이 강력한 힘이 되는 법입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꼬꼬마들도 '선생님'이 못생겼으면 말 안 듣고 잘 생기고 예쁘면 말 잘 듣는다고 합니다. 씁쓸하지만 '원초적 본능'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에 끌리고 매혹되는 법입니다.

 

  자, 이제 중요한 사실을 언급할 겁니다. 우리에게 '고전읽기의 길라잡이'가 꼭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두께도 두껍지만 내용은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임수현과 함께 읽으면 12쪽만에 <국가>에 담겨 있는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480쪽에 달하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은 15쪽이면 대강의 줄거리는 물론 책속에 담겨 있는 주제까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할까요?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뿌려주는 것만으로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맑은 물을 퍼올리게 해주는 마중물 말입니다. 요즘이야 자동펌프가 있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마중물'을 접해볼 수고조차 필요치 않게 되었지만, 우리가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과학적 원리'를 담아 인간이 쓰기에 편리한 기계를 만든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는 얘깁니다.

 

  딴에는 '그딴 것'을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 <돈 키호테>를 읽지 않아도 연극과 드라마를 통해서 '돈 키호테' 같은 등장인물이 펼치는 코믹한 행동에 웃음보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고아 소년의 눈을 통해 미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문제점까지 고발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몰라도 사는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꼭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 3부작>을 꼭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고전읽기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가요?

 

  읽으면 다릅니다. '고전의 무게'는 책 두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의 남다른 깊이'로 정해집니다. 때론 고전을 읽다가 우주만큼 광활해지는 '혜안'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전은 '생각의 깊이'와 '사고의 드넓음'을 주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동의 여운'이랍니다. 고전의 저자들은 고뇌와 고뇌를 거듭하며 '한 문장'을 써내려갔고, 그 고뇌의 끝자락에서 어렴풋이 한 가닥 불빛을 잡아낸 듯한 '진한 감동'을 <고전> 속에 녹여냈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으면 다른 책에서는 읽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에 꼭 읽어보라고 간절히 권하는 겁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한 눈에 보일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의 미궁' 속에서 실타래가 되어줄 '길라잡이'가 필요한 법입니다. 저 또한 그러한 길라잡이가 되고자 '리뷰어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 뿐입니다. 언젠간 저도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어 여러분에게 보탬이 된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 전에 임수현이라는 '아름다운 고전 길라잡이'와 먼저 재미난 인문학 여행을 떠나시길 바랍니다. 친절함은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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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세계문학산책 15
너대니얼 호손 지음, 붉은 여우 옮김, 김욱동 해설 / 지식의숲(넥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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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물론 실수의 경중을 따져서 무거우면 벌을 받고 가벼우면 용서를 받아 '잘못'을 뉘우치는 이에게는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뉘우치지 않고 또 다시 실수를 저지른다면 엄벌을, 심하면 사형에 처하거나 완벽한 격리를 시켜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사회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직한 사회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실수를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죄를 저지른 이에게 패널티(불이익)를 주는 것은 마다하지 않는다. 무겁든 가볍든 말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면 어떤 벌을 주어야 마땅할까? 흔히 말하는 '간통죄'를 저지른 부정한 여자다. <성경>에는 십계명이 나오는데, 일곱 번째 계명이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이 책의 배경이 17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인데, 청교도 신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까닭에 청렴하고 경건하며 엄숙하며 독실한 신앙만을 믿고 따르는 사회에서 '제 7계명'을 어긴 여인은 사형을 처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셈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사형을 면했다. 왜냐면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지른 죄였기 때문이다. 만약, 남편이 살아있다면 사형판결이 마땅하지만, 남편이 이미 죽은 상황이라면 정상참작을 할 여지가 남겨졌다고 중지를 모은 결과다. 그럼에도 중죄인 것은 묵과할 수 없기에 사형을 대신해서 평생토록 가슴에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징표'인 'A' 글자를 달고 살 것을 주문했다. Adultery의 앞글자인 셈이다. 이렇게 이 책의 이야기는 '부정한 여인'인 헤스터 프린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슴에 '낙인'을 달고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헤스터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감내하는 형벌을 받을 때, 그녀를 감싸주는 이가 있다. 바로 아서 딤즈데일이라는 목사다. 그는 헤스터에게 '죄의 무거움'을 혼자서 감내하지 말고, 사생아(펄)의 아버지를 밝혀서 불륜남도 똑같은 죄를 받게 하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죄의 무게'를 덜게 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당하는 수치와 모욕을 똑같이 앙갚음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헤스터는 끝내 불륜남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아니 밝힐 수 없다고 한다. 끝내 까닭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독자들은 궁금증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워낙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고, 명석한 독자들이라면 그 불륜남이 다름 아니라 '목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불륜남녀의 등장으로 충격적인 상황에 '진짜 남편'이 등장하면서 막장(?) 드라마의 구성요건은 모두 갖추게 된다. 헤스터는 펄을 가슴에 꼭 안고서 남편을 만난다. 2년만에 나타난 남편은 불륜의 상징인 'A' 글자와 사생아를 함께 바라보면서 담담히 말할 뿐이다. 못난 남편으로서 당신의 죄를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신의 삶을 수치스럽게 만든 '그 남자'는 용서할 수 없으니 밝히라고 말한다. 헤스터는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당신의 남편'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하지 말아 달라고 협박(?)한다. 그리고 불륜남을 꼭 찾아서 복수를 하겠다고 말하고 헤스터 곁을 떠난다.

 

  이 책의 이야기는 이렇게 '세 남녀'를 주목하며 작가는 각자의 세계를 펼쳐보일 뿐이다. 아빠 없이 사생아로 자라는 펄의 모습도 간간히 보여주지만, 세 남녀의 죄를 부각하거나 깊게 고뇌하게 만들거나 형언할 수 없는 순진무구함을 보여주는 '감초 역할'을 할 뿐, 작품의 주제와는 살짝 비켜서 있으니 이번 이야기에서는 논외로 하련다. 암튼, 간통녀와 간통남, 그리고 원래 남편의 삶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 독자가 해야 할 역할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독자들은 '원래 저지른 죄(결과)'보다는 '죄 지은 뒤의 삶(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헤스터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하고, 주어진 시련을 '감내'하고, 끝내 '극복'한다. 가슴에 '낙인'을 달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고 지나간 상처를 다시금 헤집어서 기어코 피를 본 뒤에 아물기도 전에 또 상처를 파헤치는 '고난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헤스터는 자신의 죄를 감내할 뿐이다. 오히려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주며,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고, 검소한 삶을 살며, 그렇게 아낀 재산을 더 배고픈 이들에게 선뜻 나눠주는 '청교도적 신앙'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반면, 불륜남인 아서 딤즈데일 목사는 나날이 초췌해져 간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차마 밝히지는 못하면서 '자신의 고뇌'를 경험담 삼아 설교를 해나가며 수많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온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지만, 홀로 남겨진 시간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학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병들어가는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한편, 로저 칠링워드라는 '가명'으로 살기를 선택한 '복수남'은 해박한 의학지식으로 온 마을의 존중받는 지식인이자 의사로 거듭나지만, 오직 '복수'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가는 못된 심보로 인해 그의 외모는 나날이 '추악'해져만 간다. 그래서 그가 마을에 처음 나타났을 때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헤스터마저 '저 사람이 내 남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외모가 달라져서, 그가 헤스터의 원래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세 남녀는 각자 죄를 저질렀다. 헤스터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죄'를, 딤즈데일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밝히지 않은 죄', 그리고 칠링워드는 '법의 심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심판하려는 죄' 말이다. 하지만 죄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죄를 지은 '다음'이 더 중요한 법이다. 다시 말해,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런 주제를 담아 세 남녀의 마지막을 그렸다.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오히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더 훌륭한 행동을 몸소 실천한 헤스터에겐 '해피 엔딩'을, 자기 죄를 고백하지 못한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며 겉으로는 '존경받는 목사'지만, 속으로는 스스로를 '고행의 도구'로 삼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다 죽음 직전에야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에야 겨우 평안한 안식을 받은 딤즈데일에겐 '새드 엔딩'을, 그리고 남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못난이가 권리만은 놓을 수 없다며 '복수의 일념'으로만 살다가 추악한 행동에 걸맞는 추악한 외모를 갖추고서 삶에 아무런 의미도 담지 못한 '초라한 지식인의 삶'을 산 칠링워드에겐 '허무한 엔딩'을 보여 주었다.

 

  이 책이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된 삶을 살아가는 건 아무나 못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봐도 '원죄의 극복'을 위한 경건한 삶의 실천이야말로 '최고의 삶'이라는 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나타내는 글자 'A'를 전혀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존경할 수밖에 없는 상징 'A'로 만드는 삶을 살아간 헤스터 프린이 아주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선명한 '주홍빛'과 찬란한 '금빛'으로 수를 놓아 가슴 한복판에 장식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에 걸맞는 넓은 아량과 이타적인 삶은 처음부터 잘난 사람보다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 사람이 더 위대하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실수에 관대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더욱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으므로.

 

  이렇게나 훌륭한 작품을 담은 책인데도 평점이 후하지 못한 까닭은 '뒤침(번역)'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청소년을 위한 책인데, 직역을 한듯 매끄럽지 못하고 읽기에도 딱딱한 문장들은 어른이자 선생인 나조차도 읽다가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울컥할 정도였다. 같은 뜻이라도 더욱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듬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면서 말이다. 이 책 덕분에 '같은 제목'을 다른 책을 섭렵할 수 있어서 좋은 것 빼고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반면에 <작품해설>은 매우 수준급이었다. 청소년을 위한 책에 걸맞는 이해하기 쉽고 깔끔한 분석이 '고전명작'을 즐기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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