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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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 버전으로 읽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탓에 직접 읽고 비교하며 두루두루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이 가장 크지만, 부족한 소양으로나마 '뒤침(번역)의 차이'를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다. 이 책도 벌써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최근에는 '황금가지' 출판사와 '해문출판사'를 읽었기에 둘의 차이점을 대조하며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먼저,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책은 2004년 경에 뒤쳐졌고, 해문에서 출간한 책은 1991년 경에 뒤쳐진 듯 보인다. 뒤쳐진 때와 출간한 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정확한 뒤침 시기는 그보다 이른 것으로 짐작되지만, 둘 사이의 시기가 벌써 10년 이상 벌어진 것을 보면 벌써 확연한 차이가 눈에 띄였다. 가장 큰 차이는 '뒤침투'가 사뭇 달라졌다. 즉, '뒤쳐진 문장이 품고 있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황금가지에서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외판원이 '스타킹'을 판매한다고 뒤쳐졌지만, 이 책, 해문에서는 '명주양말'이라고 뒤쳐졌다. 비단실로 짜여진 양말이라니, 정말 세월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가. 또 하나는 황금가지에서는 푸아로가 '프랑스어'를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것을 십분 살려서 뒤쳐진데 반해, 해문에서는 푸아로의 말투조차 '우리말'로 뒤쳐진채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으로 뒤쳐졌다. 이는 두 출판사 사이의 가장 큰 차이이므로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알다시피 이 책의 '배경'은 영국이다. 하지만 명탐정(비록 은퇴하긴 했지만)으로 활약하는 에르퀼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으로 '벨기에식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영국인들이 스스로 문제시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에 대한 작가의 의향이 다분히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영국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는 영국 독자들에게 '외국인들도 영국인들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란 말이다. 따라서 영어권 독자들은 이런 작가의 의향까지 '영어 원문'을 읽으면서 함께 느낄 수 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독자들은 이미 '우리말'로 뒤쳐진채 이 책을 읽기 때문에 굳이 푸아로가 영국을 무대로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동시'에 읽어 내려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왜냐면 '영어'도 우리말로 뒤쳐졌고, '프랑스어'도 우리말로 뒤쳐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황금가지 출판사는 굳이 영어는 우리말로 뒤쳐놓고서 '프랑스어'는 푸아로의 입을 통해 전달되도록 해놓았다.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물론, 원작에서 외국인이 전달하는 '이질감'은 충분히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사람들에게 '프랑스 발음'은 '제2외국어' 수준으로 이해될 소지가 충분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에겐 '영어' 이외에 다른 외국어를 즉석으로 해석하고 뜻을 이해할 사람이 그닥 많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우리 독자들에게 상당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을 게다.

 

  물론, '모나미는 내 친구' 정도는 상식적으로 익히 알고 있을 테지만, 푸아로가 헤이스팅스를 부를 때 "Mon Ami~"라고 지칭하는 것이 단박에 이해될 한국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며 범인을 찾으려는 '추리소설'의 성격상 술술 읽어내려가는 '그 맛'을 제대로 살린 '해문출판사'의 책이 내게는 더 친숙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는 바다. 다만, 이 책이 뒤쳐진 때가 무려 30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뒤쳐진 말투'가 상당히 옛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추리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해문출판사'를 권장하고, 좀 더 세련된 읽기를 원한다면 '황금가지'를 추천하는 바다. 물론 또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게 된다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리는 바다.

 

  이로써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두 가지 버전으로 읽어나갈 명목이 생겼다.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으로 짐작되지만 하나씩 비밀을 벗겨나가는 즐거움으로 리뷰를 할 작정이다. 추리소설의 맛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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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1
아서 C. 클라크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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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을 거슬러'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좋았다던가 나빴다던가...그런 느낌이 아닌 그냥 먼 옛날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 과학자를 꿈꾸던 나에게 '공상과학'은 상상력을 펼쳐내는 탈출구 같았다. 그래서 '천문학'에 유독 관심이 많았고 낮이고 밤이고 하늘에 떠 있는 천체에 가없는 관심을 쏟았더랬다. 하지만 'SF소설'을 쉽사리 접하긴 힘들었다. 책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도 나에게 '이런 책'이 있노라고 알려주지 않았던 탓에 아이들이 돌려보던 '만화책'이나 '과학잡지'를 통해서 겨우 공상과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눈곱만큼 적은 양으로도 나에게 엄청난 상상력을 심어주었는데, 만약 제대로 된 <SF소설>을 일찍부터 접했더라면 어땠었을까?

 

  그러다 겨우 90년대 들어서야 아이작 아시모프를 비롯해서 아서 클라크, 그리고 프랭크 허버트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와 취업전선에 뛰어들던 시절이라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공상과학' 섭렵기는 21세기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 바쁘기는 20대나 30대에도 계속이었기에 40대나 되어서야 하나둘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이제 그 시작이다. <듄>을 구매했고, <파운데이션>도 구매했다. 이제 <스페이스 오디세이>마저 구입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21세기에 들어서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속에 구현된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50년 전에는 대단히 센세이션한 놀라움이었을테지만 2022년이 되어서 읽으니 '과거의 유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인우주선'이 토성의 위성까지 탐사를 떠난다는 허무맹랑한(?) 설정이 실현되지 못했음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탓에 읽는 내내 '기대감'을 선사해야할 스펙타클함이 무뎌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이 'SF소설계의 고전'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읽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2001이라는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이니 조금쯤 늘려서 3001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책속에 등장하는 '과학적 사실'은 살짝 뒤로 재껴놓고, 이 책이 말하고픈 '본심'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면 '고전의 깊은 맛'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속의 줄거리는 인류의 초창기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직 마땅한 '도구'를 발견하지 못해 최상위포식자들의 먹잇감 신세를 면치 못한 원시 구석기시대 말이다. 주인공은 '달을 감시하는 자'다. 아직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발달하지 못해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지내지만 '이름'이 뜻하는 바를 짐작하면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를 짐작케 해주는 이름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반투명한 '크리스탈'이 불시착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부터 '달을 감시하는 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된다. 그 전에는 표범과 같은 맹수가 나타나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작정 도망을 가야만 했고, 다른 동료가 표범에게 잡히더라도 구해줄 생각은 해줄 수 없는 나약한 '원숭이인간(유인원)'에 불과했는데, 크리스탈에 시선을 빼앗기고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달을 감시하는 자'는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가슴속에선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서 결국 손에 쥐기 딱 알맞은 돌멩이(석기, 주먹도끼)를 쥔 채 표범과 당당히 맞서 싸워 '표범고기'를 먹어치우는 쾌거를 거둔다. 이 일을 계기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최상위포식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1990년대가 되었다. 인간은 '우주선'을 띄워 '달기지'를 건설하고 수시로 여행을 떠날 정도로 '고도의 지능'을 갖추게 된 어느 날, 달기지에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서 '폐쇄조치'가 내려졌다는 괴소문이 돌게 되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달기지로 향하는 '플로이드 박사'는 비밀스런 임무를 띄고 홀로 떠나게 된다. 달에 도착해서 그가 마주한 것은 달표면에서 깊이 감춰진 TMA-1(티코 석판)였다.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이 석판은 만들어진 지 무려 300만 년이나 되었고, 발견 당시 태양빛에 반응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쏟아내고서 잠잠해진 상태라는 결과를 보고 받는다. 300만 년이라니...인간이 만든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외계 생명체(ET)'가 존재하는 것이고, 심지어 '지적인 존재'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런 '고도의 과학발달'을 이룬 지적인 외계 존재가 하필이면 지구의 위성인 '달'에 이런 물건을 심어두었단 말인가? 혹시 '지구침공'을 위한 전초기지인 것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선한 목적을 두었다면, 인류의 지능이 '자신들의 물건'을 발견할 정도로 발전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고, 그렇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던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디스커버리 탐사대원들'은 목성을 지나 토성을 향해 우주선을 파견한다.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 컴퓨터인 'HAL 9000'이 비밀 임무를 감추기 위해 탐사대원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지구로부터 16억킬로미터나 떨어진 우주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대원들은 답답함을 넘어 막막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주선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탓에 사건은 숨가쁘게 돌아가고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탐사대원 중 넷이 죽고 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보먼'은 겨우 미쳐버린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든 다음 지구와 통신을 통해 '비밀 임무'을 전해듯고 홀로 토성의 위성인 '이아페투스'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밀 임무'의 목적지인 TMA-2(스타게이트)를 발견했는데...

 

  이야기는 흥미진진하지만 '고전물'이 되어버린 터라 요즘 독자들에겐 '스펙타클'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속에서라면 5분안에 마무리될 '장면묘사'를 50페이지가 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묘사라는 것이 50년 전에나 흥분할 것만 같은 '무엇'이었기에 근래의 화려하다 못해 짜릿한 '장면연출'을 직관한 독자들에겐 별다른 감흥조차 주지 못할 '형형색색의 파노라마'를 펼쳐보이는 진부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참고 끝까지 읽다보면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할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외계 지적생명체와의 만남' 말이다.

 

  사실 'SF소설'에서 외계생명체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도 존재하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확률적인 계산'은 이미 해놓은 상태다. 온 우주를 통틀어서 '태양'과 비슷한 항성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항성들이 '지구형 행성'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계산해 냈다. 그 결과, 광활한 우주속에 '지구인'과 같은 '지적인 존재'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문제는 남았다. 우주가 너무나도 넓고 텅빈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지구가 가장 가까운 항성계인 '알파 센타우리'조차 빛의 속도로 4년을 넘게 날아가야만 한다. 별다른 조건을 따지지 않고 '빛의 속도'로 왕복하는데만 대략 8년이 걸리는 거리다. 아쉽게도 그곳에는 '지구형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 8년을 허비하며 조사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밖의 항성계는 편도로만 10년이 훌쩍 넘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현존하는 가장 빠른 우주선의 속도로 환산하면, 대략 200년이 넘는 세월을 우주선에서 보내야 겨우 도달할 거리라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외계 지적존재와의 만남'은 물 건너간 듯 보인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토록 먼 거리를 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면기술'이다. 마치 겨울잠을 자듯 우주선에서 출발한 직후에 잠에 들어 200여 년이 지나서 '깨어난' 뒤에 탐사활동을 한다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탐사방법이 바로 이런 '동면기술'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여전하다. '가는 동안'에 우주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인 조종'은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불침번을 서듯 탐사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안전한 우주항해를 한다는 설정을 하기도 하는데, 200년이 넘는 탐사 기간을 버티려면 '우주선 안'에서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가능성만 더듬을 뿐 '실현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긴 매한가지다.

 

  또 하나의 대안은 '육신'을 대체하는 것이다. 유한한 육신을 대신해서 무한한 육신으로 거듭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기계의 몸'을 빌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인데, 실제로 '뇌'를 제외한 모든 인체의 장기를 '기계'로 대신하거나 '뇌의 정보(기억)'를 컴퓨터에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이라면 광활한 우주항해를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현재의 뇌과학 기술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하는데...그렇게까지 해서 외계인을 만나야 할 까닭까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최근에는 '웜홀'이라는 것을 상상해냈다. 무한한 우주공간을 '순간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공간을 왜곡하는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 공간'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거니와, 다시 되돌린다해도 '그 공간'이 진짜 원래 공간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런 '공간이동'을 성공한다하더라도 '시공간'을 돌파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또한, '육신'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한 채 가능한 방법일지도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적인 요소는 '차원'을 넘나들면서 왔다리갔다리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육체적인 요소까지 '차원'을 넘나들었을 때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론상으로야 '원소 단위'로 인간을 쪼갠 뒤에 '또 다른 시공간'에 똑같은 갯수의 '원소'를 재구성해서 보낼 수는 있겠지만, 그 원소들이 분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친 뒤에도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양자역학'이 연구되고 있지만, 문제는 아직도 지구인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자, 이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외계 지적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다음 편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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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가? 정치를? 왜? - 요즘 것들을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이형관.문현경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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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를 보면 날마다 정치인들이 싸우는 소식만 전해진다.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정도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말이다. 이른바 '정쟁'이라는 명목 아래 서민들을 위한 민생법안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만이 펼쳐지곤 한다. 그뿐 아니다. 행정수반인 대통령을 비롯해서 그 휘하 장,차관들이 입에 올리는 정책이라고는 오로지 '부자들만의 잔치'를 벌이려는 듯, 민생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그들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연일 내놓기 일쑤다. 이에 야당이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여당은 대통령을 감싸며 '국민들의 지지율'만을 내세우며 그들의 정책이 정당하다고 아우성 소리를 지른다. 그 지지율이 20%든, 40%든, 반대하는 국민들이 50%가 넘는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말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하곤 한다. 열심히 일하라고, 싸우지 말고 화합하고 조율하라고 뽑아놨더니 고작 싸움질밖에 하질 않는다면서 말이다. 이놈을 뽑든, 저놈을 뽑든 매한가지니 아예 정치와는 담을 쌓고 나몰라라하는 국민들도 점점 늘어나기만 한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해도 되는 걸까? 정말 정치를 몰라도 괜찮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안 된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더 많은 국민들의 '정치참여'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것이기에 국민들은 더욱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정치인들이 '독재'를 하게 되고, '저들만을 위한 입법, 행정, 그리고 사법'까지 장악하여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것을 그대로 '방조'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온 국민은 정치를 잘 알고, 잘 하는 '정치 100단'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민주적인 교양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단 말이다.

 

  일단, 민주정치는 어려울지 몰라도 '교양시민'이 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일 뉴스를 '경청'하고 정치인들이 하는 짓거리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들이 전하는 정치적 의견(여론)에도 '경청'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 표출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 국회의원들이 어떤 법안을 추진하는지, 법관과 검사 들이 누구를 기소하고, 어떤 판결을 내놓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면 될 일이다. 그리고 '정치참여'할 기회가 보이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렇게만 하면 누구나 '교양시민'이 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정치적 수단'을 잘 모르겠다면, 선거날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높았다면 적어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난감해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집회나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이 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도 잘 알 것이다. 이뿐 아니다. '불매운동' 등과 같이 대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방법도 있다. 정치인과 경제인은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기 십상이니 '대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면 '정치인의 행보'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을 어떻게 평가를 내리면 좋을까? 평가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물론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있을 턱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정치가 이토록 혼탁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저마다 '개인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민주정치가 어려운 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평가기준'을 세워야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명분'이라는 것인데, 나의 정치참여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려면 '타당한 기준'을 내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는 '객관적인 잣대'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기에 참고 삼아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첫째,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하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다분히 '공리적인 기준'이지만, 발빠른 정책으로 신속한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견'을 묵살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일단 첨예한 논란이 예상될 때, 정책결정이 늦어져서 더 많은 손실이 발생될 때에는, 일단 '다수의 이익'을 챙기고 난 다음에 '소수를 위한' 후속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기에 하는 말이다. 둘째, 법과 질서를 지키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취지였다고 하더라도 사법체계를 흔드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다만, 법과 질서를 내세우면서 '저들만의 잔치'를 노리고 있다면, 법과 질서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심판'을 먼저 받게 될 것을 명심하는 바른 정치인이어야 한다. 셋째, 부도덕한 윤리, 또는 그에 준하는 철학을 내세우며 '독단적인 행보'를 내딛으려는 정치인을 솎아내야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위에 내놓은 '나름 객관적인 기준'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용의주도하고 심보 고약한 철면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정치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주권자인 '국민의 동의'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대의민주주의'를 앞세워 정치인으로 뽑힘과 동시에 '면책특권(?)'을 내밀면서 뻔뻔스럽게 '저들만의 잔치'를 누리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런 뻔뻔함은 저들의 '독단적인 판단'을 '국민들의 결정'이라고 오인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적어도 그런 뻔뻔한 작자들은 절대 '정치인'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냥 '정치꾼'에 불과한 쓰레기인 까닭이다. 교양시민이라면 이런 정치꾼들을 눈여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절대로 대한민국 정치의 장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나 나름의 '소신'을 갖기도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살기도 힘겨운 마당에 어느 틈에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까지 할 수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당신들의 삶이 하루하루 힘겨운 까닭이 '정치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바꿔나가길 소홀히 한 덕분에(?) 당신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만 한다.

 

  한편, TV만 틀면 연일 '정치인들의 싸움박질' 때문에 밥맛이 떨어진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계신다. 기껏 뽑아놨더니 이놈도 싸우고 저놈도 싸우니 열불이 터져서 다시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정쟁'이라 부르고 '논쟁'을 일삼는 것이 바른 정치인이 해야만 할 일인 것이다. 흔히,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서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싸운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더 많은 이익'을 '더 많은 국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첨예한 다툼인 것이다. 이를 싸운다고 오해하도록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언론'이다. 언론이 '엉뚱한 편견'을 갖도록 전체가 아닌 일면만 보여주니 오해가 쌓인 것이고, 정치꾼과 결탁해 '저들만의 잔치'를 용이하게 주최하기 위해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만든 편견이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인의 책임'이 아니라 '언론의 무책임'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러니 TV에서 정치인들이 싸우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날카로운 눈썰미로 판단을 내리길 바란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어떤 정책(법안)을 내세워 무엇을 획책하려고 하는지 말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지난 100년 동안 살얼음판을 건너왔다. 왕조의 멸망과 함께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 당하고 온갖 설움과 억압을 받았더랬다. 그 모진 역경을 딛고 독립을 쟁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이라는 비극과 군부독재, 그리고 민주화투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리고 새천년을 맞이해 대한민국은 세계에 우뚝서는 자랑스런 역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치판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첨예한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바라는 미래는 분명하다. 전쟁 없는 평화가 영구히 깃들길 바라며, 지속발전가능한 경제적 풍요속에서 전세계가 부러워마지 않는 아름다운 선도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이 많겠지만, 올바른 정치를 해나간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겪어봐서 안다. 그리고 꼭 해낼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대한민국인이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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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고 쎈 중등 수학 3-1 (2023년용) 중등 쎈수학 (2023년)
홍범준.신사고수학콘텐츠연구회 지음 / 좋은책신사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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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실 '공부의 비법'은 평범하다. 공부를 억지로 하지 않고 즐기면서 하면 된다. 정말 쉽지 않은가? 그런데도 대다수의 학생들은 공부를 즐기는 방법을 묻지 않고 그저 '잘 하는 비법'만을 캐묻는다. 정작 자신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고 소원만 비는 것처럼 말이다.

 

  공부의 비결은 '다이어트 건강법'과 비슷하다. 일단 체중을 줄이려면 '먹는 양'는 확연히 줄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몸에 나쁜 음식을 '절대' 섭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소식을 하면서 '해로운 성분'이 덜 들어간 음식을 골고루 섭취한다면 다이어트는 자연스레 된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단단히 오해한다. '먹는 양'을 줄이지 않으면서 '살 빠지는 약(?)'만 먹으면 100% 살이 빠질 수 있다고 말이다. 반면에 '먹는 양'을 확실히 줄이고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면서 '살 빠지는 약(!)'을 동시에 복용하면 효과가 더 좋을 것이라 착각을 하곤 한다. 이럴 땐, 살이 빠지는 것은 둘째치고 '건강'이 나빠져서 몸이 병들기 십상이다. 그렇게 병들어 가면서 살이 빠진다고 좋아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공부도 '이렇게' 하기 십상이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시험에 나오는 문제'만 골라(?) 골라서 풀면 성적이 쑥쑥 올라갈 것이라 믿고 '쪽집게 과외', '시나공(시험에 나오는 문제만 공부한다)'과 같은 환상에 젖곤 한다. 또는 '공부의 양'만 잔뜩 늘여놓고서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잠도 줄여가면서 코피를 쏟아가며 죽어라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성적이 오르더라도 '단기적인 성과'에 불과하며, 마라톤과 같은 학업의 길을 완주하기에 택도 없는 방법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공부는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저마다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공부 비법' 되겠다. 그렇다면 공부를 즐길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자신의 적성에 맞는 '과목'을 찾는 것부터 해야 한다. 언어적 영역에 호기심이 많다면 국어나 영어, 그밖의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배경지식'을 쌓아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탐구적 영역에 관심이 높다면 사탐이나 과탐 쪽 과목들과 연관된 '배경지식'을 넓혀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의 '배경지식'을 속깊고 폭넓게 다루다보면 저절로 '공부의 맛'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한편, 예술적 재능이나 체능적 재주가 발달한 친구라면 '예체능의 실력'을 더욱더 갈고 닦길 바란다. 이를 테면, 음악 공부도 하다보면 자연스레 실기와 함께 '이론'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론을 접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수학'과 '과학', 그리고 '역사'와 같은 과목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속깊은 이론수업을 통달해야 비로소 음악적 재능이 꽃 피울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이는 미술과 체육도 마찬가지다.

 

  여담이지만, 공부가 정말 싫어서 음악을 전공하던 친구가 '음대'까지 진학하게 되었지만, 전문적으로 음악인으로 살아가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수학'을 공부해야만 더 좋은 음악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거짓말 같은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정말로 공부와 담을 쌓은 친구들은 '수포자'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면서 공부를 점점 더 하기 싫어질 것이다. 그럴 땐 '유용한 도구'를 잘 만나야 하는 법이다. 물론 '좋은 선생님'도 함께 만나야 한다. 사람을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공부도 혼자의 힘으로 대성하기 정말 힘들기만 하다. 그러니 '유용한 도구(교재)'와 '좋은 선생님'을 찾으러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은 전혀 아까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자, 그럼 공부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유용한 수학교재는 무엇일까? 당연히 '이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지만, 교재도 자신에게 딱 맞는 성향의 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무조건 '이 책'이 좋다고 권하는 친구나 선생님이 계시다면 '알았다'고 참고만 하고, 자신이 직접 문제를 풀어보면서 고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교재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팁은 '답지'를 옆에다 펼쳐놓고 풀어보는 것이다. 공부는 뭐니뭐니해도 '피드백'이 중요하다. 풀고서 곧바로 답을 맞춰보면서 '왜' 맞았는지, '왜' 틀렸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의 공부 실력을 가늠할 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좋은 교재', '나에게 딱 맞는 교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답지를 옆에다 펼쳐놓았다고해서 '답을 베끼라'는 얘기가 아니다. '풀이과정'을 눈여겨 읽어가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눈으로 익히고 실제로 시험을 치룰 때처럼 '막히는 부분'이 어디인지 빠르게 검토하면서 문제를 내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반복 연습' 해보는 것이다. 그러니 '막히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답지를 보면서 술술 풀어가는 연습이 대단히 유용하게 먹힐 것이다. 그러면서 '해설'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지, 풀이과정이 '이해'가 술술 되는지 스스로 판별하면서 풀다보면, 자연스레 '나에게 딱 맞는 수준의 교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보면 '공부하는 비법'을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비단 수학과목에만 써먹을 수 있는 비법이 아닐 것이다. 모든 과목의 교재를 '이런 식'으로 고를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위권 성적을 따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위권 학생'들에겐 힘든 공부비법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좋은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내기 힘겨워하는 학생에게는 '선생님의 코칭'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테니 말이다. 물론 나와 '사는 곳'이 가까운 친구라면 내가 '그 선생님'이 되어 줄 수 있고, '그 교재'도 딱 알맞게 선별해줄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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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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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까..라는 느낌을 학창시절에 읽었을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결말이 그랬고, 임자(약혼자)가 있는 여자에게 사랑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내용이 그랬다. 이런 불륜스런 이야기가 '고전명작'으로 선정되어 널리 읽히고 '서울대선정 청소년 필독서'로 선정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시대배경'이 읽히고, '작가의 의도'가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이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으로 꼽히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각설하고, 첫 느낌은 괴테의 문장은 너무나도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이것이 '작가의 문장력'인지, '뒤침이(번역가)의 힘'인지 딱 한 번으로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여러 모로 고려해본 결과, [문학동네]만의 장점으로 이해하려 했다. 물론 다른 출판사도 수려한 책들을 많이 출간하겠지만, '책표지'도 그러하고, 책이 지닌 아름다운 면만 따져본다면 [문학동네]만 한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내 독서경향이 '문학장르'만큼은 '같은 책, 다른 뒤침'을 원칙으로 삼고 꼼꼼히 비교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책읽는 속도가 더뎌지게 되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고, '지금'이 아니면 더 미룰 시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부득이 '여러 출판사의 문학책'을 두루 읽어보고 있다. 그 중간결과로, 소설책이 가진 '미적센스'를 고려한다면 [문학동네]가 책꽂이에 진열해놓기에도 아름답고, 손에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에도 단연 으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추후에 결론은 또 달라질 수 있다. 아무튼 괴테의 문장은 '자연예찬'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 이어나갔다.

 

  그러면 괴테는 왜 이리도 '자연'을 예찬한 것일까?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8세기 유럽이다. 이 시기는 '낭만소설'이 주름잡던 시절이었으며 동시에 '계몽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지적교양을 쌓는 일을 매우 중시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모든 사물이 지닌 이치와 더 나아가 자연현상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알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과학'이 고대의 자연철학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탐구영역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이 시기의 사람들은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과는 별도로 '인간의 본성'과 더불어 '세상의 이치'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 안에 감춰진 비밀을 알고자하는 욕망이 꿈틀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에 앞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깊은 감명'을 받아 자연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한없이 작고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 또한 함께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괴테는 '낭만파'의 대표주자가 되어 위대한 신의 섭리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는데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괴테는 '사랑'이 지닌 아름다움 또한 대단히 극찬하였다. 사랑(에로스)이야말로 텅비고 아무 것도 없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근원적인 힘이며, 생명이 없는 사물에조차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에게 첫 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자신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무엇'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과 '공간'에서만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사랑이 없다면 자신도 존재 가치를 잃고 말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베르테르는 젊은이답게 과격한 면이 있다. 샤를로테를 향한 사랑도 그렇고, 궁정에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샤를로테가 알베르트와 결혼을 한 뒤에도 베르테르는 샤를로테를 찾아가 만남을 갖는다. 알베르트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여도 막무가내로 샤를로테에게 '애정'을 쏟아내곤 한다. 이런 베르테르의 '무례함(?)'에도 샤를로테는 베르테르의 순수함을 믿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젊은 베르테르에게 호의를 베풀곤 한다. 베르테르는 그런 샤를로테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더욱더 욕망을 뿜어낸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베르테르는 그런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잠시 샤를로테를 떠나 궁정일을 하게 되지만, 그곳에서 직속상관과 '일처리 방식'을 두고 설전을 벌이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상관인 백작은 이런 베르테르를 두둔하며 '일처리'를 잘한다며 칭찬을 하지만, 칭찬은 그저 칭찬일 뿐이고, 직속상관과의 마찰은 점점 거칠어지게 된다.

 

  그러다 베르테르는 궁정의 사교모임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격이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교모임에 참석한 귀족들이 베르테르를 발견하고서, '귀족이 아닌' 베르테르와 동석하게 된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애초에 베르테르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신분이지만, 평소 베르테르를 좋게 보던 백작의 호의(?)로 부름을 받고 참석했을 뿐인데, 그런 창피를 당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린 베르테르가 마주한 '벽'을 느끼게 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상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그런 세상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젊은 베르테르'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고 정당한 대우를 받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어쩌면 베르테르는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는 '구태의연한 체제'가 아닌 '공명정대한 올바름'만이 유일한 척도가 되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는 '사랑'이 충만하여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거라고 말이다. 언뜻 궤변처럼 들린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런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께 해주는 샤를로테가 온전한 '내 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기 때문이다. 샤를로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알베르트가 아닌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 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눈에는 당시의 '사회규범'이 너무나도 갑갑했던 것이다. '결혼제도'라는 것도 그렇고, '신분사회'라는 것도 그렇다. 왜 한 여자를 두 남자가 사랑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 내가 더 사랑받을 자격이 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데, 왜 '내 여자'로 만들 수 없단 말인가. 그래서 베르테르는 살인죄를 저지른 범인마저 변호하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일가 싶지만, 젊은 베르테르에겐 그 살인자를 변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하다. 그 자신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잣대다. 그래서 샤를로테가 베르테르에게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규범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알베르트가 건강상의 이유로 먼저 죽기라도 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알베르트가 높은 신분을 이용해 무도하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 망나니였다면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샤를로테를 차지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알베르트는 착하고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젠틀맨'이었다. 무엇보다 '사랑'이랍시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아내를 탐하는 무례한(?) 베르테르에게조차 '매너'를 잃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죽기로 결심한다. 스스로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을 찍듯 자기 자신에게 단죄를 내리고 만다.

 

  베르테르는 결심을 하고서 알베르트에게 총을 빌린다. 알베르트는 총알을 장전하지 않은 '빈총'을 베르테르에게 빌려준다. 비록 총을 빌려주긴 하지만 장전은 되어 있지 않으니 '살해의도'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베르테르가 '빈총'을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경솔하다면서 베르테르를 꾸짖었던 적이 있었기에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엔 순순히 빌려주었다. 베르테르 스스로 죽을 결심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알베르트도 베르테르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샤를로테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돌적으로 애정공세를 보내는 '연적'이 스스로 꺼져준다고 하니, 한편으론 앓던 이가 빠진듯한 속시원함을 느꼈던 것일까?

 

  결국, 베르테르는 죽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던 '자살'로 말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망령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것으로 묘사했듯,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살'을 한 사람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베르테르의 죽음은 성직자들도 외면하고 말았다. 그의 무덤에 단 한 명의 성직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르테르의 죽음'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베르테르가 즐겨 입던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이 대유행을 한 것을 보니 말이다. 어쩌면 베르테르는 '시대저항의 아이콘'이 된 셈이다. 기성세대들의 고리타분한 규범에 순응하기보다는 거부하다못해 '주검'으로 승화한 베르테르가 젊은이들 사이에 아이돌(우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살예찬'을 한 이야기로 볼 수 없다. 베르테르는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꿈꿨고, '원초적인 사랑'을 금기시하며 '사랑의 힘'을 애써 부정하는 구태의연한 세상에 '경종'을 울린 셈이다.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숨막혀 죽을 듯 괴로우니, 제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면서 말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 따위가 중허지 않다. 사랑, 그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니 마음껏 사랑하라..제발 좀 허락해달라면서 말이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베르테르가 말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누구보다 더 가슴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과 '공간'에서 더욱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찐사랑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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