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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까..라는 느낌을 학창시절에 읽었을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결말이 그랬고, 임자(약혼자)가 있는 여자에게 사랑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내용이 그랬다. 이런 불륜스런 이야기가 '고전명작'으로 선정되어 널리 읽히고 '서울대선정 청소년 필독서'로 선정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시대배경'이 읽히고, '작가의 의도'가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이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으로 꼽히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각설하고, 첫 느낌은 괴테의 문장은 너무나도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이것이 '작가의 문장력'인지, '뒤침이(번역가)의 힘'인지 딱 한 번으로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여러 모로 고려해본 결과, [문학동네]만의 장점으로 이해하려 했다. 물론 다른 출판사도 수려한 책들을 많이 출간하겠지만, '책표지'도 그러하고, 책이 지닌 아름다운 면만 따져본다면 [문학동네]만 한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내 독서경향이 '문학장르'만큼은 '같은 책, 다른 뒤침'을 원칙으로 삼고 꼼꼼히 비교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책읽는 속도가 더뎌지게 되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고, '지금'이 아니면 더 미룰 시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부득이 '여러 출판사의 문학책'을 두루 읽어보고 있다. 그 중간결과로, 소설책이 가진 '미적센스'를 고려한다면 [문학동네]가 책꽂이에 진열해놓기에도 아름답고, 손에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에도 단연 으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추후에 결론은 또 달라질 수 있다. 아무튼 괴테의 문장은 '자연예찬'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 이어나갔다.
그러면 괴테는 왜 이리도 '자연'을 예찬한 것일까?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8세기 유럽이다. 이 시기는 '낭만소설'이 주름잡던 시절이었으며 동시에 '계몽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지적교양을 쌓는 일을 매우 중시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모든 사물이 지닌 이치와 더 나아가 자연현상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알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과학'이 고대의 자연철학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탐구영역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이 시기의 사람들은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과는 별도로 '인간의 본성'과 더불어 '세상의 이치'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 안에 감춰진 비밀을 알고자하는 욕망이 꿈틀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에 앞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깊은 감명'을 받아 자연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한없이 작고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 또한 함께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괴테는 '낭만파'의 대표주자가 되어 위대한 신의 섭리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는데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괴테는 '사랑'이 지닌 아름다움 또한 대단히 극찬하였다. 사랑(에로스)이야말로 텅비고 아무 것도 없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근원적인 힘이며, 생명이 없는 사물에조차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에게 첫 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자신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무엇'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과 '공간'에서만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사랑이 없다면 자신도 존재 가치를 잃고 말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베르테르는 젊은이답게 과격한 면이 있다. 샤를로테를 향한 사랑도 그렇고, 궁정에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샤를로테가 알베르트와 결혼을 한 뒤에도 베르테르는 샤를로테를 찾아가 만남을 갖는다. 알베르트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여도 막무가내로 샤를로테에게 '애정'을 쏟아내곤 한다. 이런 베르테르의 '무례함(?)'에도 샤를로테는 베르테르의 순수함을 믿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젊은 베르테르에게 호의를 베풀곤 한다. 베르테르는 그런 샤를로테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더욱더 욕망을 뿜어낸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베르테르는 그런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잠시 샤를로테를 떠나 궁정일을 하게 되지만, 그곳에서 직속상관과 '일처리 방식'을 두고 설전을 벌이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상관인 백작은 이런 베르테르를 두둔하며 '일처리'를 잘한다며 칭찬을 하지만, 칭찬은 그저 칭찬일 뿐이고, 직속상관과의 마찰은 점점 거칠어지게 된다.
그러다 베르테르는 궁정의 사교모임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격이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교모임에 참석한 귀족들이 베르테르를 발견하고서, '귀족이 아닌' 베르테르와 동석하게 된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애초에 베르테르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신분이지만, 평소 베르테르를 좋게 보던 백작의 호의(?)로 부름을 받고 참석했을 뿐인데, 그런 창피를 당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린 베르테르가 마주한 '벽'을 느끼게 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상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그런 세상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젊은 베르테르'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고 정당한 대우를 받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어쩌면 베르테르는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는 '구태의연한 체제'가 아닌 '공명정대한 올바름'만이 유일한 척도가 되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는 '사랑'이 충만하여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거라고 말이다. 언뜻 궤변처럼 들린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런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께 해주는 샤를로테가 온전한 '내 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기 때문이다. 샤를로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알베르트가 아닌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 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눈에는 당시의 '사회규범'이 너무나도 갑갑했던 것이다. '결혼제도'라는 것도 그렇고, '신분사회'라는 것도 그렇다. 왜 한 여자를 두 남자가 사랑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 내가 더 사랑받을 자격이 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데, 왜 '내 여자'로 만들 수 없단 말인가. 그래서 베르테르는 살인죄를 저지른 범인마저 변호하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일가 싶지만, 젊은 베르테르에겐 그 살인자를 변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하다. 그 자신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잣대다. 그래서 샤를로테가 베르테르에게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규범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알베르트가 건강상의 이유로 먼저 죽기라도 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알베르트가 높은 신분을 이용해 무도하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 망나니였다면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샤를로테를 차지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알베르트는 착하고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젠틀맨'이었다. 무엇보다 '사랑'이랍시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아내를 탐하는 무례한(?) 베르테르에게조차 '매너'를 잃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죽기로 결심한다. 스스로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을 찍듯 자기 자신에게 단죄를 내리고 만다.
베르테르는 결심을 하고서 알베르트에게 총을 빌린다. 알베르트는 총알을 장전하지 않은 '빈총'을 베르테르에게 빌려준다. 비록 총을 빌려주긴 하지만 장전은 되어 있지 않으니 '살해의도'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베르테르가 '빈총'을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경솔하다면서 베르테르를 꾸짖었던 적이 있었기에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엔 순순히 빌려주었다. 베르테르 스스로 죽을 결심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알베르트도 베르테르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샤를로테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돌적으로 애정공세를 보내는 '연적'이 스스로 꺼져준다고 하니, 한편으론 앓던 이가 빠진듯한 속시원함을 느꼈던 것일까?
결국, 베르테르는 죽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던 '자살'로 말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망령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것으로 묘사했듯,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살'을 한 사람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베르테르의 죽음은 성직자들도 외면하고 말았다. 그의 무덤에 단 한 명의 성직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르테르의 죽음'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베르테르가 즐겨 입던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이 대유행을 한 것을 보니 말이다. 어쩌면 베르테르는 '시대저항의 아이콘'이 된 셈이다. 기성세대들의 고리타분한 규범에 순응하기보다는 거부하다못해 '주검'으로 승화한 베르테르가 젊은이들 사이에 아이돌(우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살예찬'을 한 이야기로 볼 수 없다. 베르테르는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꿈꿨고, '원초적인 사랑'을 금기시하며 '사랑의 힘'을 애써 부정하는 구태의연한 세상에 '경종'을 울린 셈이다.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숨막혀 죽을 듯 괴로우니, 제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면서 말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 따위가 중허지 않다. 사랑, 그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니 마음껏 사랑하라..제발 좀 허락해달라면서 말이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베르테르가 말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누구보다 더 가슴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과 '공간'에서 더욱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찐사랑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