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를 마무리한다.

내년엔 계획대로 '한 살 어려질 것'이다.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마음만이라도 젊어져야 할 것 아닌가.


22년에는 축하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드디어 '100리뷰 출판사(한빛비즈)'도 생겼고,

개인 통산 1500리뷰도 돌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정'을 조금 찾았다는 점을 축하해야 할 것이다.


아직 '고용불안'과 '건강 적신호', 그리고 '부모님 걱정' 등등

여전히 다사다난한 일들이 내년에도 지속될 것 같지만,

심적으로는 부담을 조금쯤 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독서량'과 '리뷰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녀에 찍은 '300리뷰 돌파'는 코로나 여파로 실직과도 같은 일상을 보냈던 탓이다.

할 일이 줄어드니 책만 읽고 리뷰만 쓴 셈인데, 어쨌든 씁쓸한 '기록'이었다.

그 기록이 이듬해 현저히 줄어든 까닭은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한 탓이다.

달라진 생활패턴에 활발히 '적응'하다보니 독서량과 리뷰수가 줄어든 것이다.


그러다 21년에 모진 나날들을 극복하고 야심차게 22년을 맞이했지만

연초부터 '건강 적신호'가 켜지고, 6월 이후에는 '부모님의 와병'이 겹치면서

실직과 투병, 간병과 구직 등등 개인사의 대혼란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그래서 6월 이전에는 10리뷰도 제대로 찍지 못했고,

7월 이후에도 '고용불안'으로 독서기록이 들쭉날쭉해진 것이다.


23년에는 다시금 왕성한 독서와 리뷰를 할 작정이다.

새해 목표는, 가을이 오기 전에 150리뷰를 찍고, 겨울에 200리뷰를 돌파하는 것이다.

검은 토끼의 해는 내 독서와 리뷰를 다시 시작하는 '디딤돌'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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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2
어네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홍택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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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여러 번 밝혔지만, 문학적 소양을 넓고 깊게 하기 위해서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의 책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같은 듯' 하지만 책마다 조금씩 '다른 점'을 발견하곤 하지만, 그 다른 점을 가지고 이렇다저렇다 할 깜냥이 나에게 '있는냐?'고 되묻곤 한다. 혹여나 '나만의 착각'은 아닐런지 조심스러워지고 어줍잖은 실력으로 '섣부르고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도 던지곤 한다.

 

  요컨대, <위대한 개츠비>를 예로 들자면,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작가인 '피츠제럴드'의 신분상승 욕구를 반영하여 소설을 쓴 탓에 '개츠비'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데이지라는 부잣집 여자를 꼬시려했다며, 그의 욕망에 주목하고 있고, 다수의 독자들은 남편의 불륜을 알고 상심한 데이지 앞에 첫사랑이 나타나자 다시 불 같이 타오르는 불륜녀를 꼬시려하는 찌질남(그만한 재력으로 고작 유부녀에 올인하는 멍청이라면서 말이다)으로 보았지만, 나는 개츠비의 사랑이 '순수, 그 잡채'라고 평가하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개츠비의 삶'이 신분상승이나 재산을 모으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데이지'라는 여성에게 쏟아부으면서 '미완의 첫사랑'을 '완벽한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함이 바로 '개츠비식 사랑'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재즈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급작스런 경제부흥으로 쌓은 부를 누구라도 흥청망청 쓰던 시대였는데, 개츠비는 당대 '최고의 파티'를 주최하면서도 단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는 말짱한 정신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기 때문이다. 모두가 취해버린 와중에도 홀로 말짱한 정신으로 그가 하는 일이라곤 강 건너 '데이지의 집'을 가리키는 녹색 등대였으니 말이다.

 

  암튼, 내 방식대로의 해석이 당연하게도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의 견해도 따르지 않는 '나의 해석'이 색다른 흥미를 불러일으켜 '꾸준한 독서'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음을 밝힌다. 고로 나의 리뷰를 누가 읽어주면 더할나위 없이 고맙지만, 딱 잘라 외면을 당한다하더라도 '결코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적어도, 스스로 싫증이 나거나 더는 해석할 능력이 안 된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다시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쿠바의 어느 바닷가에 84일 동안이나 쌩꽝을 친 늙은 어부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 어부가 너무 늙었고, '운'도 다했기에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거라며 수근거렸고,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매일 같이 큰물고기를 낚을 채비를 하고 바다로 나갔다. 이런 어부의 곁을 지켜주는 이는 작은 소년 하나 뿐이었다. 소년은 물고기를 잡는 법을 늙은 어부에게 배웠고, 얼마 전까지도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지만, 허탕을 치는 나날이 늘어나자 소년의 부모가 '다른 배'를 타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은 부모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다른 배를 타고 물고기잡이에 나섰지만,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늙은 어부의 시중을 들며 곁을 지켜주며 말벗을 해주곤 했다.

 

  그날도, 늙은 어부와 소년은 맥주 한 잔과 커피 한 깡통을 마시며 수다를 안주(?) 삼아 물고기잡이 채비를 함께 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소년이 기특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벌써 세 달째 꽝을 친 덕분에 가진 것이라곤 별로 없어서 오히려 소년이 미끼로 쓸 정어리를 챙겨주었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소년 없이 홀로 늙은 어부는 출항을 했다. 날씨는 좋았고 태풍은 서너 날이나 지나야 찾아올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면서 말이다.

 

  자, 중간생략을 하고, 노인은 드디어 '큰물고기'를 낚시줄에 거는 것에 성공했다. 노인의 실력이 아직 줄어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물고기가 늙은 노인의 배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었다. 배보다 더 큰 물고기를 낚다니, 노인은 단번에 뱃전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큰물고기와 팽팽한 싸움을 벌이며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물고기는 수면으로 오르지도 않고 더 깊이 내려가지도 않으면서 늙은 어부와 힘겨루기를 하더니 급기야 '노인의 배'를 끌고 '먼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북서쪽으로, 다음엔 북쪽으로,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물고기는 자신의 덩치와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인의 배를 끌고 이러저리 나아갔다.

 

  노인도 만만치 않았다. 놈의 입에 걸린 낚시바늘이 빠지지 않게 재빨리 낚싯줄을 '한쪽 어깨'에 둘러매고서 몸을 기둥 삼아 버티면서 '두 손'으로 단단히 고쳐쥐고서 물고기와 힘겨루기를 했다. 물고기의 미끼와 함께 낚시바늘을 삼킨 것이 '한낮'이었는데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반나절이나 '두 손'으로 버텼으니, 결국 '노인의 왼손'에 쥐가 나서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재빨리 낚싯줄을 오른쪽 어깨로 고쳐매고서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었지만, 왼손에 난 쥐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노인은 큰물고기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며 이틀 낮밤은 꼬박 새운다. 그러다 사흘째, 큰물고기의 힘도 다했는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게 되었고, 노인은 노련한 솜씨로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물고기를 뱃전에 낚아올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만선의 기쁨을 간직한 채 항구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도 늙은 어부는 항구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항구가 내뿜은 빛을 찾아내고 반드시 돌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엔 너무 멀리 온 것이 문제였다. 큰물고기(머린, 청새치과 몸집이 큰 다랑어 종류)에게 끌려다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요령껏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에 기쁨을 만끽한 덕분인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배보다 더 큰 큰물고기를 요령껏 배옆에 단단히 묶어두고 곧장 항구로 향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생명을 잃은 다랑어의 비린맛을 맡은 것인지, 상어가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첫 번째 상어를 보기 좋게 물리쳤지만, 다랑어의 1/3을 낼름 뜯어가버린 뒤였다. 두 번째 상어의 공격은 더 거셌다. 살점이 뜯긴 다랑어가 흘린 피냄새를 맡고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노에 칼을 매달고서 상어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또다시 다랑어의 살점은 뜯겨져버린 뒤였다. 기진맥진해진 노인은 세 번째 상어떼의 공격을 받았고, 이전 싸움에서 칼을 잃어버린 노인은 배 뒷전의 키를 뜯어내어 휘두르며 겨우 상어떼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노인도 다랑어도 기진맥진해서 더는 싸울 힘도 없었고, 마지막 상어떼의 공격은 그저 견디면서 항구로 달아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결과, 다랑어의 살점은 상어가 다 뜯어가버렸고, 남은 것이라곤 단단한 대가리와 꼬리 뿐이고, 그 사이에는 굵지만 앙상한 뼈만 남아버렸다. 노인은 그 장면은 보고서 허탈해할 뿐이다. 모처럼 찾아온 행운이 다 날아가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행운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비참함마저 느껴버렸다.

 

  드디어 도착한 늙은 어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배를 모래사장에 끌어올렸고, 돛을 정리해 어깨에 들쳐매고서 집을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 엎드려 낚싯줄에 쓸리고 상어의 이빨자국이 선명한 손바닥을 하늘을 향한 채, 날짜가 지난 신문지를 몸에 덮고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 노인의 곁에서 울먹이는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노인이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뒤 안심했지만, 노인의 손바닥을 본 뒤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노인의 배 앞에서 웅성거리는 것도 보았다. 소년은 이미 보았던 장면이다. 엄청나게 큰 물고기의 잔해(?)가 노인의 배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을 보면서, 노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기에 경탄을 금치 못한 웅성거림이었다. 그 사이 노인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작가는 그 꿈을 '사자의 꿈'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치고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읽는 맛'은 최고다. 헤밍웨이의 문장이 간결하면서 힘찬 남성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하드보일드'라고 지칭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왜냐면 내 눈에 띤 매력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소년의 믿음'이다.

 

  소설속에서 소년의 '주위 어른들'은 노인이 어부로서 '은퇴'해야할 시점이라고 수근거리길 망설이지 않는다. 나이도 적지 않고 84일째 쌩꽝을 치면서 실력조차 '증명'이 된 셈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늙은 어부의 실력은 마을사람들이 다 아는 바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젊은 덩치와 한 '팔씨름 대결'에서 대역전극을 펼쳐내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늙은 어부의 '실력'을 크게 의심치는 못하고서 '행운'이 다했다고 떠벌린 것이다. 그래서 소년의 부모도 더는 늙은 어부와 함께 배를 타지 못하게 한 것이다. 84일간의 쌩꽝이 그 불운의 증거라면서 말이다. 늙은 어부도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자신조차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좀처럼 큰물고기를 낚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변명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소년은 자신에게 '낚는 법'을 가르친 늙은 어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실력도 좋고, 행운도 가득하니 언제고 다시 '큰물고기'를 낚아낼 거라 믿었던 것이다.

 

  소년이 늙은 어부를 '믿어 의심치 않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소년의 눈에 비친 '찐실력'이었을 것이다. 그건 소년이 '다른 배'를 타고 '물고기'를 낚아올리면서 더욱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언급은 하지 않지만 '다른 배'의 어른들의 실력이 그닥 좋지 않음을 한 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형편없는 실력에도 큰물고기를 척척 낚아내는 것을 본 소년은 그들이 운이 좋았을 뿐, '찐실력'을 갖추진 못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일테다. 흔히 '어린이의 눈'에는 거짓도 없고 순수하기 그지 없다고 표현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소년은 딱 알아본 것이다. '노인의 실력'은 아직 죽지도 낡지도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지, '운'이 따르지 않아 '꽝'을 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소년의 믿음은 맞아떨어졌다.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은 물고기의 위용이 바로 그 증거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을 때, 자신이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한없이 미안했기에 소년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도 도움도 없이 그 큰물고기를 기어코 낚아올린 늙은 어부는 또 얼마나 자랑스럽냔 말이다. 그 증거는 바로 '손바닥'이다. 망신창이가 된 그의 손바닥을 보면서 '그날'의 긴박한 현장이 생생히 그려진 탓에 소년은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 이번엔 감동 섞인 울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눈물을 멈추게 한 것은 마음사람들의 입벌어지게 만드는 칭찬과 감탐이었다. 그제서야 소년은 눈물을 멈추고 한껏 미소는 짓는다. '내 말이 맞았잖아요'라는 외침이 환한 웃음과 함께 온동네에 울려퍼질 듯이 말이다.

 

  이제 늙은 어부는 '사자의 꿈'을 꾼다. 언제 깨어날지는 몰라도 사냥을 마치고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는 동물의 왕, 사자처럼 기나긴 낮잠을 즐길 것이다. 다시 해 질 녁이 되어 큰물고기들이 활동을 시작하면 늙은 어부도 다시 깨어날 것이다. 비록 지쳐쓰러져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의 믿음'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다. 다시 깨어나 소년의 기대에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자라나 '최고의 어부'가 될 것이다. 소년에게 꿈과 희망이 되어준 '늙은 어부'가 소년과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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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5 : 인간의 감각은 화려한 착각이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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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책에서 '인간의 사춘기'를 다루면서 아우레인들의 지구 이주에 큰 걸림돌을 넘어 매우 위험하다(?)는 보고서를 아우레 본부에 보고한 '바바 요원'은 이번 책에서 그 '비밀임무'를 들키고 만다. 그간 '아싸 요원'은 바바의 비밀임무를 의심하며 증거를 찾고 있다가 이번에 '인간의 착각'을 다루면서 인간이 매우 위험하다는 자신의 판단이 실수인 것 같다며 '지구정복'을 미루어 달라는 보고서를 본부에 전송하려는 순간에 '아싸'에게 들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이 위험한 존재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우레인의 지구정복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아우레인들의 지구정복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가? 뚜둔~

 

  줄거리는 점점 뻔해가지만, 외계인의 지구정복 시나리오는 이미 여러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에서 이미 많이 다뤘기에 그닥 신기할 것도 없을 정도로 흔해빠졌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도 뻔하다. 지구인이 슬기롭게 외계인의 침공을 막아냈다거나 '의외의 변수'가 생겨서 외계인이 물러났다거나, 그도 아니면 서로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게 되었다는...아무쪼록 이 책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책인 관계로 서로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결론을 택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해졌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책의 재미가 '스토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과학에 관한 배경지식'을 넓히는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책에서는 '인간의 착각'을 다뤘다.

 

  사실, 인간의 감각은 그닥 정확하지 않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감각은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바로 '감각의 착각'이 너무나도 흔해서 정확한 감각을 꼽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엉터리 정보를 뇌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착각'이 일상다반사란 말이다. 이를 테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느꼈지만 정확하게는 8초 동안 '지속'된 일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거나, 2시간이 훌쩍 지난 것 같은 느낌적인 확신이 들어서 시계를 쳐다보니 고작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나 겪는 '시간 감각의 오류'다. 인간은 '재미난 일'은 시간이 후딱 지나는 것 같고, '지루한 일'은 더디게 시간이 지나는 것 같은 '부정확한 감각'을 타고나기 마련이다.

 

  어디 그뿐인가. '눈속임'을 얼마나 잘 당하는지 돈을 지불하면서 '마술쇼(눈속임쇼~)'를 보러가서 시종일관 신기해하곤 한다. 또한, 1조가지가 넘게 다양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기관'을 갖고 있음에도 냄새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손으로 뽑을 정도이고, 심지어 경험상 '뇌'로 인지하지 못하는 냄새는 맡은 적이 없다거나 맡아도 구별해낼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편이다. 미각도 마찬가지다. 엄청나게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음에도 '맛을 구분'해내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편이다. 심지어 다양한 맛을 섞으면 '원래의 맛'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각은 '시각'에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있어서 '레몬주스'를 빨간 색으로 만들면 '딸기맛'으로 느끼는 기이한 일까지 벌어지곤 한다. 또, 코를 막고 사과와 양파를 먹으면 양파를 사과처럼 먹으면서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는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후각'을 함께 써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인간의 감각은 '생각'만으로도 심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영하 50도의 냉동창고를 청소하던 중 출입구가 닫혀 그 안에서 일하던 작업자가 얼어죽는 일이 발생한 적도 있다. 실제로는 냉동장치가 망가져 창고 안의 온도는 '영상'이었는데도 말이다. 죽은 작업자의 사인은 놀랍게도 '저체온증으로 인한 동사'였단다. 또, 절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노인이 시름시름 앓다가 뛰따라 돌아가신 사건도 발생했단다. 평소에 앓던 병도 없으신 건강한 분이셨는데도 말이다. 함께 놀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에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고 더는 즐겁게 살 희망이 보이지 않자 '살 의욕'을 잃어버린 탓이라는 놀라운 진단결과가 더욱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이처럼 '인간의 감각'은 매우 둔하고 엉터리며 '보고 싶은대로, 듣고 싶은대로, 심지어 하고 싶은대로' 제맘음대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도대체 인간의 감각은 왜 이 모양일까? 온통 '부정확'한데도 쓸모가 있기는 한 걸까? 사실 '인간의 감각'은 훈련을 통해서 대단히 민감하고 정확하게 쓸 수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인간이 '감각기관'을 엉터리(?)로 사용하는 까닭은 감각의 부정확함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인생의 쓴맛을 견디고 이겨내면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기 때문에 '정확도'를 높이는 것보다 오히려 낮추거나 무감각해짐을 선택하여 더 나은 결과, 또는 예상치 못했던 더 큰 이익을 얻고자 진화(?)한 결과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래서 '바바 요원'도 이토록 부정확한 인간의 감각능력이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하며, 쓰디쓴 인생의 맛을 느낀 뒤에 더욱더 달콤한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비법으로 승화되는 것을 보면서, 지구인의 의외로 난폭하고 위험하지 않다는 긍정적인 면을 찾아낸 탓에 '지구정복'을 미루고 좀 더 지켜보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일테다.

 

  다음 책의 주제는 수업시간에 졸던 아이도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되살려내는 '성'이다. 과연 '지구인의 성'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는 것일까? 개봉박뚜~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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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스마트 시티 와이즈만 미래과학 14
김성화.권수진 지음, 원혜진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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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지 않은 미래에 '스마트 시티'가 생긴단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정교한 '센서'가 온갖 사물에 장착되고 온 도시를 뒤덮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컴퓨터에 '복제'가 가능해지고, 그렇게 복제된 도시에 온갖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태풍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뿐만 아니라 도시의 전력상황과 교통상황 등 '모든 정보'를 한 번에 다룰 수 있어서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단다. 더구나 '사물 인터넷'으로 도시의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자율주행차를 비롯해서 온갖 편리한 시스템을 갖추게 될테니, '스마트 시티'가 완성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걱정을 덜고 그저 '스마트 시티'가 베푸는 안락함에 만족하며 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심지어 '에너지'조차 자급자족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도 필요한 전력을 얻기 위해 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를 통해 충분한 양을 얻고 있지만,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방사능폐기물'을 쏟아내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반해, 스마트 시티에서는 도시 전체에 풍력발전소와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보다 청정한 에너지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고 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핵발전소보다 더 적은 양의 전력을 생산할테지만 도시 전체에 필요한 전력양을 '빅데이터'로 한 눈에 알 수 있을테니, 거의 정확한 수요예측으로 꼭 필요한만큼 만들어서 꼭 필요한 곳에 알맞게 쓸 수 있게 '통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남는 전력'이 있다면 전력을 모았다가 '필요한 곳'에 되팔 수도 있게 된다고 한다.

 

  더구나 미래의 농사는 '스마트 팜'으로 대체될 것이란다. 그동안엔 넓은 경작지가 필요했지만, '스마트 팜'은 수평적으로 넓힐 필요가 없이 '수직적'으로 높이 쌓을 수 있게 된단다. '스마트 팜'은 토양에다 직접 씨앗을 뿌려 태양빛과 물을 공급하는 것이 아닌, '수경재배' 방식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방식으로는 사막이나 우주에서도 얼마든지 '식물(채소)'를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이제 농사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미래에는 사람이 직접 농사를 짓는 방식이 아닌 '스마트 파머(인공지능)'가 대활약을 하며 온 도시에 필요한 만큼의 '신선채소'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단다.

 

  이처럼 온 도시가 '통제'되고 '계획'한대로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면 도시에 사는 사람은 편리함을 넘어 행복해질 것이 틀림없겠지만, 문제는 '기업'이 유지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경제'가 완벽한 자급자족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스마트 시티'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이 한 나라에만 독점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 기술이라는 것이 그닥 어려운 기술력이 아닌 탓이다. 그래서 '한 나라'에서 시작만 하면 다른 나라도 서둘러서 도입을 해버릴 것이기 때문에 '기술력 선점'의 이점조차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적다. 오히려 후발주자들이 선발주자들의 실패를 엿보고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할테니, 이래저래 '퍼스트 펭귄'이 되고 싶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스마트 시티'를 운영하기 위해서 온 도시에 '센서'를 장착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악명 높은 '빅 브라더'를 불러오지는 않을지 심히 걱정스럽다는 점이다. 정부가 또는 '특정기업'이 빅데이터를 통해 온갖 정보를 끌어모아 악용할 사례는 불을 보듯 뻔하게 실행될 것이며, 부정한 세력에 의해 개개인이 '철저히 감시' 당하면서 '특정권력집단'에 반대하는 성향의 사람들만을 골라내 벌건 대낮에 '공공력'을 투입해서 잡아가 감금하고 처형해버릴 우려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테니 말이다.

 

  인류역사는 늘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끝내는 디스토피아를 맞은 적이 참 많다. 태평성대를 맞이한 줄 착각하는 순간 독재권력이 만들어져서 힘 없는 백성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다 끝내 백성들의 분노로 혼란해지고, 혼란해진 틈을 타서 여기저기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 전쟁을 일삼고, 그 끝에 한 나라가 망하고 다시 새 나라가 들어서는 '격동의 시대'를 되풀이하곤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마트 시티'와 '빅 브라더'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밖에 없다. 사물인터넷으로 온 도시가 초연결된 상황은 '개개인의 일상'이 무방비 상태로 감시 당하는 상태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개개인의 정보가 일일이 감시 당하고 '통제'되는 순간에 '빅 브라더'로 변용되어 악용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마트 시티'는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온 도시를 '센서'로 도배를 하고, 그 센서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줄 '초연결' 사물 인터넷이 절대로 가동되지 않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이미 '빅데이터'는 활용되고 있고, '사물 인터넷'로 연결된 물건들이 전 세계에 200억 개가 넘었으며, '자율주행차'를 비롯해서 '스마트 팜' 같은 미래기술은 성큼 다가와 이미 '현재'에 구현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이 속도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스마트 시티'는 완성이 될 것이고, 매우 편리하게 이용하며 안락함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 행복이 불행으로 바뀔 '빅 브라더의 각성'을 품은 채로 말이다.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게 해야 할 일은 '철저한 대비' 뿐이다. 빅 브라더가 될 것이 뻔한 요소는 강력하게 막아놓아야만 한다. 물론 '종이 한 장의 차이'라서 강력하게 막으면 막을수록 편리하기는커녕 불편만을 초래할 것이다. 그래도 악용되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대가'를 적게 치를 것이니 '강력한 대안조치'를 만들어놓은 뒤에 추진하는 지혜를 우리 모두가 모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입에 달콤한 것이 몸에는 해롭고, 입에 쓰디쓴 것이 정작 우리몸에는 더욱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마트 시티'가 가져올 달콤함보다 '빅 브라더'라는 쓰디씀을 먼저 경계하고 충분한 대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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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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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움 출판사에서 '새로운 뒤침책'들을 내놓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뒤침(번역)이란 시대가 바뀌면 새로이 바뀌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 꾸준히 뒤쳐지는 것일테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엔 씁쓸한 진실이 감춰져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공을 들여 새롭게 뒤쳐내었다해도 독자들의 관심밖으로 내몰려 버리면 '출판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출판시장은 한없이 좁아터져서 이런 문제를 쉽사리 넘길 수 있는 출판사는 몇 안 된다는 것 또한 크나큰 문제다. 나도 이런 문제를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를 통해 접해보니 알게 된 씁쓸한 진실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나 좁아터진 마당에 '메이저 출판사'만 살아남고, 그마저도 '온라인 서점'이 매출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니 '소규모 출판사'나 '오프라인 책방' 들은 죽을 맛일게다. 그나마 독자들의 관심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솟아날 구멍이라도 찾은 듯 활기를 띨 수 있을텐데 정녕 '쉬운 길'은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새움 출판사가 '새로운 뒤침'을 내세워서 기존의 메이저 출판사의 책을 이겨내려는 노력을 보이니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허나 독자들도 안다. 남을 시기하는 마음, 다른 책의 흠을 들춰내는 따위로는 결코 '좋은책'으로 주목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늘 바른 길을 걸어야만 결국에는 '좋은 결실'을 맺는 법이다. 그래서 새움 출판사가 '다른 뒤침'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족하지, 다른 출판사는 '그르고' 자신만이 '옳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안타깝다. 물론 애초에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믿는다. 예전의 뒤침에 '잘못'이 있으니, 이를 바로 잡아 '새로 뒤쳤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그런 뉘앙스가 살포시 내려앉았다는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독자들도 '새로운 뒤침'을 접하면서 '예전의 뒤침'의 흠만 꼬집으며 저울질 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용감하게 '새로운 뒤침'을 내놓은 후발 주자들에게 힘찬 응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커다란 강물을 이루기 위해선 '새로운 물결'이 늘 밀려와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도 벌써 세 번째 리뷰다. 첫 번째는 '개츠비'를 주목했고, 두 번째는 '데이지'에 관한 썰을 풀었으니, 이번엔 작중화자인 '닉'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닉 캐러웨이는 데이지와는 사촌관계이고, 톰 뷰캐넌과는 대학동창 친구관계다. 그리고 개츠비와는 옆집에 사는 이웃지간이고 말이다. 그런 닉이 사촌도 아니고 동창도 아닌 '낮선 이웃'에게 호감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호의적으로 쓴다는 사실이 이 책의 흥밋거리 가운데 하나다. 닉은 왜 그랬을까?

 

  굳이 따지자면, 이 책에선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귀족적인 분위기를 띠는 '이스트에그'와 서민적인 분위기를 띠는 '웨스트에그' 사이에 존재하는 벽 말이다. 톰과 데이지가 살고 있는 곳이 '이스트에그'이니 톰과 데이지도 신분적으로 귀족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미국 동부지역에 살면서 서부지역의 촌뜨기와는 사뭇 다른 고풍스런 환경속에서 유복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웨스트에그' 지역은 주로 서민들이 살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스트에그' 방면으로 출퇴근을 하는 평범한 이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의 출신들도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먼 조촐한 생활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개츠비만이 '웨스트에그'에 살면서 '이스트에그' 못지 않은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기묘한 풍경속에 닉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개츠비의 이웃'이 되고 만 것이다. 자신의 출신이 '이스트에그'이면서도 말이다.

 

  그런 닉이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자신의 사촌인 데이지의 결혼생활이 어딘지 잘못되어 가고 있었고, 그 원인이 자신의 친구인 톰의 '바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접 겪고 알게 된 것이다. 비록 톰은 자신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감추려고 애쓰지만,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남편을 찾는 전화'를 통해 데이지도 얼마간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닉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친척에게 속시원히 '친구의 비밀'을 까발리고서 '한 가정의 파탄'을 지켜보는 것이 마땅했을까? 일단, 닉은 관망하는 것을 택한다.

 

  그 와중에 닉은 개츠비의 초대장을 받고 개츠비와 급속히 친분을 쌓는다. 비록 개츠비가 제법 훌륭한 '귀족 흉내'를 내곤 하지만, 그의 출신배경을 의심케 하는 의뭉스러움 때문에 닉은 '개츠비의 진실'을 파악했지만, 그의 순진한 열정과 거침없는 행동 덕분에 속내를 터놓고 지낼 정도로 급속히 친해졌던 것이다. 개츠비의 진실이란 그의 출신배경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의 소탕한 성격으로 인해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가 악당(?)들과도 사업을 하는 것을 보며 '범죄자'라는 의심도 하지만, 그의 소탈하고 진솔한 행동거지에 그런 의심 또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개츠비가 '초대장을 보낸 진실'을 알고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한다. 왜 그랬을까?

 

  그건 그와 데이지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톰과 결혼하기 전부터 둘을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둘 사이의 걸림돌(신분적 차이, 경제적 차이 따위)만 없었다면 데이지는 톰과 결혼하지 않고 개츠비와 결혼했을 거라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을 내렸기에 닉은 자신의 사촌이자 친구의 부인인 데이지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어차피 톰도 '목하 불륜중'이었으니 말이다.

 

  자칫 '막장 드라마'의 소재로 전락할 이 이야기가 매력적인 까닭은 '개츠비의 순수하고 순진한 사랑' 때문이라고 이미 밝혔다. 닉은 그런 개츠비의 매력에 빠져서 '개츠비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응원하는 쪽을 택했던 셈이고 말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개츠비의 사랑'을 받을 만큼 썩 좋은 여자는 아니었다. 개츠비의 사랑에 감동하고 톰과 헤어질 결심까지 하지만 끝내 '톰을 사랑하지 않고 개츠비를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데이지는 '두 남자'를 모두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남자도 좋고 저 남자도 좋으니 '이남자저남자다내꼬~'라는 심보가 작용한 듯 최종선택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기 때문이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내고서 그대로 내달리듯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모든 책임은 '순진한 개츠비'에게 다 떠넘기고서 말이다. 그리고는 개츠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과 함께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리고 만다. 그 사이에 개츠비는 살해를 당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는커녕 사과도 않고, 흔한 꽃 한송이 보내지도 않고 외면해버린다.

 

  닉은 이런 두 남녀를 지켜보며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토록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세상을 비관하는 한편 '개츠비의 순수성'을 위대하다는 표현으로 승화시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런 닉의 절망감을 알아차린 듯이 '미국사회'는 대공황을 맞이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미국의 독자들이 이 책을 사랑했던 까닭도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결코 '남일'이 아니며, 닉의 판단과 결론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결코 '찌질한 남자의 징징대는 러브스토리'가 될 수 없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닉'과 같은 작중화자가 등장한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개츠비와 같은 '순수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과연 대한민국에도 '순수, 그 잡채'인 존재가 있기는 한 걸까? 난 있다고 믿는다. 만약 없다면 대한민국은 진즉에 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이 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전세계가 부러워할 선도국가로 거듭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순수한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닉이 열렬히 응원하던 '그 순수'로 가득찬 사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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