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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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적인 책이다. 고전문학을 읽는 맛은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는 점에서 분명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가 느껴진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까닭이기에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널리 읽히고 입소문을 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주홍 글자>에서 느낄 수 있는 맛과 깊이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윤리적인 접근'를 통해서 '죄와 벌'에 대한 고민을 풀어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헤스터의 가슴 한복판에 '선명한 주홍빛'으로 빛나는 글자 'A'는 원래 간통(Adultery)를 뜻하는 앞글자다. 결혼한 여인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통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으니 '일곱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청교도적인 종교적 윤리관에 따라 '사형판결'을 받아 마땅했다. 허나 그녀의 남편이 2년간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여인의 몸으로 홀로 지내기 힘들었다는 정상을 참작하여, 가슴엔 '낙인'을 찍고, 지은 죄를 널리 알린다는 목적으로 '조리돌림'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간통'에 따른 벌을 받는 장면만을 보여줄 뿐, '간통'을 저지른 정황이나 두 남녀의 사정 따위는 '건너띄기'를 해버렸다. 만약 건너띄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통속소설'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작가는 '문제의 장면'을 과감히 삭제하고 '죄'가 아닌 '벌'에 집중조명을 비춰낸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문제를 과감히 드러내며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효과도 얻어냈다. '죄값'을 치뤄낸 사람에게 냉담하기 그지없는 '낙인찍기'를 멈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말이다. 또한 '여성'이 감내해야 할 사회적 무게감이 얼마나 무거우며 무한한 희생을 강요하는지에 대한 비판도 함께 싣고, '패미니즘(여성주의)'의 정신도 아울러 전하고 있다.

 

  이런 메시지는 '선홍빛 글자(The Scarlet Letter)' A가 뜻하는 바가 '능력(Able)'과 '천사(Angel)'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이는 헤스터에게 주어진 '죄값'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감내하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죄를 짓지 않은 평범한 이들보다 오히려 죄를 지은 헤스터가 이토록 숭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이 소설의 '백미'일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더욱더 면밀히 돌아보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반성을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죄인의 신분을 '낙인'을 품고 살아가지만, 지울 수 없는 '낙인' 덕분에 더 바르고 더욱 올바른 도덕심으로 살아가게 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헤스터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해내는 능력을 갖게 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배려심 깊은 행동으로 '천사'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일테다.

 

  이는 우리가 사는 인간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효과도 낳게 된다. 일명 '도덕군자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들춰냈다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도덕적인 일만 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을 일상으로 실천하는 이가 진정한 천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는 삶을 살아야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인정'만을 추구하는 삶은 스스로를 추레하게 만드는 근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도덕적이지도 않으면서 윤리적인 심판을 받을만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작은 만족감'만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가 밝고 건강해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차라리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철저히 반성한 사람이 더욱 위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면 '잘못'을 저질러 본 경험을 통해 '무엇'이 잘못인지 더욱 잘 알게 되고, 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딤스데일의 고통을 통해서 더 잘 드러난다. 딤스데일을 헤스터와 달리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밝히지 못했다. 목사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는지, 혹은 헤스터의 의지를 존중한 탓이었을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제대로 삼지 못하고 끝없는 고통속으로 침잠해버리고 만 것이다. 차라리 헤스터와 같이 '죄값'을 처절하게 치르고 나서 헤스터처럼 '철저한 반성'을 통해 지은 죄를 말끔히 털어버리고 '새출발'을 했더라면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이어나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또한, 칠링워스의 악마와 같은 괴롭힘에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등장인물 가운데 독자들에게 가장 용서받지 못할 자는 바로 칠링워스일 게다. 그는 자칭 '지식인'이라면서도 해박한 지식을 쌓아올리고도 고작해야 자신의 아내와 연적(?)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런 악행의 결과가 심히 참혹했기에 마땅한 결론이라고 박수를 아끼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우리들이 가장 '따르기 쉬운 캐릭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지상정이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칠링워스같은 '복수심'에 빠져 자신을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주홍 글자>를 통해서 자신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되돌아보고, 적어도 '칠링워스'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는 '반면교사'로 삼기 딱 좋다.

 

  이처럼 이 소설은 '도덕교과서' 같은 주제로 이해하기 딱 좋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의 삶'에 대한 메시지를 하나 더 건져냄으로써 고전의 매력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의 대명사가 바로 '여성'을 온전한 주체적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동적이고 타율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단정 짓는 일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여성의 행복은 오직 '남성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는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할 때다. 여성도 얼마든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으며, '독립적인 삶'을 선택해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헤스터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헤스터는 낙인 찍힌 죄인이었지만 남편이나 연인(?), 심지어 사회적 시스템의 도움 없이 '수놓기'라는 재능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떨쳐내고, 나아가 '조금의 여유'라도 생기면 아낌없이 남을 위해 내놓고, 베푸는 삶을 살아갔다. 즉,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갔고,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는 '위대한 삶'을 여성의 몸으로 직접 증명했단 말이다. 주위의 남성인 딤스데일은 '고뇌'를 하고, 칠링워스는 '복수심'에 불타고, 그밖의 남자들은 헤스터에게서 펄을 빼앗아갈 생각만 할 때, 헤스터는 스스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와 문제를 척척 해결하며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났단 말이다.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이런 소설을 그저 그런 '삼류 막장드라마'에 버금가는 '불륜소설'로 치부하는 목회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오히려 훌륭한 종교인들이라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죄 지은 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위인들이 '날 선 비난'만을 앞세워 궁지로 모는 어리석음은 절대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실수'에 관대한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실수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실수를 거울 삼아 더욱더 정진하는 사람이 더욱 굳센 법이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는 이치와 상통할 것이다. 그리고 실수를 해본 사람만이 더 많은 지혜를 얻는 법이다. 늘 성공만 한 사람은 '실패'했을 때의 슬픔과 고통, 아쉬움과 비참함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수를 거듭하면서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이는 성공했을 때의 기쁨과 만족, 그리고 성취감을 2배 이상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실수'를 한 이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제공하고 북돋아주는 응원을 아끼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면, 우리는 더 멋진 사회를 만들게 될 것이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고쳐나갈 줄 아는 위대함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실수도, 실패도 소중한 경험으로 삼아 위대함을 이룰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주홍 글자>를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삼는 까닭도 바로 이런 위대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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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꼭 필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 - 내 삶이 가벼워지는 21일 프로젝트
조안 타탐 지음, 조민영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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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필요한 것을 줄여가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2005년에 난 '논술쌤'으로 새출발을 하며 '두 번째 삶'을 시작하며 거실 한 켠을 꽉 채우는 거대한 책꽂이를 장만했더랬다. 그리고 그 책꽂이에 책 한 권을 꽂으며, 이 책꽂이에 책이 가득할 때즈음에 난 '최고의 논술쌤'이 되어 있을 거라는 주문을 걸어두었다. 18년이 지난 지금, 난 주문대로 '최고의 논술쌤'이 되었지만, 책은 책꽂이가 모자라 '한 개의 작은방'을 가득 채우고, '또 다른 작은방'을 서서히 잠식해나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작은 집구석에 어느새 책이 16000여 권의 책으로 넘쳐나게 된 것이다. 그간 '오래되고 낡은 책들'을 약간 버리긴 했지만, 나머지는 한권 한권에 켜켜이 쌓아둔 추억들이 있다는 핑계를 변명삼아 버리지도 못하고, 누구를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읽지도 않으면서 그저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그렇다. 난 '모으는 재주'는 있어도, '버리는 재주'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움의 비결'을 배우고자 이 책을 펼쳐들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물건들이나 방구석을 '신박하게 정리'를 할 수 있는 비법이 적힌 책은 아니어서 아쉬움이 컸더랬다. 대신 '마음'을 비우고, '일상'을 가볍게 할 수 있는 [21일간의 프로젝트]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333 비법' 같은 것이다. 3달 동안 33벌의 옷으로 생활해보는 방법인데, 옷장 속의 옷을 '한 눈에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만드는 비법이다. 일단 '버릴 수 있는 옷'과 '꼭 입을 옷'으로 구분해놓은 뒤에 '낡은 옷', '유행이 지난 옷', '스타일이 같은 옷', 그리고 '두 번 다시 입지 않을 옷' 따위는 미련없이 버리고 비우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남은 33벌의 옷만으로 3달을 버텨보는 것이다. 일단, 옷장이 가벼워지니 '라이프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지게 될 것이고, 옷장 속의 옷을 '한 눈에' 다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뒤적거릴 필요없이 '스타일'을 결정할 수 있어서 시간도 확연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볍게 비웠기' 때문에 어떤 옷이 나에게 딱 맞는지, 내게 더 필요하고, 꼭 필요한 옷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단다.

 

  하지만 난 이런 비결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왜냐면 난 '단벌신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옷이 얼마 없다. 1년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고, 속옷도 딱 3벌로 빨아입기 때문이다. 가끔 새옷을 사 입기도 하지만 5년에 한 번 살까말까하는 정도라서 '쇼핑'이랄 것도 없다. 앞으로 5년간 더 입을 정도의 무난한 옷이면 그뿐이다. 옷 쇼핑에 걸리는 시간도 길어야 1시간 남짓...그것도 시장(그렇다. 난 백화점도 안 간다)에 갔다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니 난 이 책 속에 적힌 나름의 비법들을 '내 일상'에 접목시킬 것들이 그닥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정리'나 '수납법' 따위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괜히 '최고의 논술쌤'인 것만은 아니다. 옷 정리하는 비법을 통해서 '책 정리하는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눈에 간파했기 때문이다. 일단,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낡고 오래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오래된 책이라도 무작정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추억'이 쌓인 책들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 가운데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은 꼭 버릴 것이다. 그리고 '서평이벤트'로 받은 책도 그동안 계속 쌓아두었는데, 사실 이 책들이 내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범이다. 역시 '두 번 읽지 않을 책'은 모조리 아웃이다. 특별한 '출판사의 책들'은 애정을 담아 보내주었으니 차마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남을 줄 수도 없으니 나의 '애장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밖의 출판사는 얄짤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사놓고 읽지도 못한 책들'이다. 이리저리 시간에 쫓겨 그저 책꽂이에 꽂아둔 채 '장식용'이 되어버린 책들인데, 일단 이 책들은 서둘러 '읽고', '리뷰'하고, '선별'할 것이다.

 

  이렇게만 해도 일단 1만 권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그런 뒤에 또다시 '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확실히 줄여나갈 계획이다. 일단 '읽고 써야 하는 만큼' 빠른 시일 안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중고시장'에 되팔 수 있는 책들을 팔기 시작했다. 이벤트나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들은 '책선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을 했으니 반드시 끝을 볼 것이다. 나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결심'을 하면 '끝장'을 보기 때문이다. 또, '한다'고 했으면 꼭 하고, '안 한다'고 하면 절대 안 한다. 그 덕에 난 술담배를 안 한다. 담배는 애초에 피우지 않았고, 술은 끊은 지 4년이 넘었다.

 

  이 책은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비우기'를 결심하기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을 책의 앞과 뒤에 그려진 '수레바퀴'에 적어놓고 자신의 결심으로 인해 '나의 모습'이 얼마만큼 변화했는지 주목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변화된 모습에 '자신감'을 갖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길 바라는 글쓴이의 마음이 이 책속에 가득하고 말이다.

 

  그리고 '비움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예찬하고 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먹고, 몸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여 꽉 채움으로써 누구나 건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곧잘 가지곤 한다. 하지만 진짜 건강해지는 비법은 '채움'보다 '비움'을 먼저 시작해야만 한단다. 특히, 현대인들은 '과식의 시대'를 누리고 있는 탓에 '배고픔'보다는 '배부름'으로 인한 질병이 더 늘어나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풍요로운 먹거리'를 누리지 못한 탓에 먹을 수 있을 때 쟁여두고 먹는 식습관 형태로 진화해 온 것이다. 그래서 배고픔은 두 달 이상 버틸 수 있지만, 배부름은 단 두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우리 몸을 키워 '몸속 지방질의 형태'로 쟁여두곤 한다. 이로 인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이고 말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건강해지고 싶다면 우리 몸속을 '비워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온갖 물건들로 가득그득 채워놓고 만족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인 셈이다. 이제는 방구석을 깔끔하게 비워나가면서 살아보자. 그러면 삶이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비워나가면 나갈수록 '진짜'로 필요해지는 무엇이 생길 거란다. '그것'으로 내 삶에 신선한 충전을 해나간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나도 방구석 가득한 책들을 비워나가면서 '진짜'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다. 기대해도 좋다. 홀쭉해질 '나의 행복한 독서 라이프'를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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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박정은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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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인문학책으로 세 가지 논점에서 '인간다움'을 논하고 있다. 1부에선 '코로나 시대'를 맞아 달라진 일상을 맞이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그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기로움을 이야기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어쩌면 불편한 주제인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낯선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방법론을 고찰하고, 대립과 갈등이 아닌 '공존'을 모색하는 마당을 제시했다.

 

  지은이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고 있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책을 쓸 당시에는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리고 수녀이며 학자다. 미국 홀리네임즈대학의 영성학 교수라고도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다분히 '종교적'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딱히 주제가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책제목조차 '인간다움'이 적혀 있으니 말이다. 그저 시종일관 '인간'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딱히 어느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논하지 않는 것이 퍽 맘에 들었다.

 

  책 속에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였다. 나는 '남성'이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나에게 "남자는 페미니즘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공격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난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라 얘기하지 않는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를 한다면, '페미니스트'는 다분히 '백인여성만을 위한 이상주의자'로 백인여성이 아닌 유색인에 대한 편견도 심하며, 남성들은 모두 성범죄자, 아니면 예비 강간범 취급을 하는 지독한 편견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여성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는 큰 반감이 없다. 나는 차라리 '여성주의자'라고 불리우고 싶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를 '문제시'하고 바로 잡기 위해 운동을 펼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불평등을 눈앞에 두고서도 여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할라치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느니, 남성과 여성을 '편가르기'하려는 모략이라느니...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일삼는 인간답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아주 가관일지경이다. 여성에 대한 우대정책이라고 여겨진다면 '당신네 엄마를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리고 당신의 아내와 딸이 살아갈 사회인데, 차별로도 모자라서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엉망진창인 사회시스템을 계속 유지하자고 고집부릴 셈이냔 말이다. 당장 '남성'들이 손해를 보는 정책일 것 같아도 큰 그림으로 보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일뿐인 것이 훨씬 더 많다. 왜 그런 '최소한 것'조차 열린 마음으로 남성과 여성이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단 말인가.

 

  여성 운동은 좁게 보면 '유리천장'을 없애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론 '양성평등'을 이루어 남녀차별이 없어진 세상을 만들어 '운동, 그 잡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세상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 운동'은 여성만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남성도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페미니즘'이란 명칭을 빼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복잡하다 못해 난잡해진 개념을 다시 '단순화' 시킴과 동시에 '누구'에게나 열린 운동으로 다시 시작하기 위함이다. 물론, '여성 운동'이란 명칭도 이미 어디선가 쓰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이미 활약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을 여자만의 전유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 편협함을 깨고 '남성'도 동참할 수 있는 진정한 여성주의운동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꼭 그래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간다움'을 이런 관점에서 출발하면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남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도 힘든 상황이지만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제주도에 낯선 이주민이 왔을 때도, 일각에선 '종교적 배타성'을 앞세워 예멘 난민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날선 주장을 했지만, 그들이 체류하고 있던 30일 남짓한 기간동안 많은 제주도민들이 그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잠시나마 평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는 소식을 듣고, 새삼 '인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AI가 지배할 미래에도 '인간다움'은 필수조건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러면서 AI가 '인간다움'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들이 인간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도 담았다. 하긴, '인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입력했다고 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AI가 인간을 어찌 대할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살아간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그러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곤 한다. 마치, 깨끗한 공기를 당연하게 여기다가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나서야 콜록거리며 괴로워하다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공기'도 '인간다움'도 청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다운'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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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나라 경제툰 - 만화로 배우는 돈의 원리 한빛비즈 교양툰 21
무선혜드셋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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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하는 착각이지만, '경제공부'를 하는 목적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부의 축적'이 필수조건일 수는 있겠지만, [부자=행복]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게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한 경제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의외로 우리는 '경제공부'에 대해서 꽤나 문외한이라는 것을 쉬이 느끼곤 한다. 돈을 벌고 싶다면서 '투자'와 '투기'의 차이점도 이해하지 못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로또'에 전재산을 올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출(빚)'까지 얻어서 몰빵을 하는 등 어리석은 짓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몰이해'를 이용한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범죄에 곧잘 속아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손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둥, 어렵게 모은 재산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둥...조금만 상식적인 판단을 하면 '사기범죄'라는 것을 인지하고 당하지 않을텐데도 여전히 당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경제공부가 더욱 필요한 법이다. 또한, 경제상식이 풍부한 사람은 당연히 부자일 거라는 오해도 곧잘하곤 한다. 경제상식을 잘 알고 있으면 '유용하게' 써먹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왕창 벌 수 있는 비법을 혼자만 알고 있다거나, 재벌을 능가하는 재산을 '한 방'에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단언컨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전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다거나 전세계 사람들을 가난으로 몰아넣는 '범죄자'임에 틀림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자가 되는 방법은 있을지 몰라도 '한 방에' 부자가 되는 비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말하지만, 모든 부자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너튜브로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 같아도 놀고 먹을 수준은 아니다. 인별그램 속의 세상이 아름답고 부티나서 부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카메라 각도 조절를 조금만 바꾸어도 '실속'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본인의 삶'을 인별그램에 올리면서 더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주식이나 코인에 투자해서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지만, 한 순간일 뿐, 몇 달 지나면 '연락두절'이 되는 경우가 흔해 빠졌다. 개미들의 주식투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익을 보더라도 '보너스'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해야지 생업을 팽개치고서 뛰어들만한 것이 절대 못 된다는 사실도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 이 정도의 상식을 알았다면 이제 제대로 '경제공부'를 해보자. 머리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이 책, <개미나라 경제툰>은 경제공부를 손쉽게 도와주는 유익한 책이다. 그동안 경제공부가 힘들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후속작도 나올 것 같으니 '경제교과서'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그래서 난 이 책으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경제공부는 그 어떤 공부보다 '조기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경제감각'이 없다면 꽤나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40대 이상인 분들이 그렇다. 7080년 세대들은 공부는 죽어라했으면서도 정작 '경제공부'는 해본 적이 없기에 경제적인 호황을 맞아 죽어라 돈 벌어서 흥청망청 쓸 줄만 알지 제대로 돈을 버는 '투자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신용카드가 처음 나왔을 때도 '카드깡'이라는 잘못된 방법으로 빚에 허덕이고 말았고, 주식투자의 바람직한 방법을 익히기도 전에 '몰빵'을 하다 어렵게 모은 전재산을 탕진하는 등 우여곡절도 참 많은 세대들이었다. 적어도 밀레니엄 세대들에겐 이런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제공부'는 탄탄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경제책'은 딱딱하고 어렵기만 하다. 경제이론을 설명하고 경제학자를 소개하면서 '경제흐름'을 가르치는 것은 좋은데, 먼 옛날의 경제지식을 달달 외워서 미래에 써먹을 수 있겠냔 말이다. 더구나 경제정책은 하루만 지나도 오락가락하고, 그에 따른 대책이나 대안조차 갈팡질팡하며 혼란스러울 지경인데, 옛날에나 통용될 낡은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차라리 '경제적인 맥락'만이라도 쉽게 알려줘서 '오늘날의 경제흐름'을 아이들이 직접 파악하고, '경제뉴스'를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선 그런 '낡은 지식'을 외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기존에 쓰이던 경제용어'를 대신해 '개미왕국'에서나 쓰일 법한 용어로 대신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개미나라에서 쓰이는 화폐는 '사탕'이고, 꿀벌나라에서는 '벌꿀'이다. 왜냐면 개미와 꿀벌에게는 사탕과 벌꿀이 '실물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는 '금'일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탕과 벌꿀은 '들고 다니기 힘들다'는 단점 때문에 '돈'이라는 지폐를 만들게 되었다. 또한, 이 지폐를 '은행'이라는 곳에서 언제든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자 수많은 개미들은 '사탕'을 은행에 맡기고 '지폐'를 사탕 대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은행개미'는 꼼수를 부린다. 수많은 개미들이 '사탕'을 대신해서 '지폐'에 쓰인 숫자를 믿고 거래를 하게 되니, 개미들이 맡긴 '사탕'보다 훨씬 더 많은 '지폐'를 시장에 유통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면 은행에 한 번 맡긴 '사탕'을 개미들이 바로 빼내어가지 않는다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개미'는 보유하고 있는 사탕보다 훨씬 더 많은 지폐를 찍어내서 시장에 뿌렸다. 그로 인해 경제가 활성화 되고 '경제호황'을 맞이하니 '은행개미'의 개인적인 이득 뿐만 아니라 개미나라의 경제까지 덩달아 좋아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은행개미'가 자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개미들이 맡긴 사탕을 '제것'처럼 사용하면서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것을 다른 개미들이 알게 되자, 수많은 개미들이 너도나도 '은행개미'가 되려고 했고, 그로 인해 은행간 경쟁이 붙어 '실속이 없는 은행'들이 우후죽숙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수많은 은행에서 저마다 지폐를 발행해서 시장에 유통시킨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말이다. 그러다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 생긴 은행들이 너나할 것 없이 유통시킨 '지폐'를 가지고 은행에서 사탕을 되찾으려 했을 때, 은행이 사탕 지급을 할 수 없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이 개미들에게 '뱅크런(은행에 맡긴 예금을 빼가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드는 것)'을 유발시켰고, 지급하지 못하는 예금이 발생하자 결국 은행이 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에 '개미나라 정부'는 은행을 믿지 못해 발생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보유한 사탕'의 일정액 이상을 대출하지 못하게 만들고, 만약 은행이 망하더라도 '일정금액'까지는 지급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게 된다. 이른바 '예금자보호제도'다. 그렇다면 이런 예금자의 돈을 반드시 지급하기로 만든 제도는 예금자를 위한 제도인 걸까? 곰곰이 따져보면, 예금자보다는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은행이 망하는 까닭은 '뱅크런'이 생길 때일데, 예금자보호제도를 통해 '뱅크런'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은행은 마음 놓고 '보유한 예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대출해줌으로써 이익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공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사회현상을 보여주며 사회시스템이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해주고, 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떤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게 만드는 공부 말이다. 바로 이런 공부법이 '감각'을 키워주게 되고, 그 감각을 익혀서 바로 써먹을 수 있게 만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영어공부를 10년 넘게 공교육에서 배우지만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마는 어리석음을 다른 과목에서도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또한, 국어공부를 하면 할수록 소설책 한 권 '제 입맛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정답'만 찾으려 하고, '권위자의 해석'에만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도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경제공부는 더욱더 그렇다. 어릴 적부터 '수입과 지출'을 계획적으로 실천하며 '나에게 딱 맞는 소비수준'을 배우고 익혀 습관으로 만든다면, 어른이 되어서 경제활동을 잘 할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경제정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도움을 받고,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큰 보탬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어른들도 '경제공부'는 필요하다. 부유하게 살아야만 행복하고, 일하지 않아도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비법만을 목이 빠져라 탐구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경제책들이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된다. 저렇게 하면 돈을 쉽게 번다고 현혹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한가하게 '책'이나 출간하고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상식' 아닌가? 그렇게 출간하는 목적 또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행복해지기 위한 경제공부를 하길 바란다. 이 책도 그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떠올리고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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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클래식 클라우드 12
최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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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나마 부족한 '문학적 소양'을 쌓을 요량으로 닥치는대로 고전문학을 섭렵하다보니 결국 '작가의 삶'이 궁금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의 배경지식'과 '글쓴이의 뒷이야기'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돌고 돌아 다시 '아르테'의 <클래식 클라우드>를 다시 손에 들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가 애초에 100권을 목표로 잡았다고 해서 '관심도서'에 올려두었는데, 코로나가 대유행을 하고 난 뒤에 뜸해지더니 목표에 다다르기도 전에 멈춰서고 말아서 참 아쉬웠더랬다. 다시 '시작'할 것을 의심치 않으니 더 기다리면서 '완간'을 기원해본다.

 

  작가 분야에서는 코난 도일로 시작해서 헤세와 단테를 지나 네 번째 순서로 '피츠제럴드'를 읽게 되었다. 이 시리즈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작가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을 읽을 수 있어서 '한 편의 기행문'을 읽듯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더구나 풍부한 사진이 실려 있어서 '글'로만 남긴 기행문과는 달리 '시각적인 정보' 또한 함께 읽을 수 있기에 막연한 감상이 아닌 '사실적인 느낌'으로 작가의 삶에 다가갈 수 있어서 참 좋다. 뿐만 아니라 '사진' 곳곳에 감춰진 작가의 뒷이야기도 '저자의 세련된 글'을 통해서 접할 수 있기에 견문을 넘어 '풍부한 배경지식'까지 쌓을 수 있기에 좋았다.

 

  그래서 <피츠제럴드>를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피츠제럴드의 소설들은 대부분 '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단언컨대,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해서 <낙원의 이편>, <밤은 부드러워>, 그리고 <리츠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등의 단편소설들까지 거의 대부분 피츠제럴드가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소설가들이 이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경우엔 좀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그건 바로 거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삶은 화려했고, 늘 '사교계'에 주목받는 스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게 바로 이 책에 담긴 '호기심'이었고, 그것이 또한 '매력적인 서술'로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인 개츠비와 작중화자인 닉은 '피츠제럴드'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또 <밤은 부드러워>에서 남자 주인공은 '피츠제럴드'였고, 여자 주인공은 그의 아내인 '젤다'가 모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소설 곳곳에서 '피츠제럴드'라는 자신을 등장시키고, 그것이 마치 유명화가들이 그림 속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는 것 같은 '시그니처'처럼 느껴지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평가들은 모두 그가 '심장마비'로 죽고 난 뒤에야 관심을 받게 된 것들이란다. 그의 유일한 히트작은 <낙원의 이편>이라는 장편소설 하나뿐이었고, 너무나도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도 그가 죽은 지 10년 뒤에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그의 삶은 '가난, 그 잡채'였다. 더구나 그의 아내 젤다가 '정신병'을 앓고 정신병원은 전전했던 탓에 '병원비'에 쪼들리는 상태였고, 그나마 '원고료'를 받으면 겨우 병원비를 충당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작정 글을 써냈고, '단편소설'도 뚝딱뚝딱 써냈고, 말년엔 헐리우드 상영목적의 대본을 '각색'하는 일에 참여했지만 대부분 '엔딩크레딧'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수모(?)를 견뎌야 한다고 했다. 그랬는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집'을 산 적이 없고, 대부분 월세를 전전하거나 여러 호텔에 투숙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것도 꽤나 유명한 호텔들에서 말이다. 평생 가난했다던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그의 '상승욕구'에서 찾아볼 수 있단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고상하고 품격 있는 집안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품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돈 많은 상인가문이었다고 한다. 피츠제럴드가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에게 곧잘 "나 없었으면 너의 아버지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았겠니"라는 말을 떠벌릴 정도였다고 하니, 집안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뗀 단어도 '엄마'가 아닌 'UP'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호사가들은 그가 품었던 '상승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호들갑을 떨곤 한단다.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작가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 '화려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그가 그런 의지를 불태운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의 첫사랑이었던 '지네브라 킹'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난'을 들먹이며 헤어지라고 강요했기에 젊은 피츠제럴드는 '반드시' 부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한편, 첫사랑에 실패한 피츠제럴드는 두 번째 사랑인 '젤다'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또 다시, 젤다의 아버지가 그의 가난을 들먹이며 '파혼'하기에 이른다. 피츠제럴드는 절치부심하여 그의 첫 장편소설인 <낙원의 이편>을 대히트시키며 '유명작가의 대열'에 끼자 젤다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는 피츠제럴드가 유명작가가 된 뒤였고, 엄청난 인세를 챙기던 때였기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온 행복을 '화려한 삶'으로 보상받으려 했는데,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고 한다. 뒤이어 쓴 책들이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출판시장에서도 별로 팔리지 않자 그는 곧 쪼들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씀씀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급기야 아내인 젤다가 정신병원을 전전하게 되니 '막대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말년은 호텔이 아닌 여인숙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가 동경해마지 않던 뉴욕을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거물>이라는 작품을 쓰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소설들은 그가 죽고난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위대한 개츠비>는 현재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지만, 그의 삶은 개츠비가 맞이한 비극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책이 이처럼 사랑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를 더해가고,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묘한 문장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들 한다. 이는 '원작'을 접한 이들이 말하는 공통된 주장이기도 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셀린져, <노르웨이의 숲>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유명작가들의 한결같은 이유다. 물론, 피츠제럴드라면 뭐든 까기만하던 헤밍웨이조차 '그의 문장력'만큼은 인정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극찬의 이유로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중의적 표현'으로 가득하다]고 표현했는데, '원작'을 직접 접할 수 없는 나같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아쉬운 평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뒤침(번역)'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일반독자들은 <위대한 개츠비>가 왜 '위대한 것'인지 그 까닭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긴, 엄청난 부를 쌓고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렇게 부를 쌓을 목적이 고작 유부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으며, 끝내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고 어이 없는 죽음을 맞이했으니...개츠비를 '최고의 찌질남'이라고 평한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영어권에서 'great'의 뜻은 대단하다는 긍정적인 뜻도 있지만 '너 잘났다'는 부정적인 뜻도 내포하고 있기에 개츠비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을 '원작'에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비영어권에서는 이런 이중적인 표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탓에 독자들이 느끼는 '한계'가 극명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하지만 '중의적인 표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뒤침책'이라하더라도 <위대한 개츠비>를 곰곰이 곱씹으며 읽다보면, 그 대단함을 엿볼 수 있다. 한 여인을 향한 순정을 품고 '엄청난 부'를 단단히 거머쥐며 '한 시대'를 주름잡은 시대의 풍운아, 개츠비. 그는 온 도시의 유명인사를 쥐락펴락하며 자신의 파티에 끌여들일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가 가장 원하는 단 한 명을 초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품고 있다. 그 아쉬움은 바로 '데이지'다. 아름다운 여성이자 개츠비의 단 하나뿐인 사랑이다. 그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부를 쌓은 것도 바로 데이지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다고해도 멈출 수가 없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개츠비' 자신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엄청난 자신감 아닌가? 단 한 명의 여자를 위해 온 인생을 건 남자. 그 순수성에 놀라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도 오직 자신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 그 순진함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리고 그가 뿌려대는 엄청난 부에 다시 한 번 놀랄즈음, 교통사고 한 번에 어렵게 쌓아올린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에게까지 '철저한 외면'을 당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도대체 그의 인생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살아서는 엄청난 관심을 받던 그가 죽어서는 철저한 외면을 받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아무리 그가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고는 하나 그의 평소의 품행을 보았을 때 '결코 그랬을리 없을거야'라고 믿어주는 친구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이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개츠비는 이런 푸대접을 받을 위인이 아니었다. 정작 '살인자'는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개츠비는 그 살인자까지도 품고서 홀로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그 살인자가 다름 아니라 '단 하나 뿐인 사랑, 데이지'였던 탓에 말이다.

 

  이쯤되면, 긍정적으로돈 부정적으로든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였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이 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그냥 찌질한 남자는 아니었던 탓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개츠비의 원래 모델이 '피츠제럴드, 자기 자신'이었단다. 엄청난 부를 이루고픈 갈망과 단 하나뿐인 사랑을 되찾고 싶은 욕망을 자신의 소설속에 '투영'시키고 써낸 걸작이었단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갈망과 욕망은 살아생전에는 이루지 못하고 죽고난 뒤에야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꼽히게 되었다니, 죽어서나마 그는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직 접하지 못한 <낙원의 이편>과 <밤은 부드러워>, 그리고 다수의 단편소설들을 읽어보고 싶다. 이런 것이 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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