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 - 덕의 정치, 사랑의 정치, 힘의 정치 홍성민 교수의 알기 쉬운 정치철학 강의 1
홍성민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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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정치는 '전쟁'이다. 어설픈 꼼수를 부린다거나 어리숙한 낭만적 감성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정치를 한다면 두 번 볼것도 없이 '걍 아웃'이다. 특히나 한국정치는 더하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죽여야 '우리'가 사는 약육강식의 '정글 정치'가 징글맞도록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인 홍성민 교수는 한국정치가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까닭을 정치시스템이 성숙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왕조정권'이 무너지자마자 '식민지배'를 당했고, '해방정국의 혼란'에 이어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나 성장한 것만으로도 대견하긴 하지만, 성숙할 수 있는 '단계적 발전'을 이루기도 전에 급박하게 '강대강의 대결정치' 양상으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독립과 친일 등으로 파벌싸움만 일삼았기에 대한민국의 정치는 오직 '힘의 논리'로만 우열을 가르는 안타까운 모습만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국정치는 이대로 괜찮은가? 정녕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아무리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도 무너뜨릴 방법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한국정치의 정상화'도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그저 정치꾼을 정치인처럼 활동하도록 감시하는 수준 정도로 관심을 두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부터 차근차근 이해하게 되면 '정치꾼들의 꼼수'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정치인들의 행보'도 낱낱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이 어지럽고 복잡한 '한국정치'를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아니 적어도 저들의 일가친척만 잇속을 챙기는 난장만큼은 일거에 근절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온국민이 '정치철학'에 깊이 관심을 두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이 책도 지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책으로 <정치를 보는 3가지 관점>을 펴냈다. 그 세가지란 '덕의 정치', '사랑의 정치', '힘의 정치'라고 한다. 어려운 얘기는 빼고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정치를 함에 있어 '인덕'이 있어야 하고, 무릇 정치인이라면 마음씀씀이가 '(종교적 관점에서)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며, 승리하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 과감한 결단, 다시 말해 '힘'을 적절히 발휘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는 시기적으로도 '고대의 정치'는 덕을 중요시 했고, '중세의 정치'는 사랑을 중요시 했으며, '근대의 정치'는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힘'만 갖추고 '덕'과 '사랑'이 부족해서는 올바른 정치를 이끌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라면 세 가지를 고루 갖춰야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정치철학에 관심을 두었다면 오늘날의 '정치판'이 위의 세 가지 중 어느 쪽에 치우쳤고, 어느 것이 절대 부족한지 파악하면서 살펴보면 틀림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그람시까지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살피며 덕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를 거쳐 힘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계보를 나열하며 설명하기도 했고, 동서양의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서로 비교분석하며 동서양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정치철학의 양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며 '균형잡힌 시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정치철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올바르고 균형잡힌 정치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조선왕조까지는 '덕의 정치'를 중요시해왔다. 허나 급변하는 시기에 외세의 문물을 뒤늦게 받아들이면서 '사랑의 정치'를 펼쳐보기도 전에 '힘의 정치'를 받아들이기 급급해서 '정치적 미완성', 또는 '정치적 미성숙'한 상태로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양상을 띠게 되었단다. 다시 말해, 우리 정치의 역사는 몇몇 뛰어난 인물(지도자)가 등장해서 훌륭한 인품으로 백성을 덕으로 감싸는 정치를 오래도록 해왔으나, 이런 '덕의 정치'가 발전해 마음씀씀이를 베풀줄 아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조화를 이루는 '사랑의 정치'를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왕조의 패망과 함께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받게 된 셈이다. 서구 유럽에서는 이 시기에 '종교(그리스도교) 혁명'이 일어나며 왕족과 귀족 뿐 아니라 민중들까지 종교적 영향력이 파고들어 한마음 한뜻으로 '사랑'을 떠받들며 지내온 경험을 축적해왔는데,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덕의 정치'를 마감해야 했고, '사랑의 정치'는 협소한 의미의 포교활동(?)만 해본 채, 승패에만 집착하는 '힘의 정치'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정치는 '지도자'에게만 '덕'을 갖추라고 요구할 뿐, 국민들 스스로 '덕'을 갖출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지도자(정치인)와 국민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씀씀이를 베풀 여력도 없이 오직 '이기는 정치'만을 위해 상대를 파멸시키거나 나락으로 내몰 궁리만 하는 저급한 정치풍토를 갖추게 되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얼추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게 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지도자와 국민들 모두 '덕'을 갖추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정치적 기본소양'을 닦는 일일 것이다. 만약 '나'는 덕을 갖추고 사랑을 베풀었는데 '남'은 그렇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혜택을 누리기만 하는 얌체짓을 하게 된다면, '정의의 심판'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정의론'에 해당하는 요소로 존 롤스나 마이클 샌델이 떠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덕과 사랑을 저절로 뿜어져 나올 정도로 닦지 않게 된다면 '공리주의'를 비롯한 공정과 공평, 형평을 따지는 일에 매몰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는 사회속에서는 '덕과 사랑의 정치'가 성장할 수는 없다. 물론, '정의론'을 배척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일일이 '정의'를 논하기 이전에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만큼 상대를 존중하고 이익을 챙겨줄만한 '넉넉한 마음씀씀이'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덕과 사랑'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힘의 정치'를 논한다면, 제 잇속만 챙기기 급급한 아귀다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릇 '힘의 정치'란 상대를 재끼고 '권력'을 쟁취하는데 목적을 두기는 하지만, '이런당'이 정권을 잡든 '저런당'이 정권을 잡든 심지어 '요런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힘을 겨루는 정치를 말한다. 이를 테면, 권모술수로 가득하다고 오명을 뒤집어 쓴 <군주론>도 실상은 마키아벨리가 조국 피렌체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메디치가의 수장에게 바쳤던 정치철학책이었다. 비록 권력을 잡는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지라도 '피렌체'가 다른 나라의 침략에도 끄떡하지 않고 나아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고 조언한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의 정치'도 정권을 잡기 위해 때론 비겁한 수단을 이용할지라도 정권을 잡은 뒤에는 오직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은 덕, 사랑, 힘의 진정한 정치양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직 저급한 정권투쟁만 일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들도 모두 수준이하는 절대 아니다. 덕과 사랑을 갖추고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정치인과 국민들이 반드시 있다. 비록 아직은 아주 미미한 '소수'일지라도 정치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면, 바로 그 '소수'가 비로소 제대로 활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치는 이제 시작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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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 172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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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어릴 적에는 <걸리버여행기: 소인국 편>만 따로 편집해서 출간한 '문고판' 형식의 동화책으로 읽었더랬다. 재밌게 읽었던 터라 우연히 '대인국 편'을 보게 되었을 때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흠뻑 빠졌더랬다. 그러다 대학생시절에 '완역판'이 새로 출간되어 읽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먼저 방대한 분량에 놀랐고, 날카로운 정치풍자, 사회비판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더랬다. 그저 '아동문학'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진정한 '어른문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깊은 내용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영국소설'이고, 양당체제였던 영국의회의 휘그당과 토리당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인들의 다툼에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무능한 정치인들을 비꼬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게 만드는 내용인줄로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어차피 '영국의 의회정치사'는 물론이고 '영국 역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때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걸리버 여행기>가 '아일랜드 저항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책 또한 허투루 보지 않게 되었다. 바로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일제강점기'를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핸리 2세 때부터라고하니 12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해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이 좋지 않고, 간간히 유혈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안타깝기 그지 없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만나는 '아일랜드인의 아픔'이 바로 영국의 억압과 수탈로 점철된 가혹한 식민정책 때문이라고 봐도 거의 무방하다고 한다. 그렇게 아일랜드는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18세기 후반에는 아일랜드 자치 의회가 허용되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고, 영국의 착취는 더욱 악랄해졌기 때문에 아일랜드인의 무장봉기는 점차 '민족주의 운동'으로 번졌다고 한다. 이에 영국은 19세기 초에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영연방'으로 강제합병을 하면서 영국인들의 이주를 더욱 활발히 했고, 이에 저항하는 아일랜드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아일랜드의 독립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다 20세기 초에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신페인당'이 창설되면서 아일랜드의 자치 요구는 더욱 고조되었고, 10여 년 뒤에는 '아일랜드 국민의회'를 창설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탄압이 심해지자 아일랜드는 맞서 싸웠고, 급기야 전쟁상황으로 돌입(아일랜드 독립전쟁)했고, 휴전과 내전을 거듭하다 1937년에 국호를 '에이레'로 바꾸며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던 영국은 독립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그러다 1949년에 다시 국호를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바꾸고 영연방에서도 탈퇴하면서 완전한 독립을 하였단다. 무려 900여 년간의 투쟁 끝에 거둔 독립이다.

 

  이러한 역사를 품고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스위프트는 영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교양을 쌓은 뒤에 '국교회 사제'로 아일랜드에 부임하게 되었고, 양국을 오가며 종교와 정치에 관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단다. 그의 젊은 시절은 출세지향적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정당이었던 '휘그당'과 '토리당'을 오가며 집권당을 편들며 영국 본토에서 종교에 종사하길 바랐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아 아일랜드로 밀려나게 되고 말았단다. 그렇게 아일랜드에서 머물게 되면서,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1720년대부터 영국의 식민지배에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노년때까지 왕성히 활동을 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존경받는다고 한다.

 

  이런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가 어떤 책이었겠는가. 당연히 '정치풍자'의 내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스스로 문명국이라 자랑을 늘어놓는 '영국 본토인'들에게 보란듯이 비판을 일삼았고, 때로는 비난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소설속 주인공 걸리버는 자신이 겪었던 여행담을 늘어놓으며 '강자'라고 떠세를 부리는 이들을 향해 무차별 풍자를 날리며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게 된다. 심지어 '말들의 나라'에서는 인간(야후) 자체를 부정하며 인간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낄 정도라고 야유를 보내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아동용'이라면서 왜곡했던 것일까? 그것은 '권력자'들이 하나 같이 무능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것에만 최선을 다했기에 <걸리버 여행기>를 '불편한 책'으로 여겼던 경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단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말이다.

 

  하지만 <걸리버 여행기>가 마냥 재밌거나 통렬한 비판에 속시원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다.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비판을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어내지 않으면 '주제'를 놓치기 십상인 책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주요 화자인 '걸리버'도 작가인 스위프트를 '대변'할 때도 있지만, 스위프트가 직접 '걸리버'를 비판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비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따지면서 읽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영국의 역사'에 잘 모르면, 그 '비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인지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래서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기 위해 '영국의 역사'부터 공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영국의 역사 대신 '대한민국의 역사'나 '대한민국의 현실정치'를 대입하며 읽어나가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으로 대입해서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정치풍자'는 만국 공통언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는 곳'은 달라도 '하는 짓'은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치풍자는 어디까지 하면 좋을까? 사실 대한민국은 정치풍자 마저 '검열의 대상'으로 여기는 우스운 짓을 하기에 '풍자의 한계'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때 박근혜를 '마야의 그림'으로 풍자했다가 곤혹을 치룬 화가가 있었고, 지금 정권에서도 '윤석열차'로 대상을 수상하자 대회 자체를 박살(!) 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떳떳하지 못한 짓을 얼마나 많이 했길래 그 정도 풍자에 호들갑을 떤단 말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그저 허허 웃고 넘어갈 수 있잖은가 말이다. 그런데 질색팔색하는 꼴을 보면 뒤가 구리긴 구린 모양이다. 집회와 시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정말 한결 같다.

 

  한국인들 중에 한 사람이 걸리버처럼 여행을 떠난다면 어느 나라로 가게 될까? 소인국에 가면 '갑질'을 단단히 할 것 같고, 대인국에 가면 '비굴'의 끝판왕이 되어 나라도 팔아먹을 것 같고, 라푸타에 가면 '사이비 교주'로 등극해 라푸타를 침몰 시키고 말 것 같고, 휴이넘에 가면 야후 중에 야후가 되어 휴이넘의 분노를 사서 초강력울트라캡숑 뒷발질을 맞아 아구창이 너덜너덜해질 것만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짓'만은 절대 안 했으면 싶다. 지금 하는 멍청한 짓만으로도 나라꼴이 우스워져버렸는데 더욱더 호구짓을 하기 전에 휴이넘이 정의의 뒷발질로 그 입을 더는 놀라지 못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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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3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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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어야 할까? 자꾸 이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경이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공상과학(SF)소설의 원조라는 수식어를 읊어댄들, 결국은 '19세기 소설'이기 때문이다. 1800년대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세계일주를 80일 만에 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지 몰라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루나 이틀이면 지구 한바퀴쯤 돌고도 남으니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거기다 '잠수함'으로 해저를 누비고 '우주선(대포알)'을 타고 달궤도를 돌아 귀환했다는 이야기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저 식상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이 이럴진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어느 외딴섬에 표류하여 모진 고생을 하다가 극적으로 생존한 뒤에 기적과 같이 고국에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눈에 들어올 독자도 그닥 많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보다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이 얼마든지 있는 요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난 자꾸 쥘 베른의 소설이 끌린다. 뭐라 딱 꼬집어서 '이것'이 매력이라고 말하기 난감하지만 말이다.

 

  한편, 쥘 베른의 소설을 '아동용 소설'로 소개하기도 애매하다. 애초에 베른의 소설은 '아동'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았다. 물론, 출판사가 베른의 소설을 '축약'하여 호기심이 충만한 19세기 아이들에게 신비로운 이야기로 소개하기도 했다고는 전해진다. 또 이러한 전략이 20세기 아이들에게도 <소년소녀명작동화>로 만들어져 나름 재미를 본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아이들에게도 잘 먹히는 전략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그의 소설에 흥미를 느끼기에는 21세기 과학기술이 너무 발달한 탓이고, 그의 소설이 너무 '장황한 나열과 설명'으로 이루어진 탓에 요즘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길더라도 '감동'이라도 진하게 전해질 주제를 담았다면 '교육용'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을텐데, 쥘 베른의 소설에는 '재미(흥미)'라는 요소 이외에 '교훈'이라고 할 내용이 거의 없다보니 요즘 아이들에게 소개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난 쥘 베른의 소설로 논술수업을 진행해보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리곤 한다.

 

  왜냐면 쥘 베른의 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의 창조자이면서 '모험소설'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쥘 베른의 업적은 평범한 소설가에 불과한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들어낸 결과물이 오늘날에는 '현실'로 실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다시 말해, 몽상가의 꿈이 현실로 가능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단 말이다. 거기에 아무리 극한 상황에 놓이고 험난한 위기에 닥치더라도 '인간'에게는 '이성의 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낼 수 있으며 끝내는 기적과도 같은 생환이 이루어지는 '낭만적인 모험담'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적 요소가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실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꿈보다 해몽'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신비의 섬>은 총 3부작으로 쓰여졌다. 쓰여질 당시에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영감을 받아 '외딴섬'에 표류한 주인공들이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극적으로 귀환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그래서 '모험소설'의 교과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쥘 베른만의 독특한 양식인, (당시로서는 첨단이었을) '과학적인 설명'을 눈앞에서 실현하듯 생생하게 묘사하며 독자들을 황홀(?)하게 만들고, 계몽사상을 충실히 실천하듯 '이성의 빛'으로 모든 위기를 극복해내는 '문명의 힘'을 선보이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듯 대양 한복판의 외딴섬에 표류한 처지이면서도 '깃발꽂기'를 선보이며, 조국사랑의 실천과 애국적 행위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묘한 감동(자긍심(?)) 전해준다.

 

  이런 모험담을 성사시킨 5명의 개척자 또한 각자 나름의 매력을 선보이며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쥘 베른의 소설에서는 이렇듯 '강인한 신념'을 갖추고 '뛰어난 이성'으로 온갖 위기를 극복해낸다는 이상적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오히려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반동적인 인물'이 너무 나약해 보일 정도다. 허나 쥘 베른의 소설에는 허약한 빌런(악당)보다 더 위험한 것이 등장하기 때문에 악당 따위는 등장하지 않아도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자연환경(비문명적 조건)'이다. 자연환경의 거대함은 그 앞에선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스케일로 등장하곤 한다. <해저2만리>에서도 남극점 도달 직후에 빙하속에 갇힌 노틸러스호라는 극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에게 무한한 자원의 풍요로움을 선사하던 링컨섬이 하루 아침에 화산섬으로 돌변해서 화산분화와 함께 송두리채 파괴되어 개척자들을 남태평양 한가운데도 날려버렸다. 그러나 쥘 베른은 그러한 '거대함' 앞에서도 등장인물들을 쉽사리 죽음에 이르지 않게 만든다. 왜냐면 한없는 '인류애'를 갖추고 있는 마음씨 고운 이들을 신(하느님)께서 쉬이 거두어갈리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승에서 할 일이 많은데 어딜 저승 문턱으로 들이겠느냔 말이냐는 듯이 말이다. 착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설정(해피엔딩)을 난 참 좋아한다.

 

  그런데 그 '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장황한 설명을 한다는 점이 쥘 베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해서 그 '장황함'을 빼버리면 주인공들이 왜 착한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빼기에도 그렇다. 다시 말해, 그렇게 길게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주인공들의 '매력'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의 리더격인 '사이러스 스미스'의 매력은 해박한 지식으로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를 '지상낙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풍요로운 문명의 이기를 누리게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능력은, 이를테면 그가 '과학지식'을 동원해서 그저 돌멩이에서 '철광석'으로 탈바꿈시키고, 그 철광석에서 뽑아낸 '순철'로, 필요에 맞게 '주철'을 만들고, '강철'로 제련해서,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를 척척 만들어 과정을 엿보아야만 알게 된다. 이런 예들을 수도 없이 많고, 그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히 개척자들이 집이 필요해서 집을 만들었다거나 새로운 먹거리를 구한 김에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안정적인 식량공급원을 마련했다는 내용인데,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인류가 축적한 지식이 총동원되어 자세하게 나열되었다. 그 덕분에 개척자들은 무인도에 불과한 섬을 불과 3년만에 '전신주'를 설치해서 통신장비까지 구축해 '문명생황'을 영위해 나간다. 만약, 그들이 더 오래 그 섬에 정착했더라면 '기차'를 비롯한 교통수단까지 마련해서 남태평양 한복판에서 '산업혁명'을 이룩하는 위엄을 뽐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실현가능성'이 농후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결코 허무맹랑한 상상의 산물이 아님을 독자들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문에 19세기 몽상가들이 20세기에 위대한 과학자, 공학자 들로 거듭나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최첨단 기기를 만들어 해저를 정복하고, 우주를 항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난 이런 점에서 쥘 베른의 소설을 우리 아이들의 필독서로 삼고 싶었다. 비록 읽기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 '진면목'을 깨우치는 순간, 우리 아이들도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대한민국을 넘어 대양을 누비고 우주로 나래를 펼칠 게 아니냔 말이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21세기에 재미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꼰대스타일의 '설명충'의 지루한 설교를 읽고서 '몽상가'를 꿈꾸고, 21세기형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쥘 베른이 갖춘 위대함을 '압축'해서 숨겨진 진면목을 '단숨'에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책속에 담긴 '지식'을 '지혜'로 변환시켜주는 기계를 머리에 쓰고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으면, 장황하기 짝이 없는 기나긴 설명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해서 핵심만 쏙 넣어주는 방식이 도입될 것이라는 상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이런 상상이 22세기에는 너무나도 식상하고 뻔한 내용의 지루함을 선사하게 된다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 듯한 '해몽'보다 '꿈'이 절실하다. 남들이 쌓아놓은 '기초과학'을 빌어다 실컷 '응용과학'의 혜택을 누려왔지만, 이젠 그런 혜택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우뚝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쥘 베른'을 소개해야할 당위성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쥘 베른이 20세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설명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번뜩이는 아이디어(상상력)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쥘 베른의 소설속에서 '낡은 지식'을 뽑아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어떻게' 해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들을 (전문가도 아니면서) 상상해 낼 수 있었는지, 그 '원동력'을 배워야 한단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상을 살더라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은 바로 '상상력'뿐이다. 그렇기에 선생인 내가 할 일은 바로 이 지루한 소설속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뿜어낼 수 있는 원천에 이르는 지름길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비록 꿈 같은 이야기고, 해몽에 불과한 소리일지라도, 선생이라면 반드시 꾸어야 할 꿈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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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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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명작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듯 싶다. <프랑켄슈타인>도 그런 명작소설 가운데 하나다. 이 소설을 읽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법이 있는데, 바로 '괴물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십중팔구는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은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괴물은 이름이 없다. 괴물의 창조주인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생명을 불어넣어 만든 직후에 너무나도 끔찍하고 혐오감을 느껴 '새 생명'을 눈앞에 놓아두고 그대로 도망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선 소설의 중반부까지 읽어야 눈치챌 수 있고, 끝까지 읽지 않으면 '괴물'을 무어라도 이름을 붙여 불러주었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좋은 질문'인 셈이다.

 

  하지만 진짜 괴물은 생김새가 끔찍하고 보기만 해도 역겨움을 느끼고마는 '새 생명'이 아니라, '새 생명'에 과학의 정수를 담아 숨결을 불어넣고서도 그대로 방치하여 수많은 이들에게 배척 당하고 사회밖으로 내몰아버리도록 원인을 제공한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인 까닭에 그가 괴물의 대명사로 불리더라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괴물도 살인과 같은 악행을 저질러 '악마'가 되기 이전에 어질고 선한 존재였다. 그토록 선한 마음씨를 가졌는데도 겉모습이 흉측하다는 이유로 선한 행위조차 '위협행위'로 오해하는 어리석은 이웃들 때문에 분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오해를 받고 분한 마음을 품었을 때 '창조주'였던 프랑켄슈타인이 나서서 오해를 풀어주고, 애초에 '반듯한 외모'로 창조했던들 그런 혐오감을 조장하기나 했겠느냔 말이다. 이제 막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뜬 존재에게 제대로된 훈육과 사회적응을 시켜주지도 않고서 그대로 방치한 결과가 끝내 살인을 저지르는 악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미안한 마음이나 불쌍하게 여기는 따뜻한 마음씨는 없는 듯 싶다. 시종일관 자신의 가족, 친구, 사랑하는 연인마저 죽여버린 괴물에게 복수하려는 일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살인을 저지른 괴물을 처치하는 것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최선이라는 사명감까지 부여하며 '자신의 책임'은 망각한 채, 그저 '복수의 화신'이 되는 것만이 당연한 것인 마냥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더 한심한 노릇은 자신이 무책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에 철저한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완벽하게 실행에 옮긴 것이다. 아주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순수한 악의 화신'이라고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해도 크게 다를 건 없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프랑켄슈타인' 같은 뻔뻔한 사람들이 참 많은 듯 싶다. 뛰어난 지식으로 우리 사회의 엘리트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였으면서도 자신들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병폐현상'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없이 뻔뻔스레 '남탓'만 하는 무책임한 짓을 서슴지 않는 분들이 참으로 많은 것을 보니 말이다. 일찍이 메리 셀리도 진보주의 사회운동가인 남편(퍼시 셸리)과 함께 '러다이트 운동'을 목격하며 남편이 '기계파괴 운동', 즉 '폭력의 원인은 가난이다'라고 지적한 부분에 공감을 표했고, 그후 <프랑켄슈타인>에 일정부분 '러다이트 운동'에 대한 지지를 담았다고 해석한 이들도 꽤나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속 '괴물'이 애초에 선한 존재였으나 살인을 저지르는 악행을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것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실제로도 독자들은 괴물이 저지르는 살인행각에 '혐오감'을 내비치기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며 '동정심'을 품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괴물'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노동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다.

 

  이전에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았지만, 현 정부가 들어서니 여당과 언론에서 '노조갈등'을 강성노조 탓으로 돌리고, 정당한 집회인데도 '불법시위대'로 몰아 강경하게 탄압하기 일이 비일비재한 까닭이다. 그러고는 '낡은 이념'을 꺼내들고 '전가의 보검'마냥 휘두르며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낙인 찍고, 그렇게 낙인 찍은 자신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찍이 서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병폐현상을 치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저런 강성노조와 저런 불법시위자 들 때문에 나라꼴이 엉망이라고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는 듯 하다. 정말, 어이도 유분수고, 적반하장이 없다.

 

  우리는 어쩌다 저런 '프랑켄슈타인' 같은 놈들을 엘리트로 떠받들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애꿎은 괴물, 선량한 괴물을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혐오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외모지상주의'라는 후진국형 병폐현상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듯 싶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방송에서 퇴출시키고 '소수자들의 커밍아웃'에 호들갑을 떨지 않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만 그럴 뿐, 우리 속마음까지 완전히 인식을 바꾸지는 못한 듯 싶다. 만약, 우리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췄다면 '교통약자의 시위'로 인해 출근길 교통불편을 당했다고 해도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권리가 '침해' 받은 것에 공감과 응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되려 교통불편을 초래한 서울시나 담당공사 책임자에게 그러한 민원처리를 어째 했는지 살펴보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관심을 표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기레기 언론에서 '출근길 불편'만을 담은 인터뷰를 인용해 '교통약자'를 벽안시하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가 이러한 '교통약자들의 정당한 권리주장'을 불법으로 치부하고 국민불편을 초래하는 교통약자단체의 주동자를 체포해 달게 처벌받게 했다며 정당한 공권력 행사를 자랑처럼 늘어놓고 있다.

 

  어디 '교통약자'뿐이었나? 노동자들의 정당한 시위도 '불법'으로 처벌했고, 농민들의 집회도 '무산'시켰으며, 핵오염수 방류 시점에는 어민들의 우려의 목소리와 수산시장과 수산물을 취급하는 식당 관계자들이 걱정어린 의견을 내놓는 것조차 '과학적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 날조라며 엄정한 법집행을 할 것이라 온국민을 상대로 엄포를 놓기 일쑤였다. 당연히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보에 야권의 실력행사와 반대의견을 가진 국민들의 여론이 들끌었지만 어째 '들은척'도 하지 않고, 흔히 말하는 '국민들은 개돼지'라는 듯 개무시전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이에 정부여당 지지자들은 이러한 '폭거'를 일삼는 시민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모두 싸잡아서 '괴물'을 보듯 날선 비난만 늘어놓고 말이다. 정작 누가 괴물인지 이제는 헷갈릴지경이다.

 

  소설에서는 '괴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끈질긴 추격이 펼쳐진다. 그리고 둘의 추격이 끝맺게 된 것도 극한 환경까지 쫓아간 프랑켄슈타인이 체력이 다해 죽고 난 뒤에 괴물이 나타나 프랑켄슈타인의 주검을 안고 북극의 빙하속으로 떠나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우리도 이런 결말만 남겨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백하다. 그 누구도 '괴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혐오스럽게 여기는 '괴물'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괴물'일지라도 없애버리거나 내쳐선 안 된다. 그럴 수도 없다. 실상은 '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괴물'이 아닌 그저 평범한 '우리'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괴물'이 아닌 선한 존재로 태어났는데, '괴물'로 적대시하느냔 말이다. 이전에 그런 아픔이 있었다면 앞으론 절대 그래선 안 된다.

 

  나와 '다른 모습'이라 나와 '다른 생각'이라 적대시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둬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얼마나 많은데 한순간에 스르르 녹아 없어지겠는가. 또한 그동안 당한 게 얼마나 많은데 쉽사리 '용서'하고 쉬이 '관용'이란 말이 나올 수 있겠느냔 말이다. 성인군자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내야만 한다. 극과 극의 대치상황조차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하나로 스스로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우리가 지난 100여 년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데 고작 '내부분란'으로 대한민국을 망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망하는 일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그 싸움의 이유가 오로지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첨예한 갈등속에 극한 대치를 했더라도 '대한민국'이란 이름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뭉칠 수 없는 이유로 싸우는 것들은 나라밖으로 내쳐도 좋다. '대한민국'이란 이름보다 다른 이름을 더 소중히 여긴다면 그쪽으로 내쳐도 좋다. 우리 대한민국이 보다 잘 되기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그렇지 않은 '껍데기'들은 까불어서 날려보내면 그뿐이다.

 

  끝으로 고전명작을 읽으며 줄거리만 외우려 들지 않길 바란다. 등장인물이 누구누구 나오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굳이 외우고 싶다면 등장인물이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고, 그걸 외우라. 그리고 그렇게 외운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고 '뜻'을 부여해보길 바란다. 그러면 등장인물이 하는 말이 또렷해지고, 행동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넘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그 느낌을, 자신만의 표현법으로 나타내는 것도 '좋은 독서법' 중에 하나다. 고전을 읽었는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쓸 내용이 없다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떠올리긴 했는데 차마 말로 담지 못하고, 쓰긴 썼는데 누가 읽으면 쪽 팔리다고? 설령 틀렸으면 좀 어떤가. 생각을 정리해서 쓰긴 썼는데 십분의 일도 제대로 담지 못해 안타깝다면 훌륭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기는 것'이다. 기껏 떠올린 아이디어를 말로 웅얼거리고 글로 쓰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고 머릿속에선 아무 기억도 나지 않게 될 것이다. 당장은 어줍잖다고 여긴 '기록'이 훗날 번뜩이는 대박 아이템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위인전에서 읽지 않았던가 말이다. 뉴턴의 사과처럼 말이다. 중구난방으로 써내려갔는데, 훗날 더 좋은 수업재료로 쓰기 위해 남긴 기록이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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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
헤르만 헤세 지음, 구기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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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시절에 꼭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한다면, 단연코 <데미안>을 꼽을 것이다.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표현으로 청소년들을 싸잡아 놓지만 우리네 청소년들은 그저 '폭풍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존재'만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나역시 청소년 시절을 겪었지만 '질풍노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오리무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던 것 같다. 뭔가 '해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 '이것저것 다 해볼 시간 따윈 없다'면서 그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만 매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나도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그 말'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만 뼈져리게 느낄 뿐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시절에 꼭 챙겨야 할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너무 많지만, 딱 세 가지만 말하겠다. 첫째는 '건강'이다. 10대에는 돌도 씹어먹을 정도로 무엇이든 왕성한 시절이기 때문에 '건강'을 소홀히 하기 십상이다. 이는 2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무엇을 하더라도 건강을 해쳐가는 줄도 모르고 미치기 일쑤이고, 정작 3, 40대가 되어서야 서서히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마련이고, 50대 이상이 되면 여기저기 몸이 망가져서 '하고 싶은 것'이 생겨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예전이야 나이 50살을 넘기면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죽을 날'만 손꼽고 살았지만, 이제는 '100세'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50살이 넘어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넘쳐날 나이다. 그런데 정작 건강은 10대부터 챙기지 않으면 50살을 넘기기 힘드니 미리미리 챙겨야만 한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여기저기 망가지고 난 다음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사이보그', '안드로이드'가 되어 영생을 누린다해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청소년 시기부터 건강을 챙기는 습관을 올바르게 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둘째는 '인성'이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며 형제끼리 돈독하고 친구에게 우애로운 것도 해당되는 것이 '인성'이지만, 청소년 시기에는 '제 앞가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배려(싸가지) 없음'을 경계하고,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추는 것을 통틀어 '인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말하는 '인성 쓰레기'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개쓰레기'밖에 될 것이 없다. 아무리 학벌 좋고, 돈 많아서, 사회지도자 자리에 떡하니 올라가도 '인성 개쓰레기'라면 우리 사회에서 절대로 얼굴 들고 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인성이 나빠도 '잘 생기고 예쁘면' 봐줬고, '학벌 좋고 돈 많으면' 깨갱했고, '금배지 달고 '사'짜 직업 갖고 있으면' 그저 굽신굽신 해줬을지 몰라도, 이젠 그딴거 다 필요없다. 인성이 더럽다고 '확인'되는 순간 모든 걸 박탈시켜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공부'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공부할 시간은 많다. 아니 공부는 평생해야 하는 것이기에 딱히 시기를 논할 꺼리가 없다. 그럼에도 청소년 시기에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까닭은 오직 청소년 때만 유일하게 '공부'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는 '공부'에만 전념할 시간이 없다. 하더라도 먹고 살아야 할 '돈벌이 수단'과 병행해야만 한다. 전문적인 용어로 '경제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20대 이후부터는 '집 걱정', '결혼 걱정', '육아 걱정', '노후 걱정' 등등의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하기 때문에 '뛰어난 학업 정진', '훌륭한 가치관 형성'과 같은 한가로운(?) 공부는 오직 '청소년기'에만 할 수 있는 특권인 탓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와 <데미안>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아시다시피 헤세는 불우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뒤에 '자살'을 극복하고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문학의 거장으로 발돋움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수많은 갈등과 고뇌, 그리고 가난한 환경이 주는 핍박속에서 모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아내 인류애를 성찰시킨 위대한 작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찰한 내용들은 헤세의 소설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이겨낸 깊은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데미안>은 작가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조국을 위해 싸울 것인지, 아니면 배신자로 낙인 찍힐 것인지 고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건 바로 '선과 악의 공존'이다.

 

  책속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우연히 '두 개의 세계'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그렇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선과 악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에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다 만난 '데미안'이란 인물은 선한 인물인 것 같으면서도 악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묘한 인물이었다. 그러면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선과 악의 개념마저 혼동해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 만난 베아트리체와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한층 더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지만 아직은 그뿐이었다. 그러다 첫사랑의 얼굴에서 다시금 데미안을 떠올린 싱클레어는 '이상한 꿈'과 함께 그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도착한 답장에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을 뿐이다. 세상은 알, 그 잡채이고, 그 경계를 허물고 나와야 새로운 세상과 조우할 수 있으며, 그 새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는 묘한 말과 함께 말이다. 여기서 '아브락사스'는 신의 이름인데, 이 신의 특징은 선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는 전투중에 포격을 받아 부상병으로 치료를 받는데 옆자리에 누워있는 데미안을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데미안은 이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린다. 싱클레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나 데미안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떠난 듯, 낯선 사람만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싱클레어는 그 뒤에도 아픈 일 투성이었지만 더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소설은 끝맺는다.

 

  흔히 <데미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구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에서 찾곤 한다. 더 넓은 세상을 맞이하려면 '경계'를 깨고 나와야만 하고, 그러려면 '기존의 세상'을 깨부수어야 한다며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매우 깊이 음미하곤 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세상'이란 무엇이고, '더 넓은 세상'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을 첨부한다면 '선과 악'을 구분하며 괴로워하던 싱클레어라는 껍질을 깨고 '선과 악'을 구분할 것도 없이 더 넓고 깊은 세상을 훨훨 나는 데미안을 맞이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데미안이 누구인가. 최초의 살인자 '카인'도 그저 살인을 일삼는 나쁜놈의 대명사가 아니라 하느님마저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능력자'라고 말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옆에 있던 도둑놈마저 예수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켜 자신의 죄값을 달게 치룬 멋쟁이라고 추켜세운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우리가 '악인'이라고 낙인을 찍은 사람조차 '어쩌면' 선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을 지닌 인물이 바로 '데미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데미안>을 해석하면 청소년 필독서라고 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만약 싱클레어에게 앞서 말한 '세 가지'를 이미 갖춰진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곰곰히 따져보길 바란다. 싱클레어가 '건강'을 챙기다 못해 뛰어난 운동실력을 갖춘 능력자였다면, 감히 '프란츠' 따위가 어린 싱클레어에게 삥을 뜯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싱클레어가 '두 개의 세계'를 깨달음과 동시에 '올바른 인성'까지 깨우쳤더라면 프란츠 떼거리의 어설픈 협박에도 전전긍긍하지 않았을 것이고, 데미안의 알쏭달쏭한 견해에도 따박따박 반박을 하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공부'까지 짱 먹었다면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꼬시기도 전에 넘어왔을 것이고, 범생이 피스토리우스의 궤변 따위에 고민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참가한 전장에서도 하는 일마다 명쾌했을 것이다. 애당초 전쟁은 완벽한 폭력일 따름이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자신이 참전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면 '전우'를 위해서 내 한몸 희생할 각오로 싸울 것이고,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할 뿐, '빼앗기 위한' 전쟁에는 결사반대를 할 것이고, '조국을 위해' 무모한 희생을 강요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무뇌충'들에게 저항의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조국을 위한다며 하나 뿐인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라고 말하려면, 그 '조국'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자'를 위해서 뭐라도 했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위대한 조국이라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을 것이며, 일어났더라도 애꿎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약자'를 총알받이로 내세우기에 앞서 '힘센 강자'를 내세워 적들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게 든든히 막아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약자'들도 뭐라도 내놓을 것이 없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렇기에 <데미안>은 청소년 필독서여야 한다. 제 앞가림을 하기 위해 '건강, 인성,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모두가 사는 '공동체 사회'에서 우월한 일원이 되어 밝고 멋진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헌신하는 위인으로 거듭날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돈돈돈'밖에 모른다. 돈만 벌면 장땡인 듯 스스로 '개쓰레기'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지치고 힘들 때에는 '사회비판'이랍시고, 우리 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비난을 나불댄다. 그런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우리 사회에 '인성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당신도 한몫 단단히 하지 않았으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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